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슨소리야 그게 ? ”
해리로부터 딸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철규는 놀랐는지 당혹스러워 하는 반응을 보인다. 해리가 그런 철규에게 설명을 덧붙인다.
“ 민경이에게...아마 저 좋다고 쫒아다니는 남자가 생겼나본데...아마 민경이 딴에
는 좀 안심이 안 되나봐요. 그래서 저보고 한번 만나달라고 그러더라구요. ”
“ 그래 ? ”
무슨 의미인지 눈꼬리를 한번 치켜뜨는 철규. 잠깐 생각에 잠겨보는듯 하던 철규는 침대에 걸터앉은 자세로 아내 해리에게 말을 건넨다.
“ 그...여보... ”
“ 예, 말씀하세요. ”
“ 전에도 내 이야기했지만...민경이 시집은 너무 빨리 보내는것은 난 별로야. 뭐 그
렇다고 아주 늦게 혼기를 놓쳐서 보낼수야 없는 일이지만...여하튼 사회경험을 몇
년이라도 더 쌓아보고 그런뒤에 시집을 갔으면 하는게 내 바램이거든. ”
“ 여하튼 민경이를 좋다는 남자가 있다니깐요... ”
그런 민경이의 부탁을 들어주는것이야 나쁠것 없지 않냐는듯 말하는 해리. 철규 입장에서도 그거야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는 일이라서인지 그런대로 수락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면서 말을 이어간다.
“ 근데 여보... ”
“ 네, 말씀하세요. ”
“ 당신이 나보다 더 민경이와 친한 사이니까 믿기야 하지만...여하튼 일단 만나봐
서 아주 신뢰가 갈만한 그런 남자가 아니거든...그렇게 긍정적은 반응은 보이지
말았으면 해. 뭐 그렇다고 굳이 흠잡을것이 별로 없는 사람을 악담을 한다거나
그래서야 아니될 일이지만...내 말은 여하튼 신중을 좀 기했으면 하는...그런쪽으
로 방향을 잡아봤으면 한다는 말이지. ”
“ 아, 네에... ”
여하튼 딸을 너무 일찍 시집보내는 것을 그리 탐탁치 않아하는 남편 철규의 마음을 그런대로 알기 때문일까. 해리는 철규의 마음을 이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민경의 나이 이제 스물여섯. 한 20여년전 같았으면 여자나이 20대 중반은 그렇게까지 이른 나이라고는 할 수 없는 그런대로 결혼 적령기라 볼수 있는 나이다. 하지만 요즘이야 심지어 서른을 넘어 결혼하는것도 흔한판에 민경의 나이에 결혼결심은 이르면 이르다고 말할수 있을것이다. 다만 철규가 민경이 결혼은 좀 늦게 했으면 하는데 무슨 다른 이유가 있는것은 아닌가 싶어 넌지시 해리가 묻는다.
“ 근데, 여보. ”
결혼 직후에도 한동안은 철규가 어려워서인지 스물다섯살 많은 그에게 ‘여보’나 ‘당신’이란 호칭을 쉬이 붙이지 못하고 ‘선생님’이라고 말하던 해리. 하지만 어느덧 결혼한지 두달정도 되고보니 그런대로 익숙해져서인지 자신도 모르게 ‘여보’란 단어가 스스럼없이 나오기도 한다. 그런 자신에 스스로도 가끔 놀라기도 하는 해리. 그래서일까. 괜시리 살짝 묘한 미소를 머금어보기까지 하고는 남편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간다.
“ 당신...민경이한테 뭐 특별히 바라거나 그런게 있으신거에요 혹시 ? ”
“ 뭐 ? ”
출판사를 오랫동안 운영해오면서 진보진영의 일종의 아웃사이더 역할을 하며 지금까지 살아온 강철규. 그러면서 일전에는 자신이 그와같은 정치권 아웃사이더 노릇을 하면서 하고팠던 자신의 포부와 미래비전을 넌지시 내비치기도 했던 그런 철규가 아닌가. 현실정치에 직접 뛰어드는것은 자신이 없어도 진보가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을 잡아주는 그런 일을 하고싶다고 말하기도 하던 철규. 헌데 이 정도로 나름의 야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자녀에게 바라는 무엇도 어느정도 있기 마련이다. -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후계자로 키우고 싶다던가 - 혹 철규에게도 그런 바램이 있는것은 아닌가 궁금해져서 해리가 물은것인데, 철규는 당치도 않은 이야기라는듯 말한다.
