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 !!! 이 배신자야 !!! 야, 이 천하의 변절자야 !!! ”
“ 아악~~~!!! 민경아 !!! 민경아, 왜 이래 ? ”
“ 왜 이러냐구 ? 왜 이러는질 몰라서 물어 ? 니가 !!! ”
해리와 승호가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집 문앞에서 바로 목격한 민경. 그리고는 바로 해리를 집안으로 끌고 들어와서는 머리채를 잡고 한바탕 그녀를 꼬집고 물어뜯고 할퀴고 난리를 친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해리를 ‘엄마’라 부르며 깍듯이 대하던 그런 모습은 이미 오간데 없다. 충격을 단단히 받은것일까. 민경은 해리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가 극에 달해있는 그런 모습이다. 치를 떨고있는 민경. 한편 승호는 조금전 워낙 황망했었음인지 민경에게 그 장면을 들키고는 바로 저멀리 도망가버린 뒤다. 해리로선 딱히 누가 자기 역성을 들어주거나 옹호해줄수도 없는 상황에서 민경의 욕설과 구타를 받고만 있다.
“ 민경아...민경아 오해야 이건...조금만 진정하고...조금만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
봐 !!! ”
“ 진정 ??? 오해 ??? 니들 둘이서 그렇게 죽고 못살아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여기에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해 ? 무슨 변명이 더 필
요해. 너 따위가 감히...너 따위가 감히 우리 아빠를 우롱해 ? 병들어 쓰러진 우
리 아빠를 기만을 해 ? 이 천하의 X일년...너 내가 절대로 용서안해. X여버릴거
야. 이 자리에서 당장 죽여버릴거라구 !!! ”
“ 아냐...그런거 아냐 민경아. 정말 오해라니까. 진정하고...조금만 진정하고 내 이
야길 좀 들어줘. ”
솔직히 아주 잠깐이나마 해리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은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저돌적으로 다가오는 승호의 품에 안겨 잠시나마 세상 모든 근심,시름을 다 잊은듯한 해리 가슴속에 잔뜩 응어리진 그 무엇이 한꺼번에 녹아내리는듯한 그런 묘한 안온함을 느끼기도 했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직전까지는 승호의 구애를 단호하게 거절하며 심지어 민경이와 자신의 관계를 생각해서라도 이러면 안 되는것 아니냐고 승호를 나무라기까지 했던 그런 해리가 아닌가. 그런 해리라면 솔직히 변명을 하자면 얼마든지 할수도 있는 처지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에 치를 떨고 있는 민경은 그녀의 변명따위는 단 한마디도 들어주고 싶지 않은 그런 태도였다. 솔직히 그동안 얼마나 각별하게 여겼던 해리인가. ‘새엄마’도 아니고 ‘엄마’라고 부르며 얼마나 깍듯이 해리를 대해주었던 그런 민경이던가. 헌데 그런 자신임을 알면서 다른 사람도 아닌 승호와 그러고 있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민경. 그 배신감에 그야말로 온몸을 부르르 떨며 치를 떨고 있었다. 이런식으로 자신은 물론이고 병석에 누워있는 아버지까지 철저히 우롱하고 기만한 해리를 도저히 용서할수 없다는 그런 태도로 나오고 있다.
“ 내가 이야기 했었지... ”
다음날, 날이 밝고서 그나마 흥분되었던 감정이 좀 가라앉은채로 민경이 해리에게 다가와선 말을 건넨다. 간밤에 워낙 한바탕 난리를 치는 바람에 거실은 어질러질대로 어질러져있는 상태다. 하지만 해리나 민경이나 두 사람 다 이런 거실을 치우거나 할 상태는 아니고 두 사람 다 뭔가에 홀리거나 넋이 나간듯 반쯤은 정신을 잃은듯한 그런 모습으로 망연자실해 있으면서 민경이 그러다 한참만에 말을 건넨것이다.
