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청 실 홍 실
광일이 어느덧 고등학생이 되었다. 사실 고등학생이 되었다고 해서 광일에게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물론 몸과 정신이야 그만큼 자랐으니 이전에 비해 자아나 판단능력,사고방식,가치관등은 그 이전에 비해 어느정도 성숙하고 자라있겠지만, 무뚝뚝한 분위기에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그런 성격 자체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그나마 초등학교나 중학교때는 그런 광일에게 관심이 가는지 궁금함이 생기는지 마치 청문회 국회의원마냥 꼬치꼬치 물어오는 그런 녀석들이라도 있어 그래도 한 학년당 평균 한 3-4명 꼴로는 그나마 가까이 지내는 녀석이 그렇게 자연스레 생겼는데 고등학생이 되고서는 아무래도 다들 ‘이제 본격적으로 대학입시를 준비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인지 무뚝뚝한 분위기에 반 아이들하고도 잘 어울리지 못하는 광일에게 그런식으로 다가오는 아이조차 더 이상 없었다.
대신 광일은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뜻하지 않은 ‘덫’에 걸렸다. 실은 공부 안하는 날리리 몇몇이 되려 광일에게 다가온 것이다. 광일을 자신과 비슷한 날라리로 봤는지 아니면 어디 덜떨어지거나 모자란 아이로 보고 자신들이 꼬붕으로 부려먹기 좋은 그런 ‘만만한 녀석’쯤으로 봤는지 다가온 두어명. 사실 학년초라면 광일도 아직 그녀석들이 어떤 녀석들인지 눈치를 못 챘겠지만 그래도 한두달 정도 지나고 나면 대충 어떤 녀석들이 반에서 공부 안하는 날라리인지 눈에 뜨이기 마련인데 하필 그런 녀석중 몇몇이 광일에게 다가온 것이다. 뜻밖에 그녀석들이 던지는 첫 질문은 이와 같았다.
“ 최광일, 너 임마 친구 없지 ? ”
순간 반발심에라도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긴 했는데 그 부분만은 부인할수 없는 사실인데다 어차피 학교에서 늘 보는 녀석들이기 때문에 그런 거짓 대답이 통할수도 없다. 그래서 체념하고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 어정쩡한 태도로 있었는데 그런 광일에게 사뭇 궁금하다는 듯 몇가지를 더 물어온 녀석들은 그러다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 너 미팅한번 해볼래 ? 우리가 주선해줄게. ”
뜬금없이 웬 미팅 ? 사실 어느덧 80년대 후반이면 고등학생들 사이에도 이미 미팅문화가 꽤 퍼져있는 때이긴 하지만 평상시 그다지 친하지도 않은 녀석들이 해오는 미팅이라니. 눈치가 조금 돌아가는 녀석들이라면 ‘이거 뭔가 함정 아닐까 ?’ 그런 의심을 해볼만도 한데 일단 광일은 그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어쨌든 광일도 어느덧 이성에 대해 슬슬 눈을 뜨기 시작한 사춘기 소년이고 그런 광일에게 ‘미팅을 시켜주겠다’고 제안을 해오는 녀석들이 있으니 순간이나마 설렜던 것이다. 그래서 일단은 그 자리에서 수락을 했고 광일이 수락하자 녀석들은 큭큭댔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 그럼 O월 O일 토요일 오후 O시에 OO번 정류장 앞에있는 패스트푸드점으로 와라
. 거기서 우리 OO여고 연극부 아이들과 미팅하기로 했으니까. ”
일단 인근에 있는 광일의 귀에도 익숙한 여고의 써클 이름까지 대며 제안을 해오니 광일도 더 이상 의심이 생기진 않았다. 허나 결과적으로 광일은 우선 처음엔 그렇게 들어온 미팅장소에 나가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평상시 그리 친하지도 않은 녀석들이고 게다가 대충 한두달 지켜보니 대개는 공부 안하는 날라리과에 속하는 그런 녀석들 같은데 하필 그런애들이 해오는 미팅제안이라니. 아무래도 내키지 않아 결과적으로 나가지 않았다. 허나 월요일에 학교에 갔을 때 덕분에 광일은 그 녀석들의 불같은 항의를 받아야만 했다.
