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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대 걸그룹 팬픽 - 전혜빈 (7) 1세대 걸그룹 팬픽




                                    교육원에서 생긴일 - 3. 오월의 신부



 저녁시간은 좀 지나 날이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는 무렵, 혜빈은 상기의 집 앞에 와 있다. 식구들과는 따로 떨어져 나와서 서민형의 조촐한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는 상기. 일전에 그가 손수 혜빈을 자신의 집에 데려온적이 있어 당연히 그의 집 위치는 알고있고, 다만 여기까지 와서 바로 그의 집으로 들어가거나 하진 못하고 근처 놀이터 벤치에서 공연히 주춤거리고 있다. 막상 이렇게 혼자 상기의 집으로 직접 찾아오고나니 괜한 후회나 갈등같은것이라도 생기는것인지.

 “ 누난 제가 봤을때 필력은 갖추었지만 상상력이 없는것 같아요. 누나 작품이 제

  3자 입장에서 읽어봤을때 통 이해가 안 가는게 바로 그때문이에요. ”

 아까 합평회가 그렇게 파장으로 끝나고, 참석자들한테 혹평을 받은것이 너무 자존심이 상해 울며불며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던 혜빈. 그런 혜빈을 겨우달래 이 합평회의 처음 제안자였던 준식이 그녀에게 나름 조언을 해준다면서 했던 말이다. 혜빈으로선 어쨌든 어릴때 외갓집에서 외할아버지로부터 들은 그 동네 외할아버지와 젊은시절 친분이 있었다는 어느 집안에서 실제 있었다는 이야기. 혜빈 딴에는 인상에 많이 남아 그것을 바탕으로 드라마 대본을 써서 다른 수강생들한테 보여준셈인데, 그것이 혹평만 받고 만 자리. 준식은 물론 승우라던가 다른 참석자들도 여하튼 혜빈의 작품이 기승전결 짜임새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고 결말도 이해가가지 않는다는 식으로 평가를 했지만 혜빈은 그래서 더더욱 자존심이 상한것이다. 준식은 딴에는 그래도 혜빈에게 도움이 될만한 충고를 해주고파서 그녀에게 손수 햄버거까지 사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좀 나누긴 했지만, 준식의 말조차도 오히려 혜빈의 자존심만 더 구기는 일이 되고말았다. ‘필력은 갖추었으나 상상력은 갖추지 못한것같다.’ 그것이 혜빈의 작품을 본 준식의 총평일진대 어쨌든 혜빈으로선 자신이 고생고생해서 만든 작품이 겨우 그 정도 평가밖에 받지 못한다는 점에 무척이나 속이 상하고 상처를 깊이 입은 상태. 그래서 누구한테라도 위로받고 싶은 심정이 되어서였을까. 자신도 모르게 상기네 집 앞까지 와 있었던것이다. 생각해보면 그녀가 상기의 제법 정중하고 진지한 프로포즈를 거절했던것이 벌써 한 열달전인 지난 여름의 일인데, 그런일이 있고서 지금까지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그저 단순히 아는 오빠동생 사이도 아닌 여전히 어정쩡한 사이가 계속 이어져왔던 셈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언제부터인가 혜빈은 그렇게 누군가 의지하고픈 대상이 있으면 상기를 찾기 시작한것이다. 그것도 교육원에서 연거푸 수모를 당한 이후로는. 한번은 김수현 작가에 의해 대놓고 자기 대본이 찢겨지는 수모를 당했을때, 그리고 오늘은 다른 수강생들이 손수 마련해준 합평회에서 작품 혹평을 듣고나서. 그리고 의지할곳이 없어 정처없이 헤매다 당도한곳이 상기의 집 앞인 것이다. 이쯤되면 혜빈의 태도도 참 이해하기 어렵다고 할만하다. 여하튼 작년 여름경까지만 해도 결혼이나 이런 문제는 생각이 없고 상기라는 남자도 전혀 내키지 않아 쓸데없는 일 그만 벌이고 시집이나 가라는 아버지의 충고도 귀담아듣지 않았고, 상기의 프로포즈까지 정중히 거절했던 그런 혜빈이 아닌가. 헌데 그런 혜빈이 지금은 아예 자신이 직접 상기의 집까지 찾아오면 대체 뭘 어쩌자는 것인가. 어찌보면 여자로서 본능적으로 가질만한 수치심이나 자존심 같은것도 있을법한데 하지만 지금은 너무 속상하고 심란한 상태라 그런 생각조차 들지가 않는것인지 휴대폰을 꺼내든 혜빈은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있다. 다름아닌 바로 상기한테 하는 전화다.

