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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그룹 팬픽 - 여자친구 신비 (7) 걸그룹 팬픽 8 (트와,여친)



 

                                  부제 : 예수만 섬기는 우리집


 

 김길홍은 자신의 집에서 아내와 차를 들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6.25때 호남의 피난처에서 알게된 것이 인연이 되어 그때 정식 결혼식을 올리기도 전에 첫 아이가 생기게 되고 그런 둘이 이곳 경기 양주 남부지역으로 와서 정착한지도 어느덧 18년의 세월이 흘렀다. 두 사람 사이엔 그 사이에 아들 여덟명이 태어났고, 한편 길홍은 휴전이 되기 직전에 당시 이 동네에서 교회 개척을 준비하고 있던 송수만 전도사를 처음 만나 그의 교회 짓는일을 도와주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송수만의 ‘바울교회’ 첫 등록교인이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신앙생활도 어느덧 18년의 세월. 그리고 폐허속에서 고철이나 쓸만한 물건 따위를 모으고 수리해 교회를 세우던 송수만의 경우를 본따 자신도 폐허속에서 고철과 쓸만한 물건을 모으고 수리해 공장을 짓고 처음 가구공장으로 시작한 ‘(주) 바울가구’도 어느덧 직원 20여명을 거느리고 있고 무엇보다 자기네 공장에서 만든 물품들을 어느덧 일본과 동남아는 물론 기타 20여개국에까지 수출하는 그런 중소기업으로 성장해 있었다. 무엇보다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스스로 공장을 짓고 경영하면서 ‘건전한 그리스도의 가정과 온전한 그리스도의 기업’이 세상 끝까지 이어가게 해달라는 소망이 생겨 그와같은 기도제목을 두고 기도해온 김길홍 집사. 지금 길홍은 자신이 어느덧 18년째 출석하는 ‘바울교회’의 안수집사로 있기도 하다.

 무엇보다 애초 전란중에 무너지지 않은 한 집을 겨우 수리해 사실상 단칸방에서 시작한 길홍내외의 살림도 어느덧 번듯한 2층집에 마당까지 갖춘 그런 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사실상 두 내외가 18년재 살고있는 이곳 별내면에선 다섯손가락 안에 꼽히는 가장 큰 집(1971년 현재)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 집에서 아들 여덟과 함께 살고있는 길홍내외. 다만 길홍의 장남 진규(52년생)는 어느덧 대학생이 되어 지금은 서울 명문대 의대에 진학 지금은 서울에서 하숙을 하며 학교를 다니고 있어 잠시 부모와 떨어져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차남 정규가 고2(54년생). 의대에 진학한 형과 달리 그는 법조인이 되고싶다는 꿈을 갖고 있는데 실제 법대에 진학할 생각을 하면서 열심히 공부중이다. 무엇보다 정규가 근래들어 가장 신나있는 것은 드디어 자신이 혼자 쓰는 방이 생겼다는 점이다. 길홍내외가 대략 60년대 초반에 지어 살고있는 2층집은 2층에 방 세 개를 두어 애들끼리 쓰게 했는데 지금까지 정규는 형 진규와 한방을 썼고, 그러다 진규가 고3이 되자 아버지 길홍은 수험생인 진규가 대입준비에 전념할수 있도록 혼자 쓸 수 있는 방을 주었던 것이다. 헌데 그 진규가 이제 대학에 진학하고 그 방이 빈방이 되었으니 이제 정규가 ‘자신이 그 방을 쓰게 해달라’고 부탁, 법대생을 꿈꾸는 둘째에게 아버지가 흔쾌히 허락 형이 얼마전까지 쓰던방을 물려받아 쓸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2층 두 개의 방중 하나는 현재 중2인 셋째 용규(57년생)와 국민 학교 5학년인 넷째 승규(59년생) 그리고 2학년인 다섯째 민규가 함께 쓰고있고 여섯째 태규(64년생)와 일곱째 한규(67년생)가 또다른 방을 쓰고 있으며 아직 애기인 여덟째 현규(69년생)는 아빠,엄마가 안방에서 아직 직접 키우고 있었다. 그리고 현재 길홍의 처 뱃속에는 김길홍의 아홉 번째 아이가 자라고 있는중이다.

