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청 실 홍 실
“ 광희는 이리 좀 들어와보그라. ”
이 늦은 시간에 공터에 나가있는 광희,광일 두 남매가 그것도 누나가 동생을 때리는 모습을 보고 기가막혔는지 두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들어온 가인. 그리고 광희를 안방으로 들어오게 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마침 경환은 오늘 야근을 해야해서 늦게 들어오는 날. 어디서 이미 회초리까지 준비해와 들고있는 가인이 그것으로 방바닥을 두어번 내려치며 딸에게 묻는다.
“ 광희 너 올해 몇 살이냐 나이가 ? ”
“ 중학교 2학년이요. ”
나이를 물었는데, 굳이 학년으로 그것도 볼멘소리로 대답하는 딸. 가인의 말이 이어진다.
“ 중2면 올해 나이가 몇이냐고 ? ”
“ 열다섯살... ”
만나이가 아닌 한국식 계산 나이로 그와같이 대답하고 있는 광희. 가인이 그런 딸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 이것아...열다섯살이면 옛날 같으면...아니 그보담도... ”
아무래도 ‘옛날 같으면 니 나이면 시집가란 말 나올때여 이것아 !!!’ 이런말이 나올 기세였다가 요즘 시대에 이건 너무 구닥다리 방식의 꾸짖음이란 생각이 들어서일까. 가인이 바로 수정을 하려드는듯한 모습으로 나오고 그리고 다시금 이렇게 묻는다.
“ 너...살림밑천이란 말 들어봤냐 못들어봤냐 ? ”
그런말은 아직 못들어봐서인지 중학교 2학년 광희가 어리둥절해하며 제 엄마를 바라보고 가인은 아무래도 딸이 아직 어려 모르는구나 하는 생각에 가르치려는 심사 겸사겸사 곁들여 이렇게 말을 이어간다.
“ 옛날에는 집안에서 맏이가...큰딸이 가장노릇 하는 경우가 많았어. 요즘은 그 뭣이
냐...‘둘만낳아 잘기르자’도 모잘라서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가 초만원이라고 애
좀 그만나라고 국가적으로 저 난리를 피지만서두...옛날 형제들 많던 시절엔 큰딸이
사실상 집안에서 가장노릇 하고 살았다고. 무슨말인지 알어 이겄아 ? ”
“ ...... ”
“ 뭐 솔직히 이 에미도 고등학교도 제대로 졸업 못허고...그 어린 나이에 돈좀 벌어
보겠다고 그 나이에 무작정 서울 올라온 그런 여자였지만서두...그 나이에 집에서
올망졸망 어린 동생들 자기가 먹여살리고 키우고 돌보고 해야 허니까...그 시절에
학교도 제대로 졸업 못허고 손수 서울까지 올라가 공장일하고 그러면서...그래서 돈
벌어서 동생들 뒷바라지하고...늙으신 부모님 봉양허고...그러고 산 큰딸이 부지기수
였당께. 무슨말인지 알어 ? ”
아니나 다를까. 결국 자신들이 자라던 시절 그 헐벗고 굶주리던 시절의 이야기가 한바탕 사설처럼 늘어지는 가인. 그나마 아슬아슬하게 1950년생으로 6.25를 직접 경험했다고 볼 수 있는 나이대는 아니라서 망정이지 한 열 살만 많았어도 열 살도 채 되기전 그 어린나이에 겪었을 전쟁을 두고 마치 자신이 직접 남부여대(男負女戴)해서 그 머나먼 피난길을 고생고생해서 가기라도 한것인양 말하는 그 한바탕 사설이 길어질뻔하기까지 했다. 그 점을 생각하면 아슬아슬하게 엄마가 40년대생이 아닌 1950년생인 가인네 집 자녀들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봐야하는것일지. 여하튼 가인의 경우엔 그 어머니가 나이 40을 넘겨 낳은 늦둥이 딸에 집안 형편도 안좋아 어린시절 가난하고 고생했던 기억만 많을뿐 손수 어린 동생들 키우는 ‘소녀가장’도 분명히 아니었는데 마치 자신이 직접 그런것들을 경험하기라도 한양 이와같이 늘어진 그녀의 한바탕 사설. 그리고는 결국 철없어 보이는 자신의 큰딸 광희에 대한 꾸짖음이 이어진다.
“ 그런데 대체 너는 뭣허는 아이냐 ? 옛날처럼 무슨 8남매,9남매 그렇게 돌보는 그
런 시절도 아니고 그래봤자 동생이 꼴랑 광일이 하난데 인데...그런 니가 이 엄마
바쁠 때 그 일손 도와준다 생각은 못할지언정 그 나이에 그래 겨우 두살차이인 남
동생이나 그리 구박하고 때리고 있어 !!! ”
마치 이 시간에 동생 광일을 보통 아이들이 놀이터 대용으로 쓰는 공터지 어른들은 웬만해선 거기까지 가지 않는 그 장소로 일부러 불러내어 매일같이 때리고 괴롭힌 것 정도로 가인은 지레짐작한것인지 이렇게 나오고 있고 그러니 광희가 진심으로 기가막힌다. 지금 일이 누구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는데. 광희가 기가막히다는 듯 결국 반발한다.