“ 내가 말했었잖아. 부담줄 생각 없으니까...정 아픈 우리아빠 병 구완할 자신 없
으면 떠나도 좋다고. 이해할테니까...떠나고 싶으면 떠나도 좋다고 내가 그랬지
? 근데...그때는 안 그런다더니...왜 이제와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 왜 사
람을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만들어 !!! ”
아버지가 쓰러지고 나서 민경이 바로 그러지 않았던가. 일이 이렇게 될줄을 모르고 해리에게 자신의 새엄마가 아버지의 재혼상대가 되어달라고 했던게 너무 미안하다며, 정히 자신 없으면 이대로 떠나도 좋다고 했을때 해리는 사뭇 결연한 어조로 말했었다. 그럴일 없다고. 자신은 진심으로 강철규를 사랑하고 그 딸인 민경이도 아낀다며 둘이 함께 아버지 곁을 지켜드리자고 굳게 약속까지 하지 않았던가. 헌데 그랬던 해리가 이렇게 된것을 보자 민경은 더더욱 비참하고 마음이 아픈것이다. 단순한 배신감이나 분노 그 이상의 형언할수 없는 어떤 감정이 민경을 잔뜩 주체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해리를 정말이지 이 자리에서 쏴죽여도 직성이 풀리지 않을것만 같은 민경의 모습. 헌데 한참만에 해리가 입을 연다.
“ 강민경...나 한가지만 묻자. ”
“ 묻다니 ? 뭘 ? ”
“ 너...승호 그 사람한테 마음이 있었던거니 ? ”
“ 뭐라구 ? ”
애초에 직장 동료들과 회식자리에 직장선배의 친구 자격으로 우연히 그 회식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던 의사인 승호. 헌데 그때부터 민경에게 반한것인지 관심이 갔던것인지 자신의 친구인 직장선배에게 민경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기까지 하며 다가왔던 그런 승호가 아니던가. 하지만 민경은 남자의 마음을 받아들이기엔 아직 자신이 없었던것인지 되려 해리보고 좀 어떤 사람인지 만나도 괜찮을지 대신 좀 만나봐 달라고 그런 부탁까지 했었다. 그런 민경인걸 보면 딱히 승호를 좋아했거나 한다고도 볼 수 없지 않은가. 단순히 젊은 새엄마 해리가 남자가 생긴것에 대한 배신과 분노인가. 하지만 그에 앞서 이미 민경이 ‘정히 자신 없으면 아빠곁을 떠나도 좋다’고 까지 말한것을 감안하면, 굳이 이 정도를 가지고 이렇게까지 분노하거나 격분하는것은 좀 지나친 면이 있다. 그 점이 이해가 안 가서 해리가 묻는것인데 민경은 짤막하게 답한다.
“ 몰라 ! ”
“ 무슨 그런말이 있어 ? 지금 그렇게 애매한 말로 넘어갈 상황이 아니잖아. 너
승호 그 사람 좋아했던거야 ? 너 그래서 지금 이렇게 치를 떠는거냐구. 니가 좋
아하는 남자를 내가 빼앗아간것 같아서 그래서 이러는거야 ? ”
“ 그러는 넌 ? ”
“ 뭐라구 ? ”
근데 민경의 태도가 진짜 기가막힌다. 이런 상황에서 해리를 새엄마로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다고 치자. 어찌되었거나 해리가 민경보다 다섯 살 많은 언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해리가 철규와 결혼하기 전까진 언니,동생 하면서 친자매 이상으로 그렇게까지 각별했던 두 사람이 아니던가. 헌데 불과 얼마전 아니 어젯밤 그 충격의 장면을 목격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엄마, 아프시면 약이라도 사다 드릴까요 ?’ 하면서 그렇게 깍듯이 대했던 그런 민경이 180도 태도가 돌변해버려 그래서 더 어이가 없는것이다. 그냥 대놓고 ‘야,너’ 하면서 반말 짓거리로 그야말로 해리를 두 번다시 상종하고 싶지도 않은 어느 인간말종이라도 대하듯 이러고 있는것 아닌가. 그 런 태도에 해리도 나름 화가나고, 민경에게 나름 항변할말이 없는것은 아니라 다시금 따져묻는다.
“ 너 도대체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야 ? ”
“ 뭐가 ? ”
“ 그렇게 날 새엄마니 엄마니...그렇게 꼬박꼬박 깍듯이 대하던 니가 하루아침에
돌변한 이유가 대체 뭐냐구 ? 단지 어제 그 장면 때문에 ? 그거 오해라고 했잖아
. 그러니까...변명할 기회라도 좀 주던가 했어야지. 그냥 그 승호란 남자가 앞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 저돌적으로 나한테 다가왔던것 뿐야. 그게 단데...내가 그동안
얼마나 그 사람 제의를 단호히 거절했는데...그 변명할 기회는 주지 않고 날 이
지경으로 만드니 ? 다른 사람도 아닌 민경이 니가 ? ”
“ 너하곤 말 섞고 싶지 않아 !!! ”
단호하게 그렇게 내뱉고는 2층 자기방으로 올라가 버리는 강민경. 해리는 기가막힌듯 멍한 표정으로 그런 민경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며칠후.