“ 최광일 너 임마 그날 왜 안 나왔어 ? ”
“ 아...아니 저 그게... ”
광일은 적당히 그날 엄마랑 누나 심부름을 해야했기에 못나갔다는 핑계를 대긴 했지만 광일이 안 나와서 그날 미팅이 펑크가 났다며 녀석들은 무척이나 화가 나 있었다. 광일로선 미안하다는 마음이 안들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고 녀석들은 한 며칠 광일에게 말도 안하려드는 듯 그렇게 나오다가 얼마지나지 않아 2차 제안을 해왔다.
“ 광일아, 너 저번일 우리가 용서해줄테니까 이번엔 미팅 나와라 ? ”
“ 미팅을...또 나오라고 ? ”
“ 또는 뭐가 또야 ? 저번에는 니가 나오지도 않구서 !!! ”
하긴 그건 사실이니까 광일로서도 뭔가 반박할 말이 없다. 게다가 ‘용서’란 단어까지 나오니 광일도 나름 녀석들의 마음에 감동(?)하지 않을수가 없어, 거듭되는 간곡한 제안에 이번 2차 미팅 계획은 수락하고 말았다. 다만 뜻밖에 이번엔 토요일이 아닌 금요일 학교 끝난 늦은 오후에 미팅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시간에 미팅이라니 광일로서도 의심이 안 갈수 없었지만 지난번 일도 있고 해서 미안한 마음에라도 안 나갈수가 없었던 광일. 일단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가서는 평상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가인과 광희에겐 ‘친구가 뭘 좀 사달라고 해서 그걸 좀 사다줘야 한다’는 식의 거짓말을 하고 집을 나섰다. 그러고보면 어느덧 대략 4월말-5월초 경이니 해는 많이 길어져 있을때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해질무렵이 된 그런 시간이었다.
“ 어서와라. ”
약속장소에선 문제의 그 녀석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개중 한둘은 큭큭대고 있어 아마 자신들의 거사(!)가 들통날 것 같아서인지 그 녀석들을 다른 녀석이 주의를 주는 그런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그때까진 눈치를 못챈듯한 광일의 모습. 일단 미팅장소로 가야한다길래 녀셕들에 이끌려 광일은 발걸음을 움직였다.
헌데 ‘뭔가 속은 기분’이 든 것은 머지 않았다. ‘미팅장소’로 간다더니 아무래도 그런곳과는 거리가 먼 그런 으슥한 골목쪽으로 계속 가고 있었다. 그러고보면 큰길 네거리를 한 두어번 정도 지나서 주택가가 있는 그런 단지도 한 두어군데 정도 지난 듯 한데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고도 아직도 ‘미팅장소’로는 한참을 더 가야한다는 녀석들. ‘이렇게 멀면 차라리 버스를 타야했던 것 아니냐 ?’고 광일이 묻기까지 했는데 그 물음에 녀석들은 대꾸가 없었다. 어느덧 어느 아주 으슥한 골목까지 다다른 녀석들. 그러고보면 무리는 총 6명이었는데 광일을 에워싸고 있었고 어느덧 어두워진 시간이다.
“ 너 지금부터 조용히 있어. ”
아무래도 속았구나 싶어 광일은 불안에 떨고 있었다. ‘달아나야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지만 이미 그 무리중 두녀석 정도가 광일을 좌우에서 양팔을 굳게 붙들고 있어 그러기도 쉽지 않았다. ‘이 녀석들이 대체 뭘 어쩌려고 이러는건가 ?’ 무서움과 불안함 그리고 두려움에 광일은 울음까지 터질 지경인데, 헌데 이 녀석들은 골목 모퉁이쪽으로 자꾸 힐끗거리며 어디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러다 자신들끼리 이렇게 수군댔다.
