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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대 걸그룹 팬픽 - 황정음 (9) 1세대 걸그룹 팬픽




                                    부제 : 13인의 탈북자 이야기





 공희갑 장로는 6.25때 월남한 실향민중 한 사람으로 올해나이 82세.(현재시점 : 97년 12월) 그리고 나눔선교회 총무간사 이신애의 아버지인 이성호 목사의 교회에서 20년 넘게 신앙생활을 해온 사람이기도 하다. 신애 아버지는 나이 30대 초반인 그 당시로선 비교적 늦은나이라 할수 있을때 결혼 3남2녀를 낳았고 그 막내가 이성호 목사가 나이 마흔다섯에 본 이신애인것이다. 따라서 신애의 나이 20대 중반인 현재는 이미 칠순을 넘어 현역에서 은퇴해 더 이상 목회활동은 하지 않는 목사로, 다만 공희갑 장로와의 친분은 그 뒤로도 지금까지 유지해오고 있는 상태다. 바로 그 6.25때 월남한 실향민이기도 한 공희갑 장로에서 이신애가 착안해내어 공은아 3자매를 한번 공희갑의 조선족 친척으로 위장 한국으로 들여보내면 어떻겠느냐는 안을 내본것이었다. 사실 공희갑의 경우 6.25때 북에 아내와 아이들을 두고 단신 월남한 실향민이기도 하지만 그후 약간은 좀 남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이기도 하다.

 사실 6.25때 북에 가족을 두고 월남한 실향민의 상당수는 대개 분단이 장기화되면서 남한에서 재혼을 하였다. 하지만 희갑의 경우엔 북에 두고온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재혼도 하지 않은채 나이 80이 넘을때까지 지금껏 혼자 살아온것이다. 6.25때 이미 나이 30대 중반이었던 그는 20대 초반에 결혼한 아내와의 사이에 이미 그 무렵 다섯명의 아이가 있는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공희갑은 집안 형제중에선 10남매중 첫째로 그 밑으로도 무려 아홉명이나 되는 동생이 있었다. 그중 막내동생은 희갑과는 무려 23살 차이로 희갑이 월남한 당시에는 불과 13살이었다. 막내동생은 그처럼 어렸지만 그 외의 동생들중 상당수는 6.25때 이미 20-30대 정도의 나이로 이미 결혼 슬하에 자녀도 이미 두세명 이상 둔 상태이기도 했다. 그러니 희갑은 그렇게 전쟁 당시에 결혼한 동생들의 아이인 조카만도 이미 한 십여명이 넘었다. 뿐만아니라 희갑의 아버지는 8남매중 넷째, 어머니는 7남매중 둘째로 따라서 희갑에겐 삼촌이나 고모,이모 외삼촌도 많았고 친가와 외가쪽으로도 사촌만 각기 20명이 넘었다. 이런식으로 세다보면 사촌이내만으로도 희갑은 북에 두고온 가족이 무려 100명에 이를 판이었다. 희갑의 부모님이야 희갑의 나이만을 고려해 계산해봐도 이미 백살을 훨씬 넘긴 사람들이니 지금껏 살아계실 리가 만무하지만 희갑과 나이차이가 얼마 안 나는 삼촌이나 고모도 몇몇 있긴 했으니 그들이 아직까지 살아있을만한 희망은 아직 접을수 없는일이 아닌가. 그렇게 희갑은 적어도 북에 두고온 가족이 사촌이내로만 무려 백명에 달한다고 할수도 있는 그런 실향민이자 이산가족이다.

 하지만 희갑의 나이 어느덧 82세. 6.25가 있은지 어느덧 47년이 지났고(1997년 12월) 그의 나이도 어느덧 80이 넘은 상태이니 그 역시 과연 살날이 과연 얼마나 남았을지 기약하기 어려운 일이다. 무엇보다 이렇게 하루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면서 북에 두고온 아내와 자식들 그 외 동생과 조카들과 부모님 그 외 친척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하루하루를 눈물지으며 안타까움과 아쉬움으로 보내고 있는 그런 실향민중 한사람이다.

