걸그룹 팬픽 - 우주소녀 설아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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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제 : 청  실  홍  실 

 


 “ 어떻게 친구들과 피서오신거에요 ? ” 

 광일을 태워다 주겠다고 한 30대 부부의 물음이다. 괜시리 대진교가 어쩌구 청운회 수련회가 어쩌구 이런 복잡한 설명은 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라 판단했는지 광일이 이렇게 얼버무린다. 

 “ 네, 실은 친구들과 방학맞아서 거제로 피서겸 여행을 온건데...갑자기 집에 급한 

  일이 생겼다고 연락이 와서 돌아가게 되었어요. ” 

 “ 그러시구나. 거제는 그럼 처음 와보시는거에요 ? ” 

 “ 네, 그래서 길도 잘 모르고 해서...올때야 친구들이랑 같이 온거지만... ” 

 “ 그러셨구나. 말씀드렸다시피 그럼 저희가 서울까지 태워다 드리죠. 서울 어디쯤 내 

  려다 드리면 되나요 ? ” 

 광일의 설명과 처지가 그런대로 납득이 갔는지 30대 부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광일은 대충 반포 고속버스 터미널 근처에만 내려주면 그 인근에서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 알아서 집으로 들어가겠다고 답했고 역시 30대 부부는 그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좀 까다로운면이 있거나 하면 어쩌나 걱정을 좀 한듯한데 일단 그래보이진 않는 것 같아 다행스러운 분위기였다. 

 초등학생 딸 둘이 있는 30대 부부. 그리고 그네들끼리의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여자쪽 어머니의 고향이 바로 거제인 듯 했고 그래서 그들 역시 피서철을 맞아 아이들을 데리고 여자 입장에선 모처럼 친정어머니도 뵐겸 이 먼 거제까지 내려왔다가 이쯤에서 돌아가는길인 듯 했다. 여하튼 광일로선 이래저래 복잡한 상황속에서 웬만하면 잡기 힘든 행운을 잡은 셈이다. 낮에 떠나면 길이 막힐까봐 일부러 아침일찍 출발하게된 이들인데, 그래서인지 고속도로는 대체로 거의 막히지 않고 무난하게 잘 달릴수가 있었다. 따라서 서울 톨게이트에는 점심때가 된 무렵에 어느덧 들어서고 있었다. 

 “ 고맙습니다. 조심해 들어가세요 선생님들도. 얘들아 너희들도 잘 가렴. ” 

 말한대로 반포 터미널 근처에서 이들이 광일을 내려주었고 광일이 30대 부부는 물론 아이들에게까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넨뒤 발걸음을 옮겼다. 30대 부부는 집이 강북쪽에 있다고 그랬고 그래서인지 차는 어느덧 잠수교쪽 가는길로 방향을 틀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오후 늦게는 서울에 도착하게 될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점심때 도착하게 된 광일. 그래서인지 이대로 그냥 들어가긴 뭔가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 인근 식당에 둘러 소주를 한두병 마시기까지 했다. 그러고보면 간밤에 과음을 좀 한 셈이기도 한 광일인데 그 다음날 낮에도 또 이러고 있는 것이다. 그런식으로 술 실력이 늘어나는 셈이기도 한데, 재수하면서 눈치때문에라도 그렇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때문에라도 술자리를 가질 기회가 거의 없었던 광일은 이렇게 뒤늦게나마 술이 늘어가는 중이다. 

 “ 아그야...너 대체 어찌된것이냐 ? ” 

 그렇게 반포 인근 식당에서 거나하게 술에 취한뒤 오후 늦게야 버스를 타고 집에 들어간 광일. 그러고보면 집을 나간지는 이틀만에 돌아오게 된 셈 아닌가. 원래 수련대회 준비위원들의 일정대로라면 수련회 준비기간 일주일, 수련회 기간 3박4일 게다가 이후 뒷정리 시간까지 포함하면 대략 두주 가까이는 거제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것인데 훨씬 빨리 돌아오게 된 광일. 허나 집안 식구들 입장에선 이틀전 새벽에 말도없이 집을 나간 광일이 이렇게 돌아오게 된 상황이라 무척이나 놀라우면서도 다행이라는 듯 특히 엄마 가인이 광일을 끌어안았다. 

 “ 아그야...대체 어딜 갔던것이여 ? 뭣땀시 그리 집을 나간것이여 ? 서럽고 힘든일 

  이 있거든 차라리 이 어미한테 털어놓던가 하지...대체 뭣땀시 그리 집을 나간 것이 

  여 ? ” 

 애초 광일이 집을 나간 것으로 생각 집안이 발칵 뒤집혔을때도 그 책임이 ‘누나라고 하나 있는게 동생하나 살뜰히 챙겨주지도 못했으니 얼마나 애가 집에 마음을 못붙이고 정을 못 느꼈으면 이런짓을 벌였겠냐 ?’며 그 누이 광희를 책망했던 가인이 아니던가. 그 연장선상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광일. 광희도 일단 동생이 대략 이틀만에 집으로 돌아온것에 다행이란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제 엄마의 이런 모습엔 그저 씁쓸하고 착잡한 감정에 사로잡힐 따름이다. 가인은 여전히 광일을 끌어안은채 울며불며 이만저만 말도 아니다. 그 큰 덩치가 아들을 꼭 끌어안고 있으니 어느덧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를 하는 성인인 광일이건만 가인의 품안에선 컥컥 숨까지 막힐 지경이다. 가인의 한바탕 흐느끼는 청승은 계속 이어진다. 