민경과의 관계를 이렇게 끝내고 싶진 않아서였을까. 해리가 민경의 방으로 들어와서는 나긋하게 뭔가 말을 걸어보려한다. 화가 잔뜩 나있는 민경의 마음을 어떻게든 풀어주고픈 마음이다. 해리는 침착하게 말을 건넨다.
“ 민경아... ”
“ ...... ”
“ 언제까지 이렇게 엄마랑 말도 않고 지낼거야. 그러지말고 우리 이야기좀 할 수
있을까 ? ”
그리고는 다가오는데 민경은 그런 해리를 뿌리친다. 그러면서 내뱉는다.
“ 엄마는 개뿔... ”
“ 민경아... ”
민경의 여전한 태도에 해리가 기가막혀 바라본다. 그래도 해리 나름대로 오해를 풀고 민경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서 이런건데 이렇게까지 나오는 민경을 보니 해리도 기가막혀진다. 그런 해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민경은 내지르고픈대로 내지른다.
“ 꼴도보기 싫으니까 당장 내 집에서 꺼져. 나랑 우리아빠 집에서 당장 나가달라
고. 그래도 오갈데 없는 신세란걸 알아서 좀 봐준것 뿐이야. 너같이 더러운 것이
랑은 더 이상 한 지붕아래서 살 생각 추호도 없으니까 당장 이 집에서 나가달라
구. ”
“ 야, 강민경. ”
듣자듣자하니 너무해서 결국 해리도 화가나고 만다. 정말이지 이 민경이가 얼마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꼬박꼬박 ‘엄마’라고 부르며 대하던 그 강민경이 맞는지 믿겨지지가 않을 지경이다. 오해라고 아무리 해명을 해봐도 소용없는 그녀의 태도. 사실 민경의 태도는 좀 이해할수 없는면이 있는것이 분명하다. 해리의 경우는 그렇다 치더라도 승호와의 그런 모습으로 인해 이렇게까지 화를 낼 필요가 있을까. 어쨌든 민경 역시 딱히 승호를 좋아했던것도 아니고 되려 그 마음을 받아줘도 될지 안 될지 고민하던 그런 애매한 단계에 있었던 처지다. 그러니 아닌말로 해리가 자신이 사랑하는 승호를 빼앗아갔다고도 말할수 없는 상황. 그렇다면 결국 단지 이해리 이 여자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이토록 극도의 분노로 치를떠는 것이란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민경의 이와같은 태도를 이해할수 없어 결국 해리가 한마디 한다.
“ 너 진짜 해도해도 너무한다. 그리고 아닌말로 니가 이렇게 나한테 소리지를 그
럴 처지라도 되니 ? ”
“ 뭐 ? ”
“ 처음부터 니 아버지랑 결혼해달라고 애원했던건 너였어. 니가 하도 간곡히 애원
해서 니 소원을 들어준것 뿐인데, 이제와서 니가 날 이런식으로 대하니 ? 아닌말
로...그래 내가 도대체 어떻게 해줘야 하는건데 ? 정말 니 바램대로 이 집에서 나
가 주기라도 할까 ? ”
“ 마음대로 해 !!! ”
새엄마는 고사하고 이전의 언니,동생 하던 사이로조차도 돌아갈 생각이 없는듯한 단호한 민경의 태도. 더 말해야 소용없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해리도 결국 방에서 나와버린다. 그리고 며칠후, 해리는 결국 최종 결심을 하고야 만다.
“ 그래, 나 떠난다. ”
짐을 싸들고 거실로 나온 해리. 그래도 작별인사는 해야할것 같기에 민경을 1층으로 내려오게 한다. 막상 그렇게 짐을 싸갖고 나온 해리의 모습을 보니 순간 당황하는 민경. 하지만 그 내색은 하고싶지 않은지 시선을 살짝 다른곳으로 향한다. 다리가 아프기라도 한지 해리는 거실 소파에 앉아서는 민경보고 들으라는듯 말한다. 민경은 해리에게선 조금 멀찍이 떨어져 시선을 다른곳으로 향한채 앉아있다.