 “ 여보세요. ”

 프리랜서인 상기는 아마 오늘은 일이 없는 날인지 이 시간에 집에 있었다. 물론 토요일이니 일반 직장인들도 일찍 퇴근을 하는 날이고 더욱이 지금은 저녁도 다 지난 밤시간이긴 하지만, 여하튼 프리랜서인 그의 직업을 감안하면 그가 집에 있을지 없을지는 평일이건 토요일이건 휴일이건 늘 유동적인 상태다. 따라서 집에서 전화를 상기가 받을수 있었다는것은 그런대로 혜빈에겐 행운인 셈이다.

 “ 오빠...저에요 혜빈이... ”

 “ 어, 혜빈아. 그래 어쩐일이니 ? ”

 상기는 혜빈이 먼저 자신에게 전화를 해 준것만으로도 너무 놀랍고 반가와 반색이 되어있고 집안에서 이미 전화기를 든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치 혜빈이 벌써 자기집 문앞에 당도해있기라도 한것처럼 그녀를 맞이하러 나갈것만 같은 기세다. 하지만 지금 혜빈이 바로 상기가 사는 집 문앞까지 와있는것은 아니고 아직 아파트 인근 놀이터. 하지만 이내 곧 혜빈이 바로 애원하듯 상기에게 말을 건넨다.

 “ 오빠...미안해요. 저 그리고...실은 오빠 집앞에 와있어요. ”

 “ 뭐...뭐라고 ??? 지금 어딜 와 있다고 ? ”

 혜빈이 자기집 앞에 와 있다는 사실보다는 무슨일이 또 있는것인지 어느새 울먹이는 목소리가 되어있는 혜빈의 말소리에 상기는 더더욱 놀랐다. 그러고보면 이런모습 얼마전 바로 김수현이란 작가한테서 모욕을 당했을때도 겪었던 일이 아닌가. 아직 일을 다 마치지 않았던 상기에게 무작정 전화를 걸어 지금 좀 와달라고 했던 그녀. 지금 상황도 그때와 별반 다를것이 없다.

 “ 오빠 미안해요...저 지금 누구라도 곁에 있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것 같아요. 그러

  니 제발 좀 나와줘요. 저 지금 오빠 사는 집 앞까지 와있어요. OOO동 앞에 있는

  놀이터에요. 그러니 오빠... ”

 “ 응, 아...알았어. 거기서 조금만 기다려. 꼼짝도 하지 말고. 오빠가 바로 나갈게

  !!! ”

 혜빈의 그와같은 말에 더 망설이고 할것도 없다는듯 바로 전화기를 내려놓고는 단숨에 밖으로 달려가는 상기. 바로 아파트를 다 내려와서는 혜빈이 말한 그 놀이터까지 당도해버렸다. 그리고 바로 혜빈을 알아보고는 달려오며 말을 건네는 상기.

 “ 혜빈아... ”

 “ 오빠... ”

 상기를 보자마자 마치 어둠속에서 어떤 빛이라도 본양 무슨 구세주라도 만난 인생의 낙오자마냥 바로 반색이 되어 상기에게 달려가는 혜빈.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바로 그에게 안긴다. 그리고 한참을 서럽게 흐느끼는 그녀. 혜빈의 그런 모습에 적잖이 놀라는 상기. 혜빈에게 말을 건넨다.

 “ 왜 그래 혜빈아 ? 무슨일이라도 있어 ? ”

 “ 오빠 그냥...저 아무것도 묻지말고...그냥 제 옆에 있어주시기만 하세요. 정말 오

  빠라도 제 곁에 있어주시지 않으면...저 더 견디기 힘들것 같아요. ”

 “ 혜빈아... ”

 상기는 혜빈의 그와같은 모습에 그녀가 정말 무슨 큰 문제라도 생긴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잔뜩이나 불안과 걱정이 들고, 일단 그런 혜빈을 달래며 그녀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간다. 혜빈을 집 거실 한쪽에 대충 앉게해서 쉬게하는 상기. 그러면서 말을 건넨다.

