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사로운 봄날.
해리는 1층 마당 테이블에 앉아 봄날의 정취를 만끽하고 있었다. 마당 곳곳에 심어진 이런저런 꽃이며 잎사귀 푸른 나무들에서 풍겨나오는 향기가 한껏 봄날임을 실감케 해주고 있었다. 무엇보다 해리는 이제 자신이 이런 집의 안주인이란 사실이 믿겨지지가 않았다. 철규와 결혼한지는 이제 한달여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비록 나이많은 남자이긴 했지만, 그래도 덕분에 이런 공간에서 자신이 앞으로 살아가게 된다면 힘들게 살아온 지나온 시간에 대한 보상은 충분히 되리라 생각해서 만족하고 있었다. 한껏 행복한 미소가 피어오르고 있는 해리. 철규가 그때 이쪽으로 다가온다.
“ 거기서 뭘 하고 있었나 ? ”
“ 그냥...봄향기가 너무 좋아서요. 이렇게 한껏 향기에 취해보고 있었죠. ”
“ 허허...그래. ”
해리를 살짝 안아보는 철규. 철규 역시 나이 50대 중반에 이런 젊은 아내를 맞이했다는것에 흡족해하고 있었다. 사실 해리는 그렇게 미인이라고 하긴 좀 어려운 외모다. 늘씬한 키에 제법 섹시한 몸매를 갖춘 해리이긴 하지만 갸름하면서도 다소 통통한 얼굴은 그렇게까지 비호감이라고 할 순 없지만 전체적으로 그녀를 커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대로 철규에겐 만족스러운 젊은 새 아내인지 그녀가 기특한듯 한번 머리를 쓰다듬어보기도 한다.
“ 해리... ”
“ 네, 선생님. ”
아직 ‘여보’란 호칭은 익숙치 않은것은지 그를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해리. 철규는 그녀와 마주앉은채 말을 이어간다.
“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난 여하튼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대외적으로 활동하는 일
도 많고, 집에서 손님맞이를 해야할 일도 종종 있는 그런 사람이야. 그러니 여하
튼 해리가...그런 내게 충실한 내조자가 되어주었으면 해. 사실 그동안은 아내 없
이 혼자 살아가느라 대외적으로 힘든일이 많은 편이었거든. 하지만 이제 해리가
지금껏 내게 없었던 그런 부족한 부분을 잘 채워주었으면 해. ”
실제 해리는 그사이 남편 철규와 함께 그가 참석해야하는 대외행사에 같이 나가본적도 있었고, 집에서 손님접대를 해본 경험도 두어번 있었다. 아직은 처음이라 서툴러서 그런지 사소한 실수가 있기도 했지만 철규의 주변 지인들은 나이 50대 중반에 이렇게 젊은 새 부인을 맞이한 그를 다들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결과적으로 해리의 젊은 외모에 대한 칭찬으로 이어지곤 했으니, 해리는 그럴때마다 수줍으면서도 뿌듯한듯 얼굴을 붉혔다. 헌데 해리가 문득 철규에게 궁금한게 있는듯 묻는다.
“ 근데 선생님... ”
“ 왜 ? ”
“ 혹시 선생님은 그럼 국회의원 같은데 출마하신다거나 그럴 생각이 있으신거에
요 ? ”
철규와 결혼전에는 민경이 자신의 아버지 직업이 ‘출판사 사장’이라고만 말해 그렇게만 알고 있었다. 헌데 그런 출판사 사장을 하면서 운영하는 인터넷 웹진이 있기도 하고 그리고 가끔 신문이나 잡지같은데 칼럼등의 기고활동을 하기도 하는 그. 그런 철규여서인지 실제 그런 대외행사 같은데 참석하다보면 그런대로 TV 같은데이따금 얼굴이 비치는 정치인들이나 대학교수,지식인들도 이따금 만나볼수가 있었다. 해리야 정치같은것은 잘 모르는 여자니 철규가 그런 사람들과 만나서 나누는 대화를 제대로 알아들을수는 없었지만 여하튼 정치에 관한 이야기가 이따금 화제로 올려진다는것은 눈치로 알수 있었다. 그래서 문득 그와같이 물은것이다. 해리의 그와같은 물음에 철규는 아내를 잠시 묘하게 보더니 살짝 미소를 머금고는 묻는다.