 “ 아그야...다음부턴 이러지 말어라. 이 어린 것이...대체 무슨 억화심정이 그리 있어 

  이 에미한테도 말을 안 허고 그런일을 벌인것이여. 이제 이 어미 옆 떠나지 말그라 

  . 어떤일이 있더라도 집에 꼭 붙어 있어야해. 알긋제 아가 ? ” 

 가인의 아들 광일을 생각하는 정이 그리도 남달랐던건지. 설마 이대로 대학도 가지말고 취직도 하지말고 장가도 가지 않은채 가인옆에 꼭 붙어만 있으란 그런뜻으로 하는말은 아니겠지만 가인은 광일을 그렇게 끌어안은채 한참을 하염없이 울고 남편 경환이 그런 아내를 좀 진정시키며 만류하자 그제서야 가인은 광일을 떼어놓았다. 

 “ 이리와서 이것좀 먹어라...객지에서 굶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겄어 ? 어여 와서 이 

  것좀 먹어. ” 

 정말 흔한 가출청소년처럼 무작정 집을 나가선 하루,이틀을 돈 한푼없이 헤매다 집으로 돌아온것이라 생각하는지. 실제 광일은 그렇게 30대 부부가 거제에서 서울까지 태워다준뒤 반포 터미널 근처에 내려주자 이대로 집으로 들어가긴 좀 아쉬운지 인근 식당에서 술도 거나하게 마셔댔는데, 그때부터 시간이 좀 많이 지난 상황이라 하더라도 술냄새가 그리 쉬이 가시진 않았을텐데 그 조차도 느끼지 못하는것인지 어느덧 저녁을 푸짐하게 한상 차리고 광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 어여와서 이것좀 먹어. 시상에...얼마나 배가 고팠겄어 그 어린 것이... ” 

 이쯤되면 되려 광일이 미안해질 지경이다. 사실 준비위원들과 함께 내려간 거제의 민박집에서 부엌은 자신들이 쓸수 없다고 해 자신들이 조를 짜서 돌아가며 식사를 준비하긴 했지만 그래도 특히 여성 준비위원들이 제법 정성스레 식사를 준비를 해 한 이틀동안 식사는 적어도 원없이 잘 하고 왔다. 특히 부산회관 청운회 부회장이 끓이는 참치찌개는 일품이었다. 참치캔이 시중에 출시된 것이 대략 80년대 중반부터의 일이지만 광일이 그것으로 찌개를 끓이는 것은 아직 보거나 경험한적이 없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산회관 청운회 부회장(여성)이 끓여준 그 참치 김치찌개는 솔직히 평생 세월이 지나도 잊기 힘들 정도로 맛이 일품이었던 것이다. 

 “ 어여와서 이것좀 먹어보래도. 얼마나 배가 고팠겄어 이 어린 아그가... ” 

 게다가 광일은 지금 술이 제대로 깬 상태도 아니라 속도 더부룩해 지금 뭘 제대로 먹을수 있는 상태도 아니다. 그래서 거듭 식사를 권하는 엄마 가인이 되려 불편할 지경. 사실 진도에서 전통된장 담그는 할머니의 늦둥이 외동딸 아니랄까봐 가인도 평상 할줄 아는 요리는 된장찌개밖에 없었는데 여하튼 이틀간의 가출소동 끝에 돌아온 아들에게 차려주는 상도 된장찌개 외에 시금치와 김치,콩나물 반찬 외엔 딱히 별다를 것도 없었다. 재촉하면서 어디서 쫄쫄 굶다시피(?)하다 들어왔을 아들이 거듭 애틋하고 안타까와 보여 먹을 것을 권하는 가인을 차마 뿌리칠수도 없어 억지로 밥 한그릇을 겨우겨우 다 비우긴 했지만 술 덜깬 속에 억지로 먹은 음식이다보니 되려 한밤중에 다 토해버리고 말았다. 그 와중에 되려 거제도에서 부산회관 청운회 부회장이 끓여준 참치찌개가 생각났다면, 가인이 이것을 안다면 진짜 뒷목잡고 쓰러지고도 남을일이 될 것이다. 

 


 한편 광일은 재수를 한 끝에 이듬해에 서울에서 그리 유명하지 않은 4년제 대학 사학과에 진학하게 되었다. 사학과를 선택한 것은 원래 중,고등학교때부터 따지고보면 그 이전 초등학교때부터 이공계보다는 인문계열 과목을 더 좋아했기에 그런 선택을 한것이기도 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역사 과목을 좋아했었다. 그래서 진학하게된 4년제 대학의 사학과. 그렇게 대학생활이 시작되었다. 

 한편 대진교와의 인연은 그 거제도 여름 수련회 준비위원때 일 이후로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되었다. 그렇게 준비위원으로 내려간 이틀째 밤 술자리에서 그 한바탕 소동을 겪고 다음날 ‘내가 대체 이런곳에 왜 있나’ 하는 회의감이 들어 서울로 돌아온 광일. 원래 거제도 수련회 준비위원으로 각 회관 청운회별로 2-3명이 할당되었고 원래 광일도 그 할당된 서울회관 몫 3명중 하나였던것인데, 원래는 송화가 가기로 되어있었는데 그 송화가 사정이 생겨 못가게 되는 바람에 대신 참여하게 된 준비위원인것인데 무책임하게 심지어 다른 준비위원들에겐 알리지도 않고 혼자 훌쩍 아침일찍 떠나버린 광일의 처신을 아무래도 무책임하다고 봤는지 이후 대체로 대진교 청운회측에서 광일을 곱게보지 않아 이후 특별히 연락을 취해오는 일이 없었다. 송화도 이때는 이미 고등학교는 졸업한지 오래고 다른 대학을 다니고 있을때라서 굳이 광일에게 더 이상 연락을 취해오거나 귀찮게 하는일이 거의 없었다. 

