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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대 걸그룹 팬픽 - 황정음 (4) 1세대 걸그룹 팬픽




                                     부제 : 13인의 탈북자 이야기





 한편 현우는 다음날 연변교회 목사를 통해 은신처의 13인의 탈북자를 곧 소개받게 되었다. 은신처는 다름아닌 바로 교회건물 뒤쪽에 있었는데, 멀리서 보면 창고나 화장실 같은 용도로 쓰이는 그런곳이려니 생각하기 쉬운 그런곳이었다. 뒤쪽으론 담벼락이 있어 외부에 노출되거나 하진 못하는 곳이기도 했다. 현우도 처음 교회에 들어왔을때 그 시설을 얼핏 보긴 했는데 처음엔 거기를 화장실로 잘못 알았다. 정작 화장실은 교회 건물 내부에 있었다.

 목사가 현우를 데리고 간 그곳은 막상 들어가보니 대충 이런저런 잡동사니 물건들이 너저분하게 널려있는 그런 창고 느낌이 딱 드는 곳이었다. 무엇보다 의도적인것인지 물건들이 제대로 정돈도 되어있지 않고 어질러져 있어 혹 처음 들어온 사람이라면 ‘여긴 그냥 방치된 곳이로구나’ 생각하기 딱 좋은 그런곳이었다. 하지만 그 자체가 위장술이었다. 정작 목사는 안의 불을 켜고 그곳 한쪽 구석의 널빤지를 열었다. 그리고 안으로 자신이 먼저 들어가서는 현우보고도 들어오라 했다. 막상 목사의 안내에 따라 아래로 통하는 계단으로 내려가보니 그 지하에 별천지가 만들어져 있었다.

 별천지라고 해서 무슨 화려하거나 신비로운 공간이 만들어졌다는 의미는 아니고 대략 한 대여섯평 정도로 추정되는 작은 공간을 꽤나 정성들여 만들어 놓은것이 한몸에 느껴졌다. 그 가운데는 칸막이를 치고 남자들이 쓰는 공간과 여자들이 쓰는 공간 두곳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한쪽엔 성경책과 신앙서적 그리고 남한 소식을 알수있는 책자와 잡지등이 제법 정갈하게 놓여져있는 작은 책장도 있었고 책상도 하나 있었다. 심지어 컴퓨터까지 있어서 적어도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이 심심하지 않을수 있는 소일거리는 제법 신경써서 목사가 가져다놓고 설치해놓은 셈이다. 그리고 은신해있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밥을 먹을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은신해있는 탈북자는 서울에서부터 들었던 이야기처럼 모두 13명. 원래 작년 봄까지만 해도 12명이었는데 7살난 어린 여자애가 여름에 한명 더 들어와 지금은 열세명이라고 했다. 여하튼 그러니 5-6평 정도의 공간에 열세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언제까지 마냥 이렇게 숨어 지내기만 할 수는 없는 서서히 답답한 공간으로 변해가는 중이긴 했다.

 은신처의 탈북자는 총 13명. 이중 남자가 7명이고 여자가 6명이었다. 성인과 미성년으로 구분하면 성인이 역시 7명(남자 3명, 여자4명), 미성년자가 6명(남자 5명, 여자 1명). 더 구체적으로는 작년 여름에 목사가 처음 데려왔다는 19세(당시엔 18세) 꽃제비 4명, 그리고 20대 성인여성 3자매, 그리고 열 살난 사내아이가 있는 30대 부부, 그리고 30대 중반과 40대 중반의 남성 각기 한명,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작년 여름에 들어왔다는 일곱 살 어린 여자아이까지 이렇게 열세명이 이곳에 숨어 지내는 중이었다. 일단 르뽀작가를 맡기로 한 현우로선 이들이 어떻게 탈북을 하게 되었고 여기에 은신하게 되었는지 그 사연을 들어야하기에 그들을 하나하나 면담을 하게 되었다.

