훼드라의 세상만사

whaedra.egloos.com

포토로그



걸그룹 팬픽 - 블랙핑크 제니 (1) 걸그룹 팬픽 10 (레벨,블핑)



 

                                           부제 : 채영이 이야기 

                                                              - 응답하라 ! 1985 

 


 가만보면 요즘 젊은 세대들이 1970-80년대에 대해 크게 오해하고 있는게 있는 것 같은데 70-80년대가 무슨 조선시대,고려시대 같은 신분제 사회가 아니다. 70년대면 이미 경부고속도로 만들어지고 포항제철 건설된 시대고 TV에선 ‘여로’나 ‘아씨’ 같은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되어 그 시절 어르신들에게는 바로 자신들이 자라온 일제-6.25때 일들을 생각나게 하여 눈물짓게 만들기도 했던 그런 시대다. 그리고 1980년대로 들어가면 서울올림픽 개최하고 프로야구가 개막된 그런 시대다. 조용필,전영록,이선희 같은 가수들이 오빠부대,언니부대를 본격적으로 몰고다닌 그런 시대다. 

 가령 근래에 방영된 어느 공영방송사 주말극에선 70-80년대에 10대 소녀였던 것 같으나 가정형편 때문에 상급학교(고등학교 이상)를 진학하기 못하고 가정부로 살던 여성이 그 시절 자신이 일하던 집 비슷한 또래 여성에게 여전히 ‘아가씨’,‘아씨’ 이런식으로 부르는 내용이 나오는데 적어도 그 정도 사회분위기는 아니었다는 소리다. 

 실제 80년대 부의상징(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서울 강남에서 초등학교,중학교 시절을 보내는등 사실상 80-90년대 도합 10년 넘게 강남에 살았던 필자의 기억에, 특히 어린시절 필자보다 조금 더 잘사는 이른바 ‘부잣집’에 가보면 그 집 파출부 혹은 가정부를 그 집 어른들이 자신들의 미성년 자녀들에게 ‘이모’나 ‘언니’ 또는 ‘누나’라고 부르게 하는 모습을 많이 볼수 있었다. 물론 각자 집안의 윤리기준이나 가치관에 따라 차이는 있었겠지만, 적어도 필자의 기억엔 행여 자기네 집안 자녀들이 파출부나 가정부를 함부로 막 대하지 않게 하고 파출부나 가정부도 한 가족처럼 친근하게 지낼수 있도록 가급적 그런 호칭을 권고했던 것 아닌가 짐작이 된다. 

 덕분에 본의아닌 실수를 한적도 있었다. 실제 그렇게 파출부나 가정부를 그 집 아이들이 ‘이모’나 ‘언니’라 부르는 경우가 많이 있었는데 그 시절 어울리던 한 또래 학생 집에는 역시 ‘고모’라 불리는 그리고 그 집에서 일종의 파출부 내지 가정부 역할을 하고 있는 그런 집이 있었다. 자녀가 가장 막내인 아들이 필자와 비슷한 또래였고 그 위로 중학생,고등학생 누나가 각기 한명씩 있는 총 2녀1남 3남매가 있는 집안이었는데 그 집안에서 ‘가정부’ 역할을 하는 여성(* 당시 대략 40대 정도로 추정)을 그곳에선 자녀들이 ‘고모’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래서 필자의 지레 짐작엔 실제 파출부나 가정부를 ‘이모’나 ‘언니’라 부르는 경우가 그 시절에 많았으므로 그 집의 경우에는 가정부 아줌마를 자녀들이 ‘고모’라고 부르나보다 생각하고 (편의상) 고모라 불리는 가정부 아줌마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헌데 시간이 많이 지난뒤에 알게된 사실인데 그 여성의 경우에는 그 집 주인의 여동생인 실제 자녀들의 ‘고모’였던 것이다. 젊은시절 좀 남다른 상처가 있어서 정상적인 사회생활이나 결혼생활을 하지 못하고 오빠집에서 아이들(조카들) 돌보며 그렇게 사실상의 가정부,파출부 역할을 해주며 그렇게 생계를 유지하는 사례였던 것이다. 

