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철은 며칠째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솔직히 사기결혼을 당한것이나 다름없으니 이 정도도 그나마 다행으로 봐야하는 상황이다. 정말이지 지금 당장 선신과 이혼은 물론 사기결혼으로 그녀를 고소라도 해버리고픈 심정을 겨우겨우 참아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 기철이 그녀로부터 어떤 금전적인 피해를 입거나 사기를 당한 것은 없다. 허나 어쨌든 A여대를 나오고 간호조무사로 3년을 일했다는 그것이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었다는 것. 게다가 이쯤되니 그녀가 지금까지 말해온 케이블방송사 사장인 아버지의 사생아가 어쩌구 그와같은 가정사와 관련된 부분도 자연스레 의심이 갈 수 밖에 없는 그런 상황 아닌가. 그야말로 신분이나 학력,집안등을 모두 허위로 과대포장한뒤 돈많고 나이많은 남자들에게 접근 치료비니 유학비니 이런식의 핑계를 대가며 금품을 요구하는 전형적인 SNS 꽃뱀. 그 자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다만 어쨌든 선신이 아직까지 그런식으로 기철에게 금전적 피해를 입힌 것은 없으니 적어도 그 점만은 기철 입장에선 선신에게 마지막 기대를 할만한 것이고, 선신 입장에서도 자신이 결코 그런 목적으로 기철에게 접근한 것이 아님을 항변할수 있는 그런 실날같은 희망이긴 하다. 허나 어찌 아는가. 기철 입장에서 선신이 단순히 그런 수준의 금품이 아닌 가령 유산이라던가 더 큰 것을 노리고 자신한테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마저 들수도 있으니 이런 상황에서 그렇다고 바로 이혼을 하기도 쉽지 않아 일단 기철은 한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는 것으로 방침을 정한 것이다.
사실 기철 입장에선 지금와서 다시 이혼하는것도 쉽지가 않다. 어쨌든 사업상 아내의 내조 역할이 중요한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지금껏 그런 부부동반이 필요한 행사장이나 친목모임에 이미 여러차례 선신과 동반 참석을 하였으니 이제와 다시 홀아비 아닌 홀아비 신세로 돌아가는것도 기철 입장에선 차마 못할 노릇이기까지 하다. 그런 상황에서 기철은 여하튼 지금 이런 상황에서 선신을 태연하게 볼 수 있는 심리상태도 아닌지라 적당히 회사 사무실에서 잠을 청한다던가 동료나 친구 혹은 부하직원에게라도 적당히 핑계를 대서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는다던가 아니면 하다못해 굳이 안가도 되는 문상까지 굳이 찾아가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새기까지 하는 그런식으로 밖에서 며칠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기철이 그렇게 며칠째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는 어느 하루. 선신은 집 앞 마당 테이블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때마침 공교롭게도 세차게 비까지 내리는 밤이기도 한데, 그런 밤에 작정하고 그 비를 모두 맞기라도 할 참인지 적당히 츄리닝 바람으로 나와있는 상태에서 그렇게 테이블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 하염없이 쏟아지는 비를 맞고만 있었던 것이다.
사실 선신도 선신대로 억울한 것이 사실이다. 적어도 선신 입장에서 작심하고 기철을 속일 생각으로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은 분명 아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 자존심 때문에 또는 SNS나 익명공간 같은데서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싶지 않아 A여대 출신이니 간호조무사(또는 간호사 ?)출신이니 하는식으로 자신을 허위 과대포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그런 것을 바탕으로 누군가를 속이거나 금품을 노릴 의도는 결코 없었다. 무엇보다 기철에 대한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대체 어떤 가정환경과 배경에서 자라왔는지는 모르겠지만 – 실수이지 진실인지 모르겠지만 이미 선신은 남편 기철 앞에서도 의붓아들 경환 앞에서도 ‘고아’라는 표현을 몇 번 쓴바 있다. - 여하튼 많이 어렵고 힘들게 자라왔던 선신에겐 여하튼 아버지처럼 어른처럼 의지하고 싶은 그런 대상이 필요했고 그런 상황에서 만난 남자가 중소기업 사장 최기철이었던 것이다. 비록 애딸린 이혼남이라고 할 지언정 기철을 진심으로 사랑한 죄밖에 없다. 다만 그에게 자신의 신분이나 전력에 대해 모든 것을 정직하게 사실대로 밝힐 타이밍을 놓치는 바람에 어찌어찌하다 여기까지 온것뿐.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기철을 속이거나 사기를 칠 작정으로 접근한 것은 아니었는데, 기철이 이제 자신의 말은 어느것도 믿어주지 않을것만 같은 분위기니 선신도 속상하고 억울해서 울화가 치밀 지경이다. 그런 상황에서 선신은 비를 흠뻑 맞으며 기철의 집 마당 테이블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한바탕 흐느끼고 있는 것이다.
