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가 병실로 돌아왔다. 간병인이 철규를 해리에게 인계를 하면서 간단하게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 선생님은 좀 어떠세요 ? ”
“ 뭐 늘 똑같죠 뭐. ”
뇌졸중으로 쓰러져 겨우 의식만 이어가고 있는 환자에게 하루이틀 사이에 무슨 특별한 변화가 있을수 있을까. 간병인은 해리를 사뭇 딱하다는듯 바라보며 그와같이 말한다. 간병이 직업인 사람일진대 이런 환자를 한두번 본것도 아닐진대 그래도 해리의 경우는 좀 특별한 가족관계를 대충은 들어 알고 있기 때문일까. 그녀에 대한 안타까운 감정이 간병인에게도 좀 남달리 이는것 같다.
“ 고생이 많으세요 사모님. ”
“ 별말씀을요. 어쨌든 제 남편인데...최선을 다 해야죠. ”
사실 간병인도 50대 중반 환자의 젊은 부인이라는 점 때문에 해리를 처음엔 좀 곱지 않게 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철규가 이와같이 입원한지도 어느덧 한달여, 그간 지켜본 해리의 철규를 걱정하는 마음이 진짜 진심이고 지극정성으로 남편을 보살피고 있는것을 보아왔기에 간병인은 나름 감동하면서도 그래서 더더욱 해리가 딱하고 안쓰러워보이기도 했다. 걱정말라며 수고 많았다며 이만 간병인을 보내는 해리. 간병인은 되려 해리에게도 몸 상할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당부의 말까지 보낼 정도다. 간병인이 떠나고 남편과 단 둘이 남은 병실. 해리가 철규를 바라본다.
“ 여보... ”
철규의 손을 한번 살며시 잡아본 해리. 의식이 있는것인지 없는것인지 별다른 반응이 없는 남편의 모습. 다만 남편의 눈이 반 정도 떠져있는것 같기에 혹 무리가 가지나 않을까 싶어 남편의 눈을 감겨준다. 그리고 안타까이 철규를 바라보고 있는 해리. 가슴 한켠이 다시금 아파오는것 같다. 울컥하는 심정을 겨우 억누르며 해리는 남편을 지켜보고 있다.
밤늦은 시간. 철규의 상태가 좀 이상했다. 가쁜숨을 내쉬는것 같기도 하고, 뭔가 이상한 신음소리를 내기도 하는 철규. 놀란 해리가 바로 의료진을 불렀다. 의료진은 철규를 급히 응급실로 데리고 가고, 혹 무슨 큰일이 벌어지는것은 아닌가 싶어 해리는 민경을 부르기까지 했다. 해리의 전화를 받은 민경이 다급하게 병실로 달려오고, 하지만 민경이 도착했을때는 다행이 상황이 어느정도 진정되어 있었다.
“ 선생님...대체 어떻게 된건가요 ? ”
“ 아뇨, 뭐 큰 문제는 아닙니다. 저희도 순간 걱정하긴 했는데...아마 호흡기관이
좀 순간 불편해지셨나 봅니다. 저희가 응급조치를 취한후엔 지금은 대체로 안정
이 되신 상태니 너무 크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
담당의사의 말에 해리도 민경도 안도의 한숨을 쉬고, 철규의 병실로 다시 되돌아온다. 철규 역시 응급실로 일시적으로 옮겨졌다가 지금은 상태가 안정이 되어 병실로 돌아와 있는 상태. 게슴츠레 눈을 뜬듯한 철규를 해리가 바라본다. 철규는 무슨 의식이 조금 있는듯 손을 까닥여보고, 해리가 그런 철규의 손을 잡아본다.
“ 흑... ”
어지간한 해리도 이런일이 거듭되다 보니 참기 힘든것일까. 기어이 울음을 터트리고 만다. 자신이 한 선택이니만큼 모두 감수하겠노라, 자신은 진심으로 철규를 사랑하노라 다짐했건만 아무래도 한계에 부딪히는 것일까. 기어이 울음을 터트리고 마는 해리. 민경이 걱정되는듯 그런 해리에게 다가온다.
