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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야당 잔혹사 - 1960년대에 4연패한 야당을 아시나요 ? 정치,시사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요즘 젊은 사람들 이해를 돕기위해 한국 야당사를 좀 간략하게 설명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한겨레 신문 성한용 선임기자가 4년전 20대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지금까지 총선에서 진보가 이긴 것은 17대 총선 단 한차례’라는 식의 글을 쓴적이 있는데, 무슨 취지에서 이런 글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그 이유를 지금부터 설명하겠다.


 우선 우리나라 야당사를 설명하자면 90년 3당합당 이전과 이후를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90년 민정-민주-공화 3당합당으로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중도 보수성향) 계열이 여권에 합류함으로써 민주화 세력의 한 축이 보수정당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후는 한동안 김대중 총재가 이끄는 정당이 야권의 주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사실 보수-진보의 구분은 80년대까지는 물론 한 90년대 중반 까지도 별 의미가 없다고 봐야한다. 군사정권 시절까지만 해도 야당은 대체로 ‘반공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보수야당’이었으며 김영삼,김대중이 야당을 이끌던 시절까지만 해도 대체로 ‘중도개혁’을 표방한 정당으로 봐야지 ‘좌파’와는 거리가 매우 멀다. 우리나라 정당사에서 보수-진보 구분이 시작된 것은 대체로 21세기에 들어서서부터로 봐야한다.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 요즘은 보수-진보 거대 양당의 세력이 비슷해져서 승패의 구분을 원내 제1당 또는 원내 과반을 누가 확보했느냐를 승패의 기준으로 잡지만 80년대까지만 해도 야당의 승리기준선은 ‘개헌선’을 확보한 3분의1 이상이 ‘승리기준’이었다. 그만큼 야당의 세력이 적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한국 정당사 전체와 야당사를 설명하면서 본론으로 들어가게 될 것 같은데 일단 이승만 정권 시절의 여야 구분은 6.25 이전까지만 해도 별 의미가 없다. 초창기 이승만 정권은 일종의 무당파 내지는 연립정부 같은 형태였고 한민당 계열이나 심지어 진보당 계열까지도 내각에 참여하게 된 곡절이 그래서다. (조봉암,장면,장택상,조병옥 등) 그러다 ‘자유당’이 창당된게 1951년 12월의 일이고, 오늘날 민주당이 자신들의 뿌리라고 지향하는 (그러나 이 시절에는 ‘반공보수’ 성향이었던) ‘민주당’이 창당된게 1955년의 일이다.


 1대(48년), 2대(50년) 총선은 오늘날같은 정당제도가 본격적으로 자리잡기 이전이니 제외하고 54년 3대 총선은 자유당의 대거 원내진출 그리고 4대 총선에선 민주당이 대거 약진한다.(의원 정수 233석중 자유당 126석, 민주당 79석). 한편 대선의 경우엔 민주당이 연속 불운이 겹쳐 3대(56년)에선 신익희 후보, 4대에선(60년) 조병옥 후보가 연달아 대선을 앞두고 급서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리고 1960년 저 유명한 3.15 부정선거로 촉발된 4.19 의거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게 된다. 그리고 뒤를 이어 탄생한 민주당 정부. 5대 총선(60년 7월)에선 민주당이 압승한다. (양원제. 민의원 58석중 31명, 참의원 233석중 175명) 자유당이 몰락한 상황에서 사실상 민주당 원팀으로 치른 선거나 다름없었다.


 5.16의 뒤를 이어 박정희 정권이 탄생한 60년대. 이때 야당은 총 ‘4연패’란 치욕을 겪게된다. 한마디로 63년 대선과 총선, 67년 대선과 총선 4번의 선거를 모두 패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당선된 대선이야 그렇다치고, 총선의 경우 63년 치러진 6대 총선에서 의원정수 175명중 공화당 110석, 민정당(民政黨) 41석, 민주당 13석, 자유민주당 9석. 의원정수가 175명인데 야권 의석을 모두 합해봐야 63명밖에 되지 않았다. 이때 야당 참패의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야권 분열이었다. 자유당 시절부터 민주당 정권까지 이어온 소위 민주당 신,구파 갈등에서 시작된 야권 갈등이 이때까지도 지속되어 야당이 하나되지 못하고 사분오열된게 가장 큰 원인이었던 것이다.


 7대 총선 역시 야당의 패배. 통합야당 ‘신민당’이 출범한 보람도 없이 175석중 공화당 125석, 신민당 45석에 그치고 만다. 이때 부정선거 시비가 일어나 ‘6.8 부정선거’ 시위사태가 일기도 했지만 야당의 패인은 역시 내부분열에 있었던 것으로 봐야할 것 같다. 그리고 박정희가 3선에 도전하는 가운데 40대 김대중 후보가 야당후보로 나온 1971년 대선에서도 역시 박정희 승리. 63년 대선때부터 시작한 야당의 패배는 63,67 대선과 총선 그리고 71년 대선까지 총 ‘5연패’를 당했던 것이다.