 무엇보다 길홍은 자신의 아들들이 신앙안에서 큰 말썽한번 안부리고 건강하고 건전하게 자라고 있는 것을 진심으로 감사해하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김길홍이 품기시작한 소망기도가 그러해왔지만 실제 그와같이 기도해온대로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신것만 같아 그 점만 놓고 보아도 길홍은 몇 번을 감사하고 또 감사해 마지않는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런 길홍이 아내를 잠시 지그시 바라보며 말을 건넨다. 이미 아홉째 아이를 갖고있는 그런 아내를 넌지시 바라보며.

 “ 여보, 그런데말이지. ”

 “ 네, 여보. ”

 “ 만약 우리 애들이 이 다음에 결혼을 할 때가되면 말이야. ”

 “ 당신도 참...벌써 무슨 그런 걱정을 다 하세요. ”

 아직 자녀들 결혼이나 연애문제 같은 것을 생각하기엔 다소 이르다는 생각을 한 것일까. 현재 뱃속에 새로운 아이 하나가 더 생긴 길홍의 아내는 느낌에 자기 아이들이 아직 어리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것인지. 헌데 길홍이 그런 아내를 일깨워주듯 한마디 한다.

 “ 벌써는 뭐가 벌써야. 진규가 벌써 대학생이고 정규도 이제 고2니 내년에 대입 치

  르고 나면 그 다음에 대학생인거고 그러다보면 진짜 얼마 안 남은거지 뭐... ”

 “ 그래도...아이들 대학도 가야할거구. ”

 실제 이때 남자들 군복무 기간인 3년반이었으니 체감적으로 생각해봐도 무척이나 길게 느껴질 시간이다. 추정컨대 부부나 연인간은 남자가 여자보다 그래도 7-8살 정도는 많은게 정상적이고 바람직하지 않겠느냐는 인식이 생긴 것이 대략 이 무렵부터가 아닐까 싶다. 일단 근본적으로 남자는 군복무 기간이 3년반이니 그 이전에 준비하고 하는 시간등을 포함하면 사실상 4년의 시간을 날려보내는것이나 다름이 없고, 그리고 대학 졸업하고 일자리 잡고 하면 남자는 20대 후반이나 되어야 온전하게 직장을 잡고 돈을 벌면서 여자를 만나 결혼하기에 적절한 그러한 나이가 된다. 따라서 그 점을 생각해보면 여자는 아직 그래도 대학까지는 가지 않는 경우가 많은 시절이니 남자나이는 대략 20대 중,후반 여자나이는 20대 초반 정도를 결혼적령기로 생각하는 그래서 자연스레 남자가 여자보다 몇 살 많은 커플을 ‘정상적’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 아닐지. 하지만 실제보면 일제때는 물론 심지어 6.25 전후까지만 해도 여자가 남자보다 오히려 한두살 많은 부부 생각보다 적잖이 볼수가 있다. 당장 길홍내외의 경우가 그렇지 않은가. 길홍처가 살짝 그 부분을 상기시키며 핀잔을 준다.

 “ 당신 그리고...솔직히 이제와서 하는말이지만 반성하셔야돼요. ”

 “ 뜬금없이 그게 무슨소리야 ? 아니, 내가 뭘 반성을 해 ? ”

 “ 당신 도대체 언제부터 저한테 그렇게 반말하기 시작하셨어요 ? 가만보면 우리 같

  이 살림차리기 시작하면서 은근슬쩍 그랬던거 몰라요 ? 잊어버렸어요 ? 사실 제가

  한 살많은 누나인거... ”

 “ 허허 참...아니 근데 이 사람이 지금와서 새삼 그거 따지자는거야 ? 아니, 그런식

  으로라면 내가 사기당한거지. 난 정말 당신이 O사장님 댁에 있을 때 꼬박꼬박 나한

  테 존대말을 쓰면서 상냥하고 예의바르게 대했으니 그냥 나보다 몇 살 어린 사람이

  겠거니 막연히 짐작했던거지. 그렇게 나보다 나이많은 사람이라는건 꿈속에서조차

  생각 못하고 있었는데 진규 거의 다 나올때쯤이나 되어선 뭐 ? ‘길홍씨, 미안해요

  사실은 제가 한 살 많은 누나에요 ?’ 허허 참... ”

 새삼 그때일이 억울하다는 생각이라도 드는지 살짝 공연히 흥분까지 되는 길홍. 허나 아내도 지지않는다.

