훼드라의 세상만사

whaedra.egloos.com

포토로그



걸그룹 팬픽 - 블랙핑크 로제 (1) 걸그룹 팬픽 10 (레벨,블핑)


 

 

                                           부제 : 선문법사 이야기 

 


 “ 따르르르르르릉~~~!!! ” 

 요즘 세상에 집전화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나이가 굉장히 많은 사람이거나, 아니면 원래 사용하던 집전화를 어떤 미련이나 향수 또는 기타 이유 때문에 차마 폐기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혹 예전에 알고 지내던 친구나 지인에게서 연락이나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갖고 집전화를 그냥 놓아두고 있는 경우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경기도 OO시에서 4층짜리 빌라건물 세채를 보유하고 있는 건물주 윤준식. 그 역시 건물주 업무를 보면서는 집전화보다는 휴대폰을 이용하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집전화를 굳이 신경쓰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이따금씩 걸려오는 집전화는 용건이 대개 이런경우였다. 여론조사 전화거나 업체홍보 전화거나. 게다가 준식의 경우엔 학창시절 동창이나 이런이들과도 졸업후엔 거의 교류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굳이 그때 알고 지내던 친구나 지인의 연락이 올 가능성도 없고. 헌데 그런 준식의 집에 참으로 오랜만에 집전화 벨이 울려왔다. 이런식으로 걸려오는 집전화라면 아무래도 그런 자신에겐 관심사가 아닌 정치권 여론조사나 이런저런 업체 홍보전화일 가능성이 높아 받지 않으려 했는데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단 전화를 받아보긴 했다. 한밤중이긴 했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직 잠자리엔 들기 전이었다. 

 “ 혹시...윤준식 동지신가요 ? ” 

 ‘여보세요’ 하는 물음에 좀 뭔가 나지막하면서도 침착하게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 무엇보다 굳이 ‘동지(同志)’라는 호칭을 쓰는 사람. 순간 준식의 가슴이 ‘쿵’하고 울렸다. 잠시나마 머릿속이 좀 어질해지는 느낌도 받았고. ‘동지’ 아마 북한에선 자신보다 윗사람이나 나이많은 사람에게 그와같은 호칭을 쓰는 것으로 알고있고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이나 군사정권 민주화 운동을 하던 사람들도 같은 목적을 같고 투쟁한다는 동질감을 높이기 위한 목적인지 그런 표현을 쓰곤 했었다고 한다. 허나 윤준식은 독립운동이나 민주화운동과도 거리가 먼 어느덧 2020년대로 접어든 시점에 나이 40대 후반에 이르고 있는 사람. 헌데 그런 준식을 ‘동지’라 부르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대진교(* 민족주의 계열에 후천개벽을 주장하는 군소규모 신흥종교 단체)의 청년,학생회 단체였던 ‘청운동지회(靑雲同志會)’에서 쓰던 표현. 물론 그렇다고 해도 그건 아직 친하지 않고 서먹한 단계일 때 쓰는 표현이고 어느정도 가까워지면 흔한 청년이나 청소년들처럼 서로 ‘야,자’ 하거나 ‘형,누나,언니,오빠’ 같은 표현을 썼다. - 교회에서 학생회,청년회 회원들끼리 ‘형제님.자매님’ 하는 호칭을 쓰는것과 거의 비슷한 상황이라고 보면된다. - 허나 아무리 그래도 준식이 대진교와 결별하고 떠나온지가 어느덧 24년 세월이다. 어느덧 4반세기가 가까워 오는 시절이니 아무리 그 시절 절친했다 하더라도 이렇게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와서 바로 말을 놓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일단 준식은 목소리만으로는 누구인지 가늠을 하기 어려워 긴가민가 하고 있었는데 차분하게 전화를 걸어온 남자는 자신을 소개했다. 