 어쨌든 그 경우는 다소 특이한 사례로 봐야 할것이고 그 외에는 대개 그 시절 필자 주변에 필자보다 ‘조금 잘사는’ 부잣집에선 대개 아이들이 자기네 집 가정부나 파출부 아주머니를 이모나 언니 혹은 누나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바로 그 시절 필자와 직,간접적으로 인연이 있던 사람 이야기나 사연은 아니고 한 두계단 정도 건너서 들어 알고있는 그런 사연 하나를 소개할까 한다. 두계단 정도 거쳐서 전해듣게된 사연인고로 전달 과정에서 왜곡이나 오류가 있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고, 다만 어쨌든 그런식으로 우연히 전해듣게된 어떤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사실 30%와 가공 70%를 섞어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한다. 

 채영이 역시 그 시절(80년대 중반) 흔히 보는 강남의 잘 사는집 가정부로 일하는 20대 중반의 여성이었다. 주인아저씨는 그때 이미 50이 다된 그리고 그런대로 잘 나가는 제지공장을 운영하는 중소기업가였는데 슬하에 세명의 자녀가 있었다. 고등학생 아들, 중학생 둘째. 그리고 막내로는 초등학교(당시엔 국민 학교) 2학년 정도 된 딸이 하나 있었는데 - 그러니 막내딸과 둘째오빠 사이엔 나이터울이 좀 진다. 여하튼 그 집에선 역시 ‘가정부 언니’를 아이들에게 ‘누나’나 ‘언니’라 부르도록 가르치고 있었다. 

 고등학생인 장남은 이름이 경태라고 했는데, 대체로 공부는 잘 하는편인 모범생이라고 들었다. 그리고 둘째 경수는 – 세상의 모든 둘째가 흔히 그렇듯 – 첫째와 막내 사이에서 좀 치이는 편인지 제멋대로 자유분방하게 지내는 그런 아이였고 경옥이라는 초등학생 막내딸은 아직 어려서 응석받이고 철없는 그런 집이었다고 한다. 여하튼 아버지가 나름 엄하다면 엄한 성격이라서인지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채영이’란 가정부는 누나라고 부르는 그런 집안이다. 가령 친구들을 집에 데리고 오게되면 ‘얘들아, 인사해. 우리 채영이 누나야’ 이런식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보면 가정부가 아니라 정말로 그 친구의 친누나라도 되는것처럼 오해할수 있게 그런식으로 소개를 했던 것이다. 

 헌데 유독 막내 경옥이만은 그렇지 않았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철이 없어서 그런지 초등학교 2학년이니만큼 학교는 제발로 오갈수 있어도 그 외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일상은 – 가령 옷을 갈아입는다던가 밥이나 간식을 챙겨달라고 하던가 - ‘채영이(아버지 가르침대로라면 ‘언니’라고 불러야 하는)’에게 대체로 의지하거나 부탁하는 그게 경옥이였다. - 아직 어리고 막내니 충분히 이해한다면 이해해줄수 있는 나이의 일이긴 하지만 – 가령 이런식이었다. 

 “ 얘, 채영아. 나 옷좀 벗겨줘. 빨래좀 그리고 빨리해서 널어줘. ” 

 “ 채영아...가정부...나 배고픈데 라면이라도 끓여줄래 ? 아니면 계란후라이라도... ” 

 물론 아버지가 나름 엄하다면 엄한 분이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계실때는 함부로 그렇게 하지 못하지만 평상시 아버지가 안 계신 평일 낮에 학교에서 돌아오면 그렇게 ‘채영이 언니’를 진짜 하녀 부리듯이 하는 그게 막내 경옥이였다. 물론 아무리 응석받이라도 이미 아버지의 가르침이 그와같고 오빠들이 이미 채영이를 ‘누나’라고 부르며 공손하게 예의를 갖춰서 대하는데 그런 오빠들의 눈에 버젓이 그러고 다니는 경옥이가 눈에 안 뜨일수가 없다. 그래서 오빠들은 종종 그런 경옥이에게 경고를 주기도 했다. 

