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벌받는 여자 1
“ 언니, 정말 형부랑 무슨일 있는거에요 ? ”
해리의 말이 점점 심상찮아지자 걱정도 되고 궁금하기도 해서 거듭 그와같이 묻는 민경. 해리도 이제 술기운이 어느정도 올랐기 때문일까. 민경의 물음에 바로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한채 좀 횡설수설 헛소리처럼 내뱉는다.
“ 민경아... ”
“ 네, 언니. ”
“ 민경이 넌 그래도...넌 그래도 말야... ”
무슨말을 하고싶어 이러는건지 민경으로선 여전히 해리의 의도를 알 수 없어 의아하기만 하고, 그런 민경을 바라보며 해리의 말은 다시 이어진다.
“ 넌 그래도 기왕이면... ”
“ ...... ”
“ 널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껴주는 그런 남자랑 결혼해라. 알겠지 ? 훗~! ”
조금전엔 사랑같은것은 없다느니 어쩌느니 그런말을 입에담고 심지어 자기 남편 정태를 민경보고 대놓고 욕해달라는 부탁까지 하더니 이번엔 자기보고 기왕이면 사랑하는 사람하고 결혼하라니 대체 이해리 이 여자 오늘따라 왜 이러나. 무엇보다 노정태란 남자와 그 아내 이해리 사이가 요즘 보통 아니게 심각한가보구나. 민경 입장에선 자연스레 그런 짐작이 들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이제 어느정도 취기가 오른듯한 해리가 걱정되어 민경의 말이 이어진다.
“ 언니, 아무래도 많이 취한것 같은데 이만 파하죠. 아니면 음료수라도 한모금 마
실래요 ? ”
그러면서 술이 아닌 다른 청량음료를 하나 가져다주는 민경. 해리는 그것을 한모금 마신뒤 정신이 조금 나는듯 ‘하~!’ 하며 헛트림까지 해댄다. 음료수라도 한잔 하고나니 그래도 알콜기운이 좀 잦아진듯한 해리. 그런 해리가 민경을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어간다.
“ 민경아...언니는...언니는 솔직히 있지... ”
“ ...... ”
“ 형부, 사랑해서 결혼한건 아냐. ”
“ 예 ? ”
뭐 조금전부터 하던 해리의 말과 태도로 봐선 충분히 그런말이 나올것 같고도 남아보였다. 하지만 막상 그녀의 입에서 직접 이런말을 들으니 당혹스러울 지경인 민경. 그런 민경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리의 말이 이어진다.
“ 솔직히 나도 젊었을땐...기왕이면 날 진심으로 아껴주고 사랑해주는...때로는 내
허물까지도 감싸줄수 있는 그런 드라마나 동화 같은데 나오는 백마탄 왕자같은
그런 기사님을 만나고 싶다 그런 생각도 한때 했었어. ”
“ ...... ”
“ 하지만 그렇게 직장생활 하다 아는 사람 소개로 지금의 노정태 그 인간 만나고
그리고 어느덧 10여년 세월인데... ”
그런식으로 다시 횡설수설 늘어놓는 해리의 표정은 그녀 나름대로의 지금까지의 회한이 잔잔히 배어있어 보였다. 오후 햇살에 살짝 비치는 그녀의 얼굴과 눈빛이 그래서 사뭇 애잔해보이기까지 하는데, 민경은 말없이 자신도 음료수 한모금을 마시고 그리고 해리의 말을 계속 경청한다.