 “ 혹시...김철규 동지라고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 

 ‘김쳘규 ?’. 준식은 언뜻 그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대진교는 전국에 서울,인천(송도),경산(경북지역 소재),부산,창원,전주,광주,영월,용인등 모두 열곳에 회관(會館)이라는 집회장소를 두고 있었는데 준식이 그곳에서 일하고 활동하던 시절 청운회는 청년부나 중고등부들이 모이면 평상시 모이는 인원이 대략 회관별로 20명 안팎, 그리고 1년에 두차례씩 열리는 ‘전국 청운동지회 수련대회(동,하계 각 1회씩 총 2회)’의 경우엔 보통 한 100명 많이 참석할때는 200명을 상회하는경우도 있었다. 물론 방학을 이용해 하는 청소년,청년 집회인 수련대회는 그 성격의 특성상 청운회원들이 주변의 자기 친구나 친척들을 동행해 데리고 오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수련대회에 참석하는 평균 100-200명 정도의 참석자들이 한달평균 1회꼴로 열리는 각 회관의 청년,청소년 집회에 정기적으로 다 참석하는 것은 아니고 여하튼 청년부든 중고등부든 그와같은 집회가 각 회관별로 열릴 경우엔 참석 인원이 평균 20명 안팎 수준이었다. 허나 청운회의 성격상 중고등부든 청년부든 언제까지 중,고등학생이거나 젊은 청년일수는 없을테니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차 성인이 되어 더 이상 청운집회에 참석하지 않는 이들도 있고 원래 나이어린 학생이었다가 중고등부나 청년부로 유입되어 오는 사람도 있다. - 당장 윤준식만 해도 어느덧 대진교 청운회와 결별하고 떠난지가 24년 세월이 아니던가. - 어쨌거나 전체규모를 총합하면 그래도 몇백명 정도는 된다고 봐야할 – 이미 학교를 졸업한 사람, 그 뒤에 새로 들어온 사람등을 총합하여 – 그 많은 청운회원들을 일일이 기억하기는 무리다. 그래도 준식이 상대적으로 사람들 이름을 기억하는 기억력이 좋은편이라 1년에 단 한두번이라도 청운집회에 참석한 이력이 있는 회원이라면 아직까지 이름을 잊지않고 기억하고 있는경우가 더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는 김철규란 사람. 그럼 자신이 청운회에 가입하기도 전인 대략 80년대 후반 이전의 거의 초창기 멤버란 말인가 ? 아니면 자신이 청운회를 떠났을때인 90년대 후반 이후에 가담하게된 인사란 말인가. 헌데 그렇다면 그런 평상시 자신과 친분도 없었을 사람이 이렇게 20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 굳이 전화를 걸어올 이유가 없지 않은가. 더더욱 이해도 안가고 기억도 안 나 거듭 의아해하고 있는데 김철규가 자신을 거듭 구체적으로 소개했다. 

 “ 90년대 초,중반경에 창원회관 청년부 집회에 몇 번 참석한적이 있습니다. 수련대 

  회에도 참석한적이 있고요. ” 

 “ 아...아... ” 

 ‘창원회관 청년부’ 혹은 중,고등부 회원중에서라면. 그제서야 그런 이름을 가졌던 회원이 있었던 것이 기억이 난다. 무엇보다 그때는 준식이 대진교의 총무원(* 불교의 총무원과 기능은 거의 비슷한데, 보통 창원에 소재한적도 있고 인천에 소재한적도 있는등 변동이 몇차례 있었다.)에서 근무하던 시절이라 대략 2-3년 시간의 절반을 그곳에서 상주했을 것이다. 헌데 그때 청운회원으로 집회에 참석하던 사람이라면 준식이 어찌 기억을 못하고 있었을까. 준식은 그때는 대진교 종단 전체의 성직자,회원(신도),청운회 명부 관리등 사무를 총괄하던 일종의 ‘사무간사’ 일을 보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 많은(대략 수백명 정도 규모) 회원들을 일일이 다 기억하지는 못하는 한계도 있었을 것이다. 여하튼 그제서야 기억이 나는듯한 창원회관 김철규 동지의 이름. 헌데 그런 사람이 그것도 20여년 세월이 흘러 무슨일로 ? 게다가 아마 김철규라면 자신이 이곳 경기도 OO시에서 서민형 빌라 건물주로 있다거나 그 연락처를 알만한 사람은 아닐텐데. 일단 그 궁금증을 김철규가 풀어주었다. 