 현우와 처음 면담을 하게 된 사람은 다름아닌 바로 제일 처음 작년 여름에 이곳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19세 소년 4인방이었다. 한국 나이로는 아직 미성년이지만, 북한은 학제가 남한보다 2년 짧기 때문에 이들은 모두 고등중학교까진 다 마친 상태인 소년들이다. 그런 네명이 고등중학교를 마치고 한 1년이 지난 무렵까지 직장을 마련하지 못하던가 하고 배회하다 작년 여름에 함께 탈북을 시도했다고 한다.

 “ 저흰 원래 청진에서 고등중학교를 같이 나온 학생들입니다. 그때부터 넷이 항

  상 절친하게 지냈었고요. ”

 19세 소년 4인방의 이름은 이종혁,김용태,박인수,한규직. 이들중 이종혁이란 소년이 제법 당차고 똘똘한 목소리로 자신들의 구체적인 사연을 현우에게 들려주었다. 현우가 종혁을 첫 대면했을때는 가무잡잡한 얼굴색에 초췌하고 마른 체구가 그야말로 한국의 5,60년대 배경의 드라마,영화 같은데서나 보던 거지소년 느낌이라 살짝 겁도 나고 거부감마저 들었는데 막상 이야기를 나눠보니 제법 당차게 논리적으로 말을 잘 하는 소년의 모습에 호감을 느끼기도 했다. 이종혁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 저랑 용태는 공화국에서 평범한 노동자 집안에서 자란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리

  고 인수는 째포(조총련 출신) 집안이고요, 그리고 여기 한규직이는 아버지가 원래

  평양에서 보위부에서 일하던 사람이었는데 아버지가 작은 말실수를 해서 온 가족

  이 추방을 당해 청진으로 좌천되어온 그런 집안이란 말입니다. ”

 말한마디 실수로 온 가족이 추방을 당하거나 하는 경우는 다른 귀순자나 탈북자 사례에서도 현우도 종종 들어봤던 이야기인지라 대충 그만하면 사연을 알만했다. 그래도 아주 산골로 추방당하지 않고 청진 정도로 좌천이 되었다면 그렇게까지 큰 실수를 한건 아니었나보다 대충 짐작할 따름이다. 그리고 인수의 경우는 그 아버지가 10대 중반이었던 1960년대 후반에 할아버지와 함께 조총련 북송 열풍이 한참이던때 북한으로 들어왔고 북한에 들어왔을때 아직 10대 중반 나이던 인수 아버지는 그 10년쯤 뒤에 성인이 되어 만난 북한 여성과 결혼 인수를 낳았다고 했다. 따라서 아무래도 출신성분이 좋지 못하니 감시를 당하는 처지에 있을수밖에 없는 집안. 이종혁이나 김용태의 집안은 그래도 평범한 노동자 집안이라고 했으니 출신성분이 과히 나쁘다고 할 수는 없으나 보위부 간부 출신이었지만 말 한마디 실수로 청진으로 추방을 당한 한규직의 집안이나 조총련 출신 집안인 박인수의 집안은 이래저래 감시를 당하며 살수밖에 없는 그런 집안이었을터. 그런 환경의 아이들이 북한에서 어찌 자랐을지가 대충 짐작이 갈만하다. 하지만 그렇게 각기 살아온 환경은 조금 달랐지만 그런대로 마음이나 성격은 맞았는지 고등중학교 시절부터 함께 어울려 지금까지 지내온 아이들이라고 한다. 헌데 그 네명이 어떻게하다 그것도 청진에서 탈북을 결심하게 되었을까.

 “ 공화국에선 보통 무리배치라고 해서 학교를 졸업하면 보통 성분대로 대개는 직

  장에 배치가 된단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공화국이 공장이고 산업이고 완전히

  망가져 완전 말이 아닌 상태가 되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

  지만 저희도 뭐 공장이나 이런데 배치가 되지 못한채 한 1년을 방치가 된 그런

  상태였단 말입니다. 거기다가 아버지,어머니라고 해서 딱히 생계를 꾸려갈만한

  그런 처지가 못 되는 상태가 되어 있었더란 말입니다. ”

 “ 무엇보다 지금 공화국 상태가 완전 거지꼴로 말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루가 지

