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대도사 일대기
“ 이 사람아 !!! 이건 아닐세 !!! 이게 도대체 말이 되나 !!! 당연히 늙은 내가 먼저
죽고 젊은 자네가 오래 살아야지...나도 여태 살아있는데 아직 앞날도 창창하고 나
이도 어린 자네가 먼저가면 어찌하나 !!! 이 사람아 자네가 이렇게 가면 나는 어찌
하라고...이 핏덩이를 두고 가버리면 늙은 내가 이제 어찌하라고...이 다 늙은 내가
이 어린 핏덩이를 혼자 어찌 키우라고 간단말인가. 이 사람아...정말 이건 아닐세.
당연히 늙은 내가 먼저 가고 자네가 오래 살아서 이 아이를 돌봐줘야지...이 어린
것을 두고 자네가 먼저 가버리면 난 어쩌란 말인가. 이 사람아...이 사람 연지...정
말 이건 아닐세...이 사람 연지...이건 정말 아냐 !!! ”
김노인은 처절하게 울부짖고 있었다. 산파의 말을 듣고 집으로 달려와보니 확실히 진통이 너무나 심했던 연지는 어느덧 싸늘한 주검이 되어있었고 그 대신 아직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를 알길 없는 갓난아기는 다른 산파의 품에 안겨 그저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확실하게 아들이었고 건강하고 튼실해보이는 그런 사내아이였지만 그런 사내아이를 낳은 열일곱살 연지는 이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다. 아직은 그래도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듯한 연지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김노인은 억장이 무너지는 아픔으로 처절하게 울부짖고 있었다.
“ 이 사람 연지...이렇게 기가막히게 가버리면 어쩌란 말인가. 이렇게 허망하게 가
버리면 난 어쩌란말야. 우리 약속하지 않았는가. 내가 죽고나면 자네는 내가 자유
롭게 놓아주겠다고. 대신 내가 가고나면 우리가 낳은 이 아이만은 자네가 잘 키워
주고 보살펴주겠노라고...그리 약속해놓고 이리 가버린단 말인가. 나 죽으면 자네
자유롭게 해주겠다 분명 약속했건만 그 약속이 못 미더워 이리 가버린단 말인가.
아니면 이 늙은것의 어린 아이를 돌봐주고 보살필 생각을 하니 그게 차마 못할일
같아 이렇게 가버린단 말인가. 모진세상...한많고 사연많은 세상...더 살고 싶지 않
아 이렇게 가버린단 말인가. 이 사람 연지 !!! 이건 정말 아닐세. 이건 아냐 !!!
이건 정말 아니란 말일세 연지 !!! ”
하긴 열일곱살 아직 꽃다운 나이의 연지였지만 그녀의 팔자도 참 기구하긴 했다. 그래도 나이 40넘어 낳은 늦둥이 딸이라서 부모 사랑은 듬뿍 받으며 자랐건만 열다섯살 나이에 몹쓸 사내들에게 봉변을 당하고 그후 한동안은 집밖으로도 함부로 나오지 못하는 그런 신세가 되어버린 연지. 그 처지를 딱하게 여긴 동네 이장이 이대로 죽게 내버려둘수는 없으니 사람하나 살리자는 방편으로 80의 김노인과 혼인을 시키기로 결심했고, 처음엔 체념하듯 그 혼사를 받아들인 연지. 허나 어쨌든 김노인은 어린 아내를 끔찍하게 귀여워하고 이뻐해줬고 막상 아이를 갖게되자 자신이 떠나고나면 연지를 자유롭게 해줄테니 그대신 우리 사이에 낳은 아이는 이 다음에 자신(김노인)의 제사를 차려줄 자신의 자손으로 분명하게 해달라는 그 약조를 하지 않았던가. 허나 이렇게 난산과 진통 끝에 건강하고 튼실한 아들만 하나 낳아주고 열일곱 나이에 생을 마감해버린 연지. 짧은 생이지만 그 짧은 인생중에서도 적은 비중에 불과한 2년동안 그 이전 15년 인생보다 훨씬 더한 일들을 겪다 그리 가버린 연지. 김노인은 그 연지에 대한 딱하고 안타깝고 불쌍한 마음에 한바탕 처절하게 더 울부짖을뿐이다.
장례야 정식으로 치르는 절차가 있긴 하지만 김노인은 사흘장만 정중하게 치르고 손수 뒷산으로 연지 시신을 안고가 그대로 묻어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묻는게 아니라 두고두고 그 불쌍한 어린 연지를 시신이 되었을망정 그대로 곁에 두고 싶었으나 그럴수는 없는 것. 차라리 마지막 가는길을 자신이 직접 살펴주겠노라 그리 한 것이다. 팔순노인이니 여하튼 기력이 세다고는 할수 없을텐데도 손수 연지의 시신을 안고 뒷산 중턱부근까지 올라가 그곳에 직접 땅을 파고 연지의 무덤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고이 묻어주는 연지의 시신. 무덤 형상을 다 완성하고 나서 그것을 어루만지며 김노인은 이렇게 독백처럼 말했다.