“ 사실 처음엔...노정태 그 사람...뭐 제법 예의도 있고 신사같아 보이는 그런 남자
였어. 다른건 몰라도...적어도 여자에 대한 배려심이란건 있어보이는 그런 남자였
거든 ? ”
“ 근데요 ? ”
“ 뭐 그러다보니...나도 뭐...이 정도 남자면 괜찮을것 같다. 뭐 무슨... ‘아 ! 그래
이 사람이야 !’ 그렇게까지 필이 팍 꽃히는 그런 사람은 아니더라도... ”
“ ...... ”
“ 그래 뭐 이 정도면 사업하는 사람이라니 재력도 어느정도 있어보이고...인품도
뭐 그만하면 무난해 보이고...그러다보니... ”
잠시 좀 힘에 부치는듯 한숨을 내쉬는 해리. 물기어린 눈빛이 여전히 슬픔이 남아있는 얼굴이다. 원래 술이 약한 민경이건만 그래도 해리의 이런저런 횡설수설을 들으며, 음료수를 새로 사오느라 몸을 움직이기도 하면서 그러면서 술은 좀 깨가는것 같다. 소주 두어병과 맥주 한캔이 놓여있는 술자리이건만 그러고보면 민경은 소주 한두잔과 그 외엔 주로 맥주만 마셨고 나머진 거의 해리가 마신 모양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은 해리보다 민경이 더 취해 있었던것이다. 지금은 다시 그 상황이 역전된 분위기이기도 하지만.
“ 그냥 뭐...복잡하게 고민할것 없이 이 남자면 되겠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
“ ...... ”
“ 솔직히 직접 살아보니까 말야. ”
“ 대체 형부의 뭐가 그렇게 문제인건데요 ? ”
생각해보니 그게 민경으로선 진짜 궁금해지는 부분이다. 사실 지금껏 해리는 사랑해서 한 결혼이 아니라느니 심지어 사랑같은것은 세상에 없다느니 추상적인 이야기만 늘어놓았지 남편의 구체적인 어떤 부분이 불만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어찌보면 소위 말하는 ‘꼭 집어 말할수 있는 그 무엇’이 있지는 않아도 전체적으로 봤을때 문제가 많은 그런 경우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여하튼 취한김에 민경 앞에서 남편에 대한 지금껏 쌓여진 불만을 있는대로 털어놓고 있는 해리. 민경 입장에서 해리의 이런말을 들으니 그녀가 딱해보일 지경이다.
“ 언니, 이제 그만 일어나죠. ”
시간도 어느정도 지났고, 무엇보다 술을 그렇게 나누면서 민경도 해리도 어느정도 취해있는듯 하다. 무슨 이 자리에서 만취가 되어 뻗어 꼴볼견이라도 보여주려고 이런 자리를 가진것은 아니지 않는가. 이쯤에서 자리를 파하는게 좋겠다는 공감대가 이미 해리와 민경 사이에 형성된듯 결국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술자리에 어질러진 병과 과자봉지등을 모두 치우고 큰길쪽으로 가서는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타고 두 사람은 함께 귀가를 하게된다.
평일 오전.
정태는 민경을 데리고 시내의 제법 이름난 고급 백화점에 와 있다. 의류매장에서 정태는 민경을 위해 새로 옷 한 벌을 맞추어주었다. 말쑥한 게다가 최신 유행으로 한 벌 빼입은 민경. 그 자태에 정태는 매우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 허허...경아... ”
일전에 민경과 술자리를 하는 자리에서 그녀에 대한 애칭을 ‘경아’로 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던 정태. 그 애칭을 지금 그와같이 부르고 있는것이다. 민경은 뭔가 부끄러운듯 살포시 고개를 숙이고, 정태는 그런 민경을 바라보며 말한다.
“ 확실히 내가 예상한대로야. 내가 짐작한 그대로라구. ”
“ 예 ? ”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린가. 민경으로선 좀 어리둥절해 하는데 정태는 뭔가 흡족해하는듯한 미소를 연신 지으며 그대로 말을 이어간다.
“ 일전에도 이야기했지. 경아는 지방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제법 서구적이고 도시적
인 분위기가 풍겨진다고. 그런 경아가 이렇게 말쑥한 새 옷을 차려입으면 어떨까.
