훼드라의 세상만사

whaedra.egloos.com

포토로그



걸그룹 팬픽 - 레드벨벳 예리 (3) 걸그룹 팬픽 10 (레벨,블핑)



 

                                      부제 : 박인수 장로님과의 대화록 

 


 “ 혹시 차도균 목사님에 대해서 들어본적이 있소 ? 최광일 권사 ? ” 

 최광일이 신앙생활을 한지가 어느덧 20년이 넘고 또 그간 틈틈이 이런저런 신앙서적이나 간증수기 같은것도 구해 읽어보곤 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웬만큼 유명한 대형교회 목사나 유명 크리스찬 가정에 대해선 한두번 정도 들어보거나 접해본 기억이 있다. 광일이 기억이 난다는 듯 이와같이 답한다. 

 “ OO교회라고 서울에서 가장 큰 감리교회를 이끌고 계신 목사님이 아니십니까 ? 

 ”  

 “ 허허...지금이야 그렇지만 차도균 목사의 오늘날과 같은 대형교회도 하루아침에 그 

  렇게 저절로 이루어진게 아니라오. ” 

 그러면서 차도균 목사(가공인물)가 개척교회에서부터 시작 오늘날과 같은 대형교회를 구축하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줄거리는 대략 이와 같았다. 6.25가 끝난후 당시 교육전도사 신분으로만 있던 20대의 젊은 차도균은 서울 강북지역의 한 작은 창고건물을 수리 그곳에 임시로 교회를 세우고 전도활동을 시작했다. 사실 전쟁직후니 서울이건 어디건 다 마찬가지로 무엇하나 남아나있는 것 없이 폐허가 되어있던 때였다. 이러한 때 일반인들이 먹고살기도 쉽지 않았을텐데 그 와중에 교회를 세우고 전도를 한다는 것 그 자체도 웬만한 근기가 아니곤 쉽게 할수 없는 일이긴 하다. 

 여하튼 차도균 전도사는 그 무렵 인근에 전쟁통에 남편이나 부모를 잃은 과부나 어린아이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이 판국에 무슨 교회냐 ?’ 하는식의 이야기가 대번에 나올 것 같아 처음에 차도균은 부족한 실력으로 죽이라도 쑤워 남편이나 부모를 잃은 과부와 어린아이들을 대접하기 시작하며 그들을 교회로 하나하나 인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차도균 목사의 교회는 그렇게 창고건물을 개조한 작은 예배당에 열명도 채 되지 않는 과부 혹은 고아신세인 성도들부터 시작 교회개척을 하게된 것이다. 무엇보다 다들 어렵고 힘들때라서인지 일주일에 한번 듣게되는 설교가 그런대로 심령에 위로가 되어서인지 그런식으로 교회를 찾아오는 과부와 고아들이 하나하나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 목사님...목사님 계신감유 ? ” 

 그렇게 교회개척을 시작한지 한 2-3년쯤 지난 어느날이었다. 하루는 한밤중에 자신의 거처를 찾아온 이가 있었다. 거처나 마나 별도의 사택도 없이 애초 교회로 지은 창고건물 한쪽을 적당히 칸막이를 해서 자기가 먹고잘 방을 만들어놓은건데 웬 젊은 과부 하나가 그 시간에 그 방 앞까지 와서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무슨일인가 놀란 차도균은 일단 눈을 비비고 방문을 열어보았다. 

 “ 아니, OOO 자매님. 대체 이 시간에 무슨일로 ? ” 

 일단 자기교회 성도임을 한눈에 알아본 차도균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더더욱 놀라와했고 그 당시 대략 다섯 살정도 되는 아이를 키우던 젊은 과부인 그녀는 이렇게 울부짖으며 말했다. 

 “ 목사님, 어쩌면 좋아유. 저희애가...저희 OO이가 열이 불덩이 같구먼유. 이를 어쩌 

  면 좋아유. ” 

 그 자매에게 다섯 살 정도 된 아이가 있다는 것은 차도균 목사도 알고 있었고 일단 급한김에 30대 초반 정도의 젊은 과부이기도 한 그녀에게 손잡혀 이끌려 바로 그녀가 사는집으로 가보았다. 가보니 자매의 아이는 확실히 상태가 심상치 않았고 그러나 목사가 의사도 아닌이상 솔직히 난감한 일이었다. 이 시간에 어디 병원이 열려있는곳이 있을지 확실치도 않았고 대체 뭘 어찌해야할지. 일단 도균은 아이를 업히라고 해서 아무곳으로나 무작정 달려보았다. 

 “ OO아, OO아 아이구 이를 어쩌면 좋냐 OO아. ” 

 일단 그저 단순한 감기몸살 정도려니 지레짐작한 도균은 병원을 갈 수 없는 상황이라면 약을 구할만한곳이라도 있나 백방으로 찾아보았다. 여하튼 그 시간에 갈 수 있는 병원이나 열려있는 약국도 사실상 없었고 그때 뜻밖의 구원의 손길을 하나 만났다. 