 한편 4년제 대학 사학과에 진학하게 된 광일은 물론 학과공부도 소홀히 한 것은 아니지만 그때부터 연극부 동아리에 가입 이쪽에 관심을 좀더 쏟게 되었다. 원래 연극쪽에 관심이 있거나 남모르는 재능이라도 있었던것인지 연극부 활동에 관심을 더 기울이게 된 최광일. 그리고 일단 대학교 1학년 첫해는 그런대로 큰 탈 없이 무난하게 지나갔다. 

 그러다 2학년이 된 어느날. 실은 이 무렵 광일에게 마음에 드는 여학생이 생겼다. ‘사귀었다’고까지 말할수 있는 정도는 아니고 그야말로 관심을 좀 갖게되는 수준인 정도. 이은비라고 하는 1학년 신입생이 이때 연극부 동아리에 들어왔는데 그 신입부원에게 광일이 관심을 갖게된 것이다. 아무리 연극을 좋아하거나 관심이 많아서 참여하게 된 동아리 활동이라도 아무래도 1학년 신입때야 직접 공연에 참여하게 되기보단 스텝이나 잔심부름 같은 것을 도울일이 많을터. 헌데 그러던 하루는 은비가 선배들 심부름을 좀 소홀히 하게 되었는지 3학년 선배로부터 크게 야단을 맞는일이 있었다. 

 “ 아니 도대체...장난도 아니고 일을 이따위로 처리하면 어떻게 해 !!! 준비해오라는 

  소품은 또 왜 안 사갖고 온거야 ? ” 

 “ 죄...죄송해요 선배님. 실은 제가 어느 가게에서 사야할지를 잘 몰라서... ” 

 “ 아니 도대체 무슨 어린아이도 아니고...OO 철물점에 가면 다 있다고 말 했어 안 

  했어 ? 도대체 내 말귀를 뭘로 알아들은거야. ” 

 “ 죄...죄송해요 선배님. 흑흑흑흑~~~!!! ” 

 하필 평상시 성격도 좀 까칠하고 후배들을 무섭게 대하기로 소문난 그런 3학년 선배에게 혼나고 있는 이은비. 게다가 군대까지 다녀온 복학생이라 나이도 좀 많았다. 그런 선배에게 1학년 신입생 후배가 혼나는 모습을 보니 순간 광일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평상시 ‘무서운 선배’로 알고 있기는 광일도 마찬가지라서 그 자리에 끼어들거나 선배를 말릴 엄두는 내지 못하고 그저 그 자리만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는데, 심지어 자신쪽을 바라보는 광일이 신경이 쓰였는지 흘깃 3학년 선배가 그쪽을 바라보자 광일도 겁이 났는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긴 했다. 헌데 선배에게 혼나고 난 은비가 흐느끼며 연극부 동아리방을 뛰쳐나오고 있었다. 그리고는 사람없는 계단 복도로 가서는 한바탕 서럽게 우는 은비. 일단 쫒아가 보았다. 

 “ 저...저기... ??? ” 

 인기척도 나고 부르는 소리에 은비가 이쪽을 바라보긴 했지만 이때 은비에게 광일이 면식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아직 은비에겐 광일도 그 많은 선배중 한사람 정도 그 이상 별다른 인연이 없었기에 되려 광일의 다가옴을 귀찮고 성가시게 바라보는 정도였다. 오히려 이 선배도 자신에게 한마디 하려는것인가 싶어 이젠 짜증까지 밀려올 지경인데 어떻게 말을 붙여야하나 고민하던 광일이 한참만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그게 아니라...좀 안타까와 보여서...좀 괜찮아요 ? ” 

 “ 괜찮아요. ” 

 일단 광일의 태도가 자신보고 뭐라고 나무라려는 것은 아닌 것 같고 위로해 주려는 것 같다는 생각은 들어서였는지 짤막하게 은비가 이렇게 대꾸했다. 허나 그 짧은 한마디로 자리를 마무리 하긴 좀 그랬는지 광일이 좀 대담하게 나왔다. 

 “ 뭐...마실것이라도 갖다드려요 ? ” 

 허나 무슨 손수건이라도 건네주는것도 아니고 좀 뜬금없다면 뜬금없어 보이는 광일의 말이라서 은비가 좀 황당하다는 듯 광일을 바라보았다. 광일이 민망해 하면서도 일단 해명삼아 덧붙였다. 

 “ 그게 아니라 좀 힘들어 보이는 것 같아서...날도 더운데 참... ” 

 “ 괜찮으니 신경쓰지 않으셔도 돼요. ” 

 그리고는 광일의 이런식으로 보이는 관심이 더 성가신지 빠른 걸음으로 더더욱 자리를 피해가는 은비. 광일이 아쉬운 듯 그 뒷모습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일단 그 자리는 마치 허무개그마냥 간단하게 끝나버렸지만 오히려 은비와 좀 더 가까워질 계기는 얼마후 따로 있었다. 

