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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그룹 팬픽 - 레드벨벳 예리 (2) 걸그룹 팬픽 10 (레벨,블핑)



 

                                   부제 : 박인수 장로님과의 대화록 

 


 “ 예전에 어떤 책에선가 그런 분석의 내용을 읽어본적이 있습니다. ” 

 박인수 장로와의 대화는 아직 진행중인 상황에서 최광일 권사의 말이 이어지고 있다. 박인수 장로가 대체로 평온한 자세로 광일을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광일은 어떤 답답한 그 무엇이라도 토해내듯 사뭇 약간 목소리톤이 높아진다. 

 “ 우리나라에서 기독교가 성장하게 된 주 요인이 알고보면 유교문화의 반작용 탓도 

  있다고요. ” 

 “ 그런 이야기가 있었나 ? ” 

 90 고령의 박인수도 아직 그런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해서인지 다소 의아해지며 묻고 광일의 말이 계속 이어진다. 

 “ 유교는 아무래도 내세보다는 현세를 더 중시하는 종교 아닙니까. 유교에서 제일  

  중시하는게 ‘제사문화’이긴 하지만 막말로 조상에게 제사해서 천국이 보장된다 이 

  런말은 없는거니까요. 하지만 기독교는 예수님만 믿으면 천국갈수 있다는 내세를  

  보상해주죠. 바로 그런 핵심교리가 산업화,근대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는 과정에서  

  현대의 한국인들에게 그 부족한 결핍의 뭔가를 제대로 채워줬다. 그게 주효했고... 

  그게 우리나라 기독교가 성장한 주 요인이자 발판이 된 셈이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여하튼 직장생활 하고 사회생활 하고 힘들고 다들 피곤하게  

  사는데 주일에 교회만 나오면 ‘하나님 말씀에만 순종하면 다들 복받고 천국갈수 있 

  다’ 그 한말씀에 다들 심리적 위로가 되는거에요. 산속으로 숨어들어 일반인의 접 

  근이 쉽지 않은 불교나, 내세가 보장되지 않는 유교에 비해 그래서 기독교가 20세 

  기 들어 특히 급속하게 진행되는 산업화,근대화속에서 지친 대다수 보통사람들의  

  심령을 제대로 어루만져줬던거죠. 그게 근현대사에서 한국 교회가 급속하게 성장할 

  수 있는 주요인이자 밑거름일수 있다 그 이야기에요. ” 

 “ 뭐 그런대로 일리있는 이야기구만. ” 

 광일의 말에 동의하는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박인수 장로는 들고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예하 그 평온한 표정으로 광일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말을 이어간다. 

 “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구한말 서구문물이 처음 들어왔을 때 그 주된 역할을 

  기독교 선교사들이 한 점, 게다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때도 많은 역할을 했고, 또 

  게다가 해방후 분단이 되고선 특히 이북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핍박을 받는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대거 월남한것도 남한사회에서 교회가 급속하게 성장하게 만든 그런 

  밑거름이 될수도 있었고말이야. ” 

 “ ...... ” 

 “ 또한 무엇보다 기독교단이 반공보수성향을 띨 수밖에 없었던것도 그런 배경과 무 

  관치 않다고 할 수 있지. 근본적으로 공산주의가 기독교와 대척점에 있기도 하고 

  또 월남한 실향민 대다수가 공산주의에 핍박을 받던 기독교인이란 점도 주 요인 

  이 되었을테고 말이야. ” 

 헌데 이런 분석은 교회 장로나 권사쯤 되지 않더라도 어느정도 사회분석 능력이 있는 학자나 전문가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이긴 하다. 그래서일까. 뭔가 부족함이 느껴지는지 광일이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다시금 조심스레 입을 연다. 

 “ 전 그래서 요즘 구약에 나오는 솔로몬과 다윗의 경우를 종종 생각해보곤 합니다. 

 ”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한 보수성향 웹진 송년모임을 마치고 돌아가던 자리에서 ‘헛되고 헛되도다’란 말을 읊조렸던 이가 박인수 장로 아니던가. 그래서일까. 광일의 그와같은 말에 순간 잠시 눈빛이 번득인다. 광일의 말이 좀 더 이어진다. 

 “ 마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때는 솔로몬이나 다윗의 치세가 크게 흥했으나 하 

  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초심을 잃었을 때 솔로몬이나 다윗의 치세도 막장으로  

  치달았어요. 바로 그 모습을 보는듯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 

 “ 자네 말은 지금 한국 교단이 위기에 빠진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아서 그렇 

  게 된 것 같다는 소리인가 ? 아니면 한국 정치판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아 

  서 그리 되었다는 소린가 ? ” 

 사실 매우 예민하고 조심스러운 질문이다. 그래서 어지간한 최광일도 답변을 망설일 수밖에 없을터. 일단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 초심을 잃고 교만해진자가 많아진 것 같다...뭐 그 정도로 정리해두죠. ” 

 “ 난 기독교인들이 교만해졌다고 보는것인지 정치판이 교만해졌다고 보는것인지 그 

  것을 묻고 있네. ” 

 “ 아니 저...장로님... ” 

 좀 난감하게 코너에 몰리는 것 같아서일까. 최광일은 진땀을 흘리고 있다. 그런 광일의 당혹스러워 하는 표정이 재미있기라도 한 것인지 잠시 빙긋이 웃어보이는 박인수 장로. 그의 입이 열린다. 