“ 대신 우리아이는 내가 알아서 잘 키울테니 너무 염려말게. 솔직히 나도 이제 생이
얼마나 남았을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내 살아있는 동안에는 내 힘 닿는데까지 저 아
이 잘 건사하고 나중일까지 잘 좀 부탁하고 갈테니 너무 걱정말고 편히 떠나게. 그
럼 이 사람 연지 어여 잘가게. 우리 아이는 내가 알아서 잘 돌볼테니 너무 걱정말
고 편히 떠나란 말일세. ”
열일곱 어린 연지의 혼백이라도 되는지 무덤 한쪽에 작은 꽃 한송이가 피어나는 것 같기도 했는데 일단 김노인은 망연자실하게 터벅터벅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김노인은 한동안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고 그저 망연자실하게 있을 뿐이었다.
“ 어르신...어르신. 기운차리셔요. 그리고 아이 젖은 물려야죠. 이리 주세요. 제가 도
와드릴터이니... ”
태어나자마자 어미를 잃은 아기이건만 운이 좋은것일까. 아니면 사주팔자가 좋은것일까. 아이에게 젖을 물리겠다는 젊은 아낙들이 줄을 섰다. 사실 김노인의 사연 자체가 결코 범상한 것이 아니라 동네는 물론 이웃마을까지 소문이 안날수가 없다. 나이 80 넘은 노인이 성폭행 피해를 입은 열다섯살 어린 소녀를 아내로 맞이했다는 것 자체부터가 결코 평범한 사연이 아닌데, 그 80노인의 어린 아내가 결혼 몇 달만에 임신을 하게되고 열달후 출산을 하였는데, 정작 그 아이는 살아나고 어린 어미가 열일곱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니 세상에 그런 기가막힌 일이 어디 있겠는가. 동네나 이웃주민이 아니라 생전 처음 사연을 들어보는 사람이라도 그 기가막힌 팔자에 놀라고 안타까와 하지 않을수 없는 일일것이리라. 그래서일까. 이대로 보고만 있을수는 없다는 듯 특히 젊은 아낙들이 줄을 서서 어쨌든 아이는 살리고 봐야하지 않겠냐며 ‘젖동냥’을 주겠다며 줄을 선 것이다. 동네 아낙들뿐만 아니라 다른 주민들도 수소문을 해서 이웃마을 주민중에도 갓난아기에게 젖을 물릴수 있을만한 젊은 여성을 수소문해 데리고 와 한동안 김노인 집 앞엔 아이 젖동냥을 자처하는 젊은 아낙들이 줄을 설 지경까지 되었다. 심봉사는 딸 심청이의 젖동냥을 위해 동네방네를 안타깝게 돌아다닐 수밖에 없었지만 되려 김노인은 가만히 있어도 젖동냥 주겠다는 젊은 아낙들이 줄을 서는 지경. 이쯤되면 김노인이든 그 아이든 팔자가 기구한것인지 좋은것인지 헷갈릴 지경이기까지 하다. 그래서 적어도 어미젖이 필요한 갓 태어난 얼마동안은 큰 탈없이 무럭무럭 자랄수 있는 아이. 한편 얼마 지나지 않아 김노인은 아이 이름을 성국(性國)이라고 지었다.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 별다른 고민없이 지은 이름이다. 일단 김노인이 자신의 출생내력을 전혀 모르는 사람은 아니고 또한 젊은 시절을 파란만장하게 여기저기 떠돌아다녀서 그렇지 글을 아주 모르는 사람은 아니라 대충 아는 한자들을 조합해서 그런 이름을 지은 것이다. 그렇게 태어난지 몇 달만에 ‘성국’이란 이름까지 갖게된 아이. 아이는 한동안 무탈하게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아이의 나이가 대략 네 살정도(만으론 3세)가 되어 있었다. 그 정도 나이면 자기발로 걸을수도 있고 말도 어느정도 잘 한다면 잘 할수 있는 나이긴 하지만 아직 자기 의지로 어디론가를 간다던가 사유(思惟)를 할수 있다고 보기엔 무리인 나이. 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국’이란 이름을 아버지 김노인이 지어준 이 아이는 벌써부터 조숙해지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어머니도 없이 할아버지나 다름없는 아버지와 함께 살고있는 환경으로 인한 어떤 ‘자격지심’이라도 생기는것일까. 가끔씩 우두커니 집 밖 마루에 혼자 나와 앉아 우두커니 바깥하늘을 바라보는 일이 종종 있었다. 김노인이 그러면 의아해서 가끔 다가가보곤 했다.
“ 아가...거 날도 추운데 거기서 뭐하냐 ? 어서 들어오지않구. ”
사실 아직 날이 추운때라고 볼수는 없고 그저 아이가 걱정되어서 하는말. 허나 대꾸없이 먼하늘만 바라보는 아이. 결국 김노인이 다가가 앉으며 말을 건넨다.
“ 왜 ? 애비가 다 늙은 할애비라 보기 싫은게야 ? ”
혹시 그래서 아이가 이렇게 마치 우울증에라도 걸린 아이처럼 말수도 적고 이런것인가 하는 걱정도 생겨 그렇게 묻는 김노인. 허나 아이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젓는다. 일단 어른의 말귀를 전혀 못 알아들을 나이는 아니니 진심이든 아니든 일단 안도하는 모습을 보이는 김노인. 아이를 격려하듯 어깨를 한번 두드려주며 이렇게 말한다.
