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팬픽 - 우주소녀 설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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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제 : 청  실  홍  실 

 


 ‘ 청실홍실 엮어서 정성을 드려 / 청실홍실 엮어서 무늬도 곱게 

   죄없는 인생사에 나만이 아는 / 음~~~~ 음음음음~~~ 수를 놓았소~~~ 

 

   인생살이 끝없는 나그네 길에 / 인생살이 끝없는 회오리 바람 

   불어도 순정만은 목숨을 바쳐 / 음~~~ 음음음음~~~ 간직했다오~~~ 

  

                               - 1970년대 TBC 인기드라마 ‘청실홍실’ 주제가  ’ 

   


 1960-70년대 정도면 어쨌든 아직은 연애보다는 중매결혼이 더 보편적인 그런 시대다. 물론 이 시대에도 이런저런 사례들을 수집하다보면 주위의 반대나 고난을 무릎쓰고 사랑의 결실을 맺은 그런 사례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반적으로는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고 그러다 집안 어른들 권유로 선을 보고 결혼하는게 가장 보편적인 시절. 무엇보다 남북분단의 시대를 살면서 남자는 본격적으로 의무적인 군복무 3년을 다녀와야했기 때문에 남자들의 평균 결혼 연령대가 점차 늦어지기 시작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가령 ‘첫사랑은 웬만해선 이루어지지 않는다’던가 또는 ‘군대간사이 애인이 고무신 거꾸로 신었다’던가 이런식의 이야기들이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한것도 무엇보다 산업화가 본격화되면서 남자는 어쨌든 군대도 다녀오고 학교도 졸업한뒤 직장을 잡아 어느정도 생활이 안정되면 그때쯤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으로 인식되던 시절. 반면 여자는 아직 ‘시집이나 잘가면 그만’이란 생각이 보편적이던 시기인지라, 아직 상급학교(고등학교든 대학교든)로 진학하는 여성의 비율이 그리 높지도 않았던 시절이지만 여하튼 적당히 학교 졸업하고 2-3년 정도 직장생활하며 돈벌다 시집가는게 가장 보편적이던 시절. 그래서 엇비슷한 나이의 남녀가 만나 결혼하는것보다는 남자가 여자보다 보통은 한 5-6세 이상 많게는 7-8세까지 나는 경우도 흔하게 된게 바로 이때의 불가피하게 변화하던 사회적 분위기탓이 컸던 것으로 봐야할 것 같다. 

 이 시대 최웅돈 선생의 집안이라고 해도 사정은 크게 다를것이 없다. 이때 최웅돈 선생의 나이는 최소한 환갑은 넘었을것으로 봐야할것이고 그의 슬하에 네명의 자녀가 있다. 장남 영환이 1932년생, 차남 정환이 35년생, 삼남 성환이 38년생 그리고 막내 경환이 1940년생인데 여하튼 그렇게 아들 네명을 두고있는 최웅돈 선생. 여하튼 1900년대 후반쯤에 태어나서 30년대 초반쯤 결혼 아들 넷을 낳고 이때까지 살아왔다면 그의 삶 역시 나름 일제 강점기와 6.25를 거치는 파란만장을 거쳤을것이란것도 능히 짐작해볼수가 있다. 

 사실 최웅돈 선생에게도 회한이 한가지가 있긴 하다. 실은 최선생은 6.25 직전까지 작은 화장품 공장을 운영하던 분이셨다. 그러고보면 대한민국에 ‘화장품 회사’들의 역사가 그리 길지도 않고, 그것도 1960년대 정도를 기준으로 봐도 아직 그리 많지도 않던 시절인데 그보다 전인 1930-40년대에 화장품 공장을 했다면 어느정도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의 면모도 없지는 않을터. 다만 6.25때 운영하던 공장이 모두 박살이 나고 폐허가 되어 최웅돈 선생이 아내 전씨 여사와 슬하의 아들 넷과 함께 호남의 남부지역까지 피난을 갔다가 1년여만에 돌아왔을때는 이미 공장이고 뭐고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고 그야말로 잿더미 그 자체였다고 한다. 

 여하튼 휴전협정이 되기 직전에 피난지에서 서울로 복귀한것만은 분명한 것 같은데, 휴전 이전에 복귀를 했든 이후에 복귀를 했든 폐허가 된 공장이 ‘재건불가’인 상태인것만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을터이다. 그래도 막상 돌아와서 손놓고 있을수만은 없어서 네명의 아들 – 당시 열 살 남짓이었을 막내 경환까지 포함하여 – 과 함께 어떻게든 공장을 다시 일으켜보려고 백방으로 애썼으나 쉽지 않았고 아직은 네명의 아들을 계속 키워야 하는 입장에서 언제까지 공장재건에만 매달릴수만도 없어서 결국 포기해버리고 전쟁이 끝난뒤인 1950년대 중반부터는 대략 서울 성북지역쯤에 작은 잡화점을 내어 그것을 운영하며 생계를 삼으며 아들 넷을 키우며 사셨다고 했다. - 그 잡화점은 1980년대 초반 최웅돈 선생이 작고하시기 직전까지 운영하다 접으셨다고 하니 여하튼 그 가게도 대략 25년 정도는 운영을 하셨던 셈이다.. 

