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다 혀 니 여 라
황노인이 아직 세상을 떠나기 얼마전, 그러나 몸져누워 정신도 거의 혼미해져 있을때고 전쟁은 서울이 재수복되어 어느정도 다시 안정국면에 접어든 무렵이다. (대략 1951년 봄 정도) 하루는 다현이 산책삼아 집 근처 어디를 돌아보고 있을때쯤인가. 그래도 제발로 걸어 돌아다닐수 있는 것을 보면 한 다섯 살 가까이, 서너살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싶은 여자아이 하나가 길바닥에 주저앉아 처절하게 울고 있었다. ‘엄마.아빠’를 마구 부르며 울고있는 여자아이. 다현이 다가가보았다.
“ 아가, 너 거기서 뭣을허냐 ? ”
갑자기 웬 덩치큰(* 다현이 뚱뚱한편은 아니지만) 어른이 다가와서는 물으니 무섭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전쟁을 겪으면서 이미 별의별 무서운 기억도 많을테고. 그래서 순간 울음을 뚝 그치고는 몸을 움츠리는 아이. 다현이 일단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한번 안아주었다.
“ 아가, 그러지마라. 사람이 울수도 있는것인께 울일이 있으면 마음껏 울고. 아주머
니 나쁜사람 아니여. 그러지말고 이리 와 보렴. ”
“ ...... ”
“ 니 엄마,아빠는 어디 계시냐 ? ”
아무리 봐도 딱 부모잃은 고아로 보여져서일까. 다현이 다가와 그와같이 묻고 몇차례 물어보아도 여전히 무섭고 경계가 되는지 답을 하지 않던 아이는 한참만에 시인하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이때는 어쨌든 남쪽지역은 어느정도 안정국면에 접어든때니 포탄이 떨어지고 피난을 가고하는 그런 상황은 아니지만 피난을 오가고 하는길에 건강이 쇠약해지거나 사고를 당한 부모가 죽었을수도 있는것이고. 그 외 기타 여러 가지 복잡한 사연은 얼마든지 있는때가 아닌가. 다현이 아이를 달래며 다시금 이렇게 물었다.
“ 밥은 먹었냐 ? 보아하니 밥도 제대로 먹지 못헌거 같은데... ”
이 전쟁통에 하루세끼 제대로 챙겨먹는 집이 있다면 사실 그게 더 이상한 것이다. ‘밥을 먹은지 얼마나 되냐 ?’고 묻는 다현의 물음에 아이가 이렇게 대답한다.
“ 열밤... ”
“ 뭣이여 ? 열흘씩이나 굶었단말이냐 ? ”
설마 어린아이가 정말 그렇게 장기간을 굶고도 이렇게 원기왕성하게(한참동안 처절하게 울고 있었지 않은가) 살아있을수 있겠냐만 한 2-3일을 굶었어도 아이의 느낌으로는 엄청나게 오랜 시일을 굶은것처럼 느껴질수 있는 것이다. 여하튼 지금 그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 않는가. 다현이 아이를 달래며 한번 안아 일으켜본다. 다행히 먹지못해 오래 굶어서 그런지 다현이 한번에 안아올릴수 있는 가벼운 아이였다.
“ 아가, 무서워하지 말어. 아주머니 나쁜사람 아니여. 그리고 아주머니가 밥을 줄테
니 아줌마를 따라가자. ”
그렇게 아이를 직접 집으로 데리고 갔다. 다현이 웬 아이를 데리고 오자 정태가 좀 놀란 듯 묻는다.
“ 어머니, 웬 아이입니까. ”
“ 어서 이 아이 밥이나 챙겨주소. ”
“ 예 ? ”
“ 우리 원래 고아원 차리기로 한 것 아니여라 ? ”
“ 아 ? 네에 참... ”
이미 황노인의 그와같은 유언도 있었고 발끈한 3남 정호네 가족까지 떠난뒤의 일이다. 허나 둘째 정태는 일단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결심한 듯 한데, 어쨌거나 아직 황노인이 세상을 떠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다현은 실제 고아원을 차릴 구상을 시행에 옮기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아이의 이름을 ‘미정(美貞)’이라고 지었다. 원래 다현이 문맹이었지만 이 난리통에 바깥 소식을 알려면 신문이라도 읽을줄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는지 한문을 좀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체계적으로 한문을 가르쳐주는데가 이때 있을리는 없고 주위의 나이든 어르신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직접 신문기사를 하나하나 보여드리며 ‘이것은 어떻게 읽는것이냐 ?’ 이런식으로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그 사이 배운 한자가 몇글자 있어 그것을 대충 조합 아이의 이름을 그와같이 지은 것이다.
미정이란 이름을 직접 지어준 아이를 거둔지 한달도 채 지나지 않아 또 한차례 거두게 된 아이들이 있다. 이번엔 두명으로 시장에 찬거리라도 사기위해 나갔다가 웬 가게주인에게 매를맞는 두 아이를 발견하게 되었다. 보아하니 남자아이가 대여섯살 정도 되어보였고 여자아이는 그보다 어려보였다.