  나면 사람이 죽어가고 또 하루가 지나면 저 집에선 사람이 없어지고 그런 상태가

  된지 오래란 말입니다. 그래서 저희도 이렇게 돌아가는 나라꼴,세상꼴을 더는 볼

  수가 없어 하루는 저희끼리 모여 의기투합을 했단 말입니다. ‘야 !!! 도저히 이대

  로는 안 되겠다. 이대로 있다간 우리 모두 죽는다. 차라리 이럴바엔 우리도 연변

  으로 가보자. 연변에 가서 장사를 하든 취직을 하든 그렇게해서 우리끼리 돈을

  벌자. 그래서 우리가 돈 벌어 아버지,어머니도 먹여 살리고 그렇게 하면 될거 아

  니겠나. 그러니 차라리 우리가 연변으로 가자. ’ 이렇게 결심하고 탈북을 결행한

  게 작년 여름이었단 말입니다. ”

 이종혁의 뒤를 이어 자신들의 탈북 사연을 더 이야기해준것은 김용태. 이종혁이 마른 체구와는 달리 비교적 강단있고 또렷하게 말을 잘하는 성격이었다면 용태는 종혁보다는 그래도 좀 몸에 살이 붙어있는 그런 몸집이긴 했는데, 하지만 되려 말투나 전체 분위기에선 종혁보다 조금 힘이 떨어져보였다. 하지만 종혁은 용태를 ‘이래봬도 의리있고 힘도 장사인 아이’라며 친구에 대한 자랑을 덧붙였다. 넷이 고등중학교(남한의 중학교,고등학교와 비슷)때부터 함께 어울려 지냈다더니 네명 사이의 우정과 의리만큼은 제법 깊어보이나보다 하는것을 느낄수 있는 한 장면이었다.





 이종혁 4총사의 이야기를 쭉 듣다보면 종혁은 확실히 이들 넷중에선 리더역할을 하고 있음이 분명해보였다. 그만큼 종혁은 똑부러지고 강단있는 그런면이 느껴지는 아이였다. 만약 북한에서 태어나지 않고 남한에서 나고 자랐다면 어디 운동권 지도자나 아니면 좋은 대학을 나온뒤 잘 나가는 변호사 같은것을 하게되지 않았을까 그런 추즉이나 예상까지도 가능할 정도로 확실히 종혁은 말도 잘 했고 상황판단 능력도 뛰어나보이는 그런 아이였다. 한편 용태는 그런 종혁 옆에서 참모 역할 비슷한것을 하는 그런대로 2인자쯤 되는 그런 위치에 있는 느낌의 아이였다. 옛 고전 소설로 비유한다면 조조 곁에 있는 순욱이나 순유같은 책사 혹은 춘향전에서 이도령 곁에 늘 있어주는 방자같은 역할이라고나 할까. 여하튼 그렇게 이종혁 4총사는 그런대로 우정과 의리로 똘똘 뭉쳐있는 친구지간이면서도 리더로 이끌어가는 사람의 책임감도 제법 있어보이는 그런 당찬 아이들이었다. 헌데 그런 아이들이 지금은 이렇게 꽃제비 신세가 되어 중국땅을 떠돌다가 연변교회에 은신까지 하게 되었으니 그걸 생각하니 더 딱하고 안타까운 노릇이었다. 만약 북한땅에 태어나지않고 정상적인 체제에서 나고 자랐다면 분명히 그 사회에서 제대로 한 몫 하고 중요한 역할 정도는 맡을수 있는 그만한 인재로 자랄법한 가능성이 있어보이는 그런 아이들 같아 보였다. 한마디로 현우는 이종혁 4총사의 사뭇 당차보이는 그 모습에 감탄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똑부러지고 강단있는 아이들일지언정 막상 그렇게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 중국으로 와서는 그 이후의 시간이 순탄치 못했다. 여하튼 이들의 월경 주 목적은 돈을 벌기 위한것. 처음엔 이들은 그저 중국땅으로 넘어가게 되면 식당일을 하든 공장일을 하든 어디에 취직해서 무슨일이든 하게될수 있을걸로 생각했다. 적어도 중국땅을 가본적 있다는 주위 북한 주민들이나 동료들의 말, 또는 두만강 너머 연변땅의 화려한 불빛등은 종혁등으로 하여금 강건너 세상에 대한 동경심이 절로 일어나게 만드는 풍경들이었다. 하지만 막상 넘어와선 생각했던것만큼 일이 쉽사리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북한에서 겨우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학력의 그들. 게다가 딱히 배운 기술도 없었다. 식량난을 거치면서 북한은 산업체계 뿐만 아니라 교육과정도 거의 무너져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고등중학교 5,6학년 무렵엔 공부를 거의 하지 못했다고 보는것이 맞다. 그런 이들은 처음엔 연변에서 무슨 식당이든 공장이든 가게든 닥치는대로 취직 무슨일을 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들은 중국에서 ‘불법 월경자’인셈. 탈북자인 신분이 탄로나면 언제든 북송될 위기에 직면할수 있는 아이들이다. 하는수없이 탈북자 신분을 숨기고 조선족 행세를 할수밖에 없는데 하지만 북한 사투리와 연변 사투리가 약간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 또한 쉽지 않았다. 남한 사람들은 북한 사투리와 연변 사투리의 구분이 쉽지 않지만 북한과 연변 사람들은 그 구분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니 조선족 자치구내에서 이들이 탈북자 신분을 숨기고 어디 소규모 식당이든 업체든 취직을 한다는것은 생각처럼 그렇게 쉬운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얼마지나지 않아 이들은 탈북할 때 갖고나온 돈도 다 떨어지고 그래서 여느 꽃제비들이나 다름없이 숨어살면서 구걸행각을 하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그러다 가끔은 상점 같은데서 물건이나 먹을것을 훔치기도 했다. 너무 배가고프고 게다가 생필품도 마땅히 없는 터에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헌데 그러던 이들이 바로 연변교회 목사의 눈에 뜨인게 그 무렵이었다.