“ 미안하다. 이 애비가 그래도 조금이라도 젊을 때 널 낳았어야 하는건데...어쩌다
이 애비 팔자가 사나와서 이리된 것을 어쩌겠느냐. 다 용서하고 이해해 주려무나.
”
허나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꾸가 없는 아이. 김노인이 한참 그런 성국을 바라보다 방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서랍에서 뭔가를 꺼내 가져온다.
“ 이걸 보려무나. ”
김노인이 아이에게 건네주는 것은 젊은 여자가 있는 두장의 흑백사진이다. 실은 다름 아닌 바로 연지의 사진이다. 그래도 다행히 생전 연지와 결혼해서 얼마되지 않을 때 읍내 사진관에 나가서 기념사진도 찍었고 사진기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에게 부탁 동네 마을어귀에서도 찍어둔 사진도 한 장 있다. 아직 연지가 임신도 하기 전이니 여하튼 한참 신혼일때이기도 한데, 여하튼 그때 찍어둔 사진이 있는 것이 다행이란 생각을 하며 아이에게 보여주며 설명한다.
“ 이게 니 어미여. 안타깝게도 널 낳아주고 바로 저 세상으로 가버렸지만... ”
“ ...... ”
“ 그래도 이렇게 사진으로만이라도 남아있는 네 어미니...이걸 보면서 네 어미를 떠
올려보도록 하려무나. ”
그렇게 젊고 예쁜 모습의 흑백사진으로 남아있는 연지의 모습. 김노인의 설명을 들으며 사진을 건네받은 성국은 한참을 그것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속으로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길 없지만 사진을 한참 바라보는 아이. 김노인이 그 모습을 애틋하게 지켜보고 있다.
“ 이 사람 날세. ”
추석이나 설같은 명절은 아니고 제삿날도 아니지만 하루는 김노인이 아이를 데리고 연지의 무덤을 찾았다. 자신이 직접 연지의 시신을 안고가서 묻어준 그곳으로. 그러고보니 그렇게 연지가 떠난지도 어느덧 3년의 시간이 지나지 않았나. 새삼 세월의 무심함을 실감하며 연지 무덤앞에 아이를 보여주며 이리 말한다.
“ 그래도 우리 성국이가 이렇게 자랐네. 자네가 살아서 이 아이 이리 자라는 모습을
봤어야 하는건데... ”
한숨을 내쉬는 김노인. 이래저래 팔자에 대한 기구한 생각에 한숨이 안 나올수가 없다. 눈시울 적셔지는 얼굴로 김노인의 넋두리가 계속 이어진다.
“ 자네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나만 이리 부질없는 목숨이 이리 살아있으니
참...신령님이든 천지신명이든 어디 계시면...참 무심하고 해도 너무하다는 말밖에
안 나오네. 솔직히 내가 이제 정말 살면 얼마나 살겠나. ”
하긴 이제 80대 초반도 아니고 대략 중반쯤 조금만 더 지나면 90에 이를수 있는 김노인의 나이다. 단순한 나이뿐만의 문제가 아니라 예전엔 그 좋다고 소문난 손재주나 기술도 예전같지 않고 오히려 실수가 잦고 이따금 만들어내는 낫이나 쟁기도 불량품이 되버릴때가 많다. 그렇게 기력뿐만 아니라 재주나 기술도 점점 예전같지가 않은 김노인. 그래서 이제 자신도 정말 살날이 머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그저 눈물과 탄식밖에 나오지 않는다.
“ 나 마저 떠나면...이 어린 것은 또 어찌할지...참...그걸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리
네. 내 마지막 남은 소망이 있다면...죽어서 이렇게 내 손으로 직접 묻어준 자네 곁
에 묻히고픈 소망이 있건만...이 어린 것은 그런 애비 마음을 알기나 할려는지...여
하튼 이래저래 자네나 나나 참 기구한 팔자였다는 그 말밖에 할말이 없네. ”
무덤에서 넋두리만 쏟아봤자 부질없는 짓이란걸 깨달은걸까. 그쯤에서 눈물을 거두고 아이를 데리고 내려오긴 한다. 한편 이제 겨우 만3세인 성국은 이런 아버지의 넋두리를 어찌 이해하고 알아듣고는 있을까. 말없이 그런 김노인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그런 아이를 데리고 산을 내려와 집으로 향하는 김노인. 날은 이미 저물고 있다.
6.25 동란이 있은게 그 1년후의 일이다. 김노인도 당연히 아이를 데리고 피난을 가는수밖에 없었다. 비록 나이는 80 고령이지만 그래도 소싯적에 워낙 여기저기를 돌아다녀본 경험이 많은 김노인이라서인지 일시적으로나마 다른 지역으로 피신해가서 사는것에는 그런대로 노하우가 있었다. 다만 이전에는 주로 한양 이북의 함경도나 만주 같은 북쪽지방을 돌아다녔다면 지금은 남쪽으로 피난을 가야한다는게 문제. 여하튼 아이를 데리고 부산까지 피난을 간 김노인은 거기서도 낫이나 쟁기 혹은 이런저런 철제도구들을 만드는일을 하며 그럭저럭 생계를 유지할수 있었다. 그리고 1년쯤 뒤. 1.4후퇴와 3월 서울 재수복(1951년)이 있고도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 전쟁이 어느정도 소강국면으로 접어들고 휴전협상이 진행되고 있을 때 김노인도 아이를 데리고 원래 살던 옥천땅으로 복귀하긴 했다.