“ 니가 정 그렇게 원한다면 내가 떠나줄게. 정말 그래도 되는거지 ? ”
마치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려는듯 그와같이 말하고 있는 해리. 하지만 민경은 심술난 태도로 여전히 민경을 외면하고 있고, 더 말해야 소용없을것 같다는 판단을 한 해리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침을 한번 꿀꺽 삼키는 해리. 막상 이 집을 떠나려니 아쉬움이라도 생기는것일까. 주변을 잠깐 두리번거려보기도 하고 그리고는 이내 발걸음을 옮긴다.
“ 강민경. ”
여전히 대꾸없는 그녀의 이름을 부른 해리. 거실에는 침묵이 흐를 뿐이다.
“ 한가지만 마지막으로 묻자. ”
“ ...... ”
“ 한가지만 마지막으로 물어본다니까 ? ”
“ 뭔데 ? ”
그제서야 겨우 그렇게 물어보는 민경. 막상 해리가 왜 이러는지 궁금하긴 한 것일까. 해리가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간다.
“ 너...나 없이 살 자신 있어 ? ”
“ 뭐라구 ? ”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묻는 민경. 해리는 씨익 묘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 넌 나 없이는 못 견디는 애야. 내가 그걸 알아. 그런데 이렇게 내가 미련 다 내
던지고 떠나도 견딜수 있겠느냐구. ”
“ 무슨...헛소리를 하고 있어. ”
뭔가 묘하게 얼굴을 찡그리며 그와같이 내뱉는 민경. 살짝 입술을 삐죽이 내밀어보기까지 한다. 해리는 민경에게선 시선을 돌린채 말을 이어간다.
“ 내가 봤을땐 넌 애정결핍증 환자야. 엄마없이 그렇게 외롭고 쓸쓸하게 자라서
누군가에게 한없이 사랑받고 정주는 사람이 필요했던거지. 그리고 그랬던 너에게
... ”
“ ...... ”
“ 일시적으로 그 대상이 되어주었던 사람이 나였던거지 ? 안 그래 ? ”
민경은 대꾸가 없다. 해리의 말을 듣고 있는것인지 아닌것인지 여전히 외면한채로 무표정한 얼굴의 민경. 심술이 날대로 난 인상 그 자체다. 해리가 그런 민경을 잠시 바라본다.
“ 강민경. ”
“ ...... ”
“ 내가 봤을때... ”
민경을 묘하게 바라보고 있는 해리. 그리고 말을 이어간다.
“ 니가 진짜 사랑했던 사람은 나야. 안 그래 ? ”
“ 무...무슨... ”
순간 마치 가슴속 깊은 비밀을 들킨 사람처럼 당황하여 요동치는 민경. 그 모습이 어처구니 없어 보여서일까. ‘피식~!’ 하며 실소를 터트리는 해리. 그리고 다시 말을 계속 이어간다.
“ 넌 내게서...니 엄마한테 받지 못한 사랑...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무엇을 원했던
거야. 안 그래 ? 넌 영원히 날 내 곁에 두고 싶었던거지 ? 이 세상 다른 사람은
아닌 오직 자신만을 사랑해줄 그 무엇을 원했던거지 ? 안 그래 ? ”
“ 미친소리 할거면 당장 꺼져 !!! ”
“ 푸하하핫~~~!!! ”
발끈하는 민경의 모습이 되려 웃겨서일까. 자지러지게 웃음을 터트리는 해리. 하지만 이건 좀 아니다 싶은지 바로 스스로를 진정시킨다. 그리고 다시 민경에게 말을 건넨다.
“ 다시 마지막으로 묻는다. 나 안 붙잡을거야 ? ”
대꾸없는 민경. 그녀도 그녀대로 사뭇 결연한 모습이다. 해리가 다시 그런 민경에게 말한다.
“ 다시 마지막으로 기회를 줄테니 할말 있으면 해 봐. ‘새엄마 잘 못 했어요. 두
번 다시 안 그럴께요’ 하고 싹싹 빌기라도 하던지... ”
하지만 자존심때문인걸까. 민경은 끝내 아무런 반응도 내보이지 않는다. 더 말해야 소용 없을것 같다는 판단이 들어서일까. 해리도 결국 단념한채 짐가방에 손을 가져간다.