 그런 희갑에게도 북한이 지금 사상 최악의 식량난을 겪고있고 그로인해 수많은 이들이 굶어죽고 대량탈북사태가 발생 수많은 탈북 난민들이 중국땅을 헤마고 있다는 소식은 들려왔다. 비단 희갑뿐만 아니라 대개의 실향민들에게 북한의 식량난이나 대량탈북 사태는 절대 남의일처럼 바라볼수 있는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북에 두고온 고향과 가족,친지가 있는 그네들이 아니던가. 당장 근본적으로 혹여 ‘월남자 가족’이라고 해서 북에 있는 가족들이 어떤 신분상 불이익을 받지나 않았을지 그것부터가 걱정되는판에 거기에 식량난까지 겹쳐지니 그런 상태에서 가족들의 소식은 알수도 없는 상태에서 언론과 방송에 이따금 전해지는 북한의 삭량난과 대량탈북 사태는 그 와중에 자신의 가족친지도 어찌되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아픔이 다른 보통의 남한 사람들보다 한층 더해질수밖에 없는 그런 일이었다.

 바로 그런 공희갑 장로를 찾아온것은 다름아닌 나눔선교회 홍보간사 박현정과 선교회에서 한,중간 연락책을 맡고있는 이은화 자매다. 현재 운남성에 있는 이신애 간사의 아이디어로 한번 공희갑 장로를 설득해서 공은아 3자매를 조선족 친척으로 신분을 가장시켜 한국으로 들여보내는게 어떻겠느냐는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져 그러나 운남성의 신애가 다시 한국까지 오기는 시간이 걸리는 일이니 한국에 있는 현정과 은화가 공희갑 장로를 만나러 간 것이다. 신애의 아버지인 이성호 목사의 안내를 받아 공희갑 장로를 만나게 된 두 사람. 희갑은 자신의 집을 찾은 두 자매를 환대했다.

 “ 어서들 와요. 이성호 목사님 따님의 친구들이라고 ? ”

 처음에 이 둘은 자신들의 신분을 정확히 밝히진 않은채 그저 신애와는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그런 자매들이라고만 말했다. 따라서 그렇게만 알고 대체 이성호 목사의 딸의 친구라는 사람들이 자신을 무엇 때문에 찾아왔단 말인가 의아하고 궁금해한 가운데 두 사람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공희갑 장로에게 자신들이 찾아온 구체적인 사연을 그제서야 밝혔다.

 “ 허어...그런일이 다 있단 말인가 ? ”

 공희갑 장로도 물론 탈북자에 대한 이야기는 언론,방송을 통해 관심을 갖고 지켜봐온 실향민중 한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작년과 금년엔 가족단위 탈북사건이 몇건 발생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 가족탈북 사건의 진상은 재미교포 친척과 서신왕래를 하는 과정에서 탈북을 모의했다는 사실이 나중에 언론을 통해 밝혀지기도 했다. 희갑은 그런 소식을 접하면서 자신도 한번 그런식으로 북에있는 가족들을 탈북시켜보면 어떨까 그 생각을 해보기도 했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직접 진두지휘해서 북의 남아있는 가족들을 탈북시키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너무 무모하고 허무맹랑한 상상이라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근본적으로 자신이 지금 북에 있는 가족들이 어디살며 어찌 되었는지도 모르는판에 무슨수로 그들과 연락이 닿을것이며, 또 설사 닿는다해도 무슨수로 그들을 자신이 탈북시킬수 있단말인가. 사실 공희갑 장로도 나름 실향민으로 남한에서 열심히 살아온 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면서 모아놓은 돈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돈이 과연 가족탈북에 사용할수 있을만한 비용이 될련지는 장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래저래 자신이 직접 북에 가족들을 탈북시킨다는것은 그저 한 늙은 실향민의 주책맞은 상상 - 막말로 이런 이야기를 주변 지인들에게 했다가는 ‘노인네가 이제 진짜 망령이 든 모양이로구나’ 이런 소리 듣기 딱 좋은 - 그런 허무맹랑한 상상에 불과한일일 뿐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있던 공희갑 장로를 찾아와서 운남성에 은신중인 공씨성을 가진 3자매가 한국으로 들어올수 있도록 해달라는 도움을 청하고 있는 나눔선교회 관계자들. 막상 그녀들로부터 구체적인 사연을 듣자 희갑은 놀라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마음이 여러 가지로 흔들리기도 했다. 사실 아무리 실향민이기로 초면의 젊은 자매들이 무작정 찾아와 이런 부탁을 한다면 부담스럽고 난감한 일인것만은 분명할것이다. 하지만 희갑은 자신이 실제 그런 상상(북에 있는 가족들을 자신이 직접 탈출시키는 상상)을 마침 이따금 해오던터라 이러한 도움요청을 하러온 선교회 자매들이 사람의 마음을 묘하게 요동치게 만들었다.

