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다 혀 니 여 라
“ 당장 나가렸다 !!! 꼴도보기 싫으니 어서 나가라는대두 !!! 내가 너를 그리 가르쳤
더냐 !!! ”
시댁에서 쫒겨난 다현이 갈곳은 어차피 친정밖에 없다. 그렇다고 그녀가 지금 마음나눌만한 친구나 동료가 있는가. 갈만한 먼 친척집이 있는가. 결국 몰락한 양반가로 하인들도 다 떠난 상태에서 아버지와 단둘이 살던 그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을터. 허나 3년만에 이런 모습으로 돌아온 딸을 본 송태권은 그저 기가막혀 불호령을 내릴 수밖에 없다.
“ 게다가 어디서 감히 하늘같은 남편한테 뺨을 때리고 그런 천하의 몹쓸 패악질을
벌여 ? 내가 너를 그리 가르쳤더냐 ?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뼈대있는 양반가문이니
그 체통과 품위를 잃어서는 아니된다고 그리 가르쳤거늘... ”
“ 아버님...그것이...그것이 그런 것이 아니라... ”
남편 한욱이 서울에서 신여성을 사귀었다며 헤어지자고 하는통에 그 난리가 벌어졌던 것 아닌가. 헌데 그 문제의 전후사정을 시부모님 앞에서는 그렇다치더라도 친정아버지한테조차 하소연을 할수 없게된게 다현의 처지다. 하긴 근본적으로 여자가 시댁에서 소박맞고 쫒겨난다는 것 자체가 흉이 되는 시대인데 더 말할게 무엇이 있겠는가. 게다가 다현이 더 놀란 것은 아버지가 이미 자신이 소박맞게된 연유를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봤자 불과 하루이틀 상간인데 벌써 소문이 여기까지 났단 말인가. 아니면 그렇게 며느리를 쫒아내면서 그 전후사정을 태권에게 전화로 통보정도는 조태선이 했을수도 있다. (* 몰락한 양반가라도 그래도 외부와 연락은 취하기 위한 전화 한통화 정도는 놓았을수도 있다.) 비단 꼭 전화가 아니더라도 어쨌든 며느리를 쫒아내면서 그 전후사정 설명정도는 그래도 사돈한테 해야한다는 개념정도는 있었을터. 전화를 했든 인편을 통해 연락을 취했든 여하튼 이미 그래서 그 사정을 알고있는 송태권. 허나 아직 그 송태권조차도 딸이 소박맞은 보다 구체적인 이유(* 한욱에게 새 여자가 생김) 는 모른다는 것이 다현을 더더욱 억장이 무너지게 만들었다. 아무리 그렇기로 아버지는 하나밖에 없는 딸의 역성을 한번은 들어줄줄 알았는데 그조차도 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어쨌든 뼈대있는 양반가문의 체통이 완전히 땅바닥에 떨어졌다는 사실에 절망의 탄식만을 쏟아붓고 있다.
“ 말세야 말세...망조가 단단히 들었음이야. ”
“ 아버지... ”
울며불며 어떻게든 억울함을 호소하고픈 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외면하는 아버지 태권. 그의 독백만이 이어진다.
“ 나라가 망하더니 가문도 망하고...그렇게 모든게 망하는게야...나라도 망하고 양반
도 망하고...가문도 망하고...뼈대있는 뿌리깊은 양반가 OO송씨 OO공파 가문도 이
제 OO대에 와서 완전히 폭삭 망했음이야... ”
“ 아버지...흑흑흑~~~!!! ”
“ 몰락한 집안으로 이제 하루세끼 연명하기도 힘들어진 처지에...아들도 없이 그래도
딸 하나는 반듯하게 키워...먹고살 걱정이라도 안하게 돈많은 장사치 집에 시집을
보냈건만 그래 이게 무슨 꼴이야. 그렇게 하나남은 딸마저 그런 장사치집안에서 조
차 그런 패악질을 부려 소박을 맞고 쫒겨나게 되었으니...OO송씨 OO공파 가문의
체통과 법도가 그야말로 완전히 땅에 떨어졌어. ”
다현은 그런 아버지 태권에게 어떻게든 억울하다며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고 싶었지만 태권은 도무지 딸의 말을 들어주려 하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 가문이 완전히 몰락하고 망해버린 현실이 기가막힌지 그 부분에 대한 탄식만을 거듭 늘어놓는다.
“ 이제 내가 죽어 저 세상에서 조상님들을 무슨 면목으로 보리. 대를 이을 아들하나
없이 몰락한 신세도 그렇지만...그래서...아무리 그래도 딸아이 하나만은 반가의 여
식이란 체통 하나 잃지 않게 하려고 그리 반듯하게 키우려 했건만...그렇게 달랑 하
나있는 딸아이마저 이렇게 체통을 잃고 쫒겨나게 되었으니...이렇게 집안이 망한꼴
로 내가 어떻게 저 세상에서 조상님을 봬 ? 이제 난 죽을자리조차 찾을수 없는 몸
이 되었구나. ”
여하튼 태권도 이 시대에 50을 넘긴 그런 나이긴 했지만 그런 아버지 입에서 ‘죽는다’는 말이 나오자 다현도 기가막힐 수밖에 없다. 딸인 자신도 지금 죽고싶을 정도로 억울하기는 매한가진데 그런 자신 앞에서 먼저 죽는다는것도 아니고 ‘죽을곳도 찾을수 없게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아버지. 보기도 싫으니 당장 나가버리라는 말에 다현은 원래 시집가기 전에 자기가 쓰던 방으로 들어와 슬피 울을 수밖에 없다.