 “ 박성호 동지가 아마 연락처를 안다고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전화를 드릴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마 그때...그렇게 회관을 떠난뒤로는...아버님 명의의 OO시에 

  있는 빌라를 물려받아 그 건물주로 계시다는 소식까지 들었는데... ” 

 “ 아, 박성호 동지가...그걸 또 제 소식을 거기까지 알고 있었는지는 몰랐네요. ” 

 김철규는 몰라도 박성호는 기억이 났다. 아마 90년대 중반에 송도(인천시 소재)회관 청운회 부회장까지 역임한 인물인데 준식이 대진교를 떠난뒤에도 사사로이 한 2-3년 정도는 연락을 주고받았던 사람이다. 그래서 준식이 그렇게 대진교를 떠난뒤엔 아버지와 함께 경기도 OO시 소재의 ‘OO빌라’라는 4층짜리 서민형 빌라의 건물주로 그것을 운영해오며 살았고 준식의 아버지가 돌아가신뒤엔 준식이 바로 빌라를 물려받아 계속 건물주로 살아오고 있다는 것을 박성호가 소식을 김철규에게 전해준듯하다. 여하튼 박성호든 김철규는 실로 20여년만에 듣게되는 청운회원의 소식. 헌데 그렇게 오랜시간 연락도 없던 이들이 대체 무슨 이유로 갑자기 연락을 해온것일까. 이내 곧 김철규가 준식의 궁금증을 풀어준다. 

 


 “ 선문법사(善文法師)님을 아시죠 ? ” 

 ‘선문법사’. 그 명칭을 듣는순간 다시한번 준식의 가슴이 ‘쿵’하고 울렸다. 선문법사라면 바로 대진교 창원회관 회관장을 대략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후반까지 10년이상 역임했던 인물이다. 여하튼 준식이 대진교와 인연을 맺은 것이 고등학교때부터고 이후 청운회를 거쳐 총무원에서 사무간사일을 하며 사실상 ‘직장생활’이나 다름없는 일을 할 때 ‘창원회관장’이었고 준식이 그곳을 떠날 무렵까지도 창원회관장이었으니까. 일단 김철규가 그동안의 변동사항을 설명해줘야겠는지 이와같은 말을 덧붙인다. 

 “ 일단 선문법사님께서는 지금 더 이상 창원회관장님이 아니십니다. 그만두신지가  

  꽤 오래되셨죠. ” 

 여하튼 대충 꼽아봐도 선문법사가 창원회관장으로 역임한 시간이 10년이 넘는다. 최소한 준식에겐 ‘선문법사’니 혹은 그녀의 실명보다도 ‘창원회관장’이란 이미지로 더 강렬히 박혀 있는것만 봐도. 종교단체가 되었든 일반 사회단체나 직장이 되었든 그 자리에 10년 이상 있다는 것은 쉽게 볼수있는일은 아니긴 한데, 준식의 기억에 아마 90년대 중반쯤에 회관장이나 각 회관 간부를 ‘임기제’로 돌아가며 하는 것으로 하자는 논의도 잠시 있었다. 그렇게 하는데는 몇몇 회관장이 그때(90년대 중반)를 기준으로 이미 10년 이상 장기집권화하는 경우가 더러 있어 그로인한 폐단과 부작용이 좀 있었던 것으로 안다. 그때 대충 논의가 회관장을 ‘5년’ 정도의 임기제로 하는것으로까지 이야기가 나왔었는데, 허나 워낙 군소규모 종교단체다보니 5년이 되었든 3년이 되었든 그렇게 자주 회관장을 교체할만한 인력이 그리 많지 않았고 – 종단의 법사(法師)와 순도사(殉道師)급 대략 10여명 정도가 ‘회관장’ 혹은 총무원의 각 부서 부장(副長)에 임명될 자격이 주어진다. - 그러다보니 임기제로 해봤자 늘 비슷한 사람을 그야말로 ‘회전문 돌려막기 인사’ 식으로 돌아가면서 임명하는 모양새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회관장 임기제’는 사실상 지켜지지 않던 상태라고 보면 된다. 

