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외국인 새엄마 4
어릴때부터 아버지 현준과 이따금 놀러온적도 있고 또 형진네 식구들과 함께 나들이를 가본 경험도 몇 번 있지만 그런식으로 놀러오는것과 아예 3년이 되었든 혹은 그 이상이 되었든 이 집에서 아예 살아야 한다는 것은 그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다. 일단 학교는 가까운곳으로 전학을 시켜야겠기에 그 조치는 이미 형진이 다 해놓은 상태. 그리고 짐을 챙겨갖고 형진의 집으로 오게된 명수. 방은 중학교 3학년,1학년 그리고 초등학교 5학년인 형진의 세 딸은 원래 모두 2층방을 쓰고 있기에 형진은 1층의 원래 창고처럼 쓰던 방 하나를 깨끗이 치우고 정돈해서 그 방을 명수의 방으로 쓸수있게 이미 다 조치해놓았다. 덕분에 그러는 사이 작은 해프닝까지 있었다. 실은 원래는 창고방이었던 그 방에는 형진이 아이들 몰래 보는 야설집 따위를 모아서 숨겨놓은 작은 상자가 있었다. 헌데 명수의 방을 만들어주느라 딸 셋과 함께 그 방에 있던 물건들을 모두 꺼내고 정리하고 치우거나 다른곳으로 옮기고 하는동안 자연스레 형진의 그 ‘비밀상자’도 발견될 수밖에 없을터. 여하튼 이제 명수의 방으로 써야할 그 창고방에 있던 물건들은 다 치우거나 다른곳으로 옮겨놓던가 해야하는 상황이라 자연스레 그 와중에 발견된 이상한 작은 상자를 형진의 중학생 두 딸이 아버지에게 보여주며 이렇게 물었다.
“ 아빠, 근데 이건 뭐에요 ? ”
순간 당황한 형진이 바로 손으로 제지하며 상자를 빼앗았다. 어차피 자물쇠로 굳게 잠겨진데다 열쇠의 소재조차 형진만이 알수있을 비밀상자이니만큼 내용물이 그것도 그 바쁜 와중에 들킬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겁하며 빼앗는 형진. 비명까지 이렇게 질러댔다.
“ 으...으허허헉~~~!!! 그건 당장 이리 내놓지 못해 !!! ”
그러면서 잽싸게 상자를 빼앗아 다른곳으로 옮겨놓은 형진. 어차피 형진의 집도 넓고 큰 편이니 그런곳에서 형진이 (야설집 따위가 담긴) 그런 비밀상자를 숨겨놓을만한 다른 장소를 만들자면 그건 그리 어려운일은 아니다. 여하튼 명수의 방을 만드느라 창고로 쓰던 방을 비워놓던 그 와중에 야설집을 모아 숨겨놓은 비밀상자가 딸들에게 들킬뻔한 아찔한 작은 소동까지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그렇게 현준의 아들 명수가 이제부터 한동안 자신들과 살게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현준의 세 딸 기분은 좀 묘해졌다.
“ 어쨌든 명수가 이제 우리랑 살게된다 그거죠 ? ”
여하튼 오랫동안 왕래가 잦았던 현준과 형진이기 때문에 형진의 세 딸도 명수라면 어릴때부터 쭉 보아온 익숙한 사이긴 하다. 그야말로 ‘막내 사촌동생’쯤 되는 그런 느낌의 아이라고나 할까. 허나 여하튼 이제부터는 한동안 자신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니. 형진의 세 딸들도 명수 아버지 현준의 이런 처사는 좀 이해할수 없다는 듯 나온다.
“ 어쨌든 명수 아버지도 참 웃기는 아저씨네요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
“ 순희야... ”
세 딸중 중학교 3학년인 가장 큰 딸인 순희부터 이런식으로 나오자 형진은 딸들을 나무랄 수밖에 없었다. 여하튼 형진의 세 딸 순희,상희,남희 3자매는 명수와 한 몇 년동안 함께 살아야 한다는 그 자체는 큰 불만이 없지만 그런식으로 자신의 아이를 그것도 대학 선배집에 한동안 맡기면서까지 피부색까지 다른 젊은 외국 여성과 재혼을 한다는게 여전히 이해할수 없다는 태도였다. 형진이 한숨을 내쉬며 그런 딸들을 설득했다.
“ 어쨌든...명수 아버지도 그만한 피치못할 사정이 있었던거란다. 여하튼 그 젊은 아
줌마가...지금 아이까지 가졌다고 하지 않냐. ”
대학후배인 현준을 지금까지 형진의 딸들은 물론 형진 자신도 보통은 ‘명수 아버지’나 ‘명수네 아빠’ 정도로 호칭하고 있었다. 허나 현재 현준의 재혼상대인 어나이에 대한 호칭은 이래저래 애매해 대충 ‘젊은 아줌마’ 혹은 ‘외국인 아줌마’라고 대처하고 있는 형진. 그러나 이제 알거 다 안다는 듯 중학교 1학년 둘째 상희가 이번엔 이러고 나왔다.
