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청 실 홍 실
명숙은 가인에게 한껏 모욕을 주고 떠났고 크게 상처받은 가인은 다음날 회사에서 경환을 만나 울며불며 이 일을 말했다. 경환도 화가 많이 났는지 일단 가인을 달랜뒤 자신이 직접 명숙을 만나 항의했다.
“ 아무래도 제가 사람을 잘못본 듯 합니다. ”
평상시 무뚝뚝하고 침착한 그의 성격답지 않게 지금은 한껏 격앙되어 있는 목소리다. 경환이 이렇게까지 화를 낼것이라고까진 명숙도 예상을 못했는지 다소 당혹스러운 기색을 보이고 있었고 경환의 항의가 이어진다.
“ 대체 그쪽이 가인이를 왜 만나요 ? 도대체 그게 무슨 무례한 짓이냐구요 ? ”
“ 이것보세요 !!! ”
허나 명숙도 명숙대로 나름 적반하장이라는 생각이라도 드는지 사뭇 당당하게 나오며 경환에게 이와같이 말한다. 명숙도 화가 나긴 난 모양이다.
“ 대체 지금 누구편을 들고 있는거에요 ? ”
어쨌든 경환이 선을 본 상대는 난데 대체 누구편을 드느냐는 명숙의 항의. 경환이 그런 명숙에게 맞받아친다.
“ 편이라니 지금 무슨말이 그래요 ? 아닌말로 우리가 어디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사
이이기라도 한가요 ? 그냥 선자리 한번가진 그게 전부이잖아요. ”
하긴 그렇다. 아무리 아직 연애보다는 중매가 보편적인 시대라고 하지만 무슨 조선시대마냥 상대방 얼굴도 모르는채 시집,장가 가는 그런 시대는 분명 아니고, 만약 선을 보았다가 상대가 마음에 안들거나 혹 사귀는 사람이 따로 있다면 사실대로 부모님께 말씀드리면 아주 완고한 집안이 아닌 다음에는 그래도 자식손을 들어주는 경우가 더 많았을 그런 시대다. 헌데 그냥 선자리 한번 나가본게 전부일뿐 결혼을 하는것도 연애를 하는것도 아닌 명숙과 경환의 사이에서 명숙이 마치 경환과 장래라도 약속한 무엇이라도 되는양 나오는것도 과하다면 과잉된 행동인 것이 분명하다. 허나 명숙도 명숙대로 지지않겠다는 듯 따져든다.
“ 이것봐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어쨌든 선 본 사람은 난데...전 이렇게 무시하고
모욕을 주어도 된다는 이야긴가요 ? 대체 그쪽은 그 가인인가 뭔가 회사 사환에 불
과한 여자아이만 중요하고 난 안중에도 없다 그 이야기에요 ? ”
사실 여자 입장에서 봐도 무슨 맞선 한두번 나갔다가 딱지좀 맞았다고 평생 무슨 수절과부처럼 살아가야 하는것도 아니고, 나중에 다시 좋은 혼처가 나오면 다시 그쪽을 소개받아 만나면 그만인 시대이긴 하다. 그렇다고해서 여자가 선자리 나가 여려번 딱지맞은 것을 무슨 자랑거리라고까지 동네방네 떠들고 다녀도 되는 그런 시대이기까지 한것도 분명 아니지만 여하튼 명숙은 명숙대로 나름 이대로 경환에게 차이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이렇게 나오고 있는 것이다. - 게다가 그 상대가 고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일개 지방출신 사환 여직원이라고 할진대 이화여대 나온 간호사 입장에서의 자존심과 자부심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인지 명숙의 억울한 항변이 거듭된다.
“ 어차피 이렇게 된거 그쪽이나 입장을 좀 분명히 해주시죠. 저랑 그 가인인가 뭔가
하는 아이랑 대체 어느쪽인거에요 ? ”
경환은 불쾌한 듯 헛기침을 한번 했고 명숙의 항의가 이어졌다.
“ 게다가 그러고보니 그날 선자리에서 제가 분명히 물어봤었죠 ? 혹시 다른 사귀는
여자가 있거나 하지 않냐고 ? 그런데 그때는 그렇게 단호하게 ‘없다’고 하던 사람
이...이제보니...이제보니 내가 속아도 단단히 속은거잖아 정말 !!! ”
사실 경환은 그날 시인도 부인도 아닌 애매한 입장을 취한것인데 명숙이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듯 하다. 아니면 경환의 말뜻을 자신이 그냥 그런식으로 받아들였던가. 여하튼 경환은 거듭 이 안명숙이란 여자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드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고 급기야 이렇게 나온다.
“ 아무래도 제가 여러 가지로 사람을 잘못본 듯 합니다. ”
그러고보면 처음부터 키도작고 못생긴 여자라서 마음에 들지 않았던 안명숙이 아니던가. 허나 어쨌든 이미 사귀고 있던 가인이 그렇게 문전박대를 당한 상황에서 어쩔수 없이 맞선을 보고 이후 자신의 입장을 어찌 정리해야할지 마음의 결정을 제대로 못 내리고 있었던 것 뿐인데 일이 이렇게되니 경환도 더 이상 망설이거나 주저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드나보다. 경환의 단호한 어조가 이어진다.