“ 아냐...아냐 그건 진짜. 이 사람도 참...무슨 엉뚱한 생각을...다른건 몰라도 나
내 딸은 기왕이면 안정적인 직장가진 좋은 남자 만나 평범하게 살았으면 하는
그런 바램 그 외엔 아무것도 없어. 그리고 기왕이면 자기 하고싶은 거 하면서...
자기 인생 구현해 나가면서 살면 더 좋은거고. ”
“ ...... ”
“ 여하튼 결혼문제는 좀 신중하게 생각했으면 하는 그 바램이 있을뿐 그 외 다른
것은 없어. 이 사람은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
철규의 말에 괜시리 미소가 지어지는 해리. 여하튼 철규 역시 첫 결혼의 상처가 있는 그런 남자 아닌가. 그걸 생각해보면 딸이 결혼문제 만큼은 신중하게 생각하고 선택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는것은 당연한 일일수도 있다. 그런 남편을 잠시 사랑스럽게 안아보는 해리. 철규의 말이 이어진다.
“ 여하튼 그 민경이가 좋다고 쫒아다니는 남자는 당신이 만나보고 나서...가급적
좀 신중했으면 좋겠다. 그런쪽으로 방향을 잡아보도록 해요. 다른건 몰라도 민경
이 문제는 내가 당신을 믿으니까 말이야. ”
“ 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어요 여보. ”
바람이나 쐴까 해서 해리와 철규 부부는 방을 나서려 한다. 헌데 발걸음을 옮기던 도중 갑자기 철규가 얼굴을 찡그리며 가슴을 움켜잡는다.
“ 어억... ”
“ 여보, 왜 그러세요 ? ”
갑자기 순간 휘청거리며 자리에 주저앉기까지 하는 철규. 해리가 놀라서 남편을 부축해보려 하고 그래도 바로 정신은 좀 차려지는지 손을 내저으며 철규가 숨을 들리면서 말한다.
“ 아...아냐 잠깐 그냥...가슴에 통증이 왔나봐. 그냥 가끔 이런일이 있어. ”
“ 어디 아프신것 아니에요 여보 ? ”
걱정되는듯 일단 남편을 부축해 다시 침대쪽으로 데려가 앉히며 묻는 해리. 철규는 숨을 가다듬으며 아내를 바라보며 안심하라는듯 말을 건넨다.
“ 아냐 그냥 가끔...한 2-3년전부터 이런 통증이 있었어. 가끔 가슴 한켠이 아파
오던가 현기증이 오는...자주는 아니고 가끔 이런때가 있긴 해. ”
“ 병원에 가보셔야 하는것 아니에요 여보 ? ”
다른것은 몰라도 적어도 건강문제 만큼은 결혼후 두달 아니 그 이전 철규와 교제하던 기간에도 별다른 이상을 못 느꼈던 해리다. 심지어 잠자리에서도 튼실했던 남자가 50대 중반의 남편 철규다. 헌데 그런 철규가 갑자기 이러니 해리로선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습이고 철규는 그런 아내를 안심시키듯 말한다.
“ 아냐 그냥...병원엔 한번 가서 문의를 해본적이 있는데...정신적 스트레스 때문이
아닌가 그런 진단을 하더군. 허허...하긴 내 젊은시절뿐만 아니라 그 이후도 이것
저것 정신적으로 신경쓰는 일이 좀 많았었어야지. ”
“ 여보, 그러지말고 저하고 병원에 가서 한번 정밀진단이라도 받아보던가 하세요.
그러시다 혹 정말 큰일이라도 나면... ”
철규의 나이가 나이니만큼 진심으로 걱정되는 모습을 보이는 해리. 하지만 철규는 그런 해리의 제안은 수용하면서도 공연히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는 않다는듯 말한다.