 그것이 바로 작년 여름의 일. 하루는 연변교회 목사가 한 식당에 들러 식사를 하고 있는데 꽃제비로 보이는 한 소년이 먹을것을 훔치다가 식당주인에게 걸려 멱살이 잡혔다. 그리고 바로 실랑이가 벌어졌다.

 “ 너...너 이 X 잘 만났다. 그러잖아도 너 이전부터 가끔 여기들러서 물건 훔쳐가

  는거 다 봤어. 너 이녀석 꽃제비지 ? ”

 척하면 척인듯 조선족 식당주인은 대번에 소년이 북한에서 온 아이임을 알아챈듯 하다. 소년은 자신이 탈북자가 아니고 조선족이라고 거짓말을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 조선족이라고 ? 그럼 어디엔가 니 부모가 있거나 니네집이 있겠구나 ? 그럼 당

  장 너희집으로 가자. 너희 부모님 어디계시나 ? ”

 “ 아...아닙니다 선생님. 저 진짜 조선족입니다. 꽃제비 아니란 말입니다. 공화국

  에서 온게 아니란 말입니다. ”

 “ 아...하하...요 녀석 봐라 ? 말투가 딱 북한 함경도 X인데 꽃제비가 아니라구 ?

  게다가 공화국 ? 귀신을 속여도 내 눈은 못속인다. 내가 지금껏 너같은 애들

  한두번 본줄아나 ? ”

 “ 아...아니 저 이것보세요. ”

 “ 뭐요 당신 ? ”

 그때 그 광경을 목격한 연변교회 목사가 다가와 식당주인을 말렸다. 그러면서 말했다.

 “ 난 실은 이 근처 OO교회 목사로 있는 사람입니다. 보아하니 그 아이 무척이나

  불쌍한 아이인것 같은데 그냥 놔주시지요. 돈은 제가 대신 물어드리리다. ”

 “ 아...아니 이보시오 목사선생 ? 지금 나랑 장난 하시오 ? 이 아이가 지금껏 우리

  식당에 들락거리며 훔쳐간게 얼만지 아시오 ? 그걸 다 선생이 변상해 주시겠다는

  말이오 ? ”

