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다 혀 니 여 라
“ 영감, 괜찮으시어요 ? ”
치안대가 돌아간뒤 다현은 황노인의 상태가 걱정되어 살펴보지 않을수 없었다. 황노인이 토굴에 숨어살던 석달동안 건강상태가 많이 안 좋아진것만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정신까지 혼미해질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까 치안대와 대화를 나눌때의 모습은 그야말로 치매노인이나 다름없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가. 결국 치안대도 더 물어보는게 의미없다 생각하고 돌아가긴 했지만 그래서 오히려 황노인이 그런 연기를 한것인가 의심도 들고, 이래저래 상태를 물어보지 않을수 없게 된 다현. 헌데 헛기침을 두어번 하는 듯 하던 황노인이 겨우 기운을 차리는 모습을 보며 일어나 앉기는 한다.
“ 영감, 괜찮으신거지요 ? ”
“ 그래...우리 정수가 죽었다고 말했다는겐가 ? ”
아까 치안대는 황정수의 행방만을 물어봤지 생사여부 확인까지 했던 것은 아닌데, 그러나 황노인도 대충 상황을 짐작하는것일까. 다현이 시인하기도 부인하기도 뭣해 애매한 모습을 취하는데 황노인이 오히려 잘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 차라리 그리 처리하면 다행인게지 뭐. ”
“ 어르신... ”
여하튼 임기응변으로라도 좌익에 협조한 혐의가 있는 사람이 실종상태라면 사망으로 처리하는게 당사자를 위해서도 가족들이 연좌제로 엮이게 하지 않게하기 위해서라도 다행인 조치이긴 할 것이다. 허나 언제라도 황정수가 만의하나 살아돌아오기라도 하는날엔 또 어찌해야하는가. 이래저래 다현은 걱정이 될 수밖에 없는데, 황노인이 문득 다현의 손을 잡아보며 말을 건넨다.
“ 어르신... ”
공연히 걱정되는 눈으로 다현을 바라보는 황노인. 노인의 말은 이와같다.
“ 내가 토굴에 숨어있는 석달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나 ? ”
갑자기 왜 이런말을 하는걸까. 무엇보다 다현은 애초의 황노인의 구상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허나 설마 토굴에 숨어있으면서까지 나중에 고아원 운영할일 걱정하진 않았을테고, 일단 황노인의 말은 이렇게 이어진다.
“ 만약 저 하늘 어딘가에 신이 있다면 내가 그동안 너무 욕심을 부린것에 대한 천벌
을 내리시는게 아닐까. 그 생각이 들거든. ”
일단 황노인은 지금까지 살면서 기독교든 불교든 그런 종교문제엔 별 관심없이 살아온 사람이다. - 그건 따지고보면 다현도 마찬가지다. - 그러나 따지고보면 인간이 신에 의지하고팠던 본능은 이미 원시시대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그러니 그 극한 상황에 처한 황노인이 자신의 처지나 운명을 두고 하늘의 신을 생각해보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일단 황노인의 말은 이렇게 좀 더 이어진다.
“ 무슨 나중에 고아원을 하네 뭐네...그런 문제보다도...그저 내가 지금까진 너무
악착같이 돈모으는데만 급급해서 이런일을 당하는게 아닌가. 그 생각이 들더라
이 말일세. 무엇보다 한 인간의 생이란게 삶이란게 얼마나 허망하고 부질없는 것
일까...그 생각이 들더라 이 말이지. ”
어쩄든 1880년대생으로 1950년대 초반에 나이 70인 황노인이라면 그야말로 일제 35년과 8.15 해방 그리고 6.25까지의 그 모진 시대를 몸으로 직접 체험해본 그런 세대가 아니겠는가. 그것도 일제때는 그리 악착같이 돈을 모아 소문난 지독한 노랑이에 서민들 등골 빨아먹는 고리대금업자로 소문난 그런 황노인. 그 황노인의 지난 인생에 대한 회한을 모두 담자면 이미 그 자체가 또 한편의 대하소설이 될 터이다. 여하튼 그래서인지 몹시나 복잡한 회한에 가득차 황노인에게 두줄기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다현이 수건이라도 하나 가져와 그런 노인의 눈물을 닦아준다. 황노인이 그런 다현의 등과 어깨를 한번 어루만져보고는 이렇게 말을 이어간다.