 “ 경옥이 너 근데...언제까지 누나한테 그런식으로 부를거냐 ? ” 

 “ 그럼 뭐라고 불러 ? ” 

 “ 언니라고 부르라고 아버지,어머니가 몇 번이나 말씀하셨니 ? 그런데 넌 정말... ” 

 참 해도해도 너무한다는 듯 나무라는 것은 모범생 큰오빠도 아닌 자유주의자(?) 둘째오빠였다. 그 나무람은 계속된다. 

 “ 너 채영이 누나가 너한테 몇 살차인지는 알기나 해 ? 채영이 누나가 지금 나이가 

  몇인지 아냐구 !!! ” 

 “ 내가 그걸 알게 뭐야 ? ” 

 “ 스물다섯살 !!! 너랑 열여섯살 차이랴구. 아닌말로 옛날같으면 그 만한 나이면 이 

  미 시집가서 진짜 너만한 딸이 있을수도 있는 그런 누나야. 그걸 알기나 해 ? ”  

 “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야 !!! ” 

 ‘첫사랑만 성공했어도 너만한 아이가 있을수도 있다’는 식의 이야기는 사실 그 시절(80년대) 대학생 형들이 장난처럼 만들어낸 이야기고 사실 80년대에 10대라도 10대 중,후반에 시집,장가가던 조선시대나 구한말 이야기는 도무지 실감이 안 나는 그런 세대다. 따라서 그것도 아직 초등학교 2학년인 어린 경옥이가 ‘채영이 누나 옛날같으면 너만한 딸이 있을수도 있는 그런 누나다’는 식의 말 실감은커녕 도무지 마음에 와닿을수가 없는 소리고 경옥이는 오빠들의 그런 나무람을 전혀 귀담아듣지 않았다. 

 “ 너 하여튼...한번만 더 채영이 누나한테 그런식으로 말하면 바로 아빠한테 이른다 

  !!! ” 

 “ 싫어 !!! 아빠한테 이르든 말든 오빠 마음대로 해 !!! 어쨌든 난 그런거 싫단말야 

  !!! 가정부한테 언니는 무슨 언니야 !!! ” 

 


 40평이 넘는 김진동 사장과 백승주 여사 내외의 아파트. 다시말해 채영이가 가정부로 일하는 주인 아저씨,아주머니의 집은 방이 모두 네 개가 있다. 이중 가장 큰 방을 김진동과 백승주 내외가 침실로 쓰고 있고 아들인 경태와 경수가 건너편의 한방을 그리고 막내딸 경옥이가 오빠들 방 옆방을 쓴다. 그리고 가정부 채영이가 나머지 여분의 방 하나를 쓰고 있는데 채영이의 방은 아무래도 그녀가 움직이기 편하게 부엌 가까이 위치해있다. 그리고 욕실은 침실과 가까운쪽에 하나가 있고 아이들 방 사이에 하나가 있어 채영이의 경우는 자신의 방에서 가까운 침실쪽 가까이 있는 욕실을 쓰게된다. 욕실이야 뭐 가까운곳에 위치한 것을 자기 편한대로 쓰면 되는것이겠지만 여하튼 때로는 나이많은 주인아저씨와 마주칠일도 있으니 채영이로선 어느정도 정신적 부담이 되는 일이기도 하리라. 

 채영이가 김진동 사장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한 것은 3년전부터. 헌데 원래 김진동 내외는 어느덧 사춘기로 점차 자라나는 아들 경태와 경수를 각기 다른방을 쓰도록 하고 아직 유치원도 다니기 전인 어린아이인 경옥이를 가정부 채영이가 직접 돌보도록 둘이 한방을 쓰도록 했다. 허나 경옥이가 ‘냄새나는 가정부랑 같이 자기 싫다’며 하도 칭얼대고 우는통에 하는수없이 경태와 경수를 그냥 둘이 계속 한 방을 쓰게 하고 아직 어린 애기인 경옥이는 한 1-2년을 더 진동과 승주 내외가 안방에서 함께 재운뒤 경옥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은 무렵부터 혼자 따로 자도록 남은 하나의 빈방을 내주었다. 헌데 아무리 그렇기로 아직 유치원도 들어가기전의 어린아이가 가정부 언니랑 같이 자기 싫다며 그렇게 칭얼대다니. 철이 없는 것으로 봐야하는것인지 당돌한 것으로 봐야하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헷갈리는 상황이긴 하다. 