늘 궁금해왔어. 그랬는데 역시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 이렇게 세련되고 멋진
도시적인 이미지를 한껏 풍기고 있으니까 말이야. ”
실제 민경은 정태의 집에 살면서는 대체로 츄리닝 바람의 수수한 차림새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태는 그런 민경의 자태에서 해리에게서 못 느끼던 새로운 매력을 느끼기라도 했던것일까. 일전에도 그런말을 한적이 있다. 촌티가 철철 넘치는 해리와는 달리 민경은 어딘가 모르게 도시적인 풍모가 느껴지는면이 있다고. 그런 민경에게 20대 처자에게 제법 어울릴법한 말쑥한 정장을 한 벌 맞춰준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옷을 차려입고 풍겨지는 민경의 자태에 정태는 만족해하고 있는것이다.
“ 저...그리고 경아... ”
“ 네, 형부. ”
정태는 민경을 ‘경아’란 애칭으로 부르는데 민경은 여전히 그를 형부라고 부르고 있다. 얼핏 다른 사람들이 보면 ‘저 두 사람은 대관절 무슨 관계인가 ?’ 오해하기 십상인 그런 호칭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정태는 살짝 난감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여러 가지로 신경이 쓰여서인지 민경에게 살짝 주의를 주듯 한마디 한다.
“ 오늘 그리고 내가 경아한테 옷 선물 한것은 언니한테는 비밀로 하지. 혹시 언니
가 이상하게 생각해할지도 모르니까말야. ”
“ 비밀로 하자구요 형부 ? ”
꼭 그렇게까지 해야하냐는듯 그와같이 묻는 민경. 그러고보니 이전에 정태가 함께 식사를 하자며 민경을 불러냈을때도 그런 약간의 트릭을 쓰기도 했다. 집에서 나올때는 해리한테 ‘친구를 만난다’고 핑계를 대라고 말을 하기도 했고 귀가할때도 약간의 시간차를 두어 민경이 먼저 집안으로 들어가게 하고 정태는 차로 동네 한바퀴를 더 돌며 시간을 번뒤 들어갔다. 헌데 또 이번엔 옷 선물 한것을 비밀로 하자는 정태. 이런식으로 가다보면 두 사람 사이가 진짜 무슨 은밀한 관계가 되어버리는것 아닌가 싶어 민경은 살짝 걱정도 된다. 무엇보다 다른것은 몰라도 해리언니에게 이런일을 비밀로 하고 싶지는 않은지 민경이 다소 난색을 표한다.
“ 꼭 그래야할 필요가 있을까요 ? 그리고 무엇보다...제가 예뻐진걸 알면 언니도
좋아할텐데. ”
다른것은 몰라도 자신만은 마치 친동생마냥 끔찍하게 여기는 해리. 그런 해리가 늘상 재투성이 아가씨처럼 집에서 이런저런 가사일에 찌들어있는 민경이 새 옷을 한 벌 해입고 달라진 분위기를 보면 싫어하지는 않을것 같다는 생각에 그와같이 말하지만 정태는 그런 민경을 더욱 주의를 주듯 한마디 한다.
“ 그...기왕이면 불필요한 오해 살 일은 하지 말자는 뜻에서 이러는것 아닌가. 처
제도 혹시 언니가 이런일로 괜히 처제에 대해 의심하고 그러면 기분이 좋지만은
않을거 아냐. ”
“ 그야, 그렇지만... ”
그래도 해리의 눈을 속이는 것이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듯한 모습의 민경. 하지만 일단 정태의 제안에 수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정태는 새 옷을 입은 민경을 한바퀴 휘 돌아보라고 하고 민경은 제법 뽐내듯 폼까지 잡아보며 한바퀴 돌아본다. 그야말로 잡지 사진같은데서 볼수있는 패션모델 같은 느낌이 느껴지기까지 하는 민경. 정태가 그런 민경을 짖궂게 살짝 안아보기까지 한다. 부끄러운듯 살포시 고개숙인 민경.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백화점에서 옷을 사 입고 그리고 인근에서 정태가 점심을 샀다. 사실 민경도 동네 미장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아주 백조는 분명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태의 부름에 미장원엔 집에 좀 일이있어 가보겠다고 하고 그를 만난것이다. 미장원에선 그간 민경이 대체로 성실하게 일해온 편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말을 딱히 의심하거나 하진 않았다. 그리고나서 만나게 된 두 사람. 백화점에서 정태가 옷을 한 벌 사주고 그리고 이렇게 점심식사까지 하며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것이다.