“ 여하튼 이제 돈 욕심은 그만부려야겠다...만약 정말 저 하늘의 신이 이 욕심쟁이
늙은이의 인생을 불쌍히 여겨 한번만 더 살아날 기회를 주신다면...그땐 돈 욕심은
이제 그만 부려야겠다. 그 생각을 했다 그 말이지. ”
사실 애초에 황노인이 돈을 모은 구상 자체가 어릴 때 저자거리에서 본 부모없이 떠도는 거지아이들을 보고 받은 충격에 나중에 ‘고아원’을 차릴 결심으로 시작했던 것 아닌가. 게다가 지금은 전시니 전쟁통에 부모잃고 거지꼴이 된 그런 고아나 어린아이들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그러니 지금이 딱 고아원 차리기는 좋은 시기이긴 하다. 그렇다고 무슨 ‘이날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다현이 황노인한테 대놓고 ‘지금이라도 고아원 차립시다’ 이런말을 하긴 그렇고 다만 황노인이 네 번째 부인이기도 한 자신보다 마흔살이나 어린 아내 다현의 두 뺨을 다시한번 어루만져보고는 이렇게 말을 잇는다.
“ 조만간 정태와 정호를 부르게. ”
“ 야 ? ”
그러고보면 네명의 아들중 어느덧 황노인에게 아들은 그 둘만 남은 것 아닌가. 막내 정남은 이미 죽었고 정수는 소식을 알 수 없는 실종상태. 이런 상황에서 남은 두 아들. 바로 그 두 아들은 형이 나름 기지를 발휘해 ‘너희라도 잠시 난리를 피해 피난가 있거라’고 말해 잠시 피난을 떠났다 돌아온 사람들이다. 따라서 어쨌든 전쟁통에 목숨은 부지할수 있었던이들. 헌데 그 두 아들을 부르라는 것이 지금 황노인의 지시인 것이다.
“ 그 아이들에게 꼭 좀 할말이 있으니 둘 다 부르란말일세. 아, 참 그리고 이번엔
특별히 제대로 좀 한상 차려주게나. 무슨말인지 알아듣겠나 ? ”
원래 집안 찬거리까지 단속을 할 정도로 그렇게 돈을 아끼던 지독한 노랑이 황노인 아니던가. 헌데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싶어서 이례적으로 ‘진수성찬’을 차려주라는 주문을 하는것인지. 어차피 아직은 전쟁중이라 먹을 것을 구하기가 쉽지도 않은 시절. 게다가 황노인집 하인,하녀들도 전쟁통에 이미 다 뿔뿔이 흩어져 소식이나 행방을 알수없게 된 이가 대다수다. - 마치 그 옛날 송다현의 친정집이 몰락해가던 과정처럼. - 그런 상황에서 과연 다현의 음식솜씨라 정태와 정호 가족을 제대로 진수성찬을 차려줄만한 실력이나 솜씨, 여건이 될련지 모르곘지만 여하튼 칠순의 남편 황노인 엄명이 그와같으니 일단 조만간 날을 잡아 다현은 정태와 정호 가족을 불러들였다. 정태와 정호는 이미 40년대 초반에 결혼 정태는 부인과의 사이에 딸 셋 셋째 정호는 아들 둘을 두었다.
얼마후 정태와 정호의 전 가족이 아버지를 찾아왔다. 다현은 자신이 음식솜씨 없음을 알기에 평상시 면식이 있던 이웃의 아주머니 두분을 불러 특별히 도움을 받기까지 했다. 사실 이웃 아주머니들 입장에서도 평상시 그 자린고비로 유명하며 반찬 가짓수까지 낭비 못하도록 꼼꼼이 챙긴다는 황노인이 어쩐일로 이런 자리를 다 마련하는지 ‘오늘 무슨 날이냐 ?’고 묻기까지 했고 다현은 그저 빙그레 미소짓기만 했다.
마침내 정태내외와 그들의 딸 셋 그리고 정호내외와 그들의 아들 둘 이들이 모두 황노인,다현과 한자리에 하게 되었다. 정태와 정호가 결혼한 것은 모두 40년대 초반 이후의 일이니 – 사실상 8.15 전후로 봐야할 듯 – 아이들은 이제 겨우 열 살은커녕 일곱 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아이들인데, 따라서 이런 상황의 영문을 아직 모를 나이고 다만 성인인 정태와 정호 내외만이 있는 자리에서 황노인의 진지한 입이 열리기 시작한다.