 실은 우연치고는 묘하게 광일과 은비가 같은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게 된다는 것을 얼마후 알게된 것이다. 사실 이때 광일의 집안은 그전까지 살던 강남구 압구정동 집을 팔고 강동구 명일동에 세워진 새로운 아파트단지에 새 보금자리를 틀었다. 사실 강남에 있는 집을 팔고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간다는게 집안이 망하기라도 하지 않는한 웬만하면 그때나 지금이나 잘 없을텐데 광일의 아버지 최경환이 왜 하필 이때 이런 선택을 했는지는 상식적으로 좀 납득 안가는 결정이긴 하다. 다만 막연히 추정해 보건데 경환이 이 무렵부터 ‘재테크’ 같은데 슬슬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 같긴 하다. (* 다만 그 재테크가 결과적으로 성공한 작전이었는지는 각자의 상상과 판단에 맡기도록 하겠다. -.-;;;;) 

 여하튼 압구정동 집을 팔고 명일동으로 이사온게 92년 가을의 일로 광일이 재수를 할때고 광일이 거제도 수련대회 준비위원으로 참석했다 돌아온 7월 하순경으로 부턴 약 한달여후의 일이다. 허나 광일이 어느덧 대학 2학년이니 그래도 강동에 이사와서 산지도 1년 반 이상이 지났는데, 그리고 어느덧 대학 2학년이 되고 은비란 신입생이 연극반 동아리로 들어온지도 한두달 정도가 지난 셈인데 왜 그때까지 광일이 은비와 자신과 같은 방향의 버스를 타게 된다는 것을 몰랐었는지는 좀 이해 안가는 일이긴 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연극반 동아리에 새로 들어온 신입생중 한명 그 이상의 관심이 없었기에 눈에 뜨이지 않았을수도 있는것이지만, 여하튼 은비가 자신과 같은 방향 버스를 타게 된다는 것을 안 것은 이때의 일이다. 

 “ 어, 그러고보니 ? ” 

 은비와 공교롭게도 똑같은 버스를 타게 된 것을 알고 그런식으로 말을 건네본 광일. 다만 학생들 하교시간과 직장인 퇴근시간이 겹치는 시간이라 그 시간의 혼잡한 버스내에서 은비와 말을 붙이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고보면 광일이든 은비든 모두 서울 강동지역에 살고 다니는 대학이 서북쪽에 위치해 있어 거리상으로는 사실상 극과극인데 – 오히려 도봉이나 성북쪽을 가는게 강동에선 더 수월했을 것이다. - 그 긴 시간을 천상 같은 버스를 타야하는 두 사람. (* 94년이니 아직 2기 지하철(5-8호선)은 본격적으로 놓이기 전) 그렇게 자연스레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 OO동에 사시면 제가 사는곳하고도 같은곳인데... ” 

 “ 맞아요. 그쪽에 사는 제 친구들도 많아요. ” 

 그러고보면 은비도 확실히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그 동네에서 산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다만 은비가 중,고등학교 시절이라면 광일은 아직 압구정동에 살때로 강동으로 이사를 오기 전이었을터. 이래저래 궁금함에 다시 광일이 질문을 건넸다. 

 “ 그럼 혹시 명일여고에 다니셨나요 ? ” 

 광일이 사는 아파트 단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곳에 바로 그 유명한 ‘명일여고’가위치해 있었다. 강동으로 이사온지는 이제 겨우 1년반정도 시간이 지났지만 대충 분위기를 봐도 확실히 이 일대 여학생들의 상당수는 명일동 한복판에 위치한 그 여학교를 다니는 듯 했다. 다만 은비의 답은 좀 뜻밖이었다. 

 “ 아뇨 전 명일여고는 아니고 OO여고을 나왔어요. ”  

 


 OO여고라면 광일도 모르진 않았는데 광일이 사는 명일동이나 은비가 사는 고덕동에선 조금 떨어진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고보면 이들이 다니는 대학에서 명일동 인근까지 오는 버스노선 중간에도 OO여고 앞을 지나긴 했는데 그러고보면 은비는 그 앞을 버스가 지나갈때면 괜시리 잠시 학창시절 추억에라도 잠기는지 묘한 미소를 지어보이기도 했다. 사실 OO여고는 실업계는 아니고 인문계 고등학교는 분명했으나 ‘명일여고’에 비해 상대적으로 질 떨어지는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라는 그 정도 평판을 듣는 그런 학교이긴 했다. 다만 은비는 그런 학교 출신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대체로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의 그런 여대생이었다. 

 그런일이 있은 후에도 어차피 집에 가는 방향이 같으니 학교 가는길에도 오는길에도 함께 버스를 이용하는 일이 이따금 있긴 했는데 다만 은비는 광일이 그녀에게 다소 관심을 보이는 것이 좀 불편했는지 광일이 건네오는 말이나 질문에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 심지어 어떨땐 고의적으로 광일이 보이거든 일부러 피해가거나 버스에서 내리는 경우까지 있었는데 그때까지도 일단 광일은 은비가 원래 말수가 적은 성격이거나 – 어차피 그건 광일도 마찬가지니까 – 아니면 다른 급한 볼일이 있나보다 하고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헌데 그로부터 얼마쯤 지난 어느날 광일이 좀 뜻밖의 일을 겪었다. 과 동기생 한명이 광일에게 다가왔는데 광일과 평상시 그리 가까이 지낸다고는 볼 수 없는 학생이었다. 그래서 좀 의아하긴 했는데 일단 처음엔 무슨 자신한테 특별한 용무가 있나보다 싶어 대수롭지 않게 여긴 광일. 녀석이 말을 건네왔다. 

 “ 형, 연극동아리에 이은비 알죠 ? ” 

 동기생이긴 했지만 광일이 재수생출신이라 한 살 많아서인지 말을 놓기는 좀 난감한지 굳이 ‘형’이라 부르는 녀석. 일단 연극동아리 이은비를 모르는 것은 아니니까 ‘그렇다’고 평범하게 대꾸한 광일. 녀석의 말이 이어졌다. 