“ 저한테 더 이상 연락하지 마시죠. 이제 그만 만나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
“ 뭐라구요 ? ”
사실상 ‘그만 만나자’는 소리를 입에 담고있는 경환. - 사실 맞선 한번 본 것 정도를 제외하고는 만나는 사이였다고 볼수도 없는 관계이기도 하지만. 명숙이 경환의 이 말에 더욱 악에 받쳐 나온다.
“ 이것봐요. 날 이렇게 모욕주고도 괜찮을 것 같아요 ? ”
나름 무슨 뾰족한 다른수라도 있긴 있는것인지 아니면 그저 단순한 오기로 해보는 소리인지 이렇게 나오고 있는 명숙. 경환은 거듭 단호한 어조로 ‘앞으로 내게 연락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그 자리를 떠났고 명숙은 너무나 분한지 그 자리에서 테이블을 발길로 걷어차기까지 했다. 20대의 젊은 여성이 손님들 있는 다방안에서 이런 행동까지 하는 경우는 웬만해선 잘 없을터인데. 다만 조금전 그 심각한 분위기를 혹 곁눈질로 지켜보기라도 했다면 뭔가 심각한일이 벌어지고 있는 젊은 남녀간임을 눈치채지 못하진 않았을터. 뭔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안명숙에게 손님과 종업원들의 시선이 향하고 있고, 명숙은 여전히 분을 못참고 한참을 식식거리다 한참뒤에나 다방을 나왔다.
그러나 일이 이렇게 되자 오히려 명숙이 독기를 품었다. 이후 사무실로 몇 번 연락을 취하고 회사앞까지 찾아가보기도 했지만 경환은 만나주지도 않았고 전화를 받아주지도 않았다. 명숙이 작심하고 퇴근시간 맞춰 회사앞까지 가서 기다린적이 두어번 있긴 했는데 역시 경환은 단호하고 야멸차게 내치면서 다른 동료들에게도 ‘모르는 여자일뿐’이라고 해명할 따름이었다. 허나 일이 이렇게 되자 점점 더 악에 받친 명숙이 나름의 계책을 하나 짜냈다.
자신의 이화여대 동기생들을 소집했다. 이때 이화여대 간호학과 한학년 정원이 대략 40명 남짓이던 시절인데, 명숙의 동기생들은 어느덧 졸업하여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몇몇을 제외하곤 아직 대다수가 현역 간호사로 재직중이었고 개중 몇몇은 어느덧 선을 봐서 벌써 결혼을 하거나 연애결혼을 해서 골인한 경우도 있었다. 여하튼 그렇게 1960년대 후반에 현역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이대출신 간호사 대략 20여명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안명숙은 그러고보면 학창시절 친구도 제법 많고 성격도 적극적이었는지 나름 리더역할 까지는 아니더라도 분위기 메이커 역할 정도는 하는 그런 동기생이기도 했다. 그런 명숙의 비상소집령이라서인지 안명숙의 부름에 40명 동기생중 원래 명숙과 별로 안 친했거나 연락이 되지 않거나 시집을 가서 외국에 나가 살고있는 동기생 그 정도를 제외하고 20여명 정도가 한자리에 나온 것이다. 이대출신 현역 간호사 20여명이 한자리에 모여 대체 무슨 음모(!)를 꾸미려는것인지. 모임장소 분위기는 이미 심상찮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벤트 장소는 일단 자신들이 졸업한 학교인 이대 안 모처로 정했다. 사실 이때만 해도 단체라면 모를까 개인이 이벤트를 위해 식당이나 커피숍 같은곳을 빌리기는 쉽지 않은때다. 게다가 그것도 사실상 여자가 남자에게 먼저 프로포즈를 하겠다는 것 아닌가. 아직 문화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쉽지 않은 시절임에도 이런일을 강행하는 것을 보면 그만큼 안명숙이 달아올라 있다는 이야기도 된다.
“ 문을 열고 그때 최경환씨가 들어서면 너희가 쭉 일렬로 늘어섰다가 맞이해줘. ”
일단 명숙이 구상하고 있는 프로포즈 이벤트가 대략 그와 같았다. 자신의 이대 동기생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아놓고 이벤트 장소에는 아직 크리스마스 철도 아닌데 알록달록 색지라던가 풍선 이런것들을 여기저기 붙여놓고 동기생들은 화려한 복장과 고깔모자를 쓰고 경환을 박수로 맞이하는 것이다. 이벤트 장소 한가운데엔 애써 준비한 고급스런 케익과 와인이 준비되어있고 동기생들이 그곳으로 최경환을 안내하면 그곳에서 명숙이 경한에게 정중하게 ‘제 마음을 받아달라’는 의미의 큰절을 올리는 것이다.