돌아와보니 동네고 집이고 이미 말은 아니었다. 예전 살던 집을 대충청소도 하고 수리도 해서 그런대로 복구작업은 마무리할수 있었으나 이미 김노인의 몸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사실상 이제 90을 바라보고 있는 김노인이 아니던가. 게다가 부산까지 피난을 가서 1년여를 살면서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인지 몸은 날로 쇠약해져가고 있었다. 그래도 옥천으로 돌아와 집을 수리하고 복구할때까진 어느정도 몸을 움직일수 있었지만 그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사실상 몸져 알아눕는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전까진 그래도 낫이나 쟁기 기타 철제도구라도 만들어 팔며 생계를 유지하던 김노인이었는데 이젠 사실상 이웃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밥을 억어먹으며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처지. 김노인의 아들 성국도 아직 어린 아이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는가.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이가 그런대로 똘똘하게 자랐는지 때가되면 제 발로 도움을 주던 이웃 아주머니에게 찾아가서는 ‘우리집 밥을 달라’며 구걸을 해오기도 했다. 참 안타까우면서도 기특해보이는 한 장면이 아닐수가 없었다.
노인은 1년을 누워있다시피 하다 세상을 떠났다. 그게 대략 1952년 가을쯤의 일이다. 휴전협상이 진행중이긴 하지만 전쟁상태가 완전히 마무리 되었다고 볼수는 없는 상황. 무엇보다 김노인의 아들 성국이 이제 학교도 다니고 해야하는 나이인데 김노인의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런것들을 도저히 정상적으로 처리할 수가 없었다. 김노인의 상을 동네이장이 직접 도와서 챙겨주고는 마을주민들을 불러 대책을 의논했다.
“ 그...성국이 문제를 좀 해결해야 할 것 같아서 다들 좀 모이라고 했습니다만... ”
사실 동네 이장은 해방 전후때 김노인과 연지의 혼사를 성사시킨 당시 50대였던 이장이 한 몇 년후 개인사정으로 그만두고 다른 사람이 한동안 동네 이장을 맡았다. 허나 전쟁통에 사람들이 다 뿔뿔이 흩어졌다 하나하나 돌아오는 상황이 되었을때쯤 그때 이장을 하던 사람을 다시 마을주민들이 동네이장으로 재선출. 어느덧 나이 60이 된 원래 김노인과 연지 혼사를 성사시켰던 그 이장이 다시 동네이장이 되어있는 것이다. 여하튼 한때 그렇게 동네의 이런저런 자잘한 수리나 공사일을 도와주기도 하고 손수 작은 대장간이라도 만들어 낫이나 쟁기 또는 이런저런 철제도구들을 만들어 싼값에 팔던 그 김노인이 세상을 떠난 상태에서 그 하나남은 핏줄인 성국이란 아이의 문제를 어찌 해결할것인지. 동네주민 모두 걱정이 되어 대책을 의논하지 않을수 없는 일이었다.
“ 제가 좀 그러잖아도 생각해둔게 있습니다. ”
농사보다는 읍내에서 장사를 하면서 그런대로 돈을 좀 번 한 중년 남자가 의견을 냈다. 그 의견은 대충 이러했다.
“ 실은 제가 읍내에서 장사를 하면서 대충 교류가 있었던 노OO이란 사장님이 계
세요. 아시는분도 계실련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OO군에서 과수원과 정미소를 하시
며 제법 떼돈을 버신 그런 분이시죠. ”
노 모라는 사장에 대해선 일단 들어본 이도 있고 그러지 못한이도 있는듯한 분위기였다. 헌데 대체 뭘 어쩌자는것인지. 의견을 낸 중년남자의 말이 이어졌다.
“ 뭐 그분도 전쟁통에 잠시 가족들을 데리고 피난을 가셨다가 얼마전에 돌아오셨긴
합니다만...전쟁때 엉망이 된 과수원과 정미소도 다 복구를 하시고 지금은 다 정상
적으로 운영을 하고 계신 상태더라구요. ”
“ 그래서 뭐...어쩌자는 이야긴가요. ”
그래서 뭘 어쩌자는것인지. 서론이 좀 길어지는 것 같자 몇몇 주민들이 본론을 재촉했다. 사실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도 아니고 망설일만한 문제도 아닌지라 중년남자의 의견은 이어졌다.
