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벌받는 여자 8
미주는 어차피 방송활동을 계속 하고 있으니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버지를 보살피러 고향 보령에 그렇게 자주 내려갈 처지는 못 되었다. 게다가 미주는 근래들어 성우로써의 능력을 점차 인정받는 분위기로 가고 있어 그 방송 스케줄이 차츰 더 바빠지고 있었다. 최근에는 자신이 공채로 입사한 ‘애니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케이블에서 방송하는 애니매이션에도 캐스팅이 되어 그 역할도 하는중이었다. 그렇게 바쁜 일상을 계속 보내고 있는 미주. 그러다 하루는 짬이 생겨 아버지가 걱정되어 고향인 보령에 내려가보려 했다. 헌데 뜻밖에도 그 자리에 선배 노승욱도 동행하고 있었다.
“ 노선생님...원래 성우들은 다 이렇습니까 ? ”
“ 예 ? ”
일반적인 상식으로서도 성우로선 한참 선배에 해당하는 승욱이 일개 신입 후배인 미주의 집안 문제에 이렇게까지 신경을 쓴다는 것 그렇게 흔히 볼 수 있는 일은 분명 아니다. 게다가 미주의 부모님이 아무리 시골에서 쭉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분들이더라도 요즘 세상에 TV나 신문을 통해 접해볼수 있는 정보는 어느정도 있었을것이고 그렇게 귀동냥으로라도 들은 서울에서의 직장생활이라던가 방송가 생리 그런 것을 생각해봐도 나이많은 중년의 선배가 젊은 일개 후배의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까지 신경을 쓴다는 것은 잘 이해가 가지않아 이와같이 물은것이고 승욱은 잠시 망설이는 듯 하다 허심탄회하게 답한다.
“ 전 그저 한참 장래가 기대되는 유망주인 미주가 걱정이 되어 좀 더 신경쓰고 아
버님을 보살펴드리려는것뿐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그러니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
도 됩니다. ”
승욱 입장에선 나이어린 미주가 어느날 갑자기 쓰러지신 아버지의 문제를 어떻게 해야할줄 모르자 그런점이 염려되어 조금이라도 나이많고 인생경험이 많은 자신이 좀 신경을 써주고픈 그런 의도가 담겨있던것인지도 모른다. 미주 입장에서도 부담이 되었을수 있는 일인데, 하지만 되려 일단 그동안 크고작은 인연이 없지않아 있었고 그런 승욱이 계속 자신에게 신경을 써주니 마음의 짐을 더는면도 있곤 해서 승욱의 이런 행동을 딱히 말리거나 사양하진 않았다. 함께 몸이 불편하신 아버지를 산책삼아 외출도 시켜드리고 그렇게 미주 아버지를 돌봐드리고 있는 미주와 승욱. 한편 미주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나름 궁금한게 있어 승욱에게 이렇게 물었다.
“ 헌데 선생님. 우리 미주가 정말 잘하고 있는건 맞는건가요 ? 정말 재능이 있고
방송가에서 인정을 받고 있는 그런건가요 ? ”
일단 미주 어머니가 문맹은 아니고 그래도 고등학교까진 졸업을 한 사람이고 그리고 한참 젊은 시절에는 아침마다 배달되어오는 조간신문을 시사관련 기사를 빼놓지않고 꼬박꼬박 챙겨보기까지 하던 그런 여자다. 따라서 ‘유망주’란 단어 뜻을 아주 모를 여자는 분명 아니다. 따라서 승욱의 입에서 미주를 두고 그런 표현까지 나오자 한켠으론 기대도 되고 반면 또 한편으로는 걱정과 염려도 되는면도 있어 그와같이 물은 것이다. 승욱이 그런 미주어머니를 안심시키려는 듯 말을 건넨다.