“ 엄마 !!! ”
“ 뭐...뭣이여 ? 이 에미한테 무슨 억울한 할말이라도 있다 이것이여 ? ”
이것이 요즘 흔히들 말하는 그 ‘질풍노도의 사춘기’의 시작인가 싶어 가인도 순간 당황하며 긴장되고 – 요즘은 흔히 ‘중2병’이라 표현하지만 – 그런 제 엄마를 살짝 노려보는 듯 하더니 광희의 항변이 이어진다.
“ 엄마 도대체... ”
그러나 광희는 말문을 닫았다. 지금 이 일이 누구 때문에 벌어진것인데. 무슨일 때문에 내가 광일이를 그 시간에 불러내어 그리 꾸짖은것인데. - 사실 꾸짖었다고 볼수도 없고 그냥 진상이나 좀 알아보며 타이르려 한 수준이다. - 광일이 제 엄마에 대해 무슨 서울대 나온 간호사라느니 장애인 가르치는 특수교사를 했다느니 말도 안되는 거짓말을 자꾸 하고 돌아다니는 그 문제 때문에 동생을 그 늦은 시간 – 사실 저녁때가 조금 지난 정도지 그렇게까지 밤늦은 시간도 아니다. - 에 불러내어 야단을 치려다가 자신도 모르게 그만 손찌검을 하게된것인데 하필 그 광경을 목격하고선 지금 큰딸 광희만 이리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광희 입장에서 어찌 기가막히고 억울한일이 아닐수가 있으랴. 허나 자세한 진상을 알리없는 가인은 – 가인은 아직 광일이 제 엄마에 대해 그런 소리를 하고 돌아다니는지 모르는 듯 하다. - 여전히 동생 때리는 ‘나쁜누나’ 광희만을 꾸짖고 있다.
“ 종아리 걷어라... ”
엄마가 이렇게까지 나오리라고는 예상 못한것인지. 아니 그보다는 오늘 그 일의 근본원인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따져보더라도 광희가 맞을 이유는 더더욱 없는 것 아닌가. 그러나 내막을 모르는 가인은 진심 큰딸 광희를 따끔하게 야단칠 기세로 이와같이 나오고 있고 광희는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르는 말을 꾹꾹 눌러내느라 속을 끓이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종아리를 맞기도 전에 눈물까지 왈칵 솟구칠판이다. 가인은 딸이 공연히 시간만 끌고 있는 것 같아 거듭 매섭게 호통친다.
“ 뭘 하고 있어 !!! 어서 종아리를 걷으래는데도 !!! ”
딸이 쓸데없는 꾀를 부리는것만 같아 가인은 더 화가났고 그리고 그날 수도없이 광희를 후려쳤다. 그러고보면 아직 젊은 주부이던 시절 광일이 자꾸 이상한(?) 노래를 부르는 문제를 갖고 시어머니에게 종아리를 여러번 맞은적 있는 그런 가인이 아니던가. 그래서 ‘요즘 세상에 어떤 무식한 시어머니가 그리 경우없이 며느리를 때리느냐 ?’며 어디서 붙잡고 하소연할 마땅한 친지나 친구하나 없어 아파트 단지 구석에 혼자가서 구슬피 울기까지 했던 가인. 그 시절에 대한 원망과 분노의 감정까지 치솟아올라서일까. 바로 그 시어머니의 손녀딸이기도 한 광희를 한껏 더 매섭게 후려치고 있다. 보통은 며느리때 엄청나게 시집살이 했던 여자가 나중에 시어머니가 되어서 더하다던데 가인은 어찌보면 시어머니한테 맞았던 종아리에 대한 한까지 더해져 큰딸 광희한테 이와같은 분풀이를 하는셈이다.
시간이 다시 더 흘러 광일도 어느덧 중학생이 되었다. 중학생 정도 되면 그래도 어느정도 철도 든다고 볼수도 있는데, 다만 광일의 거짓말은 이때도 달라진게 없었다. 전남 진도출신의 고등학교도 채 졸업못한 자기 어머니 가인이 창피해서 무슨 ‘서울대 나온 간호사’라는 식으로 거짓말을 한것이야 초등학교때 아직 철없고 어려서 했던짓이라 이해해줄수 있다쳐도 이때쯤에 광일의 거짓말은 좀 더 구체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일이 있었다. 광일이 어울리는 친구가 잘 없는 것은 중학생이 되어서도 그리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는데 그나마 같은 초등학교를 나와서 지금은 같은 구정중학교에 다른 학급으로 배치가 된 두어녀석 정도하고나 어울리는 그 정도의 친분관계만 갖고있는 것이 최광일이란 아이의 인간관계였다. 헌데 그런 광일이에게 어떤 궁금증이라도 생긴것일까. 하루는 한 녀석이 다가와서는 또 무슨 국회 청문회에서 질의라도 하는 국회의원마냥 꼬치꼬치 캐묻는 것이다.
“ 너 근데 니네 엄마가 자폐아들 가르치는 선생님이라면서 ? ”
그건 벌써 어떤 의미에선 엄마가 ‘서울대 나온 간호사’라는 거짓말을 하기도 이전부터 한 소린데, 당시 전학을 온 짝궁이 하필 광일과 같은 아파트단지에 이사를 오게되어서 선생님이 아직 전학생인 봉희가 이동네 지리에 익숙하지 못할테니 당분간 광일이가 집에까지 좀 데려다주고 하렴 했을 때. 그렇게 친하게 된 목사님 딸 봉희. 헌데 자기 아빠가 젊은시절 아프리카 선교여행까지 다녀왔다고 자랑스레 말하는 봉희 앞에서 콤플렉스를 느꼈기 때문일까. 그때부터 꾸며내기 시작한 거짓말. 헌데 그렇게 퍼지기 시작한 이야기를 이 아이가 또 어디서 소문으로 들었나보다.