 그런 최웅돈 선생에게 아들이 넷. 보통 이 시절에는 특히 그 많은 자녀들을 다 대학까지 보내거나 할만한 형편은 못되어서 자녀들중 장남 혹은 상대적으로 공부를 잘하는 아들 한두명을 상급학교에 보내도록 올인하는게 가장 일반적이었다고 하던데 최웅돈 선생의 자녀들의 경우엔 어찌된 영문인지 장남과 차남은 공부쪽과는 거리가 멀었는지 장남의 경우엔 학교를 졸업한뒤엔 아버지 잡화점일을 계속 도우며 살았고 차남은 다른 중소업체에 취직 직장생활을 했다. 그리고 삼남과 4남이 대학을 진학했는데 특히 막내 경환이 ‘서울대’에 진학 그중 백미(白眉)가 되었다. 그리고 삼남 성환의 경우도 ‘서울대’까진 아니지만 그런대로 ‘in 서울’에 해당되는 이름있는 명문대에 진학 4형제중 장남과 차남은 대학을 들어가지 못했지만 삼남과 사남이 명문대에 들어간 그런대로 흥미로운 가정사를 간직한 집안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중에서도 막내 최경환. 서울대를 나오고 거기에 대기업에 취직한 경우라면 그야말로 이 시대 가장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은 셈이다. 그러니 집안에서 받는 기대와 어여쁨은 얼마나 컸으랴. 어쨌든 4년제 대학에 3년 군복무기간까지 다 마치고 취직을 했다면 60년대 중반을 지나 후반으로 접어들 무렵일텐데, 여하튼 어느덧 막내아들이 – 그것도 서울대를 나와 대기업에 취직까지 한 – 학교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까지 했으니 그에 어울리는 짝을 지어줘야 한다며 최경환의 어머니이자 최웅돈 선생의 부인이기도 한 전씨노파는 동분서주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 정도 세대의 여인에 게다가 서울출신도 아닌 지방출신이라면 학교교육을 받지 못한 ‘낫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문맹인 경우가 가장 보편적인 경우다. 따라서 전씨노파가 글을 모른다고 해서 그 자체가 이상한일은 아니며, 다만 원래 성격이 숫기가 없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편인지 한때 그래도 공장도 운영하고 지금도 이만한 잡화점을 운영하는 남편을 둔 부인답지 않게 주변 친구나 인맥은 그리 많지 않은 그런 여인이 전씨 노파였다. 

 여하튼 그 전씨노파가 서울대를 나온 막내아들에게 꼭 어울리는 짝을 지어줘야한다며 동분서주하며 움직일 때, 그러고보면 이때가 어느덧 대략 1968-69년 무렵으로 봐야할테니 장남 영환과 차남 정환은 이미 결혼을 한 상태고 사실 경환과는 두 살 터울인 삼남 성환 역시 맞선을 본 상대 여성을 만나고 있는 상태이긴 하다. 따라서 사실상 막내 경환의 선자리까지 보고나면 최웅돈 선생과 전씨노파 부부는 아들 넷의 혼사문제는 이렇게 모두 해결을 보는셈. 따라서 웬만하면 셋째 성환과 넷째 경환의 혼사를 너무 늦추지 말고 거의 한꺼번에 비슷한 시기에 치르고 싶다는 그 정도의 구상을 하고 계셨을법도 하다. 그렇게 한참 전씨노파가 동분서주 막내 선자리 알아봐야 한다며 돌아다니실 때 경환은 나름 고민과 고뇌의 우울에 빠져있었다. 그런 경환에게 두 살터울지는 바로 손윗형 셋째 성환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 경환아... ” 

 진지하고 심각하게, 또 한편으로는 동생을 생각하는 안쓰럽고 딱한 마음을 담아 성환의 말이 이어진다. 

 “ 그러지말고 아버지,어머니한테 솔직하게 말씀드려. ” 

 본래 성격이 그런것인지 아니면 생긴 외모와 분위기 자체가 그런것인지 무뚝뚝하게 별다른 대꾸나 반응이 없는 경환. 성환이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는 듯 말한다. 

 “ 너 좋아하는 여자 있잖아. ” 

 동생과는 달리 복잡한 문제가 있거든 괜히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정면돌파하는 쪽을 선호하는것인지 아예 대놓고 이렇게 말하고 있는 성환. 헌데 경환은 누굴 닮아서 이런것인지 본래 성격이 숫기도 없고 말수도 적은 듯 이런식으로 얼버무린다. 

 “ 아뇨...저어...그게... ” 

 이런식으로 결국 말을 더듬으며 말꼬리를 흐리는 경환. 아무리 동생이지만 진짜 꿀밤한대 먹여주고 싶을 정도로 어떤 답답증까지 성환에게 밀려올 지경이다. 그래서 성환이 거듭 동생이 걱정된다는 듯 말한다. 

 “ 어쩔생각인데 그래서 앞으로 ? ” 

 경환도 나름 머릿속이 복잡한것일까. 그래서 거듭 별다른 대꾸를 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어색한 침묵만이 흐르고 있다. 둘이 현재 같은방을 쓰고 있으니 ‘나가달라’고 하거나 이런식으로 말할수도 없는것이고 그저 성환은 성환대로 경환은 경환대로 각자의 답답함을 스스로 달래고 있는듯하다. 

 어쨌든 경환은 이제 대기업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몸이니 월요일 아침이면 출근을 해야한다. 허나 상쾌한 아침기분이 전이되지 않을만큼 요즘 걸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는 경환. 회사에 도착해서 잠시 짬을 내어 대화를 나누는 한 여직원이 있다. 

 “ 싫소. 나는 그리 못한단말이요. ” 

 “ 가인아... ” 

 키도 좀 큰편이고 체구도 통통한 여인이 짙고 억센 전라도 사투리로 울부짖고 있었다. 뭔가 난감하고 곤란한것인지. 일단 경환이 그런 가인을 어떻게든 설득해보려 한다. 