“ 사실 그분도 손귀한 집인데다가...사모님과 사이에 딸만 넷이 있고 아직 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세요. ”
“ 그래서 ? ”
“ 성국이를 그분댁에 양자로 보내면 어떨까. 그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
양자(養子). 아이러니하게도 ‘대를 이을 아들 하나는 있어야 한다’거나 ‘집안 제사를 이어갈 자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최고의 가치관이던 시절엔 입양의 가장 좋은 명분이 되는 일이긴 했다. 친척간에 양자를 주고받는 경우도 있었고, 아주 천애고아로 떠돌아다니는 아이를 양자로 거두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적어도 다른 문제는 몰라도 손 귀한 집안에 양자로 들이게 하는 일은 생각처럼 그렇게 어려운일은 아니다. 다만 이들 입장에서 난색을 표하게 되는 문제는 어쨌든 이 동네에서 40년을 살면서 동네 오만 궂은일을 다 도와주곤 했던 그런 고마웠던 김노인이 그것도 나이 80을 넘겨 동네 이장의 권유로 치러진 혼사로 보게된 자손이 아니던가. 헌데 그런 아들을 어쨌든 남의집 양자로 보낸다는 것. 좀 난감하다면 난감한 일이긴 했다. 그래서인지 다른 주민이 대안을 내놓기로 한다.
“ 그러지말고 차라리 고아원에 보내는게 어떨까요 ? 안 그래도 요즘 전쟁고아를 거
두는 고아원이 여기저가 늘어나는 추세인데...보아하니 대충 청주나 대전에도 그런
고아원이 한둘 생겼다고 들었어요. 그러니... ”
다른건 몰라도 전쟁고아들이 넘쳐나던 시절이니 그 아이들을 거둘 필요성에 여기저기 ‘고아원’이 생겨나기 시작하던 그런 시대다. 적어도 ‘고아원’이란 개념은 6.25 동란을 거치면서 이 나라 백성들에게 확실하게 뿌리박히게 된 것이라고나 할까. 어떤곳에서는 미군부대가 나서기도 하고 어떤곳에서는 교회나 성당 같은 종교시설들이 나서고 또는 어느어느 부호가 ‘죽어 싸갖고 갈 재산도 아닌데...’하면서 사재를 다 털어 고아원을 세우는 경우도 있고. 그렇게 전쟁고아들을 거두는 고아원만큼은 충분할만큼 생겨나던 시절이니 자연스럽게 이들도 그런쪽의 생각을 안 해볼수가 없다. 허나 오히려 처음 노 모라는 사장집에 양자로 보내자는 의견을 낸 중년남자가 그 부분에 부정적 의견을 내놓는다.
“ 헌데 고아원은 아무래도 각지에서 떠돌던 아이들이 전부 모여지는 그런곳이다보니
...그런데 다른 아이도 아닌 성국이를 보내는건 좀...어쨌거나 곧 학교 가야할 나이
기도 하고 그래도 밥은 굶지 않으면서 조금이라도 편하고 온전한 환경에서 자라게
해주는게 좋지 않겠어요 ? 그러니 전 고아원에 보내느니 차라리 노사장님댁 양자로
보내는게 더 낫다고 봅니다. ”
그런식의 논쟁이 좀 벌어지다 결국 결론은 노 모라는 사장집에 양자로 보내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결국 중년남자가 얼마후 시간을 내서 문제의 노사장을 만나 의견을 타진했다. 사실 막상 이런 제안을 받은 노사장은 좀 고민을 하는 듯 했으나 여하튼 ‘아들이 생기는 것’이니 그리 싫지는 않은지 결국 이 제안을 받기로 했다. 중년남자가 동네이장과 함께 성국을 데리고 노사장댁을 찾아갔다.
“ 어서 오너라. 그래 네 이름이 뭐라고 ? ”
어느덧 여섯 살(만 나이)이 되어있는 성국은 낯선곳에 온 두려움과 떨림 때문인지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있다. 노사장이 그런 성국을 달래듯이 좋은말로 잘 타일러보았고 먹을 것을 좀 내주기도 했다. 성국을 데려온 중년남자와 동네이장이 적당히 핑계를 대고 그곳을 떠나고 노사장은 혼자 뭔가를 고민하는 듯 하다 붓글씨로 화선지에 크게 적어서 뭔가를 성국에게 보여주었다.
“ ‘받들 승(承)’, ‘큰물 홍(洪)’ 이제부터 이게 네 이름이란다. 내가 직접 이 집안의
돌림자를 따서 네 이름을 직접 지어주는게야. ”
어린 나이지만 그런대로 눈치가 좀 빠른것일까. 성국은 이대로 자신이 이 집안에 양자가 된다는 것을 눈치를 채는 듯 하다. 허나 그래서일까.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 당황한 노사장이 아이를 달랜다.
“ 얘, 얘 왜 그러니 ? 진정하거라. 아저씨 나쁜사람 아니야. 널 어떻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널 이 집안에 양자로 들이는게야. 네가 내 아들이 되는 것이래두. ”
허나 어쨌든 ‘양자로 들어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주 모르지는 않는것인지. 비록 나이많은 할아버지이긴 했지만 얼마전까지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와 분명히 함께 살았던 몸으로 갑자기 얼굴도 모르는 낯선 아저씨의 양자가 된다는 것. 어린 마음에 뭔가 충격이고 어떤 두려움과 무서움으로 다가올수도 있다. 여하튼 이대로 강행하는 것은 좀 곤란하다는 판단이 들었는지 노사장은 일단 아이가 쓸 방부터 내주고 그곳에서 심신을 안정시킬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노사장은 자신의 네 딸을 불렀다. 사실 노사장의 딸들도 모두 ‘승(承)’자 돌림으로 이름은 각기 승자,승옥,승미,승희다. 나이는 이때 다들 열 살을 넘은 10대 소녀들로 성국보다 나이가 많으니 성국이 만약 지금부터 노승홍이란 새 이름으로 이 집 아들로 살게되면 이들 딸 넷은 모두 승홍의 누나가 된다. 그래서 노사장은 네 딸을 불러서 이렇게 당부한다.