“ 이 망할것들아. 아무리 난리통이라도 그렇지 모조리 훔쳐가버리면 우린 뭣을 먹고
살라는겨 ? 안된다 !!! 오늘만은 안돼 !!! ”
“ 윤지 먹을거라도 좀 주세요. 전 굶어도 괜찮으니까 우리 윤지 먹을거라도 좀 주
세요 아주머니. ”
“ 글쎄 안 돼 이것들아 !!!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벌써 이게 몇 번째야 ? 우
린 뭐 자선사업하는 사람들인줄 아냐 ? 안 돼 여하튼 오늘은... ”
대충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 일대에서 구걸을 하는듯한 고아 아이가 가게주인과 약간의 실랑이가 벌어진듯하다. 하긴 어쩌다 한두명 이런 거지나 고아를 보는 경우라면 정말 지독한 구두쇠거나 성정이 아주 야멸차거나 못된 사람이 아닌 경우에야 밥한끼나 푼돈 몇푼 쥐어주는게 뭐 그리 어려우랴. 하지만 지금이야 이런 동냥질을 하는 아이가 한둘이 아닐테니 아무리 마음씨 좋은 가게주인이든 식당주인이든 그 많은 고아며 거지들을 다 거두려고 헀다간 살림이 거덜날판이 될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무리 봐도 남자아이가 자기보다 어린 여동생을 데리고 그렇게 구걸이나 동냥을 하러 다니는 거지남매가 분명해 보이는데, 역시 다현이 보기 딱해보여 끼어들며 주인을 일단 말렸다.
“ 뭣이요 ? 뭣을 하는 사람이요 ? ”
사실 다현이 그래도 자주 들르는 시장이니 그녀와 전혀 면식이 없는 가게주인은 아닐터인데 그래도 전혀 기억을 못하는지 어리둥절해하며 주인이 묻고 다현이 그런 주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 너무 그러지 맙시다. 다 같이 힘들고 어렵게 사는 이때 그래도 서로 돕고 살아야
하지 않겄소 ? ”
“ 아이고, 여보시오. 속모르는 소리 마시오. 나라고 뭐 그렇게까지 인정머리 없는 사
람인줄 아시오. 그래도 그것도 다 한계가 있는일이오. 나라고 맨날 거지아이들 밥
이나 챙겨주며 살다간 우리 식구들은 뭘 먹고 살란 말이오. 적선도 다 자기 입에
풀칠할 여유가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외다. 속모르는 소리 마시오. ”
“ 그러지말고 저 아이들 지가 데리고 가게허면 안 되겄소 ? ”
“ 야 ? ”
좀 별스런 아줌마를 다보겠다는 듯 어리둥절해서 보는 가게주인. 그러나 어차피 조금전 그 거지남매야 이따금 이 근처에서 동냥을 하는 아이들일뿐 자신과 인연이 있는 아이들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마음대로 하라는 듯 반응을 보인다.
“ 뭐 데려가든 말든 그것은 댁 마음대로지만...하지만 댁도 조심허시오. 나도 그래도
이렇게 시장통에서 장사라도 하는 사람이라 그래도 부모없이 떠도는 아이들 가끔씩
국밥 한두그릇 정도는 공짜로 먹여줄 마음도 있고 했던 그런 사람이오. 하지만 그
것도 어쩌다 하루이틀이지 다 한계가 있는법이오. 여하튼 데려가든 말든 댁 마음
이지만 댁도 언젠가는 한계를 느낄 것이다 이말이오. ”
하는말을 들어보니 여하튼 이 가게주인도 이렇게 식당을 하면서 구걸하는 거지들 조금이라도 도와준 일은 있었나보다. 허나 그래서 오히려 그게 더 한계가 있다는 듯 딴에는 젊은 혈기로 호기롭게 나오는듯한 다현이 안쓰러워 보여서 이렇게 되려 충고라도 하듯 한마디 하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거지남매를 데려가는데 별 이의는 없어보이는 식당주인인지라 다현은 그렇게 윤수와 윤지라는 각기 여섯 살,네살된 거지남매를 두 번째로 집안에 데리고 온 것이다.
황노인이 세상을 떠나고 얼마 지났을때쯤부터 다현과 정태는 고아원을 세우는 작업에 본격적인 박차를 가했다. 여하튼 자신의 사재를 털어서 부모잃거나 집없어 떠도는 고아랑 거지들을 거두고 싶은 것이 황노인의 생전 소망이자 유언이 아니었던가. 사실 다현도 그저 황노인을 지금까지 돈많고 땅문서,집문서가 많은 전주에서 유명한 고리대금업자이자 부자로만 알고 있었지 막상 죽고나서 그의 재산을 하나하나 처분 그것으로 고아원을 짓는 사업을 시작하면서 생각했더것보다 그의 재산이 많은것에 무척이나 놀랐다. 여하튼 그 돈으로 대략 몇십명 정도를 거둬 먹여살릴만한 규모의 고아원이 한 몇 달만에 만들어진 것이다. 사실 현금이나 현물이 아닌 부동산은 전쟁중에 매매나 거래가 쉽지는 않았을텐데 그 부분은 나름 정태가 기지를 발휘해서 대체로 현명하게 처리가 되었다. 여하튼 상대에게 부담이 가는 액수는 되지 않도록 그렇다고 너무 터무니 없이 낮은 가격으로 팔수는 없으니 어느정도 적절한 시세로 부동산을 팔아 넘긴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이때쯤엔 전쟁중에 뿔뿔히 흩어졌던 지역민들도 하나하나 본래 살던 고장으로 돌아올때이긴 한데, 그들도 지금쯤은 일제때 그 유명한 고리대금업자 황노인이 죽었다는 소식은 들었을터. 이후 황노인의 하던 고리대금이 어찌 되었을려나 관심사가 되지 않을수 없었을텐데 오히려 남은 가족들이 그 남은 재산으로 고아원을 세우고 또 심지어 그것이 고인 생전 뜻이었다는데 적잖이 놀라기까지 했다. 그래서 고인의 뜻을 잇고자 다현이 세운 고아원에 후원을 해오는이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대략 20여명의 고아를 거둬 시작한 고아원이 어느덧 수십명의 아이들을 거둬 먹여 살리는곳으로 성장(?)했을때쯤. 무엇보다 어느덧 휴전이 되어 적어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정상적인 생업에 복귀할수 있게 되었고 전쟁으로 혼란스러웠던 사회분위기도 조금씩 안정을 되찾고 있을때쯤 하루는 정태가 다현의 방으로 들어왔다. 밤늦은 시간이다.