 “ 일단 물이라도 마셔봐. 덥지 혜빈아 ? 아, 참 그리고 저녁은 먹었니 ? 배고프겠

  구나. ”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그것부터 물으며 정말 걱정이 되는듯 말하는 상기. 정말 자상하고 배려심 깊은 따스한 마음을 가진 남자 그 자체의 모습이다. 사실 혜빈은 아까 저녁때는 되기 조금전인 어정쩡한 시간대에 준식과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 세트를 하나 먹어치운 뒤라 지금 그리 배가 출출하거나 하지는 않다. 하지만 지금 혜빈이 그렇게 말한다고 상기가 곧이 믿을것 같지는 않고, 상기는 혜빈보고 조금만 기다리라고는 하고는 자신이 손수 부엌에서 분주히 움직여 저녁상을 차려준다.
상기가 식구들과 떨어져 독립해 나와산지는 몇 년 되긴 했지만, 상기가 직접 음식을 해먹거나 하는 경우는 얼마되지 않았고 보통의 경우엔 상기 어머니가 밑반찬 거리 따위를 챙겨다 주시곤 한다. 상기 어머니 사정의 여의치 않을시엔 상기 부모님댁 파출부 아주머니가 대신 그 일을 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그 외에는 평상시 상기가 라면이라던가 기타 이런저런 인스턴트 식품따위를 사서 쌓아놓아 그런것들로 밥때를 해결하거나 밖에서 사먹는 경우도 많다. 그런 상기긴 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혜빈을 위해 집에 남아있는 인스턴트 식품이나 기타 찬거리로 조촐하게나마 저녁상을 차려준 것이다. 상기는 어차피 자신이 직접 지은 밥이나 반찬도 아닌데, 마치 자신이 직접 해준 요리라도 되는양 사뭇 걱정스럽게 저녁을 먹고있는 혜빈을 바라보며 묻는다.

 “ 어떠니 혜빈아 ? 입에 맞을련지 모르겠다. ”

 사실 아까 준식과 이야기를 나눌때 햄버거 세트 하나를 다 비웠는지라 어차피 그리 배가 고픈편은 아니었다. 허나 이런 상황에서 그렇게 사양을 한다손 치더라도 상기가 그냥 지나칠 사람은 아니니 여하튼 그의 성의를 봐서 먹고있는 중인것이다. 일단 상기의 마음씀에 대한 고마움에 화답은 해준다.

 “ 좋아요. 그런대로 먹을만해요 오빠. ”

 “ 그래, 다행이구나. ”

 자신이 차려준 저녁을 혜빈이 그런대로 잘 먹어주는것 같으니 상기는 그런대로 안도가 되고, 한편 그러는 가운데에서도 상기는 혜빈이 이 저녁에 갑자기 자신을 찾아와 오빠라도 곁에 있어달라고 한 이유가 무엇인지 그 연유가 궁금하고 무엇보다 그녀가 걱정되지 않을수 없다. 따라서 다시 자연스레 그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상기. 두 사람이 식탁에 마주 앉은채 대화가 그렇게 진행되어간다.

 “ 실은요 오빠... ”

 약간 망설이는듯 하다가 혜빈이 조심스레 운을 띄웠다. 그리고 오늘 있었던일을 대충 상기에게 들려주었다. 무엇보다 기껏 그렇게 마련된 합평회건만 자신의 작품이 다른 수강생들에게조차 그런 혹평을 받은것에 엄청나게 상한 자존심, 속상함. 그리고 혜빈 딴에는 정말 어린시절 외할아버지로부터 들어 그토록 오랜시간 마음속에 소중하게 담아두고 있었던 그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들어본것인데 그런식으로 다른 수강생들에게조차 무시를 당한것에 대한 속상함과 억울함을 있는 그대로 상기에게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다 듣고나니 어쨌든 혜빈이 많이 상처받았겠구나 하는 것에 어느정도 공감이 가는지 상기는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상기라고 해서 그런 작품에 대해 뭐라고 평을 하거나 할수있는 입장도 아니고 - 게다가 일전에 혜빈에게 말한것처럼 드라마나 소설 같은데 평상시 관심도 없던 상기다. 심지어 김수현도 모르는 그가 아닌가 - 따라서 어떤식으로 그녀를 위로해줘야할지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 그도 다소 고민스러워진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그렇게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듯 하다 상기가 다시 조심스레 입을 연다.