“ 오냐 ? ”
“ 오고있어. OOO 새 마누라 오고 있다니까. ”
그렇게 자기네들끼리 수군거리는 녀석들. 확실히 녀석들이 쳐다보는 그쪽에 웬 젊은 여성 하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헌데 녀석들이 수군거릴때까지는 설마 했는데, 거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면서 그녀의 얼굴을 조금씩 알아볼수 있을만한 거리가 되자 광일은 경악했다. 실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여성은 다름아닌 그네들이 다니는 고등학교 1학년 체육선생의 젊은 아내였다.
실은 이때 이 학교 고1 체육선생인 OOO 선생이 나이 30대 후반 노총각 나이에 10여살 이상 어린 20대 초반 젊은 여성과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그게 이들이 학교에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는 올해 3월의 일이었다. 아직 한참 깨가 쏟아지는 신혼때라서일까. 체육선생의 아내는 남편 도시락이라도 직접 챙겨서 학교를 몇 번 찾아온적이 있었는데 그때 비단 광일뿐만 아니라 다른 학생들도 몇 번 그 얼굴을 본적이 있다. 광일뿐만 아니라 다른 1학년 학생들도 종종 그 체육선생의 아내도 ‘선생님’으로 오인 – 하다못해 교생선생님이나 서무과 직원일수도 있으니 – 인사를 한적도 몇 번 있기까지 하다. 그래서 광일도 체육선생님의 아내 얼굴을 전혀 모르진 않았는데 광일을 이곳까지 끌고온 녀석들은 그 체육선생의 아내를 두고 실로 어이없고 비상식적인 장난질을 치려하고 있었다.
“ 너...가서 저 여자 치마 까뒤집고와. 빨리. ”
기가막혀서 광일은 그저 녀석들을 바라보기만 할 따름이다. 혹시 성이나 이성에 대한 아무런 개념이 없는 초등학교 어린 아이들끼리 장난으로 그런다면 모를까. 이 정도의 다 큰 고등학생이 성인 여성한테 그런짓을 한다면 이 시대에도 명백히 ‘부녀자 희롱’이 될 수 있는 범죄행위다. 사실 체육선생 정도되면 그 성격상 사실상 학생부의 역할까지도 겸사겸사 하게될 경우가 있는데 그래서 광일을 여기까지 데려온 녀석들쯤 되는 날라리,비행청소년들이라면 평상시 체육선생한테 유감이 많았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기로 그런 선생님의 아내한테 복수를 하겠다는것인지 장난을 치겠다는것인지 그것도 광일이란 평상시 친하지도 않은 학생을 ‘미팅을 시켜준다’는 식으로 꼬드겨 이런짓을 벌이려 들다니. 광일로선 너무 기가막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 싫어 ? 그럼 다른거 할래 ? 그러면 가서 저 여자 종아리랑 엉덩이 한 대씩만 때
리고 와 빨리 !!! ”
치마를 까뒤집고 오라는 짓도 비상식적이지만 그 다음 요구사항은 더더욱 기가막혔다. 그것도 이런 시간에 잘 알지도 못하는 그런 여성의 종아리나 엉덩이를 무작정 때린다면 그 역시 변명의 여지없는 ‘성희롱’이고 성추행이 분명하다. 게다가 상대는 다름아닌 자기네들 학교 체육선생님의 아내 아닌가. 게다가 더더욱 공교롭고 난감한 것은 이 날라리 학생들한테야 체육선생이 무슨 철천지 원수처럼 여겨져 그 앙갚음을 하려드는것일련지 몰라도 광일은 좀 다른 입장이다.
그렇다고 체육선생이 광일에게 딱히 잘해주었다고 할것까진 없지만, 원래 광일이 운동신경이 좀 떨어지는 아이였다. 그래서 담당 체육선생 정도면 달리기나 여타 실력이 다른 평범한 다른 학생들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은 충분히 눈치를 챌수 있을터. 그것을 알아서였는지 선생이 최광일 같은 학생의 경우 다소의 배려를 해준적도 없지는 않다. 그러니 은인까진 몰라도 적어도 자신을 ‘봐준’ 전력이 종종 있는 그런 선생님의 아내에게 그런짓을 하라고 시키다니. 인간의 양심상 그야말로 차마 못할짓 아닌가. 그래서 광일은 더더욱 못한다고 버티고 있자 녀석들은 어느덧 다가오고 있는 여선생쪽으로 향해 광일을 밀쳐내기까지 한다.