“ 새엄마... ”
한편 경환은 경환대로 아버지도 집에 들어오시지 않는데 새엄마마저 보이지 않자 불안해져 잠깐 밖으로 나와보았다. 물론 비가 세차게 내리니 우산을 쓰고 나올 수밖에 없는데, 그런 상황에서 어둠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뭔가를 발견했다. 1층 베란다 전등불이라도 켜보니 그제서야 그것이 선신임을 확인할수 있어 그제서야 그녀에게 다가가 보았다.
“ 뭐하세요 새엄마 ? 그러다 감기 들어요. ”
코로나덕분에 되려 독감환자는 줄었다는 말도 있긴 했지만 감기든 독감이든 그런 위험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분명 아니다. 게다가 코로나든 감기든 이렇게 변덕이 심한 날씨(대략 환절기 정도)에 옷까지 엉성하게 차려입고 나와 비를맞고 있으면 건강에 위험이 생길수 있음은 간호사나 간호조무사 출신이 아니라 건강이나 의학에 대한 상식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여하튼 거듭 선신이 걱정되어 그녀를 불러보는 경환. 허나 선신은 여전히 웅크린 자세에서 울먹거리기만 할뿐 그 어떤 반응도 없다.
“ 새엄마...괜찮으세요 ? ”
걱정이 되어 다시금 선신을 살펴보며 말을 건네보는 기철. 사실 선신이 너무 미동도 하지 않아 순간 혹시 돌아가신 것은 아닌가 싶어 가슴이 덜컹 내려앉기까지 했는데, 아무리 그렇기로 아직은 젊고 건강한 선신이 그렇게 금방 쉽게 세상을 떠날일이 발생하진 않겠지만 여하튼 여러 가지로 걱정도 되고 우려도 되어 거듭 이렇게 말을 건네보는 경환. 그러자 한참만에 선신이 반응을 보인다.
“ 경환아... ”
그제서야 경환을 알아보고는 말을 건네보는 선신. 그녀의 말이 이어진다.
“ 우와아앙~~~!!! 경환아~~~!!! ”
순간 ‘헉 !!!’ 하는 당혹스러움이 들 정도로 갑자기 선신이 경환에게 와락 안겨들었다. 그것도 비에 흠뻑젖은 옷 그대로. 게다가 순간 당황한 경환이 우산을 떨어뜨리기까지 했으니 선신은 물론 경환까지 비에 흠뻑 젖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다. 그나마 다행히 빗줄기가 조금전보다 조금 약해지는 흐름이긴 한데 여하튼 경환은 선신을 어떻게든 달래 집안으로 들여보내려 하는데 선신은 그런 경환에게 거듭 매달려 억울하다며 울먹거리고 있다.
“ 경환아...나 정말 억울해. 새엄마 진짜 그런 사람 아냐. 새엄마 진짜 그런 여자 아
니거든. 그런데...그런데...아빠가 오해하고 계신거야. 새엄마 진짜 그런여자 아니란
말야 !!! ”
아직 경환은 집에서 그것도 아버지와 새엄마사이에 벌어진 소동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기철 입장에서든 선신 입장에서든 그녀가 학력은 물론 전력까지 모두 속이고 기철과 결혼한 ‘사기’를 쳤다는 것을 아들인 경환에게 시시콜콜 다 이야기할만한 사안은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아직은 그와같은 문제를 전혀 모르고 있는 경환. 어쨌든 선신은 달래야겠고 아직 비가 계속 내리는 상황인데 이대로 선신을 바깥에 방치해둘수도 없어 거듭 그녀를 달래고 설득해 일단 그녀를 집안으로 들여보낸다.