“ 엄마... ”
해리를 걱정되는듯 그와같이 불러보는 민경. 웬만하면 이런 모습을 잘 보이지 않던 해리이기도 한데, 그것도 민경까지 보는 앞에서 이러고 있는것을 보면 지금은 정말 힘든가보다. 민경이 해리를 말없이 안아본다.
“ 엄마...괜찮으세요 ? ”
해리는 말이 없다. 상투적이거나 으레 하는 말일지라도 이럴때 ‘괜찮다’는 말이 과연 상대에게도 액면 그대로 받아지게 될까. 그게 걱정돼서인지 오히려 무슨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해리. 그녀가 정말 힘든가보다. 그 생각을 하니 민경도 미안한 마음에 정말 어쩔줄을 모른다.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 한참 그렇게 어색한 침묵이 흐르다 다시 민경이 입을 연다.
“ 엄마... ”
“ 응, 말하렴 민경아. ”
자신을 거듭 부른 민경에게 그와같이 대답하는 해리. 민경의 말이 이어진다.
“ 힘들면 집에가서 쉬세요. 여긴 제가 지키고 있을테니까요. ”
“ 아냐, 괜찮아. 그리고 엊그제도 집에서 하루 자고 왔었잖아. 지금은 괜찮아. ”
실제 이틀전에 잠깐 집에 돌아가서 하룻밤을 자고 어제 병실로 돌아온것이기도 한 해리. 따라서 지금 다시 집으로 돌아가거나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듯 그와같이 말하고 사뭇 건강을 과시하려는듯 팔을 휘휘 돌려보기도 한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잠시나마 화색이 도는듯한 해리의 얼굴. 그 모습이 좀 우스꽝스러워서인지 민경이 순간 실소를 터트리기까지 한다. 헌데 그때였다.
“ 으...어... ”
철규가 또 뭔가 알아들을수 없는 신음소리를 냈다. 놀란 해리와 민경이 함께 다가가보고, 철규는 의식을 찾은듯 손을 들어 뭔가 알수없는 손짓을 한다. 해리가 다가가 철규의 손을 잡아보며 말을 건넨다.
“ 여보...왜 그러세요 ? 저 알아보시겠어요 ? ”
“ 아빠, 뭐 필요한거라도 가져다드려요 ? ”
해리와 민경이 철규에게 거듭 그와같이 말을 붙여보는데, 철규는 그 이상 다른 반응은 더 보이지 않은채 해리의 손을 꼭 잡은채로만 있다. 그냥 단순히 잡은 정도가 아니라 해리의 손을 놓기 싫은지 그야말로 남은 여력을 다해 해리의 손을 꽉 잡고 있는 그런 모습이다. 마치 해리보고 자신의 곁을 떠나지 말아달라는 어떤 의사표시라도 되는것일까. 꽉 잡은채로 좀처럼 놓아주지 않는 철규의 손을 보자 그 마음을 알겠다는듯 해리가 말한다.
“ 여보, 걱정마세요. 저 여기 있잖아요. 저 어떤일이 있더라도 당신 배신하지 않
아요. 언제까지나 당신곁에 있을거에요. 그리고 진심으로... ”
해리가 살짝 목이 메인다.
“ 사랑해요 여보. ”
그런 해리를 보자 민경도 뭉클해지는듯 눈에 눈물이 맺힌다. 아버지도 아버지지만 해리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이 겹쳐져 어쩔줄을 모르고 있는 민경. 해리에게 다가와 그녀를 뒤에서 살며시 안아본다. 두 사람 사이에 무한한 신뢰감이 흐르는듯한 그런 모습이다.
밤 늦은 시간.
철규는 잠에 든듯 평온한 자세로 있고, 해리가 그 옆에서 남편을 지키고 있다. 하지만 그러다 그녀도 지친듯 침대에 엎드린채로 깜빡 잠이 들었는데 그런 해리에게 누군가가 살며시 다가오고 있었다. 다가온 남자는 해리를 살짝 흔들어 깨운다.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는 해리. 그녀를 깨운 남자는 다름아닌 승호였다.
