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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대 걸그룹 팬픽 - 황정음 (5) 1세대 걸그룹 팬픽




                                    부제 : 13인의 탈북자 이야기





 은신처에 있는 13인의 탈북자중 이종혁 4총사는 아직까지는 그저 목사님을 자신들을 숨겨주는 고마운 분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고, 공은아 3자매의 경우엔 이곳에서 살면서 목사님이라던가 남한 사회를 조금씩 알아가게 되면서 ‘차라리 남조선으로 가는게 낫지 않을까 ?’ 하는 정도로 생각이 흔들리고 있는 단계였다. 하지만 이 둘에 이어 세 번째로 면담을 갖게 된 두 사람의 경우는 또 달랐다. 세 번째로 현우가 인터뷰를 하게 된 사람은 함북 회령출신의 34세의 농민이었던 정모씨와 새별군에서 왔다는 45세의 허모씨라는 남자였다. 이중 34세의 정모는 식량난으로 아내와 일곱 살난 아들을 잃고 더 이상 이대로는 있을수가 없어 탈북을 감행한 사례다. 헌데 그 아내와 아들을 잃게된 경위 자체가 기가막혔다.

 먼저 굶주림과 병으로 아내가 죽어가고 일곱 살난 꼬마 아들이 열흘이 넘도록 아무것도 먹지못해 기진한 상태로 방에 누워만 있었다. 그 모습을 차마 두고볼수만은 없어 자신도 버틸수 있는 기력이 별로 없는 상태였지만 밖으로 나가 무엇이라도 먹을것을 구해보고자 헤매다녔다. 그러다 어느 당간부집 쓰레기통을 뒤져 먹다남은 음식 찌꺼기 몇조각을 겨우 구해왔다. 헌데 그렇게 어렵사리 먹을것을 음식 찌꺼기일지언정 주워왔건만 이미 열흘을 굶은 일곱 살 꼬마아이는 그런 아버지를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하다 아버지가 구해온 음식은 먹어보지도 못한채 바로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정 모씨마저 그 기가막힌 상황에서 그마저도 탈진한 상태에서 울지도 못한채 바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 정모는 사흘만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깨어났는데 그때까지도 아내와 아이는 죽은 시신이 되어있는 상태로 방에 누워있었다. 정모는 가까운 개울가에 가서 물배라도 채운 몸으로 겨우 정신을 수습한뒤 아내와 아이를 가매장상태로 땅에 묻은뒤 가까스로 북한을 탈출한 것이다. 그리고 한동안은 조선족 마을에 은신해 살고 있었다. 그곳에서 겨우 먹을것을 주어 정모는 살아날 수 있었지만 그렇게 죽어간 아내와 아들로 인해 한동안은 눈물이 마를수가 없었다. 헌데 정작 그 정모가 그곳에서 알게된것은 이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세상이었다.

 정모를 숨겨준 조선족 가족은 그 동네에서 어느정도 사는 집안이었는데 무엇보다 고급 TV를 통해 남한 드라마라던가 뉴스를 수시로 시청하곤 하는 그런 가족이었다. 중국이나 연변방송보다 남조선의 KBS나 MBC에서 하는 방송프로들이 훨씬 재미있더라는게 그 조선족 가족의 이야기였다. 정모는 처음엔 드라마나 이런것을 보았을때는 ‘저거야 다 꾸민 이야기겠지’ 하고 반신반의했으나 그 무렵 남한에는 가족단위 탈북사건이 하나 터져 온 나라가 시끌벅적할 때였다. 정모는 연변 TV를 통해 제공되는 남한 공영방송의 뉴스를 통해 그 가족단위 탈북사건과 그로인해 떠들썩한 남한사회 분위기를 알게되었고, 그 뉴스를 보면서 ‘혹 나도 남한으로 가면 저렇게 환영받고 잘살게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갖게된 것이다.

 하지만 일단 그 희망의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 무렵 공안의 대대적인 탈북자 단속이 벌어졌던것이다. 정모는 자신을 지금껏 숨겨주었던 마음씨 좋은 조선족 가족에게 폐를 끼칠수가 없어 그 무렵 간단한 사례비와 편지를 남긴채 그곳에서 달아나버렸다. 그리고 작년 연말경에 바로 이 연변교회로 숨어들어와 은신을 하게 된 것이다.