“ 나, 목욕좀 할게 경환아. ”
어차피 비에 흠뻑 젖은 몸이니 이대로 방으로 들어갈수도 없고 그래서 욕실로 향하며 선신이 이렇게 말한다. 비에젖은 옷은 욕실앞에 던져놓고 안으로 들어가는 선신. 잠시후 ‘쏴아아’ 하는 물소리가 들려온다. 경환이 선신의 젖은옷을 세탁기가 있는곳으로 가서 옆의 빨래통에 넣어놓고, 그리고 침실에서 선신이 갈아입을 속옷을 대충 꺼내서 가져온다. 헌데 잠시후, 목욕을 마치고 나온 선신이 조금 짜증스럽게 이렇게 말한다.
“ 야 !!! ”
2층 자기방으로 올라가진 않고 1층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경환이기에 바로 말은 건넬수 있게 된 상황. 어쨌든 선신의 말이 이어진다.
“ 장난해. 자야하는데 잠옷으로 가져와야지. ”
좀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경환이 ‘피식~!’ 하며 실소를 터트린다. 뭐 어차피 밤시간이니 자야하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굳이 그런걸 또 말해야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수없이 다시 경환이 침실로 들어가려는데 순간 ‘아차’ 싶다. 사실 경환은 선신의 잠옷 있는 위치를 모른다. 아까 선신이 갈아입을 속옷이야 대충 옷장에 보이는 것을 가져오긴 했지만 여하튼 그래서 다시 나와서 선신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는 상황. 경환의 말이 이어진다.
“ 어디 있는데요 잠옷은 ? ”
“ 옷장 아랫서랍에 있을거야. ”
말한대로 다시 침실로 들어가서는 아랫서랍에 있는 잠옷을 가져오는 경환. 그러면서 혹시 선신이 술이라도 취한 것은 아닌가 싶어 그녀를 잠시 살펴본다. 일단 그런 것 같지는 않고, 여하튼 좀전에 자신에게 안기며 울며불며 한것도 있고 해서 경환이 여전히 신경쓰이는 듯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 경환아... ”
여하튼 옷은 다 갈아입고 젖은몸도 다 닦아냈으니 경환이 그쯤에서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선신이 그를 부른다. 의아해서 돌아보는데 선신이 다가와 경환의 손을 잡는다.
“ 가지마 경환아... ”
“ 네 ? ”
이게 갑자기 무슨말인가. 순간 어리둥절해서 경환이 그와같이 묻고, 그런 경환을 어떤 애원이나 갈망이 담긴듯한 눈빛으로 선신이 바라보며 그를 잡아 이끌기까지 한다. 어느덧 끌려가듯이 선신에 의해 1층 침실로 들어가게 되는 경환. 그윽한 눈빛으로 선신이 경환을 바라보며 말한다.
“ 그냥...오늘만이라도 좀 내 곁에 있어줘. ”
“ 새엄마... ”
이게 대체 갑자기 무슨소리인가. 경환으로선 선신의 의도를 알 수 없어 의아해하고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려오기까지 한다. 헌데 구슬픈 눈으로 경환을 바라보던 선신의 말은 다시금 이어진다.
“ 제발 경환아... ”
“ ...... ”
“ 그냥...누구라도 곁에 있어주지 않으면 내가 견디지 못할 것 같아서 그래. 그러니
제발... ”
그렇게 구슬프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젊은 새엄마 선신이 애원하니 경환이 차마 뿌리치지 못할 것 같다. 그래서 침대에 나란히 눕게되는 두 사람. 작은 갓전등불을 켜고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 경환아... ”
경환을 불러보는 선신의 목소리. 가냘프면서도 애처로움이 담긴듯한 그런 목소리다. 대체 왜 이러는것인지. 의아하게 여전히 경환이 선신을 바라보는 가운데 그녀의 말이 이어지고 있다.