“ 다만 이거...민경이한테는 말하지 않았으면 해. ”
“ 민경이한테요 ? ”
“ 그래. 뭐 그리 중병이 걸린것도 아니고...가끔 그냥 이 정도 통증이 이는것을 갖
고 뭐 굳이 민경이한테까지 걱정하게 할 필요가 있겠나. 병원에 가서 진단은 받
아보던가 할텐데...그러나 민경이한텐 이건 굳이 말하지 않았으면 해. ”
“ 네, 알겠어요. 민경이가 괜한 근심 하게할 필욘 없겠죠. 그럼 언제 한번 날 잡
아서 저희끼리 나들이라도 가는척 하고 나가서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아보고 오
도록 해요 여보. ”
밤 늦은 시간. 깊은잠에 들어 있었는데 어디서 뭔가가 끙끙거리는 소리가 났다. 꿈속인줄 알았는데, 어디선가 알수없는 소리가 계속 들리는듯 하다 눈을 떴다. 사방은 어두운 밤. 해리는 반사적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는데, 곁에 있어야할 남편이 없었다. 이상해서 일어나보니 저쪽에 뭔가 시커먼 물체가 보였다. 다름아닌 남편이었다. 뭔가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내고 있음을 바로 알수 있었다. 놀란 해리가 다가가보았다.
“ 여보, 왜 그러세요 ? ”
그러잖아도 얼마전에도 그렇게 고통스럽게 순간적으로 가슴을 쥐어짜다가 쓰러진적도 있고, 아무리 생각해도 불안해 민경이에게만 알리지 않고 단둘이 병원에 찾아가 남편의 정밀 검진을 받아본적도 있었다. 그때 의사는 대체로 정신적 스트레스가 많아져 생기는 증상이라며 안정을 취하면 괜찮아 질것이란 진단을 내렸다. 그래서 일단 그렇게 큰 문제는 없을것이라 안심하고 있었는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러고있는 남편을 보니 더 놀라지 않을수가 없었다. 바로 불을 켜보았다. 헌데 그러고나서 해리는 더 충격을 받았다. 남편의 얼굴이 거의 흙빛이 되어있는것 아닌가.
“ 여...여보... ”
헌데 철규는 혹 민경이에게 알리지 말라는 의미인지 그런 와중에서도 손을 내젓고 있었다. 그리고 고통스럽게 있는대로 인상을 찡그리는 철규. 그러다 이내 곧 바닥에 쓰러지고 만다. 더는 두고볼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해리가 바로 2층 민경의 방으로 달려가보았다.
“ 민경아, 민경아. 아빠가 이상해 !!! ”
“ 네 ? 뭐라구요 ? ”
밤중에 느닷없이 2층 방까지 올라온 해리로 인해 민경도 놀라는 모습이고 해리는 거듭 아버지가 이상하다며 다급하게 그 사실을 알렸다. 그래서 민경도 해리와 함께 1층 방으로 가보고 민경 역시 흙빛이 되어 쓰러진 아버지로 인해 경악하듯 놀랐다.
“ 아빠, 아빠 왜 그래요 ? 괜찮아요 아빠 ? ”
하는수없이 바로 119를 불렀다. 그리고 입원하게 된 철규. 전체적으로 진단을 해보고 의사가 상태를 알려주었다.
“ 대체 어떻게 된거에요 ? 우리 아빠 도대체 왜 저러신건데요 ? ”
해리보다도 더 다급해진것은 아무래도 외동딸인 민경일수밖에 없고 의사가 한숨을 내쉬면서 진단결과를 알려준다.
“ 그...뇌졸중 비슷한 증상이라고 보시면 되는데요... ”
“ 뇌졸중이요 ? ”
“ 네, 환자마다 상태가 조금씩 다르긴 한데, 얼마 안 가서 바로 안정을 취하고 깨
어나시는 경우도 있고 장기간 저렇게 있으면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분도 있고...
상태는 사람에 따라 천양지차입니다. 아무튼 좀 더 시간을 갖고 환자분 상태를
지켜보는수밖에 없는듯 합니다. ”
실제 철규는 의식은 곧 회복한듯 했지만, 얼굴빛 자체가 말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시커멓다’고 말하는게 좋을것 같은 철규의 인상은 이미 이전의 중후한 매력을 풍기던 50대 남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의식은 회복한듯 했지만 말도 제대로 못 하는듯 했고 다만 민경과 해리를 좀 간신히 알아보기는 하는듯 손만 겨우 움직이는 정도였다.