 어쨌든 지금 ‘그만둔지가 오래되었다’는 의미가 단지 회관장을 하지 않고 그냥 일반 ‘법사’나 ‘순도사’로 있다는 이야긴지 아니면 다른 직책을 그 종단에서 맞고 있다는 이야긴지. 아직 김철규의 말이 100% 정확히 이해가 가지 않아 여전히 의아해하고 있는데 다시한번 김철규의 말이 준식의 가슴을 또한번 울렸다. 

 “ 돌아가셨습니다. 저희도 오늘 낮에 연락을 받았어요. ”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오늘 낮에 받았다면 그럼 지금 선문법사가 회관내에는 없다는 소리인지, 일단 창원회관 청년부 회원을 잠시 지낸바 있는 김철규 동지야 무슨 법사(法師)니 교사(敎師)니 하는 성직이나 간부직을 맡은 사람도 아니고 나이상 더 이상 청운회 회원도 아닐터이니 지금 대진교에 일반 신자로 있다는것인지 계속 인연을 맺고 있다는것인지 그 조차도 아직 확인이 쉽지 않다. 여하튼 100% 정확히 상황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김철규의 말은 이와 같았다. 

 “ 문상을 가실 의향이 있는지 여쭤보고 싶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혹 의사가 있으 

  시면 내일 오전이나 낮에 저희랑 만나서 같이 가시죠. ” 

 선문법사는 원래 창원회관 회관장 시절 청운회 간부들이나 총무원에서 교사(敎師 - 교회의 전도사 기능과 비슷하다.)로 종사하는 젊은이들에게 각별하게 잘해주는 그런분이긴 했다. 창원회관의 특성상 마치 불교의 사찰과 같이 산 중턱부근 평지를 깎은 공간에 그와같은 ‘회관’이란 종교집회 시설을 만들고 장기간 기거하며 기도를 할 수 있는 그런 공간으로 활용되던 곳이었기 때문에 청운회든 일반 신도든 한달이나 두달 혹 그 이상 기거하며 기도하다 돌아가는 이들도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준식의 기억이 창원회관에 장기간 기거하며 기도하는 이들은 적을때는 보통 3-5명 많을때는 10명 이상 20명 가까이 되었고 개중에는 젊은 청운회원도 더러 있었다. 선문법사가 원래 그런 젊은 청운회원들에게 각별했기 때문에 청운회든 젊은 교사들이든 대체로 선문법사를 잘 따르는 그런 유대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런 선문법사의 별세소식을 들었다면 그녀가 창원회관 회관장 시절 청운회 간부였든 총무원의 교사로 있었든 가만있을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아마 김철규가 생각이 났는지 그 당시 총무원에서 일종의 ‘사무간사’ 같은 일로 3년여 재직했고 그러나 지금은 종단과 결별하고 떠난지 이미 4반세기가 다 되어가는 준식에게 어렵사리 연락을 취한 모양인데, 일단 준식도 적잖이 충격을 받은 상황에서 김철규호의 통화를 간단히 마무리하고 한동안 망연자실하게 있었다. 그날밤 밤잠조차 제대로 이루지 못하다가 날이 밝아 김철규등을 만나기로 한 약속장소로 나아갔다. 

 김철규와 만나기로 한곳은 서울 강서지역에 있는 한 커피숍이고 선문법사의 영안실은 인근의 한 종합병원에 마련되어 있다는 전언이다. 준식이 나아간 약속장소엔 김철규 외에도 두명의 40대 후반 남자가 더 와 있었다. 바로 준식이 건물주로 있는 빌라 연락처를 알기 때문에 가르쳐 주었다는 송도회관 부회장을 역임한바가 있는 박성호라는 이와 서울회관 청운회에서 간부로 오랫동안 있었던 이종태라는 이었다. 기억에 박성호가 아마 두 살정도 위였고 이종태는 아마 동갑이었던 것 같은데, 24년의 세월이 확실히 만만치 않은것인지 하마터면 서로를 몰라볼뻔하기까지 했다. 이젠 더 이상 청운회원이 아님은 – 종단을 떠났던 안 떠났던간에 – 피차 다 마찬가지일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삼스레 그 시절 그 추억어린 호칭마저 다시 입에 올리며. 

