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을 곁들여 하는 저녁식사이건만 민경은 술에 좀 약한것일까. 포도주 한잔을 겨우 비우고 식사를 거의 다 마쳐갈때쯤이건만 둘째잔은 거의 입에 대지도 못하고 있었다. 의아한 정태가 물었다.
“ 민경이...민경인 술이 좀 약한가 ? ”
“ 예, 좀 그래요. ”
이미 알딸딸하게 취한 상태라 다소 흐트러진 말투로 그와같이 답하는 민경. 헌데 실은 해리의 집에서 살게되기 전까진 청주의 유흥업소에서 일해왔던 민경이 아닌가. 물론 해리는 민경의 과거에 대해 어머니가 첩이었다느니 이전까지 술집에서 일했다느니 그런 어두운 과거를 남편에게 굳이 말할 사람이 아니다. 해리가 자신의 구체적인 신상에 대해 어디까지 말했는지 민경으로선 판단하기가 쉽지 않지만, 여하튼 지금은 그런대로 취기가 올라서인지 대체로 별 생각없이 내뱉고 있는중이다.
“ 혹시...엄마를 닮았으면 술이 세지 않을까...나름 기대도 해 봤는데...헌데 막상
겪어보니까...제가 생각보다 술이 그렇게 세질 않더라구요. 그걸 나중에야 알았
는데...훗~! 그러면서 대체 무슨 배짱으로 지금껏 그런데서 일했는지... ”
정태로선 제대로 일아듣기 어려운 이야기를 횡설수설 내뱉고 있는데, 그런 민경의 모습이 되려 귀여워보여서일까. 야릇한 미소를 지어보인채 정태는 그런 민경을 바라만보고 있다. 그리고 술이 약하다는것을 정태 스스로도 이미 확인했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되려 민경에게 술을 더 권하고 있는중이다.
“ 그래도 그 잔은 마저 비우지그래. 이런곳에선 그것도 예의야. 두 번째 따라준
잔은 거의 입도 대지 않았구만 그래. 그러지말고 어서 비워. ”
무슨 의도라도 있는것인지 있지도 않은 주도(酒道)까지 즉석에서 만들어내며 민경의 판단을 헷갈리게 만들고 있는 정태. 결국 민경이 하는수없이 두 번째 잔을 한 3분의 1 정도 비우고 그때쯤 정태가 민경에게 다시금 말을 건넨다.
“ 민경이...그런데말야. ”
“ 네, 형부. ”
어느정도 취한 상태에서도 정태만은 꼬박꼬박 형부라 부르고 있는 민경. 하지만 정태는 그런 민경에게 되려 엉뚱한 제안을 한다.
“ 우리 그러지말고 애칭같은거 하나 정하는거 어떨까 ? ”
“ 네 ? 애칭이요 ? ”
취기가 어느정도 올라서인지 민경은 정태가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진 못한듯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되려 그런 민경을 바라보며 일방적으로 자기 생각을 말하고 있는 정태. 그의 말이 이어진다.
“ 실은...처제란 말은 웬지 좀 거리감이 느껴지고...‘민경이’ 이런식으로 부르는것도
좀 뭣해서말야...우리끼리만 통할수 있는 어떤 애칭같은거 정하면 어떠냐구 ? 어
때 ? 민경이 ? 우리 애칭 하나 정해보는거 ? ”
“ 네, 뭐...좋아요 형부. ”
정태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것인지 제대로 판단하는 것인지 별다른 고민없이 그냥 수락해버리는 민경. 정태는 그걸 그대로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으로 생각하고 곰곰이 생각하는체 말을 이어간다.
“ 가만...그럼 애칭을...과연 어떤게 좋을까 ? 민경이...이름이 민경이니까...경이...
이건 좀 발음이나 운율이 맞지 않는것 같고. 옳지 !!! ‘경아~!’ 어때. 그렇게 불러
보는거야. 경아. 괜찮지 않나 ? ”
민경의 마지막 글자를 따서 ‘경아’라 부르겠다고 하는 정태. 민경은 취한 상태에서 그 제안을 승낙해버리고 정태는 그 자리에서 핸드폰에 등록된 민경 연락처 이름까지 그대로 ‘경아’로 바꿔버린다. 그리고 그걸 민경에게 확인까지 시키는 정태. 민경은 별다른 거부반응 없이 정태의 그와같은 행동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식사를 마치고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는 두 사람. 헌데 와인 두잔에 그 정도로 취한것인지 민경은 자리에서 일어나다 비틀거리며 쓰러질뻔 하기까지 한다. 놀란 정태가 바로 민경을 부축하며 말한다.