“ 선곡은 뭘로할까 ? 배경음악 말이야. ”
최경환이 입장할 때 틀 배경음악이라던가 최경환이 들어설 때 동기생들이 외칠 구호로 어떤게 적절할지등의 문제를 놓고 다소 논란이 있었을지언정 안명숙과 그녀의 이대 동기생들의 이벤트 준비는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모월모일 토요일 오후 네시로 장소를 정하고 그곳으로 최경환이 오게하는 것이다. 장소는 물론 애초 생각해 놓은대로 이대안에 있는 모처. 헌데 중요한 것은 최경환을 그곳까지 오게 할수 있느냐는 문제다. 자신이 직접 찾아가는 것은 일단 말이 안되고 동기생들은 아직 경환의 얼굴을 모른다. 게다가 당사자든 당사자 친구들이든 너무 자주 회사로 찾아가는것도 아직 말단사원인 경환의 입장과 처지만 난처하게 만드는 일일수도 있어서 명숙은 다른 꾀를 냈다. 다름아닌 가인에게 직접 전화를 하는 것이다. 어떻게보면 가인에게 ‘양심이 있으면 최소한 이 용건을 최경환에게 꼭 전해주기 바란다’는 압박용이면서 그런식으로 가인을 우롱하는 1석2조의 효과를 보는셈이라고나 할까. 게다가 만의하나 가인이 이 일을 전해주지 않을 경우 그 책임이 결국 자신에게 돌아올것이니 가인 입장으로서도 이래저래 곤란한 일이 안될 수가 없다. 결국 난처해진 가인이 경환에게 명숙이 자신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와 최경환씨가 모월모일 토요일 오후 네시에 이화여대 모처로 꼭 와주었으면 한다는 당부를 하더라는 그런말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가인도 가인대로 걱정과 초조함에 이렇게 덧붙인다.
“ 어찌하실라요 아저씨 ? ”
가인은 여전히 열 살많은 경환을 ‘아저씨’라고 부르고 있었고 왈칵 울음이라도 터트릴것만 같은 눈매가 되어있는 그녀의 표정. 경환도 골치가 아픈 듯 두손으로 머리를 싸맸다. 이미 ‘그만 만났으면 한다’는 말을 분명히 전했는데 대체 왜 이런일을 벌인단 말인가.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가인을 통해 일부러 이런말을 전하고 게다가 한술더떠서 자신이 졸업한 학교인 이화여대로 찾아오라는 소리까지 했다면 안명숙이 뭔가 심상찮은 일을 벌이고 있다는것쯤은 충분히 짐작할수 있는 것 아닌가. 며칠을 고심한 끝에 문제의 토요일. 퇴근시간이 다가올 무렵. 경환이 돌연 가인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덮석 잡았다.
“ 가자 가인아 !!! ”
“ 가다니요 ? 갑자기 어딜 간단 말이요 ? ”
아무리 토요일이고 그리고 퇴근시간이 다가온다지만 정확히 아직 ‘퇴근’을 할 타이밍은 분명 아니건만 경환도 확실히 연차가 쌓여가니 조금씩 배짱과 요령이 생기는것일까. 상황이 상황인지라 가인이 더욱 불안과 당혹감에 경환을 바라보고, 설마 자신보고 같이 그 이대인지 어디인지를 가자는 소리는 아니겠지. 순간 별의별 생각이 머릿속에 다 드는 그녀인데, 정작 경환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 우리 여행가자구 가인아. ”
“ 어디로요 ? 갑자기 무슨 여행을 갑자기 간단말이오 ? ”
아무리 그래도 사전의 어떤 준비나 계획도 없이 여행을 떠난다는 것. 옛날이나 지금이나 분명 쉽지않은 일인것만은 분명하다. 게다가 경환도 막상 그렇게 제안을 하고는 행선지는 아직 정하지 못한 듯 한데 결국 퇴근시간이 되자 경환이 그 몇십분 사이에 구상을 한게 있는지 다시 이렇게 말한다.
“ 우리 진도로 갈래 ? ”
“ 진도를 간다고라 ? ”
진도는 다름아닌 가인의 고향 아닌가. 게다가 바로 가인이 고등학교 2학년때 17세 나이로 학교를 그만두고 떠나온곳이기도 한곳. 사실 아직 지리적으로나 교통편으로 보나 서울서 진도까지가 가기 쉽지 않은 시대이기도 하지만 그래서인지 가인은 그렇게 고향을 떠나오고나서도 설이나 추석에조차도 내려가보기가 쉽지 않았다. 사실상 2년여전 고향 진도를 떠난뒤 아직까지 한번도 내려가본일이 없다고 봐야할 가인. 헌데 지금 경환이 그 진도를 가자는 것 아닌가. 이 일을 대체 어찌 받아들여야 하는가.