 한편 새별군에서 탈출했다는 허 모의 경우엔 조금 더 남다른 사연을 갖고 있었다. 일던 허모는 탈북 직전까진 새별군에서 살았지만 본래는 평양에서 그것도 군사정치대학을 나온뒤 군 정보기관에서 한참 잘 나가고 있던 40대의 고위 장교였다. 헌데 그런 허모에게 언젠가부터 주어진 임무가 몰래 남한방송을 듣는 북한주민을 단속하는 일이었다. 원래 북한 TV나 라디오는 기술적으로 남한이나 외국 방송을 들을수가 없으나 잘사는 사람이나 일반주민 같은 경우에 호기심 삼아 그 TV나 라디오를 뜯어고쳐 흥미나 재미로 남한방송을 청취하는 경우가 그때도 간혹 있었다고 했다. 다만 이때까진 TV보다는 몰래 라디오로 남한 방송을 듣는 경우가 더 많았는데 여하튼 원래 허 모는 그런 남한 라디오를 듣는 사람들을 단속하는 업무를 맡았는데, 오히려 그러다 호기심이 생겼다고 했다. 그래서 압수해온 남한 라디오를 들을수 있게 되어있는 라디오를 집에 갖고 들어가 종종 흥미삼아 들어보곤 했다는것이다.

 헌데 허모가 라디오를 들으면서 가장 이해 안 갔다는것은 남한 라디오의 아침 여성대상 교양방송과 드라마등이었다고 한다. 가령 아침에 하는 일부 남한 라디오의 어느어느 교양프로에는 주로 젊은 주부들이 이런저런 자기 사는 모습을 보낸 그런 사연들이 방송이 되곤 하는데, 듣다보니 남한에 ‘여행의 자유’가 있나보다 하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우선 젊은 주부들이 보내는 라디오 사연에 보면 ‘남편과 싸우고 속상해 친구들과 스트레소 해소겸 어디로 여행을 떠났다’느니 ‘남편과 사소한 불화 끝에 화가나서 OO에 있는 친정집에 한동안 가 있었다’느니 이런식의 이야기가 종종 나오곤 하는데, 여행증이 있어야 타 지역으로 이동이 가능한 북한주민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들이더라는 것이다. 또 드라마에서도 그런 교양프로 사연과 마찬가지로 실연당한 여주인공이나 아니면 남편과 싸운 젊은 아내가 혼자 속상해서 어느 바닷가를 거닌다던가 하는 그런 내용이 방송되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이 역시 남한에 ‘여행의 자유’가 있다는것을 있는 그대로 증명해 주는것이 아니던가.

 그런 부분도 흥미로왔지만 무엇보다도 허모는 그런 남한 라디오 교양프로에 젊은 주부들이 보내는 사연이나 주로 젊은 남녀나 부부간의 트러블이나 치정싸움 같은것을 다루는 남한 라디오 드라마들이 무척 재미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가끔 공책에 그런 남한 방송에 나오는 사연들을 베껴적어서 그것을 주위 친구들에게 보여주며 돌려보기도 했다는것이다. 심지어 나중엔 책자 비슷한 형식으로까지 만들어 그것을 팔기까지 했다는데, 그러다 그 행동이 적발된것이다.

 허모가 무슨 반정부 쿠데타 음모라도 꾸민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슨 북한체제를 비난하는 운동 같은것을 한것도 아닌데, 단지 남한 라디오 방송을 듣고 그 내용을 베껴 책으로 만들어 주위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팔았다는것만으로도 허모는 간첩에 반역혐의를 뒤집어썼다. 다만 허모의 군사대학시절 선후배들이 군 정보당국 요직에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원래는 극형에 처해질 일이었으나, 군사대학 시절 선후배들의 도움이 있어 그나마 처형을 당하거나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가는 신세는 면하고 다만 함경도의 머나먼 새별탄광으로 온 가족이 추방되는 것으로 처리되었다는 것이다. 단지 남한 라디오 방송을 듣고 그 내용을 베껴적어 책으로 만들어 팔았다는것만으로도 온 가족이 산간벽지로 추방될 수가 있다니. 참으로 기가막힌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기가막힌 노릇은 그 뒤를 이어 계속 일어났다. 다름아닌 아내가 추방당한 충격으로 인해 새별탄광에서의 생활을 한달을 더 버티지 못하고 자살해버린것이다. 근본적으로 허 모가 원래는 평양에서 한참 잘 나가는 군 정보당국 장교였고 따라서 그 아내 역시 대체로 중상층(中上層) 정도의 삶은 영위해가며 무엇보다 앞으로 남편이 더 출세해 잘먹고 잘살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있던 그런 여자였을것 아닌가. 그런데 그런 희망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온 가족이 새별탄광으로 추방된것만으로도 얼마나 기가막혔겠는가. 게다가 얼마전까지만 해도 손에 물한방울 묻힐 일이 거의 없었던 허모의 아내는 새별탄광에서의 열악한 생활을 한달을 더 견디지 못하고 그만 자살로 생을 마감해버린 것이다.