“ 그러니까 그런건 알아서 조심해야 하는건 아니냐구요. 그것도 혼전에 말이죠... ”
“ 거...거...상희 넌 진짜...보자보자하니 어린애가...그것도 여자애가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 앞으로 말 좀 조심하렴. ”
심지어 인터넷에서 오만 것 다 찾아볼수 있는 요즘시대니 성과 관련한 정보 습득은 20-30년전 미성년 아이들과는 비교도 할수 없을 정도로 빠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허나 아무리 그래도 중학교 1학년 여학생 입에서 ‘혼전관계’ 어쩌구 이런표현까지 나온다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듯 명수가 여기서 함께 사는 문제 이전에 형진은 그런 아이들의 말버릇부터 제대로 가르쳐줘야겠다는 듯 한바탕 호되게 나무라고 야단치는수밖에 없었다. 여하튼 그 한바탕 소동이 형진의 집에서도 벌어지고 난 뒤에 명수는 형진의 집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 그래 뭐...불편한게 있으면 어려워말고 아저씨한테 바로 말하구... ”
“ 불편한건 없고요. 고맙습니다 아저씨. ”
어차피 이렇게 된 상황. 아무리 철없는 초등학교 2학년 어린아이라도 그 정도 눈치는 있는것인지. 남의집에서 한동안 살게된 마당에 더더욱 행동거지 조심하고 눈치를 봐야겠다는 그 정도의 판단력이 생긴 듯 하다. 그래서 오히려 아무런 말 없이 자기방으로 쓰게된 방으로 들어가 우두커니 앉아있는 명수. 책상도 컴퓨터도 이불장과 옷장은 물론 명수가 쓸 침대까지. 원래 창고방으로 쓰던곳이니 넓이는 그리 크지 않다고 할 수밖에 없는 방을 그래도 형진과 형진의 세 딸들이 있을 것은 다 제대로 신경써서 챙겨서 갖춰준 듯 하다. 심지어 한쪽엔 좀 낡은 소형 TV까지 있었다. 괜히 채널 시청권갖고 자신의 딸들과 싸움이라도 날까봐 우려한것일까. 나름 명수를 배려해서 디지털 TV로 전환해 볼 수 있는 그런 옛날 TV 수상기까지 미리 구비해 챙겨넣어준 형진. 그리고 이제 이런 집에서 명수가 살아야 한다는 점. 있을만한건 다 챙겨준 부족한 것 없는 그런 방이긴 하지만 여하튼 명수는 이런저런 착잡한 심정에 한동안 그 방 한가운데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준과 어나이는 결국 결혼식을 올렸다. 이미 어나이가 임신까지 했다는 판에 더 시간을 지체할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형진 내외야 결혼식에 참석할 수밖에 없는 몸이다. 어쨌든 형진은 박현준과 20년 넘게 선후배로 지내온 가까운 사이가 아니던가. 남태평양 섬나라가 고향인 어나이는 어차피 자신의 식구나 고향친구들을 결혼식장까지 불러올수 없는 처지니 오히려 현준쪽에서 더 많은 하객들이 참석해줘 결혼식장이 썰렁하지 않게 채워줄 필요도 있어 더더욱 그래야 했다.
아침부터 신경을 써서 그러나 티내지 않고 차분한 분위기로 형진 내외는 외출준비를 서둘렀다. 그리고 자신의 세 딸 순희,상희,남희에겐 명수를 오늘 각별히 좀 챙겨주라는 당부까지 했다. 딸들은 이미 부모님으로부터 언질을 받아 오늘이 무슨 날이고 아빠,엄마가 어딜 다녀오는줄 알기에 그들의 분부대로 따르기로 했다. 이순희 3자매 입장에서도 가슴 한켠이 아려오는 그런 순간이기도 했다.
“ 명수야...뭐해 ? ”
점심시간이 되어 큰딸 순희가 1층 방에 있는 명수를 불렀다. 명수의 방은 원래 창고방으로 쓰던곳이기 때문에 1층에서도 상대적으로 구석진곳에 위치해 있긴 했다. 여하튼 그 방으로 가서 명수를 부른 순희. 오늘 결혼식에 어차피 명수가 참석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난감하고 어색한 분위기를 자아낼수 있을뿐더러 되려 명수에게 더더욱 상처가 될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형진 내외는 티내지 않게 차분하게 외출준비를 그와같이 서두른 것이다. 그러면서 명수를 챙기라고 당부하고 간 터. 그래서 순희가 점심때가 되어 명수를 부른 것이다.
“ 명수야, 뭐해. 어서 나와. 점심 먹어야지. ”
“ 생각 없는데... ”
정말 생각이 없는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것인지 일단 명수의 반응이 이와같았다. 허나 그래서 순희는 더더욱 그런 명수를 달래듯이 재촉했다.