“ 그럼요 걱정 마세요. 솔직히 미주양이 오히려 요즘 계속 방송 스케줄이 많아져서
이러다 아프신 아버님을 돌봐드릴 겨를마저 없으면 어찌하느냐고 그런 걱정까지 할
정도니까요. 오죽하면 제가 그런 미주 안심시켜주려고 선배인 제가 직접 데리고 미
주 부모님을 찾아뵈러 여기까지 내려왔겠어요. 그러니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
니다 미주 어머님. ”
미주를 직접 데리고 그녀의 고향에까지 내려온게 겸사겸사 미주의 그런 현실을 감안 배려해주는 면이 있었다는 설명까지 그와같이 덧붙인 승욱. 공연히 미주 부모님을 안심시켜드리기 위해 하는 소리가 아니라면 딸이 어쨌든 서울에서 제가 하는 일에서 제 몫 제대로 하면서 인정받는 분위기라니 부모 입장에선 분명 안심이 될 일이리라. 그렇게 승욱은 미주와 함께 그날 하루 보령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져 일단 병원에서 퇴원은 했지만 이제 다른이들의 도움과 부축을 받으며 일상을 보내야하는 미주 아버지를 보살펴드리고 온 것이다. 원래는 미주 부모님댁에서 함께 하루를 묵고 다음날 올라올 예정이었으니 승욱이 갑자기 서울에 급한 볼일이 생겨 미주만 고향집에서 하루를 더 묵고 승욱은 그날 밤기차를 타고 바로 서울로 올라갔다.
“ 선배님... ”
그렇게 세심하게 신경을 써주는 노승욱에 대한 부담과 감사함에 하루는 미주가 직접 승욱에게 작은 저녁식사를 대접했다. 식당같은데서 밥을 산다던가 하는 것은 아니고 부족한 솜씨나마 자신의 월세방에 승욱을 직접 불러 식사를 대접한 것이다. 미주에게도 부모님 정도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음식솜씨를 선보이는게 사실상 첫 경험이라서일까. 긴장되고 설레는 마음으로 승욱의 반응을 지켜보려했다.
“ 맛있네요 미주양. ”
“ 정말이세요 선배님 ? ”
외동딸로 귀하게 자랐다면 자랐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미주. 다만 농사를 짓는 부모님 밑에서 대체로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미주이기 때문에 어린시절부터 이따금씩 어머니의 가사일을 조금씩 도와드리거나 한적은 있다. 그때 간단하게 국이나 찌개 끓이는 법을 익힌적도 있고 그 솜씨로 아버지나 어머니한테까진 직접 대접해본 경험이 있지만 그 이외의 사람에게 선보이는 것은 사실상 처음. 따라서 승욱의 반응이 어떨지 몰라 긴장했는데, 승욱이 일단 미소띤 얼굴로 이와같이 반응하자 미주에게도 화색이 돈다. 미주의 말이 이어진다.
“ 선배님도 아시다시피 전 아직 모든게 다 부족하고 서투른 여자에요. 집에서 그냥
엄마한테 된장찌개 끓이는법과 콩나물국 끓이는법만 어깨너머로 배운건데...여하튼
맛있다니 다행이네요. 그리고 감사하고요. ”
“ 하하...별 걱정을 다하고 있었네요 미주양. 정말 맛있어요.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한
편이에요. ”
승욱의 거듭되는 칭찬에 공연히 얼굴이 빨개지는 미주. 새초롬해져서 살짝 혀를 낼름 내보이기까지 한다. 승욱이 그런 미주의 얼굴이 귀여워 어쩔줄 모르고. 옛날같으면 너무 귀엽고 이뻐보여 어디 한번 쓰다듬어주거나 안아주기라도 할텐데 요즘은 성추행 같은 문제가 발생할수 있으니 큰일날 짓이긴 하다. 여하튼 미주와 승욱 사이에 대체로 훈훈한 분위기가 감도는것만은 사실. 헌데 승욱이 그러다 문득 미주에게 이런 제안을 한다.
