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는 너무나 놀라 민경의 말에 무슨 이야기조차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인터넷 동아리에서부터 시작된 해리와 민경의 인연이 어느덧 5년째. 해리는 지금껏 민경을 참 마음에 들고 성품도 착한 그런 좋은 동생 정도로 생각해오고 있었다. 헌데 그런 민경이 자신보고 새엄마가 되어달라는 자신의 아버지의 재혼상대가 되어달라는 그런 부탁을 해오고 있는것이 아닌가. 무엇보다 해리와 민경의 차이는 불과 다섯 살차이. 딱 언니,동생 하는 정도로 지내면 어울릴법한 그런 나이차이다. 만약 민경에게 아버지가 되는 사람이라면 해리와의 나이차이도 대충 꼽아봐도 대략 스무살 이상 차이가 날 것이다. 물론 해리가 먼저 ‘기왕이면 아버지처럼 의지할수 있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말을 꺼내기도 했지만, 그것이 꼭 나이가 많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것을 의미하는것은 아니지 않는가. 헌데 민경은 바로 그 점을 놓치지 않고 대뜸 이런 제안을 해온것이다. ‘자신의 새엄마가 되어주면 안 되겠느냐 ?’고. 20년전 이혼으로 혼자되어 지금껏 딸인 민경을 혼자 키우면서 많이 쓸쓸하고 힘들어하셨을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걱정하는 딸의 심정에서 이해한다면 꽤나 효성이 지극한 착한 딸이로구나. 그런 생각을 할수도 있겠지만, 여하튼 자신과 불과 다섯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언니보고 ‘새엄마’가 되어달라는 부탁을 한다는것은 흔히 볼수있는 일은 아닌지라 해리는 적잖이 놀라고 있는것이다.
“ 어...언니... ”
해리가 바로 대꾸하지 못하고 여전히 놀란 얼굴로 있자 아무래도 자신이 괜한 이야길 꺼낸것 아닌가 싶어 민경은 바로 후회가 된다. 어쨌거나 자신과 나이차이도 얼마 안나는 사람보고 ‘새엄마’가 되어달라는 부탁을 한것. 쉽지 않은 부탁인것만은 사실아닌가. 민경은 바로 미안한 마음이 들어 해리에게 말을 건넨다.
“ 제가...괜한 이야길 꺼낸건가요 ? 미안해요 전 다만... ”
“ 아...아니 저 뭐...괜한 이야길 꺼냈다기 보담도... ”
해리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 민경. 하지만 방금전의 이야기가 너무 놀라운 내용이라서일까. 해리는 민경을 바로 쳐다보기가 좀 힘들어진다. 살짝 시선을 돌린채 헛기침을 한번 해보는 해리. 그리고 말을 이어간다.
“ 결혼이란게...어쨌든...당사자의 의견이 중요한거잖아. 니가 꼭 누구더러 아버지
재혼 상대가 되어달라...그런 부탁을 한다고 이루어지는것도 아니고...무엇보다 중
요한건 니 아버지 생각이겠지. ”
사실 해리 입장에서야 여태껏 민경 아버지를 한번 직접 만나본 사실도 없다. 다만 5년간 함께 지내오면서 민경으로부터 간간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좀 들어본적이 있을뿐. 다만 그간 민경이 간간이 언급했던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설명을 종합해보면 여하튼 인간적으론 참 좋은분이고 다만 젊은시절 이혼으로 인한 상처 때문에 약간의 그늘이 있다는것 정도. 게다가 어느정도 잘 나가는 출판사 사장으로 있는 민경 아버지의 사회적 지위와 재력이라면 조건으로도 그런대로 좋은편에 속한다. 물론 해리가 돈이나 밝히는 그런 속물여성은 아니지만, 사람이란 누구나 지금보다 기왕이면 잘 살고싶고 출세하고 싶은 그런 욕심이 조금씩은 있기 마련이라면 나이차와는 별개로 이만한 잘나가는 출판사 사장 사모님이 된다는것. 어린시절 아버지를 잃고 엄마와 단둘이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온 그런 해리임을 감안한다면 그것도 나름 신데렐라형 신분상승의 일이 되기도 할 것이다. 적어도 양극화가 되어간다는 요즘 세상에 웬만해선 잡기 어려운 그런 행운을 잡아보는 셈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경우. 그걸 생각하면 구미가 당기지 않는 일도 아니지만, 여하튼 민경만큼 다 큰 딸이 있는 그런 나이많은 남자와의 결혼. 게다가 아직까지 해리 입장에선 민경의 아버지는 일면식도 없는 남자임을 감안한다면 민경의 이와같은 제안이 바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그런 일인것만은 분명하다. 해리가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듯 하다 조심스레 입을 연다.
