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빈 모녀가 떠난지 몇 달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어느덧 봄은 가고 무더운 여름철이 되어 있었고 고3인 준식의 큰딸 지영과 둘째딸인 중3 수영은 저마다 학업에 열중하고 있는 중이다. 특히 백댄서가 되길 희망하는 수영의 경우엔 예고진학 의사를 밝히고 있기도 하다. 준식은 건물관리를 계속 하면서 팟캐스트와 재연배우 활동을 틈틈이 하는 그런식의 일상을 보내고 있는 어느날이었다. 장마철이라 그런지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날.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준식은 피곤한지 일찌감치 잠자리에 누웠다. 지영과 수영이 쓰는 살림집을 윗층에 따로 마련해주기도 했으니 고작 열평이 조금 넘는 서민형 빌라일지언정 혼자 쓰다보니 웬지 적적함을 느낄수도 있는 깊은밤. 헌데 갑자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입주민중 한밤중에 급한 민원이 들어오는경우도 있기 때문에 게다가 장마철이기도 해 혹시 어디 또 물새는 집이라도 있나 싶어 준식이 황급히 문을 열어주었다. 헌데 문앞에 서 있는 사람은 전혀 뜻밖의 인물이었다.
“ 아니, 예빈아. ”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예빈. 불과 몇 달전에 제 엄마와 함께 이곳을 떠나 원래 자신들이 살던 충청도의 모 지역으로 돌아간 두 사람이건만, 그리고 준식도 예빈에 대해서 그저 한때의 ‘기묘한 인연’ 정도로만 생각하고 잊어버리려 하던 중인데 그 예빈이 이 밤에 대체 여기 왜 나타난단 말인가. 너무 놀란 준식이 무슨 말을 건넬 사이도 없이 예빈은 준식에게 와락 안기고 만다.
“ 아저씨 !!! ”
“ 아...아니 저 예빈아... ”
대체 어디서 어떤 과정을 거쳐 여기까지 온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빗물에 흠뻑젖은 예빈의 몸. 그 몸냄새가 바로 준식에게 확 풍기기까지 한다. 그 당혹스러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빈은 준식에게 안겨 연신 자신의 몸을 부벼대며 말한다.
“ 보고 싶어 견딜수가 없었어요. 보고싶어 견딜수 없었단 말이에요 아저씨. 흑흑흑
흑~~~!!! ”
“ 이...일단 들어오렴 예빈아. 그리고 우선 씻기라도 하던가. ”
그런 몸으로 바로 집으로 들어오게 할수도 없는 일이라 바로 씻을것부터 권하는 예빈. 덕분에 예빈은 준식의 집 욕실에서 목욕까지 하게되고 준식은 급한대로 자신의 속옷이라도 예빈이 갈아입을수 있도록 내온다. 예빈의 옷은 빨래통에 넣고. 그리고 한숨돌린 예빈을 방안으로 들어오게 해서 어찌된것인지 자초지종을 물어보려 한다.
“ 대체 어떻게 된거야 ? 어떻게 이 밤늦은 시간에 ? ”
“ 그냥...아저씨가 보고싶어 견딜수가 없어 찾아왔어요. ”
“ 뭐라고 ? 아니 그럼...단지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여기까지 그런 옷차림으로 일부러
달려왔단말이야 ? ”
“ 아저씨 !!! ”
자신을 나무라는듯한 말로 들려서일까. 예빈은 그런 이야긴 듣고싶지 않다는 듯 준식에게 다시금 안겨들며 울음을 터트린다. 준식은 그런 예빈을 달래서 겨우겨우 진정시키고 예빈은 그간의 있었던일을 간략하게나마 준식에게 들려준다.