그러고보니 원래 시집가기전엔 하녀 말순이와 함께 쓰던 방이 아닌가. 예전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몰락한 양반가 처지로 부득이하게 하녀와 한방을 쓸 수밖에 없던 그런 다현. 하지만 그래서 하인과 아씨의 사이라기보단 친동기보다 더한 정이 들었던 그런 말순이였다. 그래서일까. 막상 다현이 시집가는날 ‘아씨따라 간다’며 ‘아씨없이 못산다’며 한사코 따라나서겠다며 울며불며 하던 말순이. 그러나 이제 이 집엔 그 말순이마저 없다. 여하튼 몰락한 양반가의 처지로 하나밖에 없는 딸마저 시집을 보내게 된 송태권의 처지인지라 그 처지를 배려한 조태선이 일정한 금전적 도움을 주었고 그렇게 조태선으로부터 받은 금전의 일부를 태권이 또 하녀 말순이를 생각해 주지 않았던가. 그걸 밑천으로 어딜가서 장사를 하든 뭘하든 더 이상 하녀신분에 얽매여 살지 않게 해주겠노라고 말순이마저 보내려 하였는데 그러나 말순이는 어릴때부터 평생 아씨만을 모시는것밖에 모르고 살아온 자신이 어디가서 장사를 하곘느냐며 공부를 하겠느냐며 떠나기 싫다고 칭얼거렸다. 허나 막상 그렇게 다현마저 떠나고나니 말순도 생각이 바뀔 수밖에 없었던것일까. 하긴 다현마저 없는 집에서 젊은 하녀가 혼자 나이많은 송태권만을 상전으로 모시고 살기도 난감하다면 난감한 일이었을터. 말순도 결국은 떠나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음을 스스로 자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떠나버린 말순이. 그래서 어느새 텅빈방. 그곳에 덩그러니 혼자 남으니 다현은 소박맞은 설움에 아버지의 외면 거기에 말순이마저 보이지 않는것에 대한 서운함과 야속한 감정마저 겹쳐져 또 한바탕 슬피운다. 어떻게보면 이럴 때 말순이마저 없어 제대로 속터놓고 마음 나눌수 있는 친구나 말벗하나 없다는 것이 더더욱 다현을 아프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현은 말순에 대한 원망의 말을 한마디 안할 수가 없다.
“ 몹쓸 것 같으니...언제는 그렇게 나 따라 가겠다며 그렇게 칭얼대고 고집을 피우
니... ”
허나 어쨌든 그 말순이도 이제 더 이상 여기 없으니 그런 상황에서 혼자 그런 원망만을 쏟아보아야 뭘 하겠는가. 텅빈방에 그저 혼자 누워 망연자실하게 있다가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 아버지...아버지...기침(起枕 : 윗사람이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남) 하시었어라 ? ”
다현은 밤새 혼자 무슨 고민을 했을까. 어쨌거나 아침이 되었으니 아버지 진짓상이라도 한번 봐드리고 싶었다. 어쨌든 다현도 시집가기전에는 아버지 진짓상은 대개 하녀 말순이가 준비했을터이니 그녀가 음식솜씨가 있을 리가 없다. 그래도 없는 솜씨에 (어쩌면 마지막으로 ?) 아버지 진짓상이라도 한번 봐드리고 떠나야겠다는 생각이라도 한것인지 일어나자마자 태권부터 찾은 것이다. 헌데 어찌된 영문인지 아직 이른아침이건만 태권이 이미 방에 보이지를 않았다.
“ 아버지 !!! 아버지 도대체 어딜 가신것이어요 ? 대체 이 이른 시간에 어딜 가신
것이어요 ? ”
혹시 이전에 혼자 답답할때면 바람이나 쏘이겠다고 구경삼아 가던 동네 인근 지역이 있긴 하다. 혹시 그곳으로 가셨나 해서 한참을 찾아 돌아다녔다. 허나 그런곳까지 아침산책차 나갔다고 생각하기엔 너무 이른시간이 아닌가. 게다가 간밤에 송태권이 장탄식을 하며 쏟아붓던 말들을 생각해도 다현으로선 불길한 예감을 지우기가 쉽지 않았다. 설마 그런일이 일어나선 안된다고 생각하며 동네 근처 아버지가 가실만한 곳을 샅샅이 찾아보았으나 결국 아버지는 찾지 못하고 포기하고 체념하고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서 기다리자는 생각을 할때쯤이었다. 저쪽에서 다현을 알아보는지 달려오는 누군가가 있었다.