“ 어쩐일이시오 ? 이 야심한 시간에. ”
어느덧 나이 30대 중반으로 접어들고 있는 다현. - 무엇보다 이때 나이 30대 중반 정도면 그냥 아줌마다. 전쟁으로 고생도 많이 했을테니 외양도 많이 피폐해졌을것이고. - 무엇보다 정태가 여태까지 다현을 딱히 부를만한 호칭도 마땅치 않아 그냥 ‘새어머니’ 이런식으로 불러오곤 했는데, 그런 정태가 밤늦은 시간에 방에 들어온 것이 좀 의아하기도 하고 놀란 다현. 헌데 정태가 다현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본다.
“ 왜 이러시오 갑자기 ? ”
좀 이전같지 않은 정태의 행동에 다현이 다소 당혹스러워지기까지 하고, 그렇게 얼마나 한참을 두어발자국 거리를 두고 선 위치에서 다현을 바라보았을까. 그러다 정태가 이렇게 말한다.
“ 어머니... ”
뭐 여하튼 호칭은 지금껏 다현을 그런식으로 불러왔으니 새삼스럽지는 않다. 다현 입장에서도 아무튼 자신보다 대여섯살 많은 정태로부터 ‘어머니’란 소리를 들으니 좀 무안하고 민망했었는데 허나 이미 세월이 그만큼 지난치라 이제는 많이 익숙해진 터. 헌데 정태는 이아같이 말한다.
“ 절 받으시지요 어머니. ”
“ 야 ? ”
갑자기 이제 웬 절 ? 사실 그동안 명절이나 이럴때는 피차 무안하거나 민망하기도 해서 서로 맞절을 하거나 그런 형식을 취해왔었다. 헌데 갑자기 절을 받으라니. 여전히 의아한 다현을 보며 정태는 이와같이 말한다.
“ 지금부턴 정말로 어머니로 모시고 싶어서 드리는 큰 절입니다. ”
“ 그게 대체...갑자기 뭔말이어라 ? ”
물론 애초 황노인이 다현을 네 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일 때 황노인의 네 아들은 이 상황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분명 있었다. 허나 어차피 그것이 현실이 되고나니 그런식으로 살면서 황노인의 네 아들들도 그냥 체념을 했는지 대충 ‘새어머니’ 이런식으로 호칭을 불러오긴 했는데 이제 그 넷중 셋이 전쟁중에 죽거나 사라지거나 이런식으로 다들 뿔뿔이 흩어진 상황에서 휴전까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이렇게 나오는 정태. 이제 황노인도 죽고 없는 상황에서 황노인의 뜻을 받들기 위해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는 다현. 그 다현에게 정태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솔직히 진심으로 어머니께 감동했습니다. ”
“ 그것이 갑자기 뭔말이여라 ? ”
“ 솔직히 처음에 어머니가 저희집에 들어오셨을때는...그렇게 여기서 몇 달 살다 떠
날분 정도로 생각했고 막상 아버지가 그런 어머니를 후처로 받아들인다 할때는 형
이나 다른 동생들도 모두 반발을 했지만...내심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어쨌든 어머
니도 딱히 갈곳없는 처지니 나이많은 아버지의 후처로 그렇게 체념하고 사시는 분
정도로 생각했고...허나 연로하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면 그 뒤엔 어떻게 하실
지 솔직히 내심 궁금했었거든요. ”
“ 별 말씀을 다 하셔라... ”
괜시리 민망한지 귀밑머리를 한번 쓸어넘기기까지 하는 다현. 무엇보다 고아원을 설립하는 일이 황노인의 생전 바램이었음은 황노인의 네 아들보다 자신이 훨씬 먼저 그로부터 들어 알고있던 사실 아니던가. 그때 그렇게 다현은 황노인이 세상을 떠나면 자신이 그 뜻을 이어받겠노라 분명히 약조헀었다. 어쩌면 그것이 다 죽은 목숨이었던 자신을 거둬준 황노인의 은혜를 갚는 길이라 생각했을수도 있고. 그런 다현을 바라보며 정태는 이렇게 말한다.
“ 어머니...진심으로 큰 어머니이십니다. ”
“ 야 ? ”
“ 사실 아무리 그래도 젊은 나이에 부모잃은 그런 어린 고아들을 거두고 그렇게 정
성껏 돌보는 것...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요. 그래서 저도 걱정했습니
다. 막상 그래도 어머니가 과연 진심으로 이 고아원을 제대로 운영하실수 있을지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실수가 있을지 걱정도 많이 했는데...그간 곁에서 지켜보며...