 “ 좋네, 자네들 부탁대로 해줌세. ”

 “ 자...장로님 고맙습니다. ”

 그리 길지않은 시간 고민을 한 끝에 결단을 내린 공희갑 장로에 현정과 은화는 감격해서 어쩔줄을 몰랐다. 그런 두 자매를 보며 희갑은 이와같이 말했다.

 “ 내 비록 생전에 내 북에있는 가족들을 볼수야 없겠지만...그 아이들을 대신해서

  라고 생각하고 그 공 뭐라는 젊은 처자들이 한국으로 들어올수 있도록 기꺼이 돕

  겠네. 으음...조선족 친척으로 신분을 위장시킨다. 뭐...불가능한 스토리는 아니니

  내 기꺼이 해주겠네. 아닌말로 나한테 북에 가족과 친척이 그렇게 많았는데 그중

  한 몇 명 중국으로 도망쳐 연변에서 살고있을 사람이 있을지 어찌 알겠나. 그러

  니 그 아이들을 조선족으로 신분만 위장시켜 한국으로 들여보내면 되는것이라 하

  니 그 정도는 내 얼마든지 흔쾌히 도와줌세. ”

 희갑은 그리고 눈물젖으며 아쉬움이 담긴 탄식을 섞어 말했다.

 “ 그리고 그 아이들이 무사히 한국땅에 들어오게 된다면...사례는 필요없으니...그

  냥 가끔 찾아와서 이 외로운 늙은이 말동무나 해달라고 전해주게. 내...북에 있는

  손녀들이 이 할애비가 보고파 찾아온 것으로 생각하고 - 실제 희갑의 자녀들이

  북에 살아 자손을 보았다면 희갑의 손자,손녀들도 그정도 되는 나이일테니 - 그

  렇게 따스히 반겨줄테니 말일세. 이 살날 얼마 남지않은 늙은이의 여생이 외롭지

  나 않게 그런 말동무나 가끔 해달라고 전해주란 말일세. ”

 


 공희갑 장로가 현정과 은화의 제안에 흔쾌히 응해줌으로 인해 일단 공은아 3자매를 한국으로 들여보낼수 있는 길은 열렸다. 베트남 대사관에서의 망명신청이 좌절된 이후 앞날이 캄캄하기만 했던 나머지 탈북자 열명의 한국행 문제에 조금씩 서광이 비쳐가는 느낌이었다. 일단 공희갑 장로의 경우 북한의 사촌동생중 한명이 이미 연변으로 나와 조선족 자치구에 정착한지가 오래되었고 아들과 손녀들까지 본 것으로 해서 바로 그 손녀들이 공은아 3자매인 것으로 신분을 위장하기로 했다. 그렇게 공희갑의 연변 친척인 것으로 해서 한국으로 들여보내게 된 공은아 3자매. 일단 초청장을 연변교회 주소로 공희갑 명의로 발송한 뒤, 그 초청장을 연변교회 관계자가 운남성 아지트까지 와서 공은아 3자매에게 전해주기로 했다. 경위야 어찌되었던 간에 단 몇사람만이라도 이런식으로 한국행의 길이 열렸다는 점에서 아직 운남성에 탈북자들과 함께 있는 선교회 간사들(최수정,이신애,이부영)과 정현우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어쨌든 다행이에요. 일이 이렇게 잘 진행되어서. 무엇보다 공희갑 장로님께서 이

  제안에 흔쾌히 응해주신게 정말 감사드려야할 일이고요. ”

 신애는 무엇보다 자신의 제안이 먹혀들어간것에 뿌듯해하고 있었다. 사실 처음은 신애의 아이디어가 좀 황당한 느낌도 들어서 최수정등 다른 간사들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었다. 게다가 그때까지만 해도 탈북자가 공은아 3자매뿐만 있는게 아니지 않았는가. 그러니 공은아 3자매는 그렇다치고 다른 탈북자 문제는 어떻게 할것인가 하는 점 때문에 신애의 아이디어는 처음엔 대체로 부정적 기류가 우세했다. 하지만 이렇게 공희갑 장로가 이 제안을 받아들임으로 인해서 상황은 반전되었다.