“ 다현아씨...혹시 송참봉 어르신댁 따님 다현아씨 아니여라 ? ”
“ 정씨 아저씨 아니시여라 ? 혹시 저희 아버지 못보셨어라 ? ”
다현과도 시집가기전 면식이 있던 동네에서 농사를 짓는 평범한 주민이었다. 여하튼 다현과도 태권과도 면식이 있는 중년의 아저씨인데 그런 남자가 다현을 보더니 황망히 달려오고 있었다. 다현은 불길한 기색을 지우지 못하며 아저씨에게 물었다.
“ 아저씨 도대체 저희 아버진...아버진 대체 지금 어디 계신것이어라 ? ”
“ 아이구 다현아씨...대체 이 일을...이 일을 어찌 말씀드려야할지. ”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남자는 결국 다현을 어디론가 안내했다. 대충 인근 야산쪽으로 올라가는 길목이긴 한데 정식으로 산길로 오르기도 전에 나무에 목을 매달고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다현은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 아버지...아버지 대체 이게 어쩐 일이시어라 ? 이렇게 세상을 떠나시면 지는 어
쩌라고 이러셔라. ”
다현도 황망했지만 다현에게 태권의 자살소식을 알려준 동네 아저씨도 적잖은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도 아마 다현이 소박을 맞아 돌아왔다는 사실은 대충 들어 알고 있을터인데 그런 상황에서 그 다현의 아버지인 송태권이 이렇게 이른 아침에 목을 매단 시신으로 발견되었으니 이 어찌 놀라운일이 아닐수가 있으랴. 비단 다현이나 아저씨뿐만 아니라 다현의 오열하는 모습과 심상찮은 분위기를 목격한 동네 주민들이 이미 하나하나 다가오고 있었다.
“ 아버지...아버지...이건 아니지라. 이렇게 목숨을 끊으시면 지는 어쩌라구 이러셔라
!!! 지가 친척이 있어라 뭐가 있어라. 지 혼자 아버지 상을 어찌 치르라고 이리 목
숨을 끊으셔라...세상에 딸자식 억울한 하소연 한번 들어주지도 않고 이리 목숨을
끊는법이 어딨어라...친척하나 없고 돈 한푼도 없는 지가...가짓것 하나없는 지가 혼
자몸으로 아버지 상을 어찌 치르라고 이리 가셔라. 간밤에는...저 세상에서 조상님
뵐 면목이 없다며...죽을 자리도 찾을수 없을 것 같다고 하시더니...그런 아버지가
이리 세상을 떠나시면 지가 어찌살어라...지 혼자 아버지 상은 어찌 치르고...지 혼
자 이제 이 세상을 어찌 살아가라고 이러셔라. 지 억울한 하소연...소박맞은 딸네미
억울한 사연 한번 들어주지도 않으시고 이리 세상을 떠나면 지는 어떡하라고 이러
셔라. 지 억울한 사연 하나 들어주지도 않고 떠나시면 대체 지는 어찌살어라. 이럴
수는 없어라...정말 이럴수는 없소 아버지. 아버지 !!! 아버지 !!! ”
세상에 부모잃은 슬픔 만큼이나 더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이 또 어디있을까. 그저 단순히 연로하신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것도 막상 그 일을 닥치고 겪으면 충격의 크기가 감당하기 쉽지 않은데 하물며 다현은 몰락한 양반가에서 하인도 친척도 모두 떠나고 연락끊긴 마당에서 아버지와 단둘이 살다 과수원,정미소하는 부잣집으로 시집가 그러다 (사실은 남편 한욱이 바람이 나는 바람에 이렇게 된 것인데) 3년만에 소박을 맞고 이렇게 돌아왔다. 게다가 실은 남자가 3년동안 자신한테 따스한 손길,눈길한번 주지 않다가 – 심지어 첫날밤에 뚱뚱하고 못생긴 마누라랑 같이 못산다며 방을 뛰쳐나가기까지 해서 다현에게 상처를 주었던 그런 남편이 아니던가. - 되려 서울로 올라가 그런 세련되고 매력적인 신여성을 만나 자유롭게 살고싶다며 자유연애를 추구하고 싶다며 자신보고 떠나달라고 한것인데, 그런 한욱에게 너무 분하고 기가막혀 한바탕 항의라도 하려다 그게 그만 시아버지한테 목격되어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것인데. 친정아버지 송태권은 그런 하나밖에 없는 딸의 하소연 한번 들어줄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집안이 망했다며 집안에 망조가 들었다며 나라가 망하더니 양반가도 이렇게 망해가는 모양이라며 이렇게 허망하게 목숨을 끊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다현으로선 이 기가막히고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 그야말로 필설로 다 할수 없는 크기가 될 것이다. 그야말로 피눈물이라도 토할것처럼 울부짖는 다현.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동네 주민들 조차도 차마 지켜보기 쉽지 않을 정도로 목불인견이었다. 다현의 피울음이 그렇게 터져나오고 있었다.
다현은 일단 어려운 형편대로 동네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3일장이라도 치를수가 있었다. 대충 동네 사람들이 이웃 마을에도 연락은 취해 불과 며칠전까지 다현의 시부모였던 조태선 내외도 문상을 왔다. 태선 내외도 막상 이런일을 접하니 무슨말을 더 잇지 못하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한욱은 끝내 문상조차 오지 않아 다현의 서운함을 한층 더하게 만들고야 말았다.
