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저씨이~~~!!! ”
예빈 어머니의 경고도 있었고 또 지영과 수영도 점차 준식과 예빈의 관계를 심상찮게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아 준식은 한동안 예빈과의 만남을 자제하는 중이었다. 허나 남녀간의 관계가 주위에서 강제로 뜯어말린다고 쉬이 말려질수 있는것도 아니고 자신이 스스로 ‘안 만나겠다’고 단호하게 자른다 해도 쉽사리 그것이 단절될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어쨌든 준식은 적어도 한동안 예빈과의 만남은 스스로 자제하려 노력하고 있었으나 뜻대로 되지가 않았다. 사실 보통은 아침 산책길에 준식과 예빈이 만나 자연스럽게 인근 놀이터까지 갔다가 자연스럽게 한두시간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온다던가 또는 둘이 같이 동네 한바퀴를 돈다던가 그러다 돌아오곤 하는 방식으로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졌는데, 하루는 이례적으로 예빈이 작심한 듯 준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서 기다리면 늘 만나던 시간이 되면 준식이 자연스레 나올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던것인가. 허나 준식의 산책이 정해진것도 아니고 불규칙적으로 가끔 2-3일에 한번정도 그것도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빌라와 건물을 돌아보다 겸사겸사 하게 되는것이었으니 언제 그 놀이터로 온다는 확실한 시간이나 기약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는 놀이터에서 작심이라도 한 듯 하염없이 예빈은 준식을 기다리고 있었고 마침 한참만에 준식이 그 옆을 지나가는 것이 보이자 바로 달려들며 안겼다.
“ 아저씨... ”
“ 예...예빈아... ”
예빈과의 만남을 가급적 자제하려던 준식이었으니 예빈의 갑작스러운 안겨듬은 당혹스러움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고 준식은 예빈을 일단 떼어내려 했으나 그럴수록 예빈은 준식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더더욱 강렬하게 안겨들었다. 그러면서 울먹이며 말한다.
“ 저 싫으세요 ? ”
“ 예...예빈아... ”
‘싫다,좋다’는 간단명료하면서 이분법적인 이 대답을 이 순간만큼 하기 힘든경우가 있었던가 그런 생각까지 들 지경이다. 준식이 지금 예빈 어머니의 엄포와 경고 때문에 그녀와의 만남을 자제하는것이지 예빈이 싫어졌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무슨 대답을 어찌해야할지 몰라 막막하기만 하고 예빈은 준식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양팔로 준식의 옆구리를 꽉 끌어안은채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채로 묻는다.
“ 말씀해주세요. 저 싫으신거냐구요. ”
“ 그...그런건 아냐. ”
“ 그런데 왜 ? ”
울상이 되어서 묻고있는 준식. 일단 예빈을 겨우겨우 달래서 가까스로 떼어내고 놀이터 벤치 있는쪽으로 그녀를 데리고 가긴 하지만 예빈은 혹여 준식이 자신을 버리고 갈까봐 불안해진 아이마냥 다시금 준식에게 바짝 파고들었고, 그런 예빈으로 인해 준식은 당혹스러움을 쉬이 지우지 못하고 있다. 일단 겨우겨우 예빈을 달래 진정시킨 준식. 그리고 입을 연다.
“ 예빈아...아저씨는 말야... ”
“ 싫어요 !!! ”
“ ??? ”
“ 친구로만 남자느니 어쩌느니 저 그런말 싫어요. 사귀면 사귀는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친구로만 남자니 세상에 그런말이 어디 있어요. 그러니...행여 그런 말씀은
두 번다시 입에 담지 말아주세요. ”
이렇게까지 나오는 예빈이니 준식으로선 참 이 상황을 어찌 정리해야할지 쉬이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제 겨우 중3인 – 다만 예빈은 1년간 학업을 사실상 중단상태였으니 현재 예빈과 동갑나기인 학생들은 모두 고등학교에 진학한 상태다. - 예빈과 살림이라도 차릴수도 없는 일이고, 정말이지 이 상황을 정리하기 쉽지 않아 막막하기만 한 준식. 여하튼 예빈을 진정시키고 달래야하긴 할 것 같아 이와같이 입을 연다.