 “ 근본적으로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하는것이지. ” 

 “ 그야 당연한 것 아닙니까. ” 

 “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나라와 민족이 실족하지 않도록 잘 이끌고 인도해야 하 

  는 것이 크리스찬의 임무이기도 해. 자넨 어찌할텐가 ? ” 

 “ 기...기도해야지요. ”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더듬거리며 대답하는 최광일. 박인수 장로가 그런 광일을 바라보며 묻는다. 

 “ 그냥 골방에서 기도만 할 참인가 ? ” 

 “ 그...그럼 뭐 어찌하라구요 ? 제가 뭐 솔직히 국회의원이라도 출마할 주제도 못되 

  고...뭐 저라도 또 적당히 뜻맞는 교인들 좀 규합해서 보수우파 단체라도 하나 새 

  로 더 만들까요 ? ” 

 “ 그런뜻은 아니지. ” 

 약간 준엄하게 꾸짖듯이 박인수의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최광일은 여전히 박인수 장로의 의중을 알수 없어 의아해하는 가운데 일단 그의 말은 좀 더 이어진다. 

 “ 내가 왜 그날 ‘헛되고 헛되도다’란 말을 공연히 뇌까렸는지 아나 ? 실성한 이도  

  아니고 치매걸린 영감도 아닐텐데 그 지하철 개찰구에서 뜬금없이 말이지. ” 

 “ 그...글쎄요... ” 

 “ 자네도 아까 말하지 않았던가. 보수우파 운동이란게 언제부터인가 이상하게 정치 

  적 성격과 종교적 성격이 혼합되어서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것 같다고. ” 

 “ 그랬었지요. ” 

 적어도 그 부분만큼은 확실히 최광일이 우려하고 개탄하는 부분이었기 때문에 새삼 목에 힘주어 답하고 있다. 사실 어차피 이 자리 자체가 광화문에서 있은 보수우파 집회에 참석했다 실망해서 중간에 돌아가는 길에 잠시 차나 한잔 하며 나누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오랜시간 대화를 나누진 못했다. 다음에 다시 만나 좀 더 깊은 이야기를 해보기로 하고 둘은 일단 그 정도에서 헤어지기로 한다. 비록 정정할지라도 어쨌든 90 고령인 아버지 박인수 장로의 건강을 걱정한 장남 박동철 권사와 차남 박훈철 권사의 우려 때문이기도 했다. 코로나 사태 때문에 사적인 만남이든 공적인 집회든 갖기 쉽지 않아진지 오래라서 다음에 또 박인수 장로와 대화의 시간을 가질 기회가 있을지 기약하긴 쉽지 않았지만 여하튼 다음 기회를 다시 보기로 하고 두 사람은 그쯤에서 헤어지게 된다. 

 


 사실 박인수 장로와 최광일 권사의 인연은 ‘OO신문(* 보수성향의 인터넷 웹진)’ 모임에서의 인연보다 앞서 한번 더 있기는 했다. - 우연이 그렇게 여러번 겹쳤던 것을 보면 어쨌든 이 또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인연이다. (* 젊은 자매와의 인연은 한번도 인도 안해주시면서. -.-;;)  

 그것이 대략 05년경쯤의 일인데 최광일은 그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북한인권과 탈북자 문제에 관심을 갖고 관련 단체에서 활동을 하던 중이었고 그때 한번은 탈북자의 한국행을 돕는 기독교 선교단체인 ‘K 선교회’ 관계자 및 탈북자들과 함께 어떤 대형교회 장로님의 식사초대를 받아 간적이 있었다. 당시 그 장로님은 탈북자를 돕는 선교단체에도 역시 후원회원으로 계실때인데 그래서 바로 그 선교회 도움으로 한국행에 성공한 탈북자들과 그곳 관계자들을 그동안 수고많았고 고생 많았다며 격려하고 싶다는 의미로 한번 식사초대를 했던 것이다. 