“ 무...무슨일이에요 ? ”
이 시간에 갑자기 찾아온 승호로 인해 놀랄수밖에 없는 해리. 혹여 남편이 깨지나 않았는지 살짝 그를 돌아보기까지 한다. 헌데 승호는 그런 해리에게 조용하라는듯 ‘쉿~!’ 하는 동작을 연신 해보이고, 당혹스런 얼굴로 해리가 그런 승호에게 묻는다.
“ 대체 무슨일이에요 이 시간에 ? ”
“ 오늘 저 야근이에요. ”
“ 야근 ? ”
그러고보니 승호가 사복차림은 아닌 의사복 차림이었다. 하지만 야근이라 할지라도 지금은 승호가 철규 담당도 아니지 않는가. 그런 승호가 자신을 이 시간에 왜 찾아왔단 말인가. 나지막하게 승호는 그러면서도 간곡하게 해리에게 말을 건넨다.
“ 해리씨한테 꼭 좀 할말이 있어요. 그러니... ”
“ 일단 나가요. 나가서 이야기해요. ”
남편이 바로 옆자리에 있는 마당에 승호와 여기서 무슨 이야기를 할 수는 없는 일이라 밖으로 나가자고 한다. 그래서 병실을 나오는 두 사람. 병실 복도쪽 계단으로 가서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밤늦은 시간이라 병실 불도 필요한 공간을 제외하곤 거의 꺼져있는 상태고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다. 하지만 해리는 그래도 혹 누가 볼새라 주위를 살펴보며 나지막하게 승호에게 말을 건넨다.
“ 대체 저한테 왜 이러는거에요 ? 저한테 이러시지 말라고 몇 번이나 이야기 했
어요 ? ”
“ 해리씨... ”
하지만 그런 해리의 손을 안타깝게 잡아보는 승호. 해리는 승호의 손을 뿌리친다.
“ 대체 저한테 왜 이래요 ?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다고...그리고 남편있는 여자인
저한테 자꾸 이래서 뭘 어쩌자구요 ? ”
“ 해리씨...저 정말... ”
어두컴컴해서 승호의 얼굴이 구체적으로 보일련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표정에는 간곡함과 안타까움이 가득 담겨있다. 어찌보면 울것만 같은 그런 인상이기까지 하다. 그런 승호가 다시한번 애원하듯 해리에게 말을 건네고 해리는 그럴수록 당혹스럽고 난감하기만 해 어쩔줄을 모를뿐이다.
“ 저 진짜 이대로는 못참아요. 해리씨의 이런 불행한 모습. 언제까지 먼발치에서
지켜만 보고 있을수는 없어요. ”
“ 이 사람이 정말...그리고 우리가 안지 뭐 얼마나 되었다고 그래요. 전 승호씨한테
관심 없어요. 아셨어요 ? ”
“ 해리씨... ”
하지만 승호는 더욱 안타까와져 급한 마음에 그만 해리를 또 와락 안아보기까지 한다. 당황한 해리가 바로 승호를 밀쳐내고 그리고 뺨을 때린다.
“ 참 나쁜사람... ”
“ 해리씨... ”
“ 민경이를 생각해서라도 이러시면 안 되는거잖아요 ? ”
“ 해리씨... ”
“ 자꾸 이러면 저 진짜 병원에 이야기하겠어요. 저한테 자꾸 추근대는 사람이 있
어 더 이상 이 병원에 못 있겠다구요. 아니, 정말 승호씨때문에라도 남편 병원을
옮기는 문제 고려해야 할것 같아요. ”
사실 승호가 팀을 옮기게 된게 바로 해리가 병원에 요구를 한바가 있어 그리된게 아닌가.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해리는 승호의 이런 일에대해서까진 언급하지 않았고 젊은 의사보단 좀 경험있는 의료진이 섞인 팀이 있었으면 한다고 해서 그런 이유로 의료진이 교체된것이다. 하지만 만약 정말 해리가 승호 문제를 제대로 병원에 다 이야기한다면 일이 어찌될지 또 모르는 일이다. 따라서 승호도 겁이난듯 일단 더 이상 해리에게 돌진하진 못하고 이쯤에서 다시 물러선다.