그러고보면 그게 이미 수년전 일인데다가 목사님이셨던 봉희네 아버지고 자신의 교회를 다른곳에 다시 새로 지었기 때문에 봉희네는 그쪽으로 이사를 가서 더 이상 이 동네에 살지도 않는다. 헌데 봉희네는 떠났지만 애초 광일이 처음 꺼낸 이야기인 셈인 광일 어머니의 자폐아 특수교사(?)설. 그걸 어디서 들었는지 이렇게 물어온 아이. 그럼 차라리 ‘아냐 !!! 그거 잘못 전해진 이야기야 !!!’ 해버리면 깔끔하게 소문을 잠재울수도 있는 것을 아예 광일은 거기에 이야기를 덧붙였다.
“ 맞아, 그때 엄마가 가르치시던 자폐아 형들중에서 아직도 연락되는 사람도 있어.
”
“ 연락되는 사람이 있다니 ? 너네 엄마한테 인사도 드리러 오곤 한다 그런 이야기
야 ? ”
“ 어어...그게 ??? ”
대충 광일이 그때 이렇게 이야기를 지어냈다. 원래 엄마가 (자신이 유치원도 다니기전에) 가르치던 자폐아 또는 장애인 학생이 몇몇 있었다. 대개는 광일보다 두어살정도 많은 형이나 누나들이었고 엄마가 그 자폐아 학생을 가르치는 시간동안에는 자신은 그 집의 다른 (장애인이 아닌 정상인인) 형이나 누나 방에서 놀며 지내곤 했었다. 그때 가르치던 자폐아 형중 한 사람이 그 형 위로 (정상인인) 누나 두명이 있었는데 엄마가 그 형을 가르치는동안 자신은 그 누나들 방에서 놀곤 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뒤 그때 가르치던 자폐아 형네 집에서 연락이 왔는데 자폐아 형의 누나들은 어느덧 대학생이 되어 있었다. - 어쨌든 광일보다 두어살 많은 형이나 누나가 광일의 어머니(?)가 주로 가르치던 자폐아나 장애아 주요 연령대라고 했으니 어느덧 광일이 중학생이니 그때 광일 어머니가 가르치던 자폐아 학생이라면 지금쯤 대략 고등학생이 되어있어야 맞고 그런 학생의 손위인 형이나 누나 또는 언니,오빠라면 지금쯤 대학생등 20대 성인이 되어있는게 일단 나이 계산상 맞아떨어지는 설정이긴 하다. 무슨 소설가적 재능이라도 미리 보이는것인지 보통 이런 거짓말은 계속 꾸며내다보면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가 나오거나 허점이 보이기 마련인데 이제 겨우 중학교 1학년짜리가 꾸며내는 이야기치곤 웬만한 방송국 ‘장애인의 날’ 특집드라마 못지 않은 제법 치밀하게 꾸며낸 설정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셈이다.
“ 엄마가 사실은 그 누나 미술선생님으로 오해를 받으신 일이 있어. ”
“ 그건 또 무슨소리야 ? 너네 엄만 그냥 장애인 특수교사라면서 ? ”
여하튼 80년대면 이미 ‘장애인의 날’ 같은날도 제정되고 어쨌든 그 이전보단 장애인에 대한 사회인식이 어느정도 바뀌어가던 시절이라, 특히 어느정도 먹고살만한 집에선 자폐아든 지적장애아든 그 외 신체장애아든 그런 자녀가 있을시 그런 아이를 가르치는 ‘특수교사’를 한두명쯤 들이는 경우. (특히 서울 강남지역 정도 되면)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긴 했다. 그래서 중학생정도 되면 ‘장애인 특수교사’란 말이 무슨 말인지 이미 이해못할 그런 나이는 아니다. 헌데 원래는 장애인 특수교사라더니 난데없이 미술선생(?)이라니 이건 또 대체 무슨소린가. 일단 광일의 가짜 이야기는 좀 더 이어졌다.
“ 그게...아까 말했지. 엄마가 OO이형(자폐아. 가상설정) 가르칠때는 난 OO이형네
누나네 방에서 놀곤 했었다구. 그리고 그 누나들도...어쨌든 동생을 가르치는 특
수교사 선생님이니까 그 누나들도 그냥 엄마를 ‘선생님’이라 부른거거든. 그리고
OO이형 큰누나는 아마 미대를 졸업해서 화가가 된걸로 알고 있는데 – 참고로 작
은누나는 아마 방송연예과 나와서 무슨 피디가 된다고 했는데...정확한 기억인지는
확실치 않다...어쨌든 OO이형네 큰누나가 소원대로 미대에 진학해서 최근에 신인
화가로 데뷔를 했어. ”
“ 그러니까 너네 엄마가 가르치던 자폐학생의 큰누나가 화가가 되었다 그 소리인거
야 ? ”
“ 응...뭐 그런셈이지 뭐. 그래서 그 누나가 신인 화가로 전시회를 갖게되었는데 그
래서 우리 엄마한테도 직접 초청장 들고 인사드리러 온거야. ”
자폐아 동생을 어린시절 가르쳐주던 특수교사 선생님을 일부러 찾아 뵙고 자신의 전시회 초청장을 보내주었다면 현실에서도 전혀 있을수 없는 일은 아니다. 그리고 그 정도의 인연이라면 그 장애아 특수교사(?)도 흔쾌히 그 학생의 전시회에 참석했을수도있고.