“ 허허...이런. 우리 경아 진짜 술이 약하긴 약한가보군. 이를 어쩌나. ”
“ 죄...죄송해요 형부. ”
“ 하하...아니야. 죄송할게 다 무에야. 우리 경아 이런 모습이 난 더 귀여워 보이
는걸. 가만있자 그나저나 이를 어쩐다. 우리 경아가 이렇게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니... ”
망설이는듯 주위 눈치를 보다가 갑자기 정태는 민경을 번쩍 안아올린다. 순간 레스토랑안의 다른 손님이나 종업원들이 다 놀랄 지경이다. 정태는 카운터에서 카드결재를 대충 해달라고 말하고는 민경을 그렇게 안은 상태로 바로 식당을 나온다. 그리고 레스토랑 주차장에 세워놓은 차에까지 그대로 민경을 안은채로 데리고 가는 정태. 자동 리모콘으로 문을 연뒤 그 안에 민경을 태운다.
“ 허허...우리 경아 진짜 많이 취했나보군. 좀 어때 경아 ? ”
정태의 말을 알아들은것인지 알아듣지 못한것인지 민경은 그냥 조수석에 풀썩 쓰러진 상태고 정태가 손수 안전벨트를 채워준다. 그리고 자신은 운전석으로 가서 앉고 차를 운전하기 시작한다.
“ 우웅...형부...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차는 어느새 집앞까지 당도해 있었다. 차안에서 별 생각없이 바로 곯아 떨어져버린 민경. 신음소리 같은것을 내며 깨어나는듯 하더니 바로 화들짝 놀라버린다.
“ 어머...형부, 여기가 어디에요 ? ”
“ 하하...어디긴 벌써 집에까지 다 왔지. ”
“ 어머, 그래요. 죄...죄송해요... ”
“ 하하...죄송할게 뭐 있나. 아무튼 민경이가 술이 그렇게 약한지는 나도 몰랐군.
겨우 포도주 두 잔에 그렇게 만취가 되어버릴줄이야. ”
아까 레스토랑에선 ‘경아’란 애칭까지 지어주었건만 혹 취중이라 제대로 기억을 못하는 민경이 놀랄까봐 바로 그와같이 불러주는 노련함까지 보인다. 민경은 거듭 정태에게 미안하다며 사과를 하고, 정태는 괜찮다고 하면서 잠시 뭔가 생각을 하는듯 하다 말을 건넨다.
“ 그나저나...처제 먼저 집으로 들어가던가 하지. 난 이 근처 한바퀴 돌아보고 들어
갈테니까. ”
“ 네 ? 왜요 ? ”
갑자기 무슨소린가 좀 의아한 민경. 정태가 설명을 덧붙인다.
“ 아니, 그냥...이 시간에 함께 식사까지 하고 술도 나눈걸 혹 언니가 알면 이상하
게 생각하지 않을까 해서. 그러니 일단 처제가 먼저 들어가도록 해. 아까 말한것
처럼 언니한텐 고향친구를 만난걸로 하고. 난 차로 이 동네 한바퀴 좀 돌며 시간
을 벌다가 들어갈터이지. ”
“ 형부도 참...제가 서울에서 만날만한 고향친구가 없다는건 언니가 더 잘 알걸요
? ”
핑계거리치곤 너무 허술해 보이는지 민경이 되려 그와같이 말한다. 하지만 자기 생각에도 괜히 해리한테 쓸데없는 오해를 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정태의 말대로 하기로 하고 차에서 내린다. 그리고 집안으로 들어간다.
하루는 정태가 회식약속이라도 있었는지 사전 연락도 없이 술에 거나하게 취해 밤늦게 귀가를 했다. 보통 늦는일이 있으면 늦는다고 간단하게 아내한테 문자라도 주었던 정태였는데, 이런 경우는 이전에 없었던지라 해리는 적잖이 화가 나 있었다. 밤늦게서야 술냄새를 잔뜩 풍기며 집안으로 들어서는 정태에게 해리는 짜증을 낸다.