 “ 무슨일이십니까 ? ” 

 병원이든 약국이든 찾지를 못해 안달이 난 20대 후반의 젊은 목사와 30대 초반의 과부. 어린아이를 데리고 있으니 모르는 상황에서 멀리서 본다면 부부인가 오해를 할수도 있는 그런 상황이기도 하다. 여하튼 뭔가 심상찮음이 느껴져서일까. 마침 지나가던 어떤이가 그들에게 다가와보았다. 

 “ 아니 저...뭐 별일이라기 보다는...실은 이 아이가 아파서 병원을 데려가든...약을  

  먹이든 어떻게 해야할텐데... ” 

 헌데 그야말로 하나님의 도우심이라고나 할까. 마침 그렇게 다가온 사람이 의사는 아니었지만 의대생이었다. 서울에서 꽤 유명한 의학대학에 다닌다고 하는 그 청년은 일단 차도균 목사와 과부를 자신의 처소로 안내했다. 청년은 일단 진료를 해 보았고 다행히 큰 병은 아닌 듯 했고 역시 감기몸살 증상이 좀 심한 그정도인 듯 했다. 마침 청년의 집에 상비약도 좀 있어 그것을 아이에게 먹여 다행히 상태가 좀 나아졌고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날이 밝아서 큰 병원으로 아이를 데리고 가 보았고 병원에선 상태가 아직 안정적이진 않으니 한 며칠정도 입원을 시키는게 어떻겠냐고 권해 그렇게 2-3일 정도 입원을 한 뒤 과부의 다섯 살난 아이는 말끔히 나을수 있었다. 

 차도균 목사의 젊은시절 목회하는 모습이 이러하였다. 설교만 하는 목사님이라기 보단 그야말로 성도 하나하나 어렵고 딱한 사정을 일일이 세심하게 보살피는 그런 목자였다고나 할까. 어떻게 보면 아직 성도도 그리 많지 않은 작은 개척교회 시절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화일수도 있지만 여하튼 그 시절의 차도균 목사는 하나하나 그와같이 지성을 다해 성도들의 크고작은 어려운일을 직접 나서 보살피고 경우에 따라선 상담도 해주고 몸이 아픈 성도는 직접 병원에 데려다주기도 하고 금전적인 어려움에 빠진 성도는 자신이 직접 나서 역시 그 어려움을 해결해줄 방법을 알아보기도 하는 이 시절의 차도균 목사의 모습이 그리하였다. 

 “ 그렇게 시작한 목회활동이라 차목사의 열성적인 모습이 알려져 점차 차목사의 교 

  회를 찾는 성도들이 하나하나 늘어나기 시작했지. 그러다 60년대 초반쯤이던가. 마 

  침내 차목사의 교회는 창고교회 신세를 벗어나 조금 큰 성전을 지어 이전을 했어.  

 ” 

 창고교회를 지은게 전쟁 직후의 일이니 그보다 좀 큰 교회를 지은게 60년대 초반이면 그때로부터는 7-8년정도 지났을때의 일일 것이다. 다만 이때까지만 해도 지금과 같은 ‘4층짜리 상가건물’ 이런곳은 잘 없었을때니 그런곳으로 교회를 이전하게 된 것은 아니고 여하튼 그전까지 창고건물안에 적당히 칸막이나 좀 해서 자신이 잘 방과 성도들이 주일날 와서 자신들끼리 교제할수 있고 식사도 할 수 있는 방 그 정도의 구분만 해서 꾸려갔던 교회보다는 좀 사정이 나아진 최소한 예배당과 교육관 그리고 식당 정도는 구분할수 있는 그 정도 규모의 교회로 성장을 해나갔던 것이다. 

 


 그렇게 열심을 다해 목회에 임하던 초창기의 차도균. 허나 그래서인지 오히려 혼기를 놓쳐 30대 후반이 되도록 장가를 가지 못했다. 그래서 이를 안타깝게 여긴 몇몇 성도들이 주선 차도균 목사를 선을 한번 보도록 했다. 차목사의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지 어느덧 몇 년정도 된 40대 집사의 지인 집안의 딸과 맞선을 보게 되었는데 그 집안 역시 6.25때 남편을 잃은 여자가 이후 딸 넷을 키우며 신앙생활을 해온 그런 믿음의 집안이었다. 그 집안 막내딸과 선을 보게된 차도균. 대충 이런 대화가 오갔다. 

 “ 어머님께서 그동안 딸 넷을 키워오시면서 내심 그런 생각을 하고 계셨었어요. 딸 

  넷중 한명 정도는 목사님 사모님으로 만들고 싶다는... ” 

 꽤 독실한 신앙심을 가진 사람중에 종종 그런생각을 하고 있는 경우가 제법 있긴 한데, 다만 목회자의 사모가 된다는 것은 당사자 입장에서 부담스러운 일이 될수도 있다. 허나 상대여성은 어찌된 영문인지 일단 그런 부분에 대한 고민은 별로 없어보였다. 