“ 근데 형부... ”
“ 왜 ? 처제...아니...경아... ”
자신을 꼬박꼬박 형부라 부르는 민경 때문인지 ‘경아’란 애칭을 정하자고 이미 말한바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태는 가끔 깜빡하고 그냥 ‘처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서는 스스로도 다소 놀라 당혹해하며 헛기침을 한번 해본다. 민경이 그런 정태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간다.
“ 언니하곤 요즘 무슨 문제 있으세요 ? ”
“ 문제 ? ”
사실 정태와 해리의 사이는 함께사는 민경 만큼이나 잘 아는 사람도 또 이 세상에 없을것이다. 불과 얼마전 아침식사 자리에서의 어색했던 기류, 그리고 뒤이어 해리는 민경보고 고수부지에나 가서 술이나 한잔 하자며 그녀 나름대로 정태에 대한 불만과 푸념을 횡설수설 늘어놓기도 했다. 그런것을 모두 지켜본 민경 입장에선 부부사이가 요즘 정말 심상치가 않구나 하는 짐작을 충분히 할만도 하다. 정태 입장에서도 그런 민경의 물음에 적당한 거짓말이나 얼버무림으로 넘어가진 못할것 같고. 정태는 한숨을 한번 내쉬어보인뒤 기왕 이렇게 된것 솔직한 속내를 털어보고픈 작정으로 천천히 입을연다.
“ 뭐 꼭...문제란게 있었다기 보단... ”
“ ??? ”
“ 요즘은 그저 집사람의 하나부터 열까지가 다 마음에 안 들어. ”
“ 왜요 형부 ? ”
“ 허허...글세...왜라... ”
대답하기가 난감한 것일까. 너털웃음을 한번 지어보일뿐 바로 다시 무슨 이야기를 더 꺼내지는 못하는 정태. 그도 그 나름대로 어떤 복잡한 속내가 있는것만은 분명해보인다. 그의 말이 이어진다.
“ 사실 일전에도 경아한테 말했지만 난 지금의 아내를... ”
“ ...... ”
“ 사랑해서 결혼했던것은 아냐. 사랑이라기 보단 어떤 의무감이라고나 할까. ”
집안에선 3대독자로 손 귀한 집안의 자손이기도 하고, 게다가 아버지때부터 해오던 중소기업을 2대째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는 처지이기도 한 정태. 그래서인지 사랑이라기 보다는 집안의 대를 이어가야 한다던가 자손을 번창하게 해야한다던가 하는 어떤 의무감에서 하게 된 결혼. 무엇보다 나이가 어느덧 30대 중반에 이르고 주위에서 어른들이 ‘장가가라’는 성화가 거듭되니 때마침 소개팅 제안도 들어오고 해서 별다른 거부감이나 망설임 없이 그 자리에 나갔던 정태. 그리고 만난게 바로 지금의 해리다. 하지만 충청도 출신이라더니 딱 봐도 촌티가 출출 흐르던 그때의 해리.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하튼 집안에서의 성화도 있고하니 딱히 그런 외모나 분위기 정도를 제외하면 다른 흠잡거나 나무랄데가 없어 선택한 그런 여자가 지금의 해리다. 그러니 적어도 정태 입장에선 해리에 대해 ‘사랑해서 한 결혼이 아니다’라고 말하는게 가능할수도 있겠다. - 하지만 따지고보면 그것은 해리 입장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 정태의 말은 거듭 이어진다.
“ 솔직히 말하자면... ”
“ ...... ”
“ 지금의 집사람을...이성으로...여자로 느껴본적이 없어. ”
“ 네에 ? ”
이런말까지 하는 정태를 보자 민경은 적잖이 충격을 받은듯한 모습이다. 그저 부부간에 종종 있을수 있는 사소한 불화 정도가 두 사람 사이에 있는것이려니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태는 아예 해리를 여자로 느껴본적이 없다고 한다. 이쯤되면 정말 심각한 상황 아닌가. 민경은 적잖이 긴장까지 되는 가운데 정태의 말은 거듭 이어진다.