하지만 승호의 해리에 대한 감정은 정말 쉽게 물러날 수 없는 상태가 되어있나보다. 그런일을 겪고나서도 승호는 또 해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면서 한번만 만나달라고 간곡하게 애원했다. 이번엔 해리도 이기지 못하겠는지 일단 승호를 만나 이야기나 진지하게 이야기나 좀 나눠보기로 생각을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시외에 한 호젓한 공간에서 만나게 되고, 그곳에서 해리는 승호에게 사뭇 작심한듯 말을 건넨다.
“ 단도직입적으로 한가지만 물을께요. ”
무슨 이야길 묻고 싶은것인지, 승호로선 막상 해리가 이렇게 만나자고 하자 설레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론 긴장도 되는데, 해리는 입술을 한번 지그시 깨물고는 사뭇 준엄한 태도로 그에게 묻는다.
“ 민경이 문제는 대체 어떻게 하실 작정인건데요 ? ”
“ ...... ”
“ 민경이와 제 사이를 생각해서라도 이러시면 안 되는거잖아요. 그래서 묻는거잖
아요. 민경이하고의 문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냐고요 ? ”
추궁이라도 하는듯한 해리의 태도. 이런 모습을 보면 비록 만나자고 했다고 해도 그녀의 마음이 승호에게로 기울거나 흔들리고 있는것은 아닌듯 했다. 승호는 그 나름대로 어떤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고, 그리고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듯하다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 민경씨가...저에대해 무슨말을 어떻게 하던가요 ? ”
그러고보니 민경이 자신에 대해 무슨 이야길 어찌 했는지 궁금해진것일까. 두 사람의 관계를 생각하면 승호의 이야기가 둘 사이에서 언급되지 않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고, 그래서 승호도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나보다. 하지만 해리는 사뭇 단호한 어조로 답한다.
“ 아뇨. 민경인 승호씨에 대해 무슨말 한적 없어요. ”
“ 없다구요 ? ”
“ 네에. 민경이가 승호씨 이야길 뭐하러 제게 하겠어요. 다만 제가... ”
“ ??? ”
“ 아버지도 저리되신 마당에 남자문제는 좀 더 나중에 생각해보도록 하자. 그런
말은 한적이 있어요. 민경이 나이도 아직 젊은데 연애나 결혼 문제는 좀 더 천천
히 신중하게 생각해도 되지 않는가. 그런 저 나름대로의 판단 때문에 그렇게 말
했어요. ”
승호는 여전히 답답한듯 눈을 잠시 질끈 감아본다. 사실 생각해보면 애초에 민경에게 몇차례 구애를 해 보았으나 자신의 마음이 받아들여지지 않는것 같아 애타던 그런 승호가 아니었던가. 헌데 해리에게서조차 이런 반응이 나오자 승호는 더더욱 막막해지는 것이다. 해리와 민경 사이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오갔는지 여부를 지금 승호가 확인하는것은 쉽지 않을것 같으나 해리나 민경이나 여하튼 자신의 마음을 쉬이 받아들이지 않는 그런 여자들인것만은 분명하다. 승호는 답답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겠는지 근처에 있는 나무기둥 하나를 손으로 한번 공연히 쳐본다. 쳐보니까 아프다. 승호는 그 아픈손을 어루만지며 옆에있는 나무의자에 앉는다. 해리가 그 옆으로 다가와 앉는다.
“ 솔직히 저... ”
“ ...... ”
“ 전 뭐 저희 집안을 그렇게 대단하다고 내세우는 그런 사람은 아니지만...저희 집
안도 여하튼...집안 식구중에 의사도 있고 변호사도 있고 한 그런 그런대로 잘 살
아온 그런 집안에서 나고 자란 그런 사람입니다. ”
“ ...... ”
“ 하지만 그래서라도 오히려 있는집 자식이라고 너무 행세하고 다닌다...그렇게 고
까와 하는 소리를 듣고싶지는 않아서...행동거지도 나름 조심하면서 살아온 그런
사람이에요. ”
승호의 말을 귀담아 듣는것인지 아닌지 해리의 태도는 대체로 무표정하다. 하지만 승호는 그런 해리에게 자신의 하고픈 이야기는 기왕 이렇게 된것 다 하고픈듯 거침없이 말을 이어가고 있다. 어느덧 여름을 지나 가을로 접어드는 무렵. 선선한 기운이 두 사람을 감싸돈다.