 “ 저도 그래서 나름 그런 소망을 갖고 기도를 해오긴 했는데... ” 

 “ ...... ” 

 “ 한번 목사님의 훌륭한 내조자로서 주님의 종으로서 제 인생을 다 바쳐보고 싶다는 

  그런 바램을 저도 기도하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은연중에 갖게 되었어요. ” 

 여하튼 사모가 되는것에 대한 별다른 부담이나 거부감은 없어보이는 그런 여성이었다. 나이는 이때 20대 후반이니 60년대 후반 기준으로도 이미 혼기를 놓친지 꽤 된 그런 사람이라 볼수도 있고 하지만 그래도 이미 나이 30대 후반인 차도균 목사와의 나이차이는 열 살차이다. 그러나 딱히 그런 문제 때문이 아니더라도 차목사는 이 자매의 경우엔 웬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단 처음 만나서 나눠본 대화 이후에도 식사자리를 한번 갖게되긴 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문제나 그런게 있어보이지는 않는 무난한 자매였다. 허나 아무래도 뭔가 ‘아니다’라는 생각이나 느낌이 든 것일까. 시간이 좀 더 지난뒤 자매를 소개시켜준 집사님에게 차도균 목사는 이와같이 그 자매에 대한 느낌을 이야기했다. 

 “ 아니, 왜요 목사님 ? 저희가 소개시켜드린 자매님이 마음에 안 드셨나요 ? ” 

 “ 아뇨 뭐...대체로 딱히 흠잡을 것은 없어 보이는...오히려 아주 귀해보이는 그런 자 

  매님이시더군요. 제게는 과분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 

 “ 그런데 왜 ? ” 

 그러나 이후 별다른 진전이 없어보였고 아마 자매쪽에서 그로인해 좀 답답함을 느꼈는지 선을 주선한 집사에게 약간의 하소연이나 보채는 듯한 모습을 보였나보다. 차목사 입장에선 그 자매한테 대놓고 ‘싫다’는 기색을 내비칠수도 없고 해서 그냥 적당히 선을 그으려고 한 것 뿐인데, 여하튼 선을 본 자매와는 차목사가 웬지 모를 거부감에 계속 거리를 두고있는 애매한 상황에서 한번은 이런일이 있었다. 

 “ 목사님, 저희 좀 잠시 신앙상담을 했으면 하는데요. ” 

 개척교회때까지만 해도 성도가 얼마되지 않는 덕분인지 차목사는 신앙상담이나 고민이 있는 지체들의 경우엔 낮이건 밤이건 언제건 가리지를 않고 그런 도움요청이나 상담에 응해주곤 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차목사의 교회도 성도가 제법 늘어난 상태라 그런 상담이나 고민은 되도록 교육전도사나 구역장들에게 일임해오고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 헌데 대체 무슨 중요한 문제인지 청년회 자매 몇몇이 차목사를 직접 찾아와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 배윤희 자매라고 아시죠 목사님 ? ” 

 이름은 대충 들어서 아는 자매였다. 자신의 교회에 다닌지는 한 3-4년 정도 되었고 그리고 나이는 현재 24세 정도. 차도균 목사와는 15살 차이이긴 했지만 여하튼 차목사 입장에선 그냥 무난하고 차분하게 교회 잘 다니는 그런 신실한 자매로 알고 있었다. 헌데 그런 윤희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 실은 윤희가 요즘 좀 이상해요. 처음엔 무슨 감기몸살이라도 앓는것인가 했는데  

  그런것도 아니고...게다가 몰랐는데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지도 한 1년정도 되었다 

  고 하더라구요. 게다가 요즘은 사람도 잘 안 만나고...교회에서 봐도 인사나 아는 

  체도 잘 안하고... ” 

 대체 무슨 일인가 궁금해져서 차도균은 자매들과 함께 사실상의 심방이나 다름없이 배윤희의 집을 찾아가보았다. 헌데 문을 꼭 걸어잠근 윤희는 목사님도 다른 자매들과의 만남도 거부하고 있는 상태였다. 하는수없이 윤희 어머니와 잠시 이야기를 나눠보기로 했다. 윤희 어머니의 경우엔 교회 다니는 사람은 아니었다. 

 “ 사실 저희애가...이상해진게 한 1년이 좀 넘어요. 원래는 다니는 직장에서도 다른 

  여직원들을 데리고 왕언니 노릇도 할만큼 성격도 좋고 활동성도 있는 그런 아이였 

  는데... ” 

 헌데 일단 직장은 별다른 이유없이 1년전에 사직했고 게다가 교회에서의 모습도 이전과 다르다는 것이 자매들의 증언이었다. 정황상 차도균은 혹시 배윤희란 자매가 성*행 피해라도 입은 것은 아닌가 그쪽으로 짐작을 해보았지만 은밀히 한번 조사를 해보니 일단 그런일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런 문제가 아니라 그냥 아무런 이유없이 직장도 그만두고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주일예배엔 그래도 빠지지 않고 출석하지만 청년회 모임엔 나오지 않고 같은 또래의 청년회 자매들과도 이전처럼 잘 어울려들지 않는다는 것. 일종의 ‘대인기피증’이라고나 할까. (* 사실 요즘같으면 ‘공황장애’로 봐야할 증상이긴 한데 60년대엔 그런 개념이 없었다.) 