“ OO로 돌아가선 어떻게든 다 잊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고 했어요. 학교도 원
래 다니던 학교에서 중3부터 다시 시작하려고 했고...하지만 적응하기 쉽지 않았
어요. 무엇보다 육상 달리기를 하다 부상을 입은 그 애가 다시 우리학교로 돌아왔
다는 수군거림도 있었고 – 바로 이전에 OO에서 다니던 중학교 육상부로 활동을
하다가 시합에 출전 그런 사고를 당했던 것 아닌가. - 아무튼...모든게 다...모든게
다 복잡하고...견디기 힘들었어요. 그래서...그래서 그냥... ”
예빈은 그저 모든 것이 다 싫고 힘들었던 듯 온 몸을 비틀고 몸서리를 치며 울부짖는다. 하긴 원래 살던 동네와 학교로 돌아갔으니 그곳에서의 수군거림이 예빈의 잊고싶은 기억을 다시 되살아나게 하는 면도 있었을것이고, 여하튼 예빈으로선 무척이나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던 것 같다. 허나 그렇다고 무작정 다시 여기까지 찾아오면 어쩌자는 것인가. 안타깝게 예빈을 바라보는 준식에게 그녀는 이와같이 말한다.
“ 아저씨... ”
“ 말해보렴 예빈아. ”
“ 저 그냥 여기서 다시 살게 해주시면 안 돼요 ? ”
“ 뭐...뭐라구 ? ”
“ 다른건 더 이상 안 바랄께요. 그러니 저 여기서 그냥 살게 해주세요. 저 OO에선
이대로 못살 것 같아요. 견디기 힘들 것 같아요. 적응 못할 것 같아요. 그리고 무엇
보다... ”
“ ....... ”
“ 아저씨가 보고싶어서 견디기 힘들었단말이에요. 정말 너무 아저씨가 미치도록 그
리웠어요. 어어어엉~~~!!! 으흐흐흐흐흐흑~~~!!! ”
다시 울음을 터트리는 예빈. 헌데 무작정 여기서 다시 살게 해달라는 예빈의 요구에 준식은 다시금 난감해진다. 어쨌든 예빈 어머니는 지금은 원래 살던 OO에 계속 살고 있을것이고 그런 상황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올라왔든 기차를 타고 올라왔든 예빈 혼자 몸으로 달랑 여기까지 다시 찾아온 것 아닌가. 그 예빈이 지금 준식보고 ‘다시 여기서 살게 해달라’는 요구를 하는 것이다. 일단 예빈이 그 엄마와 이전까지 살던 101호의 경우엔 그 사이 새 입주민이 들어와 예빈을 그곳에서 다시 살게 할수도 없다. 그러니 이 노릇을 어쩌면 좋은가 하고 난감해하는데, 예빈은 그런 준식에게 거듭 ‘여기서 계속 살게 해달라’고 말하고 준식이 한참만에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 일단 오늘은 늦었으니까 여기서 자렴. 그리고 내일 다시금 구체적으로 상의하도록
하자. ”
“ 아저씨... ”
그와같이 말하는 준식에게 아직 한가닥 불안함이 가시지 않아서일까. 예빈이 다시금 준식에게 안겨드는데 준식이 그런 예빈을 거듭 달래고 그리고 일단 자신이 쓰는 작은방 말고 옆의 큰방에서 잘수 있도록 그곳에 이불을 깔아주려 한다. 헌데 예빈이 싫다며 버틴다.
“ 저 아저씨랑 잘래요. ”
“ 뭐...뭐라구 ? ”
“ 저 아저씨랑 자고 싶어요. 아저씨랑 자게 해주세요. ”
원래 큰방을 영월에서 딸 지영과 수영이 올라오면서 그 방을 쓰도록 했다가 그 지영과 수영에게 다른 살림집을 내주었으니 그 방은 다시 빈방이 되어있는 상태다. 그리고 원래 준식이 보는 책들이 꽂혀있는 책장을 원래 큰방에 두었다가 지영과 수영이 오게되면서 자신의 방으로 옮겼는데 지영,수영에게 살림집을 따로 내주면서 책장을 다시 옆의 큰방으로 옮겨놓은 상태다. 물론 큰방은 글자그대로 방이 커서 책장을 진열해두고도 공간이 많이 남아있긴 하지만 오히려 책장을 다시 옆방으로 옮겼기 때문에 작은방도 성인 2-3명 정도가 나란히 눕기에 무리가 없는 그런 공간이 다시 되었긴 하다. 허나 지금 문제가 그런 공간때문이 아니지 않는가. 자신에게 거듭 안겨들며 준식과 함께 자고 싶다는 예빈을 그래서 하는수없으 준식은 자신의 옆에서 잠들게 한다. 먼곳에서 올라와 낯선곳에서 혼자 자려면 그로인한 무서움과 두려움도 있을터이니 그에대한 배려심도 어느정도 담겨진 조치다.