“ 안해 ? 하기싫어 ? 그럼 다른거 시킬까 ? ”
“ 거기 너희들 뭐야 !!! ”
어느덧 문제의 골목과 다가오는 여선생과의 거리는 10미터도 채 안되게 가까워져 있는데 이쯤되면 고의적인 장난이 아니더라도 광일과 녀석들 사이에 이런 실랑이가 벌어지다 무슨 사고가 날지도 모르는 아슬아슬한 상황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놀란 녀석들이 바라보니 어둠속에서 시커먼 물체가 다가오고 있었다.
“ 너희들 뭐하는 녀석들야 ? 대체 여기서 무슨 짓거리를 하는거냐구 ? ”
아는 사이라고까진 할수 없지만 면식정도는 있는 사이라고나 할까. 광일뿐만 아니라 다른 녀석들도 그렇게 다가오는 검은물체가 적어도 학교에서 얼굴을 몇 번 본 기억정도는 있는 2학년 선배임을 알수 있었다. 대충 봐도 덩치나 체구도 그렇지만 뭔가 강단있어 보이는 그런 분위기의 2학년 선배 남학생이었다. 그런 학생이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고 아무리 봐도 불량기있는 녀석들이 어떤 선량하거나 약한 학생을 괴롭히는것처럼 느껴져서일까. 엄포를 놓고 있었다.
“ 뭐야 당신 ? 미안하지만 좀 꺼져줘. ”
“ 당신 ? 이 자식들이 이거 말버릇봐라 ? 니들 OO 고등학교 다니는 녀석들 맞지
? 이것들이 선배도 몰라보고 무슨 말버릇이 그따위야 ? ”
확실히 2학년 선배도 이 비행청소년들의 얼굴을 본 기억이 없지는 않은 듯 하다. 확실히 그런대로 날라리로 소문난 1학년 후배 몇몇의 얼굴 정도는 아는가 본데, 그래서이들 5-6명의 학생들과의 대치가 벌어지고 광일은 어느덧 도와달라는 듯 2학년 선배의 뒤로가 숨어있었다. 한편 아까 그 다가오던 젊은 체육선생의 아내는 그쪽 골목에서 나는 소리며 분위기가 이미 심상찮다 짐작했는지 어느덧 다른쪽길로 달아나버리고 보이지 않았다. 그걸 뒤늦게나마 눈치챈 녀석들도 모처럼만의 재미있는(?) 장난을 치려했는데 수포로 돌아가 아쉬워하는 분위기였고, 그래서 더 분이 치밀었는지 되려 선배에게 더더욱 시비를 걸어왔다.
“ 에이씨...진짜 이 아저씨가...남의 사업은 다 망치고 대체 뭐하자는거야 지금 ? ”
“ 사업같은 소리하고 앉아있네 ? 도대체 학생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이 밤늦은
시간에 도대체 뭘하는거야 !!! ”
결국 고2 선배와 1학년 비행청소년 5-6명의 한바탕 대결이 벌어졌다. 그리고 결과는 ? 보통 허풍좀 떠는 남자들중에 왕년에 무슨 10:1로 붙어 이겼다느니 17:1로 싸웠다느니 그런 소리를 하는이들이 있기는 한가본데 그런 거짓말을 어디까지 믿어줘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만약 상대방이 그래도 운동을 좀 하는 사람이고 그 상대가 그저 깡패축에도 못끼는 껄렁거리는 양아치나 비행청소년쯤 된다면 혼자 몸으로 한 대여섯명을 제압하는게 현실적으로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나보다. 실제 이들과 대치한 고2 선배는 평상시 운동을 좀 하는 사람이었고, 정확히는 여섯명중 한녀석이 먼저 지레 겁을 먹고 달아나버렸고 2학년 선배가 두 녀석을 힘으로 제압하고 세 번째 녀석을 붙잡아 고꾸라뜨릴때쯤 나머지 둘은 이미 ‘안되겠다’ 싶어 저만치 달아나버렸다. 쓰러진 두 녀석도 이미 달아나고 그렇게 2학년 선배가 광일을 데리고 이상한 장난을 치려는 비행청소년 6명으로부터 구해준것이고 광일에게 다가와 후배를 위로한다.