“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했던거니 ? ”
“ 글쎄요...뭐 꼭 언제부터라고 꼭 집어 이야기할수 있는 그런것은 아니에요. 다만
... ”
“ 다만 ? ”
“ 아빠한테...재혼상대가 필요하겠구나 그런 생각은 여하튼 제가 철들고 나서부터
니까 꽤 오래되었다고 할수있을거고...그러다 언니와 만나 이렇게 친하게 지내면
서부터... ”
“ ...... ”
“ 그냥...언니같은 사람이 우리 새엄마가 되어준다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문득문
득 해봤던거에요.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저 혼자 너무 즉흥적으로 잠깐 해본 생
각일뿐이라 바로 잊어버리곤 했었는데... ”
해리는 말없이 커피 한모금을 음미한다. 시간이 어느정도 지나서인지 그 사이 식어버린 커피. 하지만 그런대로 달작지근한 음료를 마시는 느낌이라 그리 거부반응은 오지 않는다. 민경의 말은 계속 이어진다.
“ 하지만 그래도...기왕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거라면...그냥 혼자만 생각하다 놓
쳐버리거나 흘려버리긴 아쉽다. 그래서...한번쯤 정식으로 언니한테 이야긴 꺼내
봐야겠다 그런 생각을 한거에요. ”
“ 오늘 그럼 날 너희집으로 초대한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던거니 ? ”
“ 아니에요. 그런것은 아니고요. 그냥 언제한번 언니를 우리집에 초대하고 싶다.
그 생각은 1,2년전부터도 했었어요. ”
실제 민경이 해리를 집으로 초대하려 한적이 몇 번 있었지만 잘사는 민경의 가정환경에 대한 괜한 자격지심에 해리가 사양을 해왔다. 그러다 민경의 한사코 거듭되는 부탁이 있어 이렇게 집으로까지 찾아오게 된 해리. 하지만 민경의 말로는 반드시 그런 이야기를 하고파서 의도한 초대는 아니라지 않는가. 여하튼 해리로선 지금 당장 확답을 내리기 쉽지 않은 일이라 혼자 머릿속이 복잡하다. 민경이 그런 해리를 바라보며 사뭇 간곡하고 다급한 어조로 말한다.
“ 언니...그리고 이런 이야기까지 지금 하는것은 너무 앞서가는것 같지만... ”
“ 뭐...말해봐라. 기왕 이런 이야기까지 나온 마당에 니 진짜 속마음이나 좀 알고
싶으니까. ”
“ 언니가 말하라니까 그냥 숨김없이 말할께요. 지금은 아직 언니가 아무런 확답
도 하지 않은거지만...만약 정말 그렇게 된다면... ”
만약 해리가 정말 민경의 아버지와 결혼한 상황이라 가정하고 하는 이야기라면 확실히 너무 앞서가는 이야기인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민경은 그녀 나름대로 그 이후의 일들까지도 구상해본것이 있는듯 그녀의 말은 차분하게 계속 되고 있다.