“ 그럼...저희 아빠는 이제 어떻게 되시는거에요 ? ”
의사의 말을 듣고보니 하늘이 무너지는듯한 느낌인 민경이 잔뜩이나 걱정이 되어 그와같이 묻는다. 철규도 애초에 가슴의 통증이나 현기증 같은것을 가끔 느낄때 해리에게 민경이한테 공연한 걱정을 끼치지 않고 싶으니 말하지 말라고 하기도 했지만, 막상 아버지가 이렇게 된 모습을 실제 목격하니 민경은 정말 눈앞이 캄캄해져 어쩔줄 모르는 모습이다. 해리가 그런 민경을 어떻게든 달래보려한다.
“ 엄마...저 어떻게 하면 좋아요. ”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매달릴만한 사람이 민경 입장에선 젊은 새엄마 해리밖에 없는지 그녀에게 안겨서 어린애처럼 펑펑 울고있고, 해리도 이럴땐 민경이 정말 어린아이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여하튼 지금 민경의 충격과 걱정이 아닐터이라 어떻게든 그녀를 달래보려 하고 있고, 두 사람이 함께 일단 환자인 철규를 입원시킨 병실로 들어와본다.
“ 아빠... ”
얼굴이 말이 아닌채로 천장을 향하고 있는 철규의 모습. 아버지의 이런 모습을 민경은 이전까지 본적도 없고 해리에게도 불과 며칠전까지 정정하던 남편의 모습이 온데간데 없이 그야말로 내일이라도 어떻게 될것만 같은 송장이나 다름없는 철규의 모습이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온듯하다. 여하튼 의식은 조금 있는듯한 철규이기에 민경이 다가가서 아빠를 불러보기도 하고 팔,다리를 어루만져 보기도 한다. 해리는 아직 그렇게까지 할 엄두는 안 나는지 두발자욱 정도 물러난 거리에서 남편 철규를 안타까이 지켜보고만 있고, 그나마 철규는 의식이 조금은 있는지 그러고있는 딸 아이가 조금은 느껴지는지 손짓을 약간 까닥해보인다. 그런 손짓에서 이미 아빠의 마음이 읽혀지는듯 민경은 울먹거리며 말한다.
“ 아빠...저 민경이에요. 걱정마세요...아빠 저 여기있으니까요. ”
민경은 그야말로 이렇게 된 아버지를 어떻게든 끝까지 지켜드리겠다는 효녀딸같은 결연한 모습마저 보이고 있고, 해리는 아직 차마 그런 철규에게 다가갈 엄두도 못 내고 있는데 그런 해리를 보며 민경이 살짝 눈짓을 보낸다. 철규도 겨우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이제 결혼한지 두달밖에 안된 신혼의 젊은 아내를 느껴보고는 싶은지 다시금 뭔가 손짓을 하는듯하다. 해리가 다가와보고 민경이 해리의 손을 철규에게 가까이 다가가게 해보자 철규가 덮석 해리의 손을 잡는다. 순간 당황할 지경인 해리. 철규는 이 상태에서 해리를 놓고싶지가 않은지 좀체 그 손을 놓아주지 않는다.
“ 여보... ”
순간 하늘이 무너질듯 하고 정신이 멍해지는듯한 해리의 심정이다. 자신보다 스물다섯살이나 많은 남편 철규. 하지만 50대 중반의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중후한 풍모에 매력을 느끼기도 했고, 아무리 그래도 철규란 남자가 앞으로 한 20-30년 정도는 더 살수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선택한 그가 아니던가. 헌데 그런 철규를 택하고 이제 겨우 두달정도가 지났는데, 한참 신혼의 재미를 만끽하고 있는 터였는데, 이렇게 갑자기 예기치못하게 쓰러지더니 그야말로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남편 철규를 보니 해리는 그야말로 막막해질 지경이다. 하지만 철규는 그 와중에도 해리를 놓치고 싶지 않은지 덮석 잡은 손을 좀체 놓아주지 않고, 해리는 여러 가지로 복잡한 심경인 와중에 일단 그의 앞에 쓰러지듯 주저앉아 남편의 손을 어루만져본다. 여러 가지 복잡한 심경에 해리도 순간 왈칵 눈물이 치솟는다.
