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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그룹 팬픽 - EXID 솔지 (1) 걸그룹 팬픽 7 (마마무,EXID)




                                    부제 : 프랑스 작가가 쓴 탈북자 수기





 ‘김포 국제공항’이 아닌 ‘인천 국제공항’이란곳이 새로 생겼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습니다. 그러고보니 제가 한국땅을 밟아본 것이 어느덧 20년전의 일이라는것도 새삼 깨닫게 되었고요. 다만 한국이 왜 느닷없이 자신들과 외국이 교류하는 유일한 국제공항을 김포에서 인천으로 바꾸었는지는 아직도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제가 지금껏 한국땅을 밟아본 것은 대략 7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20년 가까운 시간동안 서른차례 조금 넘는 횟수. 그때마다 처음 밟게되는 ‘김포 국제공항’은 적어도 한국이 저같은 서양인들의 머릿속에 흔히 그릴수 있는 아프리카나 남부 아시아쯤 되는 후진국일것이란 막연한 이미지를 깨끗하게 씻겨주는데는 썩 안성마춤이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이번에 ‘인천’이란 도시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앞서 한국을 다녀가본 것이 7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20년동안 30여차례라고 했는데 그러면서 ‘인천’이란 도시도 몰랐다는게 말이 되느냐 이해못하실분도 계시겠지만, 솔직히 그건 저 같은 사람에겐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고보니 인천 국제공항이 생긴지도 어느덧 20년이 다 되어간다니 요즘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희때만 해도 한국을 방문할 때 자주 가는곳은 대개는 서울. 경복궁을 비롯한 수도권의 고궁과 전통유적 몇곳 그리고 경주라는 이른바 ‘신라 천년의 수도’였다며 한국인들이 한사코 자랑하지 못해 안달난 그 도시를 제외하고는 다른곳은 가본 경험이 거의 없으니까요. 다만 전 ‘부산’이란 도시는 한번 가본적이 있습니다. ‘한국학’을 전공하면서 대개는 학술연구 세미나등과 관련하여 한국을 오갈 때, 그때 알게된 한국인 친구가 ‘한국사람들은 외국인이 방문하면 꼭 보여주고 싶은곳이 서울과 경주 두곳밖에 없나보다’ 하면서 그 친구의 고향이기도 하다는 한국 제2의 도시이자 항구도시 부산을 한번은 꼭 보여주고 싶었노라며 3박4일 정도 일정으로 부산으로 초청한적이 한번 있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전까지 ‘인천’이란 도시는 제게는 들어본 기억이 거의 없는 낯선 지역명이었습니다.

 여하튼 한국을 방문하기위해 가야하는 공항이 이제 더 이상 ‘김포’가 아니고 ‘인천’이란 사실을 알고나서는 뒤늦게나마 부랴부랴 세계전도를 펼치고 ‘인천’이란 도시가 대관절 어디 붙어있는 도시인지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수도 서울에서 조금 떨어진 바닷가의 작은 소도시 – 제 입장에서 그렇게 느꼈다는 소리입니다. - 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여하튼 이런곳에 한 20년전에 새로운 국제공항을 건설했다니 얼핏 이해가 가지 않으면서도 한국인들도 생각이 아주 없는 사람들은 아닐터이니 그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으려니 생각하고는 그쯤에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내 이름은 소피 윌즈. 1950년대 초반에 태어난 현재 나이 60대 중반을 지나 후반으로 접어들고 있는 한국학 전공의 프랑스 교수입니다. - ‘한국학을 전공했다면서 김포공항 대신 인천국제공항이 새로 들어선게 벌써 20년전이란 사실도 모르고 심지어 인천이란 도시에 대해서도 정보가 전무하다는게 대체 말이나 되느냐 ?’며 혹 고개를 갸웃하실 분도 계실련지 모르겠지만 그건 제 입장에서 그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고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지금부터 간략하게나마 그 이유를 설명해드릴까 합니다.

