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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그룹 팬픽 - EXID 솔지 (2) 걸그룹 팬픽 7 (마마무,EXID)




                                   부제 : 프랑스 작가가 쓴 탈북자 수기





 그런 인연으로 20년만에 모처럼 다시 한국땅을 밟게 된 계기가 생긴것입니다. 70년대후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약 20년동안은 서른번도 넘게 학술대회나 기타 행사 참석차 한국을 들러본적 있는 프랑스의 한국학 전공교수 소피 윌슨이 그리고 나름 한국의 고유한 전통문화와 역사를 보다 많은 유럽인들에게 알리고 싶은 사명감에 넘처 한국 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도 두편이나 쓴 제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20년동안은 다시 찾을 기회가 없었던 그 한국땅을 다시 밟게 된 것입니다.

 애초 선교회 관계자(윌슨에게 탈북자 소재 소설을 써달라고 의뢰한 탈북자 지원단체 관계자)는 한국 입국 날짜에 맞춰 저희가 공항으로 배웅을 나가겠고 원하시면 저희가 숙소등 편의를 제공해 드리겠다며 친절하게 저를 접대하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하지만 저는 씨익 웃으며 그럴 필요까진 없다며 비행기 시간표가 잡히면 그때 별도로 연락을 주고 스케줄을 잡아 사무실을 방문하겠노라 말했습니다. 소싯적에 이미 한국을 서른번도 넘게 방문한 사람이라면서 특히 종로라든가 세종로,광화문 그 일대는 수도없이 찾아가 본 사람이라 지금도 눈을감고 돌아다닐수 있을것이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습니다. 그와같은 저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관계자는 ‘아 ! 이 작가선생님은 정말 한국에 대해 너무나 훤히 꿰뚫고 계신 분인가 보다’ 하는듯한 감탄의 말까지 입에 담으며 추후 다시만날 기약을 하고는 돌아갔습니다.

 허나 그 자신만만하게 종로,광화문,세종로 일대는 눈감고도 돌아다닐수 있노라 했던 호언장담은 첫걸음부터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 제가 그 시절 한국학 관련 학술 세미나나 그 외 기타 유관단체 행사 참석차 방문한게 한국이라면 그때 돌아다니는 코스라야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세종문화회관에서 수도없이 가졌던 세미나며 숱한 행사들...그리고 경복궁 관광. 한정식 식당에서의 호화로운 식사대접등...적어도 그 경험에 미루어 종로며 세종로,광화문 일대만큼은 제겐 그때까지만 해도 정말 ‘눈을 감고도 돌아다닐수 있는곳’이란 자신감 넘치는 지역이었습니다. 실제 다시금 그 시절 경복궁이며 세종문화회관,광화문 그 일대를 세미나나 행사 참석차 한국에 들른 일행들과 함께 돌아다니던 기억들이 다시금 감회어린 추억으로 새록새록 솟아나기까지 했으니까요.

 그렇게 약속을 잡고 한국으로 갈 스케줄을 구체적을 잡기위해 비행기표를 예약하기위해 항공사 홈페이지를 찾아보기 시작했을 때 첫 당혹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김포  국제공항’이 이제 더 이상 없다는 것을 그제서야 알게 된 것입니다. 한국으로 가려면 당연히 제 기억에 너무나 익숙한 그 ‘김포공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김포행 비행기가 보이지 않는것에 너무나 당황했습니다. 결국 항공사에 전화해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편이 왜 없느냐 ?’고 문의했더니 관계자는 ‘인천공항으로 바뀐지 꽤 되었다’고 마치 ‘뭐 이런 무식한 할머니가 다 있나 ?’는 듯 다소 한심하고 짜증난다는 듯 답변을 해주었습니다. 좀 더 나이많은 관계자가 구체적인 상담을 위해 연결이 되긴 했는데 그는 ‘김포공항은 현재는 한국에서 국내선 위주로만 이용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답해주었습니다.