“ 나...이상한 여자로 보이니 ? ”
“ 네 ? ”
너무 뜬금없이 나온 말이라 경환은 그저 어리둥절해할 수밖에 없고 선신은 그런 경환을 바라보며 다시금 애원하듯 어떤 안타까운 심정마저 담아 이렇게 말을 이어간다.
“ 괜찮으니까 솔직하게 말해줘. 나 이상하게 보이냐구... ”
근데 사실 경환 입장에선 선신에 대해 무슨 이상하거나 부정적으로 볼만한 일은 그간 거의 없었다. 일단 젊은 새엄마 선신은 남편 기철에게는 자신의 학력과 전력이 모두 거짓이었다는게 들통나 결혼생활마저 위기에 봉착한 상황이긴 하지만 적어도 기철의 아들 경환에겐 친절하게 잘 대해줬던터라 그간에 있었던 아빠와 새엄마 사이의 곡절을 알 수 없는 경환 입장에선 선신에 대해 무슨 특별히 나쁘거나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될만한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대체로 솔직하게 답한다. 경환의 말이 이어진다.
“ 사실 처음엔...막상 집에 들어와보니 젊은 새엄마가 있고해서 많이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
여하튼 초등학교 2학년때 부모님이 이혼하시고 이후 6년세월을 고모네서 살았던 경환. 아버지의 재혼으로 젊은 새엄마가 생긴 것은 분명 당혹스러운 일이었으리라. 허나 생각보다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젊고 이쁜 선신으로 인해 적어도 그녀에겐 호감이 생겼으면 생겼지 싫을 이유는 거의 없었을터. 여하튼 대체로 솔직한 감정을 담아 경환의 말은 계속되고 있다.
“ 그냥...새엄마가 저한테 잘해주시고 편견없이 잘 대해주셔서...전 뭐...고마웠어요
솔직히... ”
“ 그래 ? ”
허나 선신은 경환의 말이 진심처럼 들리지 않는것일까. 일단 안도하는 표정 가운데서도 경환에게 어떤 안타까운 감정을 담아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잠시 한숨을 내쉬는 듯 하다 선신의 말이 다시금 이어진다.
“ 새엄만...솔직하게 힘들게 자란 사람이야... ”
그리고는 착잡한 심정으로 자신의 넋두리틀 탄식조로 이어가는 선신. 그녀의 말이 이어진다.
“ 사실 새엄마는 어릴 때 고아원에서 자랐어...정확히 천주교 재단에서 운영하는...성
당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그런 고아원이었지... ”
그러고보면 아버지가 케이블회사 사장 어쩌구 한것도 모두 거짓말이고 실은 고아원에서 자란 처지임을 경환에게 처음으로 밝히는 셈이다. 아직 남편 기철에게조차 밝히지 않은 마지막 비밀을 이제야 남편도 아닌 의붓아들에게 처음으로 밝히고 있는셈인 선신. 그녀의 말이 이어지고 있다.
“ 다만...어릴땐 자연스럽게...그런데서 자라면서 종교적인 영향은 받았지만...자라면
서 그런부분은 생각이 좀 달라졌어. 어릴땐 몰랐는데 자라면서 보니까 천주교나 기
독교 외에 다른 종교도 많고...또 내 판단에도 성경이나 천주교 교리 이런게 좀 모
순되는게 많아보이고 그래서... ”
사람이란게 특히 소위 모태신앙이라던가 혹은 김선신의 경우처럼 아예 종교재단 같은데서 운영하는 고아원,보육원 같은데서 자라다보면 자연스럽게 그런 성장환경이 자아나 가치관이 자라날 때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지만 인간이기에 어쩔수없이 점차 자라나면서 세상의 보다 많은 살아가는 모습이나 각자의 생활환경 이런것들을 접해보면서 생각이 조금씩 바뀌는 것은 어쩔수 없나보다. 어쩌면 선신은 천주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자라온 성장환경, 그런 것이 고아라는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출신 게다가 천주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자랄 수밖에 없어서 생긴 어떤 자아나 가치관의 한계적 문제. 그런것 때문에 사춘기때 갈등이 많았던 듯 하다. 결국 선신의 고백이 이렇게 이어진다.