“ 아저씨...대체 아저씨가 왜 저랑 진도를 ? 진도에서 대체 뭣을 어쩌실라고요 ? ”
“ 어쩌긴...기왕 간거 너희 부모님께 인사도 드리고... ”
“ 아저씨 !!! ”
가인은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없는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태고 어머니가 진도 읍내에서 전통 된장을 만들어 팔며 나이 40넘어 본 늦둥이 외동딸 가인을 그때까지 혼자 키우며 힘들게 사셨다는 이야기쯤은 이무렵이면 경환도 익히 알고있는 사실이간 하다. 헌데 그런 가인에게 그것도 2년만에 고향에 내려가면서 그것도 경환을 데리고 부모님 – 더 정확히는 어머니에게 – 께 인사를 드린다고 ? 이건 실제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가인 어머니 입장에선 또 얼마나 황당무계한 일이겠는가 ? 아무리 ‘여자는 시집이나 잘가면 그만’인 시절이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학교도 채 졸업하지 않은 외동딸이 훌쩍 집을 떠나더니 2년동안 소식이 없다가 웬 남자를 ‘결혼을 약속한 남자’라던가 이런식으로 소개를 한다 ? 1960년대 후반의 진도가 아니라 대명천지 2020년대 서울에서 이런일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쓰러지지 않을 부모가 거의 없을 것 같다. 헌데 아직 – 교통편도 열악하고 거리도 먼 탓이긴 하나 – 고향에 한번 제대로 내려가본적도 없는 가인이 이제와서 남자를 데리고 간다 ? 아무래도 이건 아닌 듯 가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데 그러자 이번엔 최경환이 가인을 이렇게 압박해온다.
“ 그럼 나 이대로 그 이화여대 무슨실인지 거기 찾아가 볼까 ? 거기가서 안명숙 그
여자 다시 만나도 되는거지 ? 응 ? ”
거기가면 무슨 함정(?)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만약 정히 가인이 거절한다면 자신이 이대로 안명숙을 만나러 간다는 식으로 압박하는 경환. 이쯤되면 경환도 제법 능청스럽거나 전략적인면이 없지는 않은 것 같은데, 가인 입장에선 경환이 괜히 한번 해보는 소리가 아닌 것 같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까지 한다. 결국 가인이 이렇게 나온다.
“ 안되어요 아저씨. 내 죽으면 죽었지 그 꼴은 절대 못 봅니다. ”
이쯤되니 어지간한 가인도 결국 자존심이 발동하나보다. 차라리 어머니를 2년만에 뵈면서 황당무계한 상황을 만들면 만들었지 그게 차라리 이대로 경환을 안명숙에게 빼앗기는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결국 두 사람은 함께 이대로 진도로 떠나기로 한다. 어차피 아직 진도로 직행으로 가는 대중교통은 없는 시대이니 목포까지 기차로 내려가 거기서 배를 타야할 터. 우선 서울역으로 가서 목포행 기차를 타기로 한다. 토요일 오후였지만 이 시대에 딱히 관광지라고도 볼 수 없는 목포까지 굳이 가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아서인지 미리 예약을 하지 않았음에도 목포행 기차표를 사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목포행 열차를 탔다.
원래 안명숙은 최경환보고 찾아오라고 한 시간이 토요일 오후 네시였다. 퇴근하자마자 바로 찾아오기는 여러 가지로 어려울터이니 나름 여유있게 경환을 위한 시간을 잡아준 셈이기도 한데, 그러고보면 점심도 저녁때도 아닌 애매한 시간대이긴 하다. 대충 구상이 그렇게 프로포즈를 하고 동기생들과 함꼐 최경환도 있는 자리에서 저녁식사라도 할 그런 구상인가본데, ‘네시면 아무리 프로포즈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감안하더라도 저녁을 먹기엔 너무 빠르지 않냐 ?’는 친구들 의견이 몇몇 있어서 시간을 네시에서 다섯시로 한시간 늦추었다. ‘다섯시까지만 와주면 된다’는 말을 뒤늦게나마 토요일 오전에 사무실의 가인에게 전화로 전해주기까진 했는데, 어쨌든 그 시간은 아직 경환이 가인에게 ‘진도로 같이 내려가자’는 결단을 내리기 전. 그러니 경환이 그 이후에 결심을 했으니 오후 네시가 되었든 다섯시가 되었든 이미 목포행 열차에 몸을 싣고있을 경환이 그 자리에 나타날 리가 없다. 어느덧 약속한 시간 오후 다섯시를 넘어가자 친구들이 하나둘 불안해져 명숙에게 말한다.
“ 어떻게 된거야 ? 벌써 여섯시가 다 되어가는데... ”
“ 오겠지...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
다른 사정이 있거나 토요일이라 길이 막힐수도 있고, 아니면 경환도 나름 여러 가지 고민이 있을터이니 생각할 시간도 좀 주자. 그렇게 명숙 나름대로 경환의 처지를 배려(?)해주는 상황이라고나 할까. 여하튼 상황이 이럴진대 안명숙 입장에선 어떤 오기심에서나 실날같은 기대의 희망을 가져서라도 계속 기다리기 마련일진대 시간은 어느덧 여섯시를 지나 일곱시...여덟시 흘러가고 있었고 이미 동기생들중 일부는 지치거나 ‘경환이 안오거나 못올 사정이 생긴 것 아니냐 ?’면서 체념한 듯 자리를 뜨기도 했다. 따라서 애초에 20명 이상이나 모여있던 이벤트 장소엔 어느덧 대다수의 동기생들이 다 떠나고 평상시 안명숙과 아주 절친했던 약 서너명정도의 극소수 인원만 남은채 이벤트 장소는 썰렁해져가고 있었다. 화려하게 장식해놓은 이런저런 장식물들만 허무할정도로 꿋꿋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상태로 명숙도 이제 슬슬 지켜가고 있었다.