 “ 이종태 동지...맞죠. 그리고 박성호 동지... ” 

 새삼 그 시절의 추억이 되살아나서인지 서로를 바라보며 피식 웃기까지 했다. 사실 이종태나 박성호는 그후 어찌 지냈는지 청운회를 졸업(? - 졸업이란 기능이 따로 있다기 보단 보통 결혼을 하거나 20대 후반을 넘으면 더 이상 청운회 집회에는 참석하지 않는다.)하고도 대진교 신자로 계속 인연을 맺었던 것인지 아니면 준식의 경우처럼 종단과 아예 결별하고 떠난것인지. 피차 그간의 20여년 변해버린 사정은 알 수 없는 길이기에 다소 어색한 대화가 좀 더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준식이 이런식으로 다시 말을 건넸다. 

 “ 오랜만에 보네요 형들... ” 

 일단 박성호는 확실히 자신보다 두 살 연상이었던 것을 기억하기에 그와같은 인사말을 건넨것이고 동갑이었던 이종태는 좀 어이없다는 듯 다시 ‘피식’하며 실소를 머금는다. 이대론 안되겠다 싶은지 김철규가 그동안의 변동상황을 한마디로 알려주듯 이렇게 말한다.  

 “ 다 바뀌었어요 지금은. ” 

 “ 그건 무슨말이에요 ? 다 바뀌다니 ? ” 

 바로 놀라고 의아한 듯 그와같이 물은사람 역시 윤준식이고 김철규가 세 사람의 궁금함을 풀어주듯 목청을 한옥타브 높인다. 

 “ 예전 법사닙들...순도사님들...지금은 거의 다 안 계세요. 돌아가신분도 계시고...나 

  가신분도 계시고... ” 

 기억에 아마 선문법사가 50년대 후반 태생이고 다른 법사나 순도사들은 그보다 대략 열 살에서 스무살정도 위인 1930-40년대생들이었다. 그러니 1990년대 그때 이미 나이 50-60에 이른 사람들. 따라서 어느덧 최소한 20년 이상,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2020년 이 시점에 이르러 아직까지 그분들이 거의다 생존해 계실것이라 기대한다면 그 자체가 무리다. 헌데 고령으로 돌아가신분들이야 그렇다치고 ‘나가다’니. 김철규가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이와같이 말한다. 

 “ 저도 지난번 집회때 참석해보고 놀랐어요. 예전 법사님들이든 순도사님들이든 지 

  금은 다 안 계시고 완전히 다른 사람들로 다 바뀌어 있더라구요. 완전히 물갈이가 

  된 분위기라고나 할까요. 솔직히 저조차도 낯설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으니까... 

  여기가 ‘20년전 내가 청운회 애들과 어울리던 그 회관이 맞는가’ 하는 그런 생각까 

  지 들 지경으로... ” 

 “ 아니...도대체... ” 

 준식이 더더욱 이해가 안간다는 듯 다시금 한마디 끼어들었다. 그의 말이 이어진다. 

 “ 아니 뭐...그동안 쿠데타라도 일어났다는거에요 ? 뭐 어떻게 되었다는건데요 ? 뭐 

  고령으로 돌아가신분들은 그렇다치고...다른분들은... ” 

 “ 선문법사님도 그렇게 창원회관장 그만두시고 몇 년 지나서 떠나시고...그 뒤로 쭉 

  사가(私家)에 계셨다 하시고...다른분들도 어쨌든... ” 

 “ 그럼 도대체...선문법사님 별세 소식은 어떻게 안거에요 ? ” 

 이종태가 그 정황이 좀 이해 안간다는 듯 물었다. 김철규가 보충설명을 해준다. 