 여하튼 첫걸음부터 뜻밖의 난항에 부딪혔습니다. 20년 사이 한국의 국제공항이 더 이상 김포가 아니라 ‘인천공항’으로 바뀐 사실조차 몰랐던 저는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게 큰 문제는 아닐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인천이든 김포든 한국행 비행기표를 사기만 하면 되는것이니까요. 여하튼 다시금 한국의 선교회 사무실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어 제가 한국에 도착하는 날짜와 시간을 통보해주고 ‘숙소를 잡아드리지 않아도 되겠냐 ?’는 관계자의 말엔 거듭 ‘그럴필요 없다’고 웃으면서 답해주었습니다.

 제가 자신만만해한 것은 실은 한국을 자주 방문하던 당시 친하게 지냈던 한국 친구와의 인연으로 갖게된 한국의 한 고급호텔 ‘평생 이용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잦은 방문과 자기네 나라에 거듭 보여주는 관심에 대한 고마음으로 준 일종의 선물이라고나 할까요. ’프라자 호텔‘이란 이름의 무궁화 표시가 다섯 개가 된다는 한국에서도 손꼽히는 일류호텔. 비단 프라자뿐만 아니더라도 20-30년전 한국 방문시엔 늘 그쯤되는 고급호텔을 숙소로 삼곤 했는데, 여하튼 어느덧 30년전인 80년대 중반에 한국 친구로부터 선물로 받은 ’프라자호텔 평생 이용권‘이 있으니만큼 그것만 있으면 바로가서 호텔방을 잡을수 있을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앞서 말했지만 전 사실 ‘인천’이란 도시에 대해 잘 모릅니다. 한국을 자주 방문하던 시절에도 자주 들른 것은 항상 서울(종로-광화문-세종로 일대)이었고, 그 외 가본곳이 한국인들이 늘상 자랑해 마지않는 천년고도 경주, 그리고 그 외 한번은 부산이 고향이라는 친구가 한번 보여주고 싶다고 해서 3박4일 일정으로 들른 한국 제2의 대도시이자 항구도시라는 부산이 전부니까요. 그때까지만 해도 인천이란 도시는 그저 서울 옆에 붙어있는 아주 작은 도시쯤 되나보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 셰계전도를 펼쳐놓고 본 ‘인천’이란 바닷가 도시에서 받은 느낌은 확실히 그랬습니다.

 여하튼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전 또다시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아 ! 이런...’ 저는 대체 어디서부터 판단을 잘못하고 무엇이 잘못 꼬였던걸까요 ? 사실 전 ‘호텔택시’로 공항에서 호텔까지 바로 서비스가 되던 그 무렵만을 머릿속에 생각했습니다. - 사실 호텔택시는 한국에서 80년대 중반 이후론 폐지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 이후에도 대체로 저는 김포공항에 도착하면 저를 초청한 한국인 관계자가 자신들의 자동차나 렌트카등으로 제가 묶을 호텔(가령 프라자 호텔이라던가)까지 안내해주곤 했었기 때문에 서른번의 한국방문에도 불구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할 기회는 거의 없었습니다. - 다만 아마 지하철 이용은 한국 방문 당시 일정소화 과정에서 몇차례 해본 기억이 있습니다. -