 “ 기운내렴 혜빈아... ”

 하지만 지극히 상투적이고 흔해빠진 이런식의 말이 지금 혜빈에게 무슨 위로가 될 수 있을까. 혜빈도 순간 약간 어이없는듯 실소를 터트릴 지경이다. 고작 이런 이야기나 듣고싶어 여기까지 찾아온것은 아닌데. 자신에게 어쨌든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닌 상기의 마음씀만은 분명 고맙긴 하지만, 상기도 결국 자신에게 진정한 위로가 되어주진 못하는구나 하는 점에서 어떤 한계를 느끼는 혜빈이다. 일단 식사는 마무리를 해야겠기에 남은 밥이나 어서 먹기 시작한다. 어차피 배 자체가 많이 고픈편이 아니었기에 상기를 생각해서 의무감으로 밥 한그릇을 다소 억지스럽게 비워주고 있는 셈이다. 여하튼 그렇게 밥 한그릇이 거의 다 비워져갈때쯤 상기가 다시 혜빈을 바라보며 말을 건넨다.

 “ 혜빈아 그런데말야... ”

 그런 상기를 말없이 바라보는 혜빈. 이 사람이 대체 무슨 말을 또 하고싶어 이러는걸까. 생각해보면 지난번엔 자신을 위로해준답시고 자신(혜빈)의 대본을 그렇게 무식하게 찢어버린 그런 김수현 작가는 그것도 3류 저질 막장 쓰레기작가라는 말까지 입에 담아가며 혜빈같은 소중하고 고귀한 존재에 비교조차 안 되는 천하의 하잘것없는 벌레,쓰레기 같은 존재라고 말했던 그런 상기가 아니던가. 그렇게 혜빈은 높이 치켜주며 그녀의 작품을 찢은 김수현이란 작가를 무참하게 폄하하는 말을 입에 담았던 상기. 그날 어쨌든 그런 상기의 말이 위로가 되었다. 그런 상기가 오늘은 또 혜빈에게 과연 무슨말을 해주려는것일까.

 “ 너 근데 그...방송작가 교육원이란데 앞으로도 계속 다닐 생각이니 ? ”

 어떤 위로의 말이 나오리라 막연히 기대했는데 상기에게서 나온 질문은 다소 뜻밖이었다. 그나마 평상시 드라마에 별 관심이 없는 상기가 혜빈이 몇 번 입에 담은 탓인지 ‘방송작가 교육원’이란 시설명은 정확히 기억하고 입에 담고 있는것이 사뭇 신기해보일 지경이다. 혜빈이 다니는 곳이고 그녀가 몇 번 입에 담았던 이야기이기에 기억하고 있는것인지, 혜빈은 일단 그의 물음에 제대로 답을 해주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 가운데 상기가 그런 혜빈을 바라보며 사뭇 긴장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간다.

 “ 내 생각엔 오빠...정 혜빈이가 그렇게 힘들고 상처도 많이 받았으면... ”

 “ ...... ”

 “ 그러지말고...그냥 혜빈이가 오빠 인생의 작가가 되어주는것은 어떨까 ? ”

 “ 예 ? ”

 어디서 갑자기 이런식의 표현이 나온것인지 모르겠다. 만약 즉흥적으로 생각해낸 말이라면 상기야말로 프로포즈용 표현방법의 천재라고 칭송해야할 판이다. 열달전에 혜빈에게 거절당한 프로포즈를 이제와서 다시 하고있는 셈인 상기. 혜빈은 아직 상기의 말이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아 다소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가운데 상기가 혜빈을 바라보며 사뭇 힘있는 어조로 말을 이어간다. 혜빈을 향한 절박한 심정이 한데 담겨진 그런 말투다.