“ 허허...왜 ? ”
“ ??? ”
“ 해리도 뭐 기왕 이렇게 된것...국회의원 사모님이나 그런거라도 되보고 싶은건가
? ”
“ 아...아뇨...뭐 꼭 그렇다기 보담도. ”
여하튼 인간은 누구나 조금씩의 야심이나 욕심 하다못해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삶, 보다 행복하거나 잘사는 삶을 영위하고픈 그런 바램이 있기 마련이다. 해리도 적어도 그런 생각이 아주 없는 여자라곤 할 수 없지만, 막상 철규의 그와같은 물음엔 당혹스런 낯빛이 된다. 철규가 그런 해리를 바라보며 말한다.
“ 이것도 전에 말한적이 있긴 하지만 난 정치권에 직접 뛰어든다기 보담은 정치권
아웃사이더 노릇 같은것을 하고싶어. 일부러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난 진짜 선거
운동 같은것은 체질상 맞지가 않거든. 여하튼 나도 하는일이 이렇다보니 주위에
직접 정치판에 뛰어들거나 선거판에 뛰어드는 선후배니 지인도 그간 적잖이 봐왔
지만...곁에서 지켜보다보면 난 진짜 저런건 체질상 못하겠다. 그런 생각이 들더군
. ”
“ ...... ”
“ 그래서 난...직접 내가 정치판에 뛰어들기 보단...곁에서 그들에게 어떤 충고나
조언같은것을 해주고...또 때로는 사상이나 정책적 밑받침 역할을 해주는 그런 아
웃사이더 역할을 하는게 더 어울리겠다. 그런 생각을 해왔던거야. 그래서 지금까
지 이렇게 출판사를 경영하면서 웹진도 운영하고 기고활동도 하는 그런 삶을 살
아온게지. ”
해리가 원래 정치를 모르는 사람일진대, 하물며 ‘정치권 아웃사이더’란 말의 의미를 얼마나 제대로 이해할련지는 미지수다. 여하튼 정치에 직접 뛰어들기보단 지금이런 방식으로 사는게 더 낫다는 그런 의미로 받아들이면 되는것일까. 해리를 바라보며 철규의 말은 조금 더 이어진다.
“ 내가 해리한테 이런말 하는게 어떨지 모르겠지만...사실 우리나라 좌파들은 글러
먹은게 많아. 나도 80년대에 운동권 하던 사람이지만...울나라에서 무슨 진보니
좌파니 이런거 하는 친구들은...아직도 그 시절 자신들이 꿈꾸던 관념적 이상향
그 틀에 박혀 거기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할때가 많았어.
”
철규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것일까. 해리는 별다른 말없이 커피 한모금을 음미하고 있다. 철규의 말은 조금 더 이어진다.
“ 사실 이런말은 실제 내 주변 지인들한테는 잘 못 하는 이야기이기도 해. 자칫
내가 주제넘는 존재로 보일것 같아서 조심스러울때가 많아. 하지만 내가 지금 생
각하는 우리나라 진보가 추구해야할 방향은... ”
“ ...... ”
“ 평등주의의 확산과 생명평화 사상. 그것을 21세기 우리사회 진보가 새로이 지향
해야할 방향점으로 잡고싶다. 그런 생각을 해오곤 했어. 뭐...이런말을 해리가 어
찌 이해할련지는 모르겠지만. ”
사실 해리로선 좀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라서일까. 살짝 지루해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런 눈치를 챘음일까. 철규는 너털웃음을 지어보이며 미안하다고 사과의 말을 건넨다. 그리고 해리의 손을 살짝 잡아보며 말한다.