 여하튼 전 인천공항에 도착해서도 그때까지 순진하게도(!) ‘프라자호텔까지 가는 호텔택시’가 있을것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타보려 공항 관계자들에게 연거푸 문의하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럴때마다 젊은 공항 직원들은 역시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이 나이많은 푸른눈의 외국인 여성이 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것인가 ?’ 하고 바라보고는 자기네들끼리도 의아하고 어리둥절해하며 뭔가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하고 그쯤에서 안 되겠다는 듯 좀 더 나이많은 관계자를 불러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 확실히 지금 현재 인천공항의 이 젊은 여직원들은 대한민국이란 땅에 ‘호텔택시’가 존재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나이많은 관계자가 결국 안되겠다 싶은 듯 영어로 친절하게 ‘공항전철’ 또는 ‘공항버스’를 이용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가장 최근에 한국을 방문했던 것이 95-96년경. 앞서 언급했지만 그 시절에 일정소화 과정에서 지하철은 이용했던 경험이 몇 번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한국인 친구 한명이 서울에서 지하철 이용에 도움이 될수 있도록 4호선까지 그려진 지하철 약도가 있는 작은 수첩 하나를 선물로 준 일이 있습니다. 전 그것 하나면 다 되는줄 알았는데, 이른바 ‘공항전철’을 이용하는곳으로 와서 그곳에 그려진 전철약도를 보는순간 다시한번 기겁했습니다. 4호선까지 그려져있는 90년대 한국수첩의 지하철 약도와는 다른 완전 별세계가 펼쳐져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전 운이 따라주는 편인가 봅니다. 다행히 20대의 젊은 프랑스 관광객들을 만나 그들이 도와줘서 공항전철을 타고 서울시내로 가는 일반 지하철로 갈아탈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가야하는곳은 2호선 시청역. 저를 도와준 젊은 프랑스 관광객 일행은 행선지가 달라 중간에 헤어져야 했지만 한국의 지하철 역은 대개 한글로 된 역명 및에 명문으로도 표기가 되어 있어서 그 표기를 읽는게 그리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제게 전철타는 법과 행선지까지 가는 방법을 알려준 프랑스 관광객은 1-2년전에도 두어차례 한국을 찾은적이 있어 이와같은 전철이용이 대체로 익숙해 있다고 하네요. 여하튼 이런 머나먼 나라에서 저와 같은나라 젊은 관광객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은 확실히 행운이 따라준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행운은 생각보다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2호선 시청역을 제가 아는 이유는 이전 한국을 방문하던 시절 이용했던 ‘프라자호텔’ 근처에 있는 전철역이라는 것을 제가 알기 때문입니다. 앞서 이미 그 시절 서울시내 지하철이 4호선까지 있던 시절 약도가 그려진 수첩을 선물해준 한국인 친구가 있었다고 했죠 ? 생각해보면 그 시절 그런식의 ‘고마운 한국 친구’는 제법 있었습니다. ‘프라자호텔’ 평생 VIP 이용권을 제게 선물해준 사람 역시 저의 한국에 대한 유난히 많은 관심과 호의에 대한 감사표시로 준 선물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80년대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열 번도 더 이용했던 낯익은 ‘프라자호텔’ 앞에 그야말로 오래된 옛 친구나 고향친구라도 만난듯한 반가움에 다가가고 있었는데, 정작 호텔안에 들어서면서 뜻하지않은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 예약을 하셨나요 고객님 ? ”

 제 ‘VIP 이용권’은 굳이 예약을 하지 않아도 오면 얼마든지 호텔에서 방을 잡아줄수 있는 그런 특혜가 주어지는 이용권이었습니다. 헌데 갑자기 ‘예약’을 했냐고 물어보다니요. 이 직원이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해서 가방에서 제 ‘프라자호텔 평생 VIP 회원권’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헌데 어찌된 영문인지 제 프라자호텔 이용권이 가방을 아무리 뒤져도 나타나지가 않았습니다.

 “ 이게 어떻게 된거지 ? 내가 무슨 착각을 했나 ? ”

 설마 여행가방 준비를 하면서 정작 중요한 호텔 이용권 챙기는 일을 빼먹은 것은 아니겠지. 제가 나이 60대 후반이긴 하지만 아직 ‘치매가 올 나이’는 아닐것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헌데 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가방을 아무리 뒤져도 제가 호텔직원에게 확인을 시켜줘야할 이용권은 도무지 나오지 않고 있는것입니다. 혹시 중간에 소매치기라도 당했나. 하지만 공항에서 여기까지 오는 사이에 그럴일은 없었고 – 더욱이 여기까지 오는데는 그야말로 행운이 따라줘 고마운 프랑스 젊은 관광객들로부터 길안내까지 받을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 그럼 설마 제가 집에다 그 이용권을 두고 왔단 말인가.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 이용권을 가져올수도 없는 노릇이고, 설사 이용권이 없다 하더라도 일단 제가 이곳 VIP 회원임이 확인만 된다면 방을 잡을수는 있겠지 하는 생각에 제 이름 ‘소피윌슨’을 밝히면서 VIP 회원이 맞다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헌데 뭔가 명단조회를 하던 직원은 다시 뜻밖의 사실을 제게 알려주었습니다.

