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이 해리의 집에 들어와 살게 된지도 어느덧 1년 반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날은 어느덧 추워진 겨울날. 하늘이 우중충해 혹 눈이나 겨울비라도 쏟아지지 않을까 싶은 그런 날이다. 미장원이 쉬는 날이라 민경은 집에 있었는데, 흐릿한 바깥 풍경 때문에 공연히 심란해지기라도 한걸까. 민경은 1층 창가에 우두커니 서서 바깥을 바라보고만 있다. 사실 민경의 이런 정적인 모습은 적어도 해리의 집에 들어와 살게된 이후로는 이례적인 모습이다. 낮과 저녁때는 동네 미장원에서 일하고 집에 있을때도 청소며 빨래 혹은 아이들 돌보는 일까지 그야말로 하다못해 허드렛 청소라도 하면서 가사일 돌보는걸 좀처럼 쉬는적이 없었던 그런 민경이다. 이런식으로 해리의 집에서 신세지고 있는것에 대해 갚고자 하는 마음가짐인것인지 하지만 그렇더라도 어떨때보면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자신을 혹사하기까지 하는 민경이었다. 헌데 오늘은 어찌된 영문인지 장시간 그렇게 베란다 창가에 서서 한참을 말없이 바깥풍경만을 바라보고 있는 민경. 무표정한 얼굴이라 그 속을 읽기가 쉽지 않아 보이기까지 한다. 해리가 그런 민경의 뒤로 살며시 다가오고 있었다. 무엇보다 민경과는 어릴때 고향에서부터 누구보다 절친하게 지냈던 그녀가 아니던가. 그런 해리라서 이런 민경의 전에없는 모습이 이채로와 보이기까지 하고, 혹 뭔가 고민이나 문제가 있는것인가 싶어 살짝 걱정도 되었다. 그래서 말이나 걸어볼까 하고 다가오는 해리. 무슨 장난을 치거나 놀래주려는 의도가 있는것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발걸음으로 다가와서는 민경을 한번 손으로 툭 쳐본 해리. 혹여 놀랠까봐 뒤도 아니고 민경의 거의 옆쪽에서 쳐보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경은 화들짝 놀라버린다.
“ 엄마얏~~~!!! 어...어...언니... ”
갑작스런 누군가의 손길도 손길이거니와 그게 바로 해리인것을 보고는 바로 기겁을 하는 민경의 모습. 그런 민경의 태도에 해리가 더 당황이 될 지경이다. 그녀가 민경에게 말을 건넨다.
“ 어머 얘. 너 왜 그렇게 놀라니 ? 되려 내가 다 놀랄 지경이다. ”
“ 언니...그...그게 아니라...아휴... ”
정말 크게 놀라기라도 했는지 가슴을 쓸어내리기까지 하는 민경. 한숨을 한번 내쉰다. 그리고는 살짝 그녀의 눈치를 보는듯 하기까지 한 민경. 해리는 그 민경의 이전에는 볼수없던 행동에 더더욱 의아해하면서 그래도 설마 무슨일이야 있으랴 싶은 생각인지 대체로 평범한 어조로 말을 건넨다.
“ 나 원...애가 너 답지 않게...그리 놀라기는...근데 대체 거기서 뭘 하고 있었던거
야 ? 무슨 고민거리라도 있어 ? ”
“ 아, 아냐 언니...고민은 무슨... ”
당치도 않다는듯 그와같이 말하고 있는 민경. 살짝 해리의 시선을 피하기까지 한다. 해리는 일단 민경의 그와같은 태도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긴채 다시금 말을 건넨다.
“ 근데 너 이런 모습 좀 신선해 보인다. ”
“ 신선...하다구 ? ”
이건 또 무슨소린가 되려 의아해지는 민경. 무슨 양심에 찔리는것이라도 있는지 해리의 사소한 말 한마디 하나하나가 다 신경이 쓰이는 그런 모습이다. 해리의 말이 이어진다.