“ 아악~~~!!! 아아아아아아악~~~!!! ”
명숙은 발작하고 있었다. 밤 열시...열한시 아무리 기다려도 경환은 나타나지 않았고 끝까지 기다려주던 마지막 남은 친구 세명도 더는 안되겠는지 ‘무슨일이 있는 것이 아닌지 경환씨 집에 전화라도 해보는게 어떻겠느냐 ?’던가 ‘그냥 이쯤에서 단념하는게 어떻겠냐 ? 아무래도 경환씨가 너에게 마음이 없는 것 같은데...’ 이런식으로 설득하려 했다. 허나 오기심과 고집으로 이미 하나가득인 명숙은 진짜 이대로 끝까지 기다려 결판을 볼 작정인 듯 요지부동이었고, 어느덧 밤늦은 시간. 게다가 통행금지가 있는 시절이니만큼 너무 늦게까지 마냥 있을수도 없어 남아있는 친구 세명마저도 이미 초조해져가고 있었다. 실제 학교시설내 방 하나를 빌린것이니만큼 학교 수위와 야간 당직자가 들러서 ‘이제 그만 비워줘야 하는 것 아니냐 ?’며 몇차례 독촉을 하기도 해 이들도 마냥 이곳에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낼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 죽여버릴거야 !!! 다들 죽여버릴거라구 !!! ”
결국 더 이상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것인지 아니면 너무 기가막힌 상황에 억장이 무너진것인지, 그야말로 명색이 이대나온 간호사로 일개 지방출신 고졸의 대기업 사환에게 밀린 처지가 되어버린 안명숙은 그 구겨진 자존심을 참을수가 없어 있는대로 발악을 하고 있었다. 명숙의 이런 모습은 친구들도 이전에 볼수없던 모습이라 당황정도가 아니라 무서워지기까지 해 어떻게든 그녀를 말려보려 하였다.
“ 명숙아 제발 진정좀 해 !!! 너 진짜 왜 이러니 !!! ”
“ 다 불에 태워 죽여버릴거야 !!! 이 XXX들 다 불에 태워 죽여버릴거라구 !!! ”
도대체 누굴 불에 태워버리겠다는것인지. 이 자리에 끝내 나타나지 않은 최경환이나 혹은 그 연인 가인 ? 그것도 아니면 의리없이 끝까지 같이 기다려주지도 않고 먼저 가버린 다른 동기생들 ? 아니면 이 학교 시설이나 자신을 이지경으로 만들어놓은 세상을 다 불에 태워버리기라도 하겠다는것인지. 주어도 불분명한 발악같은 소리를 명숙이 한참을 해댔고 보다못한 친구 한명이 결국 그녀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 동생 두어명이 간신히 여기까지 달려와서 명숙을 뜯어말려 진정시켜서는 집으로 돌려보내게 되었다.
한편 명숙이 그러고 있을 때 경환과 가인은 이미 목포에 당도해 있었다. 아직 진도대교가 생기기 전이니 천상 목포에서 진도는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데 어느덧 밤늦은 시간이니 지금 배를 타는 것은 불가능하고 인근 여관방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아침배로 진도로 들어가는수밖에 없다. 이런 시대에 서울에서 진도까지는 그야말로 당일치기로는 어림도 없고 최소한 1박2일 오고가는 시간을 여유있게 잡으려면 대략 2박3일의 일정 정도는 잡아야할텐데, 경환도 이렇게 먼 지방까지 온 것은 난생 처음이라서인지 처음엔 그야말로 20대 후반의 젊은 패기로 가인의 손을 붙잡고 ‘진도까지 가자’며 토요일 점심때가 다되어갈 무렵에 그런 갑작스러운 번갯불 같은 제안을 한것이지만 막상 목포에 도착해서는 당황하고 있었다. 이젠 되려 열 살어린 가인이 이 근방 지리에 익숙하니 친절하게 그를 안내해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야할판. 여하튼 2년여만에 돌아와보는 고장이니만큼 가인도 감개무량해하고 있었다.
“ 엄니...엄니 있는가 ? ”
다음날 아침일찍 진도로 들어가는 첫배를 타고 당도한 가인과 경환. 그리고 읍내에 위치한 가인의 집에 당도하였다. 가인의 집은 그저 평범한 시골집 자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는데, 두 개정도의 방과 마루. 그리고 부엌으로 쓰는 공간과 화장실 그게 전부였고, 다만 전통된장을 만들어 내다파는 일을 하는게 가인의 어머니라더니 넓은 마당 한쪽에 장독을 하나가득 묻어둔 것이 경환의 눈에도 한번에 들어왔다. 가인이 어머니 입장에선 2년전 그렇게 갑자기 집을 나가버린 딸이 돌아올것이란 기대는 거의 하지 않고 있었는지 평상시처럼 하루 일과를 시작하려다가 느닷없이 웬 남자와 함께 집안으로 들어서는 딸을 보며 적잖이 놀랐다.