 1971년. 특히 대선에서 박정희에게 세 번 연거푸 패한 신민당은 패배의 후유증을 수습할 사이도 없이 8대 총선을 준비해야만 했다. 헌데 여기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이른바 ‘진산파동’까지 겪게 된다. 당시 야당의 실세였던 옥계 유진산이 8대 총선을 앞두고 자신의 지역구를 포기하자 여기에 반대파들이 ‘유진산이 자기 지역구를 팔아먹었다’며 비난하고 나오는 이른바 ‘제2차 진산파동’이 일어난다. 사실상 당이 쪼개지는것이나 다름없는 상황까지 간 것이고, 공화당은 이런 야당의 분열을 즐기는 상황이었다. 이런 분위기로 8대 총선을 치르면 너무 압승하는 것 아니냐며 오히려 그것을 걱정하며 희희락락하고 있었다. - 마치 야당의 분열로 180석,200석도 가능할 것 같다며 희희락락하던 몇 년전 어느 정당을 보는 것 같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난다. 막상 8대 총선에선 의원정수 204명중 공화당 113명, 신민당 89명. 특히 신민당으로선 박정희 정권 들어 단일야당 단독으로 처음으로 개헌저지선을 확보할수 있게된 대거 원내진출의 성과를 올렸다. 반면 공화당은 야당 강세지역이던 서울에선 불과 1석밖에 당선자를 내지 못하는등 참혹한 참패를 당한다.


 70년대엔 총선에 총 세차례(71년,73년,78년) 치러졌는데 여기서 야당의 전적은 3승 혹은 2승 1무 정도다. 특히 박정희 정권 말기인 1978년 치러진 10대 총선에선 신민당이 처음으로 득표율에서 공화당을 1.1% 앞서는 성과를 올린다. (공화당 31.7%, 신민당 32.8%) 그러나 유정회가 원내 3분의 1을 차지하게 만드는 유신체제 하에서 치러진 선거였고 게다가 한 지역구에서 국회의원을 두명씩 뽑는 이른바 ‘중,대 선거구제’였기 때문에 저 득표율로 원내 다수당이 되진 못한다. 지역구 당선자는 공화당 68석, 신민당 61석이었다.


 8대와 10대 총선 사이에 73년 9대 총선이 있었는데 72년 박정희 대통령의 전격 유신선포로 헌법을 개정한뒤 치러지는 총선이라 8대 총선을 치른지 2년만에 다시 총선을 치르게 되었다. - 그리고 유신체제하에서 국회의원 임기는 6년으로 늘어난다. - 그리고 이때부터 지역구는 한 지역구에서 국회의원을 두명씩 뽑는 ‘중,대 선거구제’로 선거구제를 바꿨고 그리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하는 ‘유정회’ 의원이 전체 의석의 3분의 1(의원정수 219명중 73명)을 차지하게 만들었다. 여소야대가 되거나 야당이 다수 의석을 확보하게 되는 상황을 원천 봉쇄시킨 셈이다. 그리고 이 중대선거구제 하에 치러진 첫 선거인 8대 총선에서 지역구는 총 73개 지역(146명 선출)에서 공화당 73명, 신민당 52명이 당선된다. 헌데 이때는 지역구가 한 지역에서 두명씩 뽑는 제도로 바뀌자 지역에 따라선 ‘차라리 공화당,신민당 나란히 동반당선 되자.’는 식의 우호적인 분위기까지 형성되기에 이른다. - 요즘도 소선거구제를 2-3명씩 뽑는 중대선거구제로 바꾸자는 주장이 정치권과 학계 일각에서 종종 제기되긴 하지만 만약 한 지역당 2-3명을 뽑는 중대선거구제가 되면 어떤 분위기가 될지 예측이 가능한 사례이기도 하다.


 여하튼 그렇게 유신체제와 박정희 장기집권에 염증을 느끼는 유권자들이 많아져서였는지 70년대 세차례 총선에서 박정희 정권의 성적은 대체로 좋지 못했다. (3패 혹은 1무 2패) 그리고 10.26으로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리고 전두환 정권이 출범한 80년대. 11대 총선은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고 얼마되지 않아 치러진 선거인데다가 양김과 그 추종자들 또는 강성 야당,재야인사 대다수를 ‘정치규제’로 아예 정치활동,정당활동을 못하도록 묶어버리는 바람에 민정당이 여유있는 분위기에서 치러진 선거였다. 결과는 의원정수가 276명으로 늘어난 상황에서 민정당 151석, 민한당 81석, 국민당 25석. 그러나 민한당은 알려져 있다시피 강성야당인사들이 모두 제거된 상황에서 온건파들로만 구성되어 ‘2중대’란 소리를 듣던 야당이었고 국민당은 구 공화당,유정회 계열 인사들 일부가 중심이 되어 만든 야당이었다.