 여하튼 대인기피증이든 공황장애든 뭔가 정신적으로 크게 상처를 입거나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한 배윤희라는 자매. 그냥 모른체 할수도 없는 일이라서 차목사가 다시 직접 윤희자매의 집을 방문해보기도 하고 아무리 목사라도 남자인 자신과 직접 만나는 것을 꺼릴수도 있겠다 싶어 다른 구역장급 집사나 여성 전도사를 보내기도 했다. 허나 여전히 윤희자매의 굳게 닫힌 마음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 그 뒤 이야기를 제가 좀 들어서 알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하다보면 소설내용이 너 

  무 길어질 것 같으니 정리를 하죠. 헌데 그렇게 공황장애든 대인기피증이든 그런  

  정신질환(?)을 앓고있는 자매를 치유해주려 하다가 인연으로 이어졌다 그 이야기  

  아닙니까 ? ” 

 “ 뭐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렇지. 그렇게 해서 인연이 맺어진 사람이 차도균 목사의 

  사모가 된 배윤희 사모님이시니까. ” 

 나이차이가 열다섯살이나 나는 두 사람이었지만 그야말로 어떤 하나님의 오묘한 인도하심이 있었는지 아니면 두 사람만의 의외로 통하는 무엇이 있었는지 그런 사이로 발전했다는 이야기다. 나이 30대 후반이 되도록 장가를 못간 노총각 목사님을 안타깝게 여긴 집사들이 직접 나서 소개시켜준 ‘사모가 될 비전’이 있다는 신실해보이던 자매에게조차도 ‘웬지모를 거부감’이 느껴져 거리를 두기까지 했는데 바로 그런 상황에서 차도균에게 나타는 배윤희라는 자매. 그렇게 결혼한 두 사람이 70년대에 2녀2남 총 4남매를 낳았다. 

 “ 목사님... ” 

 70년대 후반이면 그렇게 결혼한 차도균과 배윤희의 결혼생활이 어느덧 10년 가까이에 이를때다. 허나 열다섯살이란 나이차이때문인지 아무래도 배우자가 목사님이기 때문에 생기는 어떤 어려움이나 부담감 때문인지 배윤희는 그때까지도 차도균을 꼬박꼬박 ‘목사님’이라 부르고 있었다. 그런 윤희가 하루는 할 이야기가 좀 있다며 차도균 목사를 부른 자리. 윤희의 입에서 나온 말은 좀 뜻밖이었다. 

 “ 우리도 이제 교회를 좀 키우죠 ? ” 

 “ 교회를 키우다니 ? 우리 교회도 어느덧 등록교인만 수백명에 달하는데 이 정도면 

  되었지 무슨 교회를 더 키운다고. ” 

 “ 목사님...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 

 뭔가 살짝 짜증난다는 듯 반응을 보인 차윤희 사모. 그러고보면 애초에 ‘창고교회’에서 개척을 시작한 차도균의 ‘OO교회’도 개척을 시작한지 7-8년쯤 지난 60년대엔 교육관과 식당시설까지 갖춘 그 정도의 중규모 교회로 성장했고 무엇보다 차도균의 열성적인 목회와 전도활동 덕분에 성도는 날로 늘어나고 있었다. 허나 배윤희 사모 입장에선 뭔가 부족한게 느껴졌는지 이와같이 말한 것이다. 

 “ 무슨말을 하고싶은게요 ? 뭐 설마...성전증축 같은걸 말하는게요 ? ” 

 몰라서 묻느냐는 듯 순간 차윤희 사모의 눈빛이 번득였다. 사실 한국교회가 날로 성장하면서 차츰 저마다 교회를 점점 더 크게짓는 대형교회 경쟁이 벌어지기 시작한것도 이 무렵부터이긴 했는데, 그만큼 교회를 찾는 성도들이 늘어나는 이유 때문이기도 했지만 일단 이때까지만 해도 차도균은 성전증축에는 별다른 욕심이 없는 듯 했다. 그래서 사뭇 단호하게 잘라말했다. 

 “ 미안하지만 난 성전증축 같은데는 별 욕심이 없어요. 그런걸로 건축헌금 걷고 그 

  러는거 난 별로외다. ” 

 “ 누가 뭐 대형교회처럼 엄청나게 크게 짓재요. 우리도 이젠 예배당 하나 가지곤 부 

  족해요. 그리고 교육관도 하다못해 남선교회,여선교회 그리고 청년부가 쓸곳 그 정 

  도 구분은 해야하고... ” 

 “ 그 문제는 나도 고민을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당분간은 난 무리한 성전 

  증축이나 건축같은 것은 안 할 생각이오. 목회자가 성전건축에 너무 욕심을 내다보 

  면 결국 재물을 탐하게 되고 그러다 파멸의 길을 가게 되는것이오. 난 그와같은 길 

  을 가고싶지는 않아요. ” 

 


 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이렇게 성전건축에 큰 욕심이 없던 차도균 목사였지만, 그래도 내심 바램이 없지는 않았는지, 아니면 배윤희 사모가 토로한 고충처럼 성도들이 계속 늘어나는 상황에서 지금과 같은 작은 예배당과 교육관 시설로는 그 많은 성도들이 기도하교 교제할 공간이 부족해 더 큰 성전(교회)을 지을 수밖에 없는 현실적 문제에 봉착했음인지 아니면 적어도 그때까지만 해도 욕심이 없던 차도균 목사의 마음을 어여삐 여기신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셨음인지 80년대 초반쯤에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OO교회’에서 장로 직분을 맡고 있던 사업가,재력가 몇몇이 뜻을 모아 거액의 건축헌금을 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보다 큰 교회를 지을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감리교단에서 가장 큰 교회로 성장해 있는 것이 차도균 목사의 ‘OO교회’다. 