“ 뭐야 당신 ? 늦으면 늦는다고 전화라도 주던가 하다못해 문자라도 간단히 보내
기라도 할것이지. 기다렸잖아. ”
“ 응... ? 어어...미안해 당신... ”
꼬부라진 목소리로 말도 제대로 내뱉지 못하며 아내를 적당히 흘겨보는 정태. 그래도 2층으로 올라갈 정신은 남아있는지 성큼성큼 계단을 통해 2층에 있는 침실로 올라간다. 해리가 걱정이 되는지 그 뒤를 따르고 방에 들어선 정태는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않은채 벌러덩 그대로 침대에 누워버린다.
“ 아휴, 이게 다 뭐야 ? 당신...옷이라도 좀 갈아입고 눕던가 하지. 하유...냄새...
”
술냄새에 몸냄새에 남편에게서 풍기는 역겨운 냄새가 한둘이 아닌지라 해리는 순간 코로 입을 막아보기까지 하고, 그러면서 대충 양말이며 남편의 웃옷을 벗겨주기도 한다. 정태도 그런 해리의 손길은 느껴지는지 대충 단추라던가 이런데를 풀어헤치며 돕는 시늉을 하는데, 하지만 이내 곧 지치는듯 팔,다리의 맥이 풀리고 만다. 하지만 완전히 곯아 떨어진 정도는 아닌지 게슴츠레 뜬 눈으로 있는 남편.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대충 속옷바람이 된 정태가 그러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다.
“ 야... ”
“ 뭐야 ? 무슨 할말이라도 있어 ? 할말있으면 내일 이야기 하던가. 오늘은 이만
자. ”
어차피 술에 취해 정상적인 정신상태는 아닐듯한 정태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지는 않은지 핀잔조로 해리가 한마디 내뱉는데 헌데 정태가 슬몃 그런 해리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이 남자가 갑자기 왜 이러나 ?’ 순간 의아해지는 해리. 하지만 아직 술이 덜 깬 상태라서 저러려니 생각하고 찬 음료수나 가져다줘 정신이 좀 나게할까 하는 생각에 달작지근하면서도 차가운 쥬스를 1층 냉장고에서 가져온다. 하지만 정태는 그 쥬스를 다 마시지는 않고 한 3분의 1쯤 비운뒤 옆 테이블에 내려놓고, 그리고는 해리를 다시금 바라보며 뭐라고 말을 건넨다.
“ 너...누구냐 ? ”
“ 뭐라구 ? ”
이 남자가 아직 술이 덜 깼나보네. 그냥 쓰러져 잤으면 좋겠구만 딱 그런 심리상태인 해리. 따라서 지금 느닷없는 남편의 헛소리엔 별로 대꾸하고 싶지 않은지 쥬스잔을 저쪽으로 치우며 자신도 잠자리에 들려한다. 헌데 그런 해리를 정태가 잡아이끈다.
“ 악, 뭐야 ? 어서 자기나 해. ”
“ 아니, 그런게 아니라...너 누구냐구 ? ”
이 남자 진짜 단단히 취했나보네. 그래도 평상시 이렇게 술주정까지 하는 남편은 아니었는데, 지금은 대체 왜 이러는지 해리로선 종잡을수가 없다. 하지만 여하튼 취해서 그러려니 생각하고 지금 남편의 말이나 행동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시빗조로 거듭 뭐라고 말을 붙이려는 정태. 그의 말이 이어진다.
“ 참...이게 여자냐...남자냐... ”
“ 대체 무슨 헛소리야 ? 밤중에 봉창 두드리는것 같은 뜬금없는 소리 그만 지껄
이고 어서 자기나 해. ”
“ 아니, 자기전에 나 분명히 좀 짚고 넘어가고 싶은게 있어. 야, 도대체 어딜 봐
서 니가 내 아내냐 ? ”
“ 뭐라구 ? ”
“ 여자가 도대체가 여자다운 구석이 하나라도 있어야 말이지. 도대체가 얼굴이 이
쁘길해, 그렇다고 몸매가 섹시하길 해. 아니면 성격이 사근사근 하거나 순종적이
길 해. 도대체가 남편 말 한마디 지려하지 않고 매번 따박따박 대들기나 하고...