 “ 뭐 일단...방금 아이가 훔치려한 물건은 제가 변상해 드리겠습니다. 대신 그 아이

  는 풀어주시지요. 제가 이 아이 문제 어떻게든 해결을 해 보겠습니다. 그러니 그

  불쌍한 아이 일단은 좀 놓아주세요. ”

 “ 아니...허허...거 참... ”

 이 무렵이면 아직 연변에서 한국인 목사나 선교사들에 대한 평판은 좋은때였다. 대개 못살거나 힘든 처지에 있는 조선족을 돕거나 때로는 오갈데 없는 꽃제비 신세가 된 탈북자들을 거두기까지 하는 좋은 사람들로 알려져있을 때다. 따라서 그런 목사의 만류에 일단 식당주인은 소년을 풀어주었다. 목사는 소년을 데리고 가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 언제 북한에서 왔니 ? 혼자왔니 ? ”

 “ 아닙니다. 친구들이랑 같이 왔습니다. ”
“ 친구들이랑 같이 왔다구 ? 그럼 친구들은 지금 어디 있는데 ? ”

 그날 그렇게 목사와 만나게 된 소년은 이종혁 4인방중 박인수라는 북송교포 2세에 해당되는 아이였다. 그 아이 외에 세명이 인근 야산에 토굴을 만들고 그곳에 얼마전부터 은신중이었다. 원래는 연변에서 돈을 벌기위해 탈북한 이들 10대 후반의 네 소년. 하지만 그 사정이 여의치않아져 지금은 이렇게 자기네들끼리 토굴을 만들어 살며 구걸이나 때로는 심지어 도둑질까지 하며 살아가는 중이었다. 목사는 인수의 안내를 받아 그들이 숨어사는 토굴로 가보았다.

 “ 여기서 이러지말고 아저씨랑 함께 사는게 어떻겠니 ? 아저씨가 너희들에게 있

  을만한 곳을 제공해주마. ”

 북한을 탈출한지 아직 얼마되지 않은 어린 소년들이 목사니 교회니 하는 이런 개념들에 대해선 아직 잘 모를것이라 판단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는 않은채 ‘아저씨랑 함께 살자’고 하면서 그렇게 네 소년을 데리고 온것이다. 그렇게해서 연변교회 목사가 탈북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해주는 일이 시작된것이다.

 헌데 이만한 공간을 직접 땅을 파고 만들려면 그것도 한 몇 달 정도의 시간은 필요한것이다. 그렇다면 이 교회 목사는 꽤 오래전부터 탈북자들을 위한 은신처를 만들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현우는 그점이 궁금해서 13인의 탈북자와 면담시간을 가질때와 별도로 목사와 따로 만나 이야기를 나눌때 그에대한 궁금함도 물어보았다. 목사는 허심탄회하게 그 경위를 설명해주었다.

 “ 사실 처음부터 저 아이들한테 은신처를 제공할 생각으로 만든 공간은 아니에요.

  처음엔...다들 그렇게 생각하는것처럼 창고같은 용도로 쓸까 했는데...딱히 그곳이

  그런 창고로 쓸만한 일이 별로 없더라구요. 그래서 처음 한동안은 방치된 상태로

  있었죠. ”

 “ ...... ”

 “ 그러다 저 공간을 어찌 활용할까 나름 궁리를 해보다가...차라리 그러지말고 여

  기서 오갈데없는 꽃제비들을 숨겨주는 그런 공간으로 활용해보면 어떨까 하고...

  그래서 애초에 만들어놓았던 지하공간을 더 넓게 파서 지금 저와같은 공간을 만

  들어놓은겁니다. 그게 벌써 1년여전의 일인데 그 사이 여기 들어와 숨어사는 탈

  북 꽃제비가 어느덧 열세명에 달하고 있군요. ”

 그렇게 언제 불법월경자(탈북자)라는 신분이 밝혀져 북송될지 모르는 위기와 불안감속에 살아가야하는 탈북자들을 직접 숨겨주자는 생각을 하게된 연변교회 목사. 그러면서 차츰 그런 구상을 하게된것이다.