 “ 혜빈이 니가 내 인생을 설계하는 작가가 되어줘. 그럼 오빠는 흔쾌히 네 드라

  마의 주인공이 되어줄게. 그럼 되는거잖아. ”

 “ 오...오빠... ”

 글쎄, 지금 이 말이 과연 혜빈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련지는 잘 모르겠다. 비록 늦었을지언정 애써 쓴 단막극 대본을 담임선생인 김수현한테 바로 그 자리에서 찢기는 모욕을 당했던 혜빈. 뒤이어 수강생들에 의해 마련된 합평회자리에서 조차 작품이 도무지 이해도 안가고 이야기 앞뒤도 안맞고 결말도 납득 안간다며 온갖 면박을 당했던 그런 혜빈. 게다가 준식은 거기에 한술더떠 ‘혜빈 누나는 필력은 갖춘것 같은데 (드라마 작가나 소설가로서 필요한) 상상력이 부족한것 같다’는 말까지 들은 혜빈. 헌데 그런 혜빈에게 상기가 말하고 있는것이다. 자신의 인생의 작가가 되어달라고. 그리고 자신은 혜빈의 드라마의 주인공이 흔쾌히 되어주겠다고.

 “ 다른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하자 혜빈아. 김수현인가 뭔가하는 작가가

  뭐라고 했든...다른 수강생들이 널보고 뭐라고 했든...그런거 마음쓰지마...그리고

  다만... ”

 불과 열달전엔 상기의 사뭇 진지했던 그리고 무척이나 신경써서 마련한 프로포즈 자리에서 정중히 그것을 거절했던 혜빈이다. 그리고  그 뒤 열달 가까이 이어져온 두 사람의 어색한 관계. 헌데 지난번에 실패했던 프로포즈와 달리 이번엔 혜빈도 그녀의 처지가 처지라서인지 생각이 조금 달라져 있는것일까. 방송작가 교육원에서의 연거푸 된 좌절. 헌데 그런 혜빈에게 상기가 말하고 있는것이다. 그녀가 자기 인생의 드라마 작가가 되어달라고. 그럼 자신은 그녀가 쓰는 드라마의 주인공이 흔쾌히 되어주겠노라고. 이 말이 지금 혜빈의 가슴을 묘하게 울리고 있다. 손발이 파르르 떨리게 만든다. 상기는 어느새 혜빈 앞으로 다가와있다.

 “ 혜빈이 네가 내 인생의 드라마를 쓰는 작가가 되어준다면 난 얼마든지 네 드라

  마의 주인공이 되어줄 자신이 있어. 네 인생의 드라마의 진정한 주인공이 되어

  줄 용의가 있어. 그러니 혜빈아... ”

 “ ...... ”

 “ 그러니 혜빈아 우리 우리 인생을 스스로 쓰는 그런 드라마 작가가 되기로 하

  자. 우리 인생을 스스로 써나가는 그런 드라마 주인공이 되기로 하자. 어떠니

  혜빈아 ? ”

 “ 오...오빠... ”

 “ 다른건 아무것도 생각하지마. 그리고 혜빈아. 나만 바라봐줘. 그리고 오직 나

  만을 위한 드라마를 만들어줘. 내가 네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줄게. 그러니 혜

  빈아 이제 우리 인생이 끝나는 그날까지...아니 내 인생이 끝나는 그날까지... ”

 “ ...... ”

 “ 넌 내 인생의 설계자 난 네가 쓰는 인생의 드라마 주인공이 되어주는거야. 그

  렇게 우리 한번 근사한 우리만의 인생의 드라마를 엮어가지 않으련 ? 그거 어

  때 혜빈아 ? ”

 “ 오...오빠... ”

 혜빈은 떨고 있었다. 무엇보다 지금 혜빈의 자세는 교육원 강의 들으러 가야하는데 상기의 느닷없는 프로포즈 때문에 강의에 늦어 잔뜩 화와 짜증만 났던 그 열달전과는 확연히 다른 태도다. 무엇보다 지금 상기의 이와같은 고백의 말이 혜빈을 잔뜩이나 떨리게 만들고 있는것이다. 심장끝까지 그 떨림이 이어져올 지경이다. 팔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며 왈칵 감격의 눈물이라도 한바탕 쏟아질것만 같은 그런 감정이다. 자신이 혜빈의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줄테니 자기 인생의 작가가 되어달라는 말, 설계자가 되어달라는 말. 그러고보니 정말 기가막힌 말이다. 혜빈은 상기 인생의 드라마 작가, 설계자. 상기는 혜빈이 쓰는 드라마(인생)의 주인공. 그렇게 한쌍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상기의 고백. 혜빈은 자신도 모르게 그만 상기의 품에 안겨있었다. 사실 혜빈이 오늘 합평회에서 그런 면박을 당한뒤 교육원을 그만두고 싶다거나 그런 생각까지 했던것은 아니다. 다만 누구든 자신의 곁에 있어줘야 이 심란하고 상처받은 가슴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것만 같아 무작정 찾아온 상기의 집인데, 그 상기의 집에서 받게된 이 뜻하지 않은 고백. 자신보고 내(상기) 인생의 드라마 작가가 되어달라는 그(상기)의 고백. 혜빈은 상기 인생의 설계자고 자신은 그 인생의 주인공이 흔쾌히 되어주겠노라는 상기의 말. 혜빈은 이미 감격해서 어쩔줄을 모르고 있다. 이미 상기의 품에 안겨져있는 혜빈. 감격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다.