 “ 어쨌든 반성하시라구요. 가만보면 이 사람이 나이도 나보다 어리면서 한 살많은

  누나한테 툭하면 그냥 반말짓거리야. 도대체가 말이야. ”

 “ 뭐뭐 ??? 이...사람 ??? 허허...근데 진짜... ”





 1978년.

 김길홍에게 큰 경사스러운 일이 하나 생겼다. ‘수출의날’에 ‘수출 백만달려 돌파’와 관련한 ‘금탑’을 수상하게 된 것이다. 어느덧 일본과 대만은 물론 동남아와 중동 심지어 아프리카와 멀리 중남미까지 무려 30여개국에 이르는 나라에 자기회사가 만든 가구를 수출하기에 이른 길홍의 ‘바울가구’. 그 수출액이 어느덧 백만달러를 돌파하여 그 기념상을 ‘수출의날’에 수상하게 된 것이다. 사실 김길홍은 이전에 70년대 중반에 이미 ‘우수 중소기업인상’을 두차례 수상한바 있다. 그만큼 김길홍의 기업이 모범적으로 잘 운영되고 기업 매출과 운영도 잘 되고 있기에 ‘바울가구’에 대한 좋은 평판과 함께 김길홍이 그런 상을 타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허나 수출의날에 수상하는 상은 외국에까지 그런 길홍의 제품이 수출될정도로 명성이 알려지고 그런식으로 국가경제에 기여하는 기업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더욱 크다고 할 것이다. 기쁜 마음에 아내와 함께 ‘수출의날’ 기념식에 참석 상을 타게된 김길홍. 그리고 그 다음날에는 다른 ‘수출의 날’ 수상자들과 함께 대통령이 초청한 만찬장에도 직접 초대받아 식사까지 하게 되었다. 대통령은 그날 ‘수출의 날’ 수상자를 하나하나 그간의 격려와 노고를 치하했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김길홍 사장과도 잠시나마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게 되었다.

 “ 반갑습니다. 나 대통령입니다. 김길홍 사장님이라고 ‘바울가구’ 대표가 되시죠 ?

  특히 기업운영과 관련 아주 훌륭한 비전을 갖고계신 그런 기업인이라 들었습니다.

 ”

 “ 아...아닙니다 별 말씀을...저는 그저 다만... ”

 어쨌든 대통령을 가까이서 직접 뵙게되는 자리이기도 하고 그래서 긴장해서인지 길홍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자신을 낮추었다. 어쨌든 이런 수상까지 하게되는 기업이라면 어떤 기업인지에 대한 보고정도는 대통령도 직접 받았을터. 그런 과정에서 김길홍이 평상시 주위에 말해오곤 하던 그런 포부를 충분히 전해들을수 있었을 것이다. 길홍도 그쯤은 충분히 짐작이 되어서인지 떨리는 목소리로 대통령의 격려의 말에 겸손의 답변과 함께 이렇게 말을 이어간다.

 “ 전 그저 우리나라가 1등제품,1등부품을 많이 만들어 해외에 수출하는 그런 일류

  국가가 되길 오래전부터 소망해왔고 제가 운영하는 공장 역시 바로 그런 방향으로

  국가경제에 기여하는 그런 기업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지금껏 일해왔을뿐입니다.