“ 일단...학교는 졸업해야 할 것 아니니. ”
“ 누가 뭐 안한대요 ? ”
일단 예빈도 인근 중학교에 최근 편입신청을 해서 중학교 3학년에 다시 다니고 있긴 하다. 헌데 그러면서 평일 오전에 이렇게 학교는 안가고 마냥 준식을 기다리고 있었다니 학업을 마저 마칠 의지는 제대로 있는 아인지 그조차도 의심스러워질 지경이다. 그래서 준식은 일단 그 점부터 타일러볼까 하는데, 예빈은 그런말이 나오기를 미리 예견이라도 한것처럼 이렇게 말한다.
“ 그리고 어린애 취급하지 말아주세요. ”
“ ??? ”
“ 학교를 계속 마저 다니든 어떻게 하든 그건 제가 알아서 판단할거니까...무슨 학
교 안가니...어쩌느니 하는 그런식으로 아이 타이르듯 하는말 그런말은 저한테 하진
말아주세요. ”
준식은 탄식을 내뱉는다. 하긴 옛날같으면 10대 중반쯤 되면 이미 시집,장가갈 나이긴 하다. 허나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니고 솔직히 성인연령을 괜히 만 19세니 20세니 그런식으로 정해놓은 것이 아니다. 적어도 그 정도 나이가 되기전까진 아직 사회와 세상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이나 정서가 심어져 있을것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보편적 사회적 판단과 합의가 있기 때문에 그 정도의 연령부터를 ‘성인’으로 보는 것 아닌가. 헌데 예빈은 비록 어느덧 만 16세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일반적으론 고3, 중간에 학교를 사실상 1년을 쉬었기 때문에 아직 중3 과정을 밟고 있는 상태. 헌데 이런 아이를 어린애 취급 하지 않으면 뭘 어쩌란 이야긴지. - 가령 무슨 사탕,과자 사먹을 나이 아니라던가 만화영화나 볼 나이가 아니라던가 그런 의미의 ‘어린애 취급’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 아닐 것 아닌가. 솔직히 준식이 어느정도 말주변도 있고 여자다루는 능숙한 능력이라도 있다면 어떻게든 예빈의 마음이 잘 달래지도록 어떻게든 수를 써봤겠지만, 원래 준식이 말주변도 없고 여자 다루는 능력도 서툴러 그래서 더더욱 이런 상황에서 예빈을 다루기가 쉽지 않다. - 오히려 예빈 어머니는 전형적인 어린 여자 꼬시는 나이많은 남자의 방식으로 어린 여자애를 꼬셨다며 그런식으로 오해하고 있지만 – 한참을 고민하는 듯 하던 준식이 그러다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예빈에게 천천히 입을 연다.
“ 예빈아, 그럼 말이야. ”
“ ...... ”
“ 아저씨랑 잠깐 어디좀 갈까 ? ”
“ 어디를요 ? ”
좀 뜬금없는 소리로 들려서인지 의아하게 예빈이 준식을 보는데 준식이 그런 예빈의 손을 살며시 잡아보며 말을 건넨다.
“ 아저씨가 예빈이에게 보여주고 싶은게 하나 있어서 그래. 그러니 일단 따라와봐. ”
놀이터 건너편에는 작은 야산이 하나 있는데 그 야산 옆으로는 오솔길이 하나 나 있다. 그 오솔길쪽으로 예빈을 데리고 가는 준식. 어느정도를 걸어갔을까. 준식이 문득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 이 근처 어디였던 것 같은데... ”
준식의 의도를 알 수 없는 예빈은 의아하게 그를 바라만보는데 준식이 뭔가를 살피면서 찾는 듯 하다 뭔가를 발견한 듯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친다.
“ 아, 맞아. 아마 저쪽이었을거야. ”
“ ??? ”
그렇게 말하고는 예빈을 잡아 이끌 듯이 그쪽으로 데려가는 준식. 그쪽으로도 길은 쭉 나있었는데 다만 포장이 되어있진 않은 흙길이다. 아마 야산쪽으로 올라가는 길 같기도 한데 그 옆쪽으로 약간 평평한 공간이 있다. 그리고 얼핏 보니 어떤 이름모를 무덤 하가나 있다.