“ 미주양. ”
“ 네 선배님. ”
“ 우리 언제 한번 날 잡아서 여행한번 안 갈래요 ? ”
“ 여행...이요 ? ”
좀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황당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미주. 일단 승욱의 말이 이어진다.
“ 내가 미주양에게 꼭 한번 보여주고 싶은게 있어서 그래요. ”
“ ...... ”
“ 좀 갑작스럽고 당혹스러운 제안이겠지만 미주양만 괜찮다면 미주양에게 꼭 좀 보
여주고 싶은게 있어요. 그러니 우리 언제 한번 날 잡아서 여행한번 갑시다. ”
승욱이 미주를 데려간곳은 울산의 한 바닷가였다. 연말연시나 이럴때가 되면 사람들이 해돋이를 구경하러 오기도 하는 그곳. 특히 새해 첫날엔 한해의 첫 일출을 보고싶다며 많은 관광객이 몰리기도 하는 바로 그곳이다. 다만 지금은 그럴때는 아니고 승욱이 미주를 데리고 그곳에 도착한 시간도 그렇게 이른 새벽시간은 아니었으니 승욱은 미주를 데리고 그곳 여기저기 경치를 구경하며 함께 기념사진도 찍고 그러면서 한참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참을 그러다 잠시 한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승욱이 새삼 감회서린 얼굴로 미주를 보며 말을 건넨다.
“ 미주야...사실 난... ”
“ ...... ”
“ 20대 후반 시절에 혼자 여길 찾은적이 있었어. ”
“ 혼자서요 ? ”
‘왜 혼자였느냐 ?’는 궁금함과 의아함이라도 담겨있는듯한 그런 느낌의 질문. 그러자 승욱은 몰라서 묻느냐는 듯 머쓱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간다.
“ 그야 그때는 혼자였으니 혼자온거지. 여자친구나 뭐 그런건 없던 시절이니까말야.
그리고 실은 그때가 바로 1999년의 마지막날. 바로 20세기가 저물고 새로운 천년
의 시작을 코앞에 둔 그 시점이었는데말야...원래는 내 20대가 저물어가는날과 함
께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는 그 시간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내고 싶었던게...유
치하지만...내 젊은시절 작은 소망이었었는데... ”
“ ...... ”
“ 다행히 새천년 새해 첫 일출을 이곳에서 보게되는 소망은 이루었지만 그 시간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내는 그것만은 현실로 이루지 못했었구나. ”
새삼 그 시절이 떠올라 나름 어떤 아쉬움과 아픔이라도 있는 듯 아련한 감정과 함께 말을 이어가는 승욱. 순간 눈시울까지 붉어져 잠시 스스로를 진정시킨뒤 차분하게 승욱의 말은 좀 더 이어진다.
“ 그때 정말...사랑하는 사람이라도 곁에 있었다면 그 순간이 금상첨화였었을 것을...
”
“ ...... ”
“ 그런면에서 그날 그 순간 두가지가 아쉬웠어. 바로 1999년 12월 31일. 지나간 천
년의 마지막 밤을 여기서 보낼 때 그 느낌이 말이지. 이제 다음날 아침이 되면 난
여기서 여지없이 새천년의 첫 해를 볼수 있게 되겠지만...오늘이 지나면 이제 새로
운 천년을 또다시 맞이할일은 내 생애에 두 번다시 없을것이고...오늘이 지나면 나
의 20대도 두 번다시 돌아오지 않는데... ”
새삼 그날 그 순간의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거듭 용솟음치는듯한 승욱. 미주가 그런 승욱을 안타까우면서도 약간 불안한 심정으로 바라보고있고 승욱의 말은 좀 더 이어진다.