어머니야말로 전쟁때 부모잃은 그 많은 아이들을 거두는 진정한 ‘큰 어머니’란 생
각을 했던것입니다. ”
헌데 그러고보니 다현에겐 자기 소생은 없다. 열아홉 나이때 인연을 맺었던 세 살연하의 남편 조한욱은 3년을 같이 살긴 했지만 둘 사이에 자식이 없었고 그 한욱이 서울에 공부하러 올라가 새 여자가 생기자 소박맞아 쫒겨난게 다현이 아니더가. 슬하에 소생 하나 없이 그렇게 조태선 사장의 집에서 쫒겨나야만 했던 다현. 그 상황에서 친정아버지마저 자살하자 자신도 체념하고 목숨을 끊으려고 하다 황노인의 아들들에 의해 전주천에서 발견이 되었던 것 아닌가. 그리고 황노인의 후처로 살긴 했지만 자신보다 나이도 많은 황노인의 네 아들들이 체념하고 그냥 형식적으로나마 ‘새어머니’로 불러드리든 어찌하든 어찌 자식처럼 생각하는 감정이 들수나 있었을까. 허나 지금 이 시점에서 정태가 다현을 보며 이런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때 부모잃은 그 많은 아이들을 진심으로 거두고 보살피고 있는 다현이야말로 진정한 ‘큰 어머니’라고.
“ 어머니... ”
“ 뭐...참...갑작스레 별 말씀을 다...그래서 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것이오 ?
”
“ 말씀드렸잖습니까. ‘큰 어머니’께 큰절 한번 제대로 올려드리고 싶다고. ”
“ 아...아니 뭐 그렇다고 큰절까지야... ”
당혹스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해서 다현이 어쩔줄을 모르는데 정태는 진심의 큰절을 한번 올려드리고 싶노라며 거듭 다현에게 권한다. 그래서 결국 좌정하는 다현. 정태가 큰 절을 올린다.
“ 절 받으십시오 어머니. ”
“ 네...가...감사하구만이라...아...아니 이렇게 할게 아니라 지도 그래도 맞절은 올려
야지라... ”
하면서 맞절을 하려는데 정태가 그것은 만류한다.
“ 아닙니다. 어머니. ‘큰 어머니’께 올리는 ‘큰 절’이라니까요. ”
“ 아...아니여라. 그렇다고 제가 어찌 정태씨한테 그냥 절을 받겠어라. 이건 아니지
라. ”
“ 아닙니다 어머니. 큰어머니께 올리는 큰절이라니까요. ”
“ 아...참...이거 참...뭐 좋습니다. 여하튼 그럼 지가 절을 받는걸로 하지라... ”
다현이 세운 고아원에 제일 처음 들어오게 된게 미정이란 아이였던 것이다. 고아원을 정식으로 세우기도 전부터 다현이 거두어 키운 셈인데 사실상 그렇게 다현의 고아원 ‘1호 원생’의 기록을 세우게 된 것이다. 그리고 정식으로 고아원을 짓는 공사를 시작한게 황노인이 세상을 떠나고 얼마지나지 않아서부터의 일인데 그때까지는 황노인의 집 빈방에서 재우며 키우던 미정이라던가 윤수,윤지 남매등은 처음엔 다현을 ‘어머니’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렇게 한동안은 황노인의 집에서 다현과 함께 생활을 했던것이고 고아원이 정식으로 만들어진 뒤에는 그곳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 헌데 미정의 경우엔 아무래도 그간 다현과 정이 많이 들었던 탓인지 고아원이 정식으로 만들어진 뒤에도 그곳으로 가지 않고 다현과 함께 지내려는 경우가 많았다.
“ 엄마, 싫어. 나 오늘은 엄마곁에서 잘래. ”
칭얼거리는 아이를 무작정 내칠수도 없어 한동안은 결국 다현이 미정을 계속 품에 안고 재우는수밖에 없었다. 아직 나이어린 애기인탓일수도 있지만 여하튼 다현으로선 처음으로 ‘자식’으로서의 정을 느끼게 만든 아이라고나 할까. 아무리 그래도 황노인의 네아들이야 자신보다 나이많은 사람들이니 형식적으로 ‘새어머니’라고 부르든 진심으로 어머니로 존중을 해 드리든 어찌 다현 입장에서 자녀로서의 정을 느낄수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을까. 허나 미정은 첫 결혼에서 아이도 제대로 낳지 못하고 3년만에 소박을 맞은 다현이 처음으로 가슴에 품은 그런 첫 아이가 되는 셈이다.
“ 아버지 오셨어요. ”
어쨌거나 아주 갓난아기때 맡겨진것도 아니고 그렇게 서너살때부터 다현에 의해 키워진 것이니 이후의 사정을 파악하지 못할 아이는 아니다. 아이의 눈에 다현이 집에서 함께 지내는 남자어른 정태가 ‘아버지’처럼 느껴져서인지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했다. 졸지에 미정이 다현을 어머니라 부르고 정태를 아버지라고 부르니 다소 해괴하다면 해괴하다고 할 수 있는 가족관계의 모양새가 만들어진 셈이다. 다만 정태의 경우엔 고아원이 설립될때까지의 일만 곁에서 다현을 도와주었고 이후에는 정태도 자기가 돌봐야하는 처자식(딸 셋)이 있는 몸이기 떄문에 휴전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반 직장에 취직 자신의 가족 생계는 별도로 유지하며 따로 살아갔다. 그리고 이따금 다현의 고아원일만 도와주러 오는 일종의 고문이나 자문위원 같은 일을 하게 된 것인데 실제 시간이 많이 지난뒤 황정태는 다현의 고아원에 ‘명예고문’에 임명되기도 한다.