 “ 창원회관으로 전화가 왔대요. 근데 선문법사님 떠나신게...벌써 한 최소한 10년 이 

  상이 지난거니까...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수가 없죠. 그래서 회관 관계자들끼리 어리 

  둥절해하다가...그래도 제가 고참신자라고 저한테 연락을 해서 물어본거에요. 그래 

  서 선문법사님 별세소식을 알게된거죠. 유가족들과 통화도 했고요. ” 

 선문법사의 가족들도 그녀가 어쨌든 대진교에서 창원회관으로 10년 넘게 재직한 인연을 알고 있다면 별세소식을 전하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또 그렇게 소식을 전해주는 것이 도리라 생각했을수도 있고. 여하튼 그런식으로 전해진 이미 창원회관을 떠난지 10년이 넘는다는 선문법사의 별세소식을 청운회등을 떠난지 20년이 훨씬 넘는 이들이 그렇게 전해받을수 있게된 것이다. 

 


 막상 그렇게 김철규,박성호,이종태등과 함께 강서지역 종합병원 영안실에 안치되어 있다는 선문법사를 문상하러 가는 준식은 좀 긴장이 되었다. 대진교 시절 일반 청운회원이었던 다른 세사람과는 달리 준식은 어쨌든 일종의 ‘사무간사’격인 종단 총무원의 서류관계 업무와 출판,홍보업무 실무를 총괄하는 담당자였고, 그 과정에서 우연찮게 접하게 된 종단 성직자라던가 이런저런 신도회 간부급 인사들의 신상에 대해 제법 아는게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청운회원들이야 어쨌든 선문법사의 전력에 대해 그렇게 대진교에서 오랫동안 ‘창원회관장’으로 있었던 법사고 순도사인 것 정도로만 알지만 준식은 뜻밖에도 선문법사 가족은 의외로 독실한 ‘기독교 가정’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게 아마 준식이 창원회관에서 서류 및 전화받는 업무를 전담하고 있을때였는데 원래 준식이 선문법사의 실명이 ‘강성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강성희씨’를 찾는 전화를 몇 번 받아본적이 있었다. 그렇게 많지는 않고 최소한 너댓번에서 한 열차례 안팎정도. 그리고 뭔가 쉰목소리에 거칠어보이는 여인이 이런식으로 종종 선문법사를 찾곤 했다. 

 “ 저어...죄송하지만...거기 강성희씨좀 부탁드립니다. ” 

 그렇게 종종 ‘강성희’라는 실명을 언급하며 창원회관장을 찾는이가 바로 선문법사의 친언니임을 얼마 지나지않아 알았다. 대진교에서 창원회관장을 하고 있는 선문법사와는 달리 그녀의 다른가족들은 기독교 가정이라는 뜻밖의 사실을 안 것이 그보다 좀 지난뒤의 일이고 실제로 선문법사는 신앙심이 독실한 크리스찬인 다른 가족들과는 달리 대략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학업에 흥미를 잃고 ‘무당이 되고싶다’고 설쳐대던 여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인연이 되지 않았는지 아니면 신기(神氣)가 들리기엔 뭔가 부족함이 있었는지 여기저기 이런저런 무당이며 점쟁이,보살을 찾아다니며 10대-20대의 대다수의 시간을 보냈건만 정작 신들림은 받지 못하고 그 과정에서 우연히 나중에 ‘대진교’를 세우게 되는 도사를 만나 그 무렵부터 함께 ‘대진교’란 종교단체에 몸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창원회관이란 기도도량이자 종교집회 장소가 만들어져 그 ‘회관장’이 된것으 80년대 후반경의 일이고 선문법사가 50년대 후반 태생이라고 했으니 서른을 갓 넘겼을때의 일이다. 