“ 솔직히 지금이라도 가능하다면... ”
“ ...... ”
“ 처음부터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 그런 생각까지 들 지경이야. ”
“ 형부... ”
듣자하니 이건 좀 아니다 싶은지 살짝 끼어드는 민경. 처음부터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무엇보다 다른 사람도 아닌 민경 자신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 정태를 보자 그녀 입장에선 여간 난감해지지 않을수 없다. 무엇보다 정태가 이런 고백을 지금 한다고 해서 자신이 뭘 할수 있단 말인가. 지금 정태가 솔직하게 고백한 아내 해리에 대한 생각을 있는 그대로 해리언니에게 전하기라도 할까. 하지만 그렇다면 그것은 고자질 정도의 의미밖에 되지 않으리라. 정태의 지금 이런 해리에 대한 솔직한 마음을 그녀에게 전하는게 과연 두 사람 관계에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민경으로선 이 상황에서 어찌 대처하는게 현명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 여전히 몸둘바를 모르고 있고, 그런 상황에서 정태의 말은 다시금 이어진다.
“ 지금와서 정말 후회하는것은...내가 왜 그때 어른들 성화에 못 이겨서 원하지도
않는 그런 선자리...소개팅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에 나갔었나 하는 그런점이
야. 그리고 왜 그렇게 아무런 생각없이 지금의 집사람을 선택했는지말야. 솔직히
그때도 정히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솔직히 말할수도 있는것
을...이제와서 후회한적이 한두번이 아니야. ”
“ 형부... ”
“ 만약 내게 정말 시간을 한 10여년전 정도로...적어도 지금의 집사람...이해리
그 여자와 소개팅을 갖던 그 시간 이전으로 돌아갈수 있게만 해준다면... ”
“ ...... ”
“ 내가 적어도 지금의 이해리를 택하지는 않았을것이다. 그게 지금 내가 경아에
게 솔직히 해줄수 있는 말이야. ”
그후로도 정태는 낮에 종종 민경을 불러내어 백화점에 가서 크고 작은 선물을 사주거나 식사를 같이하거나 이런저런 구경거리가 있는곳에 데리고가서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정태야 개인사업을 하는 사람이니 자기가 시간내고플때 언제든지 시간을 낼 수 있지만, 민경의 경우엔 그럴때 집에 일이 있다고 하면서 일하는 미장원에 핑계를 댔다. 미장원 주인의 경우 민경이 지방출신이고 지금은 동향(同鄕)인 언니 집에서 함께 살고 있는것까진 알고 있었는데 여하튼 그 무렵까지는 민경의 그와같은 행동에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고 있었다. 하루는 그날도 민경과 함께 괜찮은 구경거리가 있는곳에서 데이트 비슷한 시간을 즐긴뒤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함께 밥을 먹으면서 정태가 민경에게 말을 건넨다.
“ 경아... ”
언제부터인가 정태가 민경을 부르는 애칭이 된 ‘경아’. 처음엔 정태도 막상 그렇게 붙이고 나서 쑥스럽거나 입에 붙지 않는지 ‘처제’와 ‘경아’란 호칭을 섞어가며 부르곤 했는데 이젠 많이 익숙해진듯 스스럼없이 그와같은 호칭으로 민경을 부르고 있었다. 정태의 말이 이어진다.
“ 그러고보니 언니나 경아나 둘 다 충청도 출신 아닌가. ”
“ 네, 그렇죠. ”
민경이나 해리나 둘 다 청주 인근 지역의 농촌출신. 그러니 따지고보면 둘 다 충청도 출신인 셈이다. 그걸 새삼 상기하는듯 하던 정태. 그리고 말을 이어간다.