 “ 헌데 6.25 직후에 교회개척을 시작 성장한 교회들의 이야기는 대개 엇비슷하더라 

  구요. 그렇게 전쟁직후의 폐허에서 창고가 되었든 뭐가 되었든 그런 시설을 바탕으 

  로 주위에 피난민이나 가족을 잃고 실의에 빠져있던 이들을 모아 교회개척을 시작 

  지금과 같은 큰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다는... ” 

 “ 대개는 그렇지 뭐. ” 

 박인수 장로 입장에서도 그런 이야기는 좀 식상한 느낌이 드는지 묘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연다. 

 “ 차도균 목사 이야기는 그럼 그 정도로 하고 이번엔 백민곤 목사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줄까 ? ” 

 원래 감리교단 원로목사 3인방의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해서 시작된 대화가 아니던가. 헌데 백민곤 목사의 경우는 차도균 목사의 경우와는 달리 최광일 권사도 대충 아는바가 있다. 실은 반핵반김 집회에 한참 참석할 때 그때 백민곤 목사도 연단에 선적이 몇 번 있어 그때 최광일도 먼발치서나마 백민곤 목사를 본적이 있다. - 다만 이때는 기도회 순서와 원로 정치인,지식인들의 정치연설 순서가 나뉘어져 있었기 때문에 목사인 백민곤은 기도회 순서때 마이크를 몇 번 잡았었다. 

 얼핏 이야기를 들어보면 요즘 그 말많고 탈많은 전 모 목사의 경우와 비슷한 부류로 생각될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자리에서 백민곤 목사의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은 의미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일단 박인수 장로는 92년 대선 무렵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 그땐 사실 대선후보중 교회장로인 이가 있어서 기독교계는 알게모르게 그 대선후 

  보를 지원하던 때였지. 그리고 백목사도 그때 그 후보를 돕는 선거운동에 일정부분 

  나선적도 있었어. ” 

 그리고 대선이 끝난 직후 백민곤은 평상시 교류하는 몇몇 동료 목사들과의 식사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적이 있었다. 내용은 대략 이랬다. 

 “ 보통 다들 김영삼 장로님께서 크리스찬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지지하는 것으로 알 

  고 있지만 전 솔직히 좀 생각이 다릅니다. ” 

 “ ...... ” 

 “ 김영삼 장로님...아니 김영삼 후보에게 우리의 굴절된 현대사를 어느정도는 정리해 

  주실수 있는 그만한 역량이 있지 않을까 그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 

 “ 백목사 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게요 ? ” 

 그 자리에 참석한 동료목사중 상대적으로 나이가 좀 많아보이는 이가 다소 불편한 듯 이와같이 물었고 백민곤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 뭐 각자의 생각과 평가는 다 다르겠지만 어쨌든 참으로 파란도 사연도 많았던 그 

  런 우리나라의 현대사입니다. 그 현대사의 곡절많았던 사건들을 굳이 이런 자리에 

  서 언급하진 않겠습니다만 산업화와 동시에 그 이면에 민주화 운동이란 양면이 혼 

  재되어있던 시대. 그 굴절의 시대에 상처받은 이들이 좀 많습니까. 그래서... ” 

 “ ...... ” 

 “ 적어도 김영삼 후보는 한때 민주화 운동을 하셨던분이니 우리 현대사의 그 굴절 

  된 역사속에서 상처받은이들의 심령을 어루만져 주실수 있는 그와같은 기대를 하고 

  있기에 그분을 지지한것입니다. ” 

 사실 백민곤은 그때까지만 해도 자기 정치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던 그런 목회자는 아니었다. 헌데 그랬기에 그런 백민곤이 14대 대선때만큼은 너무 노골적으로 보인다고 할 정도로 대놓고 김영삼을 지지하는 활동을 했기에 평상시 그를 알거나 친분이 있는 동료 목사들은 의아해하고 뜻밖이다라는 평을 내놓기도 했다. 바로 그런 구설이 없지는 않았기에 백민곤은 평상시 교류하는 동료 목사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자신이 하필이면 ‘김영삼 장로’를 지지한 이유에 대해 일종의 해명이라면 해명일수도 있고 입장일수도 있는 소회를 그와같이 밝혔던 것이다. 