  비록 작고 부족한 일손일지언정 국가와 민족을 위해 보탬이 되는 그런 기업을 일

  구고자 지금껏 노력해온것뿐입니다. 이번에 그런 제게 주신 상은 그저 저의 그저

  부족하나마 노력해온 결과에 대해 국가가 작은 격려를 해주신걸로 알고 감사한 마

  음으로 받겠습니다. ”

 “ 고맙습니다 김사장... ”

 “ ??? ”

 “ 김사장님과 같은 그런 좋은 생각과 비전을 가진 중소기업인이 우리나라에 한 백

  만명쯤만 된다면 제가 무슨 시름과 근심을 더 할 일이 있겠습니까 ? 만약 그렇게

  만 된다면 제가 이렇게까지 욕을 먹어가면서 이 자리에 오래 있으면서 고생할 이유

  도 없겠지요. ”

 살짝 눈물이 고이는 박정희 대통령. 다만 이런 이야기는 지금 다른 기업인들도 있고 기자들이나 기타 다른 관계자들도 많은 이런 자리에서 할 수는 없는 이야기일터이고, 시간이 조금 지난뒤 김길홍은 아내와 함께 다시 청와대로 초청을 받아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대통령의 조금 더 깊은 속내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휴일이라 마침 일요일이기도 한 그런 날이었다.

 “ 김사장님... ”

 “ 예, 대통령 각하. ”

 어쨌든 김길홍의 입장에선 대통령이 다시 자신을 초청해주었다는것만으로도 그 옛날 상감마마라도 직접 뵌듯한 무지렁이 백성처럼 무척이나 들뜨고 흥분된 마음이었고, 그래서 여전히 긴장될 수밖에 없는 마음으로 대통령의 부름에 답했고 대통령은 그런 길홍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 사람들이 날 뭐라고 욕하는지 내가 모르는게 아닙니다. 장기집권을 하는 독재자...

  저혼자 평생 다하려고 하나...뭐 그런 욕들 하는거 나 모르는 사람 아니에요. ”

 “ 각하...무슨 그런 말씀을... ”

 나름 어떤 회한이라도 있는지 약간 잠겨오는듯한 목소리로 그와같이 말하는 대통령을 보자 김길홍은 더더욱 황송하고 당황했고 대통령의 말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 난 어쨌든 헐벗고 굶주린 이 나라의 경제를 반석위에 올려놓고자 이 한몸을 다 바

  쳐 헌신하고 싶었을뿐이에요. 5.16 혁명을 일으키며 한강다리를 건널 때 내세웠던

  혁명공약에 쓰여져있던 그 문구 그대로 말입니다. ‘절망과 기아선상에 사로잡힌 이

  나라의 민생고를 해결하고...’ ”

 새삼 그때를 회상이라도 하듯 대통령은 잠시 눈을 지그시 감아보기도 하고 그런뒤에 다시 대통령의 말이 이어졌다.

 “ 그래서 나도 다방면으로 많은 전문가들 의견도 듣고 하면서 나름대로 방법을 연구

  해봤던것입니다. 자원하나, 기름한방울 없는 나라, 거기에 일제와 6.25를 거치며

  나라는 피폐할대로 피폐해졌고 거기에 국토는 3분의2가 산악지대 게다가 공산치

  하 북한과 남북으로 갈라져있는 그런 참으로 한심하고 위태롭기 짝이없는 나라...

 ”

 “ ...... ”

 “ 그런 나라를 어떻게 하면 공산침략의 위험에 시달리지 않고 도탄에 빠진 이 나

  라 백성들을 그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구제할수 있을까 그걸 연구하다...그래서 생

  각한게 수출입국,기간산업 육성, 중소기업 육성 그런것들이란말입니다. 자원하나

  없는 이 나라가 할수있는게 뭐가 있겠어요 ? 기간산업 육성, 중소기업 육성으로

  일단 이 나라의 경제성장의 기반을 닦아놓고 그리고 수출로 돈벌고...그렇게 해서

  라도 먹고살길 트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있겠냐 이 말입니다. ”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성장 이론이 그렇게 짧게나마 새삼스럽게 역설되고 있었고, 그런 대통령은 김길홍 사장을 만나게 된 반가운 마음을 그렇게 토로했다.