 저는 70년대에 ‘동양학’에 대한 관심이 생겨 대학에서 그와같은 학문을 전공했습니다. 저희때만 해도 ‘한국학’이라고 따로 한국에 대해 전문으로 공부를 하는 그런 학과는 없었고 대체로 ‘동양학’이라고 해서 일본이라던가 중국,한국,베트남등 대체로 동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그 지역의 전통문화라던가 역사,언어 그런것들을 뭉뚱그려 배우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차츰 전공분야가 심화되면서 동양학 전공자들중에도 개별적으로 나는 나중에 ‘중국을 전공으로 공부하고 싶다’던가 ‘일본에 대해 전공해보고 싶다’던가 그런 사람들이 생기긴 했지만, 대체로 딱히 ‘한국’이란 나라에 그렇게까지 관심을 갖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럼 저는 대체 왜 ‘한국학’을 전공해보기로 했냐구요 ? 그보다 제가 왜 동양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그것부터 설명을 드리는게 앞뒤 문맥이 잘 맞는 설명이 될 것 같네요. 저희 아버님께선 학자나 그런분은 아니었고 공무원 생활을 오래 하시면서 주로 외국인이나 외교관들을 접대할 기회가 많았었는데 그럴때마다 대체로 선진국보다는 우리보다 뒤떨어진 그런 아프리카나 남아시아 또는 중남미의 후진국가들. 그런 나라들의 전통문화라던가 습성,인종 그런것에 관심을 많이 갖고 계시던 분이었습니다. 어머님께선 젊은시절 간호사일을 하셨는데 그때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 같은곳에 종종 의료봉사를 나가신 경험이 있다고 하시네요. 그 영향탓일까요. 저도 그래서 프랑스보다 잘 사는 나라들보다는 상대적으로 못 사는 나라들의 그곳의 일반 주민들의 생활상이라던가 또는 그곳의 (상대적으로 유럽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전통문화라던가 습성,언어 그런것에 대한 관심을 차츰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대학에서 한번 ‘동양학’이라고 해서 처음엔 (적어도 유럽보다는 뒤떨어져 있다고 그 당시까지는 분명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동양권 국가들은 대체 어떤 나라들이고 어떠한 습성이나 문화,종교,역사,언어 그런 것을 지니고 살아온 사람들인가. 그 총체적인 관심이 생겼다고 말씀드리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 혹자는 그런 것을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이라고도 하죠. 맞습니다. 솔직히 인정하렵니다. 제가 동양에 대한 관심을 갖게된 것은 유럽보다 뒤떨어진 지역이라는데서 생기는 묘한 측은지심 또는 야릇한 호기심. 그 두가지 감정이 복합적으로 발생하여 생긴 관심이라고 말씀드린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동양학’을 대학에서 전공해보겠다고 마음먹었을때까지만 해도 대체로 처음 관심은 중국이나 일본에 대한 관심이 주를 이루었지. 설마 korea라는 그 당시까지만 해도 지도를 펼쳐봐도 거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그 작은 반도국가에 관심이나 호기심 또는 애정같은 것이 생기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막상 동양학을 전공할때까지만 해도 전 동아시아의 대다수 국가들 – 솔직히 그렇긴 합니다만 – 이 모두 유럽보다 한참 뒤떨어진 후진국일것이라 막연히 여겼습니다. 헌데 막상 그런 동양에 대해 공부를 하다보니 중국이나 일본이 오히려 역사나 전통이 유럽보다도 길고 오래되었고 심지어 일본의 경우엔 그때 막 경제적으로 부상해오는(1970년대) 그런 신흥 강국이란 사실까지 알게되고는 솔직히 자존심까지 상하게 되더군요. 대(大) 프랑스보다 못한 국가들에 대한 호기심과 측은지심으로 시작한 공부였는데 되려 그 나라들이 전통이나 역사 문화는 우리보다 오래되었다 ? 여러분이 제 입장이었더라도 자존심 상하지 않았을까요 ? 허나 일본이나 중국은 몰라도 – 적어도 그 전까지는 눈길도 관심도 가지 않던 – 그 사이에 있는 웬지모를 묘한 느낌의 작은 반도국가는 제게 또다른 흥미와 관심을 유발시켰습니다.