“ 다만 여자문제에 있어서는 그래도 저 나름대로 자신있다고 생각하고 살아온 그
런 사람이에요. ”
“ ...... ”
“ 뭐랄까...자화자찬은 쑥스러운 일이긴 하지만...그래도 저 이만하면 외모도 그다
지 꿀릴게 없고...이만한 환경...이만한 직업을 갖고 살아가다보면... ”
잠시 또 한숨을 내쉬는 승호. 그런 승호의 표정에는 나름의 어떤 회한같은게 스치는것 같다. 그에게도 남들에겐 손쉽게 말하지 못한 깊은 속내라도 있는것인지. 그의 말은 계속 이어진다.
“ 적어도 내가 마음에 들어하는 여자가 날 피하거나 거부할 그럴일은 없을거다.
그 정도의 자부심은 갖고 살아온 사람이라구요. ”
“ 왕자병이에요 ? ”
살짝 비꼬듯 그렇게 끼어드는 해리. 하지만 그런 말을 들으니 승호는 더 화가난듯 표정이 살짝 일그러진다. 그러면서 발끈하듯 말한다.
“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전 다만 여하튼...제가 여자에게 어떤 구애같은걸 할
때 거절을 당한다거나 그럴일은 없을거라는 그런 정도의 생각은 했던 사람이다.
그런 말이에요. ”
“ 그게 그거네요 뭐... ”
“ 그 진짜... ”
자신의 진심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것 같아서일까. 승호는 더욱 답답해져 그와같이 내뱉고 일단 발끈하는 심정을 가까스로 진정시키고 그리고는 말을 이어간다.
“ 다만 그런데...민경씨도 그렇고 해리씨도 그렇고...두 사람 다 제 마음을 받아주
지 않으니까... ”
“ 않으니까 뭐요 ? ”
“ 그냥 제가 저 자신에게 화가나서 견딜수가 없어요. 내가 뭐가 그리 못난게 있어
서...내가 남들에 비해 뭐 그리 뒤떨어지는게 있어서...그래서 이런 수모를 한 사
람도 아니고 두 사람에게 연거푸 이런 거절을 당해야하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분하고 화가나서 견딜수가 없었어요. ”
“ 이것봐요 김승호씨 !!! ”
승호의 이야기를 듣고보니 더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해리가 정색을 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고 그리고는 말을 이어간다.
“ 민경이 문제는 그렇다 치더라도...저에 대해선...참...상대를 택해도 될 상대를 택
했어야죠. 전 유부녀에요. 남편도 있고...게다가 민경이와 제가 어떤 관계인지까지
아시면서 이런다는게 대체 말이나 되어요 ? ”
“ 모르겠어요. ”
뭔가 괴로운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는 승호. 할말은 낙동강 모래알 숫자보다도 많은데 그 하고픈 말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나가야 할지 그 방법이 제대로 떠올려지지 않아 답답해하는 그런 모습이다. 해리는 해리대로 승호와 별로 더 할 이야기가 없다는 판단이 들어서일까.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고 만다.
“ 제가 승호씨와 아무래도 이런 이야길 더 나눠야할 이유가 없을것 같네요. 앞으
로 두 번다시 제게 이러시지 마세요. 저한테 자꾸 이러시면 저도 언제까지 이렇
게 태연하게 승호씨를 만나 드릴수가 없어요. 그리고 남편 병원을 옮기는 문제도
아무래도 고려해 봐야할것 같네요. ”
그리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가버리는 해리. 승호가 안타깝게 그 이름을 다시금 불러보며 뒤쫒아가보려 하지만 해리는 더 이상 승호를 돌아보지 않은채 이미 저만치 빠른걸음으로 앞서가고 있다.