“ 누나가 오늘 맛있게 부침개 해줄게. 그러니 같이 먹자. ”
“ 괘...괜찮다니까요... ”
초등학교 2학년 명수에게 이순희 3자매중 막내인 이남희와는 세 살차이 그리고 중학교 3학년인 큰딸 순희는 일곱 살 차이다. 그래서일까. 아버지 학교선배의 딸이고 또 그간 그렇게 잦은 왕래가 있던 두 집안인데도 명수 입장에선 이들 3자매는 좀 어렵다면 어렵다고 할수도 있는 상대라서 반말보다는 존대말을 쓰거나 반말과 존대말이 반반씩 섞인듯한 모호한 말투를 쓰는 경우가 많았다. 여하튼 이런걸 지금 따질 상황은 아닌 듯. 순희가 거듭 명수를 부엌 식탁으로 잡아 이끌었다.
부엌에는 이미 순희가 부침개 재료를 잔뜩 준비해 만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상희와 남희도 대충 옆에서 거드는 상황이라 명수는 자신도 옆에서 거들어야 하는것인지 아니면 식탁에 마냥 앉아서 먹을때만 기다려야 하는것인지 어정쩡하기만 한데 그런 명수를 더더욱 걱정되는 듯 상희와 남희가 ‘그러지말고 앉으라’고까지 했다. 그래서 어색한 가운데 명수가 다시 자리에 앉긴 하는데 그러는 사이 부침개가 하나하나 만들어져 순희와 상희가 식탁으로 나르고 있었다.
“ 명수야, 근데 요즘 지내는건 어때 ? 학교 다니는건 괜찮아 ? ”
일단 명수가 형진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된지는 2-3주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물론 학교야 전학조치가 되어 이곳 인근의 학교를 다니고 있고. 허나 단순히 그런 문제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이래저래 명수를 신경쓰지 않을수 없는터라 그와같이 말하고 있는 순희. 명수가 나지막하지만 또렷하게 답한다.
“ 학교 다니는건 괜찮아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
사실 이순희 3자매중 막내인 남희도 아직 초등학생이니 따지고보면 남희가 다니는 학교와 같은 학교로 전학조치가 이뤄졌을 가능성이 많은데 행정처리 과정에서 어떤 사정이나 문제가 있었는지 일단 남희가 다니는 학교가 아닌 다른 초등학교로 전학조치가 되긴 했다. 우연치곤 공교롭게도 남희의 학교는 물론 순희나 상희가 다니는 중학교와도 정 반대편에 위치한 학교다. 따라서 등교시간이 되면 명수는 이순희 3자매와는 정 반대방향으로 등교를 해야할판인데 덕분에 명수 혼자만 좀 외롭고 쓸쓸해 보이는 공교로운 장면까지 만들어진 것이다. 거리는 큰길로 나가 버스정류장 기준으로 4-5정거장 정도 거리. 초등학교 2학년 아이 입장에서 버스를 타고 갈지 걸어가는게 나을지 좀 애매한 정도의 거리인 셈이긴 한데 일단 명수는 버스비라도 아끼기 위함인지 걸어서 통학을 하고 있긴 했다. 여하튼 이래저래 명수가 걱정되는지 순희가 거듭 말을 건넨다.
“ 명수야 그러지말고 혹시 힘들거나 불편한게 있으면 누나들한테 솔직하게 말해.
명수 힘들거나 불편한거 있으면 누나들이 너무 어려운 부탁만 아니면 뭐든지 도와
줄게. ”
“ 그래 명수야. 어려워말고 힘든게 있으면 뭐든 말하라니까. ”
여하튼 어릴때부터 대체로 친숙하게 지내왔을 명수와 이순희 3자매가 아닌가. 그래도 현재 명수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이전에 비해 더 풀이죽고 어두워보이는 느낌이라도 받은것일까. 그래서 뭐라도 한마디 더 친절하게 신경써주는 모습을 보이려는 이순희 3자매. 비유가 어떨지 모르지만 부잣집으로 입양온 고아나 가난한집 아이라도 챙기는 언니나 오빠들 같은 모습이라고나 할까. 이런 모습이 좀 보기가 답답했는지 아니면 짜증이 났는지 막내 남희가 기어이 한마디 한다.
“ 그만들 좀 해라 !!! ”
“ 남희야, 너 왜그래 ? ”
평상시 막내 답지않게 이러는 모습에 순간 당황할 지경인 언니인 상희와 순희. 허나 남희는 사뭇 정면돌파라도 시도하겠다는 의도로 이렇게 말해버린다.
“ 그러지말고 솔직하게 말해버려. 그래서 오늘 이러는거잖아. 오늘 명수 아빠 그 아
프리카 여자랑 결혼하는 날이잖아. 명수한테 흑인 새엄마 생기는날이잖아. 그래서
명수 상처받을까봐 다들 이러는거 아냐 !!! ”
“ 야 !!! 이남희 !!! ”
기어이 일을 저지르듯 막내 남희가 이렇게 전부 말해버리니 순희도 상희도 잔뜩이나 당황이 되었다. 안 그래도 바로 그런걸 티내지 않으려고 부모님도 조용히 외출준비를 서두르셨고 그러면서 자신들한테 ‘명수 좀 챙기라’고 말씀하셨던 것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모든 것을 명수가 보는 앞에서 말해버린 남희. 게다가 표현은 또 이게 뭔가. 흑인 새엄마 운운은 그렇다치고 어나이의 출신까지 남태평양이 아닌 아프리카라고 사실관계가 다른 말까지 입에 담았다. 원래 남희가 정보를 잘못 들어 인지한것인지 아니면 홧김에 퍼붓다가 보니 말이 헛나온것인지. 다급해진 순희와 상희가 남희를 얼른 2층으로 오라고 했다.