 대체 저 작은 나라는 어떻게 생겨먹은 나라일까. 또 그 나라에는 대체 어떤 ‘신기한 존재(동물이라고 표현해볼까 하다가 혹시 욕먹을 것 같아서 참았습니다 ^^;;)’들이 살고있을까. 그 묘한 호기심의 발동. 그게 제가 korea란 나라에 대해 처음 흥미가 유발된 동기인 셈입니다. - 대학때 저와 단짝으로 지내던 동성의 친구가 하필 공교롭게도 제가 짝사랑하는 남자와 커플이 되었는데 제 단짝친구는 나중에 중국학을 전공하게 되었고, 짝사랑하던 남자는 일본문학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전공하게 되어 그 반발심리 때문에 중국도 일본도 아닌 한국을 택하게 되었다는 것은 제가 너무 쪼잔한 여자로 보일까봐 굳이 이 지면을 통해선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막상 그렇게 한국에 대한 호기심 반 측은지심 반으로 시작한 연구와 공부는 그러나 그 첫걸음에서부터 뜻밖의 경험과 그리고 선입견을 벗게 만들었습니다. 솔직히 애초에 한국이란 나라에 대해 가졌던 애정과 호기심은 어느어느 아프리카나 남아시아 또는 중남미의 극빈국가에 가서 그곳의 헐벗고 굶주린 아이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는 자원봉사자의 마음과 크게 다를바가 없었습니다. 가령 ‘어떻게 해서 저 아이는 저렇게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게 되었을까, 어떻게 해서 저 나라는 저렇게 불우하고 불행한 환경에 처해지게 되었고 문화나 역사도 짧고 뒤떨어진것일까’ 뭐 그런식으로 시작되는 관심이라고나 할까요. 솔직히 막상 한국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을때까지만 해도 그저 아프리카나 남아시아 수준의 후진국 또는 일본이나 중국과 엇비슷한 아류국가쯤으로 여겼는데, 그러나 뜻밖에도 그곳이 나름의 고유한 언어와 문자 그리고 전통문화와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처음엔 불우한 극빈국의 어린아이라도 보는듯한 측은지심처럼 시작된 관심은 ‘왜 이런 나라가 지금껏 서유럽의 유수한 국가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을까 ?’ 하는 의문과 궁금증으로 바뀌어갔습니다.

 앞서 김포공항 이야기를 서두로 꺼냈으니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풀어가보도록 하지요. 네, 제가 처음 김포공항에 첫 발을 디뎠을 때 그러니 70년대 후반 당시까지만 해도 그저 한국을 아프리카 수준의 후진국으로 여겼던 20대 중반의 세상물정 모르는 프랑스 아가씨는 김포공항의 그 깔끔한 분위기와 친절한 서비스에서 이미 ‘아, 지금껏 내가 편견과 선입견으로 생각했던 그런 나라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서울 중심가로 접어들면 접어들수록 자주 접하게 되는 고층빌딩과 아파트.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나라’가 맞나 의심이 갈 정도로 그 고층건물들은 절 충격받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호기심에서 시작된 한국과의 첫 만남은 충격이었고 그 다음의 감정은 한국이란 나라의 역사와 전통문화를 점점 알아가면서 차츰 중독되어갔다고 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호기심과 관심이었습니다.