“ 너 우리집에 들어와서 지난 1년반...몸을 쉰적이 거의 없는거 알기나 해 ? 너
그냥 우리 식구로 생각하고 내 동생으로 생각하고 들어와 살라고 한거니까...너
무 자격지심 갖지 말고 마음 편히 있으라고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도 하루도 몸
을 쉬는적이 없던애가...도대체 어쩐일이야 ? 갑자기 왜 그러는건데 ? ”
“ 언니도 참...내가 뭐 쉰적이 없다고...밤에 잠도 자고...쉴땐 쉬었지... ”
“ 녀석... ”
안쓰러운 감정을 담아 해리는 민경을 한번 안아본다. 생각해보면 이제 진짜 이 세상에 의지할만한 가족 하나 없는 그런 신세인 민경 아닌가. 단둘이 지내던 어머니마저 이젠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학창시절 왕따 당하던 민경이 어디 어울리는 친구가 있는것도 아니니 이 세상에 이제 민경이를 위해주고 걱정해줄만한 사람은 자신뿐이로구나. 그 생각을 하니 민경이 더더욱 가여워지는 것이다. 이토록 외롭고 딱한 아이가 세상에 또 있을수 있을까. 그런 생각으로 민경을 꼭 안아본건데 민경은 뭔가 좀 부담스럽기라도 한지 해리가 혹 마음 상하지는 않게 조심스럽게 살며시 그녀에게서 떨어진다.
“ 언니...이제 그만 해. 그리고...어, 시간이 벌써 저녁때 다 되어가는데...저녁준비
해야지 ? ”
밝게 웃어보이며 그와같이 말하는 민경. 하지만 해리가 그런 민경을 만류한다.
“ 민경아아...그러지마... ”
“ 언니 ? ”
“ 너 차라리 이렇게 있는 모습이 더 보기 좋다니까 그러네. 너 마치 우리 집에서
가정부나 파출부 노릇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늘 그러는거 내가 얼마나 보기 안쓰
러웠는지 알아 ? 뭐 어쨌든 내 일손 거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니 나야 고마운거지
만...여하튼...난 오히려 가끔 이렇게 니가 여유를 보이는 모습이 좋아. 넌 내 동생
이잖아. ”
“ 언니... ”
순간 가슴 한켠이 짠해오는 민경. 아니 짠해 오는게 아니라 가슴 한쪽이 콕콕 찔린다고 하는게 맞을것이다. 언제부터인가 해리를 대하는것이 편치 않아진 민경. 그렇기에 아무것도 모른채 자신에게 더더욱 친절하게 잘 해주는 해리에게 미안해질 지경이다. 살짝 시선을 피해가는 민경. 하지만 해리는 그런 민경을 보며 다시 뭐라고 말을 건넨다.
“ 근데...민경이 너 혹시 어디 아픈건 아니니 ? ”
“ 응 ? 아...아냐...아프기는...아무런 일 없어. 언니도 참 별 걱정을...아프긴 내가
어디가 아프다고 그래. 아무일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
“ 괜한 걱정이 아니라...너 요즘 표정이며 안색이 좀 예전같지 않아서 그래. 혹
어디 불편한게 있으면 걱정말고 말하라니까. ”
“ 아냐...무슨...그냥 날이 갑자기 추워져서 그런가봐. 별거 아냐. 너무 걱정 안 해
도 돼. ”
민경은 거듭 해리를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그와같이 말하는데, 민경의 그런 태도가 해리로 하여금 그녀에게 더욱 딱한 감정이 들게 만든다. 살짝 민경의 손을 이마로 짚어보기까지 하는 해리. 무슨 특별히 열이 있거나 하진 않은것 같다.
“ 아프지 않다니까. 언니도 참 괜한 걱정을...어서 저녁 준비나 할게. 아이들 학교
에서 돌아올 시간도 되었고...형부 진지 차릴 준비도 해야하니까... ”
그러면서 총총걸음으로 부엌으로 사라져가는 민경. 해리가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다본다. 민경을 바라보는 해리의 눈빛은 그야말로 동생을 생각하는 언니의 애틋함이 그대로 묻어나있는 그런 모습이다.