 아내의 그와같은 죽음으로 인한 충격. 그리고 무엇보다 아내에 대한 미안함을 지울길이 없었던 허모는 그나마 남아있는 세 아이와 함께 탈북을 시도했던 것이다. 아내는 비록 그렇게 세상을 떠났지만 아내와의 사이에 낳은 세상에 남겨진 세 아이를 언제까지 이런 상태로 놓아둘순 없다고 생각한것이다. 무엇보다 아무래도 남한이 잘살고 자유가 있는것만은 확실해보이니 그리로 가보자는 생각을 한 것이다.

 하지만 허모의 탈북은 두만강을 건널때 그만 국경경비대에 적발된것이다. 사실 대량탈북 사태가 일상화 되면서 국경경비대도 그런 탈북에 손을 놓은것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는데 그걸 감안한다면 허 모 가족은 그야말로 ‘재수없게 걸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사례였다. 국경경비대 총격을 피하기 위해 뿔뿔히 흩어져버린 허모와 아이들. 그래서 일단 아이들은 그렇게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허 모 자신부터 두만강을 건널때 총을 맞아 그 통증을 견디기가 힘들어 두만강을 겨우 다 건너고도 조선족 마을까지 다 도착하기 전에 쓰러져버렸다. 어쩌면 그대로 죽을수도 있었던 일인데, 마침 그곳에 와 있던 연변교회 목사의 아내가 그 모습을 발견한것이다. 탈북자임을 직감한 목사 사모는 바로 사람들을 부르고 구급차를 불러 병원으로 이동시켰다. 병원에는 일단 탈북자란 사실을 숨겨야겠기에 사모는 ‘자신이 아는 조선족’이라고 둘러대었다. 여하튼 일단 그렇게 45세의 허모는 목숨을 건질수가 있었고 역시 그 뒤에 이곳 연변교회에 숨어들어와 살게된 것이다.





 허모와 정모의 경우는 그렇게 남한 방송도 접해보고 또 이곳 연변교회에 와서도 남한사람들을 접해보니 남한이 더 잘살고 자신들도 그곳으로 가면 더 잘살고 대우받을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희망을 갖고 남한행을 확실하게 희망하고 있는 중이었다. 다만 이종혁 4총사나 공은아 3인방의 경우는 아직은 마음이 다소 흔들리고 있는 상태였다. 이들은 애초부터 탈북한 이유가 허모나 정모처럼 남한을 염두에 둔 탈북행이 아닌 연변에 가서 돈을 벌면 잘살게 될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때문. 따라서 이곳 연변교회에 은신해 들어오기전까지는 남한행은 꿈도 꾸지 않고 있었으나 이렇게 한국인 출신 연변교회 목사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게 되고, 또 직접 남한 사람들도 계속 만나보게 되면서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중이었다. 무엇보다 이들의 마음이 흔들리게 된 데는 어느덧 이들과 1년 가까이 은신처에서 생활하면서 허모와 정모가 이들에게도 ‘차라리 남한으로 가는게 어떻겠느냐 ?’고 자신들이 남한 방송을 통해 보고 들은것을 직접 이야기해주며 설득한것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만약 이종혁 4총사나 공은아 3자매등이 남한 사람들을 직접 접촉해보지 못한 상태에서 허모나 정모의 이야기를 들었다면 반신반의 했을것이나 이들도 직접 이곳에서 가끔 단기선교차 방문하는 남한사람들이라던가 연변교회와 관계되어있는 이런저런 남한 사람들을 이따금 접해보게 되면서 남한 또는 남조선이 지금껏 북한에서 들었던 ‘헐벗고 굶주린 사회’는 분명 아닌 근본적으로 사회 자체가 북한과는 뭔가 많이 다른곳인가보다 그 정도의 생각까진 하게 된 것이다.