“ 그러고보니 이 근방이 맞긴 맞구나. ”
예빈은 여전히 준식의 의도를 알 수 없어 그를 의아하게 바라만보는데, 준식은 일단 그 인근 앉을만한 곳을 찾아 간단하게 자리를 깔고 그 옆에 예빈을 앉게 한다. 예빈과 나란히 앉게된 준식. 준식의 말이 이어진다.
“ 그게 아마 아저씨가 이 동네로 이사를 온지 얼마되지 않았을 무렵이야. 그러니 어
느덧 20년이 다 되어가는일이구나. ”
엄밀히 따지면 20년전이면 준식은 대진교에서 사무간사로 일할 때. 허나 준식의 아버지가 빌라등 이 근처 건물 세필지를 매입한게 그때의 일이고 준식은 그때 대진교에서 일할때이긴 하지만 상주를 하는 것이 아닌 출퇴근을 하듯 오가면서 일을 봤을때이니만큼 그때의 거처도 이곳이었다고 보는게 맞다. 어쨌든 준식의 아버지가 이 동네의 빌라와 건물등을 매입하면서 이곳을 거처로 삼게된게 그때의 일이란 소린데, 바로 그 무렵의 일이라면서 준식은 이와같은 이야기를 입에 담는다.
“ 아저씨가 이 동네 이사온지 한 반년도 채 안 되었을때의 일이 될텐데...그때 한번
은 이런일이 있었어. 한 20대 중,후반 정도로 추정되는 여성이 이 근방에서 자살
을 한적이 있었지. 위치가 기억이 정확히 나지 않아 좀 헤맸었는데 저 무덤을 보
니 이 근방이 맞나보구나. ”
20년전에 있었던 20대 중,후반 정도 추정되는 여성의 자살. 헌데 그런 이야기를 지금 왜 하는것인지. 예빈이 의아해하는 가운데 준식의 말은 계속 이어진다.
“ 나중에 사연이 알려진게 대충 그와같다 하더라고. 자살한 여성은 실은 원래 여군
이라고 했던가 여경이라고 했던가...아무튼 기억이 정확치는 않은데 그런 직종에 종
사하는 그런 여성이었다고 해. 허나 자살할때야 사복차림이었을테니 자살한 여성이
여군출신이든 여경출신이든 그런 것을 알수는 없었을테고... ”
“ ...... ”
“ 대충 사연이...뭐 여군이 되었든 여경이 되었든 그런 직종에서 일하면서 거기서 알
게된 한 남자와 사귀게 된 모양이야. - 가만보면 여군이나 여경 같은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대개 비슷한 직종내에서 남자를 만나 사귀고 결혼하고 그렇게 되는 것 같
더라. 뭐 같은일에 종사하는 사람이니만큼 늘 보게되고 그러다 자연스레 정분도 나
고 그렇게 되는걸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 ”
예빈은 아직 준식의 의도를 알 수 없어 묵묵히 그를 바라만 보는 가운데 준식의 말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 어쨌든 그렇게 사귀게 된 남자와 결혼약속을 하고 약혼식까지 하고...아마 결혼식
이 얼마남지 않은 그런 무렵이었다고 해. 헌데 그 남자가 그만 불의의 사고로 세상
을 떠났다고 하더군. 그러니까 그 남자도 여자와 비슷한 경찰 혹은 군인 그런 직종
에 종사하던 남자였나본데, 여하튼 그런일을 하다 순직(殉職)을 한 모양이야. ”
“ 가만 그러니까 그 여자분이 사귀던 남자가 결혼을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는 말이
죠 ? ”
순직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중요한 것은 결혼식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태에서 남자가 죽었다는 부분이 될 것 같아 예빈이 그와같이 묻고 준식이 고개를 끄덕인다. 예빈이 멀리 떨어지지 않은곳에 위치한 무덤을 잠시 의미심장하게 바라보기까지 하는데, 일단 준식의 말은 좀 더 계속되고 있다.
“ 여자는 결혼을 앞둔 남자의 죽음으로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하더군.
