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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서스의 백묵원'을 보고나서 X-FILE



 ‘코카서스의 백묵원’이란 작품을 보게 되었다. 사실 이런 작품이 있다는 사실은 아주 최근에야 알게되었다. 인터넷에서 소설 소재거리나 좀 찾아볼까 하고 검색을 하며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그런 작품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리고 마침 그 ‘코카서스의 백묵원’이란 작품이 6월에(6.5-10) 국내에서 공연을 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된 것이다. 그리고 연극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우리식 창극으로 재구성한 공연이었다.


 ‘코카서스의 백묵원’은 주인공 그루셰가 성에서 반란이 일어나 영주가 사망하고 영주 부인은 아이를 내팽개치고 달아나자, 자신이 그 영주의 아이를 거두어 키우게 되는데 나중에 아이의 생모인 영주부인이 나타나 친권을 주장하는 그런 내용이다. 그러자 재판관은 ‘두 여인이 아이의 양 팔을 잡아당겨보라’며 아이의 손을 끝까지 놓지 않는쪽이 어미인 것을 인정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되려 그루셰는 아이가 아플까봐 손을 놓게되며 그러자 재판관은 ‘아이의 고통을 아는 그루셰가 진짜 어미다’라는 판결을 내린다.


 그러고보니 성경에 나오는 ‘솔로몬의 재판’과 대략 비슷한 이야기다. 다만 결말이 다른 것이 솔로몬의 재판에선 솔로몬이 ‘아이를 갈라 반반씩 나눠가지라’고 하자 아이의 친권을 주장하던 두 어머니중 한쪽이 ‘그럴바엔 저 여인에게 주라’고 하자 ‘바로 저 여인이 생모가 맞다’고 판결을 내린다. 하지만 ‘코카서스의 백묵원’은 작품의 원형격은 솔로몬의 재판과 달리 기른 어미가 차마 아이의 고통 때문에 결국 손을 놓아버리고 만다.


 눈치채거나 짐작한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사실 필자는 이런류의 작품 제법 좋아하는 편이며 낳은정,기른정 혹은 생모,계모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드라마,영화,소설등)을 꽤 많이 봐왔다. 다만 이번 작품은 좀 다른 관점에서 작품을 감상해보기로 했다.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이 이야기를 본다면 어떨까 그 생각을 문득 해봤던 것이다.


 실제 근래에는 모성(母性)이나 모정(母情)같은 개념조차도 남성위주의 세상이 만들어낸 개념이란 주장도 나오는 실정이다. 뭐 어느정도 일리있는 주장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변의 법칙 하나가 있다. 여성은 근본적으로 자신이 배아파서 직접 아이를 낳는 존재라는 점이다. 따라서 자신이 직접 배아파 낳은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를 대하는 눈과 감정이 다를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 모성이란 단어 자체는 남자들이 만들었을지 몰라도, 남성이나 여성의 신체적 특성은 태초부터 이미 그렇게 만들어진 것을 어쩌란 말인가. 그 문제는 천상 남자와 여자를 태초에 그와같이 만든 존재를 만나 따져보기 전에는 마땅히 달리 해결할 수 있는 방도가 없다.



 그러고보면 언제부터인가 특히 젊은 주부들이 육아의 고통을 호소하면서 ‘대체 모정이니 모성이니 이런거 누가 만든 말이냐 ? 이것도 혹시 남자들이 만든 개념 아니냐 ?’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나본데, 그런 어머니들중에도 아마 자신의 아이가 차도라도 잘못 걸어들어가 사고날 위기에 처하면 자기 몸이라도 던져 아이를 구하려들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작품 이야기로 돌아가서 만약 이런 결말을 내린다면 어떨까. ‘아이는 그냥 친엄마가 키우도록 하고 글리셰는 자유롭게 자기인생 찾아가라고 해라. 글리셰도 자기인생이 있는데 낳지도 않은 아이에 얽매여 사느니 그게 나을것이요, 친어미도 자기 아이 되찾은거니 거기에 더 이의가 있을수도 없을것이고, 아이도 자기 엄마에게서 자라게 될 것이니 문제될 것 없지 않느냐 ?’ 이게 무슨소린가 하고 어리둥절하겠지만 만약 현대의 법정에서의 양육권 분쟁 문제로 환원시켜 재해석해본다 하더라도 판결의 결말이 크게 다르진 않을 것 같다. - 실제 법정에서 이혼부부의 양육권분쟁때 친부보다 친모의 손을 들어주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물론 글리셰는 계모의 개념보다 양모(養母)의 개념으로 봐야하겠지만 그렇더라도 논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주제는 크게 달라질것이 없다. 글리셰는 지금껏 혼자 아이를 키우며 살아왔고 이후의 시간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결국 글리셰가 낳지도 않은 아이를 키우면서 요구되는 덕목은 결국 아이에 대한 희생과 헌신일 것이다.


 만약 글리셰가 다른 좋은 남자를 만나 자기 아이가 생기면 어찌될까. 글리셰를 연극속 주인공이 아닌 현실속의 인물이라 가정한다면 자기 아이를 낳은뒤에도 지금껏 키워온 아이에 대한 희생과 헌신이 지속될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낳은정,기른정,희생,헌신,모성,모정...그러고보면 열거한 것들이 전부 남성중심 세상에서 여성들에게 강요되어온 덕목들 같다. ‘코카서스의 백묵원’ 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남자다. 그리고 이번 창극 공연의 연출 역시 재일교포 남성인 정의신이 맡았다. 다만 어떤 의도가 담긴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원래는 남자였을 극중에서 아이를 누가 키우게 할것인지를 판결내리는 판사역을 이 공연에선 여배우가 맡았다.


 이 작품의 원작이 원나라 시대 연극인 ‘석필 이야기’라고 해서 혹시 원작을 찾아볼 방법이 없을까 해서 공연을 보고 돌아와서 인터넷을 샅샅이 돌아다니며 찾아봤지만 원작을 찾아보는데는 아쉽게도 실패했다. 하지만 원작이야 어찌되었든 확실히 이 연극 역시 남성위주의 사고체계가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가운데 만들어진 작품인것만은 분명하다.



 낳은정과 기른정의 차이는 과연 존재할 수밖에 없는것일까. 모성과 모정의 실체는 과연 존재할까. 또는 왜 여성은 자신이 직접 배아파 아이를 낳는 존재로 창조된 것일까. 쉽게 답하기 힘든 몇가지 의문을 가진채 공연장을 나섰다.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아이가 아플까봐 손을 놓은 글리셰의 손을 들어준 판사는 합리적인 판단을 했다고 말할수 있을까. 포스트 모던적 여성주의 시대로 가는 도입부에 있는(가령 이른바 ‘여혐’ 논란 같은 것) 우리 사회를 생각하며 여러 가지로 깊은 고민을 하게 만든 연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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