 “ 죄송합니다만 손님은 저희 회원에 가입되어있지 않습니다. ”

 “ 예 ? 뭐라고요 ? ”

 “ 명단에 없다고요. 유감입니다 고객님. ”

 재차,3차 확인을 요구하는 제 말에 그 친절해보이던 호텔 여직원도 슬슬 짜증이 나는지 그와같이 말하고 대체 이게 어찌된 영문인지 전 도무지 알수가 없었습니다. 일단 제게 이용권을 선물한 한국인 친구는 사기꾼은 아닙니다. 전 분명히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열 번도 넘게 친구가 선물한 VIP 이용권으로 이 호텔을 이용했고, 친구 또한 그런 말도 안되는 사기나 칠만한 사람은 아닌 한국사회에서 어느정도 공신력도 있고 사회적 지위도 갖춘 그런 사람입니다. 그럼 20년 세월동안 어떤 변동된 사항이라도 있단말인가. 아니면 호텔측의 단순한 사무착오인가. 대체 한국사회에 지난 20년동안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20년전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이용할수 있었던 ‘VIP 이용권’인데 지금은 그 VIP 회원 명단에 제가 포함되어있지 않다니 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호텔직원은 제가 프라자호텔 VIP가 더 이상 아님을 거듭 확인시켜주었고 예약을 하지 않으면 방을 내드릴수가 없다는 말도 거듭 반복했습니다. 눈앞이 캄캄하고 아찔해져오면서 일단 하는수없이 가방을 챙겨 호텔을 나왔습니다.

 무엇을 어찌해야하나 고민을 하다 일단 제게 30년전에 호텔 VIP 이용권을 선물해준 정원태 교수에게 연락을 취해보기로 했습니다. 저는 정교수의 20년전 연락처와 집 주소를 알고 있습니다. 사실 집전화보다 휴대전화,스마트폰을 더 많이 사용하는 시대에 과연 20년전 집 전화번호로 연락을 취한다고 연락이 될지 저도 의문이 들긴 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일단 정교수의 자택 전화로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전화를 걸어보기로 했습니다.

 “ 여보세요. ”

 “ 저...프랑스에서 온 소피입니다. 소피 윌슨이요. ”

 “ 예 ? ”

 그러자 전화를 받은 상대여성은 그야말로 한국속담 ‘아닌밤중에 홍두깨’ 같은 소리라도 들은 사람처럼 어리둥절하고 어이없어하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전 거듭 제가 프랑스에서 온 소피윌슨이라고 밝히며 정원태교수님 댁이 아니냐고 확인을 요청했는데 그러나 전화를 받은 상대는 더더욱 영문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 여기 그런분 안 사시는데요. ”

 “ 저...OO구 OO동 OOO번지의 정원태 교수님댁이 아니라는 말씀이신가요 ? OO대

  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20년전엔 분명히 거기 살던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

 “ 그런 사람 여기 안 살아요. 여긴 OOO씨 댁이에요. ”