집안 돌아가는것도 순전히 늘 지 멋대로 독단적으로만 하려들고. ”
“ 그만 자 !!! 쓸데없는 이야기 그만하구. ”
진짜 술에 취해 하는 헛소리인지 아니면 술김에 그동안 품고있던 아내 해리에 대한 불만을 일거에 쏟아놓고 싶기라도 한 것인지 해리 입장에선 들어서 그리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가 계속 정태에게서 주절주절 흘러나오고, 해리는 그런 정태의 술주정을 받아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지 외면하려 한다. 하지만 그런 해리의 태도가 정태를 더 화나게 만든다.
“ 아니 근데 이 X이...하늘같은 서방님 말씀이 말로 안 들리나 ? 야 !!! 니 귀에는
서방 말이...사람 말로 안 들리고... ”
“ 왜 그래 정말 !!! 밤늦게 술먹고 들어와서는... ”
웬만하면 술주정으로 여기고 대충 참고 넘어가려 했는데 정태의 하는 소리가 점점 가관이라서일까. 결국 화를 내며 버럭 소리를 지르는 해리. 하지만 아내의 그런 태도가 정태의 부아를 더욱 돋군다.
“ 아니, 근데 이게 어디서 성질이야 ? 너, 내가 술에 취했다고 그냥 생각없이 헛
소리 지껄이는줄 알아 ? 너말야 너... ”
“ 그만 하랬다... ”
이까지 악물면서 정태를 바라보며 말하는 해리. 그녀도 이쯤되면 더 이상 참을수 없는 지경이고도 남을일이다. 하지만 밤늦은 시간이고 술취한 남편과 지금 길게 말싸움 하고 싶지가 않은지 해리는 결국 그쯤에서 물러나고 만다. 방에 있어봐야 남편의 헛소리만 계속될거 같아 해리는 방문을 쾅 닫고 1층으로 내려가버린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 일어난 정태는 간밤의 일이 끊긴 필름처럼 제대로 기억이 안 나는지 지끈지끈 아픈 머리를 손으로 어루만져보며 간밤의 일을 되뇌어본다. 1층 아이들 방에서 간밤을 보냈던 해리가 2층으로 올라온것은 그때다.
“ 일어났어 ? ”
헌데 어제일이 민망하기라도 한 것일까. ‘피식~!’ 헛웃음까지 흘리는 정태. 해리로서도 간밤일은 술에 취해 한 남편의 실수 정도로 여기고 넘어가는게 좋을것 같다는 생각에서인지 그 일에 대해 더 언급하진 않는다. 어느덧 민경이 아침상을 다 봐놓았기에 밥이나 먹으러 내려오라고 말하는 해리. 헌데 정태는 어제 확실히 과음한것일까. 속이 완전히 풀린 상태가 아니라서인지 아침이 제대로 넘어가지 않는다.
“ 어우...근데 이거...처제가 끓인 해장국이야 ? ”
밥은 거의 넘어가지 않는 상태에서 민경이 끓여놓은 해장국 국물만 연신 떠먹어보며 속을 달래고 있는 정태. 해리가 그런 남편을 보며 살짝 놀리듯 한마디 한다.
“ 당신도 참...팔자 좋은건줄 알아. ”
“ 뭐라구 ? ”
이건 또 뜬금없이 무슨 소린가. 정태가 의아한 얼굴로 해리를 바라보는 가운데 그녀의 말이 이어진다.
“ 세상에 참...술취해 밤늦게 들어온 형부 위해서 해장국 정성스레 끓여다 바치는
처제가 다 있질않나. 그러니 복받은줄이나 알라구. 민경이니까 이러는거지 나였으
면 진짜 국물도 없어. ”
해리의 말에 괜시리 기분이 묘해진 정태는 피식 헛웃음을 흘리고, 민경은 그 사이 살짝 해리와 정태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해리는 여전히 사뭇 의기양양한 얼굴로 빈정거리듯 남편에게 한마디 툭 던진다.