“ 철없는 몹쓸사람 같으니...아무리 그래도 며칠전까지는 장인어른이었던분이 돌아가
셨는데...하다못해 인사라도 와줘야 도리가 아닌가. ”
정말이지 나이어리고 철딱서니 없는 사람이었다. 세 살연하였던 그리고 3년을 함께 살았던 조한욱이란 남자에 대한 다현의 인상과 결론은 이렇게 날 수밖에 없었다. 여하튼 동네 주민들 도움을 받아 그렇게 상을 치르고 뒷산에 조용히 묻은 아버지의 묘역. 다현은 그 앞에서 다시 피울음을 토했다. 그러고보면 이제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고 진짜 이 세상에 홀로남은 처지가 아닌가. 친척이 있는가 친구나 동료가 있는가. 거기다 이제 시댁에서 소박을 맞은 처지로 그곳으로 돌아갈수도 없다. 텅빈집으로 돌아와 다현은 한참을 망연자실하게 있었다.
“ 아씨...뭐라도 좀 드셔야지라... ”
“ 필요없으니 가져가시오. ”
걱정이 된 동네주민 몇몇이 먹을거리라도 좀 구해서 다현에게 가져다주려 하였다. 허나 다현은 그마저도 외면하고 있었다.
“ 내가 어디 그런 음식들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겄소 ? 필요없으니 그냥 가져가시오
. ”
“ 아씨, 아무리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것이어요. 아무리 억장이 무너지는 심
정이라도 이리 망연자실하게만 계시면 안되는것이여라. 부디 뭐라도 먹고 기운을
차리시고 살아갈 방도를 생각하시어요. ”
아무리 신분사회라도 나이의 인생연륜은 무시못하는것일까. 여하튼 옛날같으면 일반 평민에 불과했을 농민들이지만 20대 초반의 양반댁 아씨 앞에서 그래도 인생 한 10년,20년은 더 산 어른들의 연륜을 이리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아씨라기보단 나이어린 막내동생이나 조카라도 타이르듯 하면서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동네주민에 그 성의를 마냥 무시할수도 없어 뭐라도 좀 들기는 했다.
그러나 다현이 그렇다고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세운 것은 아니다. 그래도 굶어죽고 싶지는 않았는지 아니면 그래도 양반댁 아씨라고 걱정되어 먹을것이라도 챙겨주는 동네주민들 성의를 무시만 할수 없어서 그랬는지 먹을 것을 좀 챙겨먹긴 했지만 다현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지 않아 소리소문없이 집을 나갔다. 동네 주민들도 사실 다현네 집을 그저 한때 잘 나가던 양반집이지만 지금은 몰락한 가문 그 이상의 의미는 두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엔 좀 걱정은 했어도 시간이 지나면서 각자 생업에 바빠 더 이상 다현에게 신경은 쓰지 않고 있었다. - 신분차이 때문에라도 어쨌든 너무 가까이 지내는건 어렵고 난감한 부분이 있었을터이고. - 그렇게 동네주민 어느 누구하나 다현의 일거수 일투족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을때쯤 다현이 혼자 조용히 집을 나선 것이다.
어디를 얼만큼이나 갔을까. 그러고보면 다현 입장에서도 태어나서 지금까지 집에서 이렇게 멀리 떨어져 나와보는 경험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굳이 있다면 두 개 마을을 거쳐야 당도하는 조태선 집안에 시집갔을때가 전부고 시집가서도 그저 그곳에서 시부모님 봉양하려 남편 뒷바라지하랴(* 비록 자신을 거들떠도 안보는 남편이긴 했지만) 그러면서 집밖으로는 나가본 경험이 거의 없는 그런 다현 아씨가 아닌가. 헌데 아버지와 단둘이 단촐하게 살던 시절에도 그리고 시집을 가서도 한번을 가본적이 없는 낯설고 먼길을 하염없이 걷고 있는 것이다.
얼마를 갔을까. 어느 낯선 강변이 나왔다. 다현은 그 강기슭에 우두커니 앉아 한참을 있었다. 그러고보면 다현의 시댁쪽으로 가는길은 강이나 하다못해 작은 개울하나 없는 그런 평지였는데 이쪽은 이런 큰 강이 있는 것을 보면 다현의 집에서도 시댁쪽에서도 완전히 정 반대방향인 그런 먼곳까지 온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곳에서 망연자실하게 대체 혼자 무슨생각을 하고 있는것인지 한참을 우두커니 흐르는 강물만 바라보고 있는 다현. 이래저래 자신의 애처롭고 처량한 인생에 대한 감정이 북받쳐 눈물짓기도 하고 그러던 다현이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문득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주에 황노인이라는 제법 유명한 고리대금업자가 있다. 고리대금업이야 예나 지금이나 인상이 안 좋을 수밖에 없는데(* 요즘에 비유하지면 ‘대부업’이 되는 것 아닌가.) 여하튼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든 기타 이런저런 이유로 목돈이 필요한 사람에게든 그런 돈을 빌려주고 나중에 이자를 쳐서 갚도록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여하튼 상당한 부를 축적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자연히 그런 일을 하면서 전주는 물론 인근의 이리(지금의 익산)나 군산,정읍등 인근지역에까지 발이 넓을 수밖에 없을터. 여하튼 그만한 부를 이루고 있으면서 이 지역에서 상당한 인맥을 갖추고 있는 노인임에는 틀림없다.