“ 사실...남모르게 기도했던 것이 있었어. 나중에 커서 나처럼 고아로 힘들게 자라나
는 누군가를 한번쯤 사랑으로 품어주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는... ”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것인지. 선신의 말은 일단 좀 더 이어지고 있다.
“ 특히 고아원을 나와서 여기저기 떠돌이 생활을 하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만
약 나처럼 한참 공부하고 자라야할 나이에 집도절도 없이 여기저기 떠돈다는 것...
그런 삶이 얼마나 불행할까하는...적어도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그런 삶을 살고
있다면...그런 삶은 진짜 불행하고 안타까울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을 한거지. ”
그런데 지금 선신의 하는말을 보면 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고아원을 나왔다는 소린지. 굳이 말하자면 가출이라도 하는것처럼 사춘기 나이때 고아원을 나왔다는 소리인지. 일단 선신이 직접 그런 표현을 한 것은 아니고 아직 그 배경은 모든 것이 불분명하긴 하다. 다만 여하튼 선신의 말하는 요지를 살펴보면 대충 이런 듯 하다. ‘자신처럼 부모도 없이 집도절도 없이 한참 공부하고 자라야할 나이에 그렇게 정처없이 떠도는 모습은 싫다’는. 누군가가 자신처럼 그런 불행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은 싫다는. 그게 선신의 참된 마음이었던 것일까.
“ 그래서 만약 세상에 나처럼 그런 불행한 사춘기를 보내는이가 있다면 내가 한번쯤
은 사랑으로 감싸주고 싶었어. 엄마처럼 정말 사랑으로 잘 감싸안아주고 싶었다 그
말이지... ”
헌데 그렇더라도 여전히 납득이 안 가는 부분은 분명 있다. 대체 선신이 SNS를 왜 시작했고 그러다 어쩌다 스무살이나 많은 이혼남 최기철에게 접근(?)한것인지. 만약 선신의 생각이 그와 같았다면 기철에게 애초에 사춘기 자녀가 있는 몸이란 것을 알고 의도적으로 접근한것인지. 혹시 무슨 금품이나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삶 그런 것을 노린 의도적 접근이 아니었더라도 또다른 의도된 접근이었다는 소린지. 여하튼 일단 A여대를 졸업했다는것도 간호조무사 출신이라는것도 그리고 케이블 회사 사장의 사생아라는것도 모두 거짓임을 스스로 자백한 셈이지만 아직도 많은 것이 베일에 쌓여진 모양새인 그것이 김선신이란 여자의 현재 상황이다. 경환이 말없이 그런 선신을 바라보는 가운데 선신이 스르르 경환의 품에 기대듯 안긴다.
기철은 열흘만에 집에 돌아오긴 했다. 생각해보니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어쨌거나 지금 선신과 아들 경환이 살고있는 집은 엄연히 자기집이고 게다가 선신과 무슨 이혼을 하거나 별거라도 들어간 상황이 아닌판에 – 기철 입장에서 그런 결정을 다시 하기도 쉽지 않고 – 대체 자신이 멀쩡한 집을 놔두고 왜 밖으로 떠돌아다녀야 하는가. 게다가 나이 40대 중반이 되도록 한번도 이래본 경험이 없던 기철이 이제와서 사무실에서 잔다던가 또는 친구나 동료집에 적당히 사정을 말해 하룻밤 자기도 하고 심지어 상가(喪家)에 까지 가서 하룻밤을 지새는식의 일을 거듭하다보니 이게 생각보다 정말 사람할짓이 못되고 무엇보다 그런 생활을 계속 버텨내기가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멀쩡히 집이있는 자신이 그것도 선신은 여전히 어정쩡한 상황에서나마 아직 자신의 집에 머물러있는 상태에서 자기가 밖으로 나돌아야한다는 것 자체가 더더욱 말도 안되고 억울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결국 열흘만에 집에 돌아온 기철. 다만 그때까지 아직 자기집에 머무르고 있는 선신을 보니 좀 어이없다는 듯 한마디 했다.
“ 너 아직 안 나갔냐 ? ”
“ 여보...아저씨... ”
자신이 지은 원죄가 있기 때문에 기철한테 무슨 항의나 항변도 못해보고 열흘만에 집에 들어온 남편에게 되려 더더욱 잘못했다고 빌 수밖에 없는 처지. 허나 기철은 여전히 선신을 외면한채 입을 연다.