“ 대충 집안 분위기 돌아가는 것을 보며 짐작했겠지만 실은 양자를 들이기로 했다.
”
열 아홉 살 큰딸에서부터 열 살 막내에 이르기까지 여하튼 아주 철없는 어린 아이들은 분명 아닌 집안 대소사나 돌아가는 분위기 정도는 충분히 인지할수 있는 나이라서인지 네 딸은 다소 착잡한 심경으로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 뭐 대충 사연을 들어보니 저 아이도 전쟁통에 부모잃고...그렇게 아주 딱한 처지가
된 그런 아이로구나. 그래서 겸사겸사 이 집안 제사를 이어갈 아이도 필요하고 하
니...그래서 들인 양자라 생각하고 너희도 순종하였으면 좋겠다. ”
“ ...... ”
“ 어쨌든 너희들이 모두 저 아이에게 누나가 되는 것 아니냐. 그러니 부디 잘 해주
도록 해. ”
사실 노사장이 사는곳은 옥천군은 아닌 인근 군 지역에 사는 주민이고 특히 성국이 살아오던 OO면에선 거리가 꽤 떨어진 지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수원과 정미소를 하면서 여기저기 인맥도 많았던 노사장도 옥천의 어느 마을에 나이 80이 다 되도록 장가를 못간 어느 노인이 늘그막에 혼인을 하게되어...대충 그런식의 소문은 들은바가 있다. 다만 소문 내용이 해괴하다기 보다는 좀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 어쨌든 나이 80을 넘긴 노인이 자손을 보았다는 것은 쉽게 믿겨지지 않는 일인것만은 분명하다. - 그냥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뭔가 과장되거나 잘못 전해진 이야기려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성국이란 아이가 바로 그 문제의 주인공이라니 막상 그런 아이를 직접 대하게 되면서 제법 놀라기도 했다. 노사장이야 성국의 구체적인 사연을 성국의 입양제안을 해온쪽으로부터 들었겠지만 그런 이야기까지 굳이 자기 딸들한테 할 필요성은 못 느꼈는지 그냥 ‘전쟁통에 부모잃은 불쌍한 어린아이’라는 식으로만 말했다. 그 지독한 전쟁통에 전쟁고아가 한둘이 아니던 시기니 이 정도의 얼버무림은 누구나 쉽게 납득할수 있던 이야기고 그런 시절이기도 하다. 다만 어쨌든 ‘대를 이을 아들 하나’가 필요하다면서 양자까지 들인 아버지의 처사가 그리 흡족하진 못한것일까. 딸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뭔가 볼멘소리가 나오긴 한다.
“ 이해가 안가 난. 아들이 뭐 그리 대단한거라구 굳이 양자까지...아니 딸들은 뭐
사람도 아냐 ? 자식도 아냐 ? ”
그렇게 볼멘 소리로 먼저 불만을 터트린건 열 살난 막내 승미였다. 아무래도 아직 어린 나이고 굳이 따지면 그런식으로 세대차이(?)가 나는것인지. 아버지가 양자를 들인 문제에 대해선 적어도 가장 불순종하는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막내 승미의 모습이다. 그러자 열 아홉 살 큰딸 승자가 그런 동생을 타이른다.
“ 그러지말고 진정해 승미야. 어쨌든 우리집도 제사지내고 대 이을 아들이 하나는
필요한 그런 집이잖아. 그리고 어쨌든 전쟁통에 부모잃은 불쌍한 아이라잖아. 그러
니 적선(積善)이라 생각하고 우리가 아버지 뜻을 받아들이자고. ”
“ 그렇게 아들이 중하면 차라리 아버지도 어디서 첩이라도 들이라고 하시던가...아니
면 그렇게 전쟁고아가 불쌍하면 아버지도 어느어느 부잣집처럼 사재 털어서 고아원
을 차리라고 하시던가... ”
“ 승희 너... ”
열두살. 어쨌든 사춘기에 접어들만한 나이고 대략 초등학교(당시엔 국민 학교 – 다만 이때는 아직 전시니 아무리 집에서 학교를 보내준다고 해도 정상적으로 학교를 다닐수 있는 시기는 아니라고 보면 된다) 5,6학년 정도 된다고 봐야하는 셋째 승희가 또 이렇게 반발하는 것이다. 허나 아무리 그래도 게다가 자기보다 나이어린 막내 승미(열살)도 있는데 열두살 동생이 하는 말로 보기엔 너무 당돌하고 버릇없다 생각하는지 둘째 열다섯살 둘째 승옥이 그런 승희를 나무란다.