그런 황노인에게 네명의 아들이 있고 지금 나이는 첫째가 20대 후반 막내가 20대 초반 정도다. 이 시대에 나이 60넘은 노인이 큰아들이 20대 후반이라면 여하튼 서른을 넘어 결혼을 해 자손을 보았다는 이야기니 이 시대의 통념으로는 꽤 늦게 장가를 간 셈인데 여하튼 나중에 고리대금업에 손을 댈수 있을 정도의 부를 이루기까지 젊은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그 젊은 시절의 파란곡절도 보통이 아니었을터이니 그런 방향으로 이해를 할수 있을 것도 같다. (* 굳이 다른 사례를 들자면 독립운동을 하던 이들중에도 혼기를 놓쳐 늦게 결혼을 한 사람이 꽤 된다.)
그런 황노인에게서 빌려간 돈을 갚아야하는 사람들을 찾으러 다니는 일은 보통 장남 정수와 둘째 정태가 도맡아하고 있다. 사실 집이야 부유한 환경이지만 여하튼 남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갚도록 하는 그런일에 종사하는 사람이라 주위로부터 받는 손가락질도 있고 이들 두 아들도 솔직히 아버지의 일을 그리 긍정적으로 보지는 않는 편인데 그렇다고 지금 달리 하는일이 있는것도 아니라 마지못해 아버지 일을 돕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여하튼 그런 두 아들이 군산에서 아버지한테 돈을 빌리고 소식이 없는 두 지인(知人)의 행방을 수소문하며 돌아다니는 중이다. 그러나 쉽지 않았는지 다소 체념한 상태로 강변에 잠시 차를 세워놓고 자신들끼리 환담을 좀 나누고 있다. (* 이 시대에 차까지 몰고 다니며 영업을 할 정도면 확실히 부유층인것만은 분명하다.)
“ 형, 근데 박첨지든 송사장이든 어디 그 사람들 찾기가 어디 말처럼 쉽겠어요 ? 갚
을 사람 같으면 진작에 나타났겠지...보니까 작정하고 튄 모양인데... ”
“ 그러니까 이렇게 우리가 찾으러 다니는 것 아냐.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돈이 많다
고 해도 돈이 어디 하늘에서 떨어지는것도 아니고 약정(계약서)까지 하고 돈을 꿔
갔으면 갚는게 당연한 이치지. ”
대충 그렇게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 정수와 정태 형제. 헌데 그러다 형이 동생을 보며 공연히 씨익 웃으며 의아함과 힐난을 섞어 이렇게 한마디 한다.
“ 넌 근데 공무원 시험 보겠다는 애가 시험준비는 안 하고 왜 자꾸 우리만 따라다니
는거냐 ? ”
“ 그게 뭐...공무원 시험이 어디 쉽나요. 그리고 뭐 살다보니 어찌어찌해서 이렇게
된거죠 뭐. 저도 다시 기회를 봐서 다른일을 찾아보고 싶긴 해요. ”
어쨌든 두 사람 다 고리대금을 하는 아버지와는 다른길을 가고싶은 그런 바램이 있는 이들인것만은 분명한 듯 하다. 무엇보다 이들이 지금 전주에서 멀다면 멀다고 볼수도 있는 군산까지 놀러온 것은 분명 아니니 차만 멈춰세워놓고 한가한 이야기만 주고받을수 없다. 다시 차를 움직여 자신들이 찾아다니는 이 행방을 찾아볼까 그런 궁리도 하는중인데, 헌데 그때였다.
“ 형, 저게 뭐죠 ? ”
저만치 강 한가운데 뭔가가 떠내려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보니 무슨 한복 옷가지 같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긴가민가해서 이렇게 형제는 이야기를 나눈다.
“ 설마 사람은 아니겠죠 ? ”
“ 글쎄다. 지금이 장마철은 어쨌든 지났으니 홍수에 떠내려가는 옷가지일리도 없을
테고... ”
“ 그러니까요. 혹시 사람이 강에서 사고라도 당한건 아닌지... ”
먼발치서 봐도 뭔가 여인이 입는 한복 옷가지 같은것과 사람이 둥둥 떠내려가는 모습. 무엇보다 정수나 정태나 비록 고리대금을 하는 아버지 일을 도우며 사는 처지긴 하나 천성까지 악한 사람은 아니라서인지 강물에 떠내려가는 사람을 그냥 보고만 있을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거리가 멀어 확인도 쉽지 않은데 일단 둘째 정태가 무조건 강물로 뛰어들려했다.