 헌데 채영은 그렇게 김진동 내외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며 또 다른 당혹스러운 상황에 직면해야만 했다. 아이들에게 채영이를 ‘누나’나 ‘언니’로 부르게 하며 한 가족처럼 지내도록 하는것까진 그렇다 치더라도 채영이가 이 집에서 살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무렵부터 백승주 여사의 좀 이해할수 없는 행동이 시작된 것이다. 

 “ 채영이 목욕하니... ? ” 

 하루 일과를 마치고 욕실에서 씻고있는 채영이. 헌데 승주가 그 욕실문을 두드린 것이다. 이미 밤늦은 시간이건만 채영은 주인 아주머니가 뭔가 시키실 일이라도 급히 생겼나 싶어 바로 대답했다. 

 “ 예, 사모님. 왜요 ? ” 

 “ 얘는 뭐 그렇게 화급하게 대답은 하고 그러니. 그냥 엄마처럼 편하게 생각하라니 

  까... ” 

 “ ??? ” 

 “ 실은 아줌마가 채영이 등이나 한번 밀어주고 싶어서... ” 

 “ 예에 ? ” 

 가정부를 집에 아이들에게 ‘언니’나 ‘이모’라고 부르게 한다거나 가족처럼 친하게 지내도록 하게하는것까지야 그 시절 가정부나 파출부를 고용한 부잣집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렇기로 이런 경우는 웬만해선 잘 없는 정상적이라고 볼수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어린아이라면 모를까. 채영이는 이미 20대 성인의 몸. 아무리 같은 여자끼리라고 해도 그것도 주인집 사모님이 가정부인 자신의 등을 밀어주겠다니. 이래저래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 처음엔 그래서 기겁하며 손을 내저었던 채영이지만 승주는 한사코 그런 채영이의 등을 보고야 말았다. 

 “ 어쩜... ” 

 처음엔 당혹스러웠지만 그저 아주머니가 원래 좀 과한 친절을 베푸는 그런 분이로구나 생각하곤 그런대로 이해하려 했던 채영이. 헌데 확실히 승주의 행동은 뭔가 정상적이 아닌것처럼 보였다. 

 “ 채영이의 등은 어쩜 이리도 하얗고 매끄러울까... ” 

 “ 아...아주머니... ” 

 대체 왜 이러는것인지. 뭔가 당혹스럽고 이상한 생각도 들 수밖에 없는 상황. 헌데 승주는 그런 채영의 등을 한동안 어루만져보기도 하고 또 어떨땐 자신의 뺨을 대보기도 하고 그러다 심지어 흐느끼기까지 했다. 

 “ 어쩜 이렇게 채영이는...그 흔한 점이나 흉터,상처자국 하나 없이...이렇게 매끄러 

  울수가 있어 ? 우리 채영이는...흑흑~~~!!! ” 

 “ 아...아주머니...왜 이러세요 ? 어디 편찮으세요 ? ” 

 아무래도 승주의 행동이 뭔가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아 이와같이 나오고 있는 채영. 허나 승주는 이렇게 대꾸한다. 

 “ 아냐...그냥 가만히 있어줘. 아줌마가 우리 채영이...진짜 딸이었으면 어땠을까...그 

  런 생각이 들어서 그래. ” 

 “ 여보, 거 뭐하는게요 ? ” 

 결국 이건 아니다 싶은지 아내를 제지한 것은 남편 진동이었다. 졸지에 중년의 아저씨이기도 한 사장까지 욕실을 들여다보는 상황이 되어 채영은 더더욱 당황스러워 몸을 한쪽 구석으로 숨겼지만 진동은 일단 자신의 아내부터 욕실에서 끌어낸다. 

 “ 이제 그만좀 해...당신 점점... ” 

 “ 왜 그래요 여보 ? 전 그냥...채영이가...채영이가... ” 

 “ 그만 좀 해 !!! 채영이 당신 딸 아니잖아 !!! 그런데 당신이 자꾸 이러면...진짜 나 

  중에 큰 문제 생긴다고 !!! 알기나 해 !!! ” 

 “ 여보... ” 

 대체 뭘 걱정하고 있는것일까. 일단 침실로 아내를 데려와서 나무라는 남편을 승주는 원망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곧 그녀는 울음을 터트리고 만다. 