 여자는 쌀쌀맞은 목소리로 낯선 외국인의 엉뚱한 전화에 별로 길게 통화하고 싶지 않다는 듯 제가 더 무슨 확인성 질문을 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습니다. 순간 그야말로 머릿속이 어질어질해져오고 아찔해져오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20년이 정말 긴 시간이로구나’ 아니 그보다 내가 정말 오랫동안 한국을 찾지 않았고 그동안 한국도 많은 것이 변했구나 하는 것을 그때부터 실감하기 시작했습니다. 4호선까지만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서울시내 지하철 약도는 이미 새로운 신세계나 별세계라도 보는듯한 수많은 알 수 없는 꾸불꾸불한 새로운 노선들이 수도없이 연결되어 있었고, 저는 더 이상 프라자호텔 VIP 회원도 아니었고, 제 고마운 한국친구 정원태 교수도 더 이상 그 집에 살고 있지 않았습니다. - 어쩌면 정원태 교수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순간 불현 듯 들었습니다. - 앞서 제가 한국인 친구가 참 많았던것처럼 여러차례 주절주절 늘어놓았지만 어쨌든 70년대 후반경부터 90년대 중반까지의 일이니 벌써 20-30년전에 교류가 있던 사람들이고 따라서 그때 아무리 한국인 친구가 많았기로 지금와서 무턱대고 그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 실례가 될수도 있는 일이니까요. - 정원태 교수만 해도 여하튼 제게 한국의 고급호텔 이용권까지 선물해줄 정도로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고, 전화를 건 것은 바로 그 호텔 이용권과 관련된 문제가 잘못된 것 같아 그 부분에 대한 확인 내지는 도움을 요청하려 전화를 건 것이지 그 외 다른 한국인 친구들에게 20년,30년만에 나타나서 무턱대고 무슨 도움을 요청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대충 그 외에 친분이 있는 한국인으로는 제게 3박4일간 부산 여행을 시켜주었던 공영방송 PD를 지낸바 있는 은현숙이란 친구와 역시 한국학 세미나나 유관단체 행사에 여러차례 참여하는 과정에서 알게된 국회의원 보좌관을 10년 넘게 하고 있다는 한영준이란 친구도 있긴 합니다만 은현숙이든 한영준이든 지금 무턱대고 전화걸어 막연한 부탁을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프랑스로 다시 전화를 걸어보기로 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프랑스에 전화를 건들 정말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프라자호텔 이용권을 찾아서 가져올 작심이라도 하지 않은 다음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만 일단 그래도 뭔가 확인은 하고픈 마음에 전화를 걸어보기로 한 것입니다. 정확히는 저희집에 전화를 거는 것은 아니고 제 이웃집에 전화를 하는것입니다. 제게는 세명의 자녀가 있지만 지금은 모두 결혼해서 다른 지역에서 살고있고 이웃에 로렌이라는 19세 소녀와 한 수년전부터 친분이 있어왔습니다. 어릴 때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와 단둘이서만 살아왔다는 소녀는 제게 엄마같은 친근함이라도 느끼는지 한 몇 년동안 다소 두터운 사이가 되어있습니다. 사실 전 로렌을 제가 다시 집필과 저술활동을 시작하면 제 비서같은 역할을 좀 맡길까 생각까지 했었고 이번 한국행 준비를 할때도 로렌이 시시콜콜한것들을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지금 프랑스의 19세 소녀 로렌한테 전화를 한다고 무슨 뾰족한 수가 생기겠냐마는 저는 지푸라기라도 잡고싶은 심정입니다.

 “ 로렌 ? ”

 “ 어머, 선생님. 잘 도착하셨어요 ? ”

 로렌은 제가 한국에 잘 도착했다는 안부전화라도 건 것쯤으로 생각했는지 매우 반갑고 밝은 목소리로 대꾸하더군요. - 프랑스와의 시차도 감안해서 전화를 했어야 하는건데 지금이 대충 늦은오후이니 프랑스는 대략 시차계산을 해본다면 이른 오전시간일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 그런것까지 따질만한 정신상태가 아니었습니다.

 “ 로렌 미안하지만 내 집 비밀번호 알지 ? 들어가서 확인좀 해줄래 ? ”

 “ 뭘 확인해드려야 하는데요 ? ”

 “ 실은 내가 한국의 프라자호텔 VIP 이용권을 깜빡 집에 두고온 것 같아. 그러니 혹

  시 모르니 지금 당장이라도 좀 들어가 확인을 해줘. 한두시간쯤 후에 내가 다시 전

  화할게. ”





 ‘호텔 이용권’을 두고온 것 같다는 말에 로렌은 큰일이 났는줄로만 알고 ‘금방 찾아드리겠다’며 화들짝 놀라 바로 전화를 끊었습니다. 헌데 얼마 지나지않아 이와같은 문자가 제 휴대폰에 당도했습니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학교에 가야해서요. 끝나고 난 뒤에 찾아드릴께요.’ 순간 어이가 없어 바로 실소가 터져나왔습니다.