“ 어머, 선생님. 안녕하셨어요 ? 저 OO이에요. OOO ”
“ 어, 그래 ? OO이구나 ? 정말 오랜만에 보는구나. 그리고 아주 몰라보게 자랐어.
그동안 많이 예뻐졌구. ”
수줍게 인사하는 그 시절 자폐학생의 큰누나. 여하튼 대화를 나누면서 신인화가는 동생을 가르치던 ‘특수교사’였으니까 시종일관 ‘선생님’으로 호칭했을것이고 두 사람이 함께 신인화가의 그림을 보면서 나누는 대화에서 자연스레 화가의 동생을 가르치던 어린시절 추억담이 나왔을 것이다. 헌데 그것을 현장에서 우연히 엿들었을 다른 동료 화가라던가 미술계 인사들이 무슨 생각을 하게되었을까 ?
“ 이봐, 좀전에 그 교수(?)말이야. 어느대학 미대교수인지 아는사람 없어 ? ”
“ 누구 ? 아까 그 OOO 화백(* 신인화가. 자폐학생의 큰누나)과 대화나누던 그 여
선생 말이야 ? 보니까...제법 교양있어 보이던 중년부인이던데 ? ”
“ 그러게말야. 지금까지 한번도 본적없는 화가고 교수인 것 같은데...대체 어느대학
교수였지 ? ”
그런 신인화가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어린시절 이야기도 나누고 하니까 그곳에 있던 다른 선후배 화가나 미대교수등 미술계 인사들은 어떤 숨어있던 무림의 고수라도 본 느낌이라도 받은것일까. 여하튼 그 한참뜨는 모 신인화가가 시종일관 ‘선생님’이라 부르니. 대체 어느 무림에 숨어있든 은자(隱者)였고 고수(高手)였단 말인가. 신인화가의 전시회에 참석한 다른 미술계 인사들이 한바탕 혼란스러워지는 한 장면이 되었던것일까.
그런식의 이야기를 꾸며내고 얼마쯤 지나서였을까. 광희가 아파트 단지 앞에서 광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경환네 가족은 아직 압구정동 OO아파트 단지에서 살고있던 시절이긴 한데, 여하튼 뭔가 심상찮고 심각한 분위기의 광희. 동생을 노려보며 따진다.
“ 최광일 !!! ”
허나 아직 심각함을 깨닫지 못하는걸까. 광일은 그저 멍한 표정으로 제 누나를 바라보았고 누나가 따져든다.
“ 넌 도대체 엄마가 몇이니 ? 도대체 몇 명인거야 ? 아니면 니네 엄마가 무슨 직업
이 여러개라도 돼 ? ”
결국 광일이 꾸며낸 이야기가 광희의 귀에까지 들어갔나보다. 허나 너무 기가막히고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이는 누나와는 달리 동생은 그저 쭈볏거리기만 했다.
“ 언제는 엄마를 뭐 서울대(이화여대도 아니고)나온 간호사라고 하더니...언제는 또
무슨 선천성 심장병 애들 치료해주러 미국에 갔다...그러다 이제는 뭐 ??? 미대교
수 ??? ”
정확히는 광일은 ‘자폐아 특수교사시절 가르치던 학생의 누나 전시장에 갔다가 그곳에서 미술계 인사나 숨어있던 고수쯤 되는걸로 오해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만들어낸것이지만 어차피 그게그거 아닌가. 게다가 이 모든게 다 광일이 스스로 꾸며낸 이야기일진대 그런걸 세세히 따지는 것 자체가 별 의미가 없다. 어쨌든 중요한건 한동안 서울대 나온 간호사에 선천성 심장병 아이들 치료해주러 미국까지 가셨다는 거짓말을 했던 광일이 이제 한술더떠서 무슨 미술선생으로 오해를 받더라는 이야기까지 만들어낸 것 아닌가. 광일의 거짓말이 누나 광희로선 그저 기가차고 어이가 없어 거듭 이렇게 동생을 나무랄뿐이다.
“ 게다가 거짓말을 하려면 차라라 앞뒤나 좀 맞게 그럴듯하게 꾸며내던가 하지...
언제는 간호사라고 했다가 언제는 또 장애인 특수교사라고 했다가...이번엔 또 뭐
??? 무슨 어디가서 미대교수로 오해를 받아 ? 대체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구
!!! 아니 도대체 상식적으로 장애인들 가르치는 특수학교 선생님이 미대교수로 오
해를 왜 받니 !!! 도대체가 말이지 !!! ”
광희가 다시 광일을 아파트 단지앞 공터로 데리고 갔다. 어차피 집안에서 하기엔 여러 가지로 난감한 이야기이니만큼 그곳에서 다시 동생과 단둘이 이야기를 좀 해보려 한 것이다.