 “ 그러지말고...한번 부딪혀보자. 어차피 언젠가 한번은 겪어야할 일이라 하지 않았 

  어 ? ” 

 ‘매도 먼저 맞는편이 낫다’고 하던가. 평소 최경환의 소신이라면 차라리 본격적으로 선보는 문제가 부모님 입에서 나오기 전에 이미 정면돌파를 한번쯤 시도해 봤을법도 한데, 대체 뭐가 문제인지 지금까지 미루고 있었던듯한 모습. 여직원은 거듭 난색을 표하며 손을 내젓는다. 

 “ 내가 어떻게 아저씨네 집에 나갈수 있단말이요 ? 이런 몸으로...이런 처신으로 내 

  가 어찌 아저씨 부모님을 찾아뵙는단 말이요. 나는 그리할수 없소. 아저씨를 생각 

  해서라도 차마 그리는 못한단말이요. ” 

 송가인. 이때 나이를 대략 18-19세 정도로 봐야할 것 같다. ‘고졸 여사원’이란 개념이 이때도 있었을까 고개를 갸웃할 사람들이 있을수도 있을 것 같아 조금 부연설명을 해야할 것 같은데 요즘 흔히 생각하는 소위 고졸사원 채용이나 또는 80년대 흔하던 그런 알바같은 개념은 아니고, 이때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거나 실업계 고등학교에 다니는 어린 여학생들을 관청이나 기업체에서 사소한 잔심부름 같은 것을 하는 ‘사환’의 개념으로 쓰는 경우가 꽤 있었다. 그러고보면 요즘의 고졸 여사원이나 알바생의 개념과도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 그런 성격일텐데 어쨌든 관공서나 대기업은 이래저래 일손이 많이 필요한 일터고 고졸이나 실업계를 다니는 어린 소녀들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돈을 벌어야하는 처지에 있는 몸이 많았을테니 피차 이런식으로 ‘win-win’하는 셈이라고나 할까. 여하튼 1950년 전남 진도 출생으로 이때 나이 10대 후반인 송가인이 이때 대기업인 H그룹에서 사환으로 일하고 있었다. 사실 가인은 정확히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고 고등학교 2학년 나이때 만 17세의 몸으로 가출 돈을 벌기위해 서을까지 올라온 여인. 다만 이 정도의 학력위조는 이 시대엔 굳이 트집을 잡지 않거나 표가 나지 않았는지 가인은 이력서에 진도 ‘OO여고 졸업(사실은 중퇴)’이라고 써냈고 그렇게 H그룹 사환으로 지금껏 일해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서울대를 졸업한 최경환이 대기업 말단사원으로 H그룹에서 직장생활을 한 시기나 17세 소녀의 몸으로 무작정 상경 대기업 사환으로 취직한 가인이나 취업한 시기는 대략 엇비슷할터. 그렇게 1-2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면 둘 사이에 정분이 나기는 충분한 시간. 허나 지금 경환은 이래저래 이런 자기회사 사환 가인과의 관계를 주변에도 집안에도 쉬이 말하지 못한채 속을 끓이고 있었던 것이다. 가인의 말이 이어진다. 

 “ 아저씨네 집은 뿌리깊은 양반집안이라면서요 ? 그런데 지가 어찌... ” 

 1-2년 정도 사귀는 사이였든 그냥 같은 직장 동료로 알고 지냈든 그 정도 피차 집안내력 정도는 한두번정도 말했을법한 시간이고 사이이긴 하다. 하지만 최경환은 가당치도 않다는 듯 일단 손을 내젓는다. 

 “ 요즘이 어느 시대인데 그런걸 따지나. ” 

 하긴 ‘갑오경장’으로 신분제가 철폐된 시기를 기준으로 하면 1960년대 후반이라도 무려 70년의 시간이 지난 시절이고, 물론 사람들의 의식이나 문화가 그렇게 쉬이 바뀌지가 않아서 신분제의 잔재가 아직까지도 이따금은 느껴지는 그런 문화나 사회분위기가 없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1960년대 후반이면 이미 ‘보통선거’,‘평등선거’ 치러지는 대명천지 자유민주주의사회 대한민국이다. 여하튼 집안문제에 대한 자격지심뿐만 아니라 출신,학력등 최경환의 집안에 비해 너무 볼품이 없어서인지 가인은 거듭 차마 경환의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갈수 없다며 곤란한 자기 입장을 밝힌다. 

 “ 게다가 우리 집안은 진짜...진도에서 그냥 농사만 짓던 평범한 농사꾼 집인이란 말 

  이요. 우리 어머니도...나이 40 넘겨서 겨우 힘들게 나 낳아놓고...평생을 된장만 팔 

  다 가신...그런 어머니고... ” 

 아마 가인의 어머니는 고향인 전남 진도에서 전통된장 같은 것을 만들어 팔고 그런일을 하던 여인이었던 듯 하다. 다만 가인은 아버지에 대해서는 ‘농사만 짓던분’이란것만 알뿐 그 외 더 구체적인 내력은 모르는듯했고, 여하튼 뿌리깊은 양반가문이라는 최경환의 집안에 비해 내세울게 없는 불품없는 집안이라는 것이 가인이 경환의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가기 곤란하다는 가장 큰 이유였던 것 같다. 가인의 자격지심이 너무 커서인지 경환이 마지못해 결국 이 소리를 하고 만다. 