 선교회 도움으로 한국행에 성공한 젊은 탈북자 10여명 그리고 또다른 탈북자 단체 관계자 및 지인 두어명 그 외 ‘K 선교회’ 자원봉사자와 간사 몇몇 대략 그렇게 스무명 가까이가 장로님의 식사초대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바로 그곳이 박인수 장로님의 자택이었던 것이다. 박인수 장로는 그때 서울 강서지역의 한 고급 아파트에 살고 계셨는데 탈북자들의 식사초대 자리에 박인수 장로의 장남 박동철과 차남 박훈철 내외도 일손을 도와드리고 싶은 의미에 탈북자들을 직접 만나볼수 있다는 호기심까지 겸해져 박장로님 댁에 함께 있었고 그래서 그때 박인수 장로는 물론 그 장남 박동철,차남 박훈철과도 인사를 나누게 되었던 것이다. - 사실 이때(2천년대 중반) 이미 박인수 장로가 70대 중반이었기 때문에 박동철이든 박훈철이든 모두 최광일 보다는 열 살이상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다. 

 식사초대 모임에 그렇게 참석하게 된 10여명의 탈북자들과 ‘K 선교회’ 자원봉사자 및 간사들 그리고 다른 탈북자 단체 관계자들까지 그렇게 총 20명 가까이가 참석한 자리. 인솔을 맡은 ‘K 선교회’ 사무간사가 참석자들을 하나하나 일일이 장로님 가족들에게 소개를 했기 때문에 탈북자와 남한사람을 혼동하는 해프닝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었다. 

 조금 특별한 사연을 가진 탈북자를 최광일이 처음 만나보게 된것도 그때의 일이다. 기억하는이들이 있을련지 모르겠는데 90년대 중반에 충남인가 전북 해안에 ‘거동이 수상한 사람’이 상륙해서 자신이 ‘북한에서 왔다’고 주장을 해 인근 주민들이 간첩이거나 정신병자 같다고 관계기관에 신고를 한 일이 있었다. - 일간지에 가십성 기사로 짧게 두어줄 분량으로 났던 기사다. - 일반인 대다수들은 – 북한문제에 웬만한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 그저 하나의 작은 해프닝 정도로 생각하고 기억속에서 지워버렸을 작은 사건인데 허나 이 탈북자의 이후 우여곡절은 그 이후에도 간단히 끝나지 않았다. 아마 정보당국에서도 이 사람의 경우엔 ‘탈북자’인지 ‘중국교포’인지 혹은 간첩인지 그 신분이 확실치가 않아 쉽게 정보기관에서 내보내주지 않고 오랫동안 데리고 있었던 듯 하다. 이 탈북자의 주장에 의하면 안기부에 ‘3년 넘게 갇혀있었다’고 했는데, 역시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련지 모르겠지만 90년대 후반경 한 진보성향 월간지에 ‘3년동안 난민인정을 못 받고 갇혀있는 탈북자가 있다’는 식의 기사가 이 경우에는 좀 제법 비중있게 다뤄진적이 있었다. 이 진보 월간지의 보도가 영향을 미친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 탈북자는 결국 난민지위를 인정받아 한국사회에서 평범한 일상인으로 살게 되었다. 

 최광일 권사의 경우처럼 평상시 웬만큼 탈북자나 북한문제에 관심을 갖고 관련 기사를 살펴보거나 찾아보는 이가 아니라면 기억하기 쉽지 않을 그런 사건이다. 헌데 바로 그 사건의 문제의 당사자를 이 식사초대 모임에서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다만 이 탈북자는 ‘K 선교회’쪽 도움으로 한국으로 오게된 사례는 분명 아니고, 이 식사모임에 참석한 다른 탈북자 단체 간부와 평상시 교류가 있는 일종의 지인이었다. 이 탈북자가 ‘K 선교회’쪽 탈북자들하고 자신이 한국까지 오게된 경위를 대충 이야기 나누게 되면서 그런 이야기를 최광일도 자연스럽게 듣게 되었다. 처음엔 그저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서 그냥 흥미롭게 이 탈북자의 한국까지 오면서 고생한 과정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막상 쭉 듣고보니 최광일이 이전에 얼핏 보았던 그 문제의 기사의 인물이었다. 다만 이런 자리에서 끼어들기는 좀 그래서 그냥 먼발치에서 이 탈북자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 가령 그런 자리에서 자신이 갑자기 불쑥 끼어들어 ‘아, 저 그 기사 본 기억 나요 !!! 아마 O지이던가 그런데 났던 기사 같던데...그럼 바로 그분이신가 보네요 ?’ 하는식으로 말하는것도 좀 그렇지 않은가. 실례일수도 있고. 

 여하튼 박인수 장로의 식사초대에 그렇게 참석하게 되어 다른 탈북자들도 만나보게 되고 좀 특이한 사연과 과정을 거쳐 한국까지 오게된 탈북자를 만나게 된것도 그때의 일. 식사대접을 잘 받고 돌아가는 길. 마침 ‘K 선교회’의 홍보간사와 전략간사로 있는 최수정,이신애 두 자매와 잠시 이야기를 좀 나누게 되었다. 우연히 두 사람과 전철을 타고 가게되는 방향이 같아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던 것이다. 