“ 다른건 둘째치고라도...도대체 거짓말을 해도 좀 일관성있는 앞뒤가 맞는 거짓말이
라도 하던가 하지...언제는 무슨 간호사고 장애인 특수교사고 어쩌구 하더니 난데없
이 도대체 미대교수는 또 뭔데 ? ”
언재는 간호사라고 했다가 언제는 장애인 특수교사(선생님)라고 했다가 이번엔 오해를 받았든 실제상황(?)이든 이제 또 미대교수까지 나오니 실제로는 전라도 출신의 고등학교도 제대로 졸업못한 평범한 전업주부인 자신들의 어머니 가인의 실체와는 너무나 동떨어지고 터무니도 없을뿐더러 거짓말 자체부터가 너무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라 광희는 들으면 들을수록 기가차기만 해 동생을 이와같이 추궁하고 있다. 광일은 무안한 가운데서도 나름 해명이랍시고 이렇게 덧붙인다.
“ 누나 그런게 아니라... ”
“ 그런게 아니라 뭐 ??? ”
“ 어쨌든 충분히 있을수 있는 이야기잖아. 어쨌든 그렇게...장애인 특수교사를 하는
선생이 아이 가르치는 동안에는 그 집 누나들이 애를 좀 돌봐주도록 한건데...그렇
게 그 집과는 친분이 쭉 있어온거고...그 집 누나들은 어쨌든 장애인인 자기동생
가르치는 선생님이라서 그냥 자기들도 ‘선생님’이라 부른건데... ”
“ 그런데 그렇게 자폐아인 자기동생 가르치는 특수교사를 나중에 신인화가가 되어
전시회 초청장을 보냈는데 그래서 그 자리에 참석한 특수교사를 ‘선생님’ 어쩌구
하며 반겨하자 그곳에 참석한 관계자들이 그 특수교사를 실은 (그 신인화가의 옛
은사쯤 되는) 미대교수인걸로 오해했다 ??? ”
광일로선 어쨌든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가 너무 허술하고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로 여겨지는것에 어떤 억울함이라도 생기는지 다시한번 그 스토리텔링을 설명한것이고 허나 어차피 이 모든 것이 다 거짓말이기에 광희는 그런 동생을 한심하다는 바라보며 이렇게 말한다.
“ 최광일... ”
“ 왜 누나 ? ”
쭈볏거리며 답하는 동생. 광희의 말이 이어진다.
“ 난 솔직히 니 지금 그 이야기 듣고 무슨 생각이 드는지 아니 ? ”
누나의 의도를 알 수 없어 의아하게 바라보는 동생. 광희는 동생이 한층 더 한심하고 어처구니 없다는 듯 이렇게 말한다.
“ 딱 니 수준에서 나올법한 허접한 삼류소설이다. 알겠어 !!! ”
그리고는 자리를 박차고 먼저 집으로 들어가려는 듯 발걸음을 옮기는 광희. 광일은 괜시리 속이 상하는지 공터의 흙무더기만 한번 공연히 발길로 걷어찬다.
다시 시간이 흘러 광일도 고등학생이 되었다. 그래도 이쯤 자랐으면 제 엄마의 실제 신분을 부끄러워해서 무슨 서울대 나온 간호사가 어쩌구 이딴 거짓말은 더 안할때도 되긴 했는데 허나 광일의 자격지심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것일까. 이때는 또 한술더떠 이런일이 있었다.
굳이 책임(?)을 돌리자면 광일에겐 대략 학년초쯤에, 정확히는 새학기가 시작되고 한달여쯤 지났을 무렵에 꼭 이런식으로 꼬치꼬치 캐물어오는 녀석이 한두명은 있었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무슨 ‘신상털이’라도 할 작정인것인지. 원래 광일이 말수도 적고 사람들과 잘 못 어울리는 성격이다보니 되려 그런 반아이에 대한 궁금함에 그런식으로라도 다가오는 것으로 이해할수도 있지만 솔직히 광일도 따지고보면 남들 다 어울리는것처럼 가끔 장난도 치고 실없는 농담도 하고 즐길건 다 즐기면서 지내고 싶은 그런 보통아이였을뿐이다. 다만 성격탓인지 아니면 그 외 다른 문제가 있는것인지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던것일뿐. 그래서 이런 녀석에게 무슨 궁금함이라도 생기는지 꼭 학년초 한달여쯤 지났을 때 생기는 청문회 질의하는 국회의원마냥 꼬치꼬치 캐물어오는 녀석. 그렇다고 광일이 자기엄마 신분을 부끄러워해서 꾸준히 그런 거짓말들을 지어낸 것이 정당화되거나 그런 일련의 일들에 대한 책임을 꼬치꼬치 묻는 반아이 탓으로만 돌릴수는 없는 일이지만, 역시 고등학교에 들어와서도 또다시 곤혹스러운 일을 겪게된 광일이 이번엔 이런식으로 응수한 것이다.
“ 우리엄마 실은 ‘마당발’이야. ”
오히려 요즘의 인터넷 은어나 영어단어 활용해가며 이상한 조어나 잔뜩 만들어내는 젊은 친구들은 잘 모르는 단어일수도 있는데, ‘아는사람이나 사귀는 사람이 많고 돌아다니는데가 많은 사람’을 뜻하는 순 우리말인 마당발. 이 시절 고등학생쯤 되면 충분히 알 수 있는 고유어이긴 하다. 헌데 이번엔 뜬금없이 서울대 나온 간호사라는 제 엄마에게 난데없이 ‘마당발’이란 호칭까지 붙이는 광일. 꼬치꼬치 캐물어온 친구가 거듭 의아해서 이렇게 물었다.