며칠후. 민경이 미장원에서 퇴근을 했는데, 그때 집에 도착해 있는 택배가 하나 눈에 들어왔다. 대충 느낌에 집에 도착한지 시간이 꽤 된듯한데 지금껏 포장도 풀르지 않은 상태였다. 의아해하는 민경한테 해리가 다가오며 말을 건넨다. 뭔가 흐뭇한듯 싱글벙글한 표정인다.
“ 민경아, 어서 풀러봐. ”
“ 풀러보라구 ? 뭔데 이게 ? ”
어차피 집안의 가사담당인 민경임을 감안한다면 꼭 자기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온것이라도 자신이 챙기며 물품을 확인해보고 해야할 판이긴 했다. 하지만 해리의 표정으로 봐선 웬지 그런것 같지는 않고, 풀러보니 거기 들어있는것은 이불과 전기장판이었다.
“ 언니, 이게 뭐야 ? ”
“ 이제 곧 날도 추워질텐데 그래서 너 쓰라고 내가 특별히 장만했어. 겨울 이불과
장판이니까 잘 때 깔고 덮고 자. 그러라구. ”
“ 어...언니... ”
얼마전 그러잖아도 자신의 몸이 좀 불편해 보인다며 걱정하던 해리였다. 혹 날이 추워져서 그런가 하는 짐작에 그와같은 신경을 쓴 모양이다. 해리가 이불과 장판을 펼쳐보며 다시금 민경에게 확인을 시켜주기도 하고 있는데, 그러면서 자신이 직접 민경의 방으로 그것을 들고가 깔아주기까지 한다.
“ 어...언니...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
“ 민경아. ”
민경이 미안해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해리는 그녀를 다독여주려한다. 일단 장판은 깔고 설치해야 하니 그 작업을 일단 마무리하고 민경은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데, 그런 민경에게 다시금 해리가 다가오며 말을 건넨다.
“ 민경아... ”
“ 언니... ”
해리의 신경씀에 고마움보다 미안함이 앞서 어쩔줄을 모르고 있는 그녀. 정말 이럴땐 무슨 말을 어찌 해야할지 도대체가 판단이 서지 않는다. 민경의 마음상태가 지금 어떨지 아는지 모르는지 해리는 그런 민경의 손을 꼭 잡아보며 나름 감회에 젖은 표정으로 말을 이어간다.
“ 내가 늘 너한테 하는말이지만... ”
“ ...... ”
“ 나한테 넌 동생이나 다름없는 존재야. 내 맘 알지. ”
3대독자 집안에서 그것도 아들이 아니고 딸이었던 관계로 집에서조차 별다른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했고, 심지어 할머니는 해리만 보면 ‘저게 사내아이였다면...’, ‘계집아이가 저리 기골이 장대해서야...’ 하는식으로 혀를 끌끌차 늘 상처가 되었던 해리. 그런 해리가 지금껏 가족보다 더한 존재로 생각해왔던게 민경이다. 정말 가족처럼 친동생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주고픈 그런 마음인듯한 해리. 그런 해리가 민경을 바라보며 말한다.
“ 그리고 민경아...지금 우리끼리니까 하는 말이지만... ”
“ ...... ”
무슨 은밀한 이야기라도 하고싶은 것일까. 해리는 방문을 닫기까지 한다. 다른 가족들이 들으면 곤란한 이야기라도 하려는것인지. 사실 해리의 남편 정태는 약 한달 가까운 일정으로 현재 중국 출장중이라 지금 집에 없다. 일정상 아마 연말경 귀국 예정이고, 하지만 아이들 방이 1층에 있으니 행여 아이들이 들으면 뭔가 좀 곤란한 그런 이야기라도 하려는것인지. 민경으로선 여하튼 해리의 의도를 알 수 없어 의아하기도 하고 불안하기까지 한 가운데 그녀의 말이 이어진다.