예빈을 당분간 자신의 집에서 머물게 한 이상 이 사실을 자신의 두 딸 지영,수영에게 알리지 않을수도 없어서 다음날 준식은 바로 두 딸을 불렀다. 예빈과는 자연스레 인사를 나누게 되었고, 준식은 예빈을 잠시 나가있게 한뒤 두 딸과 이야기를 나누려했다. 헌데 준식의 이야기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큰딸 지영이 따지듯 물었다.
“ 아빠, 아빠는 도대체 저 아이랑 어떤 관계에요 ? ”
준식은 하마터면 ‘저 아이라니 ?‘하며 지영을 나무랄뻔한 것을 꾹 참았다. 만약 그와같이 나오면 예빈과 자신의 사이가 예사로운 사이가 아님을 시인하는거나 다를바 없어 참은 것이다. 그리고 차분하게 입을 연다.
“ 솔직히 이전에 아빠가 이야기했던것처럼 단순히 ‘말동무’나 ‘친구’라고 말하기는
이미 지난 그런 단계임을 시인할 수밖에 없을 것 같구나. ”
“ 아빠... ”
이런 준식의 태도에 지영이 어이없다는 듯 이와같이 나왔고 일단 준식은 헛기침을 해보인뒤 애써 침착한 어조를 유지하며 말을 계속 이어나가고 있다.
“ 지난번에 했던 말을 지키지 못하게 된 것은 미안하고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허나
여하튼 남녀관계란게 언제나 유동적이고 변화의 가능성이 있는것이라 지금으로선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는수밖에 없다는 그 말만은 전하고 싶구나. ”
“ 아빠, 지금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거에요 ? 아빠 그럼 정말 아직 고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저런 어린애랑 결혼이라도 하실 생각인거에요 ? ”
“ 지영아... ”
허나 일단 지금 당장 그러기라도 하겠다는 것은 아니라 그 부분만은 분명히 해두려는 듯 이와같이 나온다. 준식의 말이 좀 더 이어진다.
“ 일단 당분간은 예빈이가 딱히 갈곳도 없으니 이 집에 잠시만 머무르게 하겠다는
거야. 그리고 그 뒤의 일은 그 뒤에 차츰 고민을 해보도록 하겠다. ”
“ 아빠, 도대체... ”
지영은 이런 준식의 태도를 이해할수 없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나갔는데 동생 수영이 걱정되는 듯 그런 언니를 뒤쫒아나간다. 윗층인 4층 자기집으로 들어간 두 사람. 헌데 수영은 지영과는 뭔가 다른 태도를 보인다.
“ 언니, 도대체 왜 그래 ? 아빠 말씀하시는데 끝까지 들어보려 하지도 않구. ”
“ 넌 지금 그럼 이게 말이 된다구 생각하니 ? ”
“ 난 뭐...솔직히 그리 나쁠것까진 없다고 봐. ”
“ 뭐라구 ? ”
지영보다는 세 살어린 동생 수영의 태도가 뭔가 이상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지영이 순간 좀 당혹스러운 듯 이와같이 묻는데 일단 수영은 사뭇 당돌하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한다.
“ 어차피 아빠 우리 엄마랑 정식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로 지금까지 쭉 혼자 살아
오셨던거잖아. 그렇다고 우릴 완전히 내팽개치시거나 그럤다고 할수도 없고...어차
피 아버지 인생인데 우리가 그 정도는 이해해 드려야하지 않을까 ? ”
“ 수영이 너 지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 대체 뭘 이해하라는건데 ? ”
따지듯이 나오는 언니의 기세에 괜시리 기가 죽었는지 수영은 살짝 풀죽은 얼굴을 하긴 한다. 허나 수영은 그녀 나름대로 자기 생각과 할말이 있기라도 한지 조금 시간이 지난뒤 언니에게 다가와 다시금 말을 건넨다.