“ 마당발이라니 ? 그건 또 갑자기 무슨 소리야 ? ”
광일은 그렇게 자신이 상상으로 만들어낸 ‘가짜엄마’가 제법 뿌듯하고 자랑스럽기라도 한 듯 으쓱해하며 이런식으로 덧붙였다.
“ 그러니까 왜...드라마나 영화 같은거 봐도 그런 사람 하나쯤 있잖아. 어딜 가서도
처음 만나는 사람하고도 쉽게 친화력 있게 잘 어울리고 어디가서 모임에서도 꼭 리
더나 선생님 같은 역할을 하는 그런 사람... ”
요즘으로 치면 ‘왕언니’ 같은 역할을 하는 그런 여자라고나 할까. 다만 ‘왕언니’란 단어도 이때보다는 훨씬 뒤에나 본격적으로 쓰여지는 표현이고 ‘리더(leader)’라는 영어단어야 중학생 정도만 되어도 알 수 있는 영어단어이긴 하지만 일상에서 대화를 나누거나 어떤 용어로는 아직 잘 안 쓰여지는 표현이다. - 가령 계모임 대표 같은 경우엔 계주(契主)같은 표현을 썼을 것이다. 여하튼 그렇게 실제로는 전남 출신의 고등학교도 제대로 졸업못한 제 엄마 가인을 이번엔 난데없이 어느 모임에 가서도 리더나 선생님 같은 역할을 하는 그런 ‘분위기 메이커’로 둔갑을 시키다니. 이쯤되면 진짜 최광일이란 학생에게 실제로 낳아준 가인이란 어머니 말고 어디 또 ‘가짜엄마’가 따로 있기라도 한것인지 헷갈리기까지 할 지경이다. 역시 이런식의 이야기까지 얼마 지나지 않아 광희에게까지 들어가게 되었고 광희가 다시 동생을 다그쳤다.
“ 광일이 너 진짜 도대체 왜 그러니 ? 너 우리엄마 아들이 맞기나 한거야 ? 도대체
왜 그러는건데 ? ”
“ 누...누나... ”
아무리 그래도 이런 이야기까지 누나 광희 귀에 들어간다는 것은 좀 너무하지 않나 싶어 솔직히 광일도 조금 화가났다. 허나 광희는 정말 이대로 더는 안되겠다는 듯 집안이건만 거듭 동생을 다그치며 나무란다.
“ 최광일 너 진짜...엄마가 우진아파트 사실 때 왜 만날 그렇게 아파트 단지 한구석
에서 서글피 우신건지...그 사연은 알고 이러는거니 ? ”
광일이 자꾸 ‘단장의 미아리고개’니 ‘한많은 대동강’이니 대개는 6.25나 실향민의 아픔을 다룬 그런 노래를 유치원도 다니기전부터 즐겨부를 때 ‘애기들은 그런노래 부르며 못쓴다’고 나무라신뒤 기어이 ‘아이교육 어찌 시켰기에 저모양이냐 ?’며 당신의 며느리 가인을 회초리치시기까지 했던 할머니. 헌데 따지고보면 가인이 그때 그렇게 서럽게 운 진짜 이유는 단지 시어머니한테 맞았다는 아픔이나 슬픔때문은 아니었다.
“ 아무리 그래도...그 먼 진도에서 혼자몸으로 시집와서...어디 무슨 붙잡고 하소연할
친구나 친지 하나 없어서...그렇게 혼자 단지 한구석에서 구슬피 울 수밖에 없었던
게 우리 어머니야. 그런데 그런분을 두고 뭐 ??? 마당발 ??? 가는 계모임마다 리
더역할을 하고 선생님을 해 ? 이게 진짜 보자보자하니까... ”
서울과 진도라는 단순한 거리상의 이유도 있지만 실제 가인은 고향에서도 홀어머니 밑에서 외동딸로 자란 몸이라 친척도 거의 없었고 – 심지어 경환과의 결혼식때도 올라올수 있는 친척이 자신의 친정어머니의 사촌,오촌뻘 되는 친척 몇 명 정도였다. - 학교때도 그나마 좀 가까이 지내던 친구 두어명 제외하곤 가인 역시 친구가 그리 많지않았다. 그러고보면 광일의 딱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말솜씨도 어눌한 것이 그 엄마 가인을 닮은것같긴 한데, 반면 광희는 뭐 그렇게 성격이 활발하거나 싹싹한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그런대로 학교에서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그런편에 속한 아이였다. 그런걸보면 광희의 경우엔 무뚝뚝한 성격의 아버지나 혹은 말솜씨 어눌한 가인보다는 오히려 조부모쪽 성격을 많이 닮았다고 봐야하는것인지. 여하튼 실제 가인의 성격은 말도 제대로 못하고 친구도 거의 없는 그런 여자일진데 그런 여자를 두고 무슨 자기엄마가 마당발이라느니 가는 계모임마다 늘 선생님노릇,리더노릇을 했다느니 말주변이 좋다느니 참 너무 기도 안차는 거짓말인셈이다. 어찌보면 무슨 서울대 나온 간호사에 장애인 특수교사에 미대교수로 오해받은 해프닝까지 있었다는 그런류의 거짓말보다 한술 더 떠는 그런 fake storty인 셈인데 그래서 광희는 생각할수록 기가막혀 동생 광일의 등판도 쳐가고 꿀밤까지 툭툭 쳐가며 거듭 거세게 나무라고 있다.