“ 그러니까 당신말야. 아무래도 민경이 우리집에 들인거 잘 했지 ? 솔직히 요즘
세상에 어디 이렇게 우리 민경이처럼 똑부러지게 일하는 애가 있겠어. 내가 뭐
민경이 여기서 가정부나 시키려고 데려온건 아니지만...참...이쯤되면 민경이도
지극정성이다. 하여튼 너도...이런 인간이 뭐 좋다고 해장국까지 끓여다바치냐
? ”
민경에 대한 항의라기 보단 남편 정태에 대한 불만을 그와같이 입에 담은 것으로 봐야할 해리의 말. 민경은 그녀대로 어색해서인지 살짝 한마디 끼어든다.
“ 언니, 그만하세요. 이러면 제가 무안하잖아요. 형부도 뭐...힘든일이 많으셨나보
죠. ”
“ 얼씨구 ? 얘가 이제 형부 역성까지 드네요 ? 야, 솔직히 까놓고 말해 이 인간이
힘들일이 뭐가 있어 ? 돈을 못벌어 ? 그렇다고 마누라나 자식이 없어. 돈 있겠다
처자식 있겠다. 누가봐도 세상 부러울게 하나 없을것 같은 한참 잘나가는 중소기
업 사장님이시구만 뭐. ”
“ 그만해요. 이러다 진짜 아침부터 싸움날라. 형부, 어서 마저 드시고 출근준비 하
세요. 이러다가 늦겠어요. 속이 영 안 좋으시면 밥은 이리 주시고요. 남은밥은 차
라리 제가 다 먹을게요. ”
그러면서 술기운이 아직 남아있어 국물외에 다른 음식물이 제대로 넘어가지 못하는 정태에 대한 세심한 배려까지 하고있는 민경. 이쯤되면 정태에 대해선 해리보다 민경이 더 세밀하게 파악하고 있는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해리는 그저 간밤에 술먹고 술주정까지 한 남편에게 바가지만 긁고 있을뿐인데, 민경은 그런 정태가 술이 덜 깨 식사나 제대로 할 수 있는것인지 그런 몸상태까지 걱정해주는 모양새가 되어있는것 아닌가. 덕분에 살짝 어색해진 아침상 분위기. 정태는 아무래도 자신이 피하는것이 이 어색함을 빨리 종료시키는 것이란 판단이 들어서인지 남은 국물을 마저 마신뒤 출근준비를 서두른다.
얼마후. 정태가 출근을 하고 민경은 마침 일하는 미장원이 쉬는 날이라 집에 있는데, 해리가 그런 민경을 불렀다. 집에 있는날에도 하다못해 허드렛 청소라도 하면서 도대체가 몸을 쉬는일이 없는 민경. 그런 그녀가 안쓰러워서라도 커피라도 한잔 마시렴 하고 불러내서는 말을 건네는 해리.
“ 민경아, 우리 그러지말고 같이 어디 놀러라도 갈래 ? ”
“ 놀러요 ? ”
“ 응, 뭐 그냥 여러 가지로 기분전환도 하고...그리고 솔직히 이런날도 흔치는 않
잖아. ”
사실 얼마전 아침식탁 자리에서 좀 어색한 일이 있어서 해리는 민경한테 미안한 마음이 조금 있었다. 남편 정태와 사소한 말다툼이 벌어졌는데, 거기에 민경이 되려 민망했는지 말리려 들었고 그러다 본의아니게 정태 역성을 드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이 아니라 남편 정태편을 든것에 조금 마음이 상해 있는 상태이기도 했던 해리. 하지만 이런일로 동생한테 너무 삐져있는것도 좀 옹졸한 심사 같아서 피차 기분이나 풀겸 이런 제안을 한 것이다. 민경이 아주 백조로 정태의 집에 있는것도 아니고 아르바이트로 동네 미장원에 일을 나가기도 하니, 어차피 해리와 민경이 낮에 함께 집에 있는것도 그리 흔치는 않은 일이다. 그래서 이런날 민경과 가벼운 화해의 자리라도 갖고 싶은것이 해리의 마음인것이다. 민경과 함께 한강 고수부지로 놀러간 해리. 가까운데로 놀러가자더니 사실 해리의 집에서 고수부지까진 거리가 좀 된다. 그래서 택시를 잡아타고 가게 된 두 사람. 해리가 근처 편의점에서 술과 안주거리를 사와서는 그것을 펼쳐놓고 먹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 근데 민경이 너 진짜 술은 좀 약한가보구나. ”
그러고보니 해리도 민경과 이렇게 단둘이 술을 해 본 경험은 별로 없는것 같다. 해리가 대학에 진학하면서 고향마을을 떠날 때 민경이 겨우 초등학교 6학년이었으니 이후 성인이 된 민경과 함께 술을 마시거나 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다 이렇게 해리가 민경을 서울로 불러서 한 집에 살게된 두 사람인 것이니 해리 입장에선 생각보다 술이 약한편인 민경에 좀 뜻밖이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 근데...이렇게 술도 별로 못하는 애가 그동안 어떻게 그런데서 일했어 ? ”
민경이 유흥업소에서 일한것이긴 하지만 분위기가 그렇게까지 천박한곳은 아니고, 하지만 그래도 남자 손님들의 가벼운 술시중 정도는 해야하는 그런 업소였다. 꼭 남자 손님이 주는 술을 받아 마시거나 하기까진 하지 않아도 여하튼 술이 약한편인 여자가 버틸만한곳은 분명 아니었다. 그래서 의아한듯 물어본 해리. 소주를 한잔 겨우 마시고는 이후엔 맥주만 꼴깍꼴깍 들이키는 민경이 이미 살짝 맛이 간 목소리로 답해준다.