“ 난 그리고 솔직히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 ”
“ 무슨소리야 그건 또 ? ”
“ 그...예빈언니 그래도 괜찮은 언니 같다고 생각들지 않아 ? 가끔 그래도 우리 밥도
챙겨주고 한적도 있고말야... ”
엄밀히 따지면 예빈이 가끔 밑반찬 거리는 반찬가게나 마트에서 사다주기도 했고 국이나 찌개 같은 것을 자신이 손수 끓여주기도 한 그 정도다. 그러나 어쨌든 그 정도면 ‘밥 챙겨주던 언니’란 말이 그리 틀린말 같진 않아보이고, 무엇보다 수영은 예빈의 음식솜씨가 영월에서 자기들 밥을 챙겨주던 나이많은 할머니들보다 훨씬 낫더라는 칭찬까지 입에 담았던 아이가 아니던가. 그래서인지 예빈에 대한 생각이 지영과는 뭔가 다른 것 같다.
“ 난 솔직히 그 정도면 과히 나쁘지도 않아. ”
“ 수영이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 그리고 걔...어쨌든 중간에 학교 1년
쉬어서 지금 중3인애야. 아직 고등학교도 안 들어간...너랑 동급생인 애라구 !!! ”
“ 뭐 나야 어차피 예고 들어가면 같은학교 다니게 될 일은 없을테구. ”
“ 뭐라구 ? ”
백댄서 지망생이라서 그런지 예고진학 의사를 이미 몇 달전부터 밝혀온 수영이기도 하다. 허나 지금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 않는가. 지금 수영은 마치 준식과 예빈의 관계를 기정사실화 시키는듯한 말을 입에 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언니 지영은 동생의 이런 태도가 더더욱 기가막히고 이해가 안간다.
“ 수영이 넌 도대체...애가 생각이 없는거니 ? 아니면 아직 어려서 철이 없는거니 ?
어떻게 아빠가 그런 새파란 어린 여자애랑 정분이 난걸 이해한다는 듯 나올수 있
어 ? 이게 대체 말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해 ? ”
“ 말했잖아. 난 아빠를 이해해 드리고 싶다고. ”
“ 수영아 !!! ”
“ 난 어쨌든 정히 예빈언니랑 아빠가 그런 관계로 발전한다면 난 이해해드리고 싶
어. 어쨌든 아버지 인생인데...아버지도 언제까지 저렇게 혼자 외롭고 쓸쓸하게 사
실순 없는거잖아. ”
“ 윤수영 !!! ”
동생의 태도가 너무 어처구니가 없는지 지영은 무척이나 골치가 아파 두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수영은 수영대로 자기방으로 돌아가서는 그냥 혼자 자기 책상 의자에 앉아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 언니...언니 계세요 ? ”
요즘은 준식은 재연배우 활동도 하기 때문에 그 촬영 스케줄 때문에 집을 비우는 날도 많다. 그래서 예빈이 준식과 동거에 들어간 상태에서 준식이 일 때문에 집을 나가면 예빈이 혼자 집에 있는 상태가 될 수밖에 없는데 수영이 하루는 그런 예빈이 걱정이라도 되는 듯 찾아왔다.
“ 어...어서오세요. ”
예빈이 준식의 집으로 돌아온지는 아직 2-3일 정도밖에 채 지나지 않았는데, 여하튼 예빈이 걱정이라도 되는지 찾아온 수영.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고 집안으로 들어선다.
“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 ”
“ 어쩐일은요. 저 그냥 언니가 걱정되어서 왔어요. ”
“ 아...아니 뭐 그렇게까지 신경쓰시지 않아도 되는데... ”
무안하기도 해서 예빈은 살짝 빨개진 얼굴로 머리를 긁적인다. 실제 예빈모가 준식과 예빈의 관계를 더는 방치해둘수가 없다는 생각에 급히 이사를 가버렸기에망정이지 하마터면 정말 동급생으로 같은 학교에 다닐뻔하기도 했던 두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더욱 호칭을 붙이기가 애매한 예빈과 수영의 관계. 헌데 그런 상태에서 수영은 공연히 말돌릴 것 없다는 생각에서인지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 언니, 저한테만 살짝 이야기해주실수 없어요 ? ”
“ 뭘요 ? ”
“ 저희 아빠 솔직히 어디가 그렇게 좋아요 ? ”
‘아빠랑 사귀냐 ?’던가 어떤 관계냐는식의 질문도 아닌 사실상 두 사람의 관계를 인정하고 있는듯한 물음. 예빈이 일단 좀 망설이는 듯 하다 사실 그대로 대답한다.