“ 알았어. 그럼 이만 갈게. ”
“ ...... ”
“ 좀 아쉽긴 하다. ”
“ ...... ”
“ 솔직히 나 니 아빠...잠시나마 진심으로 사랑하긴 했었어. 존경하는 마음도 생겼
었고. 무엇보다... ”
열악한 가정환경에서 자라온 해리다. 그런 그녀가 막상 이런 집을 떠나려하니 아쉬움도 당연히 생길터. 언제 다시 이런 집에서 자신이 살아볼 기회가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다시한번 주위를 돌아본다. 그러면서 말을 이어간다.
“ 그만한 사회 저명인사의 아내로 살아가는것도 그런대로 손해볼것 없는 인생이
다. 그런 생각에 니 아빠를 선택했던건데...아무튼 좀 아쉽네. 여하튼 니가 날 정
그리 싫어한다면 난 이만 떠난다. 그러니 잘 있어. ”
“ ...... ”
“ 나 간다. 잘 있어 강민경. ”
그렇게 저벅저벅 집을 나서는 이해리. 민경은 해리가 대문까지 나가서 문을 쾅 닫는 소리가 날때까지도 아니 그 이후로도 한참동안 거실 소파에 앉은채 시선은 베란다 유리창쪽을 향한채 한참을 말없이 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민경은 갑자기 ‘야 !!!’ 하고 소리를 지른다. 그리고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거실에 있는 집기 이것저것을 함부로 내던져 깨트리며 있는대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그렇게 민경의 집을 나오고 얼마후 해리는 승호와 다시 만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때 해리는 거처할만한 곳이 없어서 일시적으로 연락이 되는 고등학교 동창의 도움을 받아 그녀가 마련해준 원룸에서 임시 기거하는 중이었다. 한편 그러는 동안 철규가 입원해 있는 병원엔 몇 번 다시 찾아오기도 했었던것이다. 그래도 한 몇 달동안이라도 부부사이였던 사람이라서인지 그동안 나름 생긴 정도 있고 해서 걱정하는 마음만은 여전히 남아있었던 것이다. 다만 혹여 민경의 눈에 뜨이는 일이 없이 하도록 가급적 평일 오전이나 낮시간을 이용해 병실을 찾았다. 헌데 그러다가 승호와 다시 마주하게 된 것이다. 피차 이렇게 된것 그동안의 감정이나 훌훌 털어버릴겸 두 사람은 인근 커피숍에서 다시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 그...걱정을 많이 했었습니다. ”
그날 그렇게 집 앞에서 포옹을 하는 장면이 민경에게 그대로 들키고 나서 승호는 부리나케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던것 아닌가. 워낙 갑작스럽게 겪은 일이라 어찌 대처할지 몰라 그렇게 한 것이라 변명할수 있을련지는 모르겠지만 이쯤되면 이 승호란 남자도 보통 아니게 무책임한 사람은 분명한것 같다. 그날 그 후의 일이 어찌 되었는지 승호 나름대로는 걱정이 되어 아니 물을수가 없었는데, 해리는 그녀 나름대로 착잡하기라도 한지 그 말에 바로 대답은 않은채 묘한 미소만 지어보이고 있다. 마치 ‘이제와서 그걸 알아서 뭐 어쩌겠느냐’는 듯한 태도라고나 할까. 해리의 이와같은 자신에 대한 무성의한 태도는 여전히 승호를 짜증나게 만들고 있다.
“ 한가지만 물어볼께요 승호씨. ”
“ 뭘 물어보고 싶으신데요 ? ”
“ 대체 무슨 마음으로 저한테 감히 구애를 할 생각을 했던거에요 ? ”
“ ...... ”
“ 원래 그렇게 민경이한테 접근하다 잘 안된거고...그런 상황에서 저랑 민경이의
사이를 알면서도 그래요 ? 대체 무슨 마음으로 그런 생각을 한거냐구요 ? ”
설사 해리가 철규와 결혼한 사이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민경과 해리는 그 이전에 이미 수년간 언니,동생 하며 절친하게 지내왔던 사이다. 따라서 어찌되었든 승호가 민경과 해리라는 절친하게 지내는 두 여인 사이에 끼어드는 상황이 되는것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헌데 대체 어쩌자구 그런일을 벌인것인지 도대체 이 승호란 남자 무슨 마음으로 그런일을 벌인것인지 그 속 마음이나 알고싶어 궁금해서 물은것이다. 하지만 막상 이런 질문을 받으니 답할말이 마땅치 않은것일까. 한참을 뭔가 고민하는듯한 승호가 해리가 괜찮으니 말해보라는 거듭되는 재촉에 한참만에 조심스레 입을 연다.