“ 꽤...오래전에 그런 다큐를 하나 본적이 있어요. ‘인간극장’ 비슷한 휴먼 다큐물
인데...나이가 한 70인가 80정도 되신 할머니 두분이 함께 사시는 그런 내용이
방송되었어요. 헌데 보니까 나이차이가 딱 다섯 살 차이더라구요. 그러고보니 딱
언니와 제 나이차이와 같기도 한데... ”
“ ??? 그런데 ??? ”
“ 그 두 할머니 사이가 알고보니 새어머니와 딸 그런 사이더라구요. 대충 내용이
따님이 되는분이 사춘기때쯤 아버지가 나이차이가 얼마 안 나는 그런 분과 재혼
을 하신건데... ”
“ 그런 이야기가 있었어 ? ”
“ 네, 한 10년전쯤 어떤 휴먼다큐에서 방송한 내용이에요. 여하튼 그래서...어릴
땐 사춘기때 들어온 젊은 새엄마라 그런지 갈등도 많고 했는데...지금은 그냥
두분 다 똑같이 나이들어가는 그런 연세다보니...지금은 그렇게 나이 70 넘은
나이차이 얼마 나지않는 새엄마와 딸처럼...또는 언니,동생 같은 그런 사이로
함께 사는 그런 두 할머니 내용이 방송이 되더라구요. 그 두분 다 지금은 남
편과는 사별한 그런 상태이기도 하고. 그 새어머니 되는 분이야...남편분과도
나이차이가 많이 났을테니 당연히 이미 남편은 세상을 떠났을테고 또 그 딸
이 되는 할머니도 연세가 이미 70이 넘어서 여하튼 그분도 이젠 남편과는 사
별을 했고...그래서 그렇게 다섯 살 차이나는 새어머니와 딸...그렇게 같이 나
이들어가며 서로 의지하며 사는 그런 내용이 방송되더라구요. ”
그런 경우가 아주 없지않아 있긴 하다. 헌데 그 이야길 민경이 해리 앞에서 하는 의도는 무엇일까. 그 의도가 드디어 드러난다.
“ 만약 정말...언니가 저희 아빠와 재혼해서 제 새엄마가 되어주신다면...저도 언
니와 그렇게 살고 싶어요. 아버지 연세가 지금 쉰 다섯이니니 앞으로 한 20-30
년 정도 더 사실수 있다고 치고...그땐 저나 언니의 나이도 한 40이나 50이 넘은
그 정도의 나이가 되겠죠. 그러니 그때가서도... ”
“ ...... ”
“ 그렇게 같이 늙어가면서 의지해가며 인생의 말년을 보내는...그런 새엄마와 딸
그런 사이로 언니와 함께 이 다음에 노후를 보내보고 싶어요. ”
민경이 해리한테 한 제안이 쉽게 결정할수 있는 문제가 아닌 너무나 놀라운 일이라 이후 해리는 많은 고민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민경은 해리를 직접 찾아와 몇 번이고 간곡하게 그녀를 설득했고 그러는 과정을 통해 해리의 마음도 조금씩 변해갔다. 원래 가정사로 인한 상처 때문에 남자에 대한 불신이 많은 해리이기도 하지만, 또 오히려 그로인한 반작용으로 아버지나 오빠처럼 자신이 의지할수 있는 그런 남자를 바라는 심리도 한켠으로 있는 해리. 그런것을 생각해보면 해리의 성격도 의외로 나약한 면이 있는것 같다. 하긴 해리와 민경의 친분도 다섯 살 많은 언니인 해리가 인터넷 동아리 게시판과 채팅실에서 종종 이런저런 고민을 토로하고 하던것을 민경이 들어주면서 시작한 것이니까. 그리고 실리적으로 생각해보아도 민경의 아버지 정도 되는 그만한 사회적 지위와 재력을 갖춘 남자의 후처가 되고 게다가 민경같은 다 큰 딸도 공짜로 생기는 것이라면 그다지 손해볼일도 아니라는 판단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이것도 일종의 신데렐라형 신분상승으로 볼수 있는 일이 아닌가.
그렇게 해리의 마음이 조금씩 변해가고 있을 무렵 민경이 자신의 아버지 강철규와 해리의 만남자리를 주선했다. 그러니 이것도 일종의 맞선이나 소개팅 자리라고 할수도 있을것이다. 민경은 해리를 설득하고 있을 무렵 동시에 아버지인 민경에게도 재혼을 권유하며 좋은 사람이 있어 소개시켜 드리고 싶다는 말을 종종 입에 담았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이 5년전부터 언니,동생 하며 친하게 지내는 이해리란 사람이란 말까지. 철규야 여하튼 젊은시절 이혼하고 20년을 외롭고 쓸쓸하게 살아온 사람이고, 무엇보다 그동안 재혼을 망설였던것이 하나밖에 없는 딸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는데, 되려 그런 딸이 나서서 아버지의 재혼을 주선하려고까지 하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자연스레 두 사람의 만남 자리가 이루어진것이다.