 사실 참 이해할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중국과 일본이란 거대한 강대국 사이에 있는 작은 나라일지언정 결코 만만찮은 전통문화와 역사를 가진 나라가 왜 지금껏 세상에 알려져있지 않았는지. 어떤이는 한국을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고 했다지만 그보다는 ‘은둔의 나라’였던 것은 혹시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실제 19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서양세계에 그 존재감이 너무나 미약했던 나라. 어쩌면 제가 한국땅을 처음 밟았던 70년대 후반 그 순간까지만 해도 어떤이들은 심지어 남한과 북한을 혼동해서 북한의 김일성을 남한 대통령으로 알고있기까지 한 그렇게 알려지지 않은 나라. 왜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과 궁금증은 가면 갈수록 커져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 그래서였을까요. 제가 한국땅을 처음 밟았던 70년대 후반 그때부터였다고는 할수 없겠지만 – 어쩌면 그때까지만 해도 제가 한국은 첫 방문이고 세상물정 모를때라 딱히 그런 기류를 느끼지 못했을수도 있고요 – 대체로 한국땅을 서너차례 밟고난 뒤 부터는 ‘이 나라 사람들은 유독 외국에 자신들의 역사와 전통문화등을 한사코 알리고 싶어 안달이 났구나’ 하는 점이었습니다. 제가 한국을 방문하게 된 이유는 대개 한국학과 관련된 학술 세미나 혹은 이런저런 유관단체가 해외 인사들을 초청해서 벌이는 행사들. 대략 그런것들 때문이었지만, 그래서였는지 몰라도 유독 이 나라 사람들은 ‘한사코 자기네 전통과 문화를 해외에 알리고 싶어한다, 그리고 더 이상 자기네들이 식민지와 전쟁의 폐허로 쑥밭이 된 그런 헐벗고 굶주린 나라가 아니다’ 라는 점을 한사코 알리고 싶어한다는 것을 그 열망을 강렬하게 느낄수 있었습니다.