“ 너 행여 내가 지금 널 용서했을거라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
“ 여보...저 정말...아저씨를 고의적으로 속일생각은 없었어요. ”
적어도 그 진실만은 믿어달라는 듯 애원하고 있는 선신. 하지만 기철은 한숨을 내쉰뒤 이렇게 말한다.
“ 일단...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않았다. ”
“ ??? ”
“ 솔직히 지금 내가 그렇다고 또다시 이혼을 하는것도 그렇고...별거를 하는것도 쉽
지않고...무엇보다 니가 오갈데없는 처지인것만은 분명한 것 같으니...그래서 한번
봐주는거야. 사실 이 정도면 이게 이미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지속하기 쉽지 않은
건데 – 아내가 알고보니 학력도 전직도 모두 속인 것을 알았을 때, 그걸 다 받아
들이고 용납할수 있는 남자가 얼마나 될까. 이건 거꾸로 아내 입장에서 남편의 실
체가 그렇다는 것을 알았어도 사태가 크게 다르게 진행되진 않았을 것이다. - 여하
튼 이래저래...나도 어차피 지금 또다시 이혼하는게 쉽지도 않고...오갈데 없는 처지
인 널 차마 매정하게 내칠수도 없어서 일단 그 정도로 넘어가는거야. 그러니 그렇
게나 알고 있어. ”
용서한것도 아니고, 어쨌든 이혼도 쉽지않고 오갈데없는 처지인 선신을 내쫒기도 쉽지 않아 일단 어정쩡하게나마 결혼생활은 일단 지속하는걸로 결론을 내린듯한 기철. 그렇게 다소 어색한 분위기속에 며칠이 흘렀다. 선신이 나름 남편의 마음을 풀어주고 싶은 마음에 하루는 특별히 별식을 준비했다. 사실 비록 학력도 속이고 전직도 속인 선신이긴 하지만 뜻밖에 음식솜씨쪽으론 재능이 있는것인지 식사를 하면서 기철이 선신을 새삼 칭찬하는 말을 입에 담는다.
“ 허허 참...다른건 몰라도...당신 이 요리솜씨는 어디서 배운거야 ? ”
“ 그냥 뭐...어깨너머로 배우기도 하고...그냥 어찌어찌 하다가보니...솜씨를 좀 익히
게 된것뿐이에요. ”
“ 그러지말고 솔직히 말해봐. 어디 요리학원같은데라도 특별히 다닌겐가 ? 대체 어
디서 배운 솜씨야 ? ”
여하튼 뜻밖에 요리솜씨는 제법 있는듯한 것이 선신의 재능인 듯 한데, 덕분에 기철의 마음이 조금 누그러지는듯한 모양새. 무엇보다 아들 경환도 함께 있어서 모처럼 세식구(?)가 한자리에 모인 상황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덕분에 기철은 슬쩍 선신에게 이런 농담을 건네보기까지 한다.
“ 차라리 애초에 간호사 출신이라고 속일게 아니라 어디 일류식당같은데서 쉐프(요
리사)로 일했었다고 하지 그랬어 ? 적어도 그랬다면 감쪽같이 속아넘어갔을 것
같구만...아닌말로 그 요즘 유명한 그 뭣이냐...백 뭐니 이 뭐니 하는 그런 유명한
쉐프나...이런 사람들한테 직접 사사(師事)받았다고 과감하게 뻥을 쳤다고 해도 다
들 그대로 속아넘어줬을것만 같은 그 정도의 솜씨인걸 ? ”
“ 아이...당신도 참... ”
사실 다른건 몰라도 명문대 간호학과를 나왔다던가 간호조무사로 3년 일했다고 말했던게 모두 거짓이었음은 아직 아들 경환은 모르는 일이다. 오히려 그런 경환에게 심지어 천주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자랐음을 (남편에게도 아직 자백하지 않은일을) 고백한 상황인데, 하필 이런 상황에서 농담인지 놀리거니 비아냥거리는것인지 이런식으로 나오고 있는 기철. 그래서 선신이 한층 더 당혹스럽다. 그야말로 아버지 기철과 아들 경환 사이에서 어찌 처신하면 좋을지 몰라 당황해하는 순간이라고나 할까. 뭐 어쨌든 결과적으로 자신의 요리솜씨가 그만큼 좋다는 칭찬이니 그 부분은 기분나쁠일이 없지만, 여하튼 이래저래 한층 더 난감해지는 선신의 표정. 한편 대충 그렇게 식사가 마무리된뒤, 설거지는 기철이 직접 해준뒤 다시 단둘이 있게된 자리에서 기철이 선신에게 이렇게 말을 건넨다. 진지하고 무거운 분위기다.