 “ 그나마...대기업들이 이 대통령의 마음을 알아서 최소한 수출입국의 측면에선 조금

  씩 살길이 트여가고 있어요. 하지만 결국 선박이다 자동차다 전자제품이다 기껏 다

  른나라에서 좀 좋은 부품들 수입해서 그거 조립해서 만든 제품을 만들어 수출하는

  나라 – 그나마 그 부품들 상당수가 일본제품이란게 이 나라 경제현실의 가장 결정

  적인 한계이기도 합니다만... ”

 “ ...... ”

 “ 그래서 1등제품,1등부품 많이 만드는 그런 선진국이 되자는 그런 사장님의 비전

  에 감동한것입니다. ‘아, 정말 이 나라에 선생같은 중소기업인이 한 몇만명정도만

  되어도 내가 무슨 시름,근심할일이 있을까 하는... ”

 “ 과...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대통령 각하... ”

 어떻게보면 평범한 일개 중소기업가의 입장에서 그것도 근본적으로 따지고보면 휴전직후에 어떻게든 먹고살길은 마련하기 위해 시작한 작은 공장. 그러면서 어떻게보면 철없는 젊은 혈기에 막연히 생각해본 그런 구상이자 발상. 헌데 그것이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성장 이론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질지 누가 알았으랴. 그래서 더더욱 이제야 김길홍 사장을 만난것에 더더욱 반가와하고 한편으론 아쉬워하기도 하는 박정희 대통령. 식사가 거의 끝날때쯤엔 대통령은 약간 슬픈표정으로 이와같이 말했다.

 “ 김길홍 선생, 난 진짜...난 진짜 말입니다. ”

 그 사이 김길홍과 술도 한두잔 주고받아서인지 살짝 취기가 오른 얼굴과 목소리로 김길홍 사장을 ‘선생’이라 부르며 대통령의 말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 만약 내 뜻을...경제성장에 대한 내 뜻과 비전을 제대로 알고 계승할 사람만 있었

  어도 나도 이러지 않아요. ”

 “ ...... ”

 “ 다들 날 독재자다...장기집권이다...그렇게 욕하죠. 민주주의를 파괴한 주범이다 뭐

  다...하지만 나라고 장기집권 하고싶어 한줄아쇼 ? 나도 어떻게든 이 나라 경제기반

  을 튼튼한 반석위에 올려놓고 말겠다는...내 그와같은 경제성장 비전이자 정치철

  학을 제대로 알고 이어갈만한 그런 후계자만 하나 있었어도 나 진작에 그런 사람

  에게 물려주고 떠났지...나도 20년씩이나 이 자리에 있을 생각 안 해요. ”

 “ 각하...많이 취하신 듯 합니다. ”

 “ 김길홍 선생...차라리 이 다음에 선생이 나 다음에 대통령하쇼 ? ”

 “ 옛 ? ”

 술에 취해 나온 헛소리일수도 있겠지만 순간 화들짝 놀라기까지 하는 김길홍. 대통령이 순간 실수임을 깨달았는지 손을 한번 휘휘 내젓고는 그리고 다시금 말을 이어간다.

 “ 내 말은...내 말은...그래요. 선생같은 중소기업인이 한 몇만명라도 더 있었으면 내

  가 무슨 걱정을 더 했겠냐 그말이외다. 수출입국...1등부품,1등제품 많이 만드는 그

  런 중소기업 육성. 선생 비전과 내 생각이 이제와서 딱 맞아떨어진다 그 말입니다.

  내 말 아시겠소 ? 정말 선생같은분을...선생같은분을 진작에 만났었어야 하는건데

  ...크흐흐흑~~~!!! ”

 진짜 많이 취한것인지 울음까지 터트리는 대통령으로 인해 김길홍은 어쩔줄을 모르고 안되겠다 싶은 비서진과 경호원이 달려와 그쯤에서 대통령을 부축해 퇴장시켜 김길홍 사장과의 만찬장은 대충 그정도로 마무리된다. 각하의 성의니 받아두시라며 비서진이 전해준 금일봉을 받고 김길홍은 아내와 함께 청와대를 나오게된다.