“ 내 20대의 마지막 밤을...지나간 천년의 마지막 밤을...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보내
고 싶었던...그 소망만큼은 끝내 이루지 못했구나. 그 아쉬움 때문에 그 순간을 견
디기가 정말 힘들었던거야. 오늘이 지나면 내 20대는 두 번다시 돌아오지 않을텐데
...오늘이 지나면...새로운 천년을 또다시 맞이하는 기회는 두 번다시 없을텐데...바
로 그 순간을 짝없이 솔로인 상태로 지내고 맞이해야한다는게 얼마나 서럽고 안타
깝던지... ”
승욱이 현재 함께 살고있는 다섯 살 연하의 아내 정유진과 결혼한 것은 15년전인 2년대 중반의 일. 당연히 새천년의 첫해인 2천년도에선 수년이 지난뒤의 일이다. 그리고 무슨 피치못할 사연이라도 있었던것인지 아니면 어찌어찌 살다보다 자연스레 그리된것인지는 몰라도 지나간 천년의 마지막밤을 그리고 새천년의 첫 아침을 홀로 보내고 맞이해야 한다는게 그토록 서럽고 안타깝고 아쉬웠다는 승욱. 새로운 천년과 함께 하필이면 자신의 20대도 함께 저물어가는데 바로 그 순간 자신이 혼자라는 것이 그토록 아쉽고 후회되더라는 그 심경을 지금 미주앞에서 하고있는 것이다. 자신만의 감정에 취해 그만 흐느끼는 노승욱을 미주가 눈물을 닦아주고 있고 승욱은 미주를 데리고 인근 식당으로 가서 함께 저녁을 먹은뒤 인근에 보이는 모텔방에서 하룻밤 같이 묵기로 했다.
“ 미주야, 조금 있다가 저 창가로 다가와봐봐. ”
모텔방에서 잠시 휴식을 취히다 어느덧 밤깊은 시간이 되었을 때 승욱이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스마트폰에 문자가 들어와 열어보니 다름아닌 승욱이 보낸것이었고 이렇게 적혀있었다. 그리고 거기엔 이렇게 적혀있었다. ‘지금 창가로 와보라니까.’ 의아한 마음에 창가로 가보니 모텔 앞마당에서 승욱이 폭죽같은 것을 준비해놓고 그것을 터트리며 그것을 마구 흔들어대고 있었다. 그리고 저만치 양초에 불을 붙여서 하트모양과 함께 이렇게 써놓은 것이 보였다. ‘나의 미주. 영원하렴’ 무엇을 영원하라는것인지 그 주체가 불분명하긴 하지만, 어차피 양초를 늘어놓아 글자를 만드는게 너무 긴 문장을 만들긴 쉽지 않았을테니 간단하게 그렇게 적은것이겠지만, 성우로서 앞으로 계속 승승장구하라는 의미든, (비록 지금 아버지가 아프신 상태이지만) 가족들과의 행복한 시간을 영원히 계속 보낼수 있길 바란다는 의미든 아니면 미주와 승욱이 이렇게 성우 선후배간으로 좋은 관계의 시간을 영원토록 보내길 바란다는 그런 의미든 어떤 의미로든 미주에게 감격으로 와닿지 않을수 없을 것이다. 승욱의 생각지도 못한 이벤트에 너무 감격한 미주가 바로 모텔방에서 맨발로 달려나와 승욱이 있는곳으로 와서는 그의 품에 안겼다.
“ 선배니임... ”
그러면서 울먹이는 미주. 승욱이 미주의 눈물을 닦아주다. 일단 이벤트를 펼치느라 어질러져있던 것은 잠시 치우고 그리고 승욱이 미주를 데리고 모텔방안으로 돌아온다.
“ 선배님. ”
모텔방 침대에 미주와 승욱은 나란히 누워있다. 승욱의 품에 안긴채 미주의 말이 이어진다.