“ 그냥 뭐...손님 몰래 쏟아내기도 하고...어떨땐 그냥 아예 아프다...심지어 그날이
다. 이런저런 핑계대고 그랬어요. 생각보다 술 못한다는 핑계 댈만한게 꽤나 많
더라구요. ”
“ 그래 ? 어쨌거나 다행이구나. ”
하지만 대신 거짓말 하는 실력만 늘어난것은 아닐까 살짝 걱정이 되는 해리. 술이 약한 민경이니 만큼 안주를 조금 앞에 더 가져다주는 배려를 해준다. 그러면서 다시 해리가 말을 건넨다.
“ 근데 민경아. ”
해리는 민경에 비해 그래도 상대적으로 술은 좀 하는편인지 소주 두어잔이 들어갔음에도 아직 그리 흐트러지진 않은 모양새다. 그런 모습으로 민경을 바라보는 해리. 그녀의 말이 이어진다.
“ 노정태...노정태 그 자식말야... ”
“ 노정태라뇨 ? 형부 말이에요 ? ”
민경이 해리의 집에 있은지도 이미 시간이 꽤 지났고 무엇보다 그녀의 남편 이름을 현재는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는 그녀다. 따라서 자신(해리)의 남편을 그것도 이름을 부르면서 ‘그 자식’ 운운하는것을 보니 민경으로선 적잖이 놀라는 반응을 보인다. 아직 그리 취하지도 않은것 같은데, 어찌된 영문인지 남편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하는 해리. 민경은 술대신 다른 음료수를 마시며 과자 몇조각을 집어먹어서인지 정신은 조금 난 상태로 그런 해리를 바라본다.
“ 완전 지 멋대로고...알고보면 순 이기적이고 고집적인 그런 녀석이야. 또 말은
얼마나 험하게 하는지 아니 ? 툭하면 날보고 못생겼다느니...덩치가 크다느니...
미X자식...그런 지는 얼마나 잘나서... ”
사실 어릴때 고향에서 비슷한 연령대의 다른 10대 소녀보다 비교적 큰 체구 때문에 할머니로부터도 ‘계집애가 저리 기골이 장대해서 어디다 쓰누 ?’ 하는 소리까지 들었던 그런 해리가 아닌가. 그것이 나름 사춘기 시절의 상처이기도 했는데 지금와서 남편으로부터까지 그런 소리를 듣는다면 그로인한 모멸감과 치욕스러운 느낌은 말할수 없을것이다. 확실히 남편의 그와같은 태도에 단단히 상처받은 듯한 모습의 해리. 민경을 바라보며 말한다.
“ 민경아, 그러니까말야 너. ”
“ 네 ? 제...제가 뭘요. ”
순간 괜히 찔리는것이라도 있는지 화들짝 놀라기까지 하는 민경. 해리가 그런 민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횡설수설 늘어놓는다. 괜시리 가슴이 두근거리는 민경. 해리의 말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 니가 나대신 노정태 그 자식 욕을 좀 해줘라. ‘야, 노정태 너 이 X식...니가 잘
났으면 얼마나 잘 났냐 !!! 욕이라도 좀 한바탕 해달라구 !!! ”
“ 어...언니... ”
확실히 얼마전 아침식사 자리에서 자신이 정태 역성을 조금 든것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듯 했다. 그래서일까. 되려 민경보고 자기 남편 욕 좀 해달라고 하는 해리. 술에 취해 내뱉는 실없는 소리려니 하고 넘어가려 했는데, 해리는 마치 강요라도 하는듯한 투로 민경에게 말한다.