그렇게 민경이 주선한 자리에 마주하게 된 철규와 해리. 일단 두 사람이 이렇게 마주한 자리가 첫 대면은 아니었다. 그동안 민경이 해리를 설득하면서 그녀의 집을 직접 찾아가기도 했고, 해리를 자신의 집으로 부른적도 있는데 그러다 퇴근을 한 철규와 해리가 맞닥뜨리게 된적도 한번 있었기 때문이다. 민경은 그때 해리를 ‘자신과 친하게 지내는 언니’라고 아버지에게 소개하긴 했지만 해리 입장에선 아무래도 어색한 자리가 될수밖에 없었다. 해리 입장에선 여하튼 한참 민경이 ‘자신의 새엄마가 되어달라’는 부탁을 할때이긴 했지만, 철규의 입장에선 딸이 아버지의 재혼을 권유하고 있는 상태이긴 했지만 그 상대로 점찍어둔 사람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까지는 말하지 않았을때다. 그런 상황에서 마주치게된 두 사람이니 철규 입장에서야 그냥 딸이 친하게 지내는 언니 그 정도로의 손님으로만 여길뿐이지만, 해리 입장에선 민경의 그와같은 이야기들을 염두에 둔채 철규를 마주하게 되니 그의 앞에서 어찌 처신을 해야할지 긴장이 되어 가슴이 두근두근 떨리기까지 했었다.
다만 그때 처음 마주한 철규의 외모는 해리에게 그런대로 호감이 가는 느낌이었다. 어느덧 50대 중반인 강철규이긴 하지만 그런대로 중후한 멋이 풍기는 중년의 신사 느낌이라고나 할까. 적어도 해리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어린시절 기억하는 술주정뱅이 아버지 그런 남자의 느낌과는 완전히 딴판인 그런 남자였다. 내심 되려 아버지나 오빠같은 의지하고픈 남자를 바라기도 하던 해리였는데, 어쪔 자신이 그렇게 꿈에 그리던 이상형의 남자가 그렇게 눈앞에 와 있는듯한 그런 느낌마저 받았다. 그야말로 해리 입장에선 제대로 철규란 남자에게 필이 꽂힌것이다.
그리고 고민의 시간을 더 하던 해리가 마침내 결단을 내리고, 그렇게해서 마주하게 된 두 사람의 자리. 철규는 지난번 집에서 마주했을때의 해리를 기억에서 떠올리며 말을 건넨다.
“ 이름이 이해리씨라고 했던가요 ? 그땐 그쪽이 우리 민경이가 새엄마감으로 점
찍고 있는 그런 사람인줄 모르고 마주했던건데...지금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니
감회가 새롭네요. ”
그런 철규 앞에서 해리는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그녀 답지않은 수줍음이었다. 일전에 민경의 집을 찾아갔을때야 그저 친한 동생집 찾아가는 그런 느낌으로 부담없는 캐쥬얼 복장이어서 수수한 분위기였는데, 지금은 제법 신경을 쓰고 나온 옷차림새라 키도 제법 크고 늘씬한 조숙한 미녀가 한 사람 자신의 눈앞에 앉아있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한번 궁금한걸 여쭈어보아도 될까요 ? ”
“ 뭐...뭐든지 물어보세요. 기왕 이렇게 마주한 자리니 피차 솔직하게 대화 나누는
게 좋을것 같네요. 뭐가 궁금한지 어디 해리씨가 궁금한걸 물어보세요. ”
“ 이혼은 어떻게 하시게 된거에요 ? ”
아무래도 자신도 어린시절 그런 부모를 두었던 상처가 있는 해리라서인지 그에 대한 궁금함이 앞서지 않을수 없었을것이다. 철규는 나름 회한에 잠기는듯한 표정을 하더니 ‘성격차이’였노라고만 짤막하게 대답한다. 해리는 슬몃 좀 납득이 안 가는 표정을 짓고, 그런 해리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간다.