 “ 여보... ” 

 그런 아내를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는 진동. 어쨌든 달래주긴 해야할 것 같아 조심스레 입을 연다. 

 “ 당신이 경숙이 때문에 그러는거 잘 알아... ” 

 “ 그걸 아시는 분이 왜 !!! ” 

 ‘그걸 알면서 왜 그러냐 ?’는 듯 발끈하고 있는 승주. 진동은 눈을 한번 질끈 감아본뒤 이와같이 말을 이어간다. 

 “ 경숙이...아마 죽었을거야. 살았다면 진작에 찾았겠지. 헌데...그런 어린아이가...그 

  시골구석에서 대체 뭘 할수 있었겠어 ? 20년이 지나도록 못 찾았으면 경숙이는 이 

  미 죽고 이 세상에 없는거야 !!! ” 

 “ 여보, 당신 도대체가... ” 

 어쩜 그렇게까지 나올수 있느냐며 승주의 원망찬 울음소리는 계속되고 있었다. 진동은 다시금 한숨을 길게 내쉬며 아내를 달래려는 말을 다시금 입에 담는다. 

 “ 당신 정말 이러지 마. 당신 자꾸 이러면 더 큰 병으로 도질수도 있다고 의사선생 

  님도 말씀하셨잖아 !!! ” 

 “ 이제 당신까지 절 정신병자 취급하시는거에요 ? ” 

 이런 상황에서 다니는 병원이라면 확실히 육체의 질병이 아닌 정신적 문제일 가능성이 높으리라. 더욱이 80년대 중반 정도면 아직 정신질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게 크던 시절. 여하튼 승주는 아직 할말이 남았는지 울부짖는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어간다. 

 “ 채영이도...경숙이랑 똑같아요... ” 

 “ 여보... ” 

 “ 나이도 살아있으면 딱 지금 채영이 나이겠지만...경숙이도 그럤어요. 등에도 그 흔 

  한 점하나 상처하나,흉터자국 하나 없었는데...세상에...드라마나 영화 같은데서 어 

  릴 때 헤어진 가족 찾는 이야기 보면...그런 점이나 흉터자국 갖고 잘도 찾아내는데 

  우리 경숙인 어떻게 그렇게 그 흔한 상처자국이나 점하나 없이 그렇게 하얗고 매끄 

  러웠는지 몰라...흑흑흑흑~~~!!! ”  

 “ 여보 그건 경숙이가 아직 애기였을때니 당연한거지 뭘 그러오 ? 세 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아이가 그런 상처나 흉터자국이 날 일이 뭐가 있었겠나 ? ” 

 “ 하다못해 점이라도 있었으면 그런 특징으로라도 찾을수 있었을거잖아요 !!! ” 

 유전자 감식 기능이 생기려면 아직 한참 남은 시절이니 만약 이때 헤어진 가족을 찾는다면 어린시절 기억이라던가 부모와 고향 또는 가족,친지 이름 혹은 어떤 신체적 특징 – 그것이 어떤 불구가 있었든 혹은 점이나 상처,흉터자국 같은게 있는 경우든 - 이런 것을 중심으로 확인할 수밖에 없던 시대다. 그래서일까. 세 살때 잃어버린 딸 경숙이가 하필 등이든 어디든 그 흔한 점이며 흉터자국 하나 없었던 것을 새삼 원망하고 있는 승주. 그녀의 말이 계속 이어진다. 