“ 큰일날뻔 했구나. 몸은 좀 괜찮니 ? ”
“ 고...고맙습니다 선배님. ”
이래저래 2학년 선배라는 생각에 광일은 고마움보다는 주눅까지 들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고 2학년 선배가 안심하라는 듯 어깨를 두어번 툭툭 쳐주었다. 그리고는 말을 건넨다.
“ 담배 좀 필줄 아니 ? ”
“ 아...아뇨 저 담배는 안 피우는데요. ”
“ 그래 ? 다행이구나. 넌 웬만하면 그런거 피우지 마라. ”
그리고는 그야말로 어린아이 대하듯이 기특하다는 듯 광일을 한번 쓰다듬어주기까지 하고 그리고는 좀 밝은쪽으로 이동해서 인근 놀이터 같은쪽으로 가 선배와 이야기를나누게 된다.
“ 아까 그 녀석들에 대해 아니 ? ”
“ 아뇨...실은 원래 친한 사이는 아니었는데... ”
그리고는 광일이 여기까지 그 녀석들에게 이끌려 오게된 곡절을 말했고 2학년 선배가 어이없다는 듯 나왔다.
“ 순진한 녀석...세상에 그걸 믿고 그래서 무작정 그런 아이들을 따라왔어 ? 미팅은
무슨...아무리 세상물정을 몰라도 그렇지... ”
“ 저도 처음엔 그래서 내키지 않아서 안 나갔다니까요. 그랬더니만 그 다음엔 그 녀
석들이 불같이 화를내며 그렇게 나와서... ”
‘순진하게 그런데 속아넘어갔느냐 ?’는 선배의 말에 광일이 억울하다는 듯 울상까지 되어 항변했고 선배가 그런 광일을 거듭 달래주었다. 그리고 뒤늦게나마 2학년 선배가 자기의 이름을 밝혔다.
“ 내 이름은 송화(松和)라고 한다. ”
송화 ??? 남자 이름이라기 보단 여자 이름 같다는 느낌까지 드는데 심지어 무슨 조선시대 양반이나 선비들한테서 볼법한 무슨 호(號)나 자(字)같은 느낌마저 든다. 여하튼 그렇게 자신을 소개한 송화. 그리고는 광일에게 세상물정 모르는 어리고 딱한 후배를 가르쳐주려는 듯 이렇게 나온다.
“ 아까 그런 녀석들하곤 웬만해선 어울리지 마라. 아주 질 나쁜 녀석들이거든. ”
“ 잘 알겠습니다 선배님. ”
광일이 정중하게 그렇게 대답하고 송화가 그런 광일을 잠시 뚫어져라 바라본다. 그리고 잠시 광일의 어깨며 볼같은 것을 어루만져 보기까지 하고 그렇게 좀 이상하다면 이상하다고 볼 수 있는 동작을 좀 취해보이는데, 이쯤되면 이제 광일이 되려 송화라는 사람의 정체에 대해 좀 의심까지 품을판인데, 송화는 좀 뜻밖의 말을 꺼냈다.
“ 내가 관상을 보아하니 네 녀석은... ”
“ ...... ”
“ 아무래도 너도 민족정기와 민족영혼을 제대로 일깨우는 길을 가야할 것 같다. ”
“ ??? 네 ??? ”
이게 대체 웬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황당하고 어리둥절하기만 해 광일이 송화를 바라보는 가운데 송화의 말이 이어진다.