 프랑스와 한국이 여덟시간 시차가 나니 지금 그곳은 오전시간. 학생이든 직장인이든 한참 등교나 출근 준비로 바쁜 시간이란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습니다. 헌데 지금 바삐 학교갈 준비중인 학생한테 전화를 해 그런 부탁을 하다니. 제가 정말 정신이 없어도 단단히 없나 봅니다. 헌데 그런 제게 이와같은 문자를 보낸 로렌도 정신없긴 마찬가지네요. 지금 ‘호텔이용권’이 없어 숙박을 할 수 없는 비상사태가 터진것인데 그런 제게 ‘학교에 다녀와서’야 그 호텔 이용권을 찾아주겠다니. 정신이 없기는 저나 로렌이나 그야말로 막상막하인가 봅니다. 굳이 따지자면 지금 설사 호텔 이용권이 제 집에 있다고 해도 그걸 가지러 도로 프랑스로 갈것이 아닌이상 다른 대책이 없기는 마찬가지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이웃집 소녀한테 부득불 전화부터 한게 정말 철없고 딱한 일이었지만, 여하튼 너무나 답답하고 막막한 나머지 너무 어처구니 없는 짓을 했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깨닫고 저는 씁쓸한 미소만을 머금을 뿐입니다. - 지금쯤 이미 등굣길에 나섰을수도 있는 로렌은 이 아침에 전화를 걸어 무작정 제 호텔 이용권을 집에 들어가 찾아달라는 저에 대해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 참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대책없는 망령난 노인같은 짓이었습니다.

 터덜터덜 결코 작지않은 여행가방을 끌면서 프라자호텔을 나와 무작정 걸었습니다. 새삼 제가 공항까지 마중을 나오고 숙소까지 잡아드리겠다고 한 선교회 관계자에게 ‘서울 지리는 눈감고 찾아다닐 정도로 익숙하니 걱정말라’고 큰소리 뻥뻥친게 생각이 나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사실 정확히 따지면 이 광화문에서 종로-세종로까지 거리 정도에 익숙한 것이 전부일뿐인데, ‘프라자 호텔 평생 이용권’을 너무 믿었던 탓인걸까요. 그야말로 너무 쓸데없고 어처구니없는 만용을 선교회 관계자에게 부렸던것인지라 참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민망하고 무안해 몸둘바를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얼마나 정처없이 걸었을까요. 가방도 무겁고 나이탓인지 슬슬 다리가 아파왔습니다. 하는수없이 근처 아무 돌계단에나 가서 털썩 그곳에 주저앉아 잠시 몸을 쉬기로 했습니다. 세종문화회관 – 한때 학술대회 참석차 수도없이 들렀었던 그곳 – 까지는 아직 거리가 좀 있고 그 중간쯤에 있는 어느 건물 무렵입니다. 한숨을 내쉬고는 잠시 주변과 지나가는 행인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고보면 20년동안 한국도 참 많이 변했구나 하는점과 20년이 결코 만만치 않은 긴 시간임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지난 20년...개인 문제 때문에 한국에 대한 연구도 집필활동도 미뤄두었던 시간이지만 한국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은 끊을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따금 언론이나 방송을 통해 보도되는 한국관련 기사는 늘상 스크랩해두곤 했었습니다. 아까 잠시 언급했지만 탈북자 문제가 심각해져간다는 뉴스도 이따금 접해보았고 – 다만 북한문제는 제 주된 관심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탈북자 문제는 기사 스크랩까지 해가며 관심두고 살펴보던 이슈는 아니었습니다. - 외신에서 다루는 한국에 관한 기사내용도 과거에 비해 조금은 – 솔직히 ‘많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고요 – 달라지고 있다는 점도 느낄수 있었습니다. 가령 CNN만 해도 몇 년전 한국의 주요 음식에 대해 다루는 특집,기획기사를 다루기도 했고요 그...케이팝이라고 하던가요. 그에대한 소문도 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처음엔 K-pop(케이팝) 어쩌구 하는 이야길 얼핏 들었을떈 그게 뭔지도 한국과 관련된 문화콘텐츠인지도 몰랐습니다. 다만 얼핏 프랑스에도 자녀가 케이팝에 빠져 고민중이라는 그런 부모들끼리 만든 인터넷 사이트까지 생겼다는 소문까진 들었습니다. 사실 전 나이가 나이인지라(60대 후반) 요즘 젊은 친구들이 어떤 대중음악을 즐겨듣는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하물며 한국에서 요즘 젊은 친구들이 어떤 노래를 좋아하는지를 아무리 한국학 전공하는 교수이기로 그것을 어찌 알수 있겠습니까. 다만 케이팝 어쩌구 하는 것이 ‘한국의 팝 가수들과 그와 관련된 노래’를 총칭하는 것이란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좀 어리둥절했습니다. 왜냐 ? 제가 한국을 자주 들르던때 제가 알고 지내던 한국의 친구,지인들이 제게 알려주고 싶던것들 거기에는 물론 ‘한국 전통음악’도 포함되어 있긴 했지만 그것은 확실히 요즘 일부 유럽 젊은 아이들도 좋아한다는 케이팝이니 뭐니 하는것하곤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것들이었이나요.