고아원의 이름은 ‘황성정원(黃成情園)’으로 정했다. 애초 다현과 정태는 고아원의 명칭을 상의할 때 황노인의 성과 다현의 성인 ‘송’씨를 따서 ‘황송 고아원’으로 지을 생각이었다. 헌데 두 사람의 성을 따서 ‘황송’이라고 하니 바로 ‘황송(惶悚 : 눌리어 두려워하다)’이란 단어가 떠올려지고 그러니 ‘황송 고아원’이 되면 그 의미가 더 엽기적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차라리 받침을 빼고 (두사람 성의) 초성과 중성만 본딴 ‘화소 고아원’이라 하느냐 ‘황소(?) 고아원’으로 하느냐 ‘화성(?) 고아원’으로 하느냐 별의별 궁리를 다 해보다가 일딴 황노인의 성만 유지하고 송다현의 성은 살짝 비틀어 ‘성’으로 해서 ‘황성 고아원’으로 지은 것이다. 헌데 대놓고 ‘고아원’이나 ‘보육원’이라 하는것도 아이들 정서에 좀 안 좋은 영향을 미칠수 있을 것 같아 고아원이란 명칭대신 아이들에게 ‘정’을 주며 키우는곳 혹은 ‘정성(精誠)’을 다해 아이들을 돌봐주고 보살피는 곳이란 의미를 담아 ‘정’자를 붙어 ‘황성정원(黃成情園)’이라 이름지은 것이다. - 고아원 이름을 짓는데 그야말로 부모가 자기들이 낳은 자녀 이름을 지을 때 만큼이나 온갖 고민을 다한 셈이다. 무엇보다 황성정원 ‘1호 원생’의 이름을 다현이 직접 미정(美貞)이라 지어주었으니 고아원 이름에 ‘정’자가 들어간 것은 이래저래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휴전협정이 이루어지고 대략 1년여년이 지난 어느날. ‘황성정원’은 어느덧 원생 70-80명 정도를 보살피고 있는 이 지역에서 제법 이름난 고아원이 되어있었다. 어차피 전쟁직후 부모잃은 전쟁고아들이 워낙 넘쳐다던 시절이었으니 이 정도 인원은 적은편이라고 볼수는 있을 지언정 많다고 볼수가 없는 숫자다. 여하튼 이 무렵에 전주에서도 이만한 아이들을 맡아 보살피는 그러 규모의 고아원이 생겨났던 것이다.
하루는 다현이 자신의 거처에서 혼자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현의 거처야 원래 황노인이 살던 집이지만 이제 황노인의 네 아들도 다 죽거나 실종되거나 하고 하나남은 정태마저 자신의 가족들괴 독립해 따로 살고 있으니 다현은 옛 황노인의 집중 상당수 부분은 고아원 공간으로 활용하도록 하거나 다 폐쇄시키고 헐어버리고 자신이 살수있을 공간만큼의 집만 남겨두었다. 그리고 옆쪽 통로로 고아원 시설과 연결이 되도록 그렇게 만든 것이다. 황성정원의 ‘1대 원장’이 되는 송다현의 거처와 황성정원이 그렇게 서로 연결되는 구조가 된 것이다.
독립해서 따로 나가 살며 자신의 아내와 딸 셋을 돌보며 직장생활을 하고있는 황정태가 모처럼 다현을 만나러 왔다. 한밤중에 밤하늘을 보며 상념에 잠기는 다현을 보며 말을 건넨다.
“ 어머니... ”
“ 왜요 ?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시오 ? ”
“ 아뇨 뭐 그런건 아니구요... ”
별다른 용건이 없다면 혼자 멍하니 밤하늘의 달을 쳐다보는 다현이 공연히 외롭고 쓸쓸하게 느껴지기라도 한걸까. 멋쩍게 몇발치 떨어져서 다현을 바라보고 있는 정태. 그의 말이 이어진다.
“ 아무리 그래도...많이 서운하시죠 ? ”
“ 뭣이 말이오 ? ”
의아하게 묻는 다현. 정태의 말이 이어진다.
“ 아무리 그래도...어머니는 슬하에 자녀 하나 없이 이렇게 사시게 되었으니 말입니
다. 이제 뭐 아버지도 안계시고... ”
바로 그 황노인의 생전 뜻대로 고아원을 세운 다현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렇기로 한 여인으로서의 인간으로서의 감정이 별다를것이 있을까. 바로 그 점이 걱정도 되고 우려도 되어 이렇게 운을 떼본 정태. 허나 다현은 당치도 않다는 듯 씁쓸하게 웃는다.