 1979년 10월 27일 오전.

 5.16 혁명이 일어나던 무렵만 해도 아직 TV 방송도 개국되기 전이고 다만 라디오 정도가 어느정도 보편화되어있던 시절이지만 이때쯤이면 이제 TV도 어느덧 생활필수품이 되어가고 있는 시절. ‘여로’니 ‘아씨’니 하는 흑백 TV 시절 ‘일일연속극’이 범 국민적 인기와 선풍을 몰고왔던 것이 바로 70년대가 아니던가. 바로 그 70년대도 어느덧 막바지에 치닫고 있는 늦가을. 출근준비를 서두르고 있는 김길홍에게 아내가 화들짝 놀라며 달려오고 있었다.

 “ 여보...여보 이게 무슨말이에요 ? ”

 아내는 무척이나 놀라고 충격을 받은듯한 모습이고, 다만 김길홍은 곧 출근을 해야하는 그런 시간이라서 아내의 그와같은 막아섬이 순간적으로나마 다소 성가시게 느껴졌다. 아침식사는 이미 하고난뒤니 시간은 오전 7시를 조금 넘겼을 무렵인데, 아내는 거의 본능적으로 TV를 켜고 있었다. 70년대면 TV는 평일에는 저녁시간에만 토요일은 정오부터 방송을 하고 휴일과 일요일에는 오전부터 방송을 하던 시대였지만, 가끔 중요한 스포츠 중계가 있거나 중요한 속보가 있을때는 TV가 긴급 중계나 속보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일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조금전까지 라디오를 듣고있던 아내가 바로 거의 본능적으로 TV를 켜본 것이다. 이미 속보방송이 나오고 있는 라디오를 꺼야한다는 사실조차도 까맣게 잊은채. 덕분에 TV를 아내가 켜서 화면속 내용을 김길홍이 눈으로 직접 확인도 하기전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속보내용을 통해 이미 길홍은 사태를 파악할 수가 있었다.

 “ 어제 저녁 박정희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소식으로 인해 저희 OOO 라디오 방

  송은... ”

 대충 대통령 서거소식과 관련한 속보를 계속 내보낼 예정이라는 아나운서 멘트가 나오고 있었고, TV에도 이미 정부의 ‘공식발표 내용’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의 라디오 방송과 함께 전국에 울려퍼진 5.16 혁명 발발의 소식과 함께 그렇게 등장헀던 박정희는 그 마지막을 이렇게 다시 전국에 방송되는 TV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알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그 전날 저녁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저격을 당해 27일 오전에는 이미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충격적인 소식에 길홍은 두 다리가 후들거리며 그 자리에 풀썩 쓰러지고야 말았다. 놀란 아내가 다가와서 그를 부축해야할 정도였다. 허나 놀라고 충격적인 심정이 어디 지금 이 집안의 김길홍 내외 두사람 뿐이랴. 물론 대통령이 신(神)이 아닌 이상 언젠가는 세상을 떠날 ‘사람’이라는 것을 상식적으로 생각 못할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허나 18년이란 통치기간이 너무나 길었던 탓일까. 무지렁이 농민도 평범한 일반인도 학력이 낮은 전업주부도 배불뚝이 사장이나 까칠한 중소기업 대표도 지식인이나 언론인도 평범한 학생이나 어린아이들도 ‘박정희 없는 세상’은 감히 꿈에도 생각할수 없었던게 적어도 1970년대를 보낸 이 땅의 대다수 국민들의 마음과 정서였을 것이다. 서거 며칠후 공식 발표되는 박정희 대통령 추도가 가사 그대로 그야말로 ‘태산이 무너지고 강물이 갈라지는 것’에 견줄만한 그만큼 충격적인 소식이었던 것이다.