해리는 집에서 혼자 고민에 빠져 있었다. 승호의 거듭된 구애를 단호하게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슴 한켠에선 흔들리는 그 무엇이라도 있는것일까. 사실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승호의 태도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긴 하다. 나이많은 남편의 젊은 후처로 있으면서 병든 남편을 보살피고 있는 해리를 지켜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것 까지야 있을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민경에게 구해를 하던 그런 남자가 민경에게 새엄마격이 되는 그런 해리에게 다시 구애를 해오다니. 혹시 민경에게 거듭 구애했던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억화심정에서 그 대신 해리를 택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얼마전 승호가 했던 말을 염두에 둔다면 그런 뉘앙스가 좀 풍기기도 했다. 확실히 승호는 그 스스로도 말한것처럼 외모만 봐도 특별히 꿀릴게 없는 남자고 집안배경도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인것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바로 그런점 때문에 적어도 여자한테 구애를 할때 거절당할일은 없을거라고 생각해왔다는 승호. 그런 승호라면 민경의 애매한 태도에 화가나고 억화심정이 생겼을법도 하다. 꼭 그런 심정 때문에 민경대신 해리에게 구애를 하는것이라 해석할 필요까진 없지만, 여하튼 승호의 이와같은 심리태도. 어쩌면 바로 그런면도 어느정도 담겨있는것이라 볼수도 있을것이다. 하지만 어찌되었거나 지금은 병든 남편을 간호하고 있는 젊은 아내의 처지. 아무리 생각해도 가당치도 않은일이라 승호의 구애에 ‘말도 안 되는 짓 하지 말라’며 단호하게 거절해 왔었는데, 그래도 막상 집에 돌아와 혼자 생각에 잠겨보니 좀 다른 생각이 들기라도 하는것인지 여하튼 해리는 1층 거실 테이블에 혼자 걸터앉아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는 중이었다.
“ 엄마... ”
그런 해리에게 다가온것은 다름아닌 민경. 해리는 혹 자신의 속마음이라도 들킨양 공연히 화들짝 놀라기까지 한다. 민경이 그런 해리를 바라보며 걱정되는듯 말한다.
“ 엄마, 어디 불편한데라도 있으세요 ? 약이라도 타올까요 ? ”
적어도 자신에 대해서는 깍듯이 ‘엄마’라고 꼬박꼬박 대해주고 있는 민경. 그점만은 고맙기 한이없는 일이지만 그래서인지 순간 좀 미안한 생각까지 들기도 한다. 민경 입장에선 아버지도 저리되신 마당에 혹 새엄마 해리까지 잘못되면 어쩌나. 그런 생각도 들 법 하다. 이래저래 민경에게 쓸데없는 걱정을 끼쳐서는 안되겠다는듯 해리는 환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한다.
“ 아...아냐 아프기는...그냥 좀 혼자 이런저런 생각 좀 해보다가...좀 피곤한거 같
다. 자야겠어. ”
그런식으로 얼버무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지만 민경은 여전히 석연찮은듯 해리를 바라보며 가까이 다가와 이마에 손을 대보기도 한다. 그러면서 말을 건네는 민경.
“ 아프시면 솔직하게 말씀하세요.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요. ”
“ 아냐 민경아. 공연히 쓸데없는 걱정을 다 하는구나. 그냥 좀 혼자...잡생각을 했
던것 뿐이야. 너무 걱정 안 해도돼. ”
다독이면서 민경을 2층으로 올라가보라고 말하는 해리. 하지만 해리가 여전히 걱정되는듯 바로 물러가지 않자 일부러 침실로까지 들어가보이기까지 한다. 휴식이라도 취하는 양 침대에 눕기까지 하는 해리. 하지만 아직 잘시간도 아니고, 게다가 사실 집에 들어와서 좀 쉬기도 했었기 때문에 지금 딱히 피곤하거나 졸립지도 않다. 그래서 누운채로 대충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거실로 나와본 해리. 공연히 혼자 서성대고 있는데 갑자기 인터폰벨이 울린다.
‘ 지이이이~~~!!! ’
이 시간에 찾아올만한 사람이 없는데 의아해하며 인터폰으로 다가가보는 해리. 하지만 순간 기겁하고 만다.