“ 뭐 나도 문제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을테니...이제와서 20년전 일에 대한 구차
한 변명은 하지 않겠지만...여하튼 그동안은 민경이 하나만을 보고 살아와서 그런
지 재혼이라던가 그런건 진지하게 생각해보지는 않았어요. 다만... ”
“ ...... ”
“ 내가 하는일이 그래서인지 종종 집으로 손님초대를 하거나 접대를 할 일도 많
고 대외적으로도 날 좀 도와줘야 하는 사람이 절실할때가 많았어요. 그럴때...나
도 차라리 내조를 할만한 새로운 사람이 곁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
각 안 해본것이 아니에요. ”
해리는 철규의 직업을 민경이 ‘출판사 사장’이라고만 말했기에 그렇게만 알고 있지만 실은 진보진영에서는 꽤나 알려진 그런 유명한 출판사다. 처음 철규는 주로 사회과학이나 이념에 관한 책을 주로 출판하는 그런 출판사로 일을 시작했고, 이후 국회의원등 정치권 인사들이나 사회 저명인사들의 회고록 같은것을 출간하기도 하며 차츰 그렇게 사업의 영역을 넓혀갖고 나중엔 소설이나 시집같은 문학작품도 출판하는 꽤나 다양한 방면의 책을 출간하는 그런 출판사로 사업을 확장해 여기에까지 이른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출판사 산하에 역시 진보성향의 인터넷 웹진을 운영하기도 하고 가끔 기고활동도 하는 일종의 정치권 ‘아웃사이더’ 같은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한 사람이다. 따라서 아무래도 그런일을 하다보니 대외적으로 그런 방면의 사람들을 만나거나 교류할일이 많았나보다. 그래서 가령 집으로 손님을 초대한다던가 대외 행사 같은데 참석할 때 옆에서 자신을 도와줄 내조자가 한사람쯤 필요하다. 그걸 절실하게 느껴왔던것이다. 집에서 손님접대 하는것이야 가정부를 두어 할수도 있는 일이지만 부부동반으로 대외행사 같은데 참석해야 하는 일에 가정부와 그런자리까지 나갈수는 없는 일 아닌가. 다만 여하튼 하나밖에 없는 딸에 대한 걱정 때문에 재혼은 생각하지 않았다는 철규. 따라서 재혼 그 자체에 대한 필요성과 딸로 인한 걱정. 그 두가지 딜레마가 나름 철규에게도 그간의 고민이었던 셈이다. 그 시간들을 회상하니 회한에 잠기기도 하는 철규. 해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을 이어간다.
“ 헌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그 민경이가 앞서 내 재혼을 권하니 그 마음씀
이 고맙기도 하고 참...뭐라 말하기가 쉽지 않더군요. 게다가 내 재혼상대로 점
찍어 놓았다는 사람이 민경이와 지금껏 언니,동생 하며 교류해온 사람이라니...
다른건 몰라도 새엄마 문제로 딸아이가 갈등을 겪거나 하는일은 별로 없겠구나
그런 안도감도 들었고요. ”
“ 저도 생각해보니...민경이같은 믿음직하고 착한딸이 공짜로 생기는것...그러고
보니 괜찮을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민경이의 제안을 긍정적
으로 받아들인거구요. ”
피차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런대로 마음이 맞는것도 같았고 상대에 대한 호감도 어느정도 느껴지는것 같았다. 그래서 철규와 해리는 그런식으로 교제가 시작되어 몇 달정도후에 정식으로 결혼식까지 올리게 되었다. 민경이 처음 해리에게 그와같은 제안을 하고 이후 설득의 시간 그리고 두 사람이 정식으로 맞선 비슷한 자리를 갖게되고 두 사람의 교제가 시작되어 결혼에 이르기까지 대략 1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결혼하게 된 두 사람. 신혼여행지에서 해리는 감회에 젖어 철규를 바라보며 말했다.
“ 선생님... ”
철규를 ‘선생님’이라 부르는 해리. 철규와 해리의 나이차이가 25살이나 나고 무엇보다 철규의 그만한 사회적 위치도 있다보니 해리의 입장에선 그와같은 표현이 편했다. 어쨌든 이제 부부이니 만큼 ‘여보’나 ‘당신’ 같은 호칭으로 불러야 할 터인데, 일단 해리에게 그러한 말이 입에 붙으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듯 했다.