“ 저...회진을 해야 합니다만. ”
그때 철규의 진료를 맞고있는 의료진이 들어왔다. 회진시간이 되었나보다. 민경과 해리가 자리를 비켜주고 의료진이 환자의 상태를 살펴본다. 전체적으로 안정이 필요하다는 말을 거듭 두 사람에게 일러주고, 헌데 나가려는 의료진중 막내쯤 되어보이는 남자가 순간 흘깃 민경을 본다. 찰나인데다가 이런 상황에서 누군지를 알아볼 경황은 아닌지라 민경은 그를 바로 알아보지는 못했다. 그런데 저녁때쯤이 되어서인지 사복차림을 한 누군가가 들어왔다. 다름아닌 이전까지 민경을 좋다고 쫒아다녔다는 그 승호란 남자였다.
“ 어머나...!!! ”
민경은 승호의 직업이 의사라는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하필 다른곳도 아닌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이 승호가 일하는 병원이란것에 적잖이 놀랐다. 사실 불과 얼마전에 그 직업이 의사라는 승호란 남자가 자신이 좋다고 쫒아다니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며 젊은 새엄마 해리에게 도움까지 요청했던 그런 민경이 아니던가. 하지만 아버지가 이렇게 된 상황에서 한가하게 그 일을 생각할수 있는 경황은 아닐터. 헌데 전혀 뜻하지도 않게 이런곳에서 승호와 다시 만나게 되다니 민경으로선 놀라지 않을수 없는 일일것이다. 살짝 옆에있는 해리가 신경이 쓰여 그녀를 흘깃 바라보기도 하고 해리는 아직 영문을 알 수가 없어 두 사람을 번갈아보며 바라본다.
철규의 갑작스러운 쓰러짐으로 인해 해리도 민경도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병원에 입원한 철규를 일단 간병인에게 맡기고 두 사람 다 현재 집으로 돌아와 있는 상태이긴 했지만 망연자실한 상태로 침통함과 울적한 시간이 거듭되고 있었다. 의식을 조금이나마 회복한 상태인듯한 철규는 그나마 자신의 젊은 후처 해리나 딸 민경을 조금은 알아보긴 하는지 손가락이나 겨우 까딱일 정도였고, 무슨 말도 눈짓도 제대로 보내지 못한채 병실 침대에 누워 허공만을 향하고 있을 뿐이었다. 무엇보다 해리는 얼굴이 말도 아니게 변해버린 철규로 인해 상당한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사실 해리는 50대 중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은근히 매력적이고 중후한 멋을 풍기는 그런 철규에게 반한면도 분명 있었다. 그런데 그런 철규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그야말로 산 송장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나이많은 남편의 모습이 가져온 충격으로 몸과 마음을 쉬이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날. 민경이 해리가 있는 1층 침실로 들어왔다.
“ 언니... ”
‘언니 ?’라니. 해리가 철규의 아내가 된 이후로는 자신을 ‘새엄마’도 아니고 그냥 엄마라고 불러오던 그런 민경이 아닌가. 단순한 호칭뿐만이 아니라 그야말로 끔찍이도 자신을 마치 친엄마라도 되는양 여겨왔던 그런 민경. 헌데 느닷없는 ‘언니’란 호칭에 순간 어리둥절해질 따름이다. 해리가 의아한 얼굴로 민경을 바라보는 가운데 그녀의 말이 이어진다.
“ 우리 잠깐 이야기좀 해요. ”
할말이 있으나 마나 어차피 지금 집안에 식구라곤 해리와 민경 단 둘뿐이다. 그런데도 굳이 거실로까지 나와서 할 필요가 있는 이야기인것인지. 여하튼 민경의 말에 해리는 그녀를 따라 거실로 나와보긴 한다. 2층 거실 한가운데 놓여있는 소파쪽으로 가서 헌데 민경은 잠깐 뭔가 주저하는듯한 모습을 보인다. 대체 이 아이가 왜 이러나 해리로선 여전히 의아한 가운데 민경이 그녀를 바라본다. 그러다 다가와서는 해리를 와락 안아본다.