“ 이게 다 단군 태극 민족의 자손으로 이어지는 인연이라 생각하렴. 5만년전부터 예
비되어 있는...너도 분명한 이 위대한 단군 천손민족의 자손. 그 잃어버린 민족정기
와 민족영혼을 바로 일깨워야해 !!! ”
송화는 실은 대진교라는 종교단체에서 활동을 하는 학생이었다. 대진교의 교리를 굳이 한줄로 요약하자면 한민족의 ‘정통 민족신앙’의 뿌리를 계승하는 종교요, 특히 단군민족의 자손중에 앞으로 후천세계 만 인류를 5만년동안 구원할 ‘미륵(彌勒)’이 탄생하게 되어있으니 이를 신봉(信奉)해야만 삼생(三生)을 구원받을 길이 열린다는 그것을 핵심교리로 하고 있는 종교다. 특히 서양귀신(기독교)이 우리 민족영혼을 다 잡아먹고 있으니 이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주된 교리로 하고 있다. 사실 이때면 이미 증산도니 대순진리회니 하는 종교단체들이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매스컴에 이따금씩 오르내리는 시기라, 광일도 대충 그 엇비슷한 아류의 종교인가 처음에는 그리 짐작하였다. 송화는 일단 그런식으로 인연을 맺게된 광일에게 특히 대진교에는 ‘청운동지회 : 약칭 ‘청운회’라는 청소년,청년들을 중심으로 하는 단체가 있으니 그 단체 집회에 한번 참석해볼 생각이 없느냐며 광일에게 그렇게 권유하였다. 어떻게 보면 ‘청운회’는 기독교로 치면 ‘청년회’ 비슷한 단체인 셈인데, 여하튼 그런 집회에 자신과 함께 참석해보자고 권유하는 송화. 어떻게 보면 늑대를 피하니까 호랑이를 만난 격이라고나 할까. 그런 불량학생들의 꾀임에 빠져 폭행이나 봉변을 당한것도 아니고 정말 이상한 ‘계략’에 말려들뻔한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바로 그런 위기상황에서 자신을 구해준 송화. 헌데 그런 송화가 이번엔 그런 생소한 신흥종교단체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서 그런 종교 집회에 자신과 함께 참석해 보자는 권유를 하다니. 광일은 당혹감과 함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사실 광일이나 그 가족은 원래 기독교든 불교든 그런 종교단체에 관심이 있는 그런 집안은 아니었다. 다만 굳이 그 윗대로 올라가자면 여하튼 일제때 땅을 빼앗긴 그런 뿌리깊은 양반가문인 셈이니, 어느정도 유교문화에 많이 젖어있다면 젖어있는 그런 집안인 정도. 하지만 그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퇴색되어 가고있는 그 정도의 집안이었는데 그런 집의 둘째인 광일이 그런 민족주의 계열 신흥종교단체에 이런식으로 연을 맺게 되다니. 송화는 일단 그런 문제로 광일에게 강요를 하거나 위협을 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맺어진 인연을 빌미로 한 평균 2-3주에 한번꼴로는 자신의 교실까지 찾아와 ‘한번 대진교 청운회 집회에 참석해볼 생각이 없느냐 ?’는 권유를 하였다.
아무리 자신을 그런 불량학생들로부터 권해준 그런 고마운 선배라도 그런 이상한 종교단체 집회에 참여하는 것은 내키지 않았던 광일.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송화의 요구는 사뭇 집요해져갔다. 그래서 한 두어달쯤 지난 어느 무렵에 광일이 한번 작심하고 혼자 스스로 그 종교단체 집회장소를 찾아가보았다.
대진교는 대략 서울,인천(송도),부산,경산(* 대구 옆 위성도시),창원,광주,전주등 대략 전국 10여곳 정도에 굳이 비유하자면 기독교의 교회, 불교의 사찰 비슷한 ‘집회장소’를 갖고 있었는데 그들은 그곳을 ‘회관(會館)’이라 불렀다. 그리고 ‘서울회관’은 이 무렵 혜화동의 주택가에 위치하고 있다는게 송화의 설명이었고 하루는 직접 친절하게 인근 약도까지 그려가며 위치를 설명해주기까지 했다.