 “ 그것봐요. 제가 뭐라고 했어요. 이런식으로라도 해야 길이 트일것이라고 했잖아

  요. ”

 “ 그래요, 지금 생각해보니 신애자매가 참 좋은 아이디어를 내놓았던것 같네요. 수

  고 많았어요 신애자매. ”

 “ 제가 뭘요. ”

 정확하게 공희갑 장로를 찾아가 그를 설득한것은 한국에 있는 이은화 자매와 박현정 간사(나눔선교회 홍보간사)이니 이신애가 특별히 한 일은 없다고 보는게 정확할것이다. 하지만 여하튼 처음 신애가 내놓은 아이디어대로 된 것이니 신애도 뿌듯해하고 다른 간사들도 신애를 새삼 다시보게 된 것이다. 여하튼 그렇게 세 사람을 한국으로 부르는 공희갑 장로의 초청장이 도착을 했고, 공은아 3자매의 한국행이 본격적으로 시도되었다.

 혹시나 상황이 모르니 만의하나 발생할지 모르는 돌발상황을 대비해 이신애 간사에게 이들 3자매와 동행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어차피 이들 탈북자들을 한국으로 들여보내고 난 뒤 다른 간사들도 현우도 한국으로 들어가야할 사람이니 그렇게 운남성으로 나와있던 간사들도 하나하나 귀국하는 것으로 함께 조치를 취한것이다. 덕분에 처음 탈북자 열명에 선교회 관계자 네명까지 열네명으로 북적거렸던 운남성 아지트의 식구도 하나둘 줄어드는 분위기였다. 최수정 간사의 경우 이때 이종혁 4총사의 한국행 여객선 표를 구하기 위해 천진항으로 가있는 중이다.

 “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정말 어떻게 갚아야할지... ”

 운남성에서 북경까진 또 어차피 60시간의 기나긴 기차여행을 해야하는 터. 그 동행길에서 공은아 3자매는 몇 번이고 신애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다. 사실 어쨌든 아직까진 중국땅이니 기차안에서라도 탈북자 신분이 발각되면 큰일인지라 신애는 공은아 3자매에겐 너무 불필요한 이야긴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중국에 어차피 한국인 관광객도 많은터이고 조선족이라고 해서 다른지역 여행을 하지 말란법도 없는법이니 그렇게까지 크게 의심을 살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60시간의 제법 긴 기차여행이다보니 혹시나 모르는 돌발상황에 대해선 조심을 해야했다. 하지만 어느덧 기차가 북경까지 다 와가고 2박3일의 기차여행도 어느덧 마무리 단계가 되어가는 시점에서 신애는 공은아 3자매에게 꼭 좀 하고픈말이 있는지 밤시간 다른 승객들은 대개 잠이 들어있는 틈을 이용 조심스레 이야기를 나누었다.

 “ 헌데 세분께 제가 좀 꼭 묻고 싶은말이 있어요. ”

 무슨말을 하고 싶은것인지 공은아 3자매가 의아하게 신애를 바라보는 가운데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 저희가 이렇게 인도적인 차원에서...혹은 정말 주님의 부르심과 명령에 따라 여

  러분들을 한국땅에 들여보내 더 이상 이런곳에서 중국공안에 쫒기거나 북한으로

  끌려갈 걱정이나 우려없이 마음 편하게 살수 있도록 도와드리고 있는것이긴 하지

  만... ”

 “ ...... ”

 “ 여러분 마음속에 과연 확실하게 하나님이 들어있는것인지 그건 아직 제가 확신

  이 안 서거든요. 그래서 그 말씀을 드리는거에요. ”

 어쨌든 나눔선교회는 선교단체고 신애도 원래는 북한선교에 비전을 갖고 기도하던 그런 자매다. 무엇보다 목사님 딸로 그런 신앙적 환경에서 자라다보니 신애의 사고와 가치관은 아무래도 하나님이 중심이 될수밖에 없다. 따라서 신애로선 바로 그런 방면에 대한 걱정과 우려가 앞서는거에요.