 한편 현우의 입장에서 13인의 탈북자와 직접 면담,인터뷰를 하게 되면서 가장 잊을수 없는 사례는 네 번째 인터뷰 대상이면서 일곱 살 꼬맹이 김아라(여)를 제외하면 사실상 마지막 인터뷰 대상자였던 30대 중반 부부 가족이었다. 처음엔 그저 이종혁이나 공은아등과 별반 다를바 없는 평범한 탈북자로 생각했던 이 가족이 뜻밖에도 국군포로 2세 가족이었던 것이다.

 “ 아버님이 그러니까 북한에 국군포로로 40년 넘게 억류해 계셨단 말씀이십니까

  ? ”

 정확히 30대 중반의 남자 최 모. 그의 아버지 최상기가 원래 고향은 충남 OO군으로 6.25때 참전 OO전투에서 포로로 잡힌뒤 지금껏 북한에 억류되어 살아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남자의 아버지 최상기는 이미 3년전 세상을 떠났고, 그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유언을 남겼다는 것이다. ‘자신이 국군포로이고 고향이 남쪽이니 너희들은 가서 꼭 남한에 있는 친척들을 만나뵈라’는. 최상기의 유언에 의하면 그는 남한에 있을때 형제관계가 1남4녀중 셋째로 위로 누나 둘, 아래로 여동생 둘이 있는 외동아들이었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은 2대독자로 귀한 자손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6.25 전쟁이 터지자 젊은 혈기에 그냥 그 난리를 눈으로 보고만 있을수 없어 자원 입대하였고, 하지만 포로가 되어 40년 넘게 북한에서 살다가 물론 그곳에서 결혼도 하고 아들도 이렇게 하나 낳았지만 정작 최상기 본인은 3년전인 1994년 봄에 60대 중반의 나이로 한많은 생을 마감하였다는 것이다.

 “ 저희 아버지 생전 남기신 유언이...그래서 너희도 살아서 꼭 남조선으로 가서..

  .아...아니 남한으로 가서 꼭 고모들과 할아버지,할머니를 만나뵈라는 것이었단 말

  입니다. 이미 돌아가셨거든 산소라도 찾아 뵙고...그래서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

  상태에서 그 아버지는 산에 묻어 드린뒤 북조선 상황이 점점 안 좋게 돌아가다보

  니까 아버지의 유언도 받들겸 그래서 아내와 아이와 함께 탈북을 시도한 것이

  란 말입니다. ”

 바로 그래서 국군포로 2세라는 30대 중반의 최모는 아내와 그리고 열 살난 아들 그렇게 세식구가 함께 이곳에 은신을 하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바로 그러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남한행 의지는 그 누구보다도 확고하였다. 최모는 별도로 이곳 목사님에게 남한의 친척들을 만나보거나 연락이 닿을수 있게할수 있는지 그 부탁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생전 일러준 고향 집주소까지 알려주면서.

 “ 이부영 간사가 그러잖아도 서울에 가면서 그 일도 함께 알아보고 있는 중입니

  다. 그저 좋은 소식이 들려오기만을 바랄뿐입니다. ”

 이부영은 다름아닌 나눔선교회 전략간사. 최수정과 이신애의 말로는 이부영 간사가 본격적인 이들의 남한행 전략을 짜기위해 연변교회로 오고 있다는데, 그 이부영이 최상기의 아들 가족의 남한 친척을 찾아보는 일까지 맡아 서울로 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현우는 그 이부영 간사를 만나볼수 있게 되었다.

 “ 그런데...이부영이라고요 성함이 ? ”

 이부영 간사가 서울에서 연변교회로 돌아온것은 현우의 13인 탈북자와의 면접 인터뷰가 거의 마무리될 시점이었다. 부영이 도착하자 목사와 수정,신애등은 그 이부영 간사도 현우에게 소개를 시켜주었고 하지만 이름 때문에 좀 묘한 기분이 들어서 현우가 짓궂게 한마디 했다.

 “ 그...야당 국회의원 이부영이라고 있잖아요. 그런데 그분과 이름이 같네요. ”

 “ 네, 맞아요. 근데 뭐 그래서 잘못된거라도 있나요 ? ”

 부영은 별로 불쾌한 기색은 없이 쓰윽 미소까지 지어보이며 현우에게 물었다. 그리고 되려 그녀가 사뭇 재미있는 에피소드라도 된다는듯 되려 자랑스레 한마디 늘어놓기까지 했다.