“ 미쳤어 이 녀석아. 깊이도 모르면서 무작정 강물로 뛰어들면 어쩌겠다는거야 ? ”
“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떠내려가는걸 보고만 있을수도 없잖아요. ”
인근에 일단 나룻배 한척이 보였고 사공도 한 사람 눈에 들어왔다. 운이 좋았던것인지 무작정 돈을 얼마든지 지불해줄테니 저기 떠내려가는 사람부터 구해달라고 사정을 해보았다. 사실 강물에 떠내려가는 조난자든 죽은사람의 시신이든 흘러가는 속도가 있으니 나룻배로 따라잡을수 있을지도 미지수이긴 한데 그래서 사공도 난감해하긴 하다 일단 가보기로 한다. 여하튼 대체로 운이 좋은것인지 저만치 무슨 암초나 나뭇가지 같은것에 걸려 시신인지 여인인지 알 수 없는 물체가 더는 떠내려가고 있지 않았다. 사공이 서둘러 배를 저어 여인이 더 떠내려가지 않고 멈춰서 있는곳에 다다를수 있었다.
그렇게 떠내려가던 여인이 바로 다현이었다. 시댁에서 소박맞고 그리고 친정아버지마저 자신을 외면하고는 집안이 망했다며 탄식하다 자살을 한 상황에서 실의에 빠진 다현이 오갈데도 없는 처지에서 그렇게 자신의 집에서 멀리 떨어진곳까지 와서는 강물에 빠져 자살을 시도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모진 사람의 목숨이 쉽게 끊어지지 않는것인지 이렇게 구조가 된 것이다. 일단 여인을 꺼내서 배에 태우고 서둘러 강기슭까지 온 정수와 정태. 급한대로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가 있기는 한지 정수가 인공호흡을 시도해본다. 정태가 보기 좀 민망해서 살짝 얼굴을 돌리는데 덕분에 다현이 좀 숨이 돌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허나 눈을 좀 뜨는 듯 하고 숨을 좀 쉬는 듯 하던 다현은 다시 정신을 잃었고 안되겠는지 정수와 정태는 다현을 일단 병원에부터 데려가려 했다.
“ 여긴 큰 병원이 없으니 일단 전주까지 가봐요. ”
이 시대에 이런 지방에 큰 병원이 잘 없을것이란 것은 누구나 상식으로 알수있을터. 앰뷸런스도 마땅한 응급장치도 없으니 그냥 무작정 모든 것을 운명과 하늘에 맡기고 큰병원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다. 간간히 인공호흡이라도 해주면서 그렇게 다현의 숨이 계속 붙어있기만을 바랄 수밖에. 그렇게 간신히 전주의 큰 병원에 도착 의료진이 다현의 진찰을 시도했고 다행히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곧 깨어났다.
“ 아니, 근데 이 녀석들이...꾼 돈 갚게 하라고 보낸녀석들이 하라는 일은 안하고 대
체 뭔 소동을 벌이고 있는게야 ? ”
아버지한테도 상황을 연락드리지 않을수가 없어 전화를 했고 황노인은 황노인대로 기가막혀서 일단 전주의 큰 병원으로 와 보았다. 여하튼 다현은 일단 의식은 회복한 것 같고 회복실에서 몸을 추스르는 중이다. 다현 입장에선 생전 구경도 못해본 이런 큰 병원에 그것도 낯선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것이 그저 어리둥절할뿐이다. 정수가 상황설명을 해준다.
“ 괜찮으세요 아가씨 ? 하마터면 큰일날뻔했습니다. ”
‘달덩이같다’고 표현하면 딱 맞을 것 같은 다현의 크고 둥근 얼굴. 확실히 미인에선 좀 거리가 있는 외모이지만 그래도 대충 봐도 젊은 여성이 분명한 그녀에게 이렇게 부르고 있는 정수와 정태. 허나 자신이 이 사람들이 구조해서 살아난것이란 상황파악을 하게된 다현은 다시금 단발마같은 울음을 터트린다.
“ 아악...도대체 왜 살려줬어. 도대체 왜 살려줬냐구 !!! ”
‘물에 빠진 사람 구해주면 보따리부터 내놓으라’고 한다더니 그것이 아니라 자살을 시도하려는 사람을 구해주면 이런 원망부터 듣게 되는것일까. 하긴 다현의 입장에선 절망의 끝자락에서 다른 선택을 할수있는게 없어 시도한 자살이었으니, 그것마저 무위로 돌아갔으니 더 큰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일단 정태와 정수가 그런 다현을 진정시켜보고 일단 가족들에게 연락을 취하든 뭐든 해봐야할 것 같아서 그녀의 신원과 자초지종부터 물어보려고 한다.
“ 없어요 그런거. ”
“ 네 ? ”
“ 없어요. 가족도 친구도 친지도 이제 다 내게 없단말이오. 세상에 이제 나 혼자 남
았는데 이렇게 살아서 뭐해. 그러게 날 대체 왜 살려 주었소. 가족도 친지도 없이
이제 세상에 홀몸뿐...돈도 한푼 없는 나같은 X...시댁에서 소박까지 맞은 나같은
천하 재수없는 것을 도대체 왜 살려주냔말이오 !!! 으흐흐흐흐흐흑~~!!! ”
황노인과 두 아들은 일단 다현을 자기집으로 데리고 오기로 했다. 다현의 사연을 대충 들어보니 어쨌든 시댁에서 소박맞고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마저 돌아가신뒤 자살을 시도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오갈데없는 처지가 된 몸 아닌가. 그래도 의아한점은 아직 남아있기에 황노인이 이렇게 물었다.