 “ 형, 혹시 이은비 좋아해요 ? ” 

 순간 당혹스럽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의아해지기도 한 광일. 속마음이들킨 기분이라 난감하긴 했지만 헌데 그런걸 이 녀석이 왜 물어온단 말인가. 평상시 친하지도 않은 과 동기가 일부러 자신을 지켜보지 않는한 그런걸 알수는 없을터인데 일단 그 녀석 말이 이어진다. 

 “ 형, 이거 그냥 제가 형이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데...은비 걔랑 가까이 지내지 말아 

  요. ” 

 “ 뭐라구 ? ” 

 이녀석이 근데 보자보자하니까. 지가 뭔데 자신더러 누굴 가까이 지내라 마라 이런 소리를 하는가. 순간 살짝 화가 나기까지 했는데 녀석은 좀 난감한 표정을 짓는 듯 하더니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 

 “ 은비가 그러는데...걘 나이많은 남자는 싫다 하더라구요. ” 

 순간 황당하고 어이없어진 광일. 사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은비는 실은 2월생으로 남들보다 1년 빠르게 학교에 들어간 그런 경우였다. 게다가 광일은 재수를 한 몸이니 그러고보면 두 사람은 학년만 한학년 차이일뿐 사실상 세 살차이가 아닌가. 헌데 세 살차이가 나이가 많다 ? 도대체 요즘애들(?)기준에 커플의 나이차 많고 적음이 어느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부모님 세대의 경우를 따지고보면 아무래도 남자는 군대도 다녀오고 직장도 취직해야하고 그렇게 자리잡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있으니 보통 남자가 7-8살 정도 많은게 보편적이었다. 게다가 요즘의 가령 연예인이나 유명인사로 젊은 사람중 결혼 적령기에 이른 경우도 한 대여섯살 차이 나는 커플도 적지 않은데 겨우 ‘세살차이’갖고 많다고 하다니. 물론 아직 이제 겨우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대학 1학년생이고 게다가 원래 학교까지 1년 빨리 들어갔다니 따지고보면 아직 만 18세 소녀인 이은비. 그런 그녀의 눈에 재수까지 했다는 세 살 많은 2학년 선배가 좀 나이많아 보이는게 이해해 보자면 이해할수 있는 일이긴 하다. 솔직히 광일도 고등학생 시절까지는 대학생 그러면 실제 나이차이와는 별개로 그냥 ‘나이많은 형’ 같은 느낌이었고 그 이전인 중학생때까진 함부로 말도 붙이기 어려운 그냥 ‘어른’이었다. 그러니 세 살차이 나는 2학년 선배 광일을 ‘나이많다’는 이유로 꺼린다는 것. 이해해보자면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긴 하다. 

 다만 좀 이해할수 없는 것은 그런 이야기를 하려거든 차라리 자신에게 직접 하던가 하지 오히려 자신 앞에서는 의도적으로 피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되려 그런 자신과 별로 친하지 않은 과 동기생을 통해 그런말이 전해지도록 했다는 말인가. 은비 입장에선 딴에는 광일이 상처받게 하지 않기위한 나름의 배려였을지 몰라도 사실 이런식의 전달이 당사자에게 더 자존심 상하고 화나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쯤되면 되려 광일 입장에서 혹시 이은비와 이 녀석이 어떤 관계인 것 아닌가 그런 의심이 들만도 한데, 일단 이 녀석은 그냥 사학과 학생이고 연극동아리쪽에 관심이 있거나 딱히 친한 인맥은 아닌 그런 녀석이었다. 다만 그래서 오히려 굳이 그런식으로 말을 전하게 한 은비의 태도가 광일은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허나 은비가 자신의 입장을 그런식으로 전해주었다 하더라도 이성에 대한 감정이란 것 자체가 어느날 하루아침에 딱 끊기는 쉽기 힘든법 – 심지어 헤어진지 수년 때론 수십년이 지나도 잊혀지기 쉽지 않은 그런 것이 ‘첫사랑의 상처’라 하지 않던가.- 그래서 광일은 한동안은 은비를 쉽게 포기하거나 미련을 버리지도 못한채 그렇다고 자신이 ‘나이많아서 싫다’고 하는 은비에게 다시 적극적으로 어떤 시도를 해보이기도 난감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애매한 시간만 무의미하게 한동안 흘려보내는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그러고보면 2학년 1학기도 다 끝나고 어느덧 여름방학이 다가오고 있을때인데 실은 여름방학때 광일의 연극동아리가 ‘정기공연’이 예정되어 있어 그 준비 때문에 한참 바쁜때이기도 했다. 광일도 해당 연극에서 조연급 정도의 역할은 맡아서 한참 바쁘게 그 연극연습에 열중일 때이기도 했는데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연극연습을 해야하는 날이라 그날도 동아리방에 먼저 도착 다른 부원들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는 중인데 마침 그때 은비도 와 있었다. 헌데 하필 광일 혼자만 있어서 난감해서인지 동아리 방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있어서 광일이 들어오라며 손짓읗 하려 들었다. 그때. 

 “ 너 이 X !!! 니가 그 이은빈가 뭔가 하는 X이냐 ? 이 천하의 화냥X같으니 !!! ” 

 대충 봐도 나이 30-40대 되는 아줌마 여러명이 여기까지 달려와 은비의 머리채를 잡았다. 그러고보면 대학생 같아보이지도 않는 이런 나이많은 아줌마들이 어떻게 이런 캠퍼스내 깊숙한 곳까지 알고 쳐들어 온단 말인가. 그게 더 이해할수 없는 상황이긴 한데 일단 아줌마들은 은비를 끌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고 은비는 끌려가지 않으려 발악을 하고 있어 대충 그런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광일이 황당해서 일단 아줌마들을 만류하러 들었다. 