 “ 그러잖아도 친구들도 가끔 그렇게 놀려요. 야 !!! 이부영은 그렇게까지 진보적인

  정치인인데...넌 어쩜 애가 그렇게 꽉 막혔냐고요. 뭐 나중에 알고보니...그 이부영

  의원과 한자이름까지 저와 갖더라구요. ”

 “ 하하...그래요... ”

 아무튼 동명이인 이부영 문제가 지금 이 자리에서 그렇게까지 길게 이야기할만한 거리는 아닐터이고, 일단 부영은 부영대로 자신이 서울에 갔던 일이 잘 되었음을 최상기 가족에게 전해주었다.

 “ 기뻐해주세요. 아버님 친척들을 찾았어요. ”

 “ 네 ? 그게 정말입니까 ? ”

 최상기 가족과 목사로부터 그 북에서 사망했다는 국군포로의 남한 고향 주소와 인적사항을 적어갖고간 이부영은 일단 보훈처에 의뢰를 하러갔다. 물론 40여년전 주소라 남한 행정구역도 많은 변동이 있었고 무엇보다 그 가족들이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고향인 충남 OO군에 그대로 살 가능성도 별로 없는지라 친척들을 찾는데까진 무척 애를 먹었다. 하지만 일단 충남 OO군 출신의 전사자 ‘최상기’가 보훈처 6.25 전사자 명단에 등록되어 있음은 확인할수 있었고, 그 최상기의 남한 유가족들에게도 연락이 닿을수 있었다.

 “ 데려와야 한다. 무슨수를 써서라도 그 아이들 데려와야 한다. 빚을 내서라도 데

  려와야해 !!! 비록 상기는 이미 죽어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니 이제 우리가 살

  아서 그 아이를 볼수 없겠지만 상기네 아이들이 살아서 연변에 와 있다니 어떻

  게 우리가 두고볼수만 있겠냐 ? 우리가 그 아이들을 모른체 하면 우리가 죽어 저

  세상에서 상기 얼굴을 어찌 보겠냐 ? 그러니 우리 빚을 내는 한이 있더라도 그

  아이들 데려와야만 해. ”

 연락이 닿은 상기의 가족들은 긴급 가족회의를 소집했고 상기의 아들 가족을 한국으로 데려와야 한다는 의지를 가장 강력히 밝힌 사람은 다름아닌 상기의 큰누이인 이 집안의 큰딸이었다. 물론 다른 누이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이들의 말로는 상기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지 오래 되었지만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신지 얼마 되지 않는다면서 그래서 더 애통해하고 비통해하며 이와같이 말했다.

 “ 엄마가 생전에...니들 오빠 안 죽었으니 제발 꼭 좀 찾아봐라. 우리 상기...이 에

  미 두고 그리 먼저갈 아이 절대 아니다. 꼭 찾아봐야 한다. 우리 상기 안 죽었어

  ...우리 상기 절대 안 죽었어...그 말씀을 그리 하시다 돌아가셨는데...엄마가 살아

  계셨다면...몇년만 더 살아계셨다면 이 날을 보실수도 있는건데 말야...흑흑...아이

  고 어머니~~~!!! T.T ”

 6.25때 전사자로 처리되어 이미 국립묘지에까지 안장된 상태인 아들을 노환의 병석에서 그렇게까지 이름을 부르는것은 딸들은 그저 노인의 망령이요 치매로 여기고 그저 편히 눈을 감게 해드리기만 했다. 헌데 그렇게 죽기 직전까지 ‘찾아보라, 살아있다’고 말한 그 아들 상기. 그 상기는 죽었지만 그 상기의 아들 가족이 국군포로 2세 신분으로 탈북을 해 와 있다니 얼마나 놀랍고도 기가막힌 일인가. 상기의 네명의 누이들은 그래서 그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 모습까지 거듭 상기하며 상기의 아들과 그 아내 그리고 상기에게 손자가 되는 그 아이까지 세 식구를 한국으로 꼭 데려와야 한다고 서로 굳게 다짐했다. 그리고 이부영 간사는 그런 국군포로 최상기의 가족들에게 꼭 최상기 할아버님의 가족들을 남한으로 데려올테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한껏 위로를 드리고 이렇게 연변으로 다시 돌아온것이다. 그들에게까지 ‘13인의 탈북자 한국행’을 추진중에 있다는것을 말할수야 없었지만, 여하튼 조만간 꼭 최상기 할아버님의 가족들을 볼날이 있을것이니 희망을 가지시라는 말을 마치 확신이라도 주듯 거듭 남긴채 돌아온것이다.