 제가 그 시절 저의 한국인 친구,지인들의 소개로 접하게된 ‘한국 전통음악’은...뭐랄까요...‘거문고 향 냄새’가 났다고 한다면 적절한 비유가 될련지 모르겠습니다. 거문고니 가야금이니 하는 한국 전통악기들을 꼭 지칭하지 않더라도 가령 낡은 한옥이나 한정식집을 들르곤 할 때 늘쌍 풍겨오곤 하는 ‘향나무 냄새’. 소위 ‘국악’이니 ‘판소리’니 하는 공연을 직접 관람한 경험도 몇차례 있는 그와같은 한국의 전통음악에서 느낄수 있었던 것은 ‘느리고 정적이다’라는 점이었습니다. 판소리나 창극은 내용을 잘 모를때엔 단지 ‘길고 놀랍다’는 점 외에 별다른 감홍이 없었지만, 나중에 내용을 알고난 뒤에는 ‘춘향전’에서는 변사또의 거듭되는 회유에도 끝까지 자신의 사랑을 놓치 않겠다는 그 당돌하고 당찬 조선의 어린 소녀에 놀라고 감동하기도 했고, 심청이는...글쎄요...‘효녀’라는 그 여인의 복잡한 내면세계는 별도로 논문이나 글 한편 써야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녀의 깊은 내면과 심청전에 담긴 주인공의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 – 눈먼 아버지 때문에 공양미 삼백석에 몸을 판다던가 나중에 그 아버지를 뵙겠다며 ‘맹인잔치’를 열어달라고 하는등 – 은 제겐 참 이해하기 힘든 성질의 것이기도 했습니다.

 여하튼 결론적으로 말해 ‘한국 전통음악’에 대해 그와같은 이미지와 느낌 - ‘짙은 거문고 향냄새가 난다’고 표현할 정도로 – 을 받았던 제게 ‘케이팝’이란 것은 그야말로 내가 어디 평행우주의 다른 한국에 와 있는것인가 하는 착각까지 들게 할 정도로 너무 낯선 성질의 문화현상이었습니다. - 오해가 있을 것 같아 말씀드리지만 전 ‘프랑스에도 케이팝에 빠진 자녀의 부모들끼리 그 걱정을 고민하는 사이트가 있다더라’는 소문까지 들은 정도지 그 소위 케이팝이란 것을 직접 접해보진 못했습니다.

 다만 ‘한국 대중음악’에 대해선 제가 한국 친구들과 한참 교류하던 시절에도 그네들이 흥얼거리거나 즐겨듣던 노래 두어곡 정도는 아직 기억하고 있는것들이 있습니다. ‘제3한강교’라는 한국의 수도 서울을 가로지르는 다리 하나를 놓고 만들어진 노래를 좋아하는 친구도 있었고 ‘꿈이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아쉬움 남아...’ 이런식으로 시작되는 한국의 그 당시 가장 대표적인 ‘국민가수’라 할 수 있는 이가 불렀다는 노래를 좋아하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허나 그런 노래들도 제가 한국의 ‘전통음악’에서 느낄수 있었던 ‘느리다’거나 ‘정적인 느낌’ 혹은 ‘한’이나 ‘슬픔 같은 정서가 확실히 담겨있는 노래들이었습니다.