 “ 뭐...14대 대선때 특정후보를 지지한 일이나 또 반핵반김 집회 기도회때 연단에 까 

  지 오른일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긴 하지. 허나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잘 

  모르는 알려지지 않은 일화가 있어. ” 

 “ 어떤 일화가 있는데요 장로님 ? ” 

 그것은 박정희 시절도 어느덧 후반으로 접어들던 70년대 후반의 일이었다. 산업화와 장기집권이란 명암으로 두고두고 논란이 되었던 그 대통령의 70년대 후반. 때는 추운 겨울이었고 백민곤 목사의 경우 역시 6.25 직후 개척교회를 세우며 목회를 시작 역시 서울의 한 변두리 지역에 중규모 정도의 교회를 이끌고 있었다. 때는 날도 어느덧 추워지는 겨울철이기도 했는데 밤늦은 시간 그 교회로 잠입해온 낯선이가 있었다. 

 “ 누...누구요 ? ” 

 한밤중에 침입한 낯선자에 놀란 교회 관리를 맡고있는 사찰집사가 다가와 신분을 밝히라거 했고 당황해하던 사내는 갑자기 사찰집사 앞에 무릎을 꿇으며 애원을 했다. 

 “ 죄송합니다 목사님. 쫒기는 몸인데 하룻밤만 좀 숨겨주십시오. ” 

 일단 교회다니는 사람은 아니었는지 사찰집사를 목사로 오해하고 그와같이 말했고 그러자 당황한 사찰집사가 바로 자신이 목사가 아님을 밝히고 백민곤을 불렀다. 마침 금요일이기도 해 백민곤 목사도 금요 철야기도회를 준비해야 해서 교회에 도착해 있을때다. 

 “ 대체 누구요 ? 범죄자면 솔직하게 경찰에 가서 자수하면 될 일이지 다짜고짜 쫒 

  기는 사람이라면서 숨겨달라고하면... ” 

 “ 죄송합니다 목사님. 제발 하룻밤만... ” 

 “ 거 참...아무리 무지몽매한 사람이라도 여기가 교회인걸 모르진 않을터. 아무리 그 

  렇기로 교회가 범죄자고 도둑이고 아무나 막 들어와서 먹고자고 해도 되는곳으로  

  알면 그건 곤란하오. 대체 뭘하는 사람인지 신분을 밝히시오. 안 그러면 바로 경찰 

  에 신고하리다. ” 

 “ 목사님...제발... ” 

 경찰에 신고하겠다는 말까지 목사의 입에서 나오자 겁이 났는지 사내는 거듭 백민곤에게 큰절을 올리며 애원했고 하는수없이 결국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 긴급조치 위반으로 수배중인 사람입니다. 제발...날이 밝으면 제 동지들이 있는 아 

  지트로 장소를 옮길터이니 오늘 하룻밤만 좀 재워주십시오. 오늘은 제가 거기까지 

  갈수 없는 사정이 있어서 그럽니다. 그러니 제발 한번만... ” 

 “ 뭐요 ? 긴급조치 위반 ? ” 

 긴급조치란 유신체제 하에서 대통령 직권으로 내린 일종의 강경조치로 솔직히 유신과 장기집권에 반대하는 반체제 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강경조치였다. 헌데 그런 긴급조치 위반으로 수배중인 사람이라니. 그럼 결국 그런 반정부단체에 가담해 활동하는 사람이란 짐작은 대번에 가능할터이고 일단 하는말로 봐서는 다음날 동료들의 아지트가 되었든 뭐가 되었든 갈곳이 있긴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하룻밤만 숨겨달라는 사내의 애원. 사찰집사는 더더욱 난감해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백민곤 목사는 잠시 그에게 다가가 그의 용태며 이목구비를 살펴보았다. 체구나 외모는 그저 평범한 한 20-30대 정도로 짐작되는 청년. 백민곤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사찰집사에게 말했다. 

 “ 김집사님, 이 형제 집사님 숙직실에서 하룻밤 재워주시도록 하십시오. ” 

 “ 예에 ? ” 

 백목사의 뜻밖의 말에 크게 놀란 사찰집사. 허나 백민곤은 거듭 그를 숙직실에서 재우라며 하룻밤 숨겨줄 의사가 있음을 밝혔고 당황해하는 사찰집사에겐 걱정말라는 듯 제법 진지하고 정중하게 설득했다. 그리고 원래 오늘 예정되어있는 금요 철야기도회는 갑작스런 교회 내부수리 사정이 되어 취소한다는 식으로 성도들에게 알렸다. 백목사의 의도를 더더욱 알 수 없어 사찰집사는 의아해하고 있는데 일단 담임목사의 당부대로 청년을 자신이 묵는 방으로 데리고 간 사찰집사. 헌데 한시간여쯤 지났을 때 백목사가 그 자리에 뜻밖의 사람을 하나 데려왔다. 그가 누구인지를 알고있는 사찰집사 입장에선 더더욱 경악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 아...아니 목사님...대체 어쩌시려구... ” 

 긴급조치법 위반으로 수배중이라는 청년이 있는 자리에서 백민곤이 데려온 이의 신분을 밝히는게 적절할지조차 몰라 망설이고 있는데 백목사는 아랑곳없이 데리고 온 남자에게 이와같이 말했다. 