“ 너희가 솔직히 이 애비에게 그동안 좋은 감정은 갖지 못했었을것이라 생각한다.
”
“ 당치 않아요.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아버님. ”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정태와 정호 두 아들은 거의 동시에 이와같이 답한다. 황노인은 어느덧 네명의 아들중 둘이 사라지고 두명만 남은 이 현실 그리고 자신이 고리대금을 하면서 이렇게까지 부를 축적하기에까지의 과정을 회상삼아 언급한다. 노인이다보니 자칫 이런 이야기가 장황하게 이어지기 쉬운데 그래서일까. 젊은 다현이 적당히 좀 수위조절을 곁에서 해주기도 한다. 어린 아내가 뜻밖에 이런 긍정적 도움이 되기도 하는데 여하튼 황노인은 이런말도 잊지 않았다.
“ 무엇보다 고리대금업이란 자체가 어쨌든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직업이고, 그러
다보니...너희한테도 늘 미안한 마음이 있었어. 그래도 첫째나 둘째는 어느정도 이
애비 일을 이해하고 도와주는면도 없지는 않았지만...너희가 이 애비 일을 잇지 않
고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각자 자유롭게 독립하도록 해주고 싶었고
...허허 솔직히 고리대금업이 무슨 떳떳한 직업이라고 그걸 대를 이어주길 바랬겠
느냐. ”
“ 아버님도 참... ”
그리고 실제 둘째와 셋째는 결혼후엔 지금까지 분가해서 자신들끼리 따로 살아왔던 것 아닌가. 그래서 새삼스러운 아버지의 말에 괜히 좀 민망해진다. 또 한편으로는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으셔서 그것도 이 전쟁통에 이례적인 진수성찬까지 차리셔서 이러시는것인지 더더욱 궁금해지기까지 한다. 황노인의 말은 계속된다.
“ 그러고보니 내가 너희들 이렇게 푸짐하게 상차려 주는것도 처음이지 ? 항상 너
희가 어디 밖에서 친구라도 데려와 반찬 가짓수 한두가지라도 늘어나는 것을 그
리도 노여워하며 단속했건만... ”
“ 아버님, 정말 무슨일이 있으신거에요 ? ”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이런 분위기가 심상찮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애비가 되어가지고 자식들을 위해 사실상 처음으로 차려준 푸짐한 진수성찬. 게다가 칠순에 건강까지 안 좋아진 황노인을 생각하면 어쩌면 앞으로 또 이런 자리를 마련하는게 그리 쉽지 않을수도 있다. 황노인은 자신의 어린시절 일을 좀 회상하며 결국 본론으로 들어간다.
“ 사실 그래서 어릴때부터 남몰래 내 결심한게 있었다. 나중에 내가 돈을벌면...이
세상의 모든 고아와 거지들을...설마 내가 다 없앨 능력이야 되겠냐만... ”
“ ...... ”
“ 그래도 그렇게 부모없이 떠돌며 굶주리고 구걸하는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줄수 있는일을 내가 할수 있다면 얼마나 보람된 일이 되겠는가 그 생각을 어릴
때부터 했던거였어. ”
“ 아...아버님... ”
“ 원래는 이 이야기를 네 새어머니한테만 유언으로 남기고 생전에는 안 할 생각이었
다. 아무래도 너희가 그걸 탐탁치 않게 여길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고...헌데 또 한
편으로 생각하면 내가 죽고나면 – 그것도 내게 무려 네 번째 부인이기도 한 – 나
이도 너희들보다 어린 젊은 새어머니 말에 순종이나 할지 그것도 걱정되고...그래서
내가 죽기전에 아무래도 이 이야긴 해야겠다 그 결심을 한거다. ”
“ 아버지,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건데요 ? ”
고아가 어쩌고 거지가 어쩌구 이런 말들이 나오니 정태와 정호는 슬슬 불안해진다. 게다가 나중에 새어머니 유언을 안 들을수도 있다니. 대체 하고싶은 말의 본질이 무엇인가. 황노인의 본론이 계속 이어진다.