“ 사실 전 진짜...결혼같은것은 안 하고 혼자 살 생각도 많이 해봤었어요. ”
“ 그래 ? ”
가정사로 인한 상처 때문에 남자에 대한 불신이 많다고 민경에게 이미 여러차례 고백한바 있는 해리. 하지만 그런 이야긴 철규에게 굳이 하진 않았다. 어찌보면 자신의 별로 유쾌하지 않은 과거를 그에게까지 하고는 싶지 않았던듯 하다. 다만 약간 다른 관점에서 지금 자신의 생각과 속내를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 근데 저도 나이가 어느덧 서른 정도 되고 보니까...글쎄요...뭐랄까...알게 모르
게 지쳐가더라구요. ”
지쳐간다는 말이 아직 젊은 해리가 과연 스물다섯살이나 많은 신랑 철규에게 하기에 적절한 표현일까. 그러한 판단까진 못한것인지. 여하튼 의아하면서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철규 앞에서 해리의 말은 이어지고 있다.
“ 그냥 여러 가지로...저도 뭐 학교 졸업하고 지금까지 한 10년 가까이는 직장생
활을 쭉 해온 사람이지만... ”
“ ...... ”
“ 그냥 여러 가지로 많이 힘들었어요. 사회생활도 그렇고 뭐랄까...이 험난한 세상
을 혼자 헤쳐간다는게...점점 자신이 없어지더라구요. ”
“ 그랬...었나 ? ”
아버지나 오빠처럼 의지하고 싶은 그런 남자를 만나고 싶다는 바램을 말한적도 있는 해리. 그런 이야기는 철규에게도 이미 한적이 있다. 무엇보다 스물다섯살이나 많은 남자에게 자연스럽게 끌리는 자신을 보면서 그러한 고백은 대체로 솔직하게 나왔던듯 하다. 그런 해리의 말이 다시금 이어진다.
“ 대체로...저 자신이 그렇게 강한 여자는 아니라는것을 많이 느꼈어요. 아니, 강하
긴 커녕 오히려 많이 여리고 약한 그런 사람이거든요 전... ”
어릴때부터 엄마와 단둘이 비교적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온 해리이기도 하지만 반면 강인하거나 억척스러운 면과는 좀 거리가 있는 여성인게 해리의 실체인듯 하다. 여하튼 직장생활을 한 10년 하면서 돈은 그런대로 벌어 모으긴 했지만, 혼자서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것. 그 자체만은 자신이 없었다는게 해리의 솔직한 고백인 셈이다.
“ 그런면에서...제가 민경이한테 고마운점이 많아요. ”
“ 민경이한테 ? ”
“ 네, 선생님. ”
바로 철규의 딸 민경의 주선으로 결혼에 이르게 된 두 사람. 그런걸 생각해본다면 해리가 민경에게 고마워 하는것이야 당연한 일이겠지만, 또 마저 다 고백하지 못한 속내가 남아있음인지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도 이어가고 있다.
“ 저 자신이 누구한테 의지하고 싶거나 한다고...그게 제 바램대로 바로 이루어지
거나 하는것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
“ ...... ”
“ 제 심신이 알게 모르게 그렇게 지쳐가고 있을때...그때 민경이가 그런 제안을 해
온거에요. 혹시 아빠를...즉 선생님을...만나볼 생각이 없느냐구요. ”
“ 그랬었구먼... ”
고개를 끄덕이는 철규. 해리의 말이 이어진다.
“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있어요. 그래서...제게 이제 이만큼 저의 지친 심신을 기댈
수 있는 그런 남자를 만나게 해준...그런 민경이에게도...그리고 지금 제 곁에 계
신 선생님께도요. ”
철규는 말없이 해리를 안아본다. 사실 고마운 마음이라면야 젊은시절 이혼한 상처가 있는 자신에게 20년이나 지난 지금와서 새로운 인연이 되어준 젊은 해리에게 더 많이 있을것이다. 철규에게 안긴 해리가 그윽한 목소리로 말한다.
“ 선생님...저 진심으로... ”
“ ...... ”
“ 제가 비록...부족한게 많은 여자이긴 하지만...그래도 제 성심을 다해 제가 선생
님 곁을 지켜드릴께요. 정말 이 세상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도. ”
괜히 긴장이 된 것일까. 침을 한번 꿀꺽 삼키는 해리. 나름대로의 감상에 젖은 탓인지 살짝 목이 메이기도 한다. 그녀의 말이 다시금 이어진다.