“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전 어쨌든 그렇게 부상으로 육상을 더 이상 못하게 되어서
한동안 깊은 절망과 좌절에 빠져있었던 그런 사람이에요. 진짜 죽고싶다는 생각도
했고...그야말로 히키코모리가 되어 집밖으로 나가려하지도 않던 그런 아이였죠.
불과 작년 가을까지만 해도요. ”
“ ...... ”
“ 그런데...그런 제게 아저씨가 새로운 삶에 대한 의욕과 희망을 주신...그런 분이었
다고나 할까요 ? 어쨌든 수영씨 아버지는 제게... ”
초롱초롱 빛나는 수영의 눈망울. 그런 수영을 바라보며 예빈의 말이 좀 더 이어진다.
“ 뭐 저도 어차피 아직 어리고 철이 없어서...아마 그래서 이런 선택을 한걸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
“ ...... ”
“ 수영씨 아버진 제게 절망의 나락에 빠져있던 저에게 새로운 희망의 동아줄을 던져
주신 그런분이나 다름없어요. 인생을 다시 새롭게 희망을 갖고 살수 있도록 그런
계기를 만들어주신 그런 존재라고나 할까요. ”
“ ...... ”
“ 한마디로 제 인생의 은인같은 분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
수영이 물끄러미 그런 예빈을 바라보고 있다. 이 상황을 인정한다기 보단 뭔가 재미있다는 생각이라도 드는것일까. 마치 이 야릇하고 기묘한 관계를 즐기기라도 하는듯한 철없는 여학생의 눈빛 그 자체다. 수영의 그와같은 눈빛 때문인지 예빈은 오히려 더 긴장이 된 얼굴로 수영을 바라보고 있다.
3년후.
지영은 어느덧 대학생이 되어있고, 수영은 현재 고3인데 예고에 진학후 백댄서를 모집하는 한 기획사 오디션을 통과 이미 현역 백댄서로 활동중이면서 대학은 ‘실용무용과’ 진학을 바라면수 준비중에 있다. 그리고 예빈도 이때는 고3이긴 한데 실은 지금 예빈은 준식의 아이를 임신중이다. 따라서 아이를 가진 몸으로 학교를 계속 다닐수는 없어서 부득이하게 휴학을 했다. - 생각해보면 발목부상으로 육상을 더 못하게 되면서 중학교 1년을 사실상 쉬웠던 예빈인데 고3이 되어서는 임신 때문에 학교를 다시 1년을 쉬게 된 셈이다.
준식은 여전히 경기도 OO시 변두리 지역의 서민형 빌라와 그 건너편 4층짜리 건물 그리고 그보다 좀 더 떨어진곳에 위치한 냉면가게까지 세필지 땅의 건물주로 있고, 이때는 정치 팟캐스트도 쉰채 재연배우 활동을 계속 하는중이다. 그렇게 바쁜 일상을 보내는 어느날. 촬영 스케줄이 있어 집을 나서야 하는데, 그런 준식이 어느덧 불룩해져온 예빈의 배를 어루만지며 애틋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 예빈아... ”
그렇게 부르는 준식의 품에 가만히 안기는 예빈. 그녀 역시 여러 가지 착잡한 회한에 눈물이 고이는 듯. 그런 예빈의 손을 꼭 잡으며 준식이 말한다.
“ 다른생각 하지 말고 그저 우리 아이만 건강하게 잘 출산할 생각을 해. 무슨말인지
알겠지 ? ”
“ 고마워요 아저씨. ”
아직 정식으로 혼인신고를 올리지도 않아서 그런지 준식에게 ‘여보’라던가 ‘당신’ 같은 호칭은 잘 나오지 않는 예빈. 그런 어린 예빈을 한번 안아보고는 집을 나서는 준식. 예빈의 이마에 한번 입을 맞춰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않아 예빈이 만삭이 되었고 출산 예정일이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었다. 준식은 혹시 몰라서 지영과 수영에게 예빈을 가끔씩 좀 봐달라는 부탁을 했는데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녀야하는 지영은 그 때문에 곤란하다고 했고 하는수없이 수영이 이따금 준식의 집으로 들어와서 수영의 말동무도 되어주며 그녀의 상태를 살펴보는 중이다. 그러던 어느날.