“ 마침 그러다 이런 전쟁때가 되었으니...차라리 지금 그 일을 추진하는게 낫겠구나.
그 생각을 했던거야. 허허...설마 내가 어릴 때 이런 끔찍한 전쟁이 벌어질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구상을 했겠냐만...어릴땐 그저 거리나 시장같은데서 구걸하는 불쌍
한 아이들을 보며 막연히 그런 아이들을 이 다음에 돕고싶다 그 생각을 한거였는데
결국 여기까지 오고야 말았구나. ”
“ 아버님...설마 고아원이라도 차리실 생각이신거에요 ? ”
결국 정태가 참다참다 말 빙빙 돌릴 것 없다는 듯 차라리 본론을 이야기하라는 듯 이런식으로 묻는다. 그러자 황노인이 눈을 순간 한번 질끈 감는다. 그리고는 둘째를 보며 허허거리고는 말을 이어간다.
“ 그래도 정태 니가 역시 가장 똑똑하구나. 말귀를 가장 잘 알아듣는 것 같고... ”
“ 아버지 !!! ”
헌대 둘째 정태는 그렇다치고 갑자기 셋째 정호가 버럭한다. 그리고 이렇게 대든다.
“ 그럼...저희 유산은요 ? ”
어차피 그 부분에 대한 결심까지 오래전부터 하고있던 황노인이 아니던가. 그래서 순간 셋째를 노려보기까지 하고, 허나 황노인은 이제 더 숨기고 말고 할 것도 없다는 듯 말을 이어간다.
“ 고아원을 차린다고 이미 말했다. 내 남은 재산은 전부 거기에 쓸게야. ”
“ 아버지 그래도...설마 저희 몫은 남겨 주시는거죠 ? 설마 이 많은 재산을 다 고아
들 거두고 먹여살리고...그런데 쓰신다구요 ? 말도 안돼요 !!! 도대체 전쟁통에 부모
잃은 아이들 숫자가 얼만데...아무리 우리가 갑부라고 하더라도 그 많은 거지며 고
아들을 전부 먹여살리려 들었다가는 삽시간에 거덜이 나고 말거에요 아버지. ”
“ 그러니까 하는 소리야. 이미 난 앞서 말했다. 너희들은 그저 너희들 하고싶은일
찾아 각자 자유롭게 독립해서 살아가라고. ”
“ 지금 그 말씀을 드리는게 아니잖아요 아버지 !!! 독립해 따로 나가 사는건 사는거
고...저희들 유산은 어찌되는거냐구요 ? ”
“ 너희들 인생은 너희들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거지 무슨소리야 ? 고얀 것 같으니
감히 누구한테 손을 벌리려 들어 !!! ”
“ 아버지 !!! ”
도저히 참을수가 없는 듯 버럭 소리를 지르는 정호. 형 정태가 이건 아닌 듯 일단 동생을 만류하려들고 다현도 나선다. 허나 정호는 진심으로 화가나는 듯 온 몸을 부르르 떨고 있고 그러면서 급기야 황노인에게 할말 못할말 있는대로 쏟아붓기에 이른다.
“ 도...도대체 이게 말이나 돼요 ? 평생 우리에게 따뜻한 밥 한끼 제대로 먹인적 없
으면서...평생 그렇게 돈만 밝혔으면서...게다가 여색도 좀 밝혔어요 ? 그래서...심
지어 새어머니도 앞서 이미 두분씩이나 도망가게 만들어놓고...그것도 모자라 나이
60 넘어서 더 새파란 젊은 여자를 부인으로 맞아들인 주제에 뭐...우리보고 뭘 어쩌
라구 ? 물려줄 유산이 없어 ? ”
“ 야, 황정호. 너 무슨말이 그래 ? 아버지한테 이게 무슨 말버릇이야 ? ”
“ 형은 지금 화 안나게 생겼어 ? 글쎄 저 영감탱이가...이 전쟁통에 망령까지 나도
유분수지...우리한테 재산을 안 물려준다잖아. 게다가 뭐 ? 고아원을 차려 ? 이런
18...그런 자선사업에 나설거면 진작에나 나설것이지...평생을 고리대금이나 하며
살다 다 늙어서 뭐가 어쩌구 저째 ? 이 전쟁통에 고아원을 차리겠다구 ? 도대체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야말이지 !!! ”
“ 나가서 이야기하자 !!! 나가서 이야기해. ”
사실 정태도 아버지의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고픈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동생의 행동은 너무 심한 것 같아 일단 만류를 하는 것이다. 일단 정호를 자리에서 끌고나와서는 집 밖 저만치까지 데리고 나오는 형 정태. 정호는 아직도 분이 안 풀리는지 씩씩거리고 있다.