“ 이대로 내일 아침이 밝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
“ 그건 갑자기 무슨말이지 미주 ? ”
“ 뭔가...이전까지 느껴보지 못한...묘한 안온함과 평안함. 그런게 제게 밀려들고 있
어요. 혹시 ‘행복’이란 감정이 이런것일까. 그런 생각도 들고요. 여하튼 뭔가 한두
마디 간단한 단어로는 표현하기 힘든...제 가슴 한켠이 한없이 뜨거워지면서도 뭔
가가 푹 가라앉는 느낌...굳이 비유하자면 목욕탕에서 따뜻한 욕실에 제 몸을 맡겼
을 때 그 따뜻한 물속으로 가라앉는 느낌이랄까요. 아마도 그런... ”
그런 느낌을 이전에 엮어보지 못해서일까. 미주는 그 알 수 없는 감정으로 확실히 혼란스러워하는 듯 하다. 그러면서도 지금 느끼는 그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미주. 그래서 감격했음인지 아니면 그래서 감정이 북받침인지 미주의 고백이 좀 더 이어진다.
“ 그리고 무엇보다...이 시간이 이대로 계속 되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 이 묘한 따뜻함과 평온함. 이 시간이 깨지말고 계속 지속되었다는... ”
혹시 내일 아침 날이 밝으면 아침 찬공기에라도 이 따사롭고 온화한 감정이 흩어지진 않을지 그런 불안한 생각이라도 드는것일까. 여하튼 뭔가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그런 느낌. 그런 느낌 한가운데서 미주는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고, 무엇보다 이 행복한 순간이 지속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용솟음쳐서인지 미주는 이렇게 고백한다.
“ 그냥 이대로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어요. 내일 아침 날이 밝지않고...차라리
시간이 멈춰서... ”
술도 한잔 하지 않은 두 사람이고 지금 이 순간 그리 밤늦은 시간이 아니라서인지 별로 졸립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형언할수 없는 편안함속에 승욱의 품에 안긴 미주가 이런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 내일 아침이 밝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승욱이 그런 미주를 보며 말을 건넨다.
“ 나도 솔직히 이대로... ”
“ ...... ”
“ 내일 아침 눈이 떠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냥 지금 이 순간 이
대로가 그냥 지속되어... ”
설마 승욱도 지금 미주가 느끼는 그 감정을 그대로 느끼는것일까. 알 수 없는 한숨을 내쉰뒤 승욱의 말이 이어진다.
“ 나 역시 이대로 눈을 감은채 미주와 함께 영원히 잠들었으면...내일 아침 눈이 밝
아 눈이 떠지지 않은채... ”
“ ...... ”
“ 미주 옆에서 영원히 눈을 감으면 여한이 없을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이 들어... ”
울산의 모텔방에서 승욱은 이대로 눈이 떠지지 않으면 좋겠다고 했고 미주는 이대로 시간이 멈춰지지 않아 승욱과 함께 있으면서 느끼는 평온함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란다고 했지만, 시간과 우주의 섭리가 단지 이 둘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에 다음날 아침이 되어 날은 밝았고 승욱과 미주는 눈을 떠야 했다. 다만 이렇게 서울로 올라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야한다는 생각을 하니 새삼 미주는 그게 싫고 안타깝고 아쉬운지 한바탕 울음을 터트리기까지 했다. 그런 미주를 달래서 겨우 서울로 데려온 승욱. 미주는 서울 인근의 자신의 월세방으로 돌아가며 또 한바탕 울음을 터트리기까지 했다. 이젠 승욱과 떨어져 있는 시간 자체가 그렇게 싫은것인지.
한편 승욱과 미주는 한바탕 그렇게 짧고 굵은 밀월여행을 다녀왔지만 방송국은 난리가 안 날수가 없었다. 승욱은 어차피 프리랜서 몸이니 촬영스케줄이 없을 때 하루이틀 혼자 잠적한다고 크게 문제될일은 없지만 미주는 여전히 방송국에 얽매여있는 몸인데다가 한참 더빙중인 작품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갑자기 미주가 연락이 끊기자 미주가 더빙을 맡아야하는 프로그램 제작진,출연진은 한바탕 난리가 났었던 것이다. 혹시 미주에게 무슨일이 벌어진 것은 아닌가 다들 걱정을 하기도 했고, 다행히 이틀만에 미주가 방송국에 나타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그녀를 책망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결국 대선배격이면서 현재 미주가 출연하고 있는 프로에 함께 더빙을 하고있는 임민아가 그녀를 다그쳤다.
