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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 (後代)들을 위한 현대사 특강 정치,시사


 

               부제 : 굴절(屈折)된 현대사의 곡절을 제대로 이해해야 

 

굴절(屈折) : ① 휘어서 꺾임 

             ③ 생각이나 말 따위가 다른것에 영향을 받아 본래의것과 달라짐 

                (* 2005년 ‘두산동아’ 발행. 동아 새국어사전 참조)  

 

 (여명,박성은,함초롬,박송이...그외 기타 한 대포 회원출신 필독 요망) 

 

 1987년 13대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김대중 양김의 단일화 문제가 한참 이슈일 때 이중 어느 한쪽에도 합류를 끝까지 거부하고 이듬해인 88년 13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한 ‘5인방’이 있다. 박찬종,홍사덕,조순형,허경구,이 철 이들 다섯명이 그들이다. 헌데 사실 87년 9월 양김의 단일화를 촉구하며 당시 야당인 통일민주당에서 서명을 했던 이른바 ‘서명파’는 실제로 총 13명이었다. 앞서 언급한 박찬종등 5인방 외에 장기욱,박관용,김정길,유성환,강삼재,박실,박왕식,송천영 의원등이 그들이다. 

 

 허나 면면을 대충보면 알겠지만 안타깝게도 저들 13명이 끝까지 무소속으로 잔류했던 것은 아니고 김대중 고문이 끝끝내 단일화를 거부하고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자 저들중 상당수는 김영삼과 김대중중 어느 한쪽을 택해 결국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끝까지 무소속으로 남은 사람은 저들 다섯명과 장기욱 의원까지 총 6명이다. 

 

 헌데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한 것이 이후 박찬종 의원은 문민정부가 출범한 김영삼 정부하에서 치러진 15대 총선(96년)을 앞두고 신한국당에 합류했고 김영삼 정권 말기 ‘정무장관’을 잠시 역임한 홍사덕 의원 역시 16대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한나라당에 합류했다. 조순형 의원은 이후 새정치국민회의-새천년민주당등 쭉 DJ 계열 정당에 몸담았지만 그 당내에서 입바른소리를 하며 ‘쓴소리 의원’이란 명성을 얻기도 했고 대체로 보수적인 목소리를 내던 인물이었다. 상대적으로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허경구 의원은 15대 총선을 앞두고 아예 자민련에 입당하기까지 했다. 다시말해 민주당계열의 후속정당에 끝까지 남은 사람은 노무현 정권하에서 코레일 사장을 역임한 이철의원 정도다. 그 외 나머지 8명은 어차피 13대 대선 앞두고 각자의 성향대로 김영삼,김대중중 하나를 택해 뿔뿔이 흩어졌으니 더 언급하는게 무의미할 것 같고 다만 박왕식,송천영 의원의 경우 통일민주당에 잔류했다가 이후 ‘민정-민주-공화’의 90년 3당합당이 있자 여기에 합류를 거부하고 DJ의 민주당으로 갔다. 장기욱 의원의 경우엔 신한국당과 민주당이 합당해 생긴 한나라당 소속으로 16대 총선에 출마하기도 했다. 

 

 1987년 당시 양김의 후보 단일화를 요구하며 ‘서명’까지 하고 양김 어느쪽에도 합류를 거부하고 무소속으로 잔류했을 정도면 그 시절 그 어떤 국회의원이나 정치인보다도 ‘후보단일화’에 대한 절실한 마음이 가득하고 뜨거웠던 인물들이란 소리다. 그해 대선에서 김영삼 후보가 28%로 2위, 김대중 후보가 27%로 3위를 했다. 두 후보의 득표율을 합하면 36%를 득표한 노태우 당선자의 득표율을 껑충 뛰어넘는 수치가 나온다. 적어도 그 시절 과반수가 넘는 국민들이 군사정권이나 그 아류가 더 이상 연장되지 않고 ‘민간정부’가 출범하길 그토록 뜨겁게 열망했다는 증거가 저와같이 수치로 증명된다. 