결국 다니던 직장까지 사임하고 그리고 한동안 술로 세월을 보냈다고 해. 불과 얼
마전까지만 해도 – 뭐 여군이 되었든 여경이 되었든 – 그런 강단있는 직종에 종사
하던 여성이 맞나 의구심이 들 정도로...그야말로 한동안 폐인이 되다시피하며 살았
다는데... ”
“ ...... ”
“ 그러다 결국 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을 한거야. 바로 여기까지 와서 말이
지. ”
“ 가...가만 그러니까 어쨌든 그런 사연을 가진 여자분이 여기까지 와서 자살을 했다
그 말씀인거죠 ? 결혼을 앞둔 남자를 사고로 잃고 실의에 빠진 여자가... ”
바로 20년전 준식이 이 동네 이사온지 얼마되지 않았을 무렵 있었던 좀 놀랍고 의문스러웠던 한 여인의 자살사건. 헌데 알고보니 사연이 그와같았다는 이야기 아닌가. 그리고 그 자살을 한 여인이 목숨을 끊은 장소가 이곳이라는 이야기고, 헌데 그렇다면 지금 두 사람 앞에 보이는 무덤은 바로 그 여인의 무덤이 되기라도 한단말인가. 예빈은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준식의 설명은 계속되고 있다.
“ 나중에 알고보니 정작 그 여성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혼자 자란 몸이라서 다른 가
족연고는 없었다고 하더군. 뭐 남자와 결혼 직전상태까지 갔던 사이라니 그 남자쪽
가족은 혹 있었을지 몰라도... - 헌데 어차피 정식 결혼을 한것도 아니니까 말야. ”
“ ...... ”
“ 일종의 무연고 시신 비슷하게 될 처지였어 그러니까. 그런 사연을 갖고 자살한 여
자가...그래서 그 여자분을 동네 사람들이 뜻을 모아 이 근방에 묻어주기로 했지.
여인의 사연도 너무 딱하고 또 그렇게 자살로 생을 마감한것도 안 되어보여서... ”
그렇게 사랑하던 남자를 잃고 한동안 실의에 빠져 폐인처럼 생활하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여자. 게다가 다른 가족연고도 없어 ‘무연고 시신’이 될뻔한 여자를 동네 사람들이 이곳에 묻어주었다는 것 아닌가. 그런 이야기를 듣고나니 예빈도 20년전 자살했다는 그 여자가 참 안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무덤을 말없이 바라보기까지 하는데, 준식은 어디서 준비해왔는지 소주 한병과 간단한 다과를 그녀의 무덤앞에 놓고 절까지 올린다. 준식과도 아무런 인연은 없는 여인의 무덤인것만은 분명한데 – 굳이 인연이 있다면 이 동네 이사온지 얼마 안되어 그런일이 있었고 동네 사람들이 함께 그녀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는 것 – 무엇보다 대체 이런 이야기를 예빈에게 왜 들려주는것인지 그 의도를 알 수 없어 의아하기만 한 가운데 준식의 말은 계속된다.
“ 예빈이한테 들려주고픈 말은...세상의 남녀간의 인연은 참 다양하고도 다채롭다는
그런 이야길 한번은 들려주고 싶었어. 그래서 그 20년전 자살한 여자분의 이야기
를 들려준거야. ”
“ ...... ”
“ 세상에는 아직 예빈이가 모르는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 예빈이나 또 어쩌
면 아저씨도 상상해보지 못할 수많은 이야기, 이루지 못한 사랑, 또난 알 수 없는
미모한 남녀간의 관계, 그런일들이 세상에 참 무수히 존재해. 어쩌면 드라마니 영
화니 소설이니 하는것들도 그런 남녀간의 관계를 모티브로 만드는것들이 아닐까 그
런 생각도 들고... ”
헌데 그래서 뭐 어쩌자는 것인지. 예빈은 여전히 준식의 의도를 알지 못하는 것 같고 또 한편으로는 괜한 불안함도 들어서인지 예빈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지기까지 한다. 그런 예빈을 다독이듯 준식이 어깨를 한번 감싸주고는 그리고 말을 이어간다.