“ 남희야 너 왜 그래 도대체 ? ”
“ 언니들이 하도 답답하게 나오니까 그러는거 아냐. 큰언니도 작은언니도... ”
상대적으로 아직 어린 초등학생인 남희는 그만큼 철이 없는 것으로 봐야하는것인지. 아니면 그만큼 상황이 답답해서 자신이라도 할말을 해야겠다 싶어 이러는것인지. 순희뿐만 아니라 작은언니 상희까지 거듭 그런 남희를 만류하며 타일렀다.
“ 남희 너 진짜 오늘따라 왜 그러니 진짜 ? 명수 지금 불쌍한 아이야 ! 너 그거 몰
라 ? ”
‘불쌍한 아이’ 이런말을 중학교 1학년 언니와 초등학교 5학년 동생은 과연 어떤 의미로 주고받는것일까. 어려서 엄마잃고 아버지와 단둘이 지금껏 살아온 아이. 헌데 그런 아이가 그것도 피부색과 국적까지 다른 외국인 새엄마까지 생기는 상황이라면 그런 명수를 ‘안 불쌍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허나 아주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피차 어릴때부터 친분과 교류가 있는 사이고 무엇보다 자신들과 당분간 함께 살아야만 하는 속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처지에서 나온 이런 표현. 여하튼 언니들 입장에선 막내 남희가 아직 어리고 철이없어 그러나보다 생각하고 동생을 타이르는 중이다.
“ 남희 너 정말...엄마,아빠가 그렇게까지 우리한테 신신당부하고 가셨는데 자꾸 이
럴거야 ? 우리 지금 명수 계속 감싸주고 위로해줘야 하는거라구. 우리한테 지금
그 임무가 맡겨진건데...그걸 그렇게 몰라 ? ”
“ 그러니까 차라리 그냥 사실대로 다 말 해버리라구 !!! 그게 낫지 않아 ? ”
초등학교 5학년 남희는 마치 자신도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듯 이렇게까지 자기주장을 적극 펼치고 이러다 진짜 명수문제로 자매들간에 싸움이 벌어질판이다. 위층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리는게 자기때문이란 것을 명수도 모르지 않는것일까. 결국 명수도 2층으로 올라와 그런 누나들을 말리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 이제 그만하세요 누나들... ”
여하튼 터울지는 누나들이니만큼 그렇게 정중하게 말을 건네고 자신들끼리 싸우는 모습을 명수에게 들킨 상황이라 3자매는 더 당황이 되었다. 명수는 명수 나름대로 자신도 생각이 있다는 듯 이렇게 나온다.
“ 이러면 제가 더 미안해지잖아요. 그러니 그만하세요. ”
초등학교 2학년의 어휘력치고는 지나치게 어른스럽다는 느낌까지 들 판인데 – 불과 얼마전 어나이가 자기방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가라’며 ‘싫다’며 이제 겨우 한두마디 짧은 단어밖에 구사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울부짖었던때와도 완전 딴판이 아닌가. - 여하튼 일단 점심시간에 그 난감한 상황은 대충 정리가 되고 명수는 방안에서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
저녁때쯤 형진내외가 귀가했다. 결혼식장에서 단순히 예식에만 참석하고 올만큼 어색하거나 먼 사이도 아니고 여하튼 이런저런 감회에 별도의 대화라도 좀 나누고 신혼여행 떠나는 모습까지도 지켜봤을만한 그런 사람들이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결혼식에만 참석하고 오는 사람들 치고는 귀가는 좀 늦은 편이긴 하다. 무엇보다 그때 마침 자기방에서 나오는 명수와 마주친 형진 내외. 명수는 정중하게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하고 인사를 건네지만 그런 명수의 모습에 형진 내외는 더 바짝 긴장이 될 수밖에 없다. 더욱 당혹스럽고 난감해 형진의 아내는 아예 도망이라도 치듯 안방으로 들어가버리기까지 하는데 그래서 혼자 남은 형진이 난처한 가운데 명수에게 뭐낙 말을 걸어보려 한다.
“ 어...명수야. 아저씨랑 아줌마는 실은... ”
“ 알고 있어요. ”
“ 뭐라구 ? ”
“ 아빠 오늘 결혼하신거 알고 있다고요 !!! ”
이미 이순희 3자매로부터 모든 것을 다 알아버린뒤라 공연히 숨길필요 없다는 듯 그러게 말하는 명수. 그래서 더욱 당혹스러워진 형진을 잠시 바라보다 명수는 방으로 들어가버린다.