“ 승희 너 진짜 왜 그렇게 말버릇이 점점 나빠지니 ? 대체 그게 어디서 배워먹은 말
버릇이야 ? 그리고 첩을 들이라니 ? 대체 어디서 그런걸 다 배운거야 ? ”
“ 내가 뭐 ? 내가 뭐 틀린말 했어 ? 내가 뭐 그렇게 이치에 안 맞는 말을 하기라도
했냐구 ? 어쨌든 돈많은 양반이나 부자가 아들 얻으려고 첩들이는거 예나 지금이나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인건 마찬가지 아냐 ? ”
“ 다들 그만두지 못해 !!! 지금 우리끼리 싸우라고 아버지가 이런 자리 만드신건줄
아니 ? 그러지말고 어떻게 하면 우리가 아버지 뜻을 제대로 받들 수 있을지 그 궁
리부터 하자구. ”
동생들의 말싸움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한건지 결국 큰딸 승자가 직접 나서 만류한다. 어쨌든 딸들에게도 동생을 맞이하는 문제니만큼 자신들끼리 의견을 좀 나눠보도록 이런 자리를 만들어준 것을 보면 노사장도 무조건 자기뜻을 무조건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가부장적 꼰대는 아닌듯하다. 허나 네명의 딸들이 다 생각도 성격도 각기 달라서인지 성국이라는 아이를 이미 아버지가 새로운 이름까지 정해놓으신 ‘노승홍’이란 집안의 막내동생으로 받아들일지 하는 문제로 딸 넷 사이에선 냉랭함과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어쨌든 김성국(金性國)은 이때부터 옥천의 어느 마을 팔순노인이 낳은 아들이 아닌 인근 다른지역(* 옥천은 아니고 인근 다른군임. 어차피 그래봤자 보은 아니면 영동이지만)에서 큰 과수원과 정미소를 하는 노 모라는 사장집 양자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 더 이상 김성국이 아닌 노승홍(盧承洪)이란 이름으로. 양자지만 어쨌든 지금까지 내리 딸만 넷을 낳고 아들이 없던 집에 대를 이어야 하는 중요한 책무가 주어지는 막내아들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이듬해(1953년)엔 국민 학교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아직 휴전협정(7월)이 이뤄진 것은 아니지만 전쟁이 사실상 소강상태로 접어든 국면에서 대다수의 일반인들은 그렇게 전쟁통에 폐허가 된곳 복구도 하고 하나하나 이전의 일상으로의 회복을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학교에 들어가고 얼마되지 않아 두어명의 친구를 사귀었다. 인근 마을에 사는 이진호와 박정태라는 친구와 어울려다녔다. 헌데 하루는 이진호라는 녀석이 노승홍에게 다가와 대뜸 이렇게 물었다.
“ 야 !!! 노승홍 !!! ”
뭐 대수롭지 않은 친구의 장난질이려니 생각하고 승홍은 진호의 말을 받았다. 헌데 이진호가 뜬금없이 이런 질문을 했다.
“ 너 근데 주워온애라며 ? 업둥이라며 ? ”
“ 뭐 ?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 ”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당황했지만 그와같은 사실을 오히려 부인하려는 듯 승홍은 발끈했고 허나 진호는 어디에선가 들었다는 듯 더 당당하게 나왔다.
“ 다 알아 임마. 노OO 사장님이라면 어쨌든 이 지역에선 유명한 분이잖아. 그 집안
에 아들이 없어서 대 잇게 하려고 양자로 들인게 너라던데 ? ”
“ 무슨 소리야 ?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자꾸 하고 있어 ? ”
“ 숨길 것도 없어. 우리 엄마한테 다 들었대두 그러네. ”
부모에게서 들었든 누구에게서 들었든 여하튼 노 모라는 사장네 들인 양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확실히 들은듯한 이진호. 허나 당황한 승홍은 화까지 나 눈에서 불이 일어나고 있었다. 박정태라는 친구가 안되겠다는 듯 둘 사이에 끼어들며 만류했다.
“ 야, 너 왜 그래. 그리고 이진호 너 그러는게 아냐. ”
“ 왜 그래 ? 내가 뭐 어쨌다구 ? ”
이진호가 되려 억울하다는 듯 말했고 그러자 박정태가 그런 이진호를 나무라듯 나왔다.
“ 친구의 약점을 그렇게 함부로 건드리고 약올리는게 아냐. 불쌍한 친구를 그럴수록
더더욱 사랑으로 감싸줘야지. 그럼 되겠어 ? 아무리 노승홍이 양자고 입양된 아이
라도 그런말을 함부로 하면서 놀리고 그러는게 아냐. ”
헌데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얄밉게 느껴지는 순간과 같다고나 할까. 되려 어쨌든 노승홍이 양자라는 사실을 확인시키준 모양새가 된 박정태. 그래서일까. 원래 이진호를 한 대 칠것같았던 분위기의 노승홍의 주먹은 박정태에게로 향하고 말았다.
“ 어억...노승홍 너 왜 그래 ? ”
“ 이 XX끼 !!! 이 천하의 나쁜새끼 !!! ”
너무 분하고 화가나서인지 주먹으로 때려 그 자리에 쓰러트린 정태를 그것도 모자라 몇 대를 더 때렸다. 국민 학교 1학년 짜리의 주먹이 아파봤자 얼마나 아프겠냐만 비슷한 체구와 힘의 또래 친구들끼리라면 분명 이야기가 달라진다. 피가 나고 말았다.