“ 아저씨 말은 그것처럼 예빈이 너와 아저씨의 사이도... ”
“ ...... ”
“ 어떤 그런 알 수 없고 오묘한 수많은 남녀간의 인연중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말을 하고싶은거야. ”
하긴 생각해보면 준식과 예빈의 인연도 참 기묘한 인연이기도 하다. 원래 육상을 하다 어떤 어이없는 사고로 발목부상을 당해 더 이상 달리기를 할수 없게된 상태에서 학교까지 그만두고 원래 자신들이 살던곳에서는 거리가 먼 이곳 경기도의 위성도시까지 와서 살게된 예빈 모녀. 그리고 한동안은 실의에 빠져 ‘은둔형 외톨이’처럼 살던 예빈이 밤마다 오만 발작을 하며 자기 엄마와 죽네사네 난리를 치다 이웃 주민들로부터 ‘시끄러워 못살겠다’는 민원이 계속 들어와 준식이 하는수없이 예빈 모녀에게 주의를 주면서 시작된 인연이 아닌가. 허나 그때만 해도 워낙 황폐화된 정서를 갖고있던 예빈인지라 다음날 아침 편의점 앞에서 만난 준식의 뺨을 때리는 일까지 발생했고, 나중에 안 예빈 어머니가 ‘이건 아니다’라며 백배 사죄를 했고, 예빈도 생각해보니 자신이 너무한짓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정식으로 다시 사죄의 인사를 하러 오고. 그런식으로 시작된 인연인데 생각보다 의외로 마음이 맞는 부분이 있었는지 가끔 말동무나 하며 지내게 된 준식과 예빈. 준식 입장에선 외로웠고 예빈 입장에선 잔뜩이나 실의와 절망에 빠져있던 상태에서 그런 자신을 조금이나마 변화시켜주고 세상을 향해 다시 밝게 나갈수 있는 용기를 북돋아준 그런 존재가 준식이기도 하다. - 무엇보다 예빈은 준식과의 인연이 이와같이 이어지고나서 한동안 어두웠던 분위기가 많이 밝아진 면까지 있다. 그런 준식과 예빈의 인연을 생각해보면두 사람의 인연도 참 남다르고 기묘하다는 생각도 들긴 하는데, 준식이 다시금 예빈을 보며 이와같이 말한다.
“ 거듭 말하지만 세상에는 참 무수한 남녀간의 인연이 존재해. 한두마디 말로는 표
현하기 힘든...그러니... ”
“ ...... ”
“ 예빈이 너와의 인연도 그 수많은 기묘한 만남중의 하나. 그 정도의 인연으로만 간
직했으면 좋겠구나. ”
한편 예빈모는 예빈모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나름 고뇌에 찬 결단 하나를 내렸다. 딸 예빈과 건물주 준식의 관계를 더 이상 두고볼수만은 없던 예빈모. 하루는 통보라도 하듯 딸에게 말한다.
“ 우리 이사갈거다 !!! ”
“ 엄마... ”
갑작스런 엄마의 말에 예빈은 무척이나 놀라는 반응을 보이고 당연히 그 이유를 묻지 않을수 없었다. 허나 딸의 물음에 예빈모는 그걸 몰라서 묻느냐는 듯 나왔다.
“ 이것아 !!! 다 너때문이지 누구 때문이야 !!! 너 자꾸만 동네에 이상한 소문나고 이
런식으로는 도저히 두고볼수가 없어서 결심한거야. 그러니 잔말말고 엄마 시키는대
로 해 !!! ”
“ 이사갈 돈은 있구 ? ”
“ 이사가는데 무슨 돈이 필요해 ? 몸만 옮기고 짐만 옮기면 되는거지. ”
“ 집도 새로 구해야 할거구...또 이삿짐 옮기는 비용도 들거아냐. “
“ 거 진짜... ”
딸 아이가 대놓고 이런식으로 나오는 이유가 대충 짐작이 갈 것 같아서인지 예빈모는 더더욱 거슬린다는 듯 나오고 무엇보다 준식과의 문제라면 더 거론할 가치조차도 없다는 듯 예빈모는 더욱 단호하게 나온다.
“ 너만 아니었으면 나도 이렇게까지 무리하게 나오진 않았어.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도 있으니 이런식으로 너랑 그 늙은X 떼어놓는 수밖에 더 있냐 !!!