 “ 이...이봐요 아주머니들...여기 저희 방인데...대체 여기서 왜 그러시는거에요 ? ” 

 “ 뭐야 ? 네 X은 ? ” 

 아줌마들은 은비뿐만 아니라 광일에게도 뭐라고 할것만 같은 기세로 묻고 있었고 그래서 당황한 광일은 무슨 대답을 어찌해야할지 더 난감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냥 썰렁하게 ‘동아리 선배’라고 말하기도 좀 난감한 분위기의 느낌이고, 그렇다고 ‘이 여학생 짝사랑하는 남자인데요’ 뭔가 그렇게 답하기도 난감한 그런 상황. 아주머니들은 ‘남의일 참견말고 가보라’고 하고는 이미 다시 우악스럽게 은비를 나꿔채 어디론가 끌고가고 있었고 ‘참견말고 가라’는 아주머니들의 경고가 있었지만 아무리 봐도 그냥 물러갈수 없는 상황이라 결국 그네들을 뒤따라가보았다. 여자들은 동아리 방이 있는 캠퍼스 건물 바깥까지 은비를 끌고가서는 그 인근 어떤 으슥한곳에서 한참을 그녀를 두들겨패고 꼬집고 할퀴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 네 이 X !!! 사지육신 멀쩡한 새파란 기집애가...어디 할짓이 없어 애딸린 유부남 

  을 꼬셔. 그것도 낼모래 나이가 40이 다 된 남자를...천하의 화냥년 같으니...한번 

  만 더 이런일이 있었다간 우리가 네 X을 아주 요절을 내버릴테니 그렇게 알아 !!! 

 ” 

 여인들은 은비에게 경고라도 하듯 그렇게 엄포를 놓고 사라져버렸고 은비는 뭔가 서럽고 억울한 무엇이라도 있는지 그 자리에 주저앉은채 한참을 서럽게 대성통곡을 했다. 광일이 뒤쫒아온게 대략 그때쯤인데, 캠퍼스 건물 옆 구석진곳에 쓰러져 한참을 서럽게 우는 은비를 보며 일단 안타깝고 궁금해서 다가와 말을 건네보았다. 

 “ 이...이봐요 이은비 후배님. ” 

 광일이 여기까지 따라왔다는 것을 알고 은비는 되려 수치심이라도 인 것일까. 그를외면한채 어느덧 흙을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래저래 걱정이 되어 광일은 묻지 않을수가 없었다. 

 “ 아니 저...후배님...도대체 무슨일이 있었던건데요 ? ” 

 확실히 은비는 광일에게 그렇게 우연히 집에가는 방향이 같아 몇 번을 함께 버스를 타고 오간것뿐 그리 친하다고 볼 수 있는 사이도 아니고 게다가 일전에 이미 ‘은비는 나이많은 남자 싫어한다더라’고 주의를 준 과 동기생도 있어 미련은 있을지언정 더더욱 조심스레 대해온게 이은비 후배였다. 그래서 더더욱 정중히 말을 건네보려 했는데은비는 그런 광일을 외면한채 이렇게 대꾸했다. 

 “ 별일 아니니 신경쓰시지 않으셔도 돼요. ” 

 이 난리가 벌어졌고 이 지경이 되었는데 별일이 아니라니. 이쯤되면 자신이 무시당하는 느낌이라 광일이 되려 화가날 지경이다. 헌데 어느덧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난은비는 무표정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더욱 궁금하고 걱정되어 다가가 다시 말을 건네보려던 광일에게 은비는 더 이상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학교를 빠져나와 또다른 어느 구석진 장소에서 또다시 한참을 서럽게 울고있는 은비의 모습이 광일이 동아리 연습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려 할 때 또다시 눈에 뜨이고 말았다.  

 


 그런일이 있은 얼마후 은비가 학교를 그만두었다. 학교를 그만두었으니 당연히 동아리 모임에도 더 나올일이 없고, 학사일정상 곧 여름방학이긴 하지만 연극반은 방학중 정기공연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동아리 모임은 계속 갖고있는 상황이었다. 허나은비는 이제 더 이상 동아리 모임에도 나오지 않았고 은비가 휴학도 아닌 아예 자퇴서를 제출했다는 사실을 광일뿐만 아니라 다른 연극부원들도 그나마 은비와 좀 절친한 편인 한 1학년 동기생으로부터 전해듣게 되었다. 

 “ 은비가 실은 열일곱살 많은 유부남과 사귀는 중이었어요. 듣기로는 방송국 피디 

  출신이라고 헀는데 아마 슬하에 초등학교 5학년부터 유치원 다니기전 어린아이까 

  지 아들이 셋 있는 모양이라 하더라구요. ” 

 은비가 자퇴를 했다는 사실을 알려준 1학년 동기생이 광일에겐 보다 구체적인 내막까지 그렇게 일러주었다. 광일이 은비를 남몰래 짝사랑하는지까진 눈치 못챘을수도 있어도 우연히 집이 같은 방향이라 종종 함께 버스를 타고 학교를 오가는 모습을 몇 번 목격했음인지 아무래도 광일이 은비문제에 대해 신경을 쓰고 있고 궁금해하고 있을 것 같아 그런 배려를 해준 모양이다. 헌데 막상 그렇게 은비의 연극반 동기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더더욱 광일을 충격받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은비는 바로 광일의 2학년 과 동기를 통해서 ‘광일은 나이가 많아서 부담스러우니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으면 한다’는 그런 의사를 전해주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헌데 불과 한학년 차이인 재수생 출신 세 살많은 선배를 ‘나이가 많아 부담스럽다’고 한 여자가 정작 자신은 무려 열일곱살이나 많고 아이도 셋이나 있는 그런 이혼남도 아닌 유부남을 사귀고 있었다니. 아무리 여자마음은 알다가도 모른다지만 어떻게 이런일이 있을수 있는가 싶어 은비라는 여자한테 제대로 우롱당한 기분이라 광일은 그것이 견디기 힘들었다. 