 현우는 사실 3년전인 94년에 있었던 국군포로 조창호 소위의 귀환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다만 그때까지만 해도 현우는 국군포로 문제 자체에는 그리 큰 관심이 없었다. 다만 그때까진 북한에서 온 사람이라면 휴전선을 타고 넘어온 귀순자거나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 줄을 이었던 동유럽 유학생 출신 귀순자 정도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일도 있을수 있구나 하고 좀 놀랐을 뿐이다. 헌데 이런곳에서 국군포로 2세라는 가족들을 만나 그 이야기를 들어보니 현우도 적잖은 충격을 받은것이다. (* 국군포로 2호 귀환사례인 양순용씨의 일은 이때(97년 11월)보다 6개월이 더 지난 98년 봄에 일어나는 일이다.) 무엇보다 현우는 이들 국군포로 2세 가족으로부터 그의 아버지인 최상기나 그가 같은 동네에서 함께 어울려서 지냈다는 다른 국군포로들의 사연들을 몇건 더 전해들을수 있었다. 그중 가장 인상에 남았던것은 경산 아바이와 군산 아바이라는 국군포로의 사연이었다.

 국군포로들은 대개 아무래도 자기 의지에 반해 북한땅에 억류된 사람들이니 만큼 ‘언젠가 꼭 통일되면 대한민국으로 돌아갈것’이란 의지를 하나같이 갔고 있었다. 그래서 세월이 흘러 세상을 떠나면서도 대개는 한결같이 그 아들,손자들에게 ‘너희라도 살아서 남조선으로 가서 그곳에 있을 친척들을 만나봐야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는것이다. 무엇보다 그때문인지 국군포로 대다수는 자신의 출신지를 자손들이나 주변의 다른 국군포로 자손들에게도 종종 일러주곤 했고 따라서 국군포로 2세,3세들은 해당 포로들의 출신지명을 따서 ‘어느지역 아바이’ 그런식으로 부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가령 ‘경산 아바이’라고 부르는 경우라면 그 국군포로 고향이 경산이었다는 소리고 마찬가지로 ‘군산아바이’의 고향은 전북 군산이었다.

 경산아바이와 군산아바이는 각기 포로로 잡힌뒤 휴전후 한동안 형을 살다가 50년대 후반경 북한 일반사회에 배치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60년대 초반에 바로 무산군의 OO광산으로 함께 배치되어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30년 세월을 함게 살았다. 무엇보다 이들은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때가 되면 이들이 강제노역을 하는 OO탄광지역 가장 높은 산 꼭대기에 올라 고향 남쪽하늘을 바라보며 간단한 차례도 지내고 부모와 보고픈 형제들의 이름을 부르며 목놓아 울곤 했다는것이다. 고향이 경산인 ‘경산아바이’는 자신의 고향인 남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군산아바이’는 마찬가지로 남서쪽에 있는 군산쪽 하늘을 바라보며 그렇게 하염없이 울었다는것이다.

 “ 어무이, 이 못난아들 아직까지 살아있심더. 어무이 지금 살아계십니꺼 ? 어무이

  가 지금 살아계시면 올해 연세가 OO세이신데...생전 어무이께 효도한번 제대로

  못 해본 이 못난 불효자식 아직 이 머나먼 북녘땅에서 질긴목심 아직까지 붙어있

  단 말입니다. 어무이...알고 계십니꺼 ? 이 아들 아직까지 이 북한땅에 살아 있다

  는것 알고 계시냔 말입니더. ”

 “ 아버지...어머니...질긴목숨 아직까지 살아있당께요. 통일될때까지만 그저 꼭 살

  아만 계시오. 그때가서 고향으로 가면 뭣헐러고 지금껏 그 모진세월 살아왔냐

  물어보시면 그저 살아서 아버지,어머니 그리고 많은 동생들 얼굴 한번만 더 보

  고파서 지금껏 살아왔노라고 전할랑께요. 어머니,아버지 부디 살아만 계시요잉

  . OO아, OO아. 이 못난 형 살아 돌아갈때까지 우리 아버지,어머니 그저 잘 좀

  부탁한다잉. ”

 경산아바이와 군산아바이는 그렇게 60년대 초반에 OO광산에 배치되어 와서 각기 세상을 떠난 90년대 초반까지 30년 세월 함께 우정을 쌓다가 역시 한많은 세상을 머나먼 북녘땅 OO광산에서 마감했다는것이 최상기의 아들 최모가 들려주는 전언이었다. 그러고보면 경상도 출신 국군포로와 전라도 출신 국군포로가 함경도 땅에 억류되어 30년을 함께 살며 우정을 쌓고 ‘통일되면 꼭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들을 만나보자’며 서로 다짐하며 살다가 떠났다는 사연을 충청도 출신 국군포로 최상기의 아들을 통해 전해 듣고있는 셈이다.