그래서 어느덧 봄도 다 지나고 날도 한참 더워지는 여름 어느날. 그러고보니 어느덧 여름방학 시작할 무렵에 광일은 결국 호기심삼아 대진교 청운회 집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송화의 말로는 대진교 청년,청소년 단체인 ‘청운회’는 한달에 한번정도 보통 ‘둘째 일요일날’에 집회를 갖고 그 외 중,고등부는 보통 토요일 오후에 별도로 한달에 한번정도 모임을 갖는다고 했다. 다만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초등부부터 중고등부,청년부를 포함하는 ‘청운법회’는 한달에 한번 정기적으로 열리지만 ‘중고등부 집회’는 그리 정기적이진 못해서 명목상으론 ‘한달에 한번’이지만 때론 격월, 경우에 따라선 이런저런 사정으로 한 서너달동안 열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 게다가 청운회의 규모도 각 지역 회관마다 사정이 조금씩 달라 어느곳은 중고등부나 청년부는 거의 없고 초등부 일색인곳이 있는 반면 되려 또 청년부는 거의 없고 나이어린 초등부 학생들만 있는 그런곳도 있었다.
여하튼 송화의 거듭되는 권유도 있었고 또 자꾸 그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듣게되니 ‘도대체 어떤곳인가’ 하는 호기심도 생겨 결국 여름방학 시작하기 직전인 7월의 둘째 일요일에 자기발로 한번 문제의 대진교 ‘서울회관 청운회’ 집회에 참석하러 간 것이다. 사실 이때는 지하철 2,3,4호선이 다 개통되어 있는 시기이니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에서 전철을 타고 4호선 혜화역에서 내리기까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긴 했다. 하지만 한 몇 년전까지만 하더라도 – 광일의 나이나 성숙도 여부와는 상관없이 – 압구정동에서 혜화동까지 광일이 누구 도움 안 받고 혼자 자기발로 간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었을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것도 좀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랄까. 사실 광일도 이때까지 집과 학교 그 외의 타지역을 가본 경험은 거의 없는 ‘보통학생’일 뿐이었는데 지하철이 개통되고 나서는 보다 수월하게 서울시내에서 다른 지역까지 이동을 할 수가 있게 되었던 것이다.
여하튼 혜화동까지 가보는 것은 고등학생 광일로서도 난생 처음 있는일. 막상 전철역에서 내려 출구를 제대로 못찾아 좀 헤매기까지 했다. 허나 광일이 무슨 문맹도 아니고 고등학생인 이상 송화가 그려준 약도만 제대로 살펴도 그때까지 한번도 가보지 못한 혜화동 주택가에 있는 ‘서울회관’까지 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일. 헌데 어떤 신의 도우심인지 이끔인지는 몰라도 이런 우연까지 있었다. 광일을 알아보고 이미 저만치서 부르는이가 있었다.
“ 어이...최광일 후배님 !!! ”
다가오는게 다름아닌 송화였다. 어쨌든 송화와 같은 고등학교를 다닌다면 그 역시 압구정동 인근 – 청담동이든 신사동이든 – 지역에 살고 있을것이고, 역시 대략 비슷한 시간에 청운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지하철을 탄 모양이다. 그래서 전철역에서 만나게 된 송화. 다가오며 반갑게 악수를 건넸다.
“ 설마... ”
하지만 우연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송화가 반가우면서도 혹시 몰라 이렇게 말을 건네왔고 광일이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실은...선배님께서 자꾸 권하셔서... ”
“ 그럼 청운법회 참석하러 오신거에요 후배님 ? ”
“ 네, 맞아요. ”
정중하게 광일을 ‘후배님’이라고까지 부르며 그를 서울회관으로 안내하는 송화. 전철역을 내려서 대충 소극장이나 식당 따위가 있는 골목을 지나 있는 주택가. 서울회관은 그때 그곳에 위치해있었다.