 일단 대충 정황상 그날 그렇게 은비를 찾아 대학 동아리방까지 달려온 의문의 중년여인 일행은 은비보다 열일곱살 많다는 그 남자의 본처 혹은 그쪽 관계자들인 듯 한데, 뭐 그거야 자기 남편을 꼬신 어린여자에 대한 충분한 응징일수 있다 치더라도, 나이차이도 나이차이지만 도대체 언제부터 그런 남자를 사귀었으면 그것도 학교도 1년 일찍 들어온 18세 여대생이 그때 이미 그런 관계가 될수 있단말인가. 도대체 무슨 인연이 어찌 이어졌는지 그 구체적인 곡절은 알수 없어도 일단 최소한 고등학생 시절부터 그런 관계였다 가정하지 않는다면 있기 힘든 그런일이 아닌가. 

 헌데 그런 여자가 정작 세 살많은 1년선배인 자신은 나이많아 부담스럽다며 그것을 당사자가 직접 말하는것도 아니고 별로 친하지 않은 과 동기를 통해 그런말을 듣게 만들다니. 차라리 솔직하게 자신은 따로 만나는 남자가 있다던가 광일같은 스타일은 자신에게 별로라고 말하던가 하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진짜 이상한 여자에게 제대로 우롱당한 기분이라 광일은 한동안 미칠것만 같았다. 무슨 실연을 당한것도 아니고 그나마 짝사랑을 했다고 보기도 어려운 그저 잠시나마 좀 마음에 들어했던 여자한테 제대로 우롱당하고 데인셈이 아닌가. 

 한동안 그로인한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허덕이고 있다가 어느덧 2학년도 다 끝나가는 연말쯤 애초에 광일에게 그런 구체적인 은비의 사정을 전해준 연극부 학생이 이번엔 이런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 은비...곧 그 남자랑 일본으로 떠난다 하더라구요. O월 OO일 OO시에 출국이래 

  요. ” 

 아직 인천공항은 생기기 전이니 김포공항으로 출국하는것일테고, 일본이란 나라에 대한 개인적인 호,불호 문제는 둘째치고라도 대체 그후 또 어떤일들이 있었기에 그렇게 학교까지 그만둔 은비가 이제 아예 그 남자랑 일본으로 떠나기까지 한단말인가. 무엇보다 그 동아리 후배는 자신에게 굳이 이런 은비의 소식을 구체적으로 전해주는 것을 보면 그래도 광일이 은비에게 조금이나마 마음이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고 그런 광일이 걱정되어 일부러 이런 소식을 알려준 듯 한데 이래저래 광일의 심사만 더 복잡하게 만드는 그런 결과가 되고 말았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그 남자는 결국 원래 부인과는 이혼을 했고 아이들 양육을 남자와 은비쪽이 맡아주는 조건으로 이전의 일들을 없었던걸로 해주겠다는 합의를 보았다는 것이다. (* 아직 ‘간통죄’가 폐지되기 전이니 작심하고 고소했다면 충분히 은비를 집어넣을수도 있는 사건이다.) 그러고보면 학교를 그만두고, 이후 은비가 그 열일곱살 많은 방송국 피디출신과 계속 사귀건 뭐가 되었건 ‘못헤어진다’고 버티다 결국 법적 소송까지 들어가 이혼을 하고, 아이 양육을 자신이 떠맡는 조건으로 그렇게 합의를 본뒤 남자와 아이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떠나기로 한 듯하다. 여하튼 동아리방에서 문제의 사건이 있은게 6월말이고 어느덧 반년정도 시간이 지난 셈이니 그 사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련의 사건들이긴 하다. 허나 그런일이 이래저래 더더욱 광일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여자라는 존재의 실체를 알 수 없어 더더욱 혼란스러워지게 한 사건이었다고나 할까. 일단 그렇게 이따금 버스를 타고 함께 등,하교를 하며 대화를 나눌 때 은비에게서 받은 느낌은 말수적고 차분하고 수더분한 그 이상의 느낌은 들지 않는 그런 여대생이었다. 헌데 그런 은비의 이면에 그런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있었다니. 그 자체도 충격이지만 그 이후의 일들이 어떻게 결론이 내려졌는지도 광일을 더더욱 충격받고 힘들게 만들었다. 

 어쨌든 은비의 동기생이 굳이 공항 출국날짜와 시간까지 알려주었으니 한번 나가서 은비를 잠시만이라도 보기로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은비를 만난다고 한들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 열일곱살이나 많은 유부남과 연애하고, 그 아이들을 떠맡는 조건으로 이혼하고 이후 남자와 아이들과 일본으로 떠나기로 결정한 18세 여성. 대체 그런 여인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있을지 궁금해서 견딜수가 없었다. 

 그러고보면 광일로서도 공항을 나가보는 것은 첫 경험이기도 한데 그래서 출국장을 한동안 못찾아 헤매기까지 했다. 게다가 은비를 못본지도 어느덧 6개월 시간이라 한 몇 달동안만이라도 그렇게 함께 버스타고 학교 오가던 사이임에도 얼굴을 기억해내기가 쉽지 않았다. 한참만에 겨우 은비를 찾았다. 솔직히 은비를 바로 알아보았다기 보단 웬 나이들어보이는 남자 그리고 어린아이 세명과 함께있는 모습과 분위기가 바로 그런 짐작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어느덧 일본으로 떠나는 비행기 출발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안내표에도 찍혀져 나오고 있었는데 광일이 은비를 알아보긴 했어도 이미 무슨 이야기를 나누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헀다. 