 헌데 난데없이 ‘케이팝’이라니. 이십년의 시간만큼이나 긴 거리가 느껴질만큼 처음 접해보는 생소한 ‘문화현상’입니다. 혹시 한국에 대한 기사라도 쓰려는 신문기자나 잡지사 기자가 찾아와 ‘유럽 젊은이들의 케이팝 열풍에 대해 어찌 생각하느냐 ?’고 명색이 한국학 교수라는 죄로 그런 질문을 받았을 때 대답을 어찌 해야하는지 난감해질 정도로 적어도 90년대 이전까지의 한국에서 받은 이미지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동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 다만 ‘자기 자녀가 케이팝에 빠져 고민이다’ 라는 부모의 고민에 대해선 기회가 있다면 이 정도 수준의 답은 해 드리고 싶네요. ‘자녀가 외국의 다양한 문화를 접해보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면 바람직한 일이니 너무 근심하지 말라. 그리고 아마 일시적일뿐 좀 지나면 괜찮아질 것’ 이렇게 말입니다.

 생각난김에 한가지 더 이야기하자면 앞서 CNN이 일전에 한국의 음식...어쩌구 하는 기획기사를 실은 것을 본적이 있다고 했는데, 그 기사를 접했을때는 솔직히 혼자 묘한 느낌에 ‘씨익’ 묘한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저는 ‘한국의 전통음식’과 그 맛과 멋을 한사코 자랑하고 홍보하고싶어 애를쓰던 많은 한국인 친구들의 모습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소개하던 것이 대개 냉면이니 불고기니 김치니 또는 그 외 한정식 – 네, 한국 방문때는 여지없이 들르곤 했던곳이 바로 그 소위 ‘한정식 코스’ 였으니까요 – 그런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많은 외국인들에게 한국 하면 그런 전통음식보다는 ‘개고기’를 먼저 떠올린다는 것 다들 잘 아실것입니다. 안타깝지만 ‘북한’과 ‘개고기’는 어쩌면 지금까지도 다수의 외국인들이 한국하면 제일먼저 떠올리는 양대 이미지입니다.

 한국이 ‘개고기’를 먹는나라라고 알려진 데는 특히 딴에는 무슨 인권운동에 환경운동까지 한다는 어떤 프랑스 배우 – 에구...죄송하게도 하필 저희나라네요. 저라도 대신 사과를 드려야만 할 것 같은 생각마저 듭니다. 한국 친구 여러분 ! 정말 죄송합니다. - 가 가장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 ‘개고기 먹는 나라’라는 이미지가 특히 행여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세계적으로 알려지기라도 할까봐 당시 한국정부는 물론 많은 관계자들이 전전긍긍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국이 ‘개고기 먹는 나라’로 알려진것에 제가 교류하던 한국 친구,지인들은 대개 이런식으로 반응하던게 기억이 납니다. 일단 가장 많았던 사례는 ‘거 달팽이니 거위간이니 별걸 다 먹는 사람들이 너무한 것 아니냐 ?’는 식이었고 ‘자신은 개고기를 먹지 않으니 예외’라며 빠져나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 어떤이들은 한국인들이 개고기를 먹을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문화적 불가피성을 제법 진지하게 긴 시간 역설하기도 하더군요. - 그 이유는 대개 가난하던 시절 소는 ‘농사를 짓는데 사용’하기 때문에 함부로 육류로 활용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개가 소나 닭 보다는 많이 고기로 활용될수밖에 없었다는 이유였습니다. -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한국이 ‘개고기 먹는 나라’로 알려진것에 대한 한국 친구,지인들의 반응은 흥미로울 정도로 천양지차였다는 점입니다. 다만 전 그 문제에 대해 전전긍긍해 하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네요. ‘뭐 그까짓 3류 저질배우의 헛소리에 신경쓰느냐 ? 너무 괘념치 말라’ 고요...



- 3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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