 “ 그...아까 그 박인수 장로님도 실향민이신가요 ? ” 

 “ 예 ??? ” 

 북한이나 탈북자에 관심이 많은 고령의 교회 장로,권사급 어르신들은 알고보면 실향민 출신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자연스레 지레짐작으로 혹은 확인도 해볼겸 그와같이 물은것인데 일단 오해는 없이하기 위해 최수정 간사가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 아뇨, 실향민 출신은 아니시고요. 한 몇 년전까진 쭉 사업을 해오시다가 지금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신 그런분으로 알아요. ” 

 “ 아, 네에. ” 

 어쨌든 일단 잠시 들러본 집도 제법 고급스럽고 좋아보였고, 무엇보다 그런 선교단체 후원도 하고 교회 장로직분까지 맡고 있다면 어느정도 재력을 갖춘 그런 집안일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다. 최수정에 이어 이신애가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 전 일전에 박인수 장로님의 간증 한번 읽어본적이 있어요. 아마 OO이라는 신앙잡 

  지인걸로 아는데...형제님 말씀처럼 뭐 그런 실향민이거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좀 

  이채로운 과정으로 주님을 영접하신 그런 사연이 있으신 분이시더라구요. ” 

 “ 어떤 사연이 있었는데요 ? ” 

 박인수 장로의 이때(2천년대 중반) 나이가 대략 70대 중반 정도였으니 대충 나이를 계산해보면 1930년대 초반 정도 태생. 따라서 6.25때는 대략 10대 후반 – 20대 초반 정도의 젊은 나이였을것이나 여하튼 실향민이나 이산가족 그런것과는 별 상관이 없고 그때까지는 기독교 신앙과도 별다른 인연이 없던 그런 분이라고 했다. 

 “ 위로 누님이 여섯분이 계셨대요. 헌데 그중 두분이 6.25 전쟁중에 돌아가시고 다 

  른 누님들중...아마 사라호 태풍이었던가...왜 50년대에 있었다는 큰 태풍이 있었잖 

  아요. ” 

 70년대 초반 태생만 되어도 50년대 후반에 있었다는 ‘사라호 태풍’에 대해서 귀동냥으로 어른들한테서 조금씩이나마 들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여하튼 박인수는 아직 젊은 시절이던 그 무렵 사라호 태풍이 덮친 문제의 지역에서 살고 있었고, 전쟁통에 이미 누이 둘을 잃은 아픔이 있는 박인수는 그 태풍에서 또 누님 두분을 더 잃었다고 한다. 50년대 후반이니만큼 요즘같은 방송이나 재난경보 시스템은 거의 없고 라디오로 이따금 들려오는 일기예보나 들을수 있던 시절. 아무런 방비도 하지 못한채 박인수의 가족들은 사라호 태풍을 맞았고 그 와중에 누이 둘을 더 잃었다는 것이다. 여섯명의 누이중 두명은 6.25때, 또 다른 누이 둘은 사라호 태풍때 그야말로 고난의 시대를 담은 수난소설이나 대하 시대극 같은데서나 볼법한 기가막힌 사연. 하긴 성경에도 비슷한 사례가 하나 있긴 한데 ‘욥’이라는 인물이던가. 이런저런 질병이나 사고가 거듭되며 가족들을 계속 잃었고, 허나 그런 고난속에서도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았다는 욥. 다만 성경속의 욥은 이미 신앙생활을 하는 이였지만 박인수는 그때까진 아직 하나님을 믿는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렇게 이미 누이 넷을 잃은지 얼마되지 않아 남은 두 누이중 또다른 누나가  사고를 당하는 그런 비극을 겪었다고 한다. ‘남아선호사상’이 팽배한 이 나라 백성들이다보니 아들을 보기위해 줄줄이 딸을 낳아 위로 누이가 보통 한 서넛쯤 되는 그런 막내아들인 가족관계를 이따금 볼수 있던 시절. 헌데 박인수는 공교롭게도 그 시절 6녀1남중 막내로 태어나 그 어느집 몇 대독자 부럽지 않은 귀한 대접을 받으며 자랐을텐데 그런 박인수의 젊은 시절에 전쟁,태풍 기타 사고등으로 여섯명의 누나중 무려 다섯명을 잃은 그런 아픈 사연이 있는 사람이 젊은시절의 박인수였다. 이신애가 어느 신앙잡지에서 읽어보았다는 박인수 선생의 신앙간증 내용은 좀 더 이어진다. 