“ 도대체가...마당발은 무슨 마당발이야 ? 말도 제대로 못하고 전라도 사투리 짙어
친구도 별로 없는 그런 우리엄마를 보고...대체 무슨 마당발이냐고 ? 난데없이 거
기서 마당발이 왜 나와 !!! ”
“ 이것이 대체 뭔소리다냐 ? ”
장이라도 보다 왔는지 그제서야 집안으로 들어선 가인이 하필 그 순간을 목격하고 말았다. 광희도 광일도 순간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가인이 어디서부터 이들 남매의 대화를 듣고 목격했는지 알수가 없어 광일까지도 바짝 긴장이 된 가운데 가인은 일단 들고있는 장바구니를 부엌쪽에 대충 내려놓고 광희를 불렀다.
“ 광희는 일단 방으로 들어오너라. ”
그렇게 광희를 부른 가인. 광일도 혹시 몰라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불안하게 엉거주춤 서 있는 가운데 일단 분위기 자체가 광일까지 부를 기세는 아닌 듯 해서 긴장은 조금 풀려지고 있었다. 확실히 방안에서 가인은 이미 회초리를 들고 큰딸 광희만을 닦달해대고 있었다.
“ 광희 너는 그래 대체 나한테 뭣이 그리 불만이다냐 ? ”
“ 어...엄마 ??? ”
대체 엄마가 자신과 동생의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듣게 된것인지를 알수 없어서 광희는 한층 더 당혹스러운 모습으러 어쩔줄 모르고 있고 가인의 성난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 게다가 뜬금없이 마당발은 뭔X의 마당발이여 ? 이 에미가 뭔 마당발이여 ? 이
에미가 주위에 친구없고 그래서 늘 혼자 쓸쓸히 지내는게...그게 그렇게 불만이었
었냐 ? 그래서 애꿎은 니 동생만 그리 구박하고 있었던겨 ? ”
확실히 가인은 그 앞의 맥락은 모른채 ‘마당발’ 어쩌구 하며 광일을 때리고 꼬집고 하는 모습부터 목격한 듯 하다. 그럼 이게 또 일이 단단히 잘못 꼬일대로 꼬이고 엄마 가인이 자신에게 또 오해하기 십상인 그런 상황이 아닌가. 일이 이 지경이 되자 광희는 긴장과 불안 이전에 다시금 억울한 감정이 치솟을 수밖에 없다.
“ 너...이 엄마가 그래 그 먼 전라도에서 여기까지 시집와서 친구,친척 없이 혼자 사
는게 그리도 억울하고...이 어미가 그리도 못나고 바보같은 아줌마로 보였다냐 ? 그
래서 그걸 속으로 한으로 품고 있었던겨 ? 그래서 그러는것이여 !!! ”
“ 어...엄마... ”
일단 ‘마당발’ 자체가 여하튼 주변 친구나 인맥이 많은 그런 사람을 뜻하는 우리나라 고유어이기 때문에 가인의 출신이나 학력여부와 관계없이 그런 단어뜻을 충분히 알만한 나이이긴 하다. 허나 그래서 더더욱 마치 자기 딸이 제 엄마의 그런 부분이 불만인것처럼 말하는 것으로 오해한 상황 아닌가. 그래서일까. 이제는 회초리를 칠 힘도 없다는듯 들고있던 나뭇가지까지 내팽개쳐버리고 가인은 한바탕 설움을 늘어놓는다.
“ 어이구 속상혀라...어이구 내팔자야. ”
“ 어...엄마... ”
“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즈그 엄마 천하 무식한 외톨박이인게 그게 그리 불만이고
한맺힌 기집이...엄마는 무슨놈의 엄마여 !!! ”
“ 엄마...그게 아니라...그게 아니라... ”
이거 또 내가 전부 뒤집어써야 하나 그걸 생각하니 광희 역시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그러고보면 광일이 자기 엄마에 대해 – 그것도 마치 전남출신에 학력도 일천한 그런 엄마가 아닌 어디 똑똑하고 잘난 가짜엄마라도 따로 있기라도 한양 – 말도 안되는 거짓말을 하고 돌아다니는 것을 책망하다 그러다 참다못해 동생을 때린날. 그게 벌써 광희가 중학교 2학년때 일이니 어느덧 대략 4년전일이다. 허나 그때도 가인이 자신이 아무런 이유없이 동생을 구박하는 ‘나쁜누나’라도 되는양 회초리를 쳤음에도 차마 광일의 그러고 돌아다니는 짓거리까지 엄마한테 말할수 없어 억울하지만 자신이 다 뒤집어 썼던 그런 광희가 아닌가. 근데 이제와서 또 – 정작 제 엄마의 출신이나 학력 문제를 부끄럽게 여겨 말도 안되는 거짓말을 하고 돌아다닌 아이는 따로 있는데 – 자신이 그걸 다 뒤집어 써야한단 말인가. 허나 광일이 엄마한테 혼날 문제도 문제거니와 그 거짓의 내용이 더더욱 기가막힌것들 뿐이라 그로인해 엄마가 상처받을까봐 더더욱 그런 이야기들을 꺼내지도 못하고 있는 광희. 그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채 안타까운 속만 태우고 있는데, 가인은 가인대로 한바탕 자기 신세를 한탄하는 사설을 늘어놓는다.