“ 허허허...이거 참...내가 괜한 이야기를 꺼낸것 같군. 미안하이. 여하튼 그러니 해
리가 앞으로 그런 내게...좋은 내조자가 되어달라는 그런 말을 하고픈게야. 앞으로
해리가 날 도와서 해줘야할일이 많이 있거든 ? 내 말 무슨말인지 알겠나 ? ”
“ 네, 성심을 다할께요 선생님. ”
철규의 말을 어찌 이해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자신에게 어떤 막중한 책무나 사명감 같은게 쥐어지는 것이로구나 그 정도의 짐작은 하게된다. 그리고 여하튼 이런 사람의 아내로 평생을 살아간다는것 그런대로 흥미로운 미래가 될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여하튼 해리는 지금 자신의 선택이 그런대로 잘한 선택 같다는 생각을 하고있는 중이다.
민경은 대학을 졸업하고 한 1년여 정도는 백조로 있다가 1년전쯤부터 한 기업체에 취직 직장생활을 하는 중이다. 민경이 해리한테 자신의 새엄마가 되어달라는 부탁을 할 무렵만 해도 민경은 아직 직장을 잡지 못한 상태이기도 했는데, 지금은 직장생활을 하고 있기에 평일 낮에는 보통 해리 혼자 집에 남게된다.
하루는 철규가 지방에서 열리는 세미나 행사에 참석하게 되어 내일 귀가를 할 예정인지라 해리 혼자 밤늦은 시간 집을 지키고 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그날따라 민경도 늦고 있었다. 아빠가 오시지 않는 날이라 잘되었다 싶어 자유롭게 어디서 즐기고 있기라도 한 것인지, 해리에게는 늦는다고 문자가 오긴 했는데 여하튼 그날 민경은 대체로 밤 늦은 시간이 되어 술도 어느정도 알딸딸하게 취한체 집에 들어왔다.
“ 엄마...저 왔어요. 히히히...엄마... ”
밤늦은 시간의 귀가. 그러고보니 민경에겐 아마 이렇게 집에 들어왔을때 엄마가 기다리고 있는 그런 경험은 이전까지 자랄때는 없을터였다. 그래서일까. 집에 들어오자마자 젊은 새엄마 해리가 기다리고 있는것이 좋기만 한지 살짝 취한 얼굴로 해리의 품으로 파고든다.
“ 엄마...저 왔어요. 우웅...미안해요. 그냥 친구들이랑 놀다 술 한잔 했는데... ”
“ 얘가 ? 알았어. 알았어. 민경이 많이 취했나보구나. 어서 2층으로 올라가서 쉬
어라. ”
어차피 내일 출근도 해야하는 민경이니 너무 취해서 혹 내일 늦게 일어나지나 않을지 그게 걱정도 되어 그와같이 말하는 해리. 헌데 민경은 비틀거리며 1층 소파쪽으로 가서 풀썩 쓰러진다.
“ 아니, 얘가 ? 여기서 이러면 어떡해 ? 2층으로 올라가서 자야지. ”
민경의 이전에 없던 흐트러진 모습에 순간 당황할 지경인 해리. 어서 2층 민경의 방으로 올라가라고 재촉하는데, 민경은 살짝 곯아떨어진듯 하더니 조금 있다가 게슴츠레 눈을 뜨며 깨어난다. 그리고 해리에게 손짓을 하며 말한다.
“ 우웅...우웅...새엄마... ”
보통 해리를 그냥 ‘엄마’라고 불러왔던 민경인데 술에 취해 흐트러진 정신 탓인지 ‘새엄마’라 부르고 있는 민경. 하지만 해리로선 그거야 크게 신경쓸일은 아니기에 어서 2층으로 올라가기나 하라는 재촉만 거듭하는데 민경이 그런 해리의 손을 덮석 잡는다. 그 바람에 자신도 소파로 다가와 앉게되는 해리. 민경이 해리를 바라보며 말한다.
“ 우웅...새엄마... ”
“ 왜 그래 ? 나한테 무슨 할말이라도 있어 ? ”
그저 흔한 술주정쯤으로 생각했는데, 이러는 민경의 태도가 웬지 심상찮다는 느낌도 들고, 그래서 무슨일이 있나 싶어 해리가 그와같이 묻는데 민경은 여전히 꼬부라진 목소리로 횡설수설 늘어놓는다.