현준은 어나이와 결혼식을 올린뒤 신혼여행을 떠났다. 머나먼 남태평양에서 시집을 온 어나이니까 결혼식장에는 아무래도 어나이쪽 하객은 극소수고 대다수가 현준과 관련된 가족,친지,학교친구,직장,사회 동료,선후배등이 될 수밖에 없었고 어나이의 경우에는 한국에서 3년정도 직장생활을 하면서 알게된 극소수의 친구,지인정도만 하객으로 참석한 그런 결혼식이 된 것이다.
그러고보면 현준의 기억에 어나이가 그녀의 부모나 가정환경에 대해 말한적이 거의 없는 것 같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만 18세 정도) 고향을 떠나 미국에서 5년 살고 이후 한국에서 3년정도 직장생활을 한 전력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리고 아무리 재혼이 되었건 결혼상대가 외국인이 되었건 상대 여성의 부모나 가족에게 최소한의 인사 정도는 드리는게 비단 한국뿐 아니라 지구상 인류라는 지성체의 거의 가장 보편적인 윤리관이고 가치관이 아닌가. 혹 경제적 사정등으로 예식장인 한국까지 직접 오진 못하더라도 요즘 세상에 휴대폰으로든 이메일을 통해서든 지구 반대편에 사는 사람과 실시간 소통이 가능해진 시대에 간단하게 인사정도는 드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현준이 몇 번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나이는 고등학교 졸업후 바로 미국으로 가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는 말만 거듭할뿐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때 현준은 혹시 어나이가 실제 남태평양 섬나라 출신이 아님에도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사기를 치는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어 어나이와 출신지역(남태평양 섬나라쪽)이 거의 비슷한 주한외국인을 어렵사리 찾아내 은밀하게 어나이에게 접근 테스트를 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어나이는 일단 해당국가 언어를 – 비록 고향을 떠난지 오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 대체로 무난하고 능수능란하게 구사할수 있는 것으로 확인되어 어나이의 출신지 문제 만큼은 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 게다가 미국이나 유럽같은 잘사는 나라라면 모를까 남태평양 출신이라고 출신지를 속여 사기를 칠 이유는 별로 없는 것 아닌가.
따라서 현준은 일단 가족사항과 관련 차마 말못할 사연이나 상처 같은게 있어 말을 못하는 것 아닌가 싶어 그런 문제를 더 이상은 묻지 않기로 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과 결혼까지 하게된 이상 가족과 더 이상 왕래도 않고 연락도 않는 이유 정도는 말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납득이 안 가는건 아니었지만 여하튼 어나이에게 말못할 사연이나 상처같은게 있을수도 있겠다 짐작하고 더는 묻지 않기로 했다.
신혼여행은 좀 특이하게 중국과 일본을 각기 일주일 정도 일정으로 한 보름가까이 신혼여행으론 제법 길다고 할수 있을 정도의 일정을 잡았다. 남태평양 열대국가 출신인 어나이가 동남아 같은 열대국가는 식상할수도 있으니 되려 어나이가 이국적인 분위기를 느낄수 있는 곳이라면 어나이가 한국에서 3년 직장생활 하면서도 한번도 가지못한 한국의 이웃국가인 중국과 일본을 한번쯤 구경시켜주고 싶다는 생각에 그런 다소 특이하면서도 긴 신혼여행 일정을 잡은 것이다.
중국과 일본중 첫 일정으로 중국을 간 현준과 어나이. 베이징의 한 호텔 베란다에서 상념에 잠긴 어나이에게 현준이 다가온다.
“ 어나이... ”
이미 임신중인 몸인 어나이다. 무엇보다 혼전에 두 사람은 관계는 이미 즐길만큼 즐긴 사이니 굳이 그런 부분에선 신혼 첫날밤이 큰 의미는 없을것이고, 다만 어쨌든 두 사람이 이렇게 부부가 되었다는 점 그리고 어나이는 어쨌든 이혼경력에 아이까지 있는 열다섯살 많은 동양인인 한국 남자와 결혼했다는 점에 대해 만감이 교차하는 모습으로 이렇게 마주하게 된 것이다. - 현준이 결혼을 서두른 것은 확실히 어나이기 이미 임신을 한 상태인 면이 크게 장욕했다. 워낙 혼전관계나 혼전 임신도 요즘은 그리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풍경(?)이 되어버린 세상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웨딩드레스를 입는 신부가 만삭이 되어 있다던가 하는 것은 신부 당사자에게도 불편할것이고 하객들에게도 공연한 수군거림과 이야기거리만 제공할 그럴 일밖에 더되겠는가. 따라서 어나이의 임신이 더 이상 표나지 않고 따라서 그녀의 임신 사실을 아직 아주 가까운 친구나 측근 정도밖에 모를 때 일사천리로 진행하고 싶었던 현준으로선 나름 그와같은 어나이에 대한 배려심도 있었던 것이다. 허나 두 사람에게 남은 문제가 분명 있기에 어나이가 근심띤 얼굴로 이렇게 묻는다.