“ 우리 미정이도 있고...윤수,윤지도 있고...내 아이가 이제 어느덧 70-80명. 잘하면
곧 100명도 더 넘을 판인데 이거면 되었지 뭣이 부족하고 서운하다는 말씀이시오
? 내 아이가 백명도 넘는데 뭣이 걱정이냔 말이오. ”
“ 하하...어머니도 참... ”
물론 그거야 황성정원 원생들을 두고 하는말이겠지만 자신의 자식은 정작 없는 그 허허로움이 어찌 없다고 할 수가 있을까. 미정이니 윤수,윤지니 자신이 처음에 거두었던 전쟁고아들 이름을 굳이 그렇게 하나하나 되뇌이는것도 어쩌면 오히려 그 쓸쓸하고 허허로운 감정을 가리고자 일부러 그러는것일수도 있어 정태가 그녀를 더 안쓰럽게 바라본다. 허나 다현은 살짝 고개를 가로저어 보이더니 이렇게 입을 연다.
“ 다만 이럴떄 공연히 가끔 그 사람이 생각나긴 한다오. 새삼 좀 안되었다는 생각도
들고... ”
“ 누가요 어머니 ? ”
설마 그럼 다현도 결국 황노인말고 달리 마음에 품어두었던 남자가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순간 공연한 질투심이라도 느껴지는지 정태는 가슴까지 두근거려질판인데 헌데 다현에게선 좀 엉뚱한 이름이 나온다.
“ 조한욱...그 사람 말이오. 지금은 어찌 지낼지... ”
“ 조한욱이 누군데요 ? ”
그러고보니 다현이 전남편 이름을 지금껏 정태나 황노인등에게 말한적이 있던가. 기억이 확실치는 않은데, 하지만 시집가서 시댁에서 소박맞고 남편에게조차 버림받아 그로인해 자살하려던 여자를 구해주게 된 것이 황노인 가족과 다현의 첫 인연임을 정태도 잊어버리진 않았을 것 아닌가. 허나 이미 워낙 오랜 세월을 그렇게 살아서인지 정태는 다현이 실은 소박맞은 전력이 있는 여인이라는 것을 깜빡하고 있는것일까. 괜시리 궁금함이 커지는 정태의 손을 살짝 잡아보며 다현이 빙긋이 웃는 미소로 설명을 덧붙여준다.
“ 내 전남편 말이오. 나 시댁에서 3년만에 소박맞고 쫒겨났던 여자인거 그거 잊으시
었소 ? ”
“ 아, 참 그랬었지요. ”
벌써 그 일을 까맣게 잊었던것일까. 헌데 그러고보니 그 전남편 이름이 조한욱이었던것인가. 정태가 그 이름만큼은 확실히 다현으로부터 들어본 기억이 없어 새삼 궁금해져 묻는다.
“ 여하튼 그 사람 이름이 조한욱씨였던건가요 ? ”
“ 그렇소. ”
“ 원래 그 사람이 새 여자가 생겨 어머니를 내쫒은거라면서요 ? ”
그래도 그 이야기는 잊고 있지 않았던듯한 정태. 아니면 잊고 있다 다현이 언급하니 다시 기억이 되살아난것인지. 무엇보다 그렇게 어린나이에 원치도 않는 장가가서 이후 서울에서 신여성 만나 바람나는 남자가 30년대 가장 전형적인 스토리다보니 적어도 그 전형을 정태도 모르지는 않을 것. 새삼 그래서 정태도 괜시리 마음이 언짢아진다.
“ 이제사 그 사람 얼굴 떠올려서 뭣허나 싶기도 한데...내가 이렇게 살다보니 그 사
람도 괜시리 가끔은 생각이 난다오. 그러고보면 벌써 15년 세월이 흘렀는데...그 사
람은 지금쯤 어찌 지내는지... ”
“ 15년 ? 벌써 그렇게 세월이 흐른건가요 ? ”
“ 내가 여하튼 꽃다운 나이로 시집을 간게 열아홉 나이고 그게 왜정때이니 그만한
시절이 흐른 것 아니고. 그리고 그사이 8.15다 전쟁이다 별의별 일들이 다 있었던
것이고... ”
“ 생각해보니 정말 그러네요. ”
정말 지난 수십년간 수많은 대하소설의 소재가 되었던 이 무렵의 시기가 아니던가. 그래도 15년의 시간이 새삼 길었음을 느껴 정태도 만감이 교차하고 다현의 말은 좀 더 이어진다.
“ 소식이나 좀 알수도 있으면 좋으련만...이젠 영영 소식조차 들을길이 없구려. ”
“ 이제야 그 사람 소식은 알아서 뭐하시게요 어머니 ? ”
“ 그래도 그동안 어찌 살았는지는 궁금하니까 그러는게지요. 그 사람이 내 소식을
들을수 있을련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이래저래 공연히 여러 가지 생각이 다 드는
구려. ”
여하튼 전주에서 그 유명한 고리대금업자의 후처가 되고 그 후처가 나중에 고아원을 세웠다면 유명하다면 유명한 이야기가 안될 수가 없을텐데 그래도 군산에서 전주라면 요즘이라면 모를까 이 시대 정도만 되어도 제법 부담스러운 거리다. 혹시 인편을 통해 소식정도는 들을수 있을지 몰라도 서로 왕래를 한다던가 직접 찾아오기는 쉽지 않을터. 그저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해야하는지. 다현은 씁쓸히 미소지으며 자기방으로 들어간다.