 제가 한국에 대해 연구하게 되고 한국을 자주 방문하게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시점에 한국이 이른바 ‘88 서울올림픽 유치’에 성공하기도 했지만, 확실히 그 서울올림픽을 유치하고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도 한국사람들은 자신의 나라를 더더욱 세계 만방에 적극적으로 알리고 홍보하고 싶어 한다는 그 열망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따지고보면 서울올림픽을, 그것도 아직 경제적으로 완전히 부흥했다고 보기도 어렵고, 설상가상으로 남북분단의 현실까지 있는 나라가 올림픽처럼 전 세계 모든 식구가 사상과 이념을 초월하여 한자리에 해야만 하는 ‘초대형 스포츠 행사’를 유치하려 한것도 결국 ‘자국의 홍보목적’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두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하나는 확실히 한국이란 나라는 남아시아나 아프리카 수준의 후진국이라고 할 수는 없는 어느정도 경제적으로 부흥해있는 상태인 나라였고 일본이나 중국의 아류가 아닌 나름의 독창적인 전통문화와 역사를 지니고 있는 나라. 그리고 둘째로 명색이 한국학을 전공한다는 교수인 나는 이 한국의 전통문화와 역사가 인류문명사적 차원에서 왜 어째서 보존할 가치가 있는 그만한 나라인지를 세상에 적극적으로 알리는것에 제가 해야할 일이란 생각을 하게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두 번째 일이 그것이 제가 한국을 자주 오가면서 알게된 한국인 친구,지인들의 기대와 바램에 부응하는 일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뜻밖의 사실 하나를 공개해야 할 것 같네요. 사실 한국을 소재로 한 소설을 그동안 두 차례 쓴 일이 있습니다. 앞서 이미 말씀드렸죠. 저는 프랑스에서 한국학을 전공하는 학자고, 한국의 고유한 역사와 전통문화를 보다 널리 세상에 알리는일이 저와 그동한 교류해온 한국인 친구,지인들이 저에게 바라는 기대에 부응하는 일일것이라 생각했다고. 그래서 쓴 첫 번째 소설은 구한말에 일제에 의해 잔혹하게 희생된 조선의 ‘마지막 황후’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제국주의의 야만이 조선이란 ‘순결한 신부’와도 같은 나라의 국모를 어떻게 잔혹한 방법으로 살해했는지 그 일제(日帝)의 야만적 행동만은 반드시 세상에 고발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소설은 조선시대의 한 궁중비극을 소재로 한 이야기였습니다. 제가 한국에 대해 공부하고 연구하는 과정에서 조선시대는 참 드라마틱한 역사와 이야기거리가 참 많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중 대표적인 조선시대 궁중비극 하나를 프랑스어로 써서 세상에 발표했습니다. 사실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가 될 만큼 잘 팔린책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한국에 대해 관심이 있는 또는 있을만한 사람들 정도는 거의 다 사 본 그 정도의 관심은 얻은 작품이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제가 한국 그중에서도 조선시대 왕실비사와 관련된 소재를 소설로 쓴 이유 역시 한국의 고유한 전통문화와 역사를 보다 많은 이들에게 알리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허나 7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대략 20년 가까운 시간이 그렇게 한국의 고유한 전통문화와 역사에 빠져있던 열정의 시간이었다면 그후 지난 20년이 조금 넘는 시간은 안타깝게도 한국에 대한 관심을 조금 멀리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사실 그건 제 복잡한 가정사와 관련된 이야기라 공개적으로 말씀드리기가 다소 난감하긴 하네요. 앞서 제가 하필이면 대학시절 단짝친구에게 짝사랑하던 남자를 빼앗긴 상처가 있다는 말씀은 이미 드렸습니다. 꼭 그것이 이유가 되었다고는 할수 없지만 서른을 조금 넘긴 다소 늦은 나이에 저보다 열 살많은 남자를 주위 지인 소개로 알게되어 사귀게 되어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대체로 제가 자상하고 이해심 많은 남자였지만 공교롭게도 결혼후 10년이 조금 넘었을 때 그만 몸이 아파 자리에 눕고 말았습니다. 그게 90년대 중반의 일. 한동안은 남편 간호에 신경을 쓰다보니 한국학이고 한국의 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을 쓰는일이고 도저히 그런것들에 관심가질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의 병이 좀 나아지려 하니까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세 아이들이 차례대로 속을 썩이기 시작하더군요. 그래서 그 세 아이들 뒷바라지하랴 돌보랴 대충 그 아이들 결혼시킬때까지 한 10년 넘는 시간을 또 정신없이 보냈습니다. 헌데 그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나니 그 다음엔 신경을 워낙 많이 썼던 탓인지 그 다음엔 제가 아프더군요. 그래서 지난 20년은 그 제 개인적인 복잡한 가정사 때문에 다소 힘든 시간을 보내 한국학이고 한국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쓰는일이고 그런것에 신경을 쓸 여유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솔직히 말씀드립니다. - 다만 기왕 말 나온김에 하나만 더 덧붙이자면 앞서 말씀드렸던 절 배신하고 하필 제가 짝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한 제 대학시절 단짝친구는 나중에 소식을 들으니 두 사람 사이에 아들 넷을 낳고 그 네 아들도 모두 성실하고 훌륭하게 잘 컸다는데 제가 나이 서른 넘어서 열 살연상의 남편을 만나 본 세 자녀(딸 둘, 아들 하나)는 왜 이리도 하나같이 사고뭉치들이었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운명을 관장하는 신이 정말 저 세상 어딘가에 있다면 저에게만 너무 짖궂은 심술을 부리시는게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마저 들더군요.





 그렇게 제 개인 삶에 정신없었던 20년의 시간을 보내고나니 어느덧 제 나이 70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좀 아쉽습니다. 제 나이 20대 중반부터 40대 중반까지의 20년 시간. 한국을 서른번도 넘게 드나들었던 그 시간이 한국에 대해 알아가던 열정의 시간이었다면 이후의 시간이 제게 삶의 여유가 조금이라도 있었던 시간이었다면 전 그 시간을 한국이란 나라에 대해 특히 서유럽 사람들에게 – 무엇보다 오직 자신들만이 발달된 선진문명과 역사를 가진 사람들이고 그런 나라이고 민족이란 오만에 쩔어있는 그 사람들에게 – 동양에도 비록 작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역사와 언어,전통문화를 지니고 수천년을 버텨온 그런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데, 그리고 그런 주제의 글과 책을 쓰면서 20년의 시간을 보냈을텐데 그러지 못했던 것을 아쉬워하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제가 서른번 넘게 한국을 드나들면서 알게된 한국의 지인들은 저같은 한국학 전공자나 한국에 관심을 갖고있는 이들에게 자신들의 고유한 역사와 전통문화를 한사코 알리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저같은 사람이 마땅히 그렇게 인연을 맺은 한국인들의 기대에 부응하려면 그런쪽의 활동을 보다 적극적이고 열심히 했었어야 하는것인데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것을 진심으로 나의 한국인 친구,지인들에게 미안해하고 있습니다.