 그리고 85년 2.12 총선(12대).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면서 있었던 ‘정치규제’ 조치로 정치활동을 못하게 된 인사들중 3김을 제외한 대다수 인사들이 ‘해금(解禁)’된 상황에서 치러진 총선. 이 상황에서 민추협이 중심이 되어 만든 새로운 야당 ‘신민당’이 약진하게 된다. 의석수는 민정당 148석, 신민당 67석, 민한당 35석, 국민당 35석. 특히 신민당은 이후 민한당 인사들이 대거 합류하게 되어 신민당은 한때 103석 거대 야당을 이루게 되기까지 한다. 전두환 정권에서 두차례 치러진 총선(81년,85년)에서 야당의 성적 역시 1승1패였던 셈이다.


 87년 6월 항쟁의 결과물로 ‘대통령 직선제’가 16년만에 부활하고, 국회의원 선거구는 한 지역당 두명씩 뽑는 유신,5공 시절의 ‘중대선거구제’에서 한명씩 뽑는 기존의 ‘소선거구’제로 환원된다. 그리고 의원정수는 299명으로 늘어나게 된다. 그리고 치러진 88년 13대 총선이 바로 잘 알려진 건국이래 최초의 ‘여소야대’ 정국을 이룬 선거. 여당인 민주정의당이 125석, 김대중의 평화민주당 70석,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59석,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 35석, 그 외 한겨레민주당(* 재야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정당으로 이후 평민당에 합류) 1석, 무소속 9석. 게다가 무소속 9명중 박찬종,이철,유한열(옥계 유진산의 아들)등은 야권성향이었기 때문에 민정당 입장에서 영입을 기대할수 있는 무소속은 최대 5-6명선으로 그야말로 이전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여소야대’정국이 열리게 된다.


 그러나 민정-민주-공화가 ‘범 보수 대연합’으로 90년 3당합당을 해 200석이 넘는 거대여당이 출현하고 그러나 14대 총선에서 민자당은 149석으로 줄어들고 민주당 97석, 정주영의 통일국민당이 31석의 당선자를 내고 무소속도 21명이 당선된다. 한마디로 13,14대 모두 여당의 패배. 그리고 김영삼 정권 중반부에 치러진 96년 15대 총선은 원래 김영삼 정권의 경제실정으로 민심이반이 극에 달해 있을때라 여당이 신한국당의 참패가 예상되었으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신한국당 139석, 국민회의 79석, 자민련 50석, 민주당 15석, 무소속 16석. 특히 대체로 전통적인 야당 강세지역인 서울에서 국민회의가 부진하고 서울,경기,인천등 수도권 전반적으로 신한국당이 선전을 한 총선이었기 때문에 ‘여당이 승리’한 선거라는 판정을 받았다. 대통령 임기 중반에 치러지는 총선으로는 참으로 오랜만에 ‘여당이 선전’한 총선이었다.


 지방선거가 90년대에 부활해 91년에 지방의회 선거가 치러졌고 95년에 광역,기초 단체장까지 합해 ‘광역단체장,기초단체장,광역의회,지방의회’등 4개 지방선거를 동시에 치르는 ‘전국 동시 지방선거’가 이때부터 실시된다. 한편 지방선거는 선거시기를 국회의원 임기 중반부에 맞추기 위해 95년에 한해 임기를 3년으로 하고 2대 지방선거가 98년에 치러져 이때부터 지방선거는 국회의원 임기 중반에 치러지게 된다.


 우리나라 선거에서 보수-진보로 승패여부를 가릴수 있는 선거는 사실상 21세기 들어서 치러진 선거부터로 봐야한다. 그전까지는 대체로 우리나라 정치판은 보수-진보보다는 군사독재-민주화세력으로 구분되는 시기였고 무엇보다 그 시절엔 야당도 70-80년대까지만 해도 ‘반공보수’성향이었기 때문이다. 야당의 좌파색채가 강해진 것은 재야인사들이 적극 영입된 90년대부터고, 무엇보다 김대중 정부도 임기 초반엔 보수정당인 자민련과 손잡은 DJP 연립정부였기 때문에 보수-진보로 정당구분이 가능해진 것은 대체로 2천년대 들어서부터다. 무엇보다 우리사회 보수-진보 논쟁이 격화되기 시작한게 ‘햇볕정책’에 대한 찬반 양론이 들끓기 시작하면서부터이기 때문에 선거에서 승패를 보수-진보로 구분해서 가리는것도 이때부터로 봐야 합리적이다.