“ 나 솔직히...지금 형부에 대해 애정없어. ”
“ 뭐라구 ? ”
이건 또 갑자기 무슨소린가. 하긴 해리가 이런말은 몇 달전에도 한번 자신보고 한강 고수부지에나 같이 놀러가자며 거기서 술 한잔 하면서 했던 말이기도 하다. ‘사랑 그까짓게 세상에 어딨냐...’며 비웃듯이 푸념조로 내뱉곤 했던 해리. 하지만 그땐 여하튼 해리도 어느정도 술에 알딸딸 취해 횡설수설 내뱉은 말이고. 그러나 적어도 그 이후의 해리외 그 남편 정태의 사이와 흐름을 보면 두 사람 사이가 그리 좋지 못한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보고 뭘 어쩌라고. 민경으로선 해리의 의도를 여전히 알 수 없어 불안한 가운데 그녀의 말은 계속된다.
“ 지금이야 어쨌든...너희 형부와 사이에 아이들도 셋이나 있고 하니... ”
“ ...... ”
“ 정말 아이들 때문에...애들 때문에 이혼 안하고 산다는게 나 진짜 무슨말인지 요
즘처럼 실감한때가 없다. 진짜 나...니네 형부랑 애들봐서 이혼 안 하는거야. ”
민경은 말이 없다. 해리가 눈치채지 않게 살짝 입술을 지그시 깨물어 보이는 그녀의 속 마음은 지금 좀 복잡하기도 하다. 여하튼 다른것은 몰라도 해리나 정태나 지금 부부로서 서로에 대한 애정은 거의 없는것이나 마찬가지인듯 하다. 헌데 그렇다고 지금 대체 자신보고 뭘 어쩌자구 이런 이야기를 하는것인지. 민경으로선 딱히 대꾸할말도 생각나지 않아 그냥 묵묵히 있는 가운데 민경의 두 손을 마주잡은 해리는 자기 하고픈 말을 계속한다.
“ 하지만 진짜...애들 다 고등학교 졸업하고...막내 경희까지 대학 들어가고 나면
... ”
“ ...... ”
“ 나 너희 형부랑 갈라서서 따로 살고싶어. 정말 나 애들 때문에 어쩔수 없이 사
는거지. 너희 형부에 대해 지금 애정 없어. ”
“ 언니... ”
듣자하니 민경 입장에선 기가막힌 소리다. 지금 이해리 이 여자 뭘 알고 이런 소릴 하는것인지 모르고 하는 소린지. 지금 자신이 무슨 이야길 하고 있고 그것이 민경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것인지 알고나 이러는것인지. 민경으로선 어처구니 없어 그저 해리를 멍하니 바라만 볼 뿐인데, 그런 민경의 속마음을 모르는 해리는 그저 자기 감정에 젖어 자신의 솔직한 속내를 민경 앞에서 늘어놓는다.
“ 그러니...우리...현희,정희,경희 걔네들 다 학교 졸업하고 대학까지 들어간 그때쯤
되면... ”
“ ??? ”
“ 나 그때쯤 형부랑 이혼할테니 그때 우리 둘이 같이살자. ”
“ 언니 !!! ”
순간 하도 기가막혀 버럭 소리까지 지르는 민경. 해리의 말이 듣자듣자 하니 너무 어처구니 없게 느껴져서일까. 하지만 정작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는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는지 반사적으로 자기 입을 막는 그녀. 헌데 이런 발끈하는 민경의 모습을 보니 해리 역시 자신이 뭔가 실수했나 싶어 민경의 눈치를 살펴보며 말한다.
“ 미...민경아... ”
“ ...... ”
“ 너...언니한테 실망했니 ? ”
아무리 고향에서부터 친자매처럼 의지해온 사이기로 형부와 이혼하고 싶다느니 애들 다 학교 졸업하고 대학갈때쯤 되면 우리 같이 살자느니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게 너무 비상식적으로 보였던것이 아닌가. 해리로선 그냥 솔직한 자기 생각을 동생한테 고백한것 같았는데, 그 정도가 너무 지나쳤던것인가 생각되어 그와같이 물은것이다. 해리는 민경한테 사과한다.