“ 명수는...이형진 아저씨댁에 맡기는걸로 했다면서요 ? ”
열다섯살 많은 남편의 대학 선배를 ‘아저씨’라고 호칭하고 있는 현준. 아직 한국말이 그리 익숙치는 않은 외국인 입장에서 나이많은 남자 그리고 남편의 대학선배를 ‘아저씨’라고 부르는 것. 그게 예의라고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일반적인 한국인들 입장에선 좀 어색하고 이상한 표현으로 들릴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중요한 문제는 이형진이 아니라 그 집에 맡기게 된 초등학교 2학년 어린아이 명수가 아닌가. 어나이의 말이 이어진다.
“ 명수가...제게 좋은 인상을 갖진 못하겠네요. ”
이미 두차례 그 소동을 겪은일이 있고 게다가 애초에 어나이도 초등학교 2학년밖에 안 되었다는 현준의 아들 명수를 그저 단순히 어린아이로 봤는지 자신이 쉽게 다루고 통제할수 있을것이라 막연히 생각했다지 않은가. 허나 처음부터 그런 명수와의 대면은 예기치 않은 돌발상황을 만들어냈고 그 결과가 지금 이렇게 되어버린 것. 따라서 자연히 어나이의 기분도 좋지는 않을 것이다. 여하튼 자신도 명수에게 그런 좋은 이미지의 ‘새엄마’로 받아들여지진 않았을 것이라는 것. 그것이 어나이를 우울하게 만들 수 있다.
“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거에요 ? ”
어나이가 여전히 그 부분이 마음에 걸리는 듯 이와같이 묻고 있다. 그녀의 말이 이어진다.
“ 앞으로 명수는 계속 이형진 아저씨 집에서 사는거에요 ? ”
“ 글쎄... ”
막상 어나이가 이렇게 물으니 답하기가 쉽지 않은것일까. 되려 현준이 한숨을 내쉬고 그리고는 어나이에게 묻는다.
“ 괜찮으니까...한번 어나이 생각을 나에게 말해줘. ”
“ 아저씨... ”
“ 어떻게...이대로 그냥 명수와는 따로 이렇게 계속 살고 싶어 ? 어나이 생각을 한번
말해보라니까. ”
어차피 이런건 피차 자신의 솔직한 속내를 말하기 쉽지 않은것일까. 어쩌면 둘 다 자신의 진짜 속 마음은 숨긴채 이런말을 하고 있는것일수도 있다. 현준으로선 어쨌든 자기 아이를 남한테 맡기고 재혼생활을 시작한다는 점이 그리고 어나이 입장에선 아직 명수 문제가 완전히 원만히 마무리 되지 않은 것 같아 그게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것이. 두 사람이 분명 뜨겁게 사랑해 결혼에까지 이른것임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그 부분에 대한 대화만큼은 서로에게 어떤 거리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 같다. 어나이가 잠시 고민하는 듯 하다 입을 연다.
“ 아저씨... ”
“ ...... ”
“ 그러지말고 다음에라도 시간날 때... ”
무슨말을 하고 싶은것인지 현준이 어나이를 바라보는 가운데 어나이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간다.
“ 한번...명수와 다시 친해지거나 가까워지는 시간 만들어보도록 해요.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아요. ”
“ 명수에게도 일단 시간을 줘야지. ”
“ ...... ”
“ 여하튼 그 아이도 지금은 상처받았을 것 아닌가. 그러니 그 시간을 견뎌내기가 쉽
지 않을게야... ”
두 번 그 난리를 치고 심지어 ‘친엄마’를 찾으러 간다며 101호에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새엄마 밑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와 함께 가출소동을 주도하기까지 했던 그런 명수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명수 앞에서 ‘어나이 아줌마와 결혼 안한다’는 말까지 분명 했건만 하필이면 묘하게 시간이 어긋나버려 그런말을 이미 아이에게 내뱉은 직후에 알게된 어나이의 임신사실 아닌가. - 현준은 일단 그 가출소동까진 아직 어나이에게 말하지 않았다. - 헌데 그러고나서 되려 어나이와의 결혼이 기정사실이 되어버리고 아이를 대학선배 이형진의 집에 맡기게 되고 그리고 이렇게 올린 결혼식. 이형진 선배가 아이에게 자신의 결혼소식을 알렸을지 안 알렸을지 지금 현준으로선 확실히 알수 없지만 여하튼 알리지 못할 수는 없었을 것 아닌가. 그러니 그런 말을 결국 그것도 아버지도 아닌 아버지 학교 선배인 이형진 아저씨로부터 전해들었을 때 그 어린아이의 심경은 또 어땠겠는가. 그걸 생각하면 현준도 그저 막막하기만 하다. 어나이를 품에 꼭 안은채 현준의 말이 이어진다.