 “ 심지어...6.25때 헤어졌다는 이산가족들도 다 그런 상처자국,흉터자국 그런거 찾아 

  내서 가족인지 자식인지 그거 다 확인하고 그러던데...어떻게 우리 경숙이는...어떻 

  게 우리 경숙이는 그런 흉터자국 하나 점하나가 없는지 몰라 !!! 엉엉엉엉~~~!!! ” 

 85년이면 6.25때 헤어져서 남한내에서 흩어져 살던 ‘이산가족’을 찾는 방송이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들에게조차도 엄청난 충격과 감동을 안겨주었던 그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방송이 있은지 아직 2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 따라서 그때 그 방송의 기억이 아직 많은 이들에게 생생하던때이니 승주는 세 살때 잃어버린 큰 딸 경숙이에 대한 원망을 이와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하다못해 6.25때 부모,형제 잃어버린 그런 사람들도 30년전 상처나 흉터자국 혹은 어떤 신체의 불구 같은 특징으로 가족,친지 잘도 찾더니만 20년전 잃어버린 우리딸 경숙이는 왜 하필 그런 흔한 신체적 특징 하나 없었는지. 그걸 원망하면서 마치 그 20년전 잃어버린 딸 경숙이의 등판처럼 흔한 점하나 흉터자국 없이 한없이 매끄럽고 보드랍기만 한 채영이의 등을 부둥켜안고 그렇게 흐느겼으리라. - 사연을 알수 없는 채영의 입장에선 소름돋는 상황이었으리라.  

 


 사실 바로 2년전인 1983년에 김진동이 좀 푼수같은 짓을 한적이 있다. 헤어진 자식을 찾는 부모의 심정을 생각한다면 미안한 표현이긴 하지만, 그래도 뭔가 어리석은 판단을 한것같다는 지적만은 피할 수가 없다. 실은 바로 그 ‘이산가족 찾기’때 김진동도 20년전 잃어버린 딸을 찾게해달라며 가족찾기 신청을 한 것이다. 

 사실 6.25때 헤어진 이산가족을 찾아주는 기획을 했던 공영방송 KBS 입장에선 이 부분이 가장 골머리를 앓던 부분이기도 했다. 애초에 이산가족 찾기 기획 자체가 6.25 사변 33주년을 맞아 아직 남한내에조차도 전쟁때 헤어진 가족을 찾지못한 경우가 많다며 이를 일깨워주기 위한 기획을 한것인데 이것이 뜻밖의 반향과 화제를 불러모았던 것이다. 한달여의 이산가족 신청기간동안 총 10만여명의 가족찾기 신청자가 나와 이중 10%에 해당하는 1만여명의 이산가족이 가족을 만나는 행운을 누렸지만 사실 이때 만난 이산가족의 상당수는 전란중에 뿔뿔이 흩어지긴 했지만 그 시절의 교통,통신은 지금과 달리 많이 불편하던 시절이라 헤어진 가족을 찾기가 쉽지 않아 30년 넘게 사실상 포기한 상태였다가 그야말로 ‘공영방송’이 30년 세월이 지나 그들에게 가족을 만나게 해주는 행운을 누리게 해줄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 이때 가족을 만난 경우의 상당수는 같은 남한내에서 전쟁때 뿔뿔히 흩어졌거나 6.25 무렵에 월남을 하긴 했지만 이후 가족들 소식을 알수 없었던 경우. 실제 이산가족 신청자의 상당수가 6.25때 월남한 실향민이거나 전쟁 와중에 남한땅내에서 가족을 잃어버린 경우였고, 월북이나 납북처럼 북으로 갔을 가능성이 있는 경우엔 차마 대놓고 가족을 찾겠다고 나오기는 힘든 사회 분위기였다. - 허나 그런 경우에도 혹시나 하는 실날같은 희망을 갖고 가족찾기 신청을 한 사례가 꽤 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남한내에 가족이 살고있을 가능성이 있는 경우에나 상봉의 희망이 있는것이지 북한으로 갔거나 북에 가족이 남아있는 경우라면 북한측이 이산가족 찾기 방송에 응해주지 않는한 가족을 만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일. 결국 남한내 이산가족만을 찾아주는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는 그런 한계가 있는 프로였다. 