 “ 너무 비통하고 실의에 빠져 자살을 두 번이나 결심하셨다고 해요. 그러나 두 번  

  다 실패하고... - 아...진짜 이련 이야기 하나만으로도 이미 중편소설 분량 하나 나 

  오는데 그건 생략해야겠네요 ^^ - 세 번째 자살을 시도하려 했을 때 갑자기 어디 

  선가 그런 음성이 들렸더래요. ‘인수야, 그럼 못쓴다. 그러지말고 거기서 나오라. ’ 

 ” 

 흔히 기독교를 ‘자신의 영적체험 없이는 믿기 힘든 종교’라고 한다. 그러나 살다보면 문득문득 불현듯 들리는 내면의 소리를 한두번쯤은 느낄때가 있다. - 그런 경험조차 없는 이라면 이조차도 설명이 불가능하겠지만. - 글쎄, 그것을 단순히 개인 심리나 양심의 소리쯤으로 여겨야 하는것일까. 아니면 정말 보이지 않는곳에 존재하는 신의 음성이나 (나쁜짓을 재촉할 경우) 사탄이나 귀신의 장난으로 봐야하는것일까. 물론 그것은 과학으로 증명할수 없으니 어리석은 인간들이 그저 스스로 판단하는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하튼 ‘그럼 안된다’는 소리를 박인수 청년은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기라도 했는지 그렇게 어느날 문득 무작정 교회를 찾아갔다는 것이다. ‘세번째 자살시도’를 결국 단념한 그 순간. 그렇게 하나님을 찾은 것이 박인수라는 이야기다. 

 “ 그때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셨다고 해요. 그리고 훗날 기회가 오면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은혜를 잊지않고 반드시 우리사회의 소외되고 불우한 이웃들을 위해 쓰 

  겠노라고 그렇게 기도하신분이 박인수 장로님이시라고 해요. ” 

  


 최광일이 뉴라이트에 가담해 활동을 한것도 대략 이쯤의 일이다. 광일은 이때 뉴라이트에서 발행하는 웹진인 ‘뉴라이트 닷컴’에서 가명으로 논객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그 무렵에 뉴라이트연대 사무장인 이길환(가명)과 뉴라이트 닷컴 편집국장인 최계훈(가명)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 뉴라이트 운동은 이후 수구보수파라던가 정치권이 개입하면서 많이 변질되긴 했지만 그 문제는 여기선 논외로 한다. 

 뉴라이트는 원래 80년대 운동권이었지만 이후 동구 공산권의 몰락과 북한의 식량난 그리고 대량탈북사태를 지켜보면서 북한인권과 탈북자 문제에 관심을 갖고 ‘사상적 고민’을 하던 이들이 전향을 해 ‘보수의 개혁’을 외치며 만든 단체였다. 그래서인지 초창기 뉴라이트 핵심 멤버들 상당수는 한때 열혈 운동권출신이었고 그래서인지 저마다의 그 시절 아픈 사연을 하나씩 간직하고 있기도 했다. 실제 이길환의 경우엔 신혼 일주일만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전력이 있기도 했고 최계훈은 그 아버지가 자식이 주사파가 되고 집시법,국보법 위반문제로 투옥이 되자 충격을 받고 쓰러져 돌아가신 아픔이 있기도 했다. 허나 지금은 사상적,이념적 고민 끝에 전향한 이들. 뉴라이트 운동이 대체로 2004년에 있었던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인해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참패하고 보수가 몰락위기에 처해있을 때 ‘이대로는 안되겠다’며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보수를 주창하면서 시작된 것이기도 했는데 따라서 05년 후반쯤 되면 그 뉴라이트 운동이 시작된지도 대략 1년여정도 시간이 지났을 무렵. 이길환과 최계훈 이 두 사람은 90년대에 했던 고민과는 또다른 막상 보수쪽으로 오니까 보게된 또다른 문제에 직면한 고민을 시작하고 있었다. 

 “ 사실 저희가 보수쪽에 오면서 좀 놀란게... ” 

 이길환이 한참만에 무거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서울 외곽지역에 있는 호젓한 분위기의 카페에서 나눈 대화다. 

 “ 생각보다 07년 대선에서의 정권교체 그 자체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입니 

  다. 바로 그런맥락에서 무조건 직접적인 정치참여를 바라는 이들도 많고... ” 

 “ 뭐 어쨌든 정권교체가 중요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 아닐까요 ? 그래야 자기네 뜻에 

  맞는 그런 개혁이나 정책도 추진할수 있고 하니까... ” 

 최광일의 이와같은 대답에 최계훈이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는 입을 연다. 

 “ 우리가 애초에 바랐던 것은 시민운동으로서 보수우파 어젠다 발굴과 보수우파 여 

  론형성이었습니다. 정권교체만이 능사가 아닌데...조금만 잘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그 간단한 이치를 모르는 사람들이 왜 그리 많은것인지... ” 

 “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신가요 ? ” 

 계훈의 말의 의미를 잘 이해못한 광일이 이와같이 물었고 계훈이 그런 광일을 보며 이와같이 묻는다. 