 

 짚고 넘어가고자 하는 문제는 군사정권 시절 대다수의 일반국민들이 바랬던 ‘민주화’의 본질이 무엇이었나 하는 점이다. 적어도 군사정권시절 민주화 시위에 동참한 대다수의 ‘보통사람’들의 열망은 장기집권 그만하고 더 이상 군인들이 쿠데타로 정권잡는 그런방식이 아닌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고 표현의 자유가 좀 더 보장되는 그 정도 수준의 민주화를 원했던것이지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거나 북한같은 체제를 흠모한 친북(親北)운동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실제 과거 군사정권시절 ‘야당’의 이념적 정체성이 그것을 말해준다. 사실 현재의 ‘더불어민주당’이 자신들이 1955년 자유당시절 창당된 민주당(民主黨)의 법통을 잇는다고 말하고 있으나 이념적 정체성을 놓고볼 때 그 시절의 민주당과 지금의 ‘더불어 민주당’은 하늘과 땅 만큼의 엄청난 차이가 있다. 실제 과거 50-60-70년대 야당은 스스로를 ‘보수야당(保守野黨)’이라 일컬었을만큼 그 시절 야당의 정체성은 어디까지나 ‘반공보수(反共保守)’였지 친북도 사회주의 경향도 아니었다. 80년대까지도 그 이념적 정체성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오히려 ‘중도개혁’이니 ‘좌우를 아우르는 국민정당으로 나가겠다’는 식의 말은 김대중 선생의 ‘평화민주당(87년)’, ‘새정치 국민회의(95년)’시절부터 나온 말이다. 

 

 1990년에 있었던 ‘민정(民正)-민주(民主)-공화(共和)’의 3당합당을 두고 보통 그 당시 야당이나 재야는 야합,변절 혹은 호남을 고립시키고자 하는 지역주의라고 비난했으나 실제 당시 3당합당을 주도했던 박철언씨의 구상은 ‘일본식 보수대연합’이었다. 한마디로 이념적으로 별 차이가 없는 보수정당끼리는 이제부터 같이가는게 좋다는게 당시의 ‘3당합당’ 구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3당합당이 이루어진데는 평민당이 갈려져 나간 상황에서 ‘중도보수’와 중산층을 주요 지지층으로 표방한 ‘통일민주당’의 현실적 한계의 고민도 어느정도 들어있었다고 보아야한다. 비록 통일민주당이 재야나 좌파등과는 일정부분 선을그은 ‘중도보수’ 정당이라곤 하지만 일반적으로 보수 중산층은 나라나 사회가 어지러워지면 결국 정부여당에 힘을 실어주는 경향이기 때문에 이럴 때 ‘중도보수’를 표방한 야당은 사실상 입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다. -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의 고민도 크게 다르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통일민주당하고만 손잡는다고 해봤자 애초부터 뿌리와 지나온길이 다른 두 정당이 손잡아봤자 민정-평민 양당구도가 될 때는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3당합당 외엔) 사실상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90년대 들어 동구 공산권의 몰락과 북한의 식량난을 겪으면서 80년대 운동권들은 당혹스러움과 함께 고민의 시간을 갖게된다. 이때 운동권 일각에서 ‘이제 북한인권과 탈북자 문제도 거론해야 하는 것 아니냐 ?’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으며 이중 일부가 80년대 친북, 사회주의 기류의 운동권을 벗어나 ‘북한 민주화’를 부르짖으며 전향을 선언한다. 그리고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과 보수의 몰락을 보면서 ‘이대로는 안된다’는 자각을 하고 운동권에서 전향한 이들이 새로운 보수를 주장하며 ‘뉴라이트’를 선언하게 된다. 

 

 한편 노무현 정권 출범과 ‘열린우리당’ 창당으로 운동권 출신과 구(舊) DJ계 사이에도 균열이 시작되면서 특히 운동권과 친노에게 숙청당한 DJ계 인사들이 한동안 정치적 방황의 시간을 걷다가 결국 보수진영에 합류하게 된다. 어떻게보면 운동권 출신이었다가 전향한 ‘뉴라이트’보다도 한발 늦은 ‘마지막 뉴라이트’이자 ‘늦깎이 뉴라이트’가 된 셈이다. 이렇게 구(舊) 민주화 세력은 세차례 정치적 격변을 겪으면서 차례차례 보수진영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그 첫 번째 흐름이 3당합당때 민자당에 합류한 ‘민주계’인사들이고 두 번째 흐름이 90년대 동구 공산권의 몰락과 북한의 식량난을 지켜보며 전향한 ‘뉴라이트’계열이 있고 마지막 세 번째 흐름이 친노에게 숙청당하면서 민주당 계열 정파에서 이탈하게 된 구(舊) DJ계 인사들이다. 이렇게 세차례 분화과정을 거치며 민주화 세력 상당수가 보수진영에 몸담게 된 것이다.  