 “ 실제 성경에도 그런 예화가 있거든요. 하나님의 도움으로 병이 나은 열명의 형

  제가 있었는데 처음엔 다들 그런 병을 고쳐준 하나님께 감사드리더니 그 병이

  다 낫고 난 뒤에 하나님을 찾아온 사람은 딱 한명밖에 없었다는. 솔직히 그런

  방면에서 제가 여러분들의 이후를 걱정 안할 수가 없네요. ”

 실제 성경에 그런 예화도 있지만 확실히 아무래도 모르는 일이다. 이들 탈북자들은 그야말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자신들을 숨겨주겠다는 그런 교회 목사가 있자 그야말로 갈곳잃은 새나 어린양이 찾아드는 그런 심정으로 임시로 몸을 피신했던 것으로 보는것이 정확할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교회가 뭔지 신앙이 뭔지 제대로 알길이 없었을 이들 3자매. 어찌되었거나 그 소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들 3자매의 한국행까지 이루어진것이라는게 논리적으로 충분히 성립되는 이야기지만, 공은아 3자매가 비록 자신들의 생명과 처지가 위태롭고 절실했을때는 하나님을 찾았을지언정 막상 한국땅으로 들어간뒤엔 생각이 어찌 바뀔지 모르는것 아닌가. 신애는 지금 그 걱정을 하는중이다.

 “ 저희는 뭐 남조선에 들어가면 그저 저희를 이렇게 도와주신 선생님들께 보답

  하기 위해 정말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그 마음뿐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저희가

  열심히 돈 벌어서 저희를 도와주신 선생님들의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

 사실 북한사람들에겐 장래희망이라던가 이런 개념이 없다. 과거 햇볕정책이 한창일때 이런저런 북한 응원단이라던가 교예단,어린이등이 한국을 방문했을때 그 인터뷰를 많이 본 사람들이라면 기억할것이다. ‘장차 뭐가 되고 싶느냐 ?’는 식의 질문을 기자들이 하면 뭔가 난감한듯 살짝 말을 돌리곤 하던 그네들의 모습을. 출신성분이라는 어찌보면 봉건사회보다 더 지독한 철저한 신분제 사회로 움직이는 북한체제이다보니 그런 체제하에서 나고자란 사람들에게 ‘장차 커서 뭐가 되고 싶다’느니 ‘장래에 어떤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다’느니 이런 개념은 생겨날수가 없다. 물론 군대에 갖다온다던가 당원이 된다던가 하는식의 북한식의 출세할수 있는 방도가 있긴 있는것이니 그런쪽으로 나가겠다는(군대에 다녀오면 더 이상 신분상 불이익을 안 받는다던가, 당원이 되면 출세할수 있다던가) 그 정도의 ‘자아의지’는 있을수 있어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개념의 장래희망이나 미래계획 같은것은 존재할 수가 없다. 바로 그런 사회분위기에서 나고 자란 공은아 3자매라서인지 그저 자신들을 도와준 선교회 관계자들에게 ‘은혜를 갚겠다’는 말만 거듭 반복할뿐 그 외 자신들의 구체적인 미래계획에 대해선 거의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다 보니 신애와 공은아 3자매의 대화는 뭔가 초점이 맞지 않고 자꾸 어긋나는 느낌마저 든다. 따라서 신애는 ‘우리에게 감사하지 말고 하나님께 감사드리라’는 말만 거듭 입에 담은채 대화를 마무리한다. 어차피 이런식의 대화를 기차안에서 너무 오래 깊이있게 나눴다간 진짜 신분이 발각되는 위기가 발생할수 있으니 이런 이야기는 너무 구체적으로 하지 않는게 좋다. 그 사이 어느덧 새벽하늘이 밝아오고 있었고 기차도 북경역에 당도하고 있었다.