‘ 친애하는 애국동포 여러분 !!!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오늘 새벽 미명을 기하여 일제
히 행동을 개시, 국가의 행정,입법,사법 삼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군사위원회를 조직
하였습니다... ’
세월이 흘러 마침내 1961년 5월 16일. 새벽공기를 가르며 혁명을 알리는 라디오 방송이 전국에 울려퍼지던 그날이 왔다. 전주에서 고아원을 하고있는 다현에게도 당연히 이 혁명의 소식은 알려지지 않을수 없을터. 그로인해 받는 충격과 어수선한 분위기는 말할수 없겠지만 ‘국민여러분은 걱정마시고 각기 생업에 충실하시라’는 혁명방송의 권고대로 고아원의 하루야 별다른 탈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다만 어느덧 중학생이 된 이 고아원 제1호 원생 미정이만이 공연히 호들갑을 떨며 원장실을 찾았다.
“ 엄마, 엄마 괜찮으세요 ? ”
“ 뭣 때문에 이렇게 호들갑이냐 ? ”
사실 지금은 다현도 라디오도 듣고 또 신문도 쉬운 한자 중심으로 더듬어가며 읽거나 주위 아는사람에게 읽어달라고 도움을 청해 내용을 이해할수 있는 수준은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5.16 혁명’이 주는 정신적 충격이나 느낌이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을까. 되려 호들갑인 미정이 유난스러워보일 지경이었다.
“ 난리가 났는데 엄마는 어쩜 그렇게 평온하세요 ? ”
“ 난리는 무슨 난리여...무슨 전쟁이라도 났다더냐 ? ”
사실 ‘전쟁’이라는 말이 직접 겪어본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에게 가슴에 와닿는 느낌은 하늘과 땅차이가 될 수밖에 없다. 여하튼 생각보다 너무 평온하기만 한 송다현 원장의 모습에 미정은 좀 어이없어 실소를 터트리고 저녁때쯤 공연히 걱정이 되어 다현이 미정을 불렀다.
“ 미정이 너 근데 공부는 잘 하고있는것이냐 ? ”
어느덧 100명 이상의 원생들을 돌보고 있는 ‘황성정원’. 그리고 어느덧 이 고아원을 운영한지도 10년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어느덧 성인이 되어 고아원을 떠나 일반 사회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이도 적잖이 있다. 그네들까지 포함하면 어느덧 이 황성정원을 거쳐간이도 백수십여명선에 이른다고 봐야할텐데 그래도 다섯 살도 채 되기전의 울고있던 어린아이를 직접 거둬 이름까지 지어준 아이인지라 이 미정이란 아이에 대한 다현의 감정은 각별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걱정이 되어 겸사겸사 물은것이고 미정은 걱정말라는 듯 이렇게 답한다.
“ 잘 하고 있으니 걱정말아요 엄마. ”
다현을 엄마라고 부르는 미정. 사실 어릴때는 그렇게 자신을 거두어준 미정을 그냥 ‘엄마’라고 불렀고 다현과 한 집에 살고있는 정태라는 성인 남자를 ‘아빠’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어릴때는 몰랐는데 조금씩 자라면서 보니까 자신이 그런식으로 호칭을 부르면 피차 난감해하는 것이 느껴지기도 했다. 미정도 차츰 자라면서 두 사람이 정식 부부도 아닌데 자신이 ‘엄마,아빠’라고 부르는 것은 좀 난감한가보다 하고 나름대로 판단 언제부터인가는 다현은 계속 엄마라고 부르는대신 정태는 ‘삼촌’이나 ‘선생님’ 정도로 알아서 호칭을 정정해갔고 미정이 다현의 집안 복잡한 속사정이나 황성정원이 세워지기까지의 내막을 정확히 알게 되는 것은 세월이 한참 지난뒤의 일이다. 여하튼 세상이 다시 어수선해지는 분위기 같아서 공연히 걱정도 되고 해서 1호원생인 미정을 불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눠보기도 하는 다현. 사실 어릴땐 고아원이 생기고 나서도 한동안 미정은 다현의 집에서 계속 끼고 자기도 했는데 시간이 차츰 지나면서 미정 스스로 ‘이건 아니다’라는 판단을 했는지 지금은 다른 고아원 원생들과 함께 자며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니 이제 되려 다현이 서운해질판이다.
“ 미정아, 그러지말고 오늘은 그냥 엄마방에서 자고 가. 괜찮으니께. ”
“ 아니에요 염마. 전 제 방에 가서 자야죠. 괜찮아요. ”
“ 아, 글씨 괜찮데도 그러네. 황성정원 1기생한테 내 특별히 주는 특혜니께 괜찮으
니까 이리 와. ”
그래도 한사코 사양하며 결국 고아원의 자기방으로 돌아가는 미정. 원칙적으로야 그게 맞는 일이겠지만 다현 입장에서도 괜시리 서운해지고 미정도 좀 씁쓸함을 느끼는 한순간이기도 하다. 허나 여하튼 미정은 말없이 고아원의 다른 원생들과 함께 지내는 자기방을 향해 가고 있다.
다시 또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군정을 연장하네 민정(民政)이 펼쳐지네 하고 한바탕 시끄럽더니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고 5.16을 일으킨 장본인인 박정희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 당선이 된 대략 그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다시 또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때쯤 황성정원을 찾아온 한 사람이 있었다.