“ 미안해...내가 너무 과하게 나갔던것 같구나. 민경아, 내 말이 지나쳤니 ? ”
“ 아...아니 그...뭐 꼭 그렇다기 보담도... ”
하지만 해리가 이렇게 나오자 민경도 더더욱 난감해진다. 지금 남편 정태에게 아무런 애정이 없다는 해리. 그러면서 아이들 다 대학 들어갈때쯤 되면 이혼할테니 그때 자기랑 살자고 하는 해리. 이런 그녀 앞에서 대체 무슨 말을 어찌하란 말인가. 해리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오죽하면 저런 생각을 다 할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평범한 제3자 입장에서 보면 확실히 좀 상식에 어긋난 생각인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민경은 민경대로 현재 자신의 처지가 있기에 해리의 이런 말들이 그저 어이없게 보일 뿐이고,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심경이 복잡해져 혼란스럽기만 하다. 한마디로 두 사람이 서로의 어긋난 느낌으로 지금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것이다. 해리는 일단 자신의 말이 좀 지나쳤다고 바로 민경에게 사과하는데, 민경은 심경이 복잡한지 별다른 대꾸도 못하고 있다. 하는수없이 해리는 민경의 눈치를 좀 살피다가 대충 이쯤에서 마무리하고픈지 입을 연다.
“ 오늘 언니가 좀 지나쳤던것 같다. 그렇다고...지금 한 이야기...잊어버려 달라고
하고싶진 않은데...어쨌든 민경아...언닌 너한테 그렇게 의지하고 있다는 소리야.
내 마음 알지 민경아 ? ”
민경은 고개를 숙인채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고, 해리는 거듭 이런 자신을 이해해달라는 말을 당부하듯 건네고 방을 나서는데 해리가 방에서 나가자마자 민경은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만다.
해리는 민경의 근래 행동이 뭔가 미심쩍다는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자신이 너무 잘해주니까 되려 그에대한 미안함에서 그러는 것으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요 근래의 민경의 행동은 단순히 미안함에서 그러는게 아니라 뭔가 석연찮은 무엇이 분명히 엿보였다. 어떨때는 지난번처럼 혼자 창가에 우두커니 서있거나 소파에 앉아서는 뭔가 고민이 있는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거나 아예 넋을 잃은 사람마냥 멍하니 있기도 하고, 게다가 자신이 부르면 화들짝 놀라거나 심지어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혹시 무슨일이 있거나 어디 아픈거냐고 물으면 민경은 이런식으로 둘러댔다.
“ 아...아냐...아프기는...그냥 잠깐 다른 생각을 하다가...언니 그렇게까지 신경쓰지
않아도 돼. 나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니까. ”
“ 아니, 도대체 요즘은 무슨 다른 생각을 그렇게 많이 하는데... ”
변명치곤 너무 허술해서 해리는 의심을 놓기가 쉽지 않았고, 그래서 나름대로 민경의 동태를 좀 유심히 살펴보기로 했다. 그러다 민경의 일하는 미장원 주인으로부터 민경이 근래들어 미장원을 자주 빠진일이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미장원 주인은 되려 해리에게 요즘 집에 무슨 변고가 그리 많으냐고 묻기까지 해 해리는 기가막힐 지경이었다. 하지만 해리는 일단 민경이 행여 일터에서 책잡힐까봐 정확한 사실은 말하지 않고 그저 심려를 끼쳐 미안하다는 말만 하고 돌아왔다. 하지만 이쯤되면 민경의 근래 행동은 정말 수상하기 이를데없고 의심을 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하루는 해리가 밤중에 1층으로 내려와보았다. 잠이 안오거나 물이라도 마시기 위한 핑계김에 내려오는 것이지만 사실 민경의 동태를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혹시 밤에 저혼자 있을때 무엇을 하는지를 살펴보면 민경의 문제를 보다 정확히 파악할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한 것이다. 어찌보면 민경을 감시하는 것이니 그녀에게 미안한 일일수도 있지만 지금의 해리로선 민경의 동태를 그렇게 살펴보지 않고는 대관절 그녀에게 무슨일이 있는것인지 궁금해 견디기가 힘들었다.