 “ 여보...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거에요 ? ”

 걱정되고 불안해서 어쩔줄 모르는 아내를 일단 진정시키고 길홍은 일단 출근을 서둘렀다. 5,16이 있던 날에는 ‘동요없이 생업에 종사하시라’는 혁명정부의 당부의 말씀조차 잊은채 마치 무슨 구원의 손길이라도 바라듯 송수만 목사가 있던 교회로 달려가기까지 했던 그런 김길홍인데, 그래도 오늘은 그때보다는 어느정도 정신이 남아있는지 일단 정상적인 출근은 했다. 18년의 시간이 가져온 나름 인생의 연륜과 경험탓일까. 그래도 출근을 할 정신은 남아있을 정도로 그래도 5.16 발발 당시에 받은 충격보다는 그 충격의 강도가 ‘조금’은 덜했다고 볼수도 있을 것이다.

 허나 상대적으로 그렇다는것이지 어디 ‘대통령 서거’ 소식 그 자체가 어디 보통일인가. 그것도 무슨 임기가 정해져 4년중임이든 5년단임이든 퇴임할 시기가 정해져있는 대통령도 아닌 그야말로 ‘평생동안’ 옛날 왕조시절 임금처럼 그 자리에 있을것처럼 여겨졌던 그런 장기집권 대통령의 죽음이다. 사건의 구체적인 전모는 아직 – 중정부장 김재규의 손에 그리되었다는 것 정도를 제외하건 – 기사화되고 있지 않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은 그야말로 60,70년대 이 나라를 하늘처럼 장악하고 있던 그런 존재의 사라짐 그 자체와도 같은 그런 충격이었다.

 막상 출근을 해보니 어느덧 직원수 50여명에 달하는 자신의 공장 직원들은 물론 간부급 인사들의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저마다 이미 접한 뉴스속보와 신문호외를 바라보며 자기네들끼리 수군거리고 있었고, 간부급 인사들은 사장인 자신에게 다가와 아까 집에서의 아내처럼 ‘이제 어찌되는것이냐 ?’고 걱정스레 묻기도 했다. 그러나 일개 평범한 지방(경기도)의 중소기업 사장에 불과한 자신인들 그런 질문에 무슨 답을 할수 있으랴. ‘일 안하고 뭐하냐 ?’며 몇 번 직원들을 다그치기도 했지만 일손이 잡히지 않기는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하는수없이 회사에서도 거의 하루종일 사무실에 마련된 소형 TV만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지속적으로 나오는 뉴스속보와 함께 이미 마련된 ‘추모특집’인 성격인양 계속해서 내보내지고 있는 생전 박대통령 관련 이런저런 자료화면과 함께. 허나 그런 TV 화면속 모습보다도 지금 이순간 김길홍 사장의 머릿속에 겹쳐지는 두 개의 장면이 있었다. 1년전 ‘수출의날’ ‘백만불 수출탑’ 수상을 하고 대통령을 면담했을 때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와 그리고 – 아마 지금쯤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닐것이 확실한 – 한때 자신이 그의 선거운동을 돕기까지 했던 공태광 의원 그 사람이 하던말이.

 “ 내가 내 뜻을 제대로 알고 이어받아 이 나라 경제정책을 계속 계승해갈만한 그런

  후계자만 있었어도 왜 내가 이렇게 굳이 장기집권까지 할 생각을 했겠소 ? 기간

  산업을 육성하고 중소기업을 육성하고...무엇보다 수출입국으로 이 나라 경제를 흔

  들리지 않는 반석위에 올리고 싶었던...그런 내 정신을 제대로 계승할만한 후계자만

  있었어도 내가 왜 욕먹어가면서까지 장기집권을 할 생각을 했겠느냔말이오 ? ”

 “ 우리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 8년동안 이 나라 경제성장의 기반을 다져놓으시고

  김종필 중령이 박대통령의 뒤를 이어 8년을 더해서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 다져

  놓으신 기반위에 경제성장의 열매를 더 촉진시키는 그런 시간을 보낸다면, 그러

  고 나면 한 16년쯤 뒤엔 이 나라 경제는 그야말로 흔들리지 않을 반석위에 놓이지

  않겠습니까 ? 전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 다음에 하실만한 분으로 김종필 중령을 생