“ 아이고 내 팔자야...아이고 무슨놈의 팔자가 진짜 이리도 서럽다냐. ”
“ 엄마... ”
“ 세상에 그래도...시어머니가 비록 학력도 출신도 일천허지만...그래도 마지못해 아
들 열명 안 낳아주면 쫒아낸다...그리 협박하면서 허락해준 결혼인데...근데 하필 첫
애가 아들이 아니고 딸이라 혹시 그거 책잡혀서 쫏겨날까 그리 불안했는데... ”
“ 엄마... ”
“ 그래도 둘째가 다행히 아들이라 안심하기도 했고...게다가 예부터 첫째는 살림밑천
이라는 말도 있어서...그래도 첫애가 딸이니 어릴때는 몰라도 조금씩 나이가 들면
지 어미한테 든든한 버팀목정도는 되어주겠지 그것 하나만 믿고 지금껏 살아왔는데
이게 대체 이제와서 무슨 꼴이야...세상에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경우가 다있다냐
... ”
확실히 가인은 그런쪽으로 기대를 하고 큰딸 광희를 키워왔던 것 같다. 아직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했던 시절 첫애가 딸이라서 시부모님한테 약간의 눈총은 피할지언정 ‘첫딸은 살림밑천’이란 옛말도 있으니 최소한 나중에 아이가 자라면 자기 엄마 힘들고 어려울 때 곁에서 지켜주는 든든한 버팀목정도는 되어주는 그런 마음 든든한 모녀지간. 그 정도는 바라고 키워온 딸이건만 이제 그 딸이 어느덧 고등학생이니 철들만큼 철도 들고 어느정도 제 엄마 마음은 이해해줄수 있는 그런 나이가 되었는데 (적어도 가인이 오해하기로는) 이제보니 세상 말도 안되는 이유로 자기 엄마를 부끄럽고 창피하게 여기는 그런 천하 몹쓸 딸년이 아니던가. 그걸 생각하니 가인은 억장이 무너지는 것이다. 따라서 광희는 더더욱 구체적인 진상은 말도 하지 못하고 안타깝게 제 엄마를 바라만 보고 있고 가인은 한바탕 울며불며 신세타령을 하더니 들고있던 회초리까지 내던진채 이렇게 소리친다.
“ 시끄러 !!! 이딴식으로 할거면 당장 내 앞에 나타나지도 말고 내집에서 나가버려
!!! 세상에 그것도...지 에미 학력이나 출신을 갖고 뭐라고 그러는거면 내 그것까진
쪼까 이해해줄 마음이 생길까 말까인데...시상에 그러것도 아니고...세상에 즈그 엄
마 천하에 친구도 친지도 하나없는 세상 외톨박이라고...그걸 흉보고 그걸 뭐라하고
다녀 !!! 이 천하의 몹쓸 계집아 !!! ”
“ 엄마아아... ”
광희는 너무나도 속상하고 분해 울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차마 자신보다 앞서 서럽게 신세타령을 하는 가인 앞에서는 그럴수 없어서 방에서 바로 뛰쳐나가서 거실에서 혼자 한바탕 서럽게 대성통곡을 했다. 그러고보면 조금전까지 자신도 가인에게 야단맞는 것 아닌가 불안해하던 광일은 상황이 그렇게까진 돌아가지 않는 것 같자 얄밉게도 이미 제방으로 들어가버리고 보이지도 않는데, 가인은 가인대로 방안에서 딸 광희는 그녀대로 거실에서 각자 자신의 신세와 속상하고 서러운 처지를 한바탕 눈물과 울음으로 서럽게 토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 아니, 당신 왜 그러고 있어 ? 무슨일이 있어 ? ”
저녁때 퇴근을 해 잠자리에 드는 경환에게도 아내 가인이 우는 모습이 눈에 안 뜨일수가 없었다. 그러고보면 1969년에 결혼 어느덧 결혼생활 20년이 다 되어가는 이들 부부이기도 한데 지금껏 살면서 이런저런 – 결혼전에는 확실히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 우여곡절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그런대로 무난하게 아이 넷을 낳으며 살아온 부부. 헌데 오늘따라 한밤중에 혼자 몰래 흐느끼는 아내의 모습이 결국 경환의 눈에 뜨이고 만 것이다. 의아하고 걱정되어 묻는 경환에게 차마 모든 것을 말할 수가 없어서 가인은 대충 이렇게 둘러댄다.
“ 아...아니여라...그냥 좀...몸이 좀 아파서 그런것이지라. ”
“ 아니, 어디가 아픈데 ? 아프면 병원엘 가보던가 ? ”
“ 아...아녀라. 그런 것이 아니고...가벼운 통증이 좀 있는데...약먹으면 나을텐께 너
무 걱정하지 마셔라... ”
그리고는 집안에 평상시 준비해놓는 상비약이라도 한알 챙겨먹으려는 핑계로 자리를 뜨는 가인. 거실 사물함에 있는 약 한봉지를 적당히 꺼내 먹는척 하면서 가인은 거실 창가로 가서 어두운 바깥경치를 보며 이런저런 상념에 잠긴다. 물론 눈물이 다시금 안 쏟아질수가 없다. 가인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쥔다.
- 8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