“ 아악...아아아아아아악~~~!!! ”
“ 새엄마...새엄마 왜 그러세요 ? ”
헌데 이미 능숙하게 예빈을 ‘새엄마’라고 부르고 있는 수영. 예빈의 비명소리에 놀라 달려와보는데 수영이 그런 예빈에게 손을 뻗어 도움을 청한다.
“ 아아...수영씨. 도와줘요 너무 아파요. ”
“ 새엄마...혹시 ? ”
나이는 어리지만 그래도 제법 눈치는 있는 수영이라서 – 아니면 드라마나 영화 같은걸로 이따금 봐서 익숙해져 있는것일수도 있고 – 얼른 밖으로 뛰어가 택시부터 부른다. 그리고 예빈을 부축해서 내려오는 수영. 마침 이때는 지영도 집에 있을때라서 이 한바탕 소동을 모를수가 없었는데, 그래서 아무리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마냥 보고만 있을수는 없어서 동생 수영과 함께 예빈을 데리고 택시를 타서 인근 산부인과로 간다.
“ 아이 아빠는 지금 어디있어 ? ”
병원에서 급히 수속을 밟고 예빈을 급히 분만실로 옮겼다. 그리고 보호자 등록을 해야할텐데, 간호사 입장에선 일단 임산부부터가 어려보이고 그녀를 데려온 두명조차도 나이가 어려보여서 아마 이따금씩 볼법한 ‘10대 미혼모’인가 싶어 지레짐작으로 그와같이 물은 것이다.
“ 저희 아빤 지금 촬영장에 계신데... ”
“ 아니...니네 아빠 말고 환자 아빠 말이야. 아이 아빠 어디있냐구 지금 !!! ”
간호사는 아무래도 부득이하게 10대 나이에 출산을 하게된 미혼모가 친구나 아는언니등의 도움을 받아 산부인과에까지 오게되었나 싶어 그와같이 거듭 환자를 데려온 두명의 보호자를 다그친다. 아무래도 임산부든 임산부를 데려온 친구(?)들이든 그네들의 부모를 부른다던가 할 수는 없는 상황일 것 같은 짐작이 들어서인지 거듭 ‘아이 아빠’의 행방부터 추궁하는데, 따라서 지영과 수영 입장에선 황당할 수밖에 없는 노릇. 지영은 지영대로 무슨 대답을 어찌해야할지 몰라 그저 난감하기만 한데 순간 수영이 발끈해서 외친다.
“ 저희 새엄마세요 !!! ”
“ 뭐...뭐...뭐라구 ? ”
순간 황당해하며 자신이 뭘 잘못들었나 싶어 재차 확인을 요구하는 간호사. 수영의 목소리가 병동안 모두가 들으라는 듯이 쩌렁쩌렁 울려퍼진다.
“ 방금 들어가신 환자분 저희 새엄마시라구요 !!! 이 언니가 가만보니 사람을 어떻게
보고 말도 안되는 헛소리를 하고 있어 !!! ”
10대 미혼모 환자 – 엄밀히 말해 틀린말은 아니지만 -.- - 일거라 지레 짐작하고 나온 간호사의 그와같은 말을 어이없다는 듯 되받아친 수영. 그로인해 병동의 다른 손님이나 의사,간호사등도 ‘대체 이게 무슨상황인가’ 싶어 그쪽을 잠시 바라보기까지 하고 환자 등록,접수를 담당하고 있는 간호사 역시 그저 어이없다는 듯 지영과 수영을 바라보기만 할 따름이다. 지영이 민망해서 수영을 제지하려 하긴 했지만 지금 들어간 만삭의 환자가 지영,수영의 ‘새엄마(!)’임은 이미 수영이 확실하게 확인시켜준 상황 아닌가. 그래서 지영은 순간 어떤 절망스러운 심정에 눈을 질끈 감아보기까지 한다.
“ 새엄마...괜찮으세요 ? ”
그리고 마침내 출산을 하게된 예빈. 하필 준식이 이날따라 촬영이 좀 늦고 길어져 아직 병실에 도착하지 못한 상황에서 수영이 계속 예빈을 살펴주고 있었다. 지영은 창피해서인지 이미 집으로 혼자 돌아가버린 상태에서 수영이 혼자 예빈을 지켜주고 있었던 것이다.