“ 아니, 넌 도대체 무슨 애가...어딜 가거나 다른 볼일이 있으면 있다고 말을 해야
할거아냐.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그렇게 감자기 잠적을 해버리면 어떻게 해 ?
너 한 사람이 빠짐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출연진,제작진에게 지장을 초래하는지 그
걸 알기나 해 ? ”
그야말로 생각없이 구는 후배를 다그치는 선배의 모습으로 돌아와 미주를 심하게 야단쳤고 미주야 자신이 잘못한일이니 그저 ‘죄송합니다’ 하고 사죄의 말만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미주 아버님 몸이 불편하시다는 이야기 정도는 민아도 얼핏 들은일이 있어 그게 걱정되어 묻는다.
“ 아버님은 괜찮으신거야 ? ”
“ 퇴원하셔서 집에 계신데...그래도 거동도 하시고 요즘은 말씀도 좀 하시고 그러
세요. 상태가 아주 호전되었다고 할순 없지만...그리고 저 아버지 때문에 고향 내려
갔던것 아니에요. ”
“ 별일없으시다니 다행이지만...그나저나 아버지 때문에 고향내려간것도 아니면 대체
어딜 그렇게 말도없이 다녀왔던거야 ? ”
고향의 아버님도 그렇게 몸도 불편하게 계시다는데 아무런 생각없이 어디 놀러가거나 여행이라도 다녀왔냐는 듯 민아가 거듭 미주를 책망하고, 미주는 더더욱 얼굴이 붉어져 무슨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있다. 다만 이쯤되면 미주도 착한면이 있다면 있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쯤되면 차라리 ‘아버님이 편찮으셔서’ 하는식의 핑계를 댔을수도 있을터인데, 차마 양심의 가책때문인지 아니면 민아가 너무 엄히 야단을 쳐서 황망해졌음인지 적어도 그 이유때문은 아니었음은 싱겁게 시인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후 미주는 민아와 다시 마주한 자리에서 좀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 저...선배님. ”
“ 왜 ? 무슨 할말이라도 있어 ? ”
지난번 잠적소동은 잠적소동이고 민아에게 미주는 여전히 아끼는 후배였기에 따뜻한 음성으로 묻고 있다. 미주의 말이 이어진다.
“ 저...실은...나이많은 남자와 교제하는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 ”
“ 갑자기 그게 무슨소리야 ? 남자라도 생겼다는 소리야 ? ”
지난번 갑작스러운 잠적소동까지 염두에 둔다면 뭔가 심상찮은 상황이 분명하지 않은가. 그레서 민아가 다소 놀라워하며 그와같이 묻고 미주는 미주대로 나름 그동안 고민이 많았는지 솔직하게 민아 앞에서 속내를 토로한다.
“ 솔직히 저...이런 감정 처음 느껴봤어요. ”
“ 어떤 감정을 느껴봤다는건데 ? ”
“ 뭐랄까...어떻게 표현을 해야할지. 뭔가 제 몸을 따뜻한 욕조에 담그는듯한 그런
느낌이랄까. 몸과 마음이 한없이 따뜻하고 온화해지는 느낌...아니면 저 자신이 따
뜻하게 어딘가 내려앉는듯한 그런 느낌이랄까... ”
사실 미주도 학교다닐때는 대체로 공부에 더 많은 신경을 쏟는 편이었지 남자라던가 그런 문제는 별 관심이 없던 여자다. 그것은 대학을 다니거나 이후 성우공채에 합격 지금껏 활동하면서도 마찬가지였고. 특별히 남자에게 어떤 이성으로서의 감정을 느껴본다던가 깊은 관계 같은 것을 가져본 경험은 없어서일까. 승욱과 함께 있을 때 느꼈던 그 감정의 실체를 알수 없어서 이와같이 묻는것이고 민아는 잠시나마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짐을 느끼며 일단 차분히 묻는다.