 “ 2002년의 반미 촛불시위를 기억하시지요 ? ” 

 반미 촛불시위뿐만 아니라 노사모 열풍이라던가 2002년 월드컵때 있었던 붉은악마 응원단 열풍. 대략 그런것들이 2002년의 주된 이슈들이었다. 사실 정치적으론 2002년은 김대중 대통령의 임기 마지막해이기도 했는데, 과거 김영삼과 함께 또다른 민주화 운동의 한축이었던 김대중. 그 김대중이 김영삼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것이고 그 김대중 임기가 막바지에 치달으면서 김대중 정권의 실정이나 가족,측근비리도 계속 문제가 되던때인데 바로 그런 대통령의 임기 마지막해가 맞나 싶을정도로 그해는 대통령의 레임덕보다는 노사모니 붉은악마니 반미 촛불시위니 그런게 세상과 언론을 장식하면서 정권심판의 이슈는 어느덧 사람들 특히 젊은세대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지고 있었다. 최계훈의 말이 이어진다. 

 “ 그해 촛불시위 자체가 그...미군 장갑차 사고로 죽은 여중생들을 추모한다...또 그 

  로인한 한미행정협정 개정을 요구한다 그 목소리가 그런 대대적인 촛불시위로 번 

  진것인데...사실 그런 시위와 집회를 주도하고 이끄는 이들의 바램은 결국 ‘미군철 

  수’인거잖아요. 근데 그 본질을 모르는 많은 이들이 무조건 미군 장갑차 사고로  

  죽은 누구를 살려내라 단지 그 목소리에만 경도되어 잔뜩이나 몰려나와 광화문, 

  종로 일파를 가득 메우는 것을 보고서...솔직히 소름이 끼쳤습니다. ‘아, 이거 뭔 

  가 세상이 바뀌어도 단단히 바뀌었구나. 지금의 이 세상은 이전까지 내가 알던 

  그런 세상이 아니구나’ 그리고 어쩌면 그런 이전까지의 세상이 아닌 새로운 세 

  상으로 가는 그 출발점이자 서막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절 공포에 떨게 했습니다. 

 ” 

 계훈의 말의 의미를 알듯도 하고 모를듯도 하고 일단 광일은 진지하게 계훈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고 그의 말은 계속되었다. 

 “ 사실 저희가 처음에 ’북한 민주화 운동‘을 시작했을때만 해도 행여 불필요한 정치 

  적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가급적 국내 정치이슈에는 침묵을 지키거나 일정한 거리 

  를 유지하고 오직 북한인권과 탈북자 문제에만 집중하자는 그 생각이었습니다. 그 

  런데... ” 

 “ ...... ” 

 “ 저도 참 이런 표현을 쓰게될줄은 몰랐는데...’수구좌파‘...그냥 좌파라고 부르는 것 

  보단 그렇게 부르는게 오히려 제겐 심적부담이 덜하겠네요. 네, 우리 사회에서 수 

  구좌파들의 언론과 여론 형성 영향력이 어느덧 이렇게 대단해졌구나. 그런 생각에 

  놀랐던것입니다. ” 

 최계훈의 말이 대충 그 정도로 마무리되고 그 다음에 나선 것은 이길환이다. 이길환 역시 한때는 극렬한 운동권 출신. 그리고 현재는 뉴라이트 단체인 뉴라이트 연대에서 사무업무를 총괄하고 있는셈인데 그 길환이 하고싶은 이야기는 이것이었다. 

 “ 원래 저희가 궁극적으로 바라던 목적은 뉴라이트는 보수에서 기존의 수구적 이미 

  지 – 가령 흔히 말하는 부패나 군사독재의 후예 이런것들... - 를 말끔히 제거하고 

  또 그런 뉴라이트식 개혁이 어느정도 성공하면 좌파에서도 나름 자정의 목소리가  

  나와서 종북이나 86 운동권의 패거리 문화 이런게 청산된 새로운 진보...그것을 뉴 

  레프트라고 표현한다면 어떨까요 ? 뭐 어찌되었든 보수와 진보가 기존 보수-진보 

  가 완전히 개혁되어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한 뉴라이트와 뉴레프트가 손을 잡고 

  선의의 정책경쟁을 해나가는 그런 세상으로 나가게되기를 바랬던겁니다. 그런데... 

  뭔가 첫단추부터 이상하게 가고 있어요. ” 

 “ 그 첫단추가 결국 정치참여 문제를 말씀하시는건가요 ? ” 

 뉴라이트의 정치참여 문제는 이때 한참 내부적으로 논쟁이 계속될때라서 광일도 그 속사정은 어느정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길환과 최계훈의 고민을 대충 공감하던 때였는데, 여하튼 두 사람의 깊은 탄식은 이어지고 있었다. 

 “ 여하튼...정권교체만이 능사가 아닌 세상의 여론형성 흐름을 바꾸는게 중요한데... 