 “ 그리고 양반가문이면 뭘해 ? 왜X들한테 땅 빼앗긴게 벌써 언제적 일인데... ” 

 최웅돈 선생이 젊은시절 운영하던 화장품 공장이 6.25때 무너져 폐허가 된 것은 일단 둘째치고라도 사실 그 윗대로 가면 근현대사의 아픔과 직결되는 또다른 사연 하나가 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하고나서 이른바 ‘토지조사사업’을 했다는 이야기를 다들 국사시간에 배워 들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다만 그 ‘토지조사사업’ 자체가 적극적으로 홍보되지 않았고 대다수의 지주,양반가들은 ‘우리가 왜 왜X들한테 땅을 등록하냐 ?’며 반발. 그러나 이게 구실이 되어 이때 등록을 하지 않은 집안들은 모두 땅을 빼앗기고 말았다. 바로 그 전형적인 사례중 하나가 바로 최웅돈 선생의 집안 이야기다. 그게 어쨌든 일제강점이 시작되고 얼마되지 않은때의 일이면 1900년대 후반 태생인 최웅돈도 아직 다섯 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나이였을 때. 적어도 그전까지 잘나가는 양반가중 하나였던 최웅돈의 집안도 그렇게 일제가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에 순순히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신들이 소유한 땅을 빼앗기고 하루아침에 몰락해버린 것이다. 

 요즘 역사학자들은 흔히 이런식으로 조롱하곤 한다. ‘사실 영,정조 이후로 신분제가 붕괴되면서 가짜양반이 워낙 많아져서 지금와서 ‘뿌리깊은 양반가문’이니 어쩌니 내세우는 사람들 알고보면 신뢰할수 있는 집안내력이 거의 아닐 것‘ 이라고. 헌데 영,정조때라면 일제 강점기 기준으로도 이미 200년전 일이니 설사 일제치하 직후에 아직 어린아이였던 최웅돈 선생이나 그 선대(先代)라 할지라도 200년전에 과연 어떤일이 있었을지를 구체적으로 알수는 없었을것이고, 또 (비록 가정의 상황일지언정) 영,정조 신분제 붕괴시기에 그렇게 가짜 양반족보를 사거나 하는 그런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최소한 일제 강점기 기준으로도 200년 세월정도의 그런 뿌리가 있는 ‘양반가문’인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최웅돈 선생의 집안 선영은 일제때는 물론 1960년대까지도 최소한 최웅돈 선생의 윗대 조상들이 묻혀있는 무덤터가 일정부분 존재했었다. 땅은 빼앗겼을지언정 최소한의 무덤터 정도는 보존해주는 것을 합의를 보았는지 어쨌는지 선영의 지극히 일부만 ‘보존차원’에서 남아있던 상태. 그게 최경환 집안의 내력인 셈이다. 그러니 이른바 일제때 ‘몰락한 양반가’에 해당되는 것 아닌가. 그러니 최웅돈 선생이 젊은시절 한때 화장품 공장을 한다 어쩐다하며 동분서주하며 돌아다닌것도 그렇게 (왜놈들한테 땅도 빼앗기고) 몰락한 가문을 일으켜야한다는 나름의 사명감에서 그리한 것으로 이해해야할 일이기도 하다. 허나 그렇게 세운 화장품 공장마저도 6.25때 무너졌다니 일제때는 왜X들한테 조상땅 빼앗기고 6.25때는 최웅돈 선생 스스로 세운 공장도 무너지고 말았으니 최웅돈 선생의 집안사도 그야말로 근현대 우리민족의 수난 그대로가 고스란히 간직되어있는 그런 집안임에는 틀림이 없다. 

 


 한편 최경환이 가인의 문제로 깊은 수심에 잠겨있을 때 그 부친 최웅돈 선생과 부인 전노파도 나름의 고민이 없지 않았다. 어느덧 첫째 영환과 둘째 정환은 결혼해서 분가해 내보낸 상태고 이제 셋째 성환과 막내 경환 둘만 남은 노부부. 원래 전노파가 먼저 남편에게 말을 건네거나 그런 적극적인 성격의 여인은 아닌데 일단 노파가 먼저 운을 뗐다. 

 “ 여보... ” 

 뭔가 근심스런 말투로 입을 연 전노파. 웅돈이 의아하게 바라보는 가운데 노파의 말이 이어진다. 

 “ 당신 생각은 어떠세요 ? ” 

 아무래도 막내 경환의 혼사 문제로 인한 이야긴가 싶어 웅돈이 이렇게 물었다. 

 “ 그...이화여대 간호학과를 나와서 지금은 간호원으로 일한다면서 ? ” 

 아마 최경환이 선을 보게될 맞선상대의 학력과 현 직업이 그와같은 듯 하였다. 이미 중간에 중신을 선 매파가 있다면 그 정도 신상은 이미 당사자의 부모들이 주고받았을터. 그래서 웅돈이 이미 아내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듯 그와같이 묻고 헌데 전노파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그 무엇이 있는 듯 이렇게 입을 연다. 

 “ 8남매중 맏이라고 합디다. ” 

 “ 8남매중 맏딸이라구 ? ” 

 남아선호사상이 오래부터 팽배해있는 나라 답지않게 좀 앞뒤가 맞지 않는 ‘첫째딸은 살림밑천’이란 말이 예전부터 있었다. 좋은말 같지만 조금만 뒤집어서 음미해보면 결국 동생들 돌보랴 집안살림 돌보랴 궂은일은 혼자 도맡아 하는 그런 역할이었다는 소리가 아닌가. 바로 그런 ‘사실상의 가장노릇’을 집안에서 해온 여자라면 ? 아무래도 뭔가 못마땅한 듯 노파의 말은 계속된다. 