 ‘탈북자’에 대한 소설을 써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온 것이 그 무렵의 일이었습니다. 솔직히 처음엔 당황했습니다. 물론 명색이 한국학을 전공하거나 한국에 관심이 있다는 사람이 남북분단의 현실이나 그 원인에 대해 모른다면 말이 되지 않는 일일것입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유럽 사람들이 여전히 남한과 북한을 혼동하고 있다는 것을 저 또한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런대로 공신력을 갖춘 단체나 기관 같은데서 내는 책자나 자료집에도 남한의 대통령이나 총리 이름을 김일성이나 김정일로 기록해놓고 있는 오류는 지금도 이따금씩 발견할수 있습니다. - 다만 이전에는 그런 오류의 수정요구는 저같은 한국학 학자들이 하곤 했었는데 요즘은 한국 네티즌들이 자발적으로 그런 수정요구를 하는 것 같더군요. 어찌되었거나 바람직한 일입니다.

 다만 제 주된 관심사가 남한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그 남한의 역사요 뿌리라고 할 수 있는 한국과 한민족의 전통과 역사였기 때문에 북한이나 한반도 문제는 상대적으로 제 관심권에서 다소 거리가 있는 주제라서 처음엔 살짝 당황하였습니다. 솔직히 대다수 유럽인들은 여전히 ‘북한’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적어도 매스컴에서 자주 다루는 나라가 남한보다는 상대적으로 북한인 것은 지금까지도 어쩔수 없는 현실입니다. 이따금씩 있는 북한의 무력도발이라던가 또는 그 나라의 최고 지도자(김일성,김정일)가 사망했을 때 그 이해할수 없는 집단 히스테리라도 걸린듯한 엽기적인 발악과 울부짖음. 그리고 심각하다는 북한의 식량난과 탈북자 사태는 저도 이따금 매스컴을 통해 접하곤 하는 일이었으니까요. 다만 그때마다 아쉽곤 하였습니다. 왜 서방의 언론은 한사코 북한의 이런 ‘나쁜점’만 늘 부각시켜 보도하고 한국이란 저 수천년 고유한 언어와 문화,역사를 지닌 나라에 대한 보도는 이렇게까지 인색한것일까. 따지고보면 남한과 북한을 혼동하는 유럽인이 아직도 많거나 심지어 공신력있다고 할 수 있는 기관이나 단체에서 내는 자료나 책자에조차 가끔씩은 남한의 지도자가 김일성이나 김정일이라고 적어내는 해프닝이 이따금 발생하는 원인에 매스컴도 분명 책임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오래전부터 해왔습니다.

 처음 제게 탈북자 소재 소설을 써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해온 곳은 ‘북한인민 해방전선’이란 이름부터 뭔가 섬뜩하고 낯선 느낌이 드는 단체였습니다. 처음엔 그래서 이런 생각까지 했습니다. ‘뭐 이런 이상한 단체에서 나보고 소설을 써달라는 제안을 해온단 말인가 ? 혹시 사람을 잘못알고 찾아온 것은 아닌가 ?’ 하고요. 다만 그 ‘북한...어쩌구 해방전선’이란 단체와 협력기관이라는 단체명을 듣고는 그래도 처음의 그 낯섬과 당혹감은 약간 가셨습니다.