 

 민주화 운동의 역사가 왜곡되고 굴절되기 시작한 것은 역시 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그 뿌리를 찾아야 한다. 김일성을 ‘뿔달린 도깨비’로 인식하고 자란 반공교육 세대가 전두환의 5.18 광주학살을 목격하면서 어쩌면 북한이 우리보다 나은 체제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하거나 심지어 사회주의를 새로운 대안으로 생각하게 되면서 80년대 운동권 기류가 결국 북한을 추종하는 친북(親北) 혹은 사회주의 기류가 주(主)를 이루게 되었고 여기에 100% 동조하지 않는이들의 상당수도 ‘5.18 광주학살 원흉인 전두환 타도를 위해선 악마와도 손을 잡아야 한다’는 식의 주장에 동의하게 되어 80년대 운동권은 불행하게도 그와같은 노선이 주류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민주화 운동에 동참하거나 동조한 대다수의 ‘보통사람’들의 바램과 염원은 더 이상 장기집권을 하지말고 그리고 군인들이 또다시 들고 일어나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는일이 없이 우리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뽑고(대통령 직선제) 표현의 자유가 좀 더 보장되는 그 정도 수준의 ‘민주사회’를 바랬던것이지 친북 운동권 기류에 동조했던 것이 아니라는 소리다. 이는 정작 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4당체제하에서 바뀌어진 사회 분위기에서도 충분히 입증이 된다. 소위 ‘절차적 민주주의’는 제도적으로 어느정도 수립이 되었을지언정 운동권 학생들의 시위나 노사분규는 날로 격화되고 심지어 어느어느 재야인사,운동권 학생,정치인의 방북(方北) 파동등이 잇달으면서 ‘안정’을 바라는 ‘보수중산층’은 이러한 사회주의 기류의 재야,운동권 학생들의 목소리엔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 ‘3당합당’도 결국 그런 변화하는 사회흐름에 따른 결과라고 보면 될 것이다.  

 

 유진산,박순천,정일형,정해영,이재형,고흥문,김도연...기타 등등...이 이름들 요즘 10대-20대들에겐 생소할것이고 사실 필자정도 세대들도 현대사 관련 정치다큐집 같은것을 관심있게 챙겨본 사람 아닌 다음엔 그저 이름이나 한두번 어쩌다 들어봤지 저들이 직접 활동하던 시대를 알수 있는 사람들은 아니다. 헌데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저들이 야당을 주도하던 1960-70년대의 신민당(新民黨),민정당(民政黨 - 5공때 전두환의 민정당(民正黨)과는 다르다.)등의 야당의 기본노선은 ‘반공보수’였다는 점이다. 가령 북한의 무력도발이나 귀순용사 사건 같은 것이 있을때는 야당도 북괴의 만행을 규탄하거나 귀순용사를 환영하는 성명을 발표하는등 북한문제에는 대체로 정부,여당과 한목소리를 냈었다. - 심지어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의 음모론도 실은 일본언론이 먼저 의혹을 제기한것이지 국내에선 대체로 다함께 육여사를 추모하고 북괴의 만행을 규탄하는 그런 분위기였다. 

 

 물론 60-70년대의 재야나 이런데선 사회주의 기류나 북한과 연계되었을 의심이 가는 이런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오히려 ‘민청학련 사건’처럼 억울한 피해를 입은 사람들도 있는등 대체로 친북이나 사회주의 기류는 60-70년대까지만 해도 민주화 운동의 흐름에서 주류가 될수 없었다. 결국 대학가 운동권에서 친북,사회주의 기류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것은 80년대부터며 이때부터 민주화 운동 진영의 노선에 본격적인 고민과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으로 봐야할 것이다. 

 

 필자가 하고싶은 이야기는 바로 저와같은 민주화 운동 시절의 곡절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만 과연 군사정권 시절 민주화 운동의 목소리에 동조했던 수많은 ‘보통사람’들의 진정한 염원과 여망이 무엇인지를 알수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군인들이 더 이상 쿠데타로 집권하지 않고, 장기집권 시도도 하지 않고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고 표현의 자유가 좀 더 보장되는 그 정도 수준의 자유로운 세상을 원했던것이지 친북이나 사회주의 운동의 흐름에 동조한 것이 아니었다. 바로 그 곡절을 이해해야 과거엔 민주화 진영에 몸담고 있었으나 지금은 보수정파에 속해있는 이들의 흐름과 고뇌를 제대로 이해하고 평가할수 있기에 이런말을 하는 것이다.  