 북경공항에서 신애는 공은아 3자매와 함께 비행기를 탔다. 한국인 친척의 초청을 받은 조선족 여행객이라고 하니 공항당국에선 아무도 의심을 하지 않았다. 신애야 당연히 한국사람이니만큼 그녀를 의심할 이유는 더더욱 없고. 신애는 공은아 3자매와는 연변에서 절친하게 지내던 동료사이인양 신분을 위장하자 북경공항 당국은 아무런 의심없이 이들을 모두 비행기에 탑승하도록 해 이렇게 공은아 3자매의 한국행 시도는 성공리에 마무리되었다. 김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신애는 입국수속을 밟기전에 공항 관계자에게 공은아 3자매가 사실은 탈북자임을 밝혔고 그 말을 듣자 공항측에선 관계당국에 연락을 취해 이들을 그쪽으로 인계했다. 이때만 해도 중국에 있는 탈북자의 한국 입국 사례가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던 시절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럴때를 대비한 매뉴얼은 갖추어 있는듯했다. 신애는 운남성 아지트에도 공은아 3자매가 무사히 한국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알렸다.





 공은아 3자매의 한국행이 무사히 이루어졌을때쯤, 이종혁 4총사를 한국으로 들여보낼 배편 표도 구했다는 소식이 천진(天津)항에 나가있는 최수정으로부터 전해졌다. 이렇게해서 베트남에서 한국행이 좌절된 탈북자 열명중 운남성 아지트에서 도주한 두명을 제외한 나머지 탈북자들의 한국행이 거의가 다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연변교회에서 은신중인 13인의 탈북자를 처음 베트남 대사관에서 한국 망명을 신청하려 했을때는 임산부와 10세 어린이가 포함된 국군포로 2세 가족 3명의 망명만 받아들여지고 나머지 열명은 속수무책으로 쫒겨나 운남성에 다시 임시 아지트를 마련하고 이곳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게 되었을때는 그야말로 앞으로의 일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다들 눈앞에 캄캄해질 지경이었는데, 이제 일이 이런식으로 하나하나 성사되는것을 보고 다들 조금씩 희망의 빛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 사이 해도 바뀌어 어느새 1월말이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그 사이 한국에선 엄청난 정치적 변동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바로 97년 대선에서 야당의 유력 대선후보인 김대중 후보가 4수의 대선도전 끝에 당선되어 실로 50년만의 여야간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그런 상황이었다. 이 극적인 상황에 어떤이들은 잔뜩 흥분되고 어떤이들은 환호하기도 하고 반대로 어떤이들은 불안해하거나 술렁이기도 하거나 적어도 국민 대다수가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일이나 다름없을 이 여야간 정권교체란 상황에 아직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때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IMF 경제위기’를 극복해야하는 상황이란점에서 만큼은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때인지라 그래도 어느정도는 차분하게 정권교체의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다만 정현우나 중국에 나와있는 나눔선교회 간사 세명(이신애,최수정,이부영)은 97년 대선에 투표에 참여할수는 없었다. 바로 그때가 13인의 탈북자 한국행을 추진중으라 한참 정신없이 바쁠때였으니까. 우선 현우가 이은화의 안내를 받아 연변교회로 가게된게 10월말의 일이고 이들을 베트남 한국대사관으로 데려가 망명신청을 하려한게 11월 중순의 일. 하지만 그 베트남 대사관에서의 망명신청에 세명만 받아들여지고 열명은 쫒겨나 운남성 아지트에 재결집한게 11월 말의 일이다. 그리고 한달동안은 거의 속수무책인 상황으로 있다가, 일단 신애의 제안을 받아들여 공희갑 장로란 이를 설득해서 그의 조선족 친척으로 해서 공은아 3자매를 한국땅으로 들여보내기로 하는게 결정된게 12월 말의 일이다. 하지만 그 과정의 처리도 한달 가까이가 걸리는 일이었기에 그 사이 해가 바뀌어 1월말이 되어있는것이다. 무엇보다 현우와 나눔선교회 간사 3인방은 바로 이러한 탈북자들의 한국행 문제에 한참 정신이 없는때라 그와같은 한국의 정치적 상황변동은 물론 소식 자체야 들어 알고 있겠지만 아직은 그것을 피부로 실감하고 있지는 못한때였다.