 ‘나눔 선교회’라는 단체는 한국의 개신교(기독교) 선교단체라고 합니다. - 헌데 사실 유럽에서는 상대적으로 천주교에 호의적인 사람이 더 많지 기독교를 믿는 인구는 의외로 그리 많지 않습니다. - 여하튼 그 개신교 선교단체라는곳은 대략 90년대 후반부터는 탈북자들을 돕는 일을 주된 사업으로 해오고 있다고 하더군요.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지금까지 약 2천여명에 달하는 탈북자의 한국행을 도왔다고 합니다.

 저는 북한의 식량난이 심각하고 중국땅을 떠도는 탈북자가 수십만에 달한다는 보도를 접하던 시절에, 그중 적잖은 탈북자가 중국내 외국공관에 진입하는 사태가 있었다는 보도를 접해본 사실이 있습니다. - 남한이건 북한이건 한국관련 보도는 늘 접하고 스크랩하는것도 제 일이기도 했으니까요. - 다만 그때 유럽의 일부 언론은 그와같은 탈북자 수십명의 집단 공관진입 사건은 배후에서 조종하는 단체가 있을것이란 막연한 추정을 하기도 했습니다. 헌데 막상 ‘북한인민 해방전선’의 협력단체라는 ‘나눔선교회’ 관계자를 만나 면담을 했을 때 그 관계자는 생각보다 쉽사리 그 부분을 시인하더군요. 중국내 외국공관의 탈북자 대량 유입사태중 몇건은 자신들이 사실상 배후에서 개입한것이라고요. 그리고 중국은 탈북자를 인정하지 않고있고, 북한으로 송환된 탈북자는 그곳에서 혹독한 고초를 당하고 유엔에서 난민지위 인정을 받아 한국으로 일반 탈북자를 망명시키는일이 쉽지 않아 치외법권지역인 재외공관에 탈북자를 진입시키는게 불가피했다고요. 그리고 그것은 생사의 기로에 놓여있는 그들이 유일하게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선택이자 ‘생명줄’이라며 제 앞에서 제법 긴 시간 열정적으로 그 불가피함을 역설하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이와같은 북한인권과 탈북자의 실상을 유럽에서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알게 하고픈 목적으로 한번 유럽사람 손으로 ‘탈북자’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보는게 어떨까 하는 기획을 하게 되었다는게 그 사람들이 나와의 접촉을 시도한 취지였습니다.

 탈북자와 북한인권 실상을 보다 많은 유렵인들에게 접하게 하는게 그들의 목적이고 그래서 탈북자의 증언이나 수기를 유럽인의 손에 의해 ‘소설’로 내보자는 기획을 하게 되었다. 그런 기획을 하는 과정에서 ‘프랑스에 한국을 소재로 한 소설을 두편 써 낸 작가가 있는데 그 사람을 한번 찾아가보라’ 그런식의 소개를 받을수 있다는 것이 제게 충분히 납득이 갈만한 과정이었습니다. 앞서 이미 말씀드렸지만 저는 유럽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한국의 고유한 전통문화와 역사를 알리려는 목적으로 한국을 소재로 한 두편의 소설을 써냈습니다. 그 하나가 구한말 일제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된 대한제국 황후와 관련된 이야기고, 또 다른 하나는 조선시대 궁중비극과 관련된 소설이었습니다. 그런 제게 세 번째로 ‘한국관련 소설’을 쓸 기회가 온 것입니다.

 다만 그것이 공교롭게도 ‘탈북자’를 소재로 한 소설이라니. 그 부분은 좀 망설여졌습니다. 과연 이 소재가 한국의 고유한 전통문화와 역사를 보다 많은 외국인들에게 알리고 싶어하는 제가 20년간 교류해온(7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한국의 친구,지인들의 바램과 기대에 부응하는 일일지. 그 바램과 기대의 방향성에 적합한 일인지는 다소 망설여지는 일이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아직도 많은 유럽사람들은 남한과 북한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헌데 오히려 이런류의 소설이 남한과 북한의 ‘이미지 혼동’만 한층 더 북돋게 하는 것은 아닌지 그 고민이 솔직히 먼저 앞섰습니다.