“ 엄마...나 사실 남자 생겼다. 남자친구 생겼다구. 푸힛~! ”
“ 뭐라구 ? ”
새엄마이기 이전에 이미 해리와 민경의 친분은 이전부터 한 5년을 언니,동생 하며 지내온 그런 사이 아니던가. 해리의 경우엔 이전까지 남자에는 별 관심이 없는 그런 모습이었고, 기억에 민경도 사귀는 남자가 있거나 한적은 없는것이 분명하다. 헌데 느닷없이 이런말을 하니 해리도 순간 놀라는데, 진담인가 아니면 취중에 해보는 헛소리인가 아직 판단은 안 되는데 민경은 흐트러진 눈빛으로 해리를 바라보며 연신 그런 말을 입에 담는다.
“ 남자생겼다니까. 엄마...나 그래서...엄마한테 고민 말하려구 해. 응 ? 엄마... ”
마치 어린 딸네미가 엄마한테 보채는듯한 말투로 그렇게 말하고 있는 민경. 하지만 지금 이런 상태인 민경과 무슨 진지한 대화를 나눌 상황은 아닌지라 그녀를 적당히 타일러 결국 2층 방으로 올려보낸다. 자기방 침대에 풀썩 쓰러지는 민경. 해리는 민경의 이불을 잘 덮어주고 방으로 나온다.
“ 우웅... ??? ”
날이 밝아 깨어난 민경. 1층으로 올라왔을땐 해리가 아침상을 차려놓고 있었다. 간밤의 일이 기억이 나는지 안 나는지 무안한 눈빛의 민경. 해리에게 사과한다.
“ 어...언니...아니 엄마...죄송했어요 어제. ”
장난인지 진담인지 이번엔 또 언니라고 부르는 민경. 이와같은 일관성 없는 민경의 호칭에 해리가 헷갈릴 지경이다. 좀 어이없다는 얼굴로 해리가 나무라듯 한마디 한다.
“ 야 !!! 강민경. ”
“ 예 ? ”
약간 정색한듯한 해리의 말투에 화들짝 놀라기까지 한 모습이 민경. 해리의 말이 이어진다.
“ 넌 호칭이나 좀 통일해라. 언제는 꼬박꼬박 엄마라 하더니...어젠 또 잔뜩 술에
취해서는 새엄마 어쩌구...그러다 지금은 또 언니냐 ? ”
이쯤되면 진짜 강민경 이 아이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 것인지 그조차 의심이 갈 지경이고, 민경이 아무래도 자신이 실수했다는 생각이 드는지 다시금 정식으로 사과한다.
“ 미...미안해요 엄마. 전 그냥...좀 무안해서... ”
“ 무안하면 엄마라 부르다가 갑자기 언니로 바꾸는거야 ? ”
“ 아니...그런것은 아니구... ”
반말투와 존대가 살짝 섞여있는 민경인것을 보면 뭔가 평정심은 아닌듯하다. 끓여놓은 해장국과 함께 간소하게 차린 아침상을 어서 먹을것을 재촉하는 해리. 민경이 앞에와서 앉고 해리가 그런 민경을 바라보며 묻는다.
“ 근데 민경아. ”
“ 네 ? ”
“ 너...어제 한소린 무슨 이야기야, 근데 ? ”
“ 어제...이야기요 ? ”
어제 횡설수설 늘어놓은 말을 기억 못하는것인지 그와같이 묻고있는 민경. 그럼 정말 술에취해 실없이 내뱉은 헛소리였단 말인가. 좀 어이없다는듯 해리가 바라보는데 민경은 그러다 기억이 떠올려졌는지 정색을 하고 말한다.
“ 아...그거요...실은... ”
“ ??? ”
“ 아주 근거없는 헛소리는 아니에요. ”
“ 뭐야 ? 그럼 진짜...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이야기야 ? ”
민경의 이와같은 태도에 순간 놀라기까지 한 해리. 따지고보면 민경이나 해리나 한 1-2년전까지만 해도 남자에는 별 관심이 없던 그런 쪽이었던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다 해리는 민경의 권유로 이혼남인 민경의 아버지 철규의 교제를 시작 민경의 새엄마가 된 것이고, 그리고 이제 민경이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다는 말을 하니 해리도 괜시리 기분이 묘해진다. 일단 이야기나 좀 구체적으로 들어봐야겠다는듯 해리가 다시 말을 건넨다.