“ 자 이제 솔직하게 말해봐. ”
“ ...... ”
“ 아직 당신 나한테 제대로 밝히지 않은게 한가지가 있어. 아버지가 케이블회사 사
장이고 그 사생아라는 소리...그것도 거짓말이지 ? ”
“ 여...여보... ”
이미 고아출신임을 그것도 기철이 집에 없을 때 아들 경환앞에서 자백해버린것이나 다름 없는 상황인데, 그런 상황에서 굳이 남편한테 말하지 않는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신은 나름 어떤 자존심 때문인것인지 아니면 정말 남편 기철에게도 의붓아들 경환에게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어떤 말못할 사정이 있어서 그러는것인지. 이 부분만큼은 거듭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있는 선신. 기철이 그런 선신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간다.
“ 나 이거 작심하고 알아보려고 하면 얼마든지 알아볼수 있는 사안이야. 아무튼 한
20년 가까이 벤처기업 도전해서 이만큼 사업 일으키면서 그간 알고지내게 된 이런
저런 인맥도 많고...대한민국에 아무리 케이블회사 사장이 많아도...슬하에 아들 셋
이있고 거기에 숨겨진 딸이 하나 더 있는...그리고 아내가 고등학교 수학선생이고
그런 신상의 케이블회사 사장이 과연 실제 있는지 그거 알아보는 것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은일이야. 그러니 날 더 실망시키지말고 그전에 솔직하게 자백해줘. ”
“ 여...여보... ”
만약 지금 자백하지 않고 나중에 이마저도 거짓임이 드러났을 때 그땐 더 큰 문제가 될수도 있다는 것을 선신은 판단하지 못하는것일까. 아니면 이미 기철의 아들 경환에게 자백해버린것이나 다름없으니 그 경환이 알아서 제 아버지 기철에게 말해주기라도 기대하는것일까. 여하튼 이 부분의 진위여부는 끝내 답하지 않고있는 선신. 다만 이렇게 말을 돌릴뿐이다.
“ 다른건 몰라도 아저씨에 대한 제 마음만은 진심이었어요. 그것만은 믿어주세요 여
보... ”
기철을 다시금 ‘여보’라고 부르며 애원하는 선신. 울먹이고 있지만 기철은 그런 아내를 외면하고 있다.
“ 그리고 아저씨 아들도...어쨌든 경환이 그 아이도 엄마없이 지금껏 힘들게 자란 아
이라니까...그저 제가 진심으로 사랑으로 감싸주고 싶었을뿐 그 외 다른뜻은 없어요
. 그러니 제발 그것만은 믿어주세요 여보. 네, 아저씨 ? ”
부부간의 호칭인 ‘여보’보다는 연애시철 귀엽게 아양떨 듯 불렀던 ‘아저씨’란 호칭을 다시 입에 붙이는게 더 호소력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라도 한걸까. 여하튼 ‘여보’와 ‘아저씨’란 호칭을 번갈아 사용해가면서 거듭 애원하고 있는 선신의 모습. 허나 기철은 여전히 그런 선신을 외면한채 이렇게 말한다.
“ 혹시...자네도 그럼 엄마없이 자란건가 ? ”
“ 아...아저씨... ”
“ 원래는 뭐 중학교때 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다음에 아버지와 아버지의 본부인
인 큰어머니 댁에서 살게되었다고 하더니...그럼 그게 다 거짓말인거야 ? 바른대로
말해봐. 그 모든게 전부 거짓말이었냐구 ? ”
- 5회에 계속




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