 “ 그리고 차츰 그 구상을 구체적으로 이렇게 하게된것입니다. 이렇게 된 이상 저

  아이들을 한국으로 보내자. 그리고 자리가 비면 다시 그곳에 새로운 꽃제비들을

  숨겨주고...일정기간 시간이 지나 인원이 채워지면 다시 그 아이들을 한국으로 보

  내고...그렇게해서 한사람이라도 더 많은 탈북 꽃제비들을 한국으로 들여보내 그

  곳에서 편안히 정착하게 하는게 어떨까. 그 구상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

 


 현우가 이종혁 4총사에 이어서 두 번째로 인터뷰를 하게 된 대상은 공은아,공은희,공은정 3자매였다. 올해 나이 현재 각기 28세,26세,25세인 이들 3자매는 양강도 혜산 출신. 원래 이들의 아버지는 공장 노동자였지만 다니던 공장이 북한의 산업체계가 붕괴된 이후 사실상 폐업이 되다시피 했고, 그래서 실직자가 되어버린 후엔 술로 세월을 보내다시피 하며 거의 폐인이 되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거기다 어머니의 건강상태마저 많이 안 좋아진 이후로 이들 3자매가 직접 장마당에 나가 장사를 하며 돈을 벌기 시작했다는것이다. 명색이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에서 식량난과 배급체계 붕괴 이후엔 장마당이 북한주민 대다수의 생계를 지켜주는 하나의 버팀목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 장마당을 통해 북한주민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연스레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배워가고 있는 중이었다고나 할까. 이들 3자매중 맏이인 공은아가 보다 구체적으로 밝힌 탈북 사연은 다음과 같다.

 “ 저희는 처음엔 장마당에서 저희가 손수 만든 옷이라던가 이런걸 파는 그런 장

  사를 시작했단 말입니다. 그러다 나중엔 수완좋은 아주머니를 한번 만나게 되

  어 그분 도움으로 나중엔 중국땅을 오가며 밀수에까지 손을 대개 되었습니다.

  ”

 장사를 하다 밀무역까지 하게 된 공은아 3자매. 하지만 북한주민의 현실을 생각한다면 이들의 밀수는 흠 잡을일이 아니다. 오히려 중국땅을 오가며 밀무역이라도 하지 않으면 생계를 이어가기가 어려운 처지인 경우가 대다수인 국경지대 주민들. 밀수 역시 장마당과 함께 북한 주민들의 생계를 이어주는 또다른 생명줄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땅을 오가며 장사를 하다보면 결국 발생할 수밖에 없는 문제가 있었다. 바로 차츰 바깥세상 소식을 알게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거나 한국 소식을 알게 될수도 있는것 아닌가. 하지만 아직까지 탈북자나 북한주민의 대다수는 남조선은 여전히 북한의 선전선동에서 배운대로 ‘헐벗고 굶주린 사회’로만 알고 있지 ‘남한이 더 잘살것’이라고 생각하는 북한주민은 별로 없었다. - 90년대 중,후반까지의 상황은 확실히 그렇다. 가령 남한의 영화나 드라마 같은것이 DVD등을 통해 북한 내부로 유입되기 시작한것도 대체로 2천년대 중반 이후에나 되어서의 일이다. 

 하지만 비록 한국사람을 직접 만나거나 한국 제품을 남한으로 반입까지 한 경우는 없었어도 공은아 3자매에게 생긴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북한에서 수출이 금지된 광물을 내다팔기 시작한것이다. 북한 산업체계가 붕괴되면서 폐광이 되다시피 한 탄광도 많이 있는데, 공은아 3자매는 그곳에 몰래 들어가 캐낸 광물과 금속제품따위를 중국땅에 내다파는 일을 시작한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적발되어 3자매가 모두 보위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 결국 그동안 장사를 하기위해 준비한 물건들은 전부 보위부 X들한테 몰수를

  당하고 더 이상 장사를 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단 말입니다. 한편 그 가운데

  건강이 안 좋아지신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저희도 어쩔수없이 이렇게 조국을

  버릴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단 말입니다. ”

 “ 저희도 정말...저희가 이렇게 조국을 버리게 될줄은 몰랐습니다. 사실 언니하

  고 저하고 처음엔 나름 이런 문제를 놓고 토의도 많이 했더란 말입니다. 아무

  리 그래도 우리가 조국을 배반하면 되겠는가. 장군님 품을 벗어나면 되겠는가.