“ 그 사람...좋아하니 ? ”
미주가 지금 어떤 사람을 사귀는지 그 정보는 지금 민아에게 전혀 없지만 일단 처음으로 사랑에 빠진듯한 나이어린 후배를 인생의 대선배로서 잘 인도해줘야겠다는 어떤 사명감까지 생기며 진지하게 묻고 일단 미주는 사실대로 답한다.
“ 손만잡고 잤어요.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손도 잡지 않고 그냥 침대에서 나란히
잠만 잤어요. 모텔방에서... ”
“ 뭐 ? 모텔방 ? ”
순간 놀란 듯 민아가 눈이 휘둥그래지지만 미주는 오해하지말라는 듯 거듭 손을 내저으며 ‘잠만 함께 잤다’는 사실을 거듭 밝히고 하지만 민아가 그러자 더더욱 고민스럽다는 듯 이렇게 말한다.
“ 그러니까...니 말인즉슨...관계는 갖지 않고 모텔방에서 잠만 같이 잤다 그 말이지
? 그것도 손도 안 잡고 ? ”
“ 네, 손도 안 잡고 그냥 나란히 침대에 누워서 잠만 잤다니까요. ”
순간 한숨을 잠시 내쉬어보는 민아. 고민을 하는 듯 하다 입을 연다.
“ 좀...이상하구나. ”
“ 뭐가 이상하다는건데요 선배님 ? ”
“ 뭐...그 남자에 대해서 내가 아는바가 전혀 없으니 내가 함부로 뭐라고 할 수는 없
겠지만...혹시 좀 비겁한 사람은 아닐까 그런 걱정이 좀 생겨. ”
만약 무작정 나이어린 미주에게 성관계를 요구했거나 또는 그러다 무슨일이 생겼을 때 자신은 책임없다는 듯 빠져나가려 한다면 무책임한 남자거나 그저 성관계만 밝히는 늑대같은 부류라고 비난할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주의 말인즉슨 성관계는커녕 손도 안잡고 글자그대로 ‘잠만’ 잤다는 것 아닌가. 그런 미주의 말에 고민스러워하던 민아의 말이 이어진다.
“ 물론...그 남자가 널 무작정 건드리진 않았다는점에서 적어도 널 지켜주거나 아껴
주고픈 그런 남자로구나. 또 함부로 아무 여자나 건드리는 그런 남자는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최소한 인격적으론 괜찮은 사람 같다는 생각은 들어. 하지만... ”
“ ...... ”
“ 반면 또 이런 생각도 들거든. 오히려 넌 지금 마치 그 남자를 사랑이라도 한다는
듯 말하고 있지만 그 남자의 경우엔 널 그런 존재로까지 생각하지 않는다던가...좀
미안한 이약지만 널 여자나 이성으로써의 매력을 느끼지 못해 그렇게 나왔을수도
있어. ”
“ 그런걸까요 ? ”
“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는데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그런 남자
의 속을 어찌 알겠니. 여하튼 니가 좀 신중할 필요가 있어보여 하는소리야. ”
“ ...... ”
“ 아닌말로 미주는 아직 나이도 어리고... - (현재 민아가 알고 있기로는) 이전에 다
른 남자를 사귀어본 경험이 있는지까진 모르겠지만...어쩌면 아직 이런 감정이나 경
험이 처음이기 때문에 어설프고 서툰 감정일수도 있어. 그래서 그런 니가 혹시 행
여 일시적으로 그런 감정에 잘못 휩싸였다가 나중에 상처받게 되지 않을까 그걸 걱
정한다 그 말이지. ”
진심으로 후배를 위해주는 말 같긴 하지만 미주가 지금 민아의 말을 곧이 듣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 허나 선배의 이런 충고를 귀담아듣지 않는다면 애써 이런 나이많은 선배를 만나 충고를 들을 이유나 의미 자체가 없는 것 아닌가. - 미주가 일단 나름 다급한 궁금함이 있어 묻는다.