  각하고 있다 그 말입니다. ”

 글쎄, 과연 공태광의 말처럼 박정희가 굳이 3선이나 유신까지 하면서 영구집권을 꾀하지 않고 김종필이 되었든 다른 누가 되었든 적절한 후계자에게 차기 대통령 자리를 물려주고 그 자리에서 내려왔다면 10.26 같은 비극을 맞이하지 않을수 있었을까. 허나 지금와서 굳이 그런 생각을 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어차피 3선도 유신도 이미 박정희가 다 해놓은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고 급기야 그 종막은 10.26 사태가 되고 말았다. 마치 정말 무슨 신의 정해놓은 운명인것마냥 60년대가 시작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5.16과 함께 혜성같이 나타는 그는 18년의 시간을 오직 ‘잘살아보세’라는 구호 하나로 이 나라 국정에 용왕매진한뒤 70년대가 어느덧 막바지로 치닫는 79년 10월 26일 저녁에 신임하던 중정부장의 총탄에 의해 스산한 가을바람에 지는 늦가을 낙엽처럼 그렇게 사라져가고 말았던 것이다.

 “ 각하~~~!!! ”

 김길홍은 공장 뒤쪽에 있는 어느 공터쪽으로 가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참을 대성통곡했다. 길홍이 생전 박정희 대통령을 직접 만나본 경험은 단 두 번이 전부다. 바로 1년전 ‘수출의 날’ 백만불 수출 달성 기업인으로 상을 받던날과 그 며칠후 바로 그런 명목으로 아내와 함께 별도로 일요일 만찬장에 초대받았을 때. 허나 비단 그 두 번의 인연때문만으로 이러는 것은 분명 아니지 않는가. 김길홍은 그 스스로 지난 20여년 가구제품을 만들어 파는 중소기업을 운영해오면서 ‘열성적’인 정도까지는 아니었어도 그 역사 분명한 박정희 대통령 지지자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오직 헐벗고 굶주린 이 나라 백성들을 ‘잘살게’ 만들겠다는 그분의 일념만은 십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아니, 이해하는정도가 아니라 그 열정과 열성에 진심 감동하고 감격하였다. 일제 35년을 거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남북이 분단되고 6.25로 폐허까지 된 이 나라를 어떻게든 경제적으로 부강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공산침략의 위협에 더 이상 시달리지 않는 그런 ‘부국강병’의 나라로 만들겠다는 그분의 정신과 정책만큼은 김길홍 그 자신도 누구못지않게 공감하고 지지해왔기에 그분의 이와같은 너무나 충격적이고 허망한 죽음에 비통한 마음으로 대성통곡을 하는 것이다. 박정희 정권시절 마지막 내각요인중 한사람이었던 어떤이의 말처럼 ‘이 나라를 빈곤에서 해방시키신’ 그분이 정말 가셨구나 하는 생각에 그 누구보다도 비통하고 처절하게 자신의 공장 뒤쪽 어느곳에서 이렇게 울부짖고 있는 것이다. 

 “ 각하~~~!!! 각하~~~!!! 각하~~~!!! ”

 ‘아아...각하 이대로 가시면 어이합니까. 각하께서 가시면 이제 이 나라는 대체 누가 이끌어 간답니까. 아직 채 맺지못한 다른 열매들은 누가 있어 다시금 주렁주렁 열리게 만들 수 있단 말입니까. 각하께서 세우신 ’부국강병‘의 높은뜻 정녕 이제 누가 있어 이어갈수 있단 말입니까...’ 한바탕 조사(弔辭)라도 읊조리고 싶은 그 심정을 그러나 굳이 그런 주절주절 넋두리 대사를 읊을것까지 없이 이 한바탕 처절하고 구슬픈 대성통곡으로 김길홍 사장은 자신의 마음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10.26의 충격적인 비보가 전해진 그날 오후, 자신의 25년을 경영해온 공장 뒤쪽 어느곳에서 한바탕 피눈물과 함께 처절하고 비통한 대성통곡을 하고있는 것이다.



- 8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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