“ 실은 처음엔 그냥... ”
“ ...... ”
“ 해리씨의 그런 처지가 참 딱해보이고 그래서...동정심으로 시작되었던거 같습니
다. 그리고... ”
말없이 차 한모금을 음미하는 승호. 그 사이 날씨가 많이 쌀쌀해져 있기도 하다. 찬 음료보다는 더운 음료가 어울릴 계절. 여하튼 승호의 말은 계속되고 있다.
“ 민경씨의 경우엔 어쨌든 제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애매모호한 태도로 있는게
화도 나고...자존심도 상하고 그래서... ”
“ ...... ”
“ 뭐랄까...그냥 에라 모르겠다. 그런 심정으로 그런 일을 저질렀던것 같습니다.
”
승호로부터 그와같은 말을 들으니 좀 어이없는듯 실소가 터진 해리. 그러니까 다시말해 아무 생각없이 충동적으로 그런일을 저지른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민경이 자기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것에 화도 나고 해서 억화심정으로 그런일을 저질렀다니. 그런 점들을 생각해보면 이 승호란 남자 진짜 생각없고 대책없는 남자로구나 그런 생각도 든다. 승호는 말없이 차 한모금을 마신뒤 해리를 바라보며 다시 말을 건넨다.
“ 근데...해리씨는 그동안 어찌 지내셨나요 ? ”
“ 뭐...보시다시피... ”
마치 그쪽이 굳이 관심 가질일은 없다는듯 애매하게 답하는 해리. 살짝 승호를 놀리듯 미소를 지어보이기까지 한다. 여하튼 이런 해리와의 관계를 지금이라도 다시 진척시켜 본다던가 하는것은 틀린 일이란 판단 정도는 되는것일까. 승호의 태도에도 어떤 체념한듯한 기색이 보이는것 같기도 하다. 해리가 그런 승호를 보며 말한다.
“ 우리 다신 만나지 말죠. ”
“ 예 ? ”
“ 두 번다시 만나진 말자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우린 그냥 악연이었던것 같아요.
그러니 설사 그쪽과 내가 두 번다시 만난다 하더라도 그다지 좋은 추억이 되살
아 난다거나 할 일도 없으니... ”
“ ...... ”
“ 그러니...기왕이면 그쪽도 저에 대한 기억은 지워주세요. 저도 가급적 그쪽과 있
었던 일은 기억에서 빨리 지워버리고 싶네요. ”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다는듯 해리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승호의 찻값까지 자신이 지불하고 커피숍을 나온다. 속상해진 승호는 커피숍을 나와서 인근에 있는 전봇대나 공연히 한번 힘껏 걷어찬다.
“ 아빠... ”
민경이 아버지의 병실을 찾았다. 해리까지 떠난 마당에 이제 철규를 지킬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지 않은가. 그것을 생각하니 민경은 아버지에 대한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 그리고 안타까움까지 겹쳐져 북받치는 설움을 터트리고야 만다. 무엇보다 아버지에 대한 한없는 죄송한 마음 때문에 어찌할 수가 없다. 자신이 공연히 쓸데없는 일을 벌였던것만 같아 한없이 자책하고 있는것이다. 차라리 처음부터 해리를 철규에게 소개시켜주지 말것을, 자신은 딴에는 아버지의 지금껏 혼자 살아오신 모습이 안되고 딱해보이기도 했고, 거기에 기왕이면 언니,동생 하며 가까이 지낸 해리언니를 좀 더 자신의 곁에 가까이 붙잡아두고 싶어 일을 벌인것인데, 그것이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어버리자 민경으로선 아버지에게 한없이 죄스러운 딸이 된 것에 후회와 자책감이 드는것이다. 의식이나 겨우겨우 이어가며 세상에서 지금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전혀 모르는듯한 아버지의 모습. 그것을 생각해보면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민경은 아버지의 손을 꼭 잡은채 한참을 그 앞에 엎드려 서럽게 대성통곡을 한다.