“ 미...민경아... ”
순간 당혹스럽기 짝이없는 해리. 대체 민경이 이 아이가 왜 이러나 그 의도를 알 수 없어 여전히 의아하기만 한데 민경이 해리를 안은채로 말한다.
“ 언니... ”
“ ??? ”
“ 미안해요 언니. ”
그리고는 흐느끼기까지 하는 민경. 조금 갑작스럽게 해리에게 큰절을 올리기까지 한다. 그리고 소파에 그녀를 앉히고는 해리의 손을 잡은채 다시한번 사과의 말을 건넨다.
“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언니. ”
“ 민경아, 대체 왜 이러는건데 ? ”
“ 제가 아무래도 잘못 생각했나봐요. ”
“ 뭐라구 ? ”
대체 무슨소린지 아직도 알 수 없어 하는 해리의 모습. 민경은 눈물을 훔치며 자신을 겨우 진정시키고는 말을 이어간다.
“ 전 그냥...우리 아빠가...저 어릴때부터 지금껏 혼자 키워오신 모습이...너무 딱하
고 안쓰러워보여서...그래서 우리 아빠가 재혼하셨으면 하는 바램도 있었고... ”
“ ...... ”
“ 그래서...기왕이면 새엄마감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으
면 좋겠다. 그런 마음에 언니를 선택한건데... ”
“ 미...민경아... ”
“ 아무래도 제가 잘못 생각한것 같아요. 정말 미안해요 언니. 내가 아무래도 언니
한테 정말 몹쓸짓을 한 것 같아요. ”
아무래도 아버지가 이 지경이 되자 해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나보다. 그러고보면 이제 철규와 결혼한지 두달여밖에 안된 신혼의 젊은 신부 해리이기도 하지 않은가. 헌데 아직 신혼의 기분을 제대로 만끽하기도 전에 병든 나이든 남편의 병수발을 해야하는 처지까지 되어버린 해리. 그걸 생각해보니 민경으로선 너무 미안해서 어쩔줄을 모르는 그런 마음인것 같다. 그래서인지 몇 번이고 거듭 사죄의 말을 건네는 민경. 하지만 해리는 그런 민경을 바라보며 말한다.
“ 민경아. 이러지 마. 나 너 원망한적 없어. ”
“ 언니... ”
말이야 그렇게 하지만 설마 진심일까 싶은 민경. 이렇게 된 상태에서 자신을 원망하는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리라. 그래서일까. 민경은 뭔가 작심한듯 입술을 지그시 깨물어보이며 해리에게 말한다.
“ 언니...정 뭣하면... ”
“ ??? ”
“ 그냥 우리 아빠 곁 떠나도 좋아요. 다른건 몰라도...언니가 저희 아빠 병수발이나
하면서 남은 시간을 보내는거...제 양심이 허락할수 없어요. ”
“ 미...민경아... ”
“ 내키지 않으면 지금 그냥 떠나셔도 돼요. 어차피...아닌말로 언니가 우리 아빠하
고 사이에 아이가 있는것도 아니고...그냥...아빠 병 구완은 저 혼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거니까. ”
“ ...... ”
“ 언니는 그냥 언니대로 자유롭게 사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진짜 언니한테
너무 몹쓸짓을 한것 같아 견딜수가 없어요. ”
해리한테 정말 미안한 마음에 어쩔줄을 모르는듯한 민경. 이런 민경의 태도를 지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해리도 해리대로 뭔가 심경이 복잡한듯 한데, 그냥 아버지 곁을 떠나도 좋다고 말하는 민경을 말없이 바라보며 뭔가 생각에 잠기는듯 하다. 그러다 한참만에 천천히 입을 연다.
“ 이러지마 민경아. ”
“ ...... ”
“ 나...한번도 너 원망해본적 없어. 솔직히 막상 선생님 쓰러지시고 나서...좀 많이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
해리 스스로도 뭔가 울컥 치미는것이 있는지 잠시 목이 메이는 그녀. 침을 꿀꺽 삼켜 스스로를 진정시키고 그리고는 민경을 바라보며 사뭇 결연한 어조로 말한다.