 여하튼 21세기 들어서 치른 다섯차례 총선에서 17대는 진보 승, 18대,19대는 보수 승 그리고 20대는 진보 승, 21대 다시 진보 승으로 보수 : 진보 승패가 총 2 : 3이다. 그리고 지방선거 제도가 도입된 90년대 중반 이후로는 대체로 전국단위 선거를 평균 2년마다 한번꼴로 치르게 되었는데 이후 한 정파가 전국단위 선거에서 내리 ‘4연패’까지 한 경우는 지금까지 거의 없었다. ‘3연패’가 단 한차례 06 지방선거, 07 대선, 08 총선을 한나라당이 이겨 진보진영이 ‘3연패’를 했는데 근 4년동안 2016년 20대 총선부터 시작 17 대선과 18 지방선거 그리고 며칠전 치른 21대 총선까지 보수진영이 네 번 연달아 참패를 함으로써 ‘4연패’의 기록을 세웠다. 한 정파가 내리 ‘4연패’를 한 경우는 저 1960년대 박정희 시절 야당이 63년과 67년 대선과 총선 네 번을 모두 패한이래 실로 50여년만의 일이다.


 지금 보수의 상황은 어떤 의미에선 60년대 야당보다 낫다고 볼수도 있다. 그 시절엔 지방선거는 없었고 대선과 총선을 같은해에 한두달 정도의 시차를 두고 치렀기 때문에 선거에서 패하고 나면 다음 대선과 총선이 있는해까지 무작정 4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선,총선,지방선거등 전국단위의 선거를 평균 2년에 한번꼴로 치르게 된다. 반전의 계기를 삼을 시간이 그만큼 빨리 찾아온다는 이야기다.


 환골탈태하는 자세로 국민의 신뢰를 받는 보수로 거듭나 2022년을 준비하자.














덧글

  • 흑범 2020/04/22 12:25 # 답글

    히드라님이 말한 환골탈태란 아마도 저 진보 징징이들이 말하는대로 하는 그런 환골탈태인것 같은데, 내생각에는 개싸움도 불사할 환골탈태가 필요한듯 싶네요.
  • 훼드라 2020/04/23 16:01 #

    차라리 08년 광우병 쇠고기 사태때 시위대를 탱크로 쓸어버리고 헬기 기총소사까지 해서 진압했으면 사태가 여기까지 안 왔을수도 있어요. 그리고 그때 진작 김규리,김제동,김미화 이런애들 한 10년동안 방송출연 못하게 정지시키고. 저라고 그런 소리 할줄 몰라서 안 하는게 아닙니다 !!! -> 하지만 그게 꼭 현명한 방식일까요 ? 세상이치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니까 이러는거죠

    아니면 97년에 김O삼이 작정하고(제2의 5.18이라도 각오하고) 김O중 비자금이라도 탈탈 털었으면 또 역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르죠...
  • 김대중협정 개정 2020/04/22 18:15 # 답글

    지금의 구도는 김대중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주 고약한 구도이고 김대중은 역사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1963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은 색깔론으로 박정희를 공격했고 결과는 박정희와 윤보선의 득표율이 각각 47%와 45%로 박빙의 승부였다. 1967년의 대선에서는 두 사람의 득표율이 각각 51%와 41%를 기록하며 격차가 벌어졌는데, 이는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경제개발이 성과를 나타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흐름에서 벗어나기 위해 민주당은 1971년 대선에서 불균형 성장을 트집잡고 지역감정을 선동했다. 그러나 결과는 박정희와 김대중의 득표율이 각각 53%와 45%로 나타나 대세를 바꾸지 못했다. 경제개발의 성과를 내고 있던 박정희 정권은 굳이 지역감정을 부추길 필요가 없었다.
    http://qindex.info/i.php?x=3223
  • 김대중협정 개정 2020/04/22 18:49 # 답글

    민주당이 압승한 데에는 종미기독 세력에 대한 심판도 큰 역할을 했지만 핵심은 김홍걸 비리대표에 있죠.
    http://qindex.info/i.php?x=5249
    문재인 괴뢰설의 한 부분이고 위의 덧글과도 연결됩니다.
  • 김대중협정 개정 2020/04/23 10:58 # 답글

    종미기독 세력이 숨기는 게 하나 있는데 야당이 4연패하던 시기의 공화당은 좌파였다는 사실이죠.

    1963-10-17 윤보선
    "부산과 대구는 6.25당시 후퇴하지 않은 곳으로 빨갱이가 많고 인민군이 침입하면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박정희가 물러나야 미국의 원조도 증가된다."
    http://qindex.info/i.php?x=2043#2043

    그리고 박정희 정권의 결과물을 자유시장경제의 성과로 둔갑시키고 이승만을 끼워넣습니다.
    지금 통합당이 외면받는 이유는 종미기독화된 결과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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