  언니와 동생과 참 많은 시간 고민도 하고 의논도 하고 그랬단 말입니다. ”

 ‘조국을 배반할수 없다.’ 적어도 90년대 중,후반 대량 탈북 사태가 벌어지던 초창기의 탈북자들은 대개가 그랬다. 이들은 비록 식량난과 마땅한 생계수단이 없어 탈북을 감행할수밖에 없었을 지언정 북한에서 받은 세뇌교육 의식만은 크게 지워지지가 않았다. 심지어 막상 그렇게 탈북을 하고 나서도 조선족들이 김일성이나 김정일을 욕하는 모습을 보면 젊은 아이들중엔 ‘왜 우리 장군님을 욕하는가 ? 당간부들이 자꾸 비리를 저질러서 공화국이(북한이) 저리된 것이지 장군님은 여전히 인민을 위해 애쓰시는 분이다.’ 하고 발끈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하지 않던가. 아직 20대 젊은 나이인 공은아 3자매의 정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조국’이란 표현을 수도없이 입에 담는 것으로 보아 아직 북한에 대한 애정과 미련은 많이 남아있는것이 분명해 보였다. 3자매의 의지는 확실히 아직 확고하진 못한채 많이 흔들리고 갈등하는듯 했다. 하지만 어찌되었거나 한가지 분명한것은 이들 3자매 이젠 모두 북한땅을 떠난 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국을 배신했다’는 가슴 한켠의 양심의 가책이나 갈등만은 여전히 남아있는듯 했다. 그런 3자매에게 현우가 물었다.

 “ 지금 그럼 세분 생각은 어떠신가요 ?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으신건가요 ? ”

 그 물음에 은아 3자매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곳 목사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은신처의 탈북자들을 이런식으로 모아서 남한으로 보낼 생각이라고. 헌데 그 부분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3자매는 하지 못하고 있는것이다.

 “ 사실 처음엔 저희 3자매...사실 저희 3자매 숨어살던곳이 저 동무들(이종혁 4총

  사) 숨어 살던곳에서 머지 않은곳에 있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남조선에서 온 목사님이란 분이 저 동무들을 데려갔다는 사실을 알고 저희

  3자매끼리 토의를 했단말입니다. 북조선에서 온 사람들을 숨겨주는 고마운 분이

  있다하니 우리도 여기서 불안하게 사는것보단 그곳에 가서 도와달라 하는것이 어

  떻겠는가. 참 많은시간 고민하고 토의했더란 말입니다. ”

 “ 사실 저흰 하나님이 뭔지 예수님이 뭔지 그런건 하나도 모르는 사람들이란 말입

  니다. 공화국엔 그런게 하나도 없단 말입니다. 공화국에선 오직 위대하신 어버이

  수령님하고 김정일 장군만 알지 그런건 하나도 모른단 말입니다. 그런데 목사님

  이 저희에게 성경책을 처음 보여주실땐...참 뭐랄까...세상에 이런것도 있구나...뭔

  가 별천지를 보는것 같기도 하고 신기했더란 말입니다. ”

 그렇게 연변교회 목사(남한 출신)의 도움을 받아 은신하게 되고 그들로부터 성경책을 건네받으며 전도가 되는 과정에서 남한에 대해서도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도 조금씩 알아가게 된게 이들 3자매다. 무엇보다 ‘헐벗고 굶주린 남조선 사회’라고만 알았던 그곳이 정작 북한보다 잘 살고 자유로운 곳이라는 목사의 말은 이들 3자매를 반신반의하게 만들었다.