 헌데 그것 외에도 뜻밖의 돌발변수가 하나 있었다. 바로 6.25때가 아닌 전쟁이 있은지 이미 한참 지난뒤에 심지어는 불과 수년전에 가출한 자녀나 이런 가족을 찾아달라는 신청자까지 줄을 이었던 것이다. 당황한 방송사측은 하는수없이 대략 한 50년대 중,후반까지라도 전쟁직후 여러 가지 먹고살기 힘든 시절에 입양을 보냈다던가 기타 사정으로 가족을 잃은 경우까지 신청자를 받아주기로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60-70년대는 물론 그 이후에 가족을 잃은 경우까지 신청자가 몰려들어 기껏 세운 6.25때 헤어진 이산가족 찾기 기획이 빛이 바랠수도 있는 상황에까지 몰렸다. 이산가족 찾기 신청자 접수가 한달만에 막을 내렸고 이산가족 찾기 방송 역시 반년정도 시간이 지난 11월말에 정식으로 막을 내린데는 이런 속사정도 어느정도 포함이 되어있다. 

 여하튼 문제는 바로 김진동도 이때 20년전 잃어버린 딸을 찾겠다고 신청을 한 것이다. 당연히 신청을 받는 접수처 관계자는 난색을 표했다. 

 “ 선생님, 63년에 딸을 잃어버리신거면 그땐 이미 전쟁 끝나고 10년이나 지난뒤의 

  일이잖아요. 그런데 그런 딸을 여기와서 찾겠다고 하시면 어떻게 해요 ? 여긴 6.25 

  때 헤어진 가족들을 찾아주는곳이에요. ” 

 “ 아가씨, 그러지말고 제발 사정좀 봐주십시오. 저희도 무척이나 애가타고 속이타요. 

  바로 20년전에 논산의 처가 과수원에 당시 세 살난 딸을 데리고 놀러갔다가 잃어 

  버린...그리고도 백방으로 찾아보려고 노력을 해도 찾을수가 없었던 그런 가슴아픈 

  사연입니다. 저희 부부에게는 무척이나 아픈 손가락이라구요. ” 

 아무래도 자연스레 큰 소리가 오갈 수밖에 없었고 주변의 다른 나이많은 이산가족 신청자나 이런 이들의 눈총도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6.25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라면 평균적으로 봐도 김진동보단 나이가 많은 사람들일 것 아닌가. 그러니 어떤이들은 ‘저런 철없는 친구’, ‘저런 몰지각한 사람 같으니...’ 하면서 혀를 차기까지 했고 그래도 김진동은 아랑곳이 없었다. 

 “ 그러지말고 제발...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러는것이니..제발 저희 부부 딱한 사정도 

  좀 봐주십시오 !!! ” 

 “ 따님을 세 살때 잃어버리셨다구요 ? ” 

 “ 네, 아가씨. ” 

 “ 세 살때면 애가 어떻게 기억을 해요 ? 그때면...선생님 저도 솔직히 세 살때 일은 

  거의 기억도 안 나요. 헌데 세 살때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가 그 일을 어떻게 기억 

  하겠어요 ? ” 

 “ 그래서 이렇게 신청을 하는거 아닙니까. 보니까 방송을 보면 고향은 물론 부모,형 

  제에 대해 아무런 단서도 없이 무작정 가족을 찾으러 나온분들도 적지 않던데... ” 

 “ 그분들은 전쟁때 부모,형제를 잃은 분들이니까 그렇죠 !!! 선생님은 전쟁 끝나고  

  10년이나 지난뒤 딸을 잃어버리신거라면서요. ” 

 20대의 젊은 접수창구 여직원과 이런식으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던 김진동. 대충 근처에 있는 사람들은 말다툼의 내막을 대충 알 것 같아 결국 비난의 소리가 쏟아졌다. 

 “ 거 참...젊은 사람이 철없이...거 뒤에 아직도 나이많은 어르신들 신청하러 온거 

  안 보여요 ? 여긴 6.25때 헤어진 가족 찾으러 온 사람들이에요. ” 

 “ 60년대에 잃어버린 딸을 왜 여기와서 찾아 ? 그런건 경찰서나 고아원 같은데 가 

  서 알아보던가 해야지 !!! ” 

 “ 거 어떤 아새끼래 자꾸 버릇없이 구네 ? 말로만 듣던 평양 박치기 맛 한번 보여 

  줘야 정신차리갔어 ? ” 