“ 아니 너 ? ”
너무나 생각지도 못하게 2년만에 나타난 딸. 기겁과 놀라움. 그리고 반가움에 가인을 끌어안았다. 그렇게 학교졸업도 안하고 서울로 가버린 딸에 대한 책망을 하려면 그게 어디 한두마디 말로 다 될까만은 이렇게 막상 2년만에 돌아온 딸을 보니 그로인한 반가움과 무엇보다 딸이 무사하다는것에 대한 안도의 마음부터 앞설뿐이었다. 모녀가 서로를 끌어안고 회한의 눈물부터 흘렸다.
“ 이것아...너 도대체 어떻게 된겨 ? ”
“ 내가 말 안했어 ? 서울가서 돈벌거라고 엄니한테 그리 말했잖여. 편지에도 분
명 그렇게 쓰고 갔구만은... ”
확실히 가출하기 전에 엄마 보라고 써놓고 간 편지가 있긴 했는지 ‘그것도 안 읽어봤냐’며 책망하듯 한마디 했고, 허나 지금 그것이 문제는 아닌 듯 어머니는 딸을 끌어안고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며 회한의 말을 입에 담는다.
“ 이것아...아무리 그래도 학교공부는 다 마치고 서울을 가든 돈을벌든 하라 내 그리
말했거만은...학교부터 졸업하고 다른걸 하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었냐 ? ”
이 시대에 가인 어머니정도 세대의 여인이라면 정상적인 학교교육은 받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고, 아무리 ‘여자는 시집이나 잘가면 그만’이란 인식이 보편적이더라도 오히려 그래서 더더욱 하나밖에 없는 딸을 최소한 고등학교까진 졸업시키고픈 마음이 어머니에게 있었는지, 여하튼 그렇게 학교 졸업도 하지 않고 서울로 가버린 딸에 대한 책망과 야속함을 거듭 입에 담고있는 어머니. 경환이 어머니의 눈에 들어온 것은 모녀상봉의 회한과 회포를 한참 풀고 난 뒤의 일이다.
“ 근데 저...사람은... ??? ”
나이 20대 후반의 경환이 좀 무뚝뚝하고 무거워보이는 분위기일지언정 그리 나이들어 보이는 인상은 아닌데, 어쨌든 초면의 남자에게 함부로 대할수도 없어서일까. 괜시리 ‘나이많은 어른’ 같다는 지레짐작부터 한듯하고 가인이 그제서야 경환을 소개한다.
“ 아, 참 엄마 인사드려. 우리 아저씨야. 나가 일하는 회사에서 같이 일하는 아저씨
랑께... ”
원래 고졸사환 가인이 대학을 졸업하고 정식으로 입사한 열 살많은 경환에 대한 호칭이 ‘아저씨’였으니 지금도 그렇게 부르는것이고 경환도 경환대로 인사는 드려야겠다는 듯 이제야 다가온다.
“ 우선 절부터 받으시죠 어르신. ”
장인이나 장모한테도 ‘어머님’,‘아버님’이라고 부르는 문화가 언제부터 익숙해져 있긴 한데 원래 예전엔 그렇게 부르진 않았고 장인과 장모는 그냥 ‘장인어른’,‘장모님’일 뿐이다. 게다가 지금 경환과 가인은 비록 사귈지언정 결혼을 한 사이도 아니고, 게다가 2년만에 집에 돌아오는 딸과 동행한 남자의 몸으로 가인 어머니를 그렇게 부르거나 할수도 없는 일이라 우선 인사부터 올리겠다며 ‘어르신’이라 부른것이고 그래서 거듭 어리둥절해하는 어머니에게 가인이 거듭 재촉한다.
“ 엄니, 우선 방으로 들어가지. 우리 아저씨가 정식으로 인사 올린다고 하잖여. 그
러니..우선 방에서 절부터 받어. ”
“ 아니 도대체... ”
어쨌든 집에 찾아온 손님이면 접대부터 해야할텐데 되려 자신에게 그저 간단한 인사 정도도 아니고 절을 올리겠다니. 얼떨결에 방으로 들어온 가인 어머니. 그리고 경환이 정중히 큰절을 올린뒤 자신을 소개한다.
“ 우선...가인씨로부터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여하튼 서울에서 진도가 워낙 멀
다보니 추석이나 설에도 쉽게 내려갈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고요. ”
게다가 이런 시골이라면 아직 전화도 변변찮을테니 그러기도 쉽지 않을터. 무작정 가출소녀였든 무작정 상경여성이었든 적어도 그 부분은 충분히 이해가 될만한 시대다. 헌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않는가. 여전히 가인이 데려온 낯선 젊은이를 불안해하고 있는 어머니를 보며 경환이 천천히 입을 연다.