순간 승홍이 멈칫했다. 뭐랄까. 사람에게서 피가 나오는 것을 보는 처음 순간이라고나 할까. 사실 평범한 아이였다면 더 분하고 화가나 정태를 더 때리던가 아니면 코피가 나는 모습에 겁이나 되려 후퇴하거나 할텐데 승홍의 태도는 뭔가 달랐다. 사람의 코에서 나는 피. 그리고 그 핏자국이 승홍의 주먹에도 묻었다. 그 피. 승홍이 말없이 그것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멍하니 있었을까. 사실 알고보면 몇초도 안되는 짧은 시간일수도 있겠지만 당사자에겐 생각보다 긴 고뇌와 고민의 시간일수도 있다. 허나 지금 그렇게 혼자만의 고독한 고뇌에 잠겨있을때는 아니다.
“ 너 가만안둬 !!! 우리 엄마한테 이를거야 !!! ”
코피까지 터진 박정태가 너무 분해 이렇게 말하고는 적당히 휴지라도 가져와 응급처치를 해주는 이진호의 도움을 받으며 일단 집으로 돌아갔다. 허나 다음날 사달이 나고야 말았다. 박정태의 어머니가 학교로 따지라 왔고 노승홍의 집에서는 어머니는 아니고 아버지가 대신 학교로 찾아갔다.
“ 아니 도대체 있는집 자식이면 없는집 아이를 이렇게 괄시하고 무시해도 되는겁니
까. ”
보통 이런 설정의 소설이나 드라마에선 가난하거나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가 잘사는 집이나 힘있는 집 아이를 잘못 때려 난감한 상황에 처해지고 마는데 그 반대의 상황. 여하튼 노승홍의 집은 이 일대에서 잘나가는 부잣집에 속하고 이진호나 박정태는 가난하다고까지 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노승홍의 집안에 비해 상대적으로 꿀린다고 봐야하는 그런 집안이다. 허나 그래서 더더욱 그대로 못 넘어가겠다는 듯 정태라는 친구의 어머니는 더더욱 화가나서 거칠게 항의했다.
“ 저 이거...고소라도 하든 뭘 하든...그렇게 하고 말지 그냥 못 넘어가요. 도대체 이
렇게 학교가 험해서야 어디 안심하고 애를 학교에 보낼수 있겠어요 ? ”
“ 잘못은 원래 제가 했는데...노승홍 쟤도 이상한 아이에요 참. 원래 제가 노승홍을
놀린건데 그걸 말리던 박정태를 노승홍이 때린거라구요 !!! ”
확실히 박정태 어머니는 이 일을 그냥 넘어갈일이 아니라는 듯 강하게 나오고 있었고 그래서 증인으로 함께 있었다는 이진호라는 아이까지 함께 교무실로 불려온 것이다. 그래서 이진호의 증언은 노승홍을 더더욱 불리하게 만들 수밖에 없는 상황. 승홍의 아버지가 백배 사죄하고 치료비를 물어주겠다고까지 하면서 겨우 사태를 마무리할수 있었다.
헌데 그때 집으로 돌아온 노승홍은 엉뚱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잘못한 것을 뉘우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고 다만 박정태란 아이를 때릴 때 아이에게서 났던 코피. 그것이 공연히 노승홍에게 심각한 ‘무엇’으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 사람은 때리면 피가 나는걸까 ? ”
여하튼 국민 학교 1학년 어린아이가 생전 처음 해보는 경험이고 그러다보니 많이 놀라거나 충격을 받았을수도 있다. 여하튼 아무리 불같이 화가나서 사람을 때린것이기로 그리고 자신이 잘못한 것은 분명하지만...피가 나다니. 코피가 나다니. 승홍은 뭔기 이상하고 의아한 번민에 빠져들고 있었다.
“ 사람은...때리면 아프겠지 ? ”
그 당연한 상식같은 이야기를 하지만 딱 국민 학교 1학년 어린아이같은 어찌보면 순진하고 천진난만하다고 할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고민을 하는 아이. 승홍은 점점 고민의 블랙홀로 빨려들고 있었다.
“ 사람은 때리면 아프다...그리고 때리면 피가 난다... ”
그래서 뭘 어쩌자는것인지. 방에서 혼자 공부를 하는것도 아니고 다른 책을 보는것도 아니고 그저 책상에 멍하니 앉아 그런 고민을 하고있는 노승홍. 어제 그렇게 정태를 때렸던 자신의 주먹을 다시금 살펴보기도 한다. 물론 어제 묻었던 핏자국은 그 사이 물로 깨끗이 씻어 사라졌지만 죄책감이라고나 할까. 아직 그 핏자국이 묻어있을것만 같은 묘한 상상이 들어 자신의 주먹. 어제 정태를 때렸던 그 부분을 공연히 한번 어루만져보고 있다.
“ 사람은 때리면 아프다...그리고 때리면 피가 난다. 사람은 왜 피가 나는것일까. ”
“ ...... ”
“ 모든 생물은 때리면 아프다. 모든 생명은 맞으면 아프다. 상처를 입으면 아프다.
상처를 입은 곳에선 피가 나는 것이다. 왜 상처입은 생명체는 피가나는 것일까...
... ”
- 3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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