 “ 들으니까...그 아버지가 수년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고 그리고 그 뒤로는 그 집 큰 

  아이라는 그 여자애가 동생들 돌보는 사실상의 가장역할을 해온 듯 합니다. ” 

 그러나 아주 어릴때부터 부모를 여의고 자신이 사실상의 동생들 돌보는 부모역할을 하거나 그 정도는 아닌 듯 하고 아버지가 아마 몇 년전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라는 것 같은데, 여하튼 아내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최웅돈 선생도 뭔가 생각이 좀 달라지는것일까. 이렇게 전노파에게 묻는다. 

 “ 아버지는 대체 어쩌다 돌아가신건데 ? ” 

 이 무렵 평균수명은 대략 60-70세 정도고 또 6.25 같은 전란도 있었고 이후의 살림살이도 그리 편하지는 않았을테니 결혼적령기의 자녀를 둔 부모가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라고 해서 그 자체가 흠이 될것까진 없다. 그래도 그런 문제를 따지려는 사람들은 제법 꼬치꼬치 따진모양. 웅돈의 궁금함에 노파가 답한다. 

 “ 아버지가 은행 간부를 역임했나본데...무슨 비리혐의로 수년전에 구속이 되었대요. 

  근데 이후 홧병이 나서 세상을 떠났다고 합디다. ” 

 전노파가 알고있는 내막은 대략 이러했다. 어쩄든 웅돈과 선을 보게 되어있는 여자쪽 부친이 은행 간부를 역임했는데, 일자무식에 성격도 숫기없는 편이라 친구도 인맥도 그리 많지 않은 전노파의 성격과는 극과극으로 아마 그 여자쪽 아버지는 성격도 제법 적극적이고 친구도 주변에 많았나보다. 호탕한 성격에 평상시 어려운 친구,지인들 부탁 잘 들어주기로 유명하다는 그런 사람이 헌데 종종 그런사람들 뒤를 봐주다보니 – 직업이 은행 간부다 – 공금횡령 및 유용 그리고 은행법 위반등의 문제로 구속이 되었고 당연히 해당직위에선 해임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로인해 집안이 몰락하고 다만 여자의 아버지는 형을 그렇게 오래살진 않고 한 2-3년 정도 형을 살다 나온 모양인데 그러다 나름 억울한 그 무엇이라도 있는지 울화병등이 겹쳐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게 전노파가 알고있는 그쪽 집안의 내력이다. 헌데 상식적으로 매파가 중신을 서면서 상대집안의 일을 좋은쪽으로 과장했으면 했지 흠될만한 일은 말하지 않을터. 헌데 지방출신에 문맹으로 게다가 성격탓인지 서울에 살면서 주위에 아는 친구나 지인도 거의 없는 노파가 어느새 그런 집안의 뒷조사를 그렇게까지 했다는것인지 그게 좀 의문이긴 하지만. 여하튼 그렇게 아버지가 은행간부까지 지내다 비리혐의로 구속된뒤 돌아가시고 그렇게 몰락한 집안에서 지난 몇 년동안 혼자 어머니와 동생 일곱을 돌보는 가장역할을 했다는 여자. 그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지 전노파는 거듭 손을 내저으며 한숨을 내쉰다. 

 “ 언제는 그래도 서울대 나온 아들 어울리는 짝 지어줘야 한다고 하더니... ” 

 “ 근데 그렇게 알아둔 맞선상대 집안이 영 아니니까 그렇지요... ” 

 “ 그래도 이화여대 나와서 간호원까지 할 정도면 괜찮은 여자 아닌가 ? ” 

 “ 집안에서 사실상 가장노릇 한다잖아요. 8남매중 맏이인 가장 !!! ” 

 확실히 1980년대에 중,고등학교 다니는 딸 한두명쯤 있는 ‘강남 아줌마’들은 그런말들을 했었다. 여자애 성차별 받지 않고 한 몇 년 적당히 돈벌다 좋은데 시집보낼수 있는 직업이 ‘교사,간호사 그리고 방송작가’라고. 허나 1960년대에도 이미 이런말이 있었을지는 분명치 않다. 그래도 학교선생이나 간호사쯤 하면서 몇 년정도 돈이라도 좀 벌다 시집오는 여자라면 집에서 아주 신부수업(?)만 쌓다 들어오는 경우보다는 그래도 상대적으로 우호적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는 분명 있었다. 여하튼 학교선생이나 간호원 정도면 여자애들 시키는 직업으로도 그리고 며느리감으로 들이는 출신으로도 그리 나쁘지 않게 보는 분위기는 분명 있었는 듯. ‘이화여대 나온 간호사’라면 적어도 이 시대에도 분명 그다지 꿀릴 것 없는 그런 신분인것만은 분명하다. (* 다만 ‘간호사’란 명칭은 1980년대 이후에 생겼고 이때는 ‘간호원’이라고 불렀다.) 허나 구체적으로 여자 집안에 대해 알아보니까 비리혐의로 구속되었다 돌아가신 아버지에 8남매중 맏이라 가장노릇까지 한다는 여자. 아무래도 막내 경환의 신부감으로는 영 마땅치가 않았는지 노파의 한숨이 깊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 그만하면 되었지...무슨 사람이 그렇게 욕심이 많아 ? ” 

 “ 그래도...뿌리깊은 양반가문이 아니오 ? 당신 집안은. ” 

 새삼 바로 그런 소위 ‘뿌리깊은 양반가문’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노파. 하긴 ‘여자는 시집가면 그집 귀신이 되어야 한다’는 말도 이때는 있었고 또 막상 그런 집으로 시집을 와서 특히 일제때 토지조사사업으로 강제로 땅 빼앗긴 집안이라고 하니 그런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소리를 이 집의 며느리였던 전노파는 또 얼마나 선대(先代)들로부터 들었을까. 허나 새삼 아내가 그런말을 입에 담자 웅돈도 웅돈 나름대로 회한이 있는지 또다시 이와같은 이야기를 입에 담는다. 