헌데 1층 화장실에 불이 켜져있는것이 눈에 띄었다. 1층에야 아이들 방도 있으니 아이들이 화장실에 간 것으로 생각할수도 있으나 어떤 직감같은것일까. 민경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조심스레 화장실로 다가가보았다. 헌데 다소 놀라운 풍경이 해리의 눈에 펼쳐졌다. 짐작한대로 지금 화장실에 있는것은 분명 민경이었는데 그녀가 헛구역질을 하고 있는것이었다. 그것도 한두번도 아니고 여러차례나.
“ 민경아... ”
“ 헉~!!! ”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민경. 바로 해리인것을 알고는 기겁을 하며 어쩔줄을 모른다. 해리가 그런 민경에게 다가온다.
“ 너 거기서 뭐해 ? 너 대체 어떻게 된거야 ? ”
“ 어...언니...그...그게... ”
이 장면을 해리에게 그대로 들키고 말았으니 민경으로선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어찌 대처를 해야하나. 어찌 변명을 해야하나. 눈앞도 머릿속도 모두 캄캄해진 느낌이라 도대체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런 민경을 해리는 어느새 화장실 밖으로 잡아 이끌고 있었다.
“ 너...대체 어떻게 된거야 ? 그리고 방금 그 모습은...본게 대체 뭐야 ? ”
“ 어...언니... ? ”
“ 너...내가 무슨일 있냐고 물을때는 그렇게 아무일 없다고 발뺌하더니...대체 이
게 뭐야. 너 설마... ”
“ 어...언니... ”
민경은 해리 앞에서 잔뜩이나 무섭고 겁이 나서 차마 무슨 말도 어떤 행동도 취하고 있지 못하고 있고 해리는 그런 민경을 거듭 추궁한다. 그냥 넘어갈일이 이미 아니지 않는가. 결국 해리의 입에서 이와같은 질문이 나오고 만다.
“ 너...설마 임신한거야 ? 그랬던거야 ? 그래서 이 고민을 지금껏 혼자 하고 있었
던거야 ? ”
“ 어...언니...아아... ”
민경은 결국 현기증을 일으키며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만다. 도대체 이 노릇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이미 해리가 모든 것을 다 알고 말았으니. 눈앞이 캄캄해지고 정신이 아득해져 어쩔줄 모르다 결국 쓰러지고 만것이다. 해리가 그런 민경을 일단 흔들어 깨워보려 한다.
“ 민경아...민경아...정신좀 차려봐. 아니, 대체...이 노릇을 어쩌면 좋아. 민경아, 민
경아. 제발 정신좀 차려보래도. ”
해리는 급한대로 민경을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구급차를 부르거나 할 상황도 아니라 간단한 신경안정제라도 먹이며 민경의 정신을 차려보게 하려고 했다. 진짜 정신을 잃고 이대로 혼절해버린 것인지, 차라리 이렇게 된거 이대로 영원히 눈을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작심을 한 것인지. 민경은 한참뒤에야 날이 밝은뒤에 정신을 차리고 말았다.
“ 민경아... ”
해리는 그때까지 민경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여하튼 임신을 한 몸이라니 약을 먹이기도 쉽지 않고 그래서 민경의 팔다리를 주무르고 물수건으로 몇 번이나 그녀의 몸을 닦아주며 정신을 차리고 깨어나길 바랬다. 한참만에 민경이 정신을 차리는것을 보고 해리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쉰다.
“ 언니...미안해... ”
민경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와같이 말했다. 하지만 아직 정확한 자초지종을 모르고 있는 해리는 그런 민경을 딱하다는듯 안아보았다. 이런 마음고생을 지금껏 저혼자 하고 있었다니. 참 얼마나 딱하고 불쌍한 동생인가. 게다가 남자가 생겼으면서 그것도 여지껏 언니인 나한테 말도 하지 않았다니 살짝 야속하고 괘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단 보다 정확한 진상은 알아보아야겠기에 해리가 차분하게 민경에게 물었다.