 “ 아무렴 남조선에서 온 사람이 자기 조국에 대해 나쁘게 말하겠는가. 일부러 그

  러는 거겠지.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단 말입니다. 헌데 가끔씩 여기 목사님이나 사

  모님 말씀하시는것 보면...가끔씩 보면 남조선에 있는 가족이나 친척들과 자유롭

  게 전화통화도 하고 그러는것 같은데...그러는것 보며 놀랐단 말입니다. 공화국에

  있는 사람들은 중국이나 연변에 있는 조선족 친지와 저리 자주 전화통화를 하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 그걸 생각해보니 남조선은 공화국과 뭔가 다른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단 말입니다. ”

 “ 또 가끔씩 목사님이나 사모님들이 여기 오시는 남조선 손님들과 대화하시는걸

  보면...가끔씩...무슨 남조선에 김영삼이 어쩌구 김대중이 어쩌구...그런 소리를

  하는데...하루는 제가 궁금해서 목사님께 물어봤더란 말입니다. ‘목사님 ? 대체

  아까 그 김영삼이니 뭐니 그런 말씀 하시는데 그 사람들이 누굽니까 ?’ 그러니까

  목사님이 그리 말씀하시더란 말입니다. ‘김영삼은 지금 한국 대통령인데 경제를

  너무 엉망으로 만들어놔 큰일이다. 그리고 김대중은 야당 유력 대선후본데 그 사

  람도 무슨 정계...무슨 은퇴를 했다던가 뭐인가...아무튼 그랬다 다시 왔다면서...

  무슨 대통령병 환자다 어쩐다...그렇게 욕을 막 하시더래지 뭡니까. 그래서 제가

  놀라서 물었습니다. ‘아니, 목사님 그렇게 남조선의 대통령이고 그런 분들이라면

  서 그런 높은분들을 함부로 욕하시면 어캅니까 ?’ 그러니까 목사님이 전혀 놀랍

  지도 않고 당연하다는듯이 ‘아니...내가 내 생각 그냥 자유롭게 말하는게 뭐가 어

  떠냐 ?’ 그렇게 말씀하시더래지 뭡니까. 그래서 저나 언니나 무척 놀랐단 말입니

  다. ‘이야, 남조선 사람들은 대체 어찌된 사람들인가. 남조선 사람들 생각은 대체

  어떻길래 저런 말도 막 한단 말인가.’ 언니랑 저랑 또 엄청 놀라서 밤새 그걸갖고

  엄청 토의했단 말입니다. ”

 실제 북한주민이나 탈북자들은 남한문물이나 사람을 처음 접했을때 우리는 전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소한 문제에서 충격을 받는 일이 많다고 한다. 80년대에 유명했던 모 귀순용사도 바닷가에 떠밀려온 남한 라면봉지를 보고 거기에 영양성분이 어쩌구 조리법이 어쩌구 세세히 적혀있고 심지어 ‘불량품은 바꿔드린다’는 설명까지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하지 않던가. 또 2002년 ‘야인시대’란 드라마가 모 지상파에서 한참 인기리에 방영되었을때도 거기서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란 김두한이 백주대낮에 종로거리를 마음대로 활보하고 다니며 주먹질을 하는 모습을 보고도 ‘만약 북한이라면 가령 황장엽쯤 되는 사람 아들이 저렇게 평양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는게 가능할까. 그런데 일제시대엔 (아무리 드라마라 쳐도) 그 김두한이란 사람은 아버지 김좌진 장군이 그렇게 대단한 독립군이었어도 그런 연좌제에 적용 안 받고 종로거리를 자유롭게 활보하고 다녔구나.’ 하며 놀라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게 단순히 남한이 북한보다 잘산다는 측면보다도 남한이 북한보다 훨씬 자유롭고 자기 할말 다 하며 사는구나 하는 점에 더 충격받는 북한주민이나 탈북자가 많았다고 한다. 공은아 3자매 역시 대체로 그런 상태라고 보면된다. 처음엔 그저 생계를 위해 장마당에서 장사를 시작했다가 나중엔 밀수에 손을 대고 수출이 금지된 품목을 중국에 내다팔다 걸려 하는수없이 북한을 탈출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 3자매. 그런 3자매가 그때까지만 해도 북한의 말대로 ‘헐벗고 굶주린 사회’로만 여겼던 남한에 대해 직접 남한출신 연변교회 목사의 도움을 받아 은신처를 제공받고 이런곳에서 이렇게 직접 남한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심경에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는 중이었다.



- 5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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