 “ 그때...공산당X들 때문에...공장만 무너지지 않았더라도... ” 

 6.25때 폐허가 되어 재건불가가 되어버린 최웅돈 선생의 화장품 공장. 여기서 자칫 특정 대기업의 명예를 훼손할수 있는 민감한 이야기가 될수도 있어 조심스럽긴 하지만, 최웅돈 선생에겐 나름 그만의 회한과 아쉬움이 있었나보다. - 따지고보면 다른 종류의 사업도 마찬가지였겠지만 – 아직은 우리나라에 화장품 회사가 그리 많지 않던 일종의 태동기. 따라서 6.25때 최웅돈 선생의 화장품 공장이 무너지고 이후 재건불가가 되어 다시 일으키는 것을 단념하지만 않았다면 이후 최웅돈의 화장품공장도 국내 굴지의 화장품 회사인 어느어느 대기업에 견줄정도로 만만찮은 기업으로 성장해 있었을지 어찌 아는가.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만약에’라는 가정이니 다 지나고나서 이런 아쉬움의 상상을 하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 게다가 그것도 6.25때 폐허가 되고 무너진 공장이 아니던가. - 6.25를 겪은 사람이 최돈웅 선생네 가족 한집안 뿐만 아니라 온민족이 다 함께 겪은 수난일진대 혼자만 그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곱씹는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 그 이야기를 벌써 백번도 아니고 천번도 넘게 하시고 계시는구랴... ” 

 하긴 어느덧 1960년대 후반이면 6.25도 어느덧 15년 이상이 지나 – 굳이 화장품 공장 망가진 시기때부터 계산하면 – 17-18년이 다 되어가는 일이다. 막상 그리고 전쟁이 소강상태가 된뒤 돌아와서는 백방으로 공장재건을 해보려다 수포로 돌아가 이후 최웅돈은 하루도 빠짐없이 아내와 단둘이 있는 자리에선 그 회한과 아쉬움을 곱씹었나보다. 휴전협정(53년)이 있던 이후만을 기준으로도 이미 15년 이상이 지났으니 매일같이 아내와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그런 소리를 했다면 정말 이미 백번이 아닌 천번이상...다행히(?) 만단위로까진 올라가지 않고 약 5천번을 조금 상회하는 수준으로 그런 이야기를 했었으리라. 따라서 어쩌면 대한민국에서 최웅돈 사장의 그런 회한섞인 이야기를 가장 많이 들었을 전노파. 그래서 이젠 지겹고 이제와서 그런 이야기 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그만하자고 남편을 만류한다. 

 “ 이제 그만 하세요. 다 지난일을... ” 

 “ 이렇게 나도 선대의 유업을 제대로 잇지는 못하고...이렇게 내 인생을 마무리하게  

  되는구먼... ” 

 어쨌든 1960년대 후반 기준으로 이미 환갑을 넘긴 최웅돈 사장이고 공장재건은 단념한지가 이미 십년도 훨씬넘고 어느덧 아들 넷중 둘을 장가보내고 둘만 남은 상황이라면 그야말로 ‘이제 이렇게 내 인생을 마무리하게 되나보다’ 그런 회한과 아쉬움에 충분히 잠길수 있는 그런 나이다. - 게다가 ‘선대의 유업’이라면 그렇게 일제때 왜X들한테 강제로 땅 빼앗긴 그런 집안이라면 선대의 유업이 바로 ‘몰락한 양반가문을 일으켜야 한다’는 소리말고 또 다른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 유업은 결국 자신이 이루지 못하고 자신은 이렇게 서울 성북지역에서 조그만 잡화점이나 운영하며 아들 넷을 키워 장가보내는 것으로 자신의 삶이 마무리되고 ‘몰락한 양반가문을 일으켜야 한다’는 선대의 유업은 자신이 잇지 못하고 결국 다음대로 넘길 수밖에 없다는게 최웅돈 선생의 끝끝내 가슴속에서 지우기 힘든 회한이 되고 한탄이 되고 아쉬움이 되리라.  

 


 “ 경환아, 이리 좀 들어와보거라. ” 

 경환의 고심이 날로 깊어가는 가운데 부모님이 봐주신 상대 여성과의 선을 보는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헌데 무슨 결혼이나 약혼전야도 아니고 그래봤자 선을 보는 자린데 – 중매가 보편적인 시대라지만 선을 보고 상대가 마음에 안들면 딱지를 놓을수도 있는 것이다. - 굳이 이런 상황에서 부모님이 막내인 자신에게 특별히 당부말씀 같은 것을 하실일이 있을까. 경환도 평상시 성정은 대체로 효심 지극한편에 속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 경우는 좀 납득이 안가서 이해가 안가는 가운데 안방으로 들어섰다. 뜻밖에도 셋째형 성환도 함께 있었다. 