“ 일단 어쨌든...조금은 기다릴 시간이 필요해... ”
그런 현준과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심리라도 내비치듯 어나이는 두 팔로 현준을 꼭 끌어안고 있다. 좀처럼 그를 놓아주지 않으려는 눈치다.
교통정리(?)란 표현이 이런 경우에도 적절할련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렇게 어나이를 싫어하는 명수를 대학선배인 형진의 집에 맡기는 것으로 하고 현준은 임신을 한 어나이와 결혼을 하는 것으로 이 상황이 일단락되기는 했다. 그리고 그나마 다행이라고 봐야하는것일까. 일단 이후 약 3년정도의 시간은 그리 큰 문제나 사건없이 무난하게 흘러갔다.
일단 어나이는 이듬해 현준과의 사이에 첫 아들을 출산했고 이듬해 가을쯤에 두 번째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다. 이때 현준의 집에 살고있는 명수는 어느덧 초등학교 4학년이 되어 있었고 명수가 5학년이 되는 이듬해 초여름 무렵에 두 번째 아이를 출산했는데 이번에도 아들이었다. 현준에게 아들복이 좀 있는것일까. 첫 번째 부인에게서 낳은 명수가 아들인데 그 첫 아내와 이혼후 약 3년여만에 얻은 두 번째 아내 어나이와의 사이에도 아들을 둘 더 얻었으니 말이다. 사실 비단 박현준뿐만 아니라 이들 형제가 좀 아들복이 많은 형제이기도 하다. 현준이 집안에서 3형제중 둘째인데 형준의 형님 박성준의 경우에는 현재 슬하에 아들 넷이 있고 현준의 동생인 막내 명준도 현재 슬하에 아들 둘이 있다 현준까지 포함하면 이들의 자녀대에 총 9명의 아들이 생긴셈. 오히려 딸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생길만한 그런 집안이기도 하다. 허나 반대로 명수에게 할아버지가 되는 박현준 3형제의 아버지는 또 4녀1남중 막내다. 현준의 할머니의 경우 그 시댁식구들로부터 아들 낳아야한다는 구박을 또 얼마나 받아을까 짐작이 갈만한 그런 가족구성원이기도 한데, 여하튼 그런 집안의 둘째아들 현준의 아들인 명수. 적어도 지금까진 어려서 엄마를 잃고 아빠랑 단둘이 사는 외로운 외동아들이었는데 여하튼 그 사이 외국인 새엄마 어나이가 동생 둘을 더 낳은 그런 상황인 것이다. - 물론 명수야 지난 3년 형진의 집에서 살아왔으니 지금까지 어나이는 물론 그녀가 낳은 두 아이도 만나본적이 없다. 현준의 경우 이후에도 이따금 아들을 보러 또는 형진선배를 만나러 형진의 집을 찾아온적은 종종 있었지만 아무래도 피차 어색하고 불편한 광경이 만들어질 것 같아서인지 어나이와 결혼후엔 형진의 집엔 혼자서만 방문을 해 겸사겸사 아들 명수도 만나보고 돌아가곤 했다.
여하튼 그런식으로 3년이 흘렀으니 지금까진 그런대로 무탈한 시간이 흘렀을지언정 다시 새로운 고민이 생길 수밖에 없다. 애초 현준이 형진선배에게 부탁한 시간이 3-4년 정도가 아니었던가. 헌데 어느덧 그 시간이 이미 다 흘러가버린 것이다. 사실 지금 당장 그냥 외국인 새엄마 어나이가 있는 집으로 명수가 돌아간다 해도 오히려 더 불편하고 힘든 시간이 시작될 수밖에 없을터인데 아이를 그때 생긴 첫아이뿐만 아니라 최근에 이렇게 둘째까지 출산 그 어나이와의 사이에 낳은 두 아이 키우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 현준이기도 하다. 그 어나이가 둘째를 낳고 얼마지나지 않아 산후조리도 다 끝나지 않은때. 형진이 현준을 밖에서 만나 같이 술이나 한잔 하자며 그를 불렀다.
“ 자네, 그래 이제 어찌할참이야. ”
대충 형진의 의도를 짐작할 것 같은 현준. 그래서인지 다소 곤혹스러운 표정이다. 형진은 형진대로 그런 후배 현준을 보며 답답하다는 듯 말한다.
“ 자네 애초에 말한 3년의 시간이 다 지났어. 설마 그걸 잊은건 아니겠지 ? ”
“ 선배님... ”
“ 설마 자네 날더러 저 아이를 앞으로도 계속...대학 졸업할때까지 맡아달라거나 그
럴 생각인건 아니겠지 ? ”
사실 친구나 선,후배가 되었건 친척이 되었건 자기 아이를 남에게 맡긴다는 것은 보통 아닌 실례고 상대에게 부담을 주는일이 분명하다. 솔직히 어떤 부득이한 사정 때문에 하루이틀 아이를 맡기는것도 부담주는 일일텐데 하물며 몇 년씩 이런식으로 한 대서야. 아무리 이혼이나 재혼같은 불가피한 사정이 있다 하더라도 현준 입장에서 언제까지 마냥 대학선배 이형진 집에 아이를 맡긴채로 둘수는 없는 일이다. 차라리 이형진 내외가 슬하에 자녀가 없는 상황이라면 아들 하나 입양한셈 치고 그렇게 맡아 키워줄수도 있는 일이겠지만 형진은 되려 명수보다도 나이가 많은 딸 셋을 더 키우는 몸이고 그 세 딸도 어느덧 중학생,고등학생이 되어있는 때다. 아이들 학비며 생활비며 한참 갈수록 돈드는일이 생길 수밖에 없는때. 이래저래 이형진의 고민은 가득하기만 하다.