“ 대체 어떤 남잔데 ? 어떻게 알게된 사이야 ? ”
“ 아...그게 실은요... ”
조금전엔 진짜 무슨 사귀는 남자가 생긴것처럼 말하더니 뭔가 말꼬리를 흐리는듯한 민경. 해리로선 살짝 답답해지기까지 하는데 민경의 말이 다시금 이어진다.
“ 사실...정식으로 사귀거나 하는 그런 사인 아니고요. ”
“ 아니면 ? ”
“ 그냥 좀...괜찮은...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긴 한데...결정을 하지는 못했어요. ”
“ 뭐야 그게 싱겁게 ? 그럼 뭐...아직 아무 결론도 안 내고서 어제 잔뜩 취해서는
그런 술주정을 했던거야 ? ”
“ 그래서 고민이 되어서 새엄마한테 이야기를 꺼낸거죠. ”
세상의 모녀간이란 대개 어떤 사이인걸까. 대체로 보면 부자간은 무뚝뚝한 남자끼리라서인지 좀 어색하게 지내는 경우가 많고, 모자간이나 부녀같은 마치 연인같은 경우도 있다. 그런 반면 모녀간은 마치 친구처럼 친숙한 그런 사이라고나 할까. 같이 쇼핑이나 취미생활을 즐기기도 하고 깊은 고민을 숨김없이 털어놓는 그런 친숙한 사이. 하지만 여자인 민경은 바로 그런 친구나 말동무같은 존재가 되어줄 ‘엄마’가 부재한 상태로 살아온 그런 여자였다. 민경에게 엄마가 필요했던것은 어쩌면 그런 이유 때문도 아닐까. 마치 친구처럼 지난 5년간 언니,동생 하며 절친하게 지내온 그런 사이였던 해리와 민경. 민경이 그런 해리가 ‘새엄마’가 되어주길 원한 진짜 의도는 어쩌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함께 취미생활 같은것도 즐기고 같은 여자끼리 속깊은 고민도 털어놓는 그런 친구같은 모녀지간. 그런 ‘새엄마’를 원한것이 민경이라면 바로 해리를 원했던 그녀의 진짜 의도가 이와같이 드러나는것일수도 있다. 여하튼 남자가 생겼다면서 그것을 젊은 새엄마 해리에게 털어놓는 상황인 민경. 그녀의 말이 이어진다.
“ 새엄마... ”
“ 그래, 새엄마 어디 도망 안가고 여기 니 앞에 있으니까 말해봐. 대체 뭘 어쩌
겠다는건데 ? ”
“ 새엄마가...한번 그 남자 만나봐주면 안 돼요 ? ”
“ 뭐 ? ”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순간 당혹스러운 해리. 만약 해리가 민경의 친엄마라면 민경이 사귀는 남자건 만난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이건 대체 어떤 사람인지나 좀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에 만나는것은 별 문제가 없다. 헌데 해리는 민경을 어릴때나 사춘기때부터 키워준 그런 새엄마도 아니고 이제 막 아버지의 후처가 된 젊은 아내에 불과할 뿐이다. 물론 그 이전 해리와 민경의 사이가 각별했던 특별한 경우이긴 하지만, 그래도 막상 민경이 이렇게 나오자 당혹스럽기까지 한 해리. 그녀가 민경에게 말한다.
“ 도대체 뭐야 ? 사람 헷갈리게...조금전엔 너도 뭐 아직 결정을 하거나 한 것은
아니라느니 어쩌느니...그러더니 이번엔 날더러 누군지도 모르는 그런 남자를 만
나보라구 ? 대체 어쩌자는 이야긴데 ? ”
민경의 의도를 알 수 없어 살짝 답답해지기까지 하는 해리. 민경은 찬물 한모금을 들이키고 말을 이어간다.