“ 나 지금은 선생님 진심으로 사랑해. 그러니... ”
“ 어...언니 ? ”
“ 너희 아버지...아니 선생님 곁 떠날 생각 추호도 없어. 그리고...떠나라니...무슨
말이 그래. 날더러 병든 남편 버리고 나혼자 잘 살겠다고 도망가버린 그런 여자
가 되라구 ? ”
“ 언니 ? ”
해리 스스로도 뭔가 결심한것이 있기라도 한것인지 사뭇 결연하기까지 한 그녀의 태도가 오히려 민경이 이해가 안 갈 지경이다. 그런 민경을 안심시켜 주려는듯 해리의 말이 이어진다.
“ 솔직히 처음엔...니가 너희 아버지와 결혼해 줄수 없느냐고 말했을땐...많이 당혹
스럽고 놀라기도 했지만... ”
“ ...... ”
“ 막상 너희 아버지를 그렇게 만나보고...너희 아버지에 대해 보다 많은것을 알게
된 뒤로... ”
해리의 가슴이 순간 묘하게 두근거린다. 이런것도 여하튼 자신의 마음의 고백이라면 고백이라서일까. 살짝 긴장이 된 모습.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의 말이 이어진다.
“ 나 지금은 진심으로 너희 아버지 사랑해. ”
“ 어...언니... ”
“ 다른건 몰라도 나 너희 아버지 지금은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 그러니...떠나다
니 ?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 가긴 어디로 가. 나도 곁에서 아버지를...
선생님을 지켜드리며 하고싶은 것들이 있어. 그러니...그렇게 쉽게 함부로 말하지
말아줘. ”
출판사를 경영하고 인터넷 웹진도 함께 운영하면서 겸사겸사 기고활동도 하는 진보진영의 일종의 아웃사이더 노릇을 지금껏 해온 강철규. 그런 철규에 대해 점차 알아가면서 해리도 그에대한 나름의 존경심이 생긴것일까. 그리고 그 존경심이 사랑의 감정으로 발전한것이라면 분명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볼수 있을것이다. 그래서인지 떠나도 좋다는 민경의 말에 당치도 않다는듯 해리의 말이 이어진다.
“ 이러지말고...우리가 함께 힘을 모아 아버지를 지켜드리자. 우리가 선생님을 지
켜드리지 않으면 누가 지켜드릴수 있겠니 ? 응, 민경아. 그러니 우리 이럴수록
서로의 마음을 합해가야 하는거야. ”
“ 어...언니... ”
해리의 그와같은 말이 여전히 쉬이 믿겨지지 않는것일까. 한편으론 해리의 말이 고맙게 들리면서도 그러면서도 한켠으론 더더욱 미안한 감정이 들기까지 하는 해리. 헌데 해리는 민경을 살짝 나무라듯 정색을 하며 한마디 더 덧붙인다.
“ 그리고 언니라니...무슨말이 그래 ? ”
“ ...... ”
“ 엄마와 딸사이 하기로 했잖아. 이 다음에 나이 70,80 될 때까지 나이차 얼마
않나는 새엄마와 딸 사이로 오순도순 함께 살자며 ? 그러고나서 언니라니 ? 엄
마보고 언니라 부르는 사람이 어디있어 ? ”
해리는 해리대로 자신의 마음을 단단히 굳혔는듯 되려 자신을 계속 새엄마로 여겨달라는듯이 민경을 나무라며 그와같이 말하고 있다. 해리의 그 말에 다시금 가슴 한켠이 묘하게 요동치는 민경. 지금까지처럼 계속 엄마로 불러달라는 해리의 말에 민경의 가슴이 살짝 짠해오기까지 한다.
“ 미안해요 언니...아...아니 엄마. ”
“ 그래. 우리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모녀지간으로 다정하고 친구같은 모녀간으로
계속 사는거야. 무슨말인지 알겠지 ? 그리고 우리 성심을 다해 쓰러지신 아버지
완쾌되실수 있을때까지 말야. ”
“ 미안해요 엄마. ”
“ 힘내 민경아. 그리고 우리 함께 힘을 합쳐가기로 하자. ”
민경의 두 손을 꼭 잡아보는 해리. 그런 해리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 교차되어 민경은 다시 울음을 터트린다. 해리가 그런 민경을 안아본다.
- 5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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