 선문법사야 인연이나 운명이 그렇게 정해져 있었던것인지 어쨌던것인이 어쩔수 없는 일이더라도 그런 동생이나 딸을 바라보는 다른 가족들의 심정은 또 어땠을까. 준식이 그때 선문법사의 ‘언니’라는 분과 통화를 했을 때 꼬박꼬박 ‘강성희씨’라고만 찾는 그 언니는 자기 동생이 대진교란 종교단체에서 현재 법사고 창원회관장이란 자리까지 역임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듯 했다. 어쩌면 선문법사 입장에서 자기가족들을 걱정하는 배려의 조치쯤 된다고나 할까. 여하튼 그런 기독교 가정 집안에서 막내딸이자 동생이 그저 호구지책삼아 말단에서 잔심부름이나 하고 있는 그런 위치라면 ‘그저 제X 팔자가 그런걸 어쩌리...’ 하고 체념하며 살수도 있겠지만 창원회관장이든 법사든 순도사든 그런 주요직책에 있는것이라면 그 의미와 경우가 또 다르지 않는가. 무슨 회관장이라고 하든 법사나 순도사든 그런 직책에 있다면 대진교라는 종교단체에 대한 교리나 정보,조직 시스템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상당히 중요한 고위직책에 있다는것쯤은 충분히 짐작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그런 종단의 고위직에 있다는식으로 말하는것보단 그냥 말단에서 심부름이나 좀 하며 호구지책을 삼고 있다고 말하는게 가족들을 조금이라도 안심시키는 방편이라고 생각했던것일까. 여하튼 꼬박꼬박 ‘선문법사’니 ‘창원회관장’이니 하는 그런 호칭으로 부르지 않고 ‘강성희씨’라며 자신의 동생을 찾는 전화를 몇 번 해온적 있는 여인. 그런 여인과 통화경험이 준식에게 있었던 것이다. - 어쩌면 여인은 저와같은 호칭(선문법사,창원회관장,순도사 등)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는 전혀 없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러고보니 기억에 강성희 여사, 아니 선문법사에게 위로 언니가 한명은 아니고 몇 명 더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짐작도 된다. 일단 기억에 선문법사에게 ‘오빠’가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한 것 같고 ‘조카’라는 이 몇몇이 92년인가 93년쯤에 마침 ‘청운회 동계(겨울) 수련대회’가 있을 때 찾아온적이 있었다. - 대진교의 청운회는 1년에 두차례(동,하계 각기 한차례) 전국단위의 ‘수련대회’ 형식의 모임을 갖는다.  

 그네들이 선문법사를 개별적으로 만나러 온 것인지 아니면 수련대회에까지 참석할 의사가 있었던것인지까진 파악하지 못했으나 여하튼 나이는 20대 초반 정도로 추정되는 총 세명의 여인이었고 그중 두명이 선문법사의 ‘조카’ 그리고 한명이 ‘조카의 친구’ 라고 했다. 헌데 조카든 조카의 친구든 그런 조카가 존재하려거든 선문법사에게 50년대생 언니 외에도 40년대생 언니가 한두명 정도 더 있어야 한다. - 선문법사와 종종 그렇게 통화하던 ‘언니’는 나이터울이 얼마나지 않는 그런 언니라고 들었다. 

 헌데 상식적으로 50년대 초반이나 중반에 탄생한 여인이라면 70년대 초반 태생 자녀가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50년대생 언니 외에 40년대생 언니가 한두명 더 있었다는 소린데 어쨌든 그네들은 자신의 동생이 그런 군소규모 종교단체에서 말단 심부름 정도나 하는 위치에 있는 것으로 아는 듯 했고, 헌데 좀 뜻밖에도 90년대 초반에 한번은 그런 선문법사의 조카딸 두명이 자신의 친구 한명까지 더 동행해서 청운회 수련대회가 있을 때 창원회관을 찾은적이 있다는 소리다. 