이것아 너도 그리고...그 조심하라고 만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러다 정말 큰일나면 어쩔려구 그래 이것아 !!! ”
예빈모는 철딱서니 없는 딸이 정말 걱정되고 기가막히다는 듯 나오는데, 그럼 대체 이사는 어디로 갈 생각이냐는 딸의 물음에 예빈모는 이와같이 대답한다.
“ 전에 살던데로 가야지 어디로 가겠냐. 솔직히 니 말마따나 지금 집 구하기 쉽지도
않고...월세방이라도 하나 새로 구해야하나 생각은 해봤는데...근데 아무래도 뭐니뭐
니 해도 원래 살던 고향인 OO으로 돌아가는게 가장 낫겠다. 그 생각이 들더구나. ”
“ 싫어 !!! 거긴 안 가 !!! ”
“ 뭐라구 ? ”
대놓고 반발하는 딸의 모습에 어이없어 하는 예빈모. 허나 예빈은 원래 살던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엄마의 말에 더더욱 당치않다는 듯 나온다.
“ 싫어 !!! 거기 안 가 !!! 쪽팔려서라도 OO(* 원래 예빈 모녀가 살던 고장)으론 다
시 안돌아가 !!! 나 다리병신된거 동네 사람들이 다 아는데, 그런데 거기로 다시 돌
아가자구 !!! 엄만 도대체 내가 왜 다른데로 이사가자고 조르고 보챘는지 그걸 진짜
모르는거야 ? 게다가 학교두...차라리 여기서 그냥 다니는게 낫지...나랑 동급생인
친구들은 이미 다 고등학생 되어 있을텐데 나만 혼자 중3부터 다시 다니면서...그
꼴을 쪽팔려서 내가 어떻게 보냐구 ? 나랑 한때 동기였던 애들이 고등학생 선배 있
는 것을 내가 X팔려서 어떻게 보고 사냔말야 !!! ”
“ 이것아...니가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때야 !!! 그러게 왜 처신을 똑바로 하지 않고.
..차라리 육상인지 뭔지 한답시고 밀린 공부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니까 그 말
도 안듣고 대체 뭣 때문에 이 사달을 만든건데 !!! 이게 다 너 때문에 이렇게 된일
을 이제와서 대체 누구탓을 하는거야 !!! ”
예빈모는 딸을 거듭 나무랐고 하지만 예빈은 이사가기 싫다며 거듭 버텼다. 게다가 예빈모가 이사가기로 한곳이 결국 원래 예빈 모녀가 살던곳인 OO임을 밝히자 그건 더더욱 싫다고 했다. 일단 이사를 가는 것 자체가 준식과 자신을 떼어놓으려는 것이 엄마의 1차 목표이니 그것부터 못마땅한 판에 잔뜩이나 달리기를 더 할수 없게 된 상황에서 이런 모습으로 친구나 이웃주민등을 더 보고싶지 않고 수치스럽고 민망해서 그래서 엄마보고 늘상 이사가자고 졸랐던 것이 달리기를 하다 부상을 입은 직후 한동안의 예빈의 모습이었다. - 죽고싶다고까지 그 난리를 쳤으니 실제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봐야할것이 그 당시의 예빈의 모습이다. - 헌데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떠나온 고향을 이제와서 돌아가자니. 예빈 입장에선 더더욱 싫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더욱 몸서리치지만 예빈이 싫다고 해서 아직 경제적으로 독립을 할 힘이 없는 그녀에게 어떤 결정권이 있을수가 없다 예빈모는 이미 집을 내놓고 이사를 간다는 말을 집주인 윤준식에게 밝혔고 그로부터 얼마후 실제 이사를 실행에 옮겼다.
“ 죄송합니다 어머님. ”
막상 그렇게 이삿짐을 챙겨 떠나는 예빈 모녀를 보자 준식이 착잡함에 그와같은 인사를 건넸다. 입주민들이 들어올때라면 모를까 나갈때마다 늘상 챙기고 배웅할 정도의 준식은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빈모녀와는 그동안의 일들이 일들이었으니만큼 막상 그렇게 떠나는 예빈 모녀에게 배웅이라도 안하고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정중하게 사과의 말을 건네는 준식을 보며 예빈 어머니는 이와같이 말한다.