“ 그럼 다른 친척이나 친지도 없다는말인가 ? ”
“ 육촌 오라버니가 두분정도 계시는걸로 아는데 어릴 때 명절 때 몇 번본게 전부고
그 뒤론 못뵌지 십년이 넘었어라. 아니 10년이 다 뭣이여라...지가 여하튼 열 살도
되기전 어릴 때 뵌 분들이니 한 15년이 다 되가는 일인지라. ”
어느덧 20대 초반의 다현이 열 살도 되기전에 본적이 있는 육촌오빠 둘 정도가 그녀에게 친척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의 전부라면 사실상 연락할만한 친척은 없는것이나 다름없는 경우 아닌가. 이 시대에도 2대독자니 3대독자니 그런식으로 손귀한 집안이 흔하진 않아도 간간이 볼수는 있는 경우이긴 했지만 남자도 아닌 여자가 지금껏 혼자 몸으로 아버지와 살다가 시댁에서 소박맞고 돌아와서 그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난몸으로 그 외에는 다른 연락할만한 친척이 없는 몸이라니. 그야말로 기가막히기 이를데 없는 일이다. 이런 다현을 게다가 이미 한번 자살을 시도하려했던 몸이니 또 무슨 잘못된 마음을 먹을까 우려도 되고해서 일단 그녀를 집으로 데리고온 것이다. 그러고보면 남들한테 손가락질 받는 고리대금업을 하는 집안일지언정 그래도 천성은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들 같다고 봐야하는것일까. 일단 황노인은 다현의 말이 100% 다 진실인지 여부를 좀 알아보기 위해 두 아들에게 군산쪽으로 가서 자세한걸 알아보라고 했다. 여하튼 다현의 시댁이었던곳이나 그녀가 친정아버지와 단둘이 살던곳 정도는 그녀로부터 이야기를 들어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으니 찾아가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일이 아니다. 게다가 여하튼 조태선 사장의 집이라는곳은 군산에서도 그런대로 알아주는 과수원과 정미소를 하는 잘나가는 집안. 알아내는 것이 그리 어렵지가 않았다.
“ 그래, 알아보았느냐 ? ”
“ 그 조태선 사장이라는이의 집에서 최근 며느리를 쫒아낸 사실이 있는것만은 사실
이라고 합니다. 보니까 남편과의 사이에 불화가 좀 있었던 것 같던데... ”
이야기를 어떻게 듣고 왔는지 장남 정수가 말을 그와같이 전했고 그러자 다현이 정말 억울하다는 듯 그제서야 한바탕 하소연을 한다. 그러고보면 시부모님한테도 친정아버지한테도 제대로 털어놓지 못한 억울한 사연을 황노인 가족들에게 처음으로 털어놓는 모양새다.
“ 그 세 살어린 나이어린 신랑이...3년동안 제게 눈길한번 손길한번 주지 않더니만...
그러다 서울에서 공부한다더니...그곳에서 신여성을 만났다면서...그러면서 절더러
헤어져달라느니...자유연애를 해보고 싶다느니 막 그러던거 아녀라. 그러니...지가
무슨 부처님 가운데 토막도 아닌데 그런 수모를 당하고 어떻게 참을수 있겠어라.
그래서 그만...흑흑~~~!!! ”
“ 허어...그런일이 다 있었단말인가 ? ”
그런 정도의 사연이 요즘 흔하디 흔하다는 것 정도는 황노인도 모르지는 않을터. 그래서 다현의 손을 슬몃 잡아보며 그녀를 달래주며 위로하기까지 한다.
“ 참...나도 그런 사연들이 있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본 것 아니네만은...그렇게까지
기구한 사연이 있는 여인을 이렇게까지 가까이서 접해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구
먼. 그러고보면 그...어쨌든 곱게자랐을 양반댁 여식이 그런곳으로 시집을 가서 남
편사랑 한번 제대로 받아보지도 못하고 그런 3년세월을 산것도 기가막혔을텐데...
되려 그런 남편이 새 여자가 생겼다며...그 무슨 자유연애를 하고싶다며 그런짓을
벌이다니. 에잉...몹쓸사람들 같으니. ”
비단 다현을 위로하는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다현을 내쫏은 그녀의 전남편과 시댁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일어나 이런말을 하는 것이다. 게다가 시댁에서 쫒겨난것도 그렇거니와 아버지도 이미 돌아가시고 마지막 하나 남았던 하녀도 떠나고 혼자남은 몸이라니 이제 다 쓰러져가는 초가만 남은 그녀가 살던 집으로 가는것도 차마 못할짓이 될 것이다. 오죽했으면 이 아직 어리다고 할수 있는 여자가 자살시도까지 했겠는가. 그래서 황노인은 일단 그런 다현을 거듭 위로하며 잠시 자신의 집에 기거하도록 했다. 다현도 여하튼 눈치도 있고 또 자신의 처지를 모르진 않으니 그곳에서 작은 허드렛일이라도 하며 그곳의 일을 도왔다. 사실 황노인의 집이야 잘사는 집이니 하인도 있고 하녀도 있지만 다현이 손수 손을 걷어부치고 자신도 그네들의 일을 돕겠다고 하는 것이다. 헌데 그런 다현을 하루는 황노인이 불렀다.