“ 말한 그대로에요. 어떻게 하다 알게된 그런 남자가 있는데...이 남자를 사귀어도
될지...어떨지...그걸 결정을 못하겠어서 그래요. 그러니 새엄마가 만나보고 판단을
좀 해 줘요. ”
“ 대체 어떻게 알게된 남자인건데 ? ”
“ 그게... ”
말하기가 좀 난감한 무엇이라도 있는걸까. 민경은 살짝 말꼬리를 흐리는듯 하더니 어차피 숨길일은 아니란 판단을 한 것인지 바로 또렷한 목소리로 답한다.
“ 실은 저희 직장 선배오빠 친구에요. ”
“ 뭐 ? ”
직장 선배 오빠도 아니고 선배오빠의 친구라니. 일단 민경이 현재 일하고 있는 직장은 평범한 기업체다. 그런곳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사내커플이 될수도 있고 회사 동료의 소개로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될수도 있는일이다. 헌데 직장 선배도 직장선배의 소개로 만나게 된것도 아니고 그냥 ‘선배오빠의 친구’라니. 더더욱 알수없는 일이라 해리로선 의아해지기만 한 가운데 민경의 설명이 조금 더 이어진다.
“ 실은 저희 회사 팀 직원들끼리 회식자리를 가질때 OO 선배가 자신의 친구라며
자리에 데리고 온 사람이 있어요. 그렇게 자주는 아니었고 한 두 번인가 그랬는
데...그러다 그분이 저한테 살짝 관심이 갔나봐요. ”
“ 그래 ? ”
“ 그러다 하루는 선배가 제게 말하더라구요. 그때 그 회식자리에 잠깐 참석했던
자기 친구가 저한테 관심이 있는것 같다며 한번 만나보지 않겠느냐구. ”
“ ...... ”
“ 처음엔 그냥 농담으로 여기고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나중에 다시 선
배가 진지하게 두어번 더 그 이야길 꺼내더라구요. 그러다 한번은 그 선배의 친
구란분이 저희 회사 사무실까지 찾아오기까지 했어요. 퇴근시간에 맞춰서. ”
“ 그래 ? ”
해리도 민경의 이야기를 들으니 사뭇 놀라는 반응을 보인다. 친구의 직장 동료에게 관심이 가서 그 회사 사무실까지 직접 찾아왔다면 그것은 분명 보통 열성이 아니다. 그저 잠깐 스쳐지나가다 만난 사이정도로 가볍게 여겼다면 일부러 그런 정성까지 보이진 않았을것 아닌가. 헌데 그런 정도의 정성을 보인것을 보면 민경의 직장선배 친구란 사람은 확실히 민경에게 제법 진지하게 관심을 보이고 있는것만은 분명해보였다. 이야기를 거기까지 들으니 뭔가 상황이 그리 가볍지만은 않다 여겨졌는지 해리가 이번엔 진지한 톤으로 묻는다.
“ 그...남자 직업은 뭐라고 하던데 ? ”
“ 의사래요. ”
“ 그래 ? ”
의사라면 여하튼 그런대로 안정된 직업을 가진 사람이고, 민경의 집안 배경을 고려해봐도 그렇게 적절치 못하거나 한 그런 상대는 아니다. 다만 민경의 말로는 여하튼 그 남자에 대해 딱히 어떻게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는 소리 아닌가. 해리가 좀 근심이 되는듯 민경에게 말한다.
“ 강민경. ”
“ 네, 엄마. ”
자신을 ‘엄마’라고 또렷한 목소리로 부르는 민경. 이 호칭이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것인지 해리는 민경에게서 이런 말을 들을때면 괜시리 기분이 묘해지곤 한다. 해리의 말이 이어진다.