“ 나이차이는 상관없는거죠 ? 남녀간에 사랑하는데... ”
“ 아니, 도대체 몇 살이나 많은 사람이길래 그래 ? ”
나이많은 남자와 교제하는것에 대해 어찌 생각하느냐는 물음이 애초 미주 화두였고 그러니 지금 미주가 사귄다는 남자가 나이많은 남자란것만은 분명한 것 같아 이와같이 물은 민아. 미주가 머뭇거리다 답한다.
“ 한...스무살 정도... ? ”
“ 스무살 ? ”
순간 좀 놀란 듯이 반응하는 민아. 나이차이가 좀 나봤자 기껏 한 열 살 좀 이상 차이나는 남자려니 막연히 짐작했던것인지. 헌데 ‘스무살정도’라고만 미주고 답했는데도 민아는 이미 놀라는 모습이다. 걱정되는 듯 민아가 묻는다.
“ 설마 유부남은 아니지 ? ”
“ 아...아닐거에요. 설마... ”
순간 당황한 듯 손을 내저으며 답하는 미주. 물론 이미 노승욱은 미주에게 단순한 방송국 성우 선후배간의 사이는 아니고, 적어도 가족관계에 대해 한두번쯤 언급 안한적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미주가 승욱의 나이까진 몰라도 가족관계에 대한 정보는 여태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것인지 일단 이렇게 반응하는 모습을 보이고, 그런 미주를 보며 민아의 말은 이어진다.
“ 솔직히 난 나이차이는 별 상관 안하는 사람인데...그래도 스무살차이는 좀 많은 것
같다. 그리고...난 뭐 이혼남하고 사귀는것까진 상관없다고 봐. 하지만 유부남은 곤
란해. ”
“ ...... ”
“ 기왕지사 말 나온김에 덧붙이는 이야기지만 난 연예인이고 유명인사고 누가 이혼
을했든 재혼을 했든 그런것에 대해 속사정을 잘 모르는 제3자가 막 왈가왈부하고
그러는것 별로야. 아니...막말로 남이야 이혼을 했든 재혼을 했든 지들이 뭔 상관
인건데 ? 그게 그렇게 불만이 많으면 지들이 대신 살아주던가... ”
그 와중에도 괜시리 좀 웃기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미주가 피식 웃어보이고 민아의 말이 좀 더 이어진다.
“ 여하튼 나이차이가 좀 지더라도 이혼남인 경우는 상관없어. 하지만 유부남은 곤
란해. 설마 그런건 아니겠지 ? ”
“ 선배님... ”
“ 나 나이많고 애딸린 이혼남과 사귀는것까진 뭐라고 하지 않지만 유부남 사귀는 어
린애들은 딱 질색야. 무슨말인지 알겠어 ? 애딸린 나이많은 이혼남은 괜찮지만 유
부남은 안된다는 소리야 !!! 나이가 많건적건...어딜 남자가 없어서 멀쩡히 가정있는
남자 집안을 파괴하려들어. ”
할말잃은 미주를 보며 민아가 거듭 묻는다.
“ 어쨌든 유부남은 아닌거지 미주야 ? ”
“ ...... ”
“ 괜찮으니 솔직히 말해봐. 나 나이많은 애딸린 이혼남을 사귀는것까진 이해해 준대
두 그러네. 유부남만 아니면 돼. ”
- 5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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