 

 솔직히 이 글을 쓰는 필자도 어느덧 나이 50을 바라보는 사람으로 앞으로도 이렇게 활발히 글쓰며 활동할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지 기약하기 쉽지 않은 사람이다. (* 평균수명 100세 어쩌구 하지만 모아놓은 돈도 거의 없고 건강상태도 안 좋은 사람이 이대로 백살까지 산다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재앙이니 축복이 아닐 것 같다.) 무엇보다 이제 민주화 운동 시절의 곡절을 제대로 알고 후대에게 들려줄수 있는 사람들도 점차 구시대 사람들이 되어가는 시점에서 앞으로 10년이 더 지나면 저 사람들에 대한 후대의 평가가 어떻게 왜곡되고 변질될지 몰라서 그것만은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에 이런글을 쓰는 것이다. 민주화 운동 진영에 있다가 지금은 보수정당에 몸담고 있는 이들. 이들의 고뇌와 역사적 곡절을 제대로 이해해야만 민주화 운동 시절 진정한 대다수 ‘보통사람들의 여망’을 제대로 이해할수 있다. 시간이 좀 더 흘러 민주화 운동의 역사가 완전 석양으로 저문뒤에 각자의 편파적인 감정으로 왜곡의 평가가 나오면 곤란하겠기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 가령 박 모는 공화당때 어땠느니 홍 모는 이라크 파병 논란때 이상한 소리를 했다느니 이런식의 사소한 전력 트집잡기로 흠집을 내다보면 저들의 민주화 운동시절의 진심과 고뇌를 제대로 이해할수 없기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동서고금 역사에 명암(明暗)은 항상 공존하게 되어있다. 군사정권 시절의 경제성장이 ‘밝은면’이었다면 장기집권과 인권탄압은 ‘어두운 부분’이었다. 그 공존의 시절을 함께 이해하고 평가할줄 알아야 한다는 소리다. 민주화를 바랬던 진정한 보통사람들의 열망과 함께했던 이들이 누구였고 그들의 고뇌가 어떤것이었는지를 제대로 이해할줄 알아야 잘못 꼬여져버린 민주화 운동의 역사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질수 있다는 이야기다.  

 

 

 

 


덧글

  • 과객b 2021/06/03 13:48 # 삭제 답글

    서울대학교 6학년 2반인 나도 공감한다.
    추천!
  • 훼드라 2021/06/03 20:05 #

    감사합니다
  • 과객b 2021/06/04 07:59 # 삭제

    진짜가 내가 진짜라고 말해야 할 정도면
    강호의 도는 무너진거라고 말할 수 밖에
    주인장의 너그러운 마음씨는 여기까지
  • 나인테일 2021/06/03 15:08 # 답글

    국민의 힘은 독재정권 옹호라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 김영삼이 세운 아이덴티티로의 복귀를 꽤 성공적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봅니다.
  • 훼드라 2021/06/03 20:05 #

    예 맞습니다
  • MoGo 2021/06/03 18:40 # 삭제 답글

    10년동안 폐쇄적인 뉴밸에 있다 보면 뉴밸 의견만이 옳다고 동조하게 되거나 뉴밸에서 벌어지는 행태에 대해 어떤 위험도 자각하지 못하고 군중심리에 이끌려 우르르 따라갈 때가 있으니 어서 탈출하여 현실감각을 찾으러 가거라 훠훠훠
  • 훼드라 2021/06/03 20:06 #

    어쨌거나...동의합니다
  • 흑범 2021/06/04 06:51 # 답글

    백살 시대라... 지금 칠순 정도 되신 노인분들 백살까지 살 겁니다. 팔순 넘은 분들도 거의 백살 가까이 간다고 보시면 됩니다.

    아마 86세대까지는 별일 없으면 백살 살텐데

    x세대나 80년대생들 부터는 imf 이후 사회진출, 정착이 늦어진 사람들이 늘어나서,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모아둔 재산, 사회진출 늦어진것, 늦은 결혼, 연금 문제, 출생자수 감소 등. 불리한 요인들이 많겠더군요.
  • 훼드라 2021/06/04 18:21 #

    동의합니다.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 흑범 2021/06/04 06:59 # 답글

    이중잣대가 심한 사람들하고 피해의식 있는 사람들이 할수 있는 일이 트집잡기 밖에 더있을까요? 이것도 문제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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