 무엇보다 현우는 이와같은 국군포로의 사연들을 들으면서 국군포로 역시 이산가족이고 실항먄이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사실 대한민국의 수많은 이들은 이산가족이나 실향민이라면 6.25때 북한땅이 싫어서 그 체제를 등지고 내려온 수많은 실향민을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그려보곤 한다. 해마다 추석이나 설이 되면 통일전망대에 가서 머나먼 북녘땅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그곳 어딘가에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북의 가족들의 이름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짓는 실향민들. 현우도 추석이나 설때 보도하는 그런 뉴스들을 보며 수도없이 접해봤던 장면들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렇게 현우에게도 고정관념으로 박혀있던 이산가족과 실향민의 이미지가 또다른 관점에서 다가오고 있는것이다. 충청도 출신 국군포로 최상기도 경상도 출신 경산아바이란 국군포로도 군산 아바이란 국군포로도 모두 남녘 고향과 그곳의 가족들을 그리며 하염없이 울다가 한많은 세상을 떠났다지 않는가. 생각해보니 그들도 이산가족이고 실향민이다. 고향을 그리고 헤어진 가족들을 그리는 마음이야 북에 있는 이산가족이고 실향민이라고 해서 어찌 그 마음이 다를수 있을까. ‘살아서 너희들은 꼭 남쪽으로 가서 할머니,할아버지,고모들을 만나보라’는 유언을 남기고 떠난 충청도 출신 국군포로 최상기나 역시 OO광산 꼭대기에 해마다 추석과 설이 되면 올라 각자 자기 고향을 바라보며 고향과 가족을 그리며 처절하게 울부짖었다는 그 경산아바이와 군산아바이도 국군포로이면서 또 다른 이산가족이며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인 실향민이었던 것이다.

 “ 그...군산아바이와 경산아바이 되시는 분들의 성함은 알수가 없나요 ? 가능하다

  면 저희가 그분들의 남쪽 가족도 한번 찾아드리고 싶은데... ”

 인터뷰도중 현우가 살짝 그 의사를 내비쳤다. 최상기의 경우처럼 경산아바이든 군산아바이든 그들도 북에서 살면서 결혼 남겨진 자식들이 있을것 아닌가. 비록 경산아바이와 군산아바이는 모두 이미 세상을 떠난 몸이라지만 그들의 2세,3세라도 살아있다면 혹 남쪽의 그들 가족을 찾을 방법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와같은 제안을 한것이다. 다만 그것은 생각처럼 쉬운 작업은 아니었다.

 “ 그...경산아바이의 경우엔 성함이 이용...뭐라고 했던것 같고...군산아바이는 이름

  은 모르고 아마 밑으로 동생들이 많은 그런 분이라고 들었던것 같은데... ”

 하긴 웬만해서 아버지의 친구나 동료들의 이름이나 인적사항을 구체적으로 아는 경우는 드물다. 게다가 일상적으로 경산아바이니 군산아바이니 그렇게 고향명을 따서 부르곤 하던 그런 사이였다면 굳이 성함이나 구체적인 인적사항을 물어볼 이유나 필요성을 그리 크게는 생각해보지 않았을것이다. 그나마 경산아바이라는 국군포로는 ‘이용...’이라는 이름 두자까지만 확인이 가능하고 군산아바이는 이름은 아예 모르는채 ‘밑으로 동생이 많았다’고만 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 시절 형제많은 집이 어디 한둘인가. 보통 8남매,9남매씩 낳고 하던 시절이니 ‘군산에서 밑으로 동생이 많았던 당시 6.25때 참전한 국군포로를 찾습니다’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도 아닌 군산에서 아무개 찾기가 될 것이다. 사실상 쉽지 않은일이란것을 깨달은 현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 현우형제, 일단 지금은 그 일이 중요한게 아니잖아요. 우선 우리가 추진하는 일

  부터 진행해야죠. ”