“ 원장님, 누가 찾아오셨는데요 ? ”
여하튼 황성정원도 전주는 물론 사실상 이 근방 군산이라던가 이리(지금의 익산),정읍일대에까지 알려진 전북 북부지역에선 그런대로 유명한 ‘고아원’으로 성장해있다. 그러니 후원을 해주는이들도 그 사이 많아졌고 자원봉사차 고아원을 찾아오는이나 외부 손님도 많다. 그러니 가끔 그런저런 손님들이 원장을 찾아오는건 다현 입장에선 이제 익숙한 일이기도 한데, 그런데 이번엔 좀 뜻밖의 손님이었다. 다소 평범한 옷차림을 한 여인은 일단 키는 좀 큰 편이라고 느껴졌는데 다현도 이 시대 여성으로선 비교적 키가 큰 편이었는데 여인의 키도 대략 그와 비슷했다. 그리고 대체로 알 수 없는 귀티가 느껴지는 여인이었는데 차분하고 다소곳하게 인사를 건넨 여인은 이렇게 자신을 소개한다.
“ 근영이 엄마라고 해요. ”
근영이 엄마 ? 사실 이 시대의 여성은 자신의 실명을 직접 대는것보다 특히 시집을 간 여인들은 자신의 자녀 이름을 따 ‘아무개 엄마’라고 소개하는게 가장 일반적인 모습이긴 하지만 솔직히 ‘누구 엄마’라는식의 자기소개로 그 사람의 신원을 알기는 너무 막연하다. 여하튼 근영이 엄마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인은 이곳을 찾아온 목적을 이렇게 밝혔다.
“ 전북에서 가장 유명한 고아원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번 대체 어떻게 운영
을 하는지 좀 살펴보고 싶어 찾아왔어요. ”
“ 아...예 뭐...전북에서 제일 유명한지까지는 모르겠지만 뭐 어떻게...전쟁때 보니까
워낙 부모잃고 불쌍한 신세가 된 고아들이 너무 많아서 그런 애들을 좀 거두다보
니 지금까지 이런걸 운영하마 살고 있네요. ”
무슨 판단을 어떻게 하고 있는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다현은 지금 실은 이렇게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여인이 혹시 ‘말순이’가 아닌가 그 착각을 하는중이다. 원래 자신이 열아홉 나이때 시집을 갈 때 아씨를 따라 가겠다며 울며불며 하던 자신보다 한 살어린 하녀 말순이. 몰락한 양반가에서 아씨와 하녀사이라기보단 친 동기간이나 다름없이 지낸 말순이라서인지 그렇게 시집가는 아씨따라 가고 싶어했던것인데 허나 막상 아씨가 시집을 가고나니 말순이도 생각이 달라졌던것인지 다현의 아버지 태권이 챙겨준 돈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마지막 남은 집안의 하녀였던 그녀도 그예 떠나고야 말았다. 이후 한번도 찾아오지도 않고 소식을 알수없었던 말순이를 다현은 내심 서운해하고 있었다.
“ 몹쓸사람 같으니...그래도 한번은 찾아올줄 알았는데...수소문이라도 하면 못 찾아
올 일도 아니지 않는가... ”
군산 조태선 사장집에서 3년만에 소박맞고 쫒겨나 이후 고리대금업자의 후처가 되고 그 시간들이 자신에게도 무척이나 파란만장한 시간이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작심하고 소식을 알려고 하면 못 알아볼일도 아닌 다현의 소식이다. 아니면 혹시 소식을 알고도 차마 그렇게 야멸차게 떠나버렸던 죄책감 때문에 찾아오지 못하는것인가, 아니면 말순이도 아무래도 젊은 여성이니 전쟁통에 무슨 봉변이라도 당했던 것은 아닌지. 혼자 별의별 생각을 다 하면서 내심 그리워하기도 하고 궁금해하기도 했던 지난날의 하녀 말순이. 솔직히 그래서 이따금 고아원에 후원을 하러 찾아오는 여인이나 손님들중 ‘말순이’가 있을 가능성 정도를 그리 크지는 않더라도 어느정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기대를 해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자신이 누군지 구체적으로 밝히지도 않고 ‘근영이 엄마’라고만 막연히 자신을 소개하고는 전북에서 가장 큰 고아원을 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는 여인이 ‘혹시 말순이 아닐까 ?’ 그 착각을 하는중이다. 그래서 다현은 손님과 차 한잔의 환담을 나누며 이렇게 묻기도 했다.
“ 헌데 실레지만 여사님께선 그럼 고향은 어찌되시는지요 ? ”
여사야 이 시대에 어느정도 사회적 지위를 갖춘 여성이라면 붙이게 되는 호칭이니 그리 결례될 것은 아닐것이고 다만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좀 민망한것일까. 살짝 당황한듯한 여인은 그러나 준비된 답변인 듯 이렇게 말꼬리를 흐리듯 답한다.
“ 아...제 고향은 충청도에요... ”
충청도 전체가 다 고향도 아닐텐데 말꼬리를 흐리듯 이렇게 답한 다현. 아무래도 말순이는 아닌 것 같구나 하는 생각에 다현도 좀 실망을 한듯한데 다현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보고는 한두시간정도 머물다 떠나는 여인. 금일봉을 건네주고 이렇게 떠난다.
“ 어쨌든 저도 이런분들에게 좀 관심이 있어 찾아와본것입니다. 조만간 좋은날이
오면 다시 찾아뵙던가 하지요. 그럼 몸 건강히 계십시오. ”
“ 예, 어쨌든 관심갖고 찾아주셔서 감사하구만이라. 그럼 안녕히 가시어요 여사님.
”
일단 확실히 ‘말순이’는 아닌 것 같은 의문투성이의 여인. 다현은 괜시리 묘한 기분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 9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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