“ 그쪽 말마따나 다 잊어버리고 삽시다. ”
일전에 예빈이 준식의 뺨을 때린일로 예빈모녀가 사과하러 왔을떄 준식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난 원래 이런일은 그냥 잊어버리고 살려고 하는 사람이니 신경쓰지 말고 앞으로 행동이나 조심하라.’구. 헌데 이번엔 비슷한 취지의 말을 예빈모가 입에 담고 있는 것이다.
“ 피차 악연으로 생각하렵니다. 뭐 이제 이사가고나면 다시 볼일도 없겠지만은...여
하튼 그동안 있었던일 다 잊고 삽시다. ”
“ 다시한번 정중히 사죄드립니다 예빈 어머니. ”
예빈은 실상 지금 준식에게 매달려 ‘헤어지기 싫다’며 울며불며 난리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지만 그랬다간 엄마가 또 한바탕 뭐라고 할 것 같아 참는중이다. 이삿짐을 일단 이삿짐 센터 차에 모두 실어 보내고 예빈모녀는 대중교통을 통해 자신들의 원래 살던 지역인 OO으로 내려갈 예정이다. 웬만한 짐들은 다 이삿짐센터 차에 실었고 두 사람은 간단한 소지품만을 들고 빌라를 떠나는 모습. 준식의 두 딸도 인사를 건넨다.
“ 어쨌거나 다들 잘들 계시오. 건강하게들... ”
예빈 어머니 입장에선 그것도 준식의 두 딸에게 무슨 딱히 할말이 있는 처지도 아니니 그렇게 원론적인 인사말을 건넬 수밖에 없고 그렇게 예빈모녀는 저만치 사라지고 있다. 준식은 큰길까지 뒤따라가서 예빈 모녀가 시야에서 보이지 않을때까지 한참을 바라보지만 그 안타까운 심정조차 지금 예빈에게 전할길이 없어 답답할 따름이다. 아마 예빈 모녀는 기차를 타던가 고속버스를 탈것으로 예상이 되는데 그럼 아무래도 서울역이나 고속버스 터미널쪽으로 갈 전철을 먼저 타게될 듯 하다. 그러니 일단 지하철까지 가는 버스를 타게 될테고 바로 그 버스정류장에서 두 모녀가 탈 버스가 도착할때까지 준식은 큰길가에서 한참동안 안타깝게 예빈 모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돌아온 준식은 일단 예빈모녀가 떠난 101호 집의 청소작업부터 시작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제든 새로 입주민이 들어올수도 있으니 청소는 늘 깔끔하게 해두는 것이 준식이 늘상 하는일이다. 이미 예빈모녀의 이삿짐이 모두 옮겨져 텅빈 집안. 한참을 쓸고 닦고 작업을 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지쳤음인지 방 한쪽 구석에 누워서 상념에 잠긴다. 그러고보면 불과 전날까지만 해도 예빈이가 살던 그리고 그 아이의 체쥐가 곳곳에 남아있는 그런 집이 아닌가. 그래서 공연히 집안 여기저기를 돌며 특히 예빈이 자기방으로 썼을 작은방을 일부러 만지작거려도 보고 냄새도 맡아보는 준식. 순간 가슴 한켠이 아려오기 시작했다. 뭔가 사랑하는 무엇을 잃었을 때 느끼는 그런 상실감. 그런 한없은 허전함과 아픔이 준식의 가슴 한켠에 밀려들고 있는 것이다. 준식은 중국집에 전화를 걸어 자장면 한그릇을 시켰다. 그리고 인근 편의점에서 술 한병을 바로 사와 배달한 자장면이 도착하자 그것을 술안주삼아 먹으며 복잡한 속내를 달래고 있다. 자꾸만 떠오르는 예빈의 얼굴. 그리고 집안 여기저기 남아있을 예빈의 체취. 그것이 지금 준식을 견딜수없이 힘들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자장면 한그릇을 배고픔에 다 비우고 배달부가 도착해 그릇을 돌려보내고 난 뒤에도 준식은 술 몇병을 더 사와 예빈 모녀가 살던집에서 혼자 그것을 들며 한참을 마셔대다 인사불성이 되어 그 자리에 쓰러져버렸다.
- 마지막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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