 그렇다. 국군포로의 문제에 대해 새삼 재인식하게 된것이 현우 입장에서는 새로운 충격이기도 했지만, 지금이 국군포로 문제에 집중할 상황은 일단 아니다. 무엇보다 현우는 지금 ‘13인의 탈북자 한국행’ 취재동행기 르뽀작가를 하기위해 여기 와 있는것이 아닌가. 그리고 며칠전 그렇게 국군포로 최상기의 남쪽 가족을 찾았다는 소식도 함께 가져온 전략간사 이부영은 구체적인 이들의 한국행 계획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일단 이분들을 한국인 관광객으로 위장시켜서 기차를 타고 운남성까지 가기로

  했어요. 그리고 그곳에서 중국-베트남간 국경을 넘는거죠. 다만 그쪽 국경을 넘

  는일은 현지 브로커의 도움을 받아야 할거에요. 사실 중국-베트남쪽에도 불법 월

  경자들이 종종 있기 때문에 브로커를 구하는것은 어렵지 않을거에요. 그렇게 이

  분들을 베트남으로 들여보내면 그곳에서 베트남 한국 대사관에서 망명신청을 하

  도록 하는거에요. ”

 그때까지만 해도 이들은 탈북자를 베트남 대사관에 들여보내기만 하면 일은 만사 형통이 될것이라 순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중국 주재 한국 대사관은 중국 당국 눈치가 보여 탈북자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던 시기이긴 했지만 베트남은 상황이 많이 다를것이라 막연히 짐작했던것이다. 따라서 중국대신 베트남을 택하자. 그것이 연변교회와 나눔선교회 관계자들이 세운 계책이었다. 다만 운남성까진 한국인 관광객으로 위장시킬것이지만 중국-베트남 국경을 넘을때 브로커에겐 또다른 핑계를 대야할 판이다. 그쪽 상황이 어떤지도 모르는판에 브로커에게 함부로 ‘탈북자’라고 밝힐수가 없었다. 궁리끝에 이들은 몽골족인데 베트남에서 일자리를 구하려 한다고 브로커를 속이기로 했다. 일단 베트남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무조건 한국대사관으로 찾아가기만 하면 되는것이니까 그 외에는 특별히 다른 어려운일은 없을것으로 생각했다.

 “ 근데 이부영 간사. ”

 헌데 그와같은 구체적인 계획을 의논하다 좀 의아한게 있어 현우가 부영에게 물었다. 이부영의 구체적인 직책은 나눔선교회 전략간사. 헌데 사실 선교단체에서 일반적으로 ‘전략간사’라면 보통은 기독교 전도,선교와 관련된 그런 전략을 짜는 사람이다. 헌데 이부영은 그런 전략을 짜는게 아니라 탈북자 한국행 전략을 짜고 있는것 아닌가. 그게 새삼 궁금해져 물은것이다.

 “ 헌데 이부영간사...원래 이런 전략 짜라고 전략간사가 된것은 아닐것 아니에요

  ? ”

 나눔선교회가 원래는 아프리카등 제3국 난민들에게 식량지원을 하는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인데 그동안 여러 가지 복잡한 과정을 통해 원래 아프리카 선교파 대다수가 나눔선교회에서 탈퇴했고 지금은 다른 북한과 연변관련 선교단체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유입되어와 멤버가 대거 교체된 상황이란 그 복잡한 이야기는 중국으로 올때 이미 이은화로부터 대충 이야기는 들어 알고는 있다. 헌데 여하튼 그런일들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보니 ‘전략간사’ 이부영이란 직책이 좀 묘하게 느껴져서 현우가 그와같이 물었다.

 “ 아, 그게 실은요... ”

 “ ...... ”

 “ 저도 솔직히 나눔선교회 들어온지는 얼마 안되는데요 저도 처음엔 선교관련한

  활동만 주로 하게될줄 알았어요. 그런데 뜻밖에도 이렇게 여기계신 탈북자분들

  한국행 작전도 짜고 국군포로 가족분들 남쪽 친척도 찾아주고 그런일을 도맡아

  하는 그런 모습이 되었네요. ”

 앞으로도 전략간사 이부영이 주로 하게될일이 탈북자 구출작전이나 국군포로,납북자 가족 찾아주기 같은 일들이 될련지 아니면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련지는 알수없는 일이다. 다만 여하튼 지금은 이들 연변교회에 은신해있는 13인의 탈북자를 한국으로 보내는것이 급선무이기 때문에 그 외 다른 복잡한 일들은 훗날 기회있으면 다시 구체적으로 이야기 나눠보기로 하고 일단 13인의 탈북자를 한국인 관광객으로 위장시키는 작업에 들어갔다.



- 6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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