“ 대체 어떻게 된거야 ? 언제 남자가 생겼던거야 ? ”
“ 어...언니 그게... ”
“ 말을 하지 그랬어 진작. 그럼 언니가 대체 어떤 남자인지 좀 알아보기도 하고
니가 사귀고 만나봐도 되는 남자인지 같이 좀 의논을 할수도 있었을거고... ”
민경의 아이가 정확히 누구 아이인지 까맣게 모르고 있는 해리는 그저 동생이 어디 카사노바나 바람둥이 같은 남자에게 당한것은 아닌가 - 혹 또는 그 남자가 유부남이면 어쩌나 하는 걱정까지도 들고 - 그런 걱정에 민경을 한편으론 나무라기도 하면서 어떻게든 그녀의 마음을 안정시켜보려 한다. 민경의 입장에선 그저 이런 상황이 기가막힐 뿐이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오직 동생 걱정뿐인 언니 해리. 그리고 이런 고마운 언니 앞에서 자신이 대체 무슨말을 어찌해야할지 판단이 제대로 서지 않아 그녀는 여전히 말문도 제대로 열지 못하고 있다.
“ 너 그리고...미장원에 실은 얼마전에 물어보았는데...너 그동안 집안일 핑계대고
미장원 자주 빠졌다면서 ? 그럼 그러면서 지금껏 그 남자 만나고 다녔던거야 ?
”
해리가 이미 민경에 대해 거기까지 알아봤다는것은 민경으로선 더더욱 놀라운 일이다. 해리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더더욱 어쩔줄을 모르고 무엇보다 해리가 알게 모르게 자신의 뒷조사를 해봤다는것은 민경으로서도 이제 더 이상 빠져나갈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구나 하는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 이미 해리가 거기까지 알아봤다면 민경이 만나는 남자가 대체 누군지 알게되는것도 시간문제 아닐것인가. 하지만 해리는 아직은 거기까진 짐작조차 못 하는지 민경이 직장을 빠진 문제에 대한 책망부터 한다.
“ 이 바보야. 아무리 남자가 좋아도 그렇지 세상에 직장까지 빠져가며 연애를 하
니 ? 그것도 집에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면서 ? 그리고...그렇게 남자를 만나갖고
지금 대체 이게 무슨 꼴이야 ? ”
한숨을 내쉬는 해리. 그녀는 민경의 일을 정말 자신의 일처럼 고민하고 있다. 잠깐 뭔가 생각을 해보는듯한 해리는 입술을 한번 지그시 깨물어 보더니 차분히 입을 연다.
“ 그 남자는...알고 있니 ? ”
무슨 대답을 어찌 해야하나. 민경은 망설이다 ‘아마 모를거야’ 하며 기어가는 목소리로 가까스로 대답한다. 해리가 거듭 민경을 책망하듯 말한다.
“ 이 바보야. 그래도 이야긴 해야지 !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남자한테 말도 안
하고 너혼자 끙끙대면 어쩌자는거야 ? 일단 그 남자를 만나봐야 무슨 결혼을 하
든 아니면 다른 조치를 취하든 해결방법을 찾을거 아냐 !!! ”
“ ...... ”
“ 대체 어떤 남자니 ? 뭐하는 남자인데 널 이렇게 만든거야 ? ”
대답없는 민경. 해리가 거듭 추궁한다.
“ 설마...유부남이니 ? 그런건 아니겠지 ? 아니면 집안이 너무 빵빵한 집안이라
그 집 부모님이 널 반대라도 하시니 ? ”
근데 민경이 서울 해리집에서 살게 된 시간이 이제 1년 반 정도. 벌써 결혼문제가 오가고 집안 반대 이야기가 나올만한 그 정도로까지 깊은 관계의 남자를 만났다고 보긴 무리인 시간이다. 어쨌든 서울 올라와서 한동안은 해리 집 가사일도 돌보며 딴에는 자기 밥값은 자기가 벌겠다며 미장원에서 아르바이트까지 하며 바삐 살았던 그런 민경 아닌가. 일단 미장원까지 빠져가며 연애를 했다고 할진대 민경의 남자가 미장원 직원이거나 손님일 가능성은 없다. 그렇다면 대체 민경이 지금껏 만나온 남자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해리가 그 부분을 거듭 추궁하지만 민경은 차마 무슨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다. 그런 민경의 태도에 해리도 한껏 답답해 하고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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