 사실 전 기회가 있다면 한국을 소재로 한 소설을 몇 번 더 쓰고싶다는 생각은 했었습니다. 다만 세 번째로 생각해봤던 소설은 ‘종군위안부’와 관련된 소재였습니다. 일본의 야만적인 제국주의가 ‘순결한 처녀’와 같은 한국을 어떤식으로 유린했는지 그 만행을 보다 적극적으로 세상에 알리고 폭로할만한 소재는 역시 ‘종군위안부’ 문제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외 생각해둔 소설이 있다면 역시 조선시대 왕실과 관련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 조선시대 왕실은 그야말로 세익스피어 비극이나 어떤 유럽 왕실 못지않은 드라마틱한 이야기와 사연을 많이 간직하고 있기에 한국의 고유한 역사와 전통문화를 알리는데는 조선시대 왕실 이야기만큼 적합한것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여러번 말했듯 제 나이가 어느덧 60대 후반인데, 앞으로 제가 한 10여년 정도 더 살 수 있다 가정한다면 그 십년동안 ‘종군위안부’라던가 조선시대 왕실비극 같은 소재 소설로 ‘한국의 고유한 전통문화와 역사를 유럽에 알리는데 기여’하고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나고 싶다는게 어느덧 70을 바라보는 한국학을 전공한 프랑스 노파의 마지막 남은 소박한 바램이었습니다. 20대 중반부터 40대까지 20년 시간 그야말로 열정적으로 빠져들었던 한국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그 시절 어울리고 교류헀던 나의 한국 친구들, 벗과 지인들.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는길은 역시 그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헌데 그런 제게 ‘탈북자 소재 소설’을 써보라니요. 애초에 제 관심사가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무슨 북한 사람들을 해방시키겠다는 탈북자 망명단체와 그리고 그런 단체와 함께 일을 한다는 북한인권단체(또는 개신교 선교단체 ?)의 제안은 선뜻 받아들이기 망설여졌습니다.

 허나 다소의 망설임 끝에 ‘일단 한번 도전은 해보자’는 쪽으로 생각이 차츰 바뀌어갔습니다. 그러고보면 제가 한국학 연구에서 손을 떼고 제 집안 문제에 정신을 쏟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 세상이 너무 많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한국학도 이전에 비해 보다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공부하는 학생들이나 학자들이 어느정도 늘어났고, 따라서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열정적으로 활동했던 따라서 적어도 프랑스에선 한국학 연구의 첫 물꼬를 텄다고도 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한 저는 오히려 어느덧 ‘뒷방 늙은이’로 밀려나는 느낌마저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한국땅을 가본지가 너무 오래되었구나’ 하는 자각에 이를 계기로 다시금 한국땅을 밟고 싶다는 소망도 생겼기 때문입니다. 어느덧 나이 60대 후반인데 이런 기회를 놓치면 다음에 올 기회가 쉽지 않을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애초의 당혹스러움과 망설임은 있었을지언정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았기에 일단 그 제안에 응해보기로 하였습니다.

 나눔선교회 관계자는 일단 소설 모델로 삼을만한 4-5명 정도의 탈북자 사례를 제게 말해주었습니다. 그중 두명은 자신들이 직접 한국행을 도운 젊은 탈북여성이고, 나머지 두명은 최근 한국에 새로 생겼다는 케이블 방송사에 ‘탈북자들’이 고정적으로 출연하는 ‘토크쇼’ 형식의 TV 프로그램이 있는데 거기 단골로 출연하는 탈북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명은 이들보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은 그리고 북한에서 다소 고위층에 해당된다는 탈북자라는데 일단 다섯 번째 사례자는 관계자가 그렇게 적극적으로까지 설명하진 않는 눈치였습니다. 따라서 제가 접한 사례자는 일단 막연히 4-5명 정도라고 해두겠습니다.



- 2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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