  그래서 뉴라이트 운동을 시민운동이나 씽크탱크 같은 방향으로 이끌려고 했던건데 

  왜 그걸 자꾸 이상한쪽으로 끌고가는지...게다가 정치참여라는게...사실 저희도 다  

  왕년에 학생운동,시민운동 다 해본사람들이라서 알아요. 정치란게 막상 그 바닥 뛰 

  어들면 별의별 어중이 떠중이 다 몰려들고 꼬이게 마련인겁니다. 근데 그걸 왜  

  생각 못하는건지... ” 

 뉴라이트 운동이 시작한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정치참여 문제나 2007년 정권교체 문제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기존의 보수우파 진영이) 문제들, 그런것들이 뉴라이트 운동을 변질시키고 이상한 방향으로 가게 만들 것 같다는 이 둘의 우려. 어떻게보면 앞으로 다가올 문제와 혼란상을 미리 예견하고 있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그 말미에 이길환이 다소 걱정되는 듯 이와같이 광일에게 묻는다. 

 “ 우린 그렇다치고 최광일 선생께선 이제 어떻게 하실건가요 ? ” 

 “ 어떡하다니요 ? 뭘요 ? ” 

 “ 현역작가로 활동하면서 보수우파 운동에 계속 가담하시는 것은 아무래도 여러가 

  지로 부담스러우실텐데...그래도 계속 우리와 함께 하시겠느냐 이 말인거죠. ” 

 “ 뭐 어차피 저야... ” 

 광일이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어간다. 

 “ 제가 드라마 작가로 데뷔한지 이제 한 6-7년 정도 되었지만 뭐 아직 그렇게 유명 

  하게 뜨는 작가라고 할수도 없고 또 솔직히 작가나 피디의 경우엔 직접 방송에 얼 

  굴을 내비치는 직업은 아니기 때문에 아주 톱스타급 작가나 피디가 아닌 다음엔 일 

  반인들이 얼굴을 아는 경우가 많지 않아요. 그리고 어차피 인터넷 웹진 활동은 가 

  명으로 활동하는거니까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저도... ” 

 “ ...... ” 

 “ 만약에 07년에 보수로 정권교체가 되면 이후엔 보수우파 운동은 좀 자제를 하고 

  본업인 드라마 작가 활동에만 전념할 생각입니다. 지금은 일단 그런 생각으로 있어 

  요. ” 

    


 최광일은 실제 90년대 후반 드라마 작가로 데뷔 이후 20년동안 현역작가로 활동하면서 약 10편 정도의 미니시리즈 그리고 10편 정도의 주말극과 일일극 그 외 3편의 대하사극을 집필해온 작가다. 다만 2천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아직 상대적으로 유명한 작가는 아니었기 때문에 북한인권운동이든 보수우파운동이든 적극적으로 가담하는데 그리 큰 지장은 없었다. 오히려 탈북자와 북한인권문제에 관심을 갖고 해당 기독교 선교단체나 북한인권단체등을 찾아다니던 90년대 후반 – 2천년대 초반 정도까지만 해도 아직은 자기 신분을 밝히는데 그렇게까지 꺼려질만한 것은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자신의 직업을 대체로 정정당당히 밝히는 편이었다. 허나 이후 보수성향 인터넷 웹진에서 논객으로 활동할때는 주로 가명으로 기고활동을 했고, 또 반핵반김 집회라던가 이런저런 보수우파 운동가들의 모임에 참석할때는 자신의 직업을 ’자영업‘을 한다던가 경기도의 신도시에서 4층짜리 상가건물을 운영하는 건물주라는 식으로 거짓으로 자기 신분을 둘러대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보수우파 운동 모임에서 최광일과 교류하는 이들은 – 최광일이 아직 그렇게까지 유명한 작가이거나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 그가 밝힌 신분을 대체로 그대로 믿는편이었다. 

 허나 07년 대선으로 10년만에 정권이 보수에게로 돌아온 이후로는 ’자신의 소임은 어느정도 다 했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이제 보수우파 운동에 적극 가담하는 것은 자신도 어느정도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때부턴 쭉 드라마 작가로서의 활동에만 전념하고 보수우파 운동 모임 참석은 가급적 자제해왔던 것이다. 그랬던 것이 10여년의 세월. 그 사이 다시 세상(정권)이 바뀌고 한편 어찌된 영문인지 그래도 지난 20년 드라마 작가로서 활동을 하는데는 별다른 지장이 없던 최광일도 한 1-2년전부터는 작가일이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광일도 나이 40대 후반에 이르다보니 후배들에게 점차 밀려나는 부분도 있었겠지만 뭔가 정치적인 의심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 무렵부터는 최광일은 유튜브에서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피력하는 유튜버로 활동하면서 두 개 정도의 케이블 시사프로에 패널로 출연하면서 그렇게 생계를 유지해가고 있었다. 