 다만 여하튼 현우가 중국으로 들어온지 석달만에, 그리고 베트남에서의 한국행이 죄절되고 운남성 아지트에 열명의 탈북자가 재 은신을 하게된지 두달만에 중간에 도망한 두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여덟명중 대다수의 한국행이 이와같이 순조롭게 성사되고 있는 중이었던것이다. 그러는 사이 운남성 아지트의 식구도 당연히 대폭 줄어들었다. 처음 34세 정모와 45세 허모가 도망했을때 열명의 탈북자가 여덟명으로 줄었을때만 해도 그렇게 사람이 준 느낌을 받진 못했는데, 공은아 3자매가 이신애 간사의 도움을 받아 북경공항으로 떠나고 최수정 간사가 천진항으로 이종혁 4총사가 탈 배 표를 구하기 위해 떠난 직후엔 여자방의 경우 사람은 어느덧 선교회 전략간사인 이부영과 일곱 살 꼬마 아라 두명밖에 남지 않았다. 아라도 그 사이 한 살을 더 먹어 여덟살이 되어있긴 하지만 여하튼 여자방은 이제 성인여성 한명과 어린아이 한명이 비교적 여유롭게 공간을 쓸수있는 상황이 되어 있었고, 남자방은 정현우가 이종혁 4총사를 최수정 간사가 배표를 사서 기다리고 있는 천진항까지 데리고 가기로 했기 때문에 이들마저 떠나면 남자방은 아예 텅빈방이 되어버리는것이다. 이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해준 나눔선교회 후원이기도 한 한국인 사업가는 이종혁 4총사와 정현우가 떠나기로 되어있는 전날밤 찾아와 시원섭섭함을 달래기도 했다.

 “ 그래도 생각보다 일이 순조롭게 빨리 진행된 기분이네요. 난 또 처음엔 이 사람

  들을 대체 언제까지 내가 데리고 있어야 하는것인가...그 생각에 순간 막막하기까

  지 했었는데. ”

 원래 이 집은 이 한국인 사업가가 비상시에 연락사무실이나 개인용도 정도로 쓰기위해 사놓은 작은 집이라고 했다. 헌데 이런곳에 졸지에 열명의 탈북자와 한국인 간사등 네명까지 받아들여 살게 되었으니 그때는 아무리 호의로 이런 공간을 제공해주는 사업가이기로 기가막힌 심정만은 어쩔수가 없었을것이다. 무엇보다 이들 탈북자들이 연변에서 이미 1년 이상 은신해있던 사람들이란것을 알고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자신도 그렇게 마냥 1년이고 2년이고 이들을 데리고 있어야 하는것인가 하는 생각에 처음엔 눈앞이 캄캄해지기까지 했었다고 한다.

 “ 여하튼 이렇게 무사히 한국행길이 열렸다니 천만 다행입니다. 다들 무사히 한국

  으로 들어가길 바라고요. 들어가거든 부디 한국에서 행복하게 그리고 중국에서처

  럼 공안에 쫒기고 숨어사는일 없이 마음 편하게 잘 살기 바랍니다. 간사님도 조

  심해 들어가시고요. ”

 사업가는 정현우도 선교회 간사로 알고 있었는지 그에게까지 ‘간사님’이라 불렀다. 뭐 어차피 그런 문제를 굳이 따지거나 할 상황은 아닌지라 현우야 현우대로 쑥스러운 마음은 가슴한켠에 간직한채 그냥 그런식의 호칭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음날 현우는 이종혁 4총사와 함께 운남성에서 기차를 타고 60시간의 기나긴 북경까지의 여행을 시작했다. 운남성에서 북경까지가 어쨌든 기차로 사흘정도는 걸리는 시간이기 때문에 시간을 넉넉히 잡기위해 수정이 사놓았다는 배표 날짜보다 닷새전에 이곳에서 출발을 한 것이다. 수정과는 그녀가 직접 북경 기차역까지와서 함께 이종혁 4총사를 천진항으로 데리고 가기로 했다.