“ 뭐 해 ? 욕좀 해달라니까. 노정태 그 자식 욕 좀 해달란말이야 !!! ”
“ 어...언니... ? ”
“ 안 해 ? 이게 그냥 확...언니 진짜 화낸다. ”
이젠 해리도 확실히 취기가 올랐는지 평정심을 잃은듯한 모습까지 보인다. 하지만 밑도끝도 없이 자기 남편 욕을 해달라는데 이걸 대체 어찌 받아줘야 한단 말인가. 난감해하고 있는 민경에게 해리가 거듭 보챈다.
“ 따라해봐 강민경. 이렇게 하란말이야. 야 !!! 임마 노정태 !!! ”
이젠 아예 따라하라고까지 하는 해리. 하는수없이 민경은 그녀가 시키는대로 해준다. 어차피 민경도 취기가 오른 상태이니 이판사판이다 하는 심정이기도 하다.
“ 야 !!! 임마 노정태 !!! ”
그렇게 버럭 소리를 질러본 민경. 순간 지나가는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그쪽을 지켜보기까지 할 지경이다. 해리가 다시 민경에게 요구한다.
“ 노정태 너 이 X식 니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냐 !!! ”
“ 노정태 너 이 X식...니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냐 !!! ”
그렇게 해리가 시키는대로 정태를 비난하는 말을 두어번 입에 담은 민경. 술기운 때문인지 얼굴이 화끈거려온다. 해리는 자신이 시키는대로 해준 민경이 기특한듯 박수까지 쳐준다.
“ 그래그래...바로 그거야. 잘했어. 아주 잘했어요 내동생. 그러게 내 착한 동생이
지...우쭈쭈쭈~~~!!! ”
다가와선 민경을 안아보기까지 하는 해리. 술내가 확 풍긴다. 마치 자신이 유흥업소에서 일할 때 술취해서 자신에게 수작부리던 그런 남자들이 순간 연상되기까지 하는 그런 해리의 행동이다. 불편한듯 살짝 해리를 밀쳐낸 민경. 해리는 술과 안주를 쌓아놓은 자리로 가서 풀썩 주저앉는다.
“ 근데 언니... ”
“ 왜 ? 강민경... ”
“ 언니는...형부 사랑하지 않아요 ? ”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태와 해리 사이에 단단히 무슨 문제가 있는것처럼 생각되어 그렇게 묻는 민경. 해리가 잠시 그런 민경을 바라보다 피식 웃어보인다. 그리고 주절거린다.
“ 사랑 ? 글쎄...사랑이라...푸훗~! ”
“ 어쨌든...형부 사랑해서 결혼했을거 아니에요 ? ”
그러면서 지금와서 왜 이러느냐는듯 정말 이해할수 없다는듯 묻고있는 민경. 해리가 그런 민경을 바라보며 말한다.
“ 민경아 !!! ”
“ 말씀하세요 언니. ”
“ 넌 사랑을 믿냐 ? 진짜 세상에 사랑같은게 있을거라 생각하냐구 ? ”
“ 그...글쎄요 뭐... ”
이런 질문에 대체 무슨 대답을 어찌할수 있을까. 태고 이래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소설가며 작가들이며 문화예술가들도 끝끝내 답을 알아내지 못한 사랑의 실체를 어찌 일개 20대 여성에 불과한 민경이 지금 명답을 낼 수 있으랴. 술기운이 어느정도 오른 해리의 횡설수설에 그저 어쩔줄을 모르고 있을뿐. 헌데 해리는 그런 민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절망스러운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보고는 말한다.
“ 내가 볼땐 없어...그까짓 사랑은... ”
“ ...... ”
“ 없단말이야. 내가 봤을때...적어도 사랑이란것은...사랑 ? 훗...웃기고들 자빠졌네
전부 다 웃기는 수작들이지. ”
- 6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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