“ 사실 난 그러고보니 지금껏 살아오면서... ”
“ ??? ”
“ 충청도 출신하곤 별 인연이 없었네. 그러고보니. ”
이건 또 갑자기 무슨소리인가. 어쨌든 사업을 하는 정태임을 감안한다면 별의별 지역 사람들을 다 만나게 될 수 있는 그런 직업일것이다. 게다가 정태 나이 이미 40을 넘겼음을 감안한다면 지금껏 충청도 사람과 별 인연이 없었다는것은 좀 이채로운 일이기도 하다. 정태의 말이 이어지고 있다.
“ 그...다만 그런 이야기는 종종 귀동냥으로 듣곤 했어. 충청도 사람들은 자기 속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던가...뭐 그런 말은 나도 들어봤는데 직접 겪어보니 그렇지도
않은것 같군. ”
하지만 따지고보면 결국 충청도 출신인 해리와 결혼했고 지금 정태 앞에 있는 민경도 충청도 출신. 헌데 두 여자 모두 기존에 귀동냥으로 들었던 이야기, 그리고 그로인해 생긴 편견과는 다소 거리가 먼 여자들이라는 그런 의미인것일까. 자기 속을 쉬이 안 드러낸다는 충청도 기질. 확실히 해리나 민경은 그런쪽과는 거리가 좀 있어보인다. 정태의 말이 계속된다.
“ 어쨌거나 뭐...지금 내가 굳이 지역색을 거론하려는것은 아니고...여하튼 내가 보
기엔... ”
“ ...... ”
“ 어쨌든 지금의 내 아내는 여성으로선 별다른 매력이 없어. 그래서 늘 후회해 왔
던거야. 어떤 의무감에서 선택한 결혼이다보니...볼때마다 느끼는거지만 지금 내
아내는 여성으로서의 매력은 전혀 없는 그런 여자야. 하지만 경아를 보면... ”
민경은 말없이 물을 한모금 마신다. 정태의 그런 말을 들으며 괜시리 긴장되어 있는듯한 표정. 정태의 말은 다시금 이어지고 있다.
“ 정말 제대로 내 마음을 끌리게 만드는 여자가 바로 경아야.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여자로서의 매력’ 그것을 느끼게 해주는게 경아라고나 할까. 경아...경아
는 내가 봤을때 천상 여자야. ”
민경은 말이 없다. 자신이 지금 이런 정태 앞에서 어떤 대꾸를 할 수 있을까. 그러고보면 이런말 정태가 지금까지 종종 입에 담아왔었다. 여하튼 지금의 아내 해리는 사랑해서 한 결혼이 아니고, 그때 조금만이라도 더 신중했더라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텐데. 그게 정태가 지금 나이 40이 넘어 하는 후회라고나 할까. 헌데 따지고보면 해리도 그 비슷한 취지의 말을 민경에게 한적이 있다. 해리 역시 ‘사랑...그딴거 웃기지말라고 해...’ 이렇게 에둘러 말하며 남편에 대한 애정이 별로 없다는 듯 말하곤 했다. 그러니 그런 두 사람의 고백을 다 들은 셈인 민경의 속은 복잡할수밖에 없다. 해리는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 자신이 정태 앞에서 무슨 말을 어찌 할수 있단말인가. 입술을 한번 지그시 깨물어보는 민경. 고개를 살포시 숙인채 말이 없다. 정태가 그런 민경의 손을 한번 살짝 잡아본다.
밤늦은 시간. 어느 모텔방. 차 한 대가 그 앞에 와 서있다. 다름아닌 정태와 민경이 함께 탄 차다. 여기까지 차를 몰고온 정태. 민경은 적잖이 당황한듯 하다.
“ 형부... ”
정태의 의도를 알 수 없어 당혹스럽고 두렵기까지 한 민경. 대체 이 남자 뭘 어쩌려고 이러는것인지. 하지만 정태는 그런 민경을 다독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간다.