“ 미안...해요... ”
아무리 그래도 자신과 비슷한 연배의 어린 학생들에게 졸지에 새엄마(?)의 처지가 되어버린 자신이라서인지 그 미안한 마음을 담아 이와같이 말하는 예빈. 허나 오히려 수영이 더 어른스럽게 예빈의 손을 지그시 잡아본다.
“ 미안할게 뭐 있어요 새엄마. 그리고... ”
“ ...... ”
“ 어차피 저희에게도 동생인데... ”
한편 예빈이 낳은 아이는 아들이었다. 수영도 어느덧 고3이고 지영은 이미 대학생인 상황에서 스무살남짓 차이가 나는 이복동생이 하나 생긴셈이다. 한편 예빈이 입원한 병실은 2인용 병실이었는데 그래서 옆 침대의 환자와 관계자들도 ‘대체 저쪽은 어떤 관계인가 ?’하며 의아하게 예빈과 수영쪽을 바라보고 있다. 보아하니 아이 아빠가 되는이는 아직 병실에 도착을 못한 듯 한데, 그런 상황에서 아짓 앳되어 보이는 두 여자가 ‘새엄마’ 어쩌구 하면서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그야말로 ‘미스테리한 가족관계’로 여겨질 수밖에 없을것이고 복잡한 심정에 눈물을 흘리는 예빈을 수영은 한번 안아주기까지 하며 그녀를 위로한다.
“ 허허...그놈 참...똘똘하게 생겼구나. ”
나이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늦둥이 아들을 본 준식이라서인지 입이 헤 벌어져 좋아하고 있었다. 한 일주일쯤후에 퇴원을 하게 된 예빈. 그 서른살 어린 아내 예빈과 함께 아이를 돌보며 준식은 마냥 좋아서 어쩔줄을 모른다. 하긴 ‘옛날같으면’도 아니고 요즘이라도 만약 첫사랑을 성공만 했어도 이미 손자를 보았을수도 있는 그런 나이의 윤준식이 아니던가. 헌데 그런 나이에 아들을 보다니. 준식도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우려와 걱정도 되고 여러 가지 만감이 교차하는 심정으로 아이를 보살피고 있는 것이다. 지영이 조금 늦게 준식과 예빈의 거처로 찾아왔다.
“ 저도 애기 좀 보여주세요. ”
다소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그와같이 말하는 지영. 어쨌든 아버지의 어린 새 아내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났다니 안 궁금할 수는 없을 것이다. - 물론 지영도 수영과 함께 예빈을 데리고 병원까지 가주긴 했고. - 그러니 지영은 창피하다며 예빈이 무사히 출산하는것까지만 확인하고 바로 집으로 돌아와버린 것이다.
“ 이 아이... ”
“ ??? ”
“ 3대 독자죠 ? ”
지영도 아마 아버지 윤준식의 집안 내력을 들어본적이 있어서일까. 새삼 궁금해져서 묻는다. 지영이 말한대로 준식도 그리고 그 아버지도 모두 외아들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태어난 준식의 아이가 3대독자인 것은 맞다. - 그렇다고 준식이 굳이 그런 것을 따지기나 하는 성격은 아니다. 다만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그렇다는것일뿐. 준식의 말이 이어진다.
“ 뭐 요즘 세상에 그런걸 굳이 따지는건 우습고...어쨌든 아버지가 나이 50에 새롭
게 맺은 인연이라 생각해주면 고맙겠구나. 아버지로선 정말 늦은 나이에 모처럼 좋
은 인연을 만났던 셈인데... ”
“ ...... ”
“ 그냥 그렇게 알고 축복해주면 고맙겠구나. ”
미안함과 착잡한 마음에 그와같이 말하는 준식. 예빈이 아이를 안아보지 않겠느냐는 듯 살짝 지영을 바라보는데 아이를 한번 보여달라는 듯 지영이 팔을 뻗어본다. 그렇게 예빈에게서 받은 스무살 이상 차이나는 막내동생을 지영이 애틋하게 바라보고 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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