“ 여보게, 그런데 자네 이름이 다현이라고 혔던가. ”
“ 예, 어르신. ”
다소곳하게 노인앞에 앉아 대답하는 다현. 무엇보다 아무리 그동안 한 얼마동안이라도 함께 지냈더라도 아직은 낯설다고 할 수 있는 자신의 아버지보다도 나이많은 노인 앞에서 다현은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얼굴도 살짝 붉어지기까지 하는데 황노인이 그런 다현의 손을 거듭 어루만지며 이런 제안을 한다.
“ 내 그러잖아도 지난 한 며칠 앞으로 자네의 거취를 어찌하면 좋을지 그 고민을 해
보았어. 여하튼 시댁으로 돌아가는 것은 차마 못할짓이고 식솔들도 다 죽고 떠나고
없는 그 집으로 돌아가는것도 그리 바람직해보이진 못하고... ”
“ ...... ”
“ 그렇다고 명색이 양반댁 여식이란 자네를 내가 이 집에서 하인처럼 부릴수도 없
는일 아닌가. 아무리 시대가 변했어도 그리 곱게자란 양반댁 여식에게 궂은일을
시킨다는 것은 차마 못할짓이야. ”
“ 아...아니여라. 전 이미 각오하고 있어라... ”
다현은 마치 자신을 이 집에서 하녀로 거두어만 준다면 무슨일이든 다 하겠다는 자세로 나오고 있고 그러자 황노인이 그런 각오까지 서린 다현을 한층 딱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여하튼 시대만 잘 만났어도 얼마든지 곱게 자랐을 그런 여인이 이 무슨 수모인가. 그걸 생각하니 다현의 처지가 마치 자신의 일처럼 아파오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말꺼내기가 쉽지 않아서인지 황노인은 헛기침을 두어번 하고는 조심스레 입을 연다.
“ 그보다는 자네도 여기서 한 몇주 지내보며 우리집 분위기를 대충 알겠지만 나에겐
이미 장성한 아들도 넷이나 있고...결정적으로 내게 지금 부인이 없네... ”
“ ...... ”
“ 한 10년전에 상처(喪妻)를 했네. 아니 엄밀히 따지면 상처라고는 할 수 없고...그
렇게 오래전에 그 사람이 무슨 나랑 그리 안 맞는 일이 많았는지 어느날 갑자기 집
을 나가버렸네. 아무리 그래도 우리집에 아이들도 있고 한데 그런 사정은 생각도
해 주지 않고말이지. ”
“ 어...어르신... ”
이런말을 하는 황노인의 의도는 과연 뭘까. 다현이 아직 눈치는 채지 못한 것 같은데 그래도 공연히 긴장되고 두려워지는 심정을 어찌할 수가 없다. 일단 황노인이 자신의 처지를 말하며 뭔가 하소연하는듯한 간곡한 어조는 계속 이어진다.
“ 사실 그 사람(집나간 전부인)을 찾아보려고 내 나름대로 백방으로 수소문을 해봤어
. 허나 10년이 지나도록 소식을 도통 알수가 없었던게지. 그러는 사이에 아이들도
어느덧 저리 다 자랐고...그 사람은 그냥 죽었으려니 생각하고 이리 사는게야. ”
“ 어...어르신... ”
“ 내 말뜻이 아직 무슨말인지 모르겠나 ? ”
“ 어르신 대체... ”
‘설마 아니겠지 ?’ 하는 생각을 다현이 하고는 있는데 어쨌든 60넘은 노인이 아직 젊고 어린 자신에게 설마 ? 그런 생각으로 다현이 두려움으로 노인을 바라보는데 노인은 다현에게 더욱 바짝 다가오며 이렇게 말한다.
“ 내 후실이 한번 되주면 어떻겠나 ? ”
“ 어르신... ”
“ 어쨌든 이미 자네도 한번 소박을 맞은 처지로 이제와서 다른 새출발을 하기도 쉽
지 않을 것 아니겠나. 그렇다고 어디 혼자 갈데가 있는 몸도 아니니...그렇게 힘들
게 사느니...차라리 내 후실이 한번 되어주는게 어떻겠느냐 그 소리야. ”
“ ...... ”
“ 곱게 자란 반가의 여식인 자네가 어딘지도 모르는 낯선곳에서 정처없이 헤매다
가 무슨 봉변이라도 당하던가 생고생을 하며 사느니...그래도 내 곁에서 살면 최
소한 경제적 어려움은 없이 살게 될것이 아닌가. 그러니 한번 내 후실이 되어달라
는 말일세. 어차피 오갈데 없는 처지가 된 자네로선 차라리 그게 낫지 않겠나 그
말일세. 한번 잘 생각해보게. ”
- 5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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