 “ 이성호 의원님. 일단 이쪽에 앉으시지요. 그리고 이 청년과 인사 나누십시오. ” 

 


 사실 이성호는 공화당 소속의 4선 국회의원으로 특히 이때는 10대 총선(* 1978년 12월 12일)을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라 이성호 권사의 아내가 남편의 ‘5선 국회의원 당선’을 위해 매일같이 백민곤 목사의 ‘OO 감리교회’의 새벽예배에 출석하며 기도를 드리는 중이었다. 이성호는 ‘OO 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한지는 이때 한 10년 정도의 시간이 지났고 게다가 권사 직분까지 맡고 있었는데 사실 이만한 사회적 지위를 갖춘 인물이 이만한 교회에서 권사 직분까지 갖고 있다면 그 교회에서 갖는 (특히 재정적으로) 영향력은 꽤 크다고 봐야할 것이다. 헌데 그런 것을 알턱없는 긴급조치 위반으로 수배중인 청년이 이런 교회로 숨어들었으니 그야말로 호랑이굴에 제발로 걸어들어간 것이나 다름없다. 허나 백민곤 목사는 이성호 권사와 쫒기는 청년이 마주한 자리에서 서로에 대해 간단한 소개와 인사를 시킨뒤 이와같이 말했다. 

 “ 오늘 이 자리는 하나님의 주관하에 이 백민곤 목사 직권으로 갖게되는 긴급 시국 

  기도회입니다. ” 

 사실 총선 공식 선거운동 기간은 예나 지금이나 두주 정도지만 그에 앞서 정당의 공천도 받아야하고 지역구 관리도 해야하니 국회의원 선거 당선을 위해서 당사자는 최소한 반년이상 한 1년 가까이 준비를 한다고 봐야한다. 그랬기에 이성호 권사의 아내는 ‘남편의 공화당 5선 국회의원 당선’을 위해 한 6-7개월전부터 꼬박꼬박 새벽기도를 드리는 중이었고 이성호 본인 역시 바쁜 일정 가운데서도 ‘OO 감리교회’의 철야기도회 만큼은 꼬박꼬박 참석해오고 있었다. 헌데 오늘 백민곤 목사는 긴급조치 위반으로 수배중인 청년을 잠시 숨겨주면서 그날 예정인 철야기도회를 일시적으로 취소하고 그리고는 사찰집사의 숙직실에 잠시 몸을 숨기고 있는 청년이 있는 자리에 공화당 4선 국회의원이기도 한 이성호 의원을 데리고 온 것이다. 막상 그렇게 서로를 소개받은 청년과 이성호는 몹시나 놀랐고 두 사람 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것인가’ 하고 백목사의 의도를 알 수 없어 의아하기도 하고 어이없다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헌데 백민곤 목사는 일단 두 사람을 편히 마주앉게 한뒤 이와같이 말을 이어같다. 

 “ 지금의 이 시국에 대해 두분 다 각기 걱정하시고 우려하는바가 있으리라 믿습니 

  다. 어떻게 보면 서로 완전히 다른 입장에 있는 두분이 이 자리에 마주하게 된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닐까 생각되어 이런 자리를 마련한것입니다. ” 

 “ ...... ” 

 “ 보릿고개를 면하게 해준 대통령, 그리고 또 한편으론 장기집권과 독재로 가고 있 

  는 대통령. 그리고 그런 나라에서 살고 있는 이 나라의 백성들. 모두 다 각자의 생 

  각은 다르겠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선 지금의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시리라 생각 

  합니다. 각자 지금 이 나라의 현실을 바라보는 생각과 입장은 다르겠지만 그래도  

  이 나라와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는 그 마음만큼은 같다고 생각합니다. 방향은 다르 

  지만 결국 다 나라와 민족을 걱정하는 마음만은 하나. 그 하나된 마음을 하나님 앞 

  에 내어놓는 자리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 

 그리고는 먼저 백민곤 목사가 쫒기는 청년과 이성호 두 사람의 손을 잡고 기도를 시작했다. 

 “ 사랑의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어쩌면 그렇게 쉽게 가질수 없는 이런 귀중한 시국 

  기도회의 자리를 오늘밤 OO감리교회에서 잠시 드리게 할수 있게 인도하심에 감사 

  드립니다. 사랑의 하나님. 많은 이들이 이 나라의 현실과 앞날을 걱정하고 있으리 

  라 생각합니다. 어떤이는 대통령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걱정을 할것이고 또 어떤이 

  는 대통령을 비판하는 입장에서 걱정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이 나라와 백성 

  들을 걱정하는 그 본질적 마음은 같다고 생각하기에 서로 거쳐온 과정과 처해진 위 

  치는 달라도 함께 합심으로 이 나라의 앞날을 바르게 인도해달라고 기도드리고자  

  합니다. 하나의 영혼, 하나의 어린양도 그 어느것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다 말 

  씀하신 하나님. 오늘 정말 이 귀중한 시간에 참으로 소중한 두분을 한 자리에 모이 

  게 하신 것 진실로 하나님의 깊은 생각과 인도하심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중략) 함 

  께 기도하고자 합니다. 이 나라의 경제건설 현장에서 땀흘리는 이들이건 또는 이  

  땅에서 핍박받는 이들이건 그 어느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 없이 귀한 존재들이라 