“ 제가 교화(敎和)한 동지입니다. 저희학교 후배고 이름은 최광일이에요. ”
법회가 끝나고 친교시간에 송화가 그렇게 광일을 다른 청운동지들한테 소개했다. 그러고보면 기독교의 전도와 비슷한 의미로 그들은 ‘교화(敎和)’란 단어를 쓰고 있었고, 그리고 기독교에서 엇비슷한 연배의 청년회원들끼리 ‘형제님,자매님’이라고 하듯 이들은 서로를 ‘동지’라고 부르고 있었다. 여하튼 그렇게 대진교 서울회관 청운회 집회에 처음 참석하게 된 광일. 대진교 청운회 사정과 규모가 각 지역마다 사정이 많이 다르다는 것은 시간이 좀 지난뒤에 알게 된 일이지만, 처음 청운집회에 참석했을 때 서울회관의 경우 청년회와 중,고등부 회원수가 대략 엇비슷한 느낌이었다.
청운법회 말고 별도로 중,고등부 집회를 보통 둘째 토요일이나 넷째 토요일 오후 보통은 한달에 한번 사정에 따라선 격월에 한번꼴로 열렸는데 중고등부 집회의 경우 많이 모일때는 스무명 가까이 적을때는 열명이 채 되지 않았었다. 여성은 상대적으로 많지않아 적을때는 한 2-3명. 많아봐야 대여섯명을 넘는일은 거의 없어 굳이 비율로 따지만 남,녀 학생의 비율이 대략 3:1 정도 되었던 셈이다.
그렇게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직전에 처음 참가하게 된 청운집회. 이후 청운회 수련대회라는것도 한번 참석을 했고 대략 고2 중반부까지 비교적 열성적으로 참가한것같다. 그러다 자연스레 고3이 되면서 공부를 해야했기에 청운집회에는 덜 참석하게 되었다.
“ 최광일, 너 요즘 뭐하냐 ? ”
그런 광일의 최근 행보를 수상쩍게 여긴 것은 역시 두 살터울의 손윗누이 최광희였다. 광일은 보통 청운회 집회에 참가하러 갈 때 ‘친구를 만난다’던가 ‘인근 독서실에서 공부한다’는 식의 핑계를 댔다. 허나 엄마 가인이야 워낙 쑥맥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누나까지 속이긴 쉽지 않았다. 원래 친구가 그리 많지 않고 게다가 그런 얼마 되지도 않는 친구를 집에 데려오는 일도 거의 없던 광일이 갑자기 그렇게 ‘친구 만나는 일’이 많아진 것 – 어쨌든 경우에 따라선 한달에 한번, 두 번도 되는셈 아닌가. - 도 수상쩍거니와 ‘동네 독서실’에서 공부한다는것도 광희는 신뢰가 안가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집 근처 독서실이라면 위치를 광희도 모르진 않을터. 이래저래 신뢰가 안가는 것을 견디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 독서실은 무슨...내가 OO 독서실 가봤더니 너 없더라. ”
“ 아니 거기 말고 다른데 다니니까... ”
“ 대체 어디있는 독서실을 가는데...게다가 고작 공부하려고 일부러 그렇게 멀리까지
간다구 ? ”
광희는 거듭 동생이 수상쩍어 이리 추궁했고 결국 이렇게 물어왔다.
“ 광일이 너 설마...혹시 이상한데 다니거나 그러는건 아니지 ? ”
“ 무...무슨 소리야 갑자기 ? ”
“ 혹시 교회나 성당같은데 다니는거라면...우리집이 굳이 그런거 말릴 집안은 아니니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을테고...솔직하게 말해봐. 도대체 어딜 다니는거야 ? ”
광희는 수상한 눈초리를 쉬이 지우지 못하며 이렇게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지만 당황한 광일은 손만 내저을뿐 제대로 된 변명이나 해명도 못하고 있었다.
“ 그런거 아니라니까. 누난 도대체 날 어떻게 보고...도대체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
거야 ? 그런거 절대 아니라니까 !!! ”
- 10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