“ 진정해 정호야. 그리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버지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니 ?
”
“ 형은 화도 안 나 ? 이런 말도 안 되는 수모를 겪고도 화도 안 나냐구 ? ”
“ 나도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 ”
정호야 이렇게 격분하고 있는것이고 정태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겨우겨우 동생을 진정시킨 정호의 말이 이어진다.
“ 나도 뜻밖이고 많이 놀란 것은 사실이야. 설마 아버지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실것이라곤 정말 꿈에도 상상 못한일이었고...게다가 유산까지 안 물려주시고 그
많은 유산을 오직 고아원 운영하는데 다 쓰시겠다는 결심엔 솔직히 진짜 당황했어.
”
“ 형도 그러면서 뭘... ”
살짝 빈정거리듯 나오는 정호. 허나 한두살 많은 형이라도 역시 형은 형인것일까. 사실 그 당혹스러운 생각에 다른 깊은 생각을 할 겨를은 없었겠지만 여하튼 정태는 뭔가 정호와는 다른 입장표명을 하게된다.
“ 하지만...막상 그렇게 피난까지 갖다오고 석달동안 그곳에서 오만 고생을 하면서
나도 별의별 생각을 다 해보게 되었어. 뭐랄까...이 세상에 진짜 불쌍하고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구나... ”
“ 그래서 뭐...형도 아버지처럼 전쟁고아 거두는 일이라도 시작할 결심을 했다는거야
? ”
“ 아니, 솔직히 난 뭐 거기까진 생각을 못해봤어. 하지만 여하튼 이 난리통에 뭔가
남들에게 도움을 줄만한 뭔가는 좀 해봐야겠다는 그 생각은 하고 있었지. 그리고
... ”
“ ??? ”
“ 무엇보다 아버지 건강이 점점 안 좋아지시는 것을 보면서 여러 가지로 고민도 많
이 하셨고...그러고보니 아버지 연세도 어느덧 칠순. 게다가 전쟁통에 그런 고초까
지 겪으셨으니 아버지 생도 이제 얼마 남지 않으셨겠구나 하는... ”
그러면서 잠시 먼 하늘을 바라보는 정태. 그러고보니 아버지와 아들 가족들이 함께하는 식사가 저녁식사였는데 그러다보니 이미 날이 어두워져있긴 하다. 그런 밤하늘을 바라보다 공연히 감정이 북받치기라도 한것일까. 살짝 눈물짓기까지 하는 정태. 그리고 다시 말을 이어간다.
“ 기왕이면 아버지가 남은 여생을 마음편히 지내시다 그러다 보내드리는 것은 어떨
까 그 생각을 하던 중이었어. ”
“ 그건 또 갑자기 무슨소리야 ? ”
“ 아버지 뜻을...어느정도 존중해드리고 순종해드려야겠다 그 생각을 한거지. ”
“ 형 !!! ”
얼마후 다현은 정태를 만나 별도의 대화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다현은 정태에게 위로차 이렇게 말을 건넸다.
“ 많이 놀라셨지요 ? ”
이미 수년전에 황노인의 구상을 들어 알고있는 다현. 다만 황노인은 애초에 자신이 죽은뒤 유언으로 남길말이라 했기에 그후 다현은 쭉 마음속에만 담아두고 살아왔다. 허나 막상 황노인이 그 이야기를 직접 아들들에게 꺼낸 상황. 솔직히 이런 상황에서 황노인 아들들의 반응이 어떨지 다현도 무척이나 궁금하던터였다. 헌데 대놓고 반발하던 셋째 정호와 달리 둘째 정태는 좀 다른 것 같아 겸사겸사 이렇게 운을 뗀 것이다.