 결국 더 있다간 공영방송사 접수창구 복도 한가운데서 제대로 큰 망신을 당하거나 봉변이라도 당할 것 같은 분위기라 김진동은 결국 거기서 맥없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진동은 거기서 물러나지 않고 더 대담한짓을 감행했다. 작심하고 그 역시 동네 좀 큰 문구점에 가서 커다란 벽보용 용지를 하나 구입 가족, 더 정확히는 20년전 잃어버린 딸의 사연을 빼곡히 적어놓았다. 사실 세 살때 잃어버린 아이니만큼 적을만한 사연은 외가가 충남 논산이라는것과 바로 그 논산 외가 과수원에 세 살때 엄마,아빠랑 함께 놀러갔다가 잃어버렸다는 것이 전부지만 진동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큰딸을 잃고 수년이 지난 뒤에나 낳게 된 경태,경수,경옥 세 자녀(경숙에게는 동생이 될)에 대해서는 물론 자신의 할아버지,할머니는 물론 증조할아버지,고조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까지 그야말로 가족사를 커다란 벽보용 종이에 빼곡히 적어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 이산가족 찾기 창구에선 접수를 거절당한것이었으니 ‘접수번호 없음’이라고 당당하게 크게 적어놓고는 ‘만남의 광장’은 물론 KBS 방송사 근처 이곳저곳 이산가족들이 너도나도 하염없이 빼곡히 붙여놓은 벽보와 그와같은 가족들이 몰려나와 있는곳을 샅샅이 뒤져보며 돌아다녔다. 

 “ 여보, 여보 이러지마 !!! 당신 도대체 왜 이러는건데 !!! 제발 이러지마...여긴 우 

  리 있을데가 아니잖아 !!! ” 

 보다못한 아내 승주가 직접 그렇게 딸을 찾겠다며 방송국 근처를 매일같이 누비는 남편 진동을 말리러 왔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나 무안하고 민망한짓 아닌가. 사실 6.25때 가족을 잃어버린 경우라면 이 당시 나이 40-50대 정도면 전쟁때 잃어버린 형제나 부모 그 외 친척을 찾는 경우고 전쟁때 헤어진 자녀나 배우자를 찾는 경우면 나이 최소한 60은 넘긴 사람들이다. 헌데 그런곳에 이제 겨우 나이 40대 후반인 사람이 20년전 잃어버린 딸을 찾겠다고 나왔으니 다른 사람들 시선도 그렇거니와 당사자 입장에서도 무척이나 민망하고 무안한 일이 될 것이다. - 따지고보면 웬만한 강심장이나 철면피 아닌 다음에는 못하는 짓이다. - 그래서 아내 승주는 그런 남편을 말렸고 여의도 KBS 본관 건물 앞 한복판에서 한밤중에 부부간의 그런 말다툼이 이어졌다. 

 “ 여보 이러지말고 집으로 돌아가자. 창피하게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야 ? ” 

 “ 창피하긴 뭐가 창피해 !!! 부모가 잃어버린 딸 찾는게 뭐가 창피해 !!! 내가 내새 

  끼 찾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잘못된건가 ? 다른 사람들도 다 저기 저렇게 가족찾으 

  러 나와서 하루종일 방송사 일대를 돌아다니고 헤매다니는데 대체 내가 왜 안 돼 

  !!! ” 

 “ 여보, 저 사람들은 전쟁때 가족 잃은 사람들이고 우린 그런 경우 아니잖아. 우린 

  전쟁 끝나고 10년이나 지나서 애 잃어버린 사람들이야. 20년전 1963년에 당시 겨 

  우 세 살밖에 안 된 딸을 잃어버린거라구. 근데 전쟁끝난지 10년 지나서 잃어버린 

  애를 우리가 여기서 왜 찾아 !!! ” 

 “ 시끄러 !!! 이거 안 놔 !!! 난 그래도 여기서 우리 경숙이 올때까지 기다릴거야. 우 

  리 경숙이 찾기전엔 집으로 절대 못 돌아가 !!! 싫으면 당신 혼자 집에 돌아가 !!! 

  난 우리 경숙이 찾기전엔 이 여의도 KBS 방송사 앞에서 한발자욱도 못 물러나니까 

  당신은 그렇게나 알아 !!! ”



- 2회에 계속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