 “ 어차피 원래 20대때 제 생각도 제가 드라마 작가로 활동할수 있는 시간은 길어 

  야 20년 정도겠구나 막연히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그래서 30-40대 한 20년 정도 

  는 작가일에 전념하고 나이 50 넘어서 일이 떨어져 나가면 그때쯤엔 방송예능인 

  쪽으로 나가볼까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 

 사실 90년대까지만 해도 아직 ’방송예능인‘이란 개념은 없었고 다만 그 시절은 물론 거슬러 올라가면 70-80년대에도 방송 외부인이면서 이런저런 교양이나 시사프로에 패널로 자주 출연하는 그런 인사들이 더러 있기는 했다. 최광일은 20대때 자신의 50대 이후의 삶은 그런쪽을 롤모델로 삼았던 셈인데, 따라서 그렇게 막연히 바랬던 20대 시절의 소망과 인생구상은 어느정도는 이룬셈이라 볼수도 있을 것이다.  

 박인수 장로의 연락을 다시 받은 것은 8.15 집회에 참석했다 우연히 13년만에 그를 다시 만난일이 있은 두달뒤의 일이다. 사실 8.15 집회 직후에 코로나 ’2차 재확진‘ 사태가 터졌고 따라서 이후 정부의 거리두기 정책이 더 강화되었으니 최광일쪽이든 박인수 장로 쪽이든 서로 만나자고 연락을 취하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 추석연휴도 지나고 어느덧 날씨도 쌀쌀함을 느끼게 될 때쯤이 되어 박인수 장로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다. 경기도 남서지역에 위치한 신도시의 한 작은 서민형 빌라에 살고있는 최광일은 박인수 장로의 연락을 받고 약속장소로 나갔다. 

 “ 그래 그동안 생각은 잘 해 보았나 ? ” 

 “ 예 ? ” 

 “ 앞으로 어찌할것인가 생각을 해 보았냐 이 말일세. ” 

 두달전 박인수 장로와 나눴던 대화가 대충 한국교회든 보수우파 운동이든 다 초심을 잃은 것 같고 그래서 이런 사회분위기가 마치 성경에 나오는 다윗이나 솔로몬의 경우를 보는 것 같다는 그런식의 이야기를 나눴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시대에 솔로몬이나 다윗은 흥했으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고 초심을 잃고 불의에 빠졌을 때 결국 패망한 고대 이스라엘의 두 임금. 만약 그 경우와 오늘날 한국사회의 모습이 흡사하다면 그 이후의 모습은 과연 어찌될까. 그런 고민을 하던 최광일 권사에게 박인수 장로가 한 질문이 그와같았다. 

 “ 그래, 그러면 자네는 이제 어찌할텐가. ” 

 그런 문제에 대해 어찌할것이냐는 뜻의 물음일진대 최광일은 그날 박인수 장로 앞에서 제대로 된 답을 내놓지 못했다. 어쩌면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앞으로 무엇을 어찌해야할지‘에 대한 깊은 고민까진 해보지 않았던 듯. 그렇다고 그날 박인수 장로가 무슨 ’숙제‘라도 내듯이 한달후든 두달후든 답을 가져오라는 요구는 한적 없는데, 여하튼 자신을 두달만에 만난 자리에서 다시 이런 이야기를 꺼내니 광일은 당혹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그런 최광일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며 박인수 장로의 말이 이어진다. 

 “ 아직 그 생각까진 해보지 못한게로군... ” 

 “ 뭐 솔직히...딱히 기도외엔 제가 할수있는일이 있을련지요... ” 

 초심을 잃은 한국교회, 초심을 잃은 한국 정치판(또는 좌우갈등이 갈수록 극심해지는 정치판). 과연 이런 시대에 최광일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볼수 있을까. 그래서 더더욱 박인수 장로의 물음엔 답하기가 난감해지는데 그런 광일을 보며 박인수의 말이 다시금 이어진다. 

 “ 내...자네에게 그러잖아도 이 이야기를 한번 들려주고 싶어 자네를 다시 보자고 했 

  네. ” 

 “ 어떤 이야기를 말씀이신지요. ” 

 “ 자네, 감리교회 원로목사 3인방에 대해서 혹시 들어보았나 ? (* 감리교단 현재 실제 

   상황과는 관련없는 가상상황이니 이 점 오해없기 바랍니다.)  

 감리교회 원로목사 3인방 ? 그런 이야긴 일단 최광일이 들어본적이 없어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그러나 모범적인 크리스찬 가정이라던가 사회에 귀감이 될만한 행적을 걸어온 그런 원로목사님들의 이야기들은 굳이 관심을 갖고 찾아보자면 대형서점 기독교 서적 매장 같은데서 지금도 쉽게 찾아볼수가 있다. 그러나 원로목사 3인방이 되었든 무엇이 되었든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좀 뜬금없이 들려져서인지 광일은 여전이 의아하게 박인수 장로를 바라본다. 박인수의 말은 차분하게 다시금 이어진다. 

 “ 내 자네에게 실은 특별히 감리교회 원로목사 3인방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자 

  네를 이 자리에 부른것일세. ”



- 3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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