 기억에 아마 선문법사 어머니 되시는분이 90년대 중반쯤에 세상을 떠났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40-50년대생 딸이 3-4명 정도 되는 90년대 중반 당시의 70-80대 정도 된 노모라면 여하튼 그 정도의 가족관계가 충분히 합리적 추론이 가능하다. 선문법사 어머니의 문상때는 아마 다른 법사와 순도사님들을 ‘수행원’ 자격으로 다른 총무원의 교사 두명과 함께 ‘모시고’ 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앞서 언급한바와 같이 50년대 후반 태생인 선문법사가 그 당시 대진교 법사,순도사중엔 막내급이었고, 나머지 법사,순도사들은 거의다 30-40년대생으로 그때 이미 연세 50-60대에 이른 어른들이었다. 

 여하튼 그렇게 선문법사 모친상에 문상을 드리러 간 것이 어느덧 25년도 더 되는 옛날일인데 그리고 실로 최소한 25년 이상의 세월이 지나 준식은 옛 청운회 시절 동료이자 동지 몇몇과 함께 이번엔 선문법사의 상에 문상을 드리러 가게된 것이다. 

 “ 저기... ” 

 김철규는 물론 박성호나 이종태도 아마 그때까지 ‘선문법사’로만 알고있지 실명은 모르는 듯 해 준식이 일러주는수밖에 없었다. 영안실의 안치된 시신과 그 유가족 명단을 준식이 직접 일일이 확인했고 한참만에야 선문법사 아니 강성희 여사의 영안실에 당도할 수가 있었다. 50년대 후반 태생이니 그녀도 어느덧 나이 60을 넘긴 나이. 평균수명이 점점 높아진다고는 하지만 사람의 나이가 60이 넘으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로 다를바가 없는것일까. 원래 허약하거나 병치레가 잦았든 또는 과로나 젊은시절 무리를 너무했든 또는 일찌감치 질병이 찾아왔던 60을 조금 넘겨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지금도 생각보다 제법 있다. 어쨌든 그렇게 선문법사도 나이 60을 조금 넘겨 이와같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막상 영안실에서 영정사진을 마주대하니 준식은 착잡한 심경에 사로잡혔다. 대진교 시절 선문법사와의 이런저런 애증의 사연들이 순간 한편의 하이라이트 영화처럼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라고나 할까. 살짝 옆을 보니 김철규나 이종태,박성호등의 분위기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무엇보다 영정사진의 선문법사 얼굴은 그래도 의외로 나이가 좀 든 뒤의 사진을 가져다 놓았다. 여하튼 선문법사가 창원회관장 시절의 나이가 대략 30대. 물론 아무리 그래도 준식보다는 최소한 열두살 이상 많은 여인이니 준식의 눈에는 ‘젊은여성’이라기보단 그냥 ‘아줌마’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가령 천도제나 기선,법회등의 종교의식을 치르느라 법복(法服 : 대진교의 법복은 일반적으로 흰색 두루마기다. 종종 검은색 두루마기를 착용하기도 한다.)을 입고 있을때는 제법 장엄하기도 했으나 사복을 입고 일반적인 업무를 볼때는 그냥 나이좀 많은 여성 ‘직장간부’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 저어... ” 

 절을 올리고 유가족에게 다가가보았다. 대충 나이와 분위기로볼 때 선문법사의 언니로 추정되는이에게 다가가보았다. 먼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조문의 인사에 이어 문상객으로 찾아온 자신들의 신분을 밝혀야하니 화두를 이와같이 떠났다. 

 “ 예전에 저와 전화통화 몇 번 하신적이 있었을겁니다. ” 

 “ 예 ? ” 

 준식의 말을 바로 못알아듣는지 60대로 추정되는 여성 하나가 좀 황당한 듯 바라보았고 준식의 설명이 이어진다. 

 “ 제가 창원회관에서 일할 때...‘강성희씨’를 찾는 전화를 몇번 받은적이 있거든요 

  . 그때 아마 ‘강성희씨 언니’ 되신다고 말씀하신 것을 제가 기억해서... ” 

 “ 아아... ” 

 그제서야 여인은 그때일을 기억하는것일까. 어떤 인연이 되었든지간에 이렇게 문상객으로 찾아온 일행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며 여인은 접대실로 윤준식 일행을 안내 곧 식사를 대접하게 했다.



- 2회에 계속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