 “ 너...사귀는 여자가 있다는게 사실이냐 ? ”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경환은 흘깃 성환을 바라보았다. 굳이 이런 자리에 셋째형이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대충 짐작은 했지만 역시 형이 부모님께 말씀을 드린 모양이다. 성환은 입모양과 손짓등으로 ‘그러지말고 솔직하게 부모님께 말씀드리라’는 식의 표현을 하고 있었고 그래도 경환의 천성탓에 아직 용기있게 쉬이 말을 못 꺼내는 상황. 성환이 거듭 답답해서 손짓을 다시금 해보이는데 상황이 이렇게까지 몰리자 형의 난처함을 없이하기 위해서라도 솔직하게 털어놓는 상황이 될 수밖에 없다. 쭈볏거리면서 결국 경환의 입이 열린다. 

 “ 그게 저어...다니는 회사에 입사초기부터 알고 지내던 사환 여직원이 하나 있었습 

  니다만... ” 

 “ ...... ” 

 “ 지방출신이고 나이도 어려 아직 세상물정을 많이 모르고 서툰 것 같아서 제가 

  이런거 저런거 가르쳐주다가...좀 가까워지긴 했습니다. ” 

 “ 허면 그 여자를 사랑하느냐 ? ” 

 사랑이란 단어가 사실 이 무렵이면 드라마나 소설같은데는 표현이 될수 있어도 일상에서 그것도 나이많은 노인이 입에 올릴 수 있는 단어는 아니다. 그래도 기왕이면 아들의 편을 들어주고 싶은것인지 아니면 어쨌든 기왕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굳이 선을보고 어쩌고 할것없이 그쪽을 한번 만나보기는 할 의사가 있는것인지 이와같이 묻는 최웅돈 선생. 경환의 입이 조심스레 열린다. 

 “ 제가 지금까지 살면서 부모님 말씀을 거역한적은 한번도 없습니다만... ” 

 “ ...... ” 

 “ 그래도...제가 지금 만나고 있는 여자에게 상처를 주고픈 마음은 없습니다. ” 

 웅돈이 잠시 아내를 바라보았다. 허나 전노파는 이미 표정이 일그러져있었다. 그냥 이 상황 자체가 싫은것인지. 언제는 아무리 이대나온 간호사라지만 8남매중 맏이라 집에서 가장노릇 하고있고 게다가 그 부친이 비리혐의로 구속된뒤 세상을 떠난 그런 사람이라니. 영 마음에들어 하지 않더니 오히려 이제와선 경환이 자신의 뜻을 어기고 제멋대로 사귀는 여자가 있다는 것이 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것인지. 여하튼 이 시대 가치관의 기준으로는 웅돈이나 전노파도 쉬이 결정할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던 듯 하다. 게다가 이미 선을 보기로 한 상대여성과의 맞선날짜와 시간이 이미 정해져있어 바로 다음날이 아닌가. 그래서 바로 이런 상황임에도 사귀는 여자가 있다는 것을 부모님께 제대로 말씀도 못드리고 우유부단하게 있는 동생이 안타까와 형 성환이 먼저 말씀을 드린것이긴 하지만, 일단 웅돈과 전노파 내외는 경환도 성환도 모두 나가보라고 한뒤 다시 한숨쉬는 고민이 이어지고 있었다. 

 “ 여보... ” 

 “ ...... ” 

 “ 손 귀한 집안이잖아요. 우리 집안은... ” 

 전노파의 말은 사실이다. 실은 공교롭게도 최웅돈 선생의 집안은 일제때 토지조사작업 등록거부로 땅을 빼앗긴 그런 상처가 있는 집안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이러다 자칫 ‘집안의 대가 끊기는 것 아닌가’ 하는 위기상황이 있던 그런 집안이기도 하다. 다름아닌 최웅돈 선생의 부친과 조부가 모두 무녀독남(無女獨男)의 외동아들이었던 것. 다행히 ‘3대독자’까진 가지 않고 최웅돈은 밑으로 열 살정도 터울지는 남동생이 하나 더 있긴 하지만 그 윗대는 여하튼 아들이 달랑 하나뿐이라 – 그것도 일제 강점기 이전인 조선말기에 - ‘이러다 집안 대가 끊기면 어쩌나’ 하는 노심초사가 보통이 아니었던 그런 집안이기도 했다. - 그런 집안에서 전노파는 또 그것도 맏이에게 시집와서는 아들 넷을 낳았으니 그런 전노파는 젊은 시절엔 집안에서 얼마나 이쁨받는 며느리였으랴. 무엇보다 최웅돈 선생의 가문에 대 끊길 위기를 없이하는데 공훈을 톡톡히 세운 그런 여인인것만은 분명하다. 허나 그런 전노파 역시 시집왔을때는 시어머니로부터든 시할머니로부터든 ‘손귀한 집안이니 대 이을 아들은 꼭 많이 낳아야 한다’는 신신당부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으리라. 헌데 지금 이런 상황에서 손귀한 집안인 문제가 굳이 상관할 사안이 될까. 여하튼 이대나온 간호사 출신이라는 경환의 맞선상대를 집안문제 때문에 영 마땅치 않게 여기고 있는 전노파. 이런 상황에서 경환이 자기회사에 다니는 고졸의 여사환을 사귀고 있다면 과연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여하튼 쉽게 결정하기 힘든 문제였을것만은 분명하다. 