“ 새어머닌 어쨌든 알고 계셨던것이잖아요. ”
“ 알고 있었지라. 어르신께서 원래는 돌아가실 때 유언으로 남기실것이라 허셨는디
... ”
“ ...... ”
“ 어쨌거나 아들들한테 유산 물려줄 뜻이 없다는 말을 미리 하면 어떤 아들이 좋아
허겄냐며 지한테만 알고 있으라 하고 비밀로 하라고 하셔서 지금껏 아무말 안했던
것이어요. ”
“ 새어머니... ”
그런 다현을 진지하게 이렇게 불러보는 정태. 헌데 그러고보면 호칭문제에 있어서 다현과 황노인 아들들의 사이도 애매하다면 애매했는데 정수나 정태의 경우처럼 어차피 딱히 마땅한 호칭도 없고 해서 언제부터인가 자신도 모르게 그냥 ‘새어머니’라 불러오고 있는 이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아들도 있었다. 여하튼 정태는 다현을 그와같이 부르며 이렇게 말을 이어간다.
“ 여하튼 전 아버지 생각을 존중하기로 했습니다. ”
“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여라 ? ”
어째 진심일 것 같지 않아보여서일까. 놀라기도 하고 좀 이해도 안간다는 듯 이와같이 묻는 다현. 허나 정태는 생각보다 순순히 이와같이 나오고 있다.
“ 사실 저도 아버지를 그저 돈만 밝히고 남들 등골만 빼먹는 그런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어요. 헌데 이제라도 아버지의 재산을 그런식으로 사회에 환원하시겠다는 뜻
전 일단 높이 사고 싶습니다. ”
“ ...... ”
“ 뭐 저도 사람인 이상...막상 저희에게 돌아오는 유산은 없다는것에 서운한 감정이
없지는 않지만... ”
“ ...... ”
“ 기왕에 말이 이렇게 나온 것 아버지가 추진하시려는 고아원 운영사업 한번 적극
적으로 밀어드리고 싶네요. ”
“ 고맙구만이라 정태씨. ”
다현이 감격하여 정태의 손을 잡아보기까지 하며 이렇게 나온다. 적어도 황노인의 뜻인 고아원 설립과 운영사업에 이 둘은 확실한 지지파가 된 셈. 허나 셋째 정호의 집에선 전혀 다른 반응이 나오고 있었다.
“ 여보, 우리 차라리 떠나지. ”
“ 여보 대체 어디를요 ? ”
어차피 식구들이 다 있는 식사자리에서 나온일이니 정호의 부인도 그 이야기를 모르진 않을터. 허나 그래서 더더욱 어찌보면 즉흥적이고 감정적으로 느껴지는 남편의 이런 반응을 더욱 불안하게 보며 이렇게 말한다.
“ 아버지 이야기 그날 못 들었어 ? 영감탱이가 아무튼 망령이 나도 유분수지...우리
한테 유산 한푼 안 물려주고 뭐 ? 고아원을 하고 뭘 어쩐다구 ? 허...진짜 생각하
면 생각할수록 화가나네. ”
“ 여보, 그러지말고... ”
헌데 정호의 처 생각은 좀 다른것일까. 그녀는 일단 남편을 진정시켜볼 생각부터 한다. 여하튼 정호의 처도 평범한 보통여자고 또 며느리의 입장이니 어쨌든 아들인 정태나 정호보다는 한단계 건너 있는 입장 아닌가. 그런 정호의 처이니만큼 나름의 어떤 불안하고 야속한 감정도 없지 않았을터. 허나 그래서인지 오히려 남편을 이렇게 설득하는 것이다.
“ 그러지말고...좋은말로 한번 아버님을 설득해보는건 어때요. 당신이 이렇게 나오면
아버지가 더 우릴 안 좋게 보시지 좋게 보시며 유산을 물려주실 생각을 하시겠어요
? ”
“ 그래서 뭐 어쩌라구 ? ”
“ 당신과 내가 직접 아버지 찾아 뵙고 좋은말로 잘 말씀드리고 아버지 마음도 좀 풀
어지게 해봅시다. 그럼 아버지 생각이 조금이라도 달라질지 어찌 아냐구요. ”
여하튼 그렇게라도 그 많은 유산을 다 물려받지 못하더라도 자신들의 몫으로 조금이라도 돌아올수 있는게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런 잔꾀를 부리는듯한 정호의 처. 허나 정호는 손을 내젓는다.