“ 제가...선생님 곁에서 정말 좋은 내조자가 되어 드릴께요. ”
“ 그래...고마와 해리. ”
해리의 그런 말이 되려 철규의 마음을 짠하게 울린다. 철규가 해리를 꼭 품에 안아보고 지그시 눈을 감은 해리는 철규의 품안에서 그렇게 한 마리 지친 작은새처럼 쉬고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두 사람의 결혼생활이 시작되었다. 이제 민경의 집이면서 철규의 집에 그 두 사람과 함께 살게된 해리. 무엇보다 지금까진 엄마와 함께 비교적 열악한 집에서 30년을 살아온 해리인지라 이렇게 넓고 근사한 집에서 자신이 살게 되었다는 점이 꿈만 같아진다. 1층 거실 한복판에서 주위를 한번 두리번거리며 감회에 사로잡히는 해리. 민경이 그때 해리에게 다가온다.
“ 엄마... ”
민경이 해리를 ‘엄마’라고 부른다. 원래 언니,동생 하던 사이였던 두 사람. 게다가 나이차이도 다섯 살밖에 나지 않는 두 사람이건만 ‘새엄마’도 아니고 바로 그냥 ‘엄마’라고 부르니 되려 해리가 당혹스러워질 지경이다. 해리를 엄마라 부르며 그녀에게 안겨보는 민경. 순간 해리의 가슴이 두근거릴 지경이다.
“ 민경아... ”
“ 우웅...엄마... ”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해리에게 거듭 안기며 얼굴을 부벼보기까지 하는 민경. 이 순간이 마냥 좋고 행복한 그런 한 20대 중반의 젊은 여성의 천진난만한 얼굴이다. 해리가 그런 민경을 바라보며 말한다.
“ 그렇게...좋으니 ? ”
자신을 아무런 망설임이나 거리낌도 없이 바로 ‘엄마’라고 부른 민경의 표정에 나타나고 있는것은 한없는 행복한 표정 그 자체였다. 어릴때 부모 이혼으로 엄마없이 20년을 살아온 민경. 그 20년동안 ‘엄마’라는 존재에 대한 굶주림과 갈망이 워낙 컸던 탓일까. 아니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와 언니,동생 하며 지내온 해리언니가 새엄마가 된 현실인지라 그 자체가 마냥 좋은것일까. 아니면 두가지 감정이 모두 복합되어 나오는 모습인걸까. 여하튼 민경의 지금 이 순간 표정은 그야말로 이 세상 모든 걱정근심이 다 사라져 버린듯한 마냥 행복하고 좋기만 한 한 여자의 표정이다. 그런 민경을 보니 해리가 괜시리 짠해져 사뭇 애틋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한다.
“ 그렇게...불러보고 싶었던거야 ? 엄마란 말을 ? ”
“ 네. ”
해리의 물음에 망설일것도 없다는듯 바로 또렷한 목소리로 말하는 민경. 이런 딸이 배도 안 아파보고 공짜로 생겼다는것도 해리에겐 그런대로 행운이라면 행운일것이다. 혹여 나이차이가 얼마나지 않는 의붓딸과 갈등이 심하다면 문제일테지만 이렇게 자신을 마냥 좋아만 하는 믿음직한 딸이라면 무슨 문제될일이 더 있으랴. 해리도 새삼 감격하여 민경의 볼을 살짝 어루만져본다.
“ 그래 어쨌든...니 말마따나... ”
어느 휴먼다큐에 나온 내용이라던가. 나이 70이 넘어 80이 다 되어가도록 오순도순 한 집에서 정겹게 잘 살고 있는 나이많은 그리고 나이차이가 다섯 살 정도밖에 안 난다는 의붓딸과 새엄마 사이라는 노년의 두 여성의 모습. 바로 그렇게 자신도 해리와 나이들어 이 세상을 떠날때까지 살아보고 싶다는 말을 하기도 했던 민경. 그 말을 상기해보며 해리가 말한다.
“ 우리 진짜 나중에 늙어 죽을때까지 오순도순 잘 살아보도록 하자. 알겠지 ? 우
리딸 강민경. ”
민경을 ‘우리딸’이라 부르는데 순간 해리의 감정도 두근거려온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고백하는 순간의 두근거림과도 거의 비슷한 성격의 것이라고나 할까. 해리를 바라보며 민경도 환한 목소리로 답한다.
“ 응, 엄마. ”
민경은 다시금 해리의 품에 안기고 해리가 그런 민경을 안아본다.
- 3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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