  생각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길로 인도해주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겠습 

  니다. 이 나라가 지금보다 한층 더 건강하고 건전한 그리고 건실한 나라로 나아가 

  기 위한 그런 마음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땀흘리는 이나 핍박받는 이나 그 어느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마음으로 이 나라 위정자들이 정말 하나님 보시기 

  에 합당한 그런길로 이끌어주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으로 오늘 이 자리에서 생각은 

  다르나 마음만은 하나인 두 영혼이 함께 기도드리고자 합니다. 주님, 인도하여 주 

  소서. 이끌어주소서. ” 

 백민곤 목사의 기도가 먼저 있고 그 뒤를 이어서는 두 사람은 별도의 기도말은 하지 않은채 묵상으로 한동안 기도하도록 했다. 어찌되었거나 정치적 입장이 완전히 극과극인 두 사람이니 – 게다가 쫒기는 청년은 기독교인인지조차 확실치 않고 – 자칫 드러내고 하는 기도말이 기도회 분위기를 망치거나 상처를 더 줄수도 있는 우려에서였다. 그렇게 백민곤 목사의 주도로 긴급히 마련된 ‘시국기도회’. 어쩌면 쫒기는 청년이나 이성호 권사나 두 사람 입장에서도 두 번다시 또 있기 힘들 그런자리를, 얼떨결에 시작된 기도회였으나 백민곤 목사의 절실한 기도말이 있었기에 두 사람 다 각자의 생각대로 이 나라와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그 자리에서만큼은 함께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청년은 목사님께 간단하게 감사인사만 드리고 아침도 들지 않은채 바로 교회를 떠났다. 여하튼 하룻밤 재워주신 목사님에게 지나친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아서 바로 떠난 것이다. 그리고 이날의 일이 백민곤 목사가 자기자랑 하고파서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진 않았을터이니 훨씬 시간이 지난뒤에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사실 이성호 의원은 그날 갖게된 ‘특별 시국기도회’와는 별개로 ‘5선의원이 되게 해달라’는 아내의 기도는 효험이 없었는지 얼마후 치러진 총선에서 보기좋게 낙선하고 말았다. 그리고 한 1-2년 정도 정치낭인으로의 시간을 보내다가 80년대 들어서는 한 10년 조금 넘게 한 지방대학의 명예교수로 활동하다 90년대 중반쯤 세상을 떠났다. 70년대 후반에 이미 5선의원에 도전하는 50대 후반의 정치인이었으니 90년대에 이미 70을 넘긴 나이인데 그 무렵이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는 의미로 ‘공화당 4선 국회의원’ 출신인 자신의 회고록을 하나 냈던 것이다. 헌데 그 회고록에 그날의 일을 간단하게 소개 78년 10대 총선을 앞둔 시점에 ‘OO 감리교회’에서 있었던 백민곤 목사가 주도한 그 특별한 시국기도회의 일화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때는 이미 유신도 막을 내리고 박정희 대통령도 서거한지 10여년이 지난뒤의 일인데 그래서 이성호도 보다 담담하게 그날의 일을 회고록에 소개할수 있었던 것이다. 내용이 대략 다음과 같았다. 

 “ 그날 솔직히 백민곤 목사를 다시보게 되었다. 평상시 내가 알던 백민곤 목사는 대 

  체로 박정희 대통령을 ‘보릿고개를 면케 해주신 대통령’이라며 칭송하는 부분만은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그날밤만큼은 그 어떤 민주투사 못지않은 결기마저 느 

  껴졌다. (중략)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힘든 수배과정에서 교회로 숨어들어온 

  어린양을 헛되이 보내진 않으려는 사려깊으신 마음도 계신걸로 이해할수 있었다. 

  (중략) 백민곤 목사님을 다시 보게된 그날이었다. ” 

 한편 그날 함께 ‘시국기도회’를 가졌던 청년의 소식은 이성호도 이후 들은적이 없다고 했다. 감리교회 권사이던 이성호 의원의 경우와 달리 그 청년은 이름도 나이도 밝힐수 없는 처지였을뿐더러 그날 하룻밤을 묵고 교회를 떠난뒤 그 청년을 이성호가 만나거나 할 기회는 당연히 없었을테니까. 물론 백민곤 목사도 그날 이후 그 청년을 만나본적은 없었다고 들었는데, 오히려 이성호 의원이 그때의 일을 회고록에 처음 공개하면서 시간이 좀 더 지난뒤 자연스럽게 문제의 청년의 존재도 알려지게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이성호 의원의 회고록을 접해보게된 그때 그 청년이 평소 교류하던 지인들에게 ‘그때 그 일화의 주인공이 나’라며 말한적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문제의 청년은 그때 극렬 반미단체에서 활동하던이였기 때문에 그렇게 수배대상이 되었던것이며 80년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쭉 반정부,반미활동을 해온 인물이다. 허나 민주화가 되고 동구 공산권이 붕괴되고 북한의 식량난을 지켜본뒤에 전향 이후에 한 보수정당 대선후보 캠프에서 활동한바도 있다고 한다.



- 4회에 계속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