얼마후, 뇌졸중으로 쓰러진 철규의 증세가 악화되어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상을 치르고 나서 민경은 망연자실하게 집안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이제 해리도 떠나고 아버지도 안 계시니 이제 이 드넓은 집안에 자기 혼자만 덩그러니 남겨져있는것이다. 그 허허로움, 쓸쓸함, 상실감...한두가지 단어로는 다 표현이 안 되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여 민경은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다. 마치 넋을 잃은 사람마냥 한동안 집 한쪽에 우두커니 앉아 멍한 자세로만 있었던것이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민경은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2층 한쪽에 전시용으로 걸어놓은 총을 집어들었다. 일전에 해리가 자신의 집을 방문했을때 보고는 다소 신기하게 물어보았던 그 사냥총이다.
“ 민경이 너도 참...아무리 그래도 집에다 이런걸 다 진열해 놓고 그러냐 ? ”
원래 총쏘는것이 취미였던 민경이 아닌가. 요즘 세상에 여자가 총쏘는것이 뭐 그리 흉이나 놀림거리도 아니지만, 여하튼 사격이 취미인 젊은 여성을 보는것이 그리 흔한일은 아니라서인지 해리도 종종 민경의 그 별스러운 취미를 놀리듯 말하곤 했었다. 그리고 언젠가 한번은 장난스레 해리를 쏘기라도 할듯 총을 겨누기도 한 그녀. 그런 민경이 총을 집어든것이다. 그리고 골프용 가방인지, 스키용 가방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장총이 들어갈만한 길이의 긴 가방에 그 총을 넣었다. 아무래도 사람들의 눈에 뜨이는것을 막기위한 의도인것인지. 그리고 총을 넣어둔 가방을 들고 심각한 표정으로 집을 나섰다.
해리는 이 무렵 새로운 직장을 마련 그곳에서 일하는 중이었다. 퇴근시간이 되어 그간 직장생활을 하며 어울린 동료 몇몇과 재잘거리며 사무실을 나서는 중이었다. 직장 동료중 젊은 남자직원 한둘은 해리에게 관심이라도 가는듯 살짝 추파를 던져보이기도 했다. 해리는 그런 남자의 다가섬은 좋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그리 싫지도 않은듯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한 남자 직원의 짖궂은 농담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아달라며 사양하듯 손을 내젓기도 하는 해리. 헌데 그런 해리를 저쪽에서 누가 겨누고 있었다.
강민경이다. 실은 바로 그녀가 해리의 직장을 알아내 여기까지 찾아온것이다. 해리의 근황은 그녀와 평소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에게 물어서 새로 일하게 된 직장을 알아낼수 있었고 그 퇴근시간에 맞춰 여기까지 찾아온것이다. 해리에 대한 분노, 배신감. 그 치가 떨리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던 민경이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다.
“ 이해리씬 그럼 정말 시집갈 생각 없는거에요 ? ”
“ 아유 정말 없어요. 그러니 괜히 그런소리 하지 말아주세요. ”
그렇게 이런저런 담소를 주고받으며 사무실을 나서고 있는 해리. 헌데 그때였다.
‘타앙~!’
“ 아악~~~!!! ”
갑자기 어디선가 난 총소리. 그리고 해리의 등에 정면으로 맞았다. 그리고 확인사살이라도 하려는듯 총 한두발이 더 추가로 날아왔고 그 한발이 더 해리에게 맞고 한발은 빗나가 총 두발을 맞은 해리가 피를 흘리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 허억~~~!!! 이...이게 뭐야... ”
백주대낮에 서울 한복판 직장인들 퇴근시간에 벌어진 이 기가막힌 일에 함께 퇴근하던 동료들은 물론 주위에 지나가던 사람들도 충격을 받은듯 하고 해리보고 정신차리라며 동료들이 일으켜보려 했다. 또 어떤이는 바로 구급차를 부르러 전화를 걸기도 하고. 하지만 피를 잔뜩 흘리고 있는 해리는 이내 곧 정신을 잃고만다.
“ 아하하하하하하핫~~~!!!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핫~~~!!! ”
민경이 방금 자신이 쏜 총을 들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해리의 죽음을 확인한 민경이 실성한 여자처럼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며 웃고 있었다. 바로 함께 있던 동료들이 신고 경찰차가 달려오고 있었고 민경은 해리의 시신옆에 주저앉아 한손에는 총을 든채 웃음소리도 울음소리도 아닌 기괴한 소리를 연신 내면서 실성한 사람처럼 있었다. 경찰들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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