“ 너 근데...혹시 결정장애나 그런게 있는것은 아니지 ? ”
“ 네에 ? ”
해리의 말이 좀 어이없게 들리는지 민경이 약간 황당해하는 표정을 짓는다. 민경과 해리의 인연은 어느덧 6년전부터의 일. 해리가 민경의 새엄마가 되기전부터도 이미 5년 인연이니 서로에 대해 알만큼은 안 그런 사이가 아니던가. 적어도 이전에 느끼는 민경은 그렇게까지 결정장애가 있다거나 우유부단한 그런 아이는 아니었다. 가정사의 상처 때문에 약간의 그늘은 있을지언정 대체로 밝았고 오히려 그런 민경이 해리에겐 의지가 되기도 했던 그런 사이기까지 했다. 헌데 이제와서 결정장애 운운하는것은 좀 어이없게 들려서인지 민경이 살짝 짜증을 낸다.
“ 새엄마... ”
“ ...... ”
“ 그런게 아니라...좀 쉽게 판단을 내리기 힘든 문제라 그러는거죠. 기왕이면 신중
을 기하고 싶어서...그러니 엄마가 좀 저랑 같이 그 남자를 만나달라는거에요. ”
민경의 이런 간곡한 부탁까지 들으니 해리도 거절하진 못할것만 같다. 새엄마와 의붓딸 사이가 아닌 그냥 언니,동생하며 사는 친한 사이였더라도 사실 이런 부탁은 할법한 그런 사이가 아닌가. 그런 맥락에서 생각해봐도 그리 무리가 가는 부탁은 아니라서인지 일단 해리는 민경의 요구를 수용하기로 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다소 걱정이 되는듯 말한다.
“ 근데 민경아. 사실 너도 알다시피... ”
“ ??? ”
“ 나도 남자에 대핸 잘 몰라. 나도 사실상 너희 아버지가 첫 남자인거나 마찬가지
아냐. ”
가정사로 인한 상처 때문인지 남자에 대한 불신이 있었다던 그런 해리라지 않았던가. 그래서 나이 서른이 넘도록 지금껏 별다른 연애경험이 없던 해리. 그러고보면 해리나 민경이나 이전까진 특별한 경험이 없었던것은 매한가지. 그래서일까. 해리는 아무래도 부담이 되는듯 말한다.
“ 내가...그 니 선배오빠의 친구란 사람을 만난다고 해서 과연 도움이 될련지는 모
르겠다. ”
“ 그래도...백짓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도 있잖아요. ”
민경의 거듭되는 요구에 결국 해리는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다. 다만 지금은 곧 출근을 해야할 시간이니 이런 이야기로 너무 시간을 보낼수는 없는지라 어서 마저 밥을 먹고 출근하라고 해리가 재촉한다. 민경도 그제서야 정신이 난듯 서둘러 마저 밥을 먹고 옷을 갈아입는다. 헌데 민경이 집을 나설때쯤 해리가 뭔가 할말이 더 남았는듯 그녀를 잠깐 부른다.
“ 아, 참 근데 민경아. ”
“ 네, 엄마. ”
무슨 다른 용무가 있는것인가 싶어 민경이 바라보는데 해리는 뭔가 살짝 근심서린 얼굴로 민경을 보면서 말한다.
“ 아까 깜빡하고 이야길 못한거 같은데...깜빡 했다기보단...타이밍을 놓친것 같은
데 사실 아버진말야. ”
“ 아버지요 ? 아버지가 왜요 ? ”
“ 아니, 실은...아버진 민경이 너 시집은 좀 늦게 보내고 싶다는 말씀을 하신적이
계셨어. ”
“ 그래요 ? ”
아까는 없었던 이야기가 지금 나오자 좀 놀라고 뜻밖의 표정인 민경. 해리가 그런 민경을 보며 말을 이어간다.
“ 좀 더 사회경험 쌓고...서른쯤에 시집보내면 어떨까...그런말씀 하신적이 있으셨
거든. 그러니...니가 참고했으면 해서 하는말이야. ”
해리가 철규와 결혼한지가 어느덧 두달정도 되는데, 그 사이 딸 민경에 대한 이야기도 벌써 그와같이 주고받았나보다. 일단 지금은 출근을 서둘러야 할 시간이기에 해리의 이야기를 더 들을수는 없어 민경은 그쯤에서 집을 나선다. 빠른 걸음으로 큰길쪽으로 사라져가는 민경의 뒷모습을 해리는 잠시 한참동안 바라본다.
- 4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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