 “ 일단 한번 데리고 와 보거라. 어떤 여자인지 얼굴은 한번 보자꾸나. ” 

 밤새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결국 아들이 사귄다는 여자를 한번 만나는 보겠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듯한 최웅돈 선생 부부. 당연히 원래 이날 약속이 되어있었던 맞선은 취소가 될 수밖에 없다. 이미 선을 보기로 하고 갑자기 취소를 하는게 이 시대의 가치관으로 통용이 될수 있었을련지는 모르겠는데 그래도 만약 당사자가 아프다던가 혹은 가족,친지의 상을 갑자기 당하는것과 같은 돌발사태가 벌어졌다면 양해를 전혀 구하지 못할일은 아니다. 최웅돈 선생이 일단 애초에 중신을 섰다는 매파에게 전화를 걸어 ‘실은 먼 친척상을 갑자기 당해서 온 가족이 목포까지 한 2-3일 내려갔다와야 한다. 그래서 죄송하지만 선은 다음기회로 미루어야 할 것 같다’는 핑계로 양해를 구했다. 지방으로 가는 대중교통 수단은 아직 기차외에는 그리 원활하지 못하던 시절이니 그런일로 지방까지 내려가야한다면 누구라도 충분히 납득할수 있는 핑계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바로 다음날 갑자기 데려오는 것은 쉽지 않을터이니 그 다음주 토요일에 경환이 가인을 데려오는 것으로 날짜를 잡았다. 

 “ 아저씨. 어떻소. 이 정도면 괜찮어요 ? ” 

 전라도 사투리 짙은 가인은 막상 그렇게 경환의 부모님을 만나뵈러 간다는 사실에, 애초 행여 경환이 자신을 버리면 어찌하나 하던 근심과는 달리 반가와지면서도 어떻게 하면 예비 시부모님(?)께 책잡힐일은 행여 없을지 밤낮으로 근심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진도에 사는 자기 어머니를 이 상황에서 갑자기 올라오라고 해서 도움이나 조언을 받기도 쉽지 않을일이고 – 이 시대에 진도 정도면 아직 전화도 흔치 않았을 것이다. - 따라서 나름 딴에는 빌려서라도 맞춰입은 옷. 경환을 만난 자리에서 몇 번이고 다시금 살펴달라,살펴달라 말하였다. 경환은 그런 가인을 달래듯 ‘이쁘니 괜찮다’고 말했고 일단 그렇게 가인을 데리고 성북동의 집으로 향했다. 

 “ 돌아가시오 !!! ” 

 문전박대. 막상 그렇게 경환이 가인을 데리고 오자 뜻밖에 전노파의 ‘제1성’이 그것이었다. 어쨌든 최웅돈 선생은 ‘한번 만나보자’는 식으로 결론을 내린것인데 전노파의 생각은 그 사이 달라진것일까. 집안으로 들어서는 가인을 보자마자 기겁하며 바로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 내가 알기로 내 아들과 선을 보는 여자는 이화여대 나온 간호원인걸로 알고있소. 

  헌데 대체 이게 무슨...아무래도 그쪽 처자가 집을 잘못 찾아오신 것 같구료... ” 

 “ 어...어머니... ” 

 당황한 가인이 순간적으로 자신도 모르게 전노파를 그렇게 부르긴 했는데 노파는 더욱 가당찮다는 듯 호통을 쳤다. 

 “ 어머니라니 !!! 당치도 않은 소리 말아요. 그 집안에선 아무 지나가는 노인한테나 

  어머니라 부르라고 그렇게 가르칩디까 ? 나 댁같은 딸도 며느리도 둔적 없으니 어 

  서 돌아가시란 말이오. ” 

 “ 어...어머니... ” 

 대체 무엇이 마음에 안 들어서 전노파는 집안으로 들어서는 막내 경환의 여자를 보자마자 이리 문전박대를 한 것일까. 전라도 사투리 짙은 진도출신의 여자. 고등학교도 졸업하기 전에 집을 나와 무작정 상경 대기업 사환으로 일하며 돈을 번 여자. 어머니는 진도 읍내에서 된장을 만들어 파는 여자고 아버지는 시골에서 그냥 농사지으며 사셨다는 것 외엔 딸 가인조차도 자세히 구체적으로 아는 정보는 별로 없는 듯. 이런 오만가지 열악한 여건에 있는 여인이기도 하지만, 시간이 훨씬 지난뒤 전노파는 손자,손녀들 보는 앞에서 넷째며느리를 처음 보던날의 느낌을 이렇게 말했다. 

 ‘ 어디서 웬 고릴라나 킹콩같은 여자가 들어오더라지 뭐냐... ’ 

 사실 ‘킹콩’이란 영화는 70년대에 국내에서 개봉을 했으니 그것도 60년대 후반에 문맹의 노파가 알 수 있는 영화는 아닌데, 그러니 ‘킹콩’ 같은 말은 나중에 시간이 지난뒤에 전노파가 어디서 귀동냥으로 들어본듯하고, 여하튼 키도 크고 체구도 제법 뚱뚱한편에 속하는 그런 열아홉살 가인이 전노파의 첫눈에 그런 느낌으로 받아들여졌나보다. 전라도 사투리 짙은 키크고 뚱뚱한 한눈에 봐도 무식해보이는 여자. 노파가 가인을 처음 보았을 때 첫 느낌이 그와같았다는 이야기다.  

 

2회에 계속 

 

 

 

 

 

덧글

  • 훼드라 2023/04/11 06:29 답글

    이 작품을 끝으로 앞으로 이글루스에선 더 이상의 소설연재는 하지 않습니다
    사실상 마지막 작품이 될듯합니다

    이글루스가 사실상 파장분위기인것 같아 더 이상 소설연재가 의미가 없을것 같아
    내린 결정입니다

    그동안 부족한 작품에 관심가져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깊은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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