“ 소용없으니 당신도 포기해요. ”
“ 여보... ”
“ 당신이야 시집와서 분가해서 아버지하곤 쭉 떨어져 살았으니 모르겠지만...난 어릴
때부터 지켜본 아버지이기 때문에 잘 알아요. 그 노인데 한번 결심한 고집 절대 못
꺾어. 그러니 당신도 괜히 힘빼지 말고 포기해. ”
“ 여보... ”
“ 허허...글세 우린 차라리 떠나자니까. 차라리 그게 속편하지. 아무렴 전쟁때 피난
도 갔는데 그보다 더한것인들 못하겠나. 얘들아. 희철아,은철아 가자. 아빠랑 같이
떠나자구. 이 애비가 아무렴 너희 둘과 너희엄마 이렇게 네식구 건사할만한 능력이
안 되겠냐 ? 우리식구들 일은 내가 알아서 책임질테니 우린 이만 떠나자구 !!! ”
정호는 사뭇 결연한 어조로 아직 다섯 살도 채 되지 않은 자신의 어린 두 아들의 이름까지 부르며 이렇게 나오고 있고 그래서인지 정호의 처는 더더욱 불안한 얼굴로 남편을 바라보고 있다.
“ 으어...으어... ”
시간이 좀 더 흘렀다. 그 사이 1.4 후퇴가 있었고 두달쯤 뒤인 3월에 서울이 재수복되긴 했다. 사실 1.4후퇴에서 남쪽 사람들이 이미 1년전 공산치하때 겪은 끔찍한 일 때문에 그때 피난 못간이들도 더더욱 앞다투어 피난을 가려했고 국군이 북쪽으로 진격했을 때 일시적으로나마 자유를 맛본 북한쪽 사람들도 중공군이 다시 내려오자 두 번다시 끔찍한 공산치하를 겪기 싫다며 대규모 피난민들이 내려오기 시작. 특히 전시 임시수도였던 부산은 그야말로 팔도에서 내려온 수많은 피난민들로 더더욱 북적거리고 있었다. 허나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피난을 가지 않고 자신의 터전에 남아있는 이들도 아직 있었고 또 이번엔 1년전과 달리 서울이 바로 수복되고 바로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고 휴전협상이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하나하나 다시 자신들이 살던 터전으로 복귀해오는 이들도 있었다. 황노인의 가족들도 북한군이 다시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일시적으로 피난을 떠나긴 했지만 상황이 그런대로 안정되어가는 것 같자 고향으로 복귀하긴 했다. 그러나 이때 황노인의 병세는 점차 악화되고 있었다.
“ 어르신...괜찮으시여라 ? ”
“ 전쟁은...전쟁은 끝난겐가 ? ”
“ 뭔 휴전협상인지 뭔지가 들어갔다고 혀는디...어찌 돌아가는건지는 지도 잘 모르겠
어라... ”
사실 다현도 문맹인데(* 한문 읽을줄 모름) 그래도 황노인의 집에도 원래 라디오도 있고 했었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바깥 소식이나 정보 정도는 들을수가 있었다. 따라서 전쟁은 그런대로 소강상태로 접어들고 휴전협상에 들어갔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휴전이든 뭐든 전쟁상태가 종식된 것은 아니기에 황노인은 안타까운 눈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전쟁이라도...전쟁이라도 끝나야 하는데 빨리... ”
“ 어르신... ”
“ 그 많은 전쟁고아들을 다 거두어 먹여살려야 할 것 아닌가 어서...그리고 어서 전
쟁이 끝나야 하는데... ”
“ 어르신...어르신 뜻은 저희가 잘 받들고 있어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
”
“ 전쟁이 빨리 끝나야 하는데...그리고 그 많은 전쟁고아들을 우리가 거둬야하는데
...그 불쌍한 어린것들을...그 불쌍한 어린것들을... ”
“ 어르신... ”
황노인의 말소리가 점점 힘을 잃어가고 그러다 팔 하나가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황노인이 숨을 거둔 것을 확인한 다현의 찢어질듯한 피울음소리가 들렸다. 생각해보면 1880년대 초반에 태어나 일제와 8.15 해방 그리고 6.25 사번까지의 그 모진 세월을 겪은 세대이기도 한 황노인이 그렇게 아직 휴전협정이 체결되기도 전인인 1950년대 초반 나름의 파란만장했던 한 생을 그렇게 마감하게 된 것이다.
- 8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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