“ 갑자기 찾아와선 이렇게 말씀드리는게 예의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아시다시피 서
울에서 진도가 그리 쉬이 오갈수 있는것도 아니라...기왕 찾아온김에 정식으로 인사
올리고 허락을 받고자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
“ 아니...도대체 ??? ”
이쯤되면 가인 어머니도 아주 눈치없는 사람이 아닌이상 그런쪽으로 의심이 들 수밖에 없고 경환의 본론이 결국 이어진다.
“ 허락만 해주시면 제가 가인씨의 인생을 책임져드리는 그런 존재가 되어드리고 싶
습니다. ”
이 시대가 산업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소위 돈을 벌기위해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무작정 상경’ 처녀가 줄을 잇던 그런 시대이기도 했지만, 대체로 그런 여인들중 성공한 사례는 그리 많지 않고 대개는 공장 노동자나 하다못해 사환으로라도 취직 돈을 벌면서 고향의 가족들을 먹여살리는 그 정도가 보편적인 그 시대였다. 그리고 그나마도 다행이고 솔직히 잘못된 길로 빠져들거나 누군가의 꾀임에 넘어가 유흥업소 같은곳을 전전하거나 범죄의 길로 들어서는 여성도 적지 않던 시절이라 가인 어머니도 2년만에 그렇게 나타난 딸이 그것도 마치 사귀는 남자이거나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사람이라도 되는양 나오는 모습에 더더욱 불안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만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딸 가인을 은밀히 불러 두 손을 부여잡으며 말한다.
“ 가인아... ”
“ ...... ”
“ 니가 서울에서 뭔 일을 하든 난 그런건 상관 안혀. 그저 너 몸 건강히 무사히 잘
있어주기만 하면 된단말씨. ”
“ 엄니 무슨말이 그려 ? 나 이상한 일 안혀. 대기업에 사환으로 취직했다니께 ? 돈
도 많이벌고...이렇게 좋은 아저씨도 만나 사귀고 있기까지 하다니께...이제 엄니
호강시켜줄일만 남았어야... ”
하긴 다른 문제는 둘째치고라도 가인의 외모나 체구자체가 그런곳에서 남자들한테 술따르거나 이상한짓 할 그럴수 있는 여자는 이미 아니다. 허나 딸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쉬이 떠나지 않아서 ‘한OO약 OO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하고 최경환이 분명히 정확하게 자신의 직업을 소개했건만 여전히 그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솔직히 1960년대 후반이면 현대니 삼성이니 럭키금성(* 훗날의 LG)이니 하는 기업들은 이미 어느정도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시기이긴 했어도 ‘한OO약’의 지명도는 아직은 낮은편이었던 시대다. 심지어 80년대에 이 그룹 창립 30주년을 기념하여 발행한 홍보책자에도 이 업체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으로 ‘가령 아이스크림을 제조,판매하는 모 기업체나 역시 바닥장판(* OO륨으로 유명했던)으로 유명했던 모 기업 혹은 서울 중심가에 떡하니 위치한 모 호텔등 계열사 개별적으로는 알려진 기업이나 사업장이 제법 있어도 이들을 계열사로 보유한 그룹인 ’한OO약‘ 자체는 아는이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게 H그룹의 홍보적 측면에서 가장 치명적 약점이라는 내적고민을 토로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기도 했다. (* 물론 요즘은 만년 하위권을 면치 못하는 프로아구팀을 보유한 그룹으로 더 유명하기도 하고 한때는 회장(2대) 아들들이 돌아가며 사고를 쳐서 그것으로 더 유명해지기도 했다.)
“ 엄니, 무슨말을 그렇게 혀 ? 딸을 어찌보고 서운하게 그런소릴 한당께 ? 가인이
그런일 하는 여자 아녀 !!! 아무리 사환이라도 엄연히 대기업 H그룹에서 일하는 사
원이랑께. (* 요즘으로 치면 비정규직 알바 ^^;;) ”
가인이 거듭 그와같이 말을 해도 어머니는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지 못하는듯했고 그래서 거듭 한숨을 쉬며 최경환에게도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 이보시오 선생. 대체 무엇을 하는 분인지는 모르겠지만...그리고 나가 보다시피 이
렇게 어촌바닥에서 된장이나 만들어 파는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 노인네에 불과
하지만은... ”
“ 아니 저 어르신... ”
이쯤되면 가인은 둘째치고라도 자신조차 혹시 이상한 직종에 근무하는 사람으로 의심하는거 아닌가 싶어 이제 경환이 화가날 지경이다. 허나 여하튼 지금 이런 상황에서 가인 어머니에게 화를 낼수도 없어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 그저 헛기침을 한두번 해보일뿐이다. 가인 어머니의 말이 이어진다.