“ 내 뜻을 오해하진 말아주었으면 좋겠어 경아... ”
“ 형부... ”
“ 그냥 난 경아와 좀 더 차분하게 우리 둘만 있을수 있는 그런 장소에서 술이나
한잔 하면서 이야기나 나누었으면 하는 그런 마음 뿐이야. 왜 ? 이러는 내가 이
상해보이나 ? ”
“ 형부... ”
망설이던 민경. 하지만 정태의 거듭된 설득에 넘어가 결국 둘이 함께 모텔방으로 들어간다. 정태는 미리 준비해온 와인병을 꺼내 뚜껑을 따며 모텔방에 있는 컵에 술을 따른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와인잔이 아닌 평범한 물컵이란게 좀 아쉽긴 하지만 어쨌든 정태는 나름대로 분위기를 내고 싶은가보다.
“ 경아... ”
“ 형부... ”
정태를 ‘형부’라고 부르는데 괜시리 머릿속이 어지러워지는 기분이다. 어쨌거나 해리와 민경이 무슨 친자매간도 아니고 다만 어릴때부터 한 동네에서 언니,동생 하며 그와같이 살아온 사이일뿐이다. 그럴진대 정태가 무슨 혈연관계로 이어진 그런 진짜 ‘형부’도 아니고 그냥 아는 언니의 남편일뿐.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까지 와버린 이상 자신이 정태를 형부라 부르는것 조차 적절한지 판단이 제대로 되지 않을 지경이다. 여하튼 여전히 긴장된 모습의 민경. 정태는 거듭 그런 민경을 다독여주며 마음을 안정시켜주려한다.
“ 내 누차 하는 이야기지만...경아... ”
“ ...... ”
“ 나한테 정말 10여년전에 그런 섣부른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
민경은 별다른 대꾸가 없다. 정태의 이와같은 태도에 정말 어찌 대처를 해야할지 제대로 판단이 서지 않는다. 그냥 말없이 앉아만 있는 그녀. 정태가 그런 민경을 살짝 안아보기까지 한다.
“ 이후에 다시 좀 더 나은 선택을 할수도 있었을텐데...지금 난 그런 후회를 하는
중이야. ”
“ 형부...아...아니 저... ”
이제 민경은 정태를 형부라 부르는것조차 죄스러워질 지경이다. 그래서일까. 호칭조차도 제대로 붙이지 못한채 어정쩡한 자세로 있는데 정태는 그런 민경을 잡아 이끈다. 아직 술도 입에 대지 않았는데 벌써 판단력이 흐려진것일까. 순간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이라도 든 것인지 민경은 그만 자신을 잡아 이끄는 정태의 품에 안겨들고 만다.
“ 경아... ”
어느 소설속 대사였던가. ‘경아...오랫만에 누워보는군...’ 하지만 지금 정태와 민경의 분위기는 그런식의 대화를 나눌만한 그런 상황은 분명 아닌듯 하고, 다만 모텔 침대위에 나란히 누운 두 사람. 착잡한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볼뿐이다. 한참만에 정태가 다시 입을 연다.
“ 경아는...사랑을 해본적이 있나 ? ”
이제 차마 정태를 더 이상 ‘형부’라 부르지 못할것만 같다. 다만 죄책감과 미안함에 민경의 가슴속이 뜨거워지고 있다. 그리고 그 뜨거운 기운이 이내 곧 눈물로 승화되어 버리고, 민경은 흐느끼고 있다.
“ 왜 우나 ? ”
민경의 손을 살포시 잡아보며 묻고있는 정태. 민경은 울음소리를 멈추고 어렵사리 입을 뗀다.
“ 죄송해요... ”
“ 죄송하다니 ? 뭐가 ? ”
대체 누가 누구더러 죄송하다고 하는것은지. 그 주체와 객체조차 불분명한 상황에서 민경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와같은 말만 거듭 입에 담는다.
“ 죄송해요...정말 죄송해요... ”
민경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쥔채 울음을 터트린다. 침대에 누운채로 두 손으로 얼굴만 감싸쥔채 울고있는 민경의 모습.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주체하지 못하는 민경의 심리상태가 그대로 나타나는것만 같다.
- 7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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