 은비는 무슨 스캔들이라도 일으키고 떠나는 유명 연예인도 아닌데 모자를 푹 눌러쓰고 안경까지 끼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남자는 은비보다 열일곱살 많은 방송국피디출신이라더니 그럼 은비 나이를 감안하면 그래도 이제 겨우 30대 중반 정도일텐데 공연한 편견이라도 순간 들었는지 남자는 족히 40은 되어보였다. 무엇보다 나이어린 은비를 저지경으로 만든 장본인이란 생각을 하니 광일은 당장 달려가서 초면의 그 남자 면상이라도 한 대 주먹으로 후려갈기고픈 충동까지 일었다. 

 남자와 은비. 그리고 어린아이 셋이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속에 이미 출국장으로 향해가고 있기 때문에 어차피 은비와는 더 이상 무슨 말을 나눌수 있을 상황도 되지 못했다. 결국 은비가 자신이 찾아왔는지조차 눈치 못했을 것 같은 상황에서 떠나는 은비만 잠시 멍하니 뒷모습을 바라보았을뿐이다. 그리고 출국장문이 닫히자 광일은 허탈하게 한동안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2학년을 마치고 광일은 군대에 갔다. 어차피 나이도 어느덧 20대 중반에 접어들고 있고 따라서 군대문제는 더 늦기전에 지금쯤 해결하는게 적절하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게다가 은비 문제로 인해 받은 충격을 잊기 위해서라도 차라리 군대가 광일에게 잠시나마 시름을 달랠수 있는 도피처가 되어줄것만 같았다. 

 군대 2년반을 마치고 돌아오니 어느덧 시절은 9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어느덧 3학년이 된 광일. 무엇보다 2학년때 여자문제로 한번 단단히 데인 그 상처때문에라도 광일은 나머지 2년은 그냥 공부에만 전념하기로 했다. 게다가 막상 그렇게 군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와 복학하니 똑같은 3학년임에도 ‘노땅’취급 당하는 분위기라 지금와서 새삼 무슨 여자를 새로 사귄다는가 하는것도 쉽지않은 상황이었다. 생각해보면 괜히 쓸데없이 1,2학년때 군대도 가기전에 여자 사귀다 나중에 군대가는 문제 때문에 고민하느니 우선 군대부터 해결하고 그 다음에 여자를 사귀는게 낫겠다는 생각을 그 당시엔 했는데 막상 복학해서 3학년이 되니 이젠 또 노땅취급 당하는 분위기라 광일로선 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한 처지가 되었다. 

 여하튼 어쩌면 대학 캠퍼스내엔 자신의 인연은 없다 생각하고 남은 대학생활 2년은 이래저래 공부에만 전념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 게다가 굳이 통계적으로 따져도 대학 캠퍼스 커플로 만나 결혼에까지 이른 경우보다 대학 졸업후 사회에서 만난 인연이 결혼으로 이어진 경우가 더 많으리라. 그러니 굳이 대학시절에 연애나 여자문제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광일의 판단이었다.) 

 헌데 그런 광일이 어느덧 대학 4학년에 접어들 무렵에 좀 뜻밖의 인연을 만났다. 실은 ‘나눔선교회’라는 장애인을 돕는 선교단체를 우연히 알게되어서 광일이 그곳에서 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사실 광일이든 그 가족이든 원래 종교문제엔 별다른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고 다만 광일만이 고등학교때부터 재수할 무렵까지 잠시 고등학교때 깡패들로부터 자신을 구해준 송화선배와의 인연으로 대진교라는 민족주의 계열의 종교단체와 잠시 인연을 맺었던 것이 전부일뿐. 어쨌든 교회쪽과는 별다른 인연이 없었는데 그런 선교단체와 인연을 맺은 것은 좀 남다른 사연이 있다. 

 실은 광일은 군에 갔다와서 3학년에 복학하기전 한 반년정도는 집에서 하이텔 채팅실 따위를 즐기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게 그러니 97년 후반기때 일. 그때 하이텔에 ‘나눔회’라는 장애인을 돕는 동아리가 하나 있었는데, 그곳에서 잠시 활동을 했었고 허나 광일이 복학한 98년 이후로는 하이텔 동호회 자체가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점차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었기 때문에 나눔회도 대략 그렇게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기억에 광일이 나눔회에 처음 가입했던 97년 가을만 해도 회원수 2만명이 넘는 제법 큰 동호회였는데 1년후인 3학년 겨울방학때 다시 생각이 나 들어와보니 어느덧 회원수는 1천명도 채 되지 않을정도로 쪼그라들었고 심지어 게시판이나 채팅실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사람은 그나마 열명도 채 되지 않고 있었다. 

 운영진은 자연스럽게 – 대다수 하이텔 동호회들이 이 무렵 대개 그런 수순을 밟았다. - 장애인을 돕는 봉사단체인 ‘나눔회’도 발전적 해체를 논의하고 있었다. 헌데 그냥 해체가 아닌 ‘발전적’이란 수식어가 붙을진데 하이텔 동호회 자체는 해산되더라도 이후 어떤 제2,제3의 길로 나눔회의 발전방향을 모색해본다는 의미도 되는데 그때 하이텔 동호회와는 별개로 이 동호회 운영진 혹은 회원이던 크리스찬 몇몇끼리 별도로 만든 단체가 있었는데 그게 ‘나눔선교회’였다.  

 


12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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