“ 그저 이 무지렁이 늙은이...어떻게 나이 40이 넘어서 저아이 하나 낳아서...남편도
없이 지금껏 저 아이 하나만 보고 고생하며 살아온 그런 몸이라오. 그런 것이 어찌
하다 철이없어 저 혼자 돈 좀 벌어 보겠다고 서울로 올라가서 이 지경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두... ”
“ 어르신 정말 그런 걱정 안 하셔도 된다니까요. 저나 가인이 절대 그런 일 하는 사
람 아닙니다. 그리고 저희 이미 장래를 약속하고 사귀는 사이인것도 맞구요. 그러나
어르신도 아시다시피 서울에서 진도까지가 오가기도 쉽지 않고 또 대기업에서 늘 바
쁘게 일하는 몸으로 여기까지 내려오기도 쉽지 않아 뒤늦게 인사드리게 된 것 뿐입
니다. 그 점만은 진심으로 정중히 사과올리겠습니다. ”
게다가 70-80년대는 물론 60년대 드라마나 영화에도 그런 이야기가 가끔씩 있었다. (* 꼭 유흥업소 쪽으로 빠진 경우가 아닐지라도) 그렇게 무작정 상경 서울에서 산전수전 다 거친 여자가 결국 실패해서 단념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하다못해 그렇게 돌아가게된 귀향길에서 만난 낯선 나그네에게라도 부탁 고향의 늙으신 부모님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가짜 애인’이나 ‘가짜 약혼자’ 행세라도 해달라는 부탁을 해 그렇게 여주인공의 고향을 방문하게 되는 이야기. - TV가 없더라도 하다못해 ‘라디오 단막극’ 같은 형식으로라도 접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 아닌가. 바로 그런류의 이야기 때문에라도 딸 가인이 대기업에 다니는 애인을 인사시키기 위해 데리고 찾아왔다는 말을 100% 진실한 말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 하다. 여하튼 어차피 내일 다시 출근하기 위해선 경환이나 가인이나 여기서 너무 지체할수도 없는 일이라 가인의 살던 동네나 한바퀴 돌아보고 그리고 가인 어머니가 대접해준 푸짐한 점심상을 받고는 서울로 돌아가게 된다.
“ 가인아... ”
“ 야, 아저씨... ”
목포에서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를 탄 두 사람. 경환이 가인의 손을 꼭 잡은채로 말한다.
“ 우리...우리말야 만약에... ”
막상 이런 이야기를 입에 담으려니까 긴장이 된 탓일까. 하긴 이미 이런 단계까지 왔으면 직접 말하지 않아도 누가 봐도 결혼을 전제로 사귀는 연인사이가 맞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막상 이런말을 입에 담을 때 가인이 어찌 반응을 할지 몰라 경환은 거듭 긴장되기까지 하다. 기차는 서울로 올라가는 속도를 한층 높이고 있는 가운데 경환이 말한다.
“ 우리 정말 이대로 결혼하게 되면... ”
“ 아...아저씨... ”
결국 결혼이란 말이 경환에게서 나오자 가인도 순산 가슴이 요동친다. 경환의 말이 이어진다.
“ 신혼여행은...강릉으로 한번 가보는게 어때 ? ”
“ 강릉이라고라 ? ”
60년대 후반이면 해외여행은커녕 ‘제주도 신혼여행’도 아직 보편적이 되기 전이다. - 제주도 신혼여행은 70년대 후반 이후에나 보편적이 된 듯. - 따라서 그나마 좀 살림이 여유가 있는 집안이면 그저 자신들이 사는 지역에서 그리 멀지않은 관광지나 유원지에 한 2-3일이나 3-4일 정도 일정으로 다녀오는게 신혼여행의 전부라면 전부일터. 그러니 서울살면서 게다가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 6.25 피난길에 온 가족이 호남 남부지역까지 내려간적은 있지만 – 서울 이외의 지역을 가봤을 경험은 거의 없었을 경환으로서는 제법 통크게 계획을 잡은 셈이기도 하다. 여하튼 아직 결혼날짜라도 잡은것도 아닌데 벌써 신혼여행 구상(?)까지 하고있는 경환을 보니 가인도 다시금 가슴이 떨려온다.
“ 가인아...그리고 이 자리에서 내 분명히 말하지만은... ”
목포에서 출발한 기차가 대략 대전까지 오고있을때쯤 경환이 다시금 목에 힘주어 가인에게이렇게 말했다.
“ 어떤일이 있더라도 내가 결코 널 버리진 않으마. 이건 분명히 약속해줄수 있어.
절대 어떤일이 있더라도...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시련과 난관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 ”
여하튼 이대로 가인과 함께 백년해로를 할 각오와 결심을 하고 있는 듯 말하고 있는 경환. 가인이 감격해온다.
“ 어떤일이 있더라도 널 버리지 않고 영원히 함께하마. 그건 분명히 맹세해줄수 있
어. ”
“ 아저씨... ”
눈물고인 가인.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경환이 손수건을 꺼내 닥아주고 기차안에서는 그렇게 두 사람의 다정한 연분이 몽글몽글 피어오르고 있었다.
- 4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