“ 자네...뭐 하나만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
“ 무슨 말씀을 하시려구요 선배님 ? ”
긴장한 상태의 현준.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더니 바로 그렇게 형진의 입이 열린다.
“ 자네...지금 자네 아내와 명수중 누가 더 소중한가 ? ”
“ 네에 ? ”
재혼한 지금의 새 아내와 전처소생인 명수. 이 둘중 누가 더 중하냐는 질문. 현준으로선 무척이나 곤혹스럽고 당혹스러운 질문이 분명하다. 어쨌거나 지금의 아내 어나이는 이혼의 상처를 겪은 현준이 늦은 나이에 얻은 귀하디 귀한 새로운 사랑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기로 어찌 전처소생인 자기 자녀를 포기할수 있겠는가. 남자 입장에서 정말 선택하기 어려운 문제. 헌데 형진은 그런 현준의 아픈곳을 거듭 찌르고 있다.
“ 혹시 자네...젊은 흑인 아내에게 푹 빠져 자기 아들은 본체만체 하는 것은 아닌가
그걸 묻고 있는거야. ”
“ 선배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그리고 흑인이라니요 ? ”
바로 그런 문제로 기겁을 하던 아들 명수의 일을 생생히 기억하는 현준 아닌가. 그리고 남태평양 출신이긴 하지만 분명 어나이는 피부색이 좀 가무잡잡한 편일뿐 흑인이라곤 볼 수 없다. 헌데 그런 어나이를 두고 아이도 아니고 자신에게도 선배가 되는 형진이 대놓고 ‘흑인 아내’라니. 기가막히기도 하고 이형진 선배도 결국 이런 사람이었나 하는 실망감까지 겹쳐져 현준이 따진다.
“ 선배님도 참...아니 도대체 어딜봐서 어나이가 흑인입니까 ? 당치도 않아요. 제가
말씀드렸고...또 선배님도 우리 어나이 못 본것도 아니잖아요. 오히려...동남아나 중
동출신 아니냐는 오해까지 받을정도로 피부색은 오히려 그쪽에 더 가까운게 우리
어나이에요. ”
“ 우리 어나이 ? ”
현준이야 사랑하는 어린 아내 어나이를 감싸주고 싶은 마음에 이런 표현을 쓰는것이지만 형진은 자신의 말뜻을 그리 못알아듣느냐는 듯 후배를 흘겨본다. 형진의 나무라는 말이 이어진다.
“ 내가 지금 인종차별 발언을 하는게 아니지 않나. 뭐 독해력이나 이해력이 부족한
사람이라면 지금 내 의도를 그런식으로 곡해하려는건지 모르겠지만...난 지금 젊은
새 아내에게 푹 빠져 자기 아이는 잊은듯한 그런 자네를 나무라고 있어. ”
“ 선배님 무슨 말씀을...저 그래도 한두달에 한번은 종종 명수 보러 찾아가고 그랬잖
아요. 그리고 솔직히...제가 선배님앞에서 내색을 안해서 그렇지 그 아이 볼때마다
얼마나 억장이 무너지는데요 ? ”
“ 하지만 여하튼 아이 데려갈 생각은 안 하고 있잖아. 애초엔 3년만 맡아주면 된다
며 ? ”
“ 선배님... ”
현준은 울상이 되어서 선배마저 자기 마음을 몰라주냐는 듯 야속다는 듯 나오고 있고 그런 현준을 보며 형진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간다.
“ 내가 자네 아이를 맡는게 부담스럽고 귀찮아서 이러는게 아니야. 애초부터 그런
생각이었으면 처음부터 자네 그런 부탁 수락하지도 않았어. 아무리 피치못한 사정
이 있다고 해도 말일세...아닌말로 자네 사정이 정 딱하면 자네 아들 명수. 대학이
아니라 나중에 군대갔다오고 장가갈때까지도 못 맡아줄 사람이 나는 아니야 !!! ”
“ ...... ”
“ 허나 지금 난 자네 태도를 묻고 있는거야. 도대체 명수 생각을 하기는 하는건지
...여하튼 그렇게 아이는 우리집에 방치해 놓은 상태로 젊은 아내 어나이하고의 사
는 재미에만 푹 빠져 있는거 같아...그걸 나무라고 있는걸세. 다시한번 묻겠네. 자
넨 지금 어나이가 더 중한가, 아니면 명수가 중한가. ”
- 5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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