 “ 저어...근데 형님. ”

 연변에서부터는 어느덧 두달 반 이상, 심지어 운남성 아지트에서는 한 방을 쓰며 두달을 보내 그 사이 익숙해져서일까. 이종혁 4총사는 현우를 언제부터인가 ‘형님’이라 부르고 있었다. 현우도 뭐 그런식의 호칭이 싫지는 않았다. 이종혁이 그대로 나름의 호기심을 담아 어찌보면 살짝 무슨 의문이라도 품고있는 사람처럼 묘한 말투로 현우에게 물었다.

 “ 형님도 그럼 남조선에서 하나님을 믿으며 쭉 살아오신것입니까 ? ”

 다른 은신처 탈북자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이종혁 4총사가 이곳에 와서 만나본 남한사람들은 대개 연변교회 관계자이거나 나눔선교회 관계자들일것이다. 그리고 선교활동 같은데 나설정도인 사람들은 대개 신앙연륜이 오래되거나 깊은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그런 사람들과 주로 접촉하다보니 이들은 남조선 사람들은 모두 연변교회나 나눔선교회 관계자들처럼 굉장히 독실한 신앙인인 것으로 알게된것일까. 대략 한 고등학교때부터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이유로 가끔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그런 현우이긴 하지만, 구체적인 사연을 이들 앞에서 토로하긴 복잡한지 손을 내저으며 묘한 미소를 짓는다.

 “ 아...아니 뭐 꼭 그런건 아니야. 물론 나도 교회 다니는 사람이긴 하지만... ”

 “ ...... ”

 “ 다만 너희들을 이렇게 만난게 진짜 어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던가 아니면 어떤

  인연은 아니었을까 그 생각은 하는중이었다. ”

 “ 인연이요 ? ”

 ‘인연’이란 말의 뜻을 북한출신인 이종혁 4총사가 제대로 이해할수 있을까. 어쩌면 실제 그런 말뜻을 잘 몰라서 그러는것인지 잘 이해가 안간다는듯 4총사가 현우를 바라보고 현우가 그런 이종혁등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만 들려준다.

 “ 사실 난 중학교때 반공드라마를 써본적이 있어. 하하...직접 작품으로 세상에 발

  표했거나 그런건 아니고...그냥 원래 그때부터 북한문제에 관심이 좀 생겨서...그

  냥 나 나름대로 학교에서 들은 반공교육이라던가 또는 기타 책이나 신문,잡지 자

  료등을 참조해가면서 쓴 60회짜리 ‘라디오 드라마’가 있거든. ”

 대체 이게 무슨소리인지 이종혁 4총사는 나름대로 호기심을 갖고 현우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는 가운데 그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 그러고보니 우연치곤 좀 묘하다는 생각이 들긴한다. 거기에서 주인공들이 사는

  배경도 청진으로 정했거든. 뭐...그냥 우연의 일치겠지만...그때도 막연히 그런 이

  야긴 들었어. 북한에서 평양 다음으로 큰 도시가 청진이라는...그래서 대충 그 정

  도 도시를 배경으로 내 나름대로의 상상을 곁들여 드라마를 만들어본거지. ”

 “ ...... ”

 “ 그 드라마 결말이 주인공들이 배를 타고 북한을 탈출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된

  다. 그땐 ‘탈북’이란 말은 아직 생기지 않았을때지만 그땐 탈북자라기보단 귀순자

  란 말을 더 자주 썼지. ”

 현우는 새삼 그때 드라마를 쓸때의 감회가 떠올려져서인지 나름 묘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그런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살짝 눈물이 고이는것 같기도 하다.

 “ 사실 그 드라마 결말을 비극으로 할까 해피엔딩으로 할까 많은 고민을 하다가

  주인공들이 배를 타고 북한을 탈출했지만...그 배가 쭉 남쪽으로 흘러가다 실종

  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는데... ”

 “ ...... ”

 “ 솔직히 지금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이렇게 너희들을 직접 대면하면서 그때 내

  가 썼던 드라마속 주인공들을 직접 현실에서 만나는것 같은 기분이 든다. ”

 현우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말을 이어간다.

 “ 하지만 그 드라마속 주인공들은...남쪽으로 흘러가던 배가 실종되는 것으로 해

  서 비극도 아니고 희극도 아닌 애매한 결말로 마무리 지었지만... ”

 “ ...... ”

 “ 지금의 이야기는 비극이 아닌 해피엔딩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



- 10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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