“ 헉~! ”
화면에 비치는 얼굴은 다름아닌 승호였다. 대체 저 사람이 어떻게 여기까지 알고 찾아왔단 말인가. 여하튼 불과 얼마전까지 민경에게 구애하던 승호고 그 뒤를 이어 해리에게까지 접근했던 사람임을 생각해본다면 해리와 민경의 집 주소와 위치를 알아내는것은 어려운일은 아닐것이다. 민경에게는 직장 선배의 친구니 정히 민경 집 주소를 알고싶다면 그 선배에게 문의했을수도 있는 일이고, 환자 기록 카드에도 집 주소는 적혀있을것 아닌가. 그걸 생각해보면 승호가 굳이 집 주소와 위치를 알아내려 했다면 알아내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을것이란건 충분히 짐작할수 있는 일. 하지만 지금 해리가 문을 열어 승호를 맞이한데서야 말이 되는가. 인터폰을 아예 받지도 않은채 사람이 없는것처럼 위장을 한다. 어차피 지금 승호가 집 앞에 와 있다면 지금와서 불을 끈다면 그야말로 눈가리고 아웅하는 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아무도 없는체 불까지 끄면서 인터폰은 받지 않는 해리. 하지만 인터폰은 이미 여러차례 울리고 있다.
“ 엄마... ”
헌데 소리를 들었음인지 2층에서 내려온 민경. 불까지 꺼져있는것을 보고 더더욱 놀란다. 해리가 침실로 가 있는것을 보고는 더더욱 의아해하는 모습이고, 민경이 가서 인터폰을 받으려는데 해리가 기겁하며 다가와 민경을 저지한다.
“ 받지마 민경아 !!! ”
“ 어...엄마 왜 그러세요 ? ”
“ 아니...그 그게 저...보니까 누가 술 취한 사람이 장난치는것 같더라. 그러니까 받
지 말라구. ”
“ 장난...이라구요 ? ”
하지만 좀 납득이 안 가는듯 민경은 의아해서 해리와 인터폰을 거듭 바라보고, 하는수없이 해리는 거실의 불은 다시 켠채 민경보고 2층으로 올라가라고 한다. 민경은 여전히 의혹이 가시지 않는듯 뭔가 의심스레 해리를 바라보고 있는데 일단 못이기는체 2층으로 올라가긴 한다. 그리고 하는수없이 해리는 인터폰을 받고는 집 문앞으로 나가본다.
“ 미쳤어 ? 여기까지 오면 어떻게 해 ? ”
바로 문 앞에서 수도없이 인터폰 벨을 눌렀던 승호를 그렇게 나무라는 해리. 하지만 승호는 앞뒤 가릴것도 없다는듯 바로 그녀를 와락 안는다.
“ 악 !!! 이게 무슨 짓이야 !!! ”
너무 당황해서 비명을 지르는 해리. 하지만 승호는 이대론 참을수 없다는듯 작정하고 해리를 안은채 그녀에게 얼굴을 부벼댄다.
“ 해리씨...제발...도저히 참을수 없어요. 이대로 해리씨를 포기할수 없다고요. 저
절대 해리씨를 단념할수 없다구요. ”
“ 이거 안 놔 !!!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야 ? 이 정신나간 작자야 !!! ”
“ 해리씨 그러지말고 제 마음을 받아줘요. 저 이대로 해리씨 포기 못해요. 제 마
음은 이미 해리씨에게...이미 해리씨에게... ”
“ 이거 놓지 못해 !!! 나 소리지를거야 !!! ”
하지만 소리를 지른들 이런 광경을 이웃 주민들에게 들킬수도 있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해리. 한참을 버둥거리다가 차라리 체념한듯 그대로 승호에게 안긴 자세로 있다. 승호는 마치 자신이 이긴듯 뭔가 희열감 넘치는 표정으로 해리를 꼭 안아보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본다. 해리의 눈에선 눈물이 흐른다. 뭔가 만감이 교차하는듯한 그런 표정이다. 복잡한 심경의 해리. 하지만 그 복잡했던 그 무엇들마저도 일순간에 녹아내리는 느낌. 해리는 일단 말없이 승호의 품에 안긴 자세로 있다. 헌데 그때였다.
“ 두 사람 지금 거기서 뭐하는거야 ? ”
- 마지막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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