 4월이면 작년 11월부터 시작된 OO기 연수반 6개월 교육과정은 거의 다 마무리되어가는 단계다. 교육원에선 이미 다음달부터 새로 시작되는 신학기 및 신입생 등록,접수를 시작하고 있었고 수강생들중에서도 다음 상급학기로 진학 계속 강의를 듣기 희망하는 학생들은 등록을 서두르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혜빈은 이때쯤엔 사실상 교육원에는 강의를 들으러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김수현한테 그렇게 습작품이 눈앞에서 찢겨나가는 면박을 당하고, 합평회 자리 참석자들에게서조차도 자신의 작품 혹평을 들은 상태에서 더 이상 이런 강의를 듣는것이 의미가 없다는 판단을 한것일까. 하지만 그보다는 혜빈 자신의 신변에 더 중요한 변화가 생겼다. 바로 다름아닌 상기의 청혼을 받아들인것이다.

 불과 열달전 상기가 제법 신경써서 서울 인근의 작은 전시관 하나를 빌려 한 이벤트성 프로포즈는 혜빈이 덕분에 교육원 강의만 늦었다며 신경질까지 내며 사실상 거절을 해버렸는데 그로부터 열달이 지나선 어찌보면 다소 즉흥적이었다 할 수 있는 상기의 고백의 말이 혜빈을 더더욱 감동시켰던것일까. 네가 내 인생의 드라마를 쓰는 작가가 되어달라는 그리고 나는 네가 쓰는 드라마의 주인공이 흔쾌히 되어줄 용의가 되어있다는 그러니 이제 앞으로 우리 둘만의 인생의 드라마를 만들어가자는 그와같은 상기의 청혼의 말이 혜빈을 너무나 감동시킨 모양이다. 자신의 단막극 분량도 채 안 되는 A4 용지 20장 정도의 짧은 단막극 대본을 선생한테선 찢기는 수모를 당하고 수강생들로부터 혹평을 듣고 잔뜩이나 마음의 상처를 입고 찾아온 상기의 집에서 듣게된 그와같은 프로포즈. 그래서 제법 돈을 들이고 신경을 써서 준비했던 열달전의 프로포즈보다 더 확실하게 그토록 닫혀있던 혜빈의 마음을 열리게하는 효과를 보았던것 같다.

 막상 그렇게 두 사람이 결혼을 약속하자 준비는 대체로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다. 혜빈의 집안이나 상기의 집안이나 피차 두 사람을 짝지워주었으면 하는 마음속 바램이 있었던지라 기왕 그렇게 둘이 장래를 약속했다면 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약혼식같은 번거로운 과정은 생략하고 다음달인 5월에 바로 식을 올리기로 했다. IMF 이후 대체로 구조조정이나 근검절약의 정신이 강조되는 시절임을 생각한다면 전직 국회의원 출신인 혜빈 아버지나 역시 잘 나가는 중견 기업가인 상기 아버지는 그런대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정신이 어느정도는 자리잡혀있는 사람이라고나 할까. - 강남의 이름있는 예식장을 결혼식장으로 잡고 주위 웬만한 친지,지인들은 모두 불러 성대한 결혼식을 치르려고 하는것을 보면 딱히 그렇다고 볼수도 없지만.

 여하튼 그렇게 혜빈은 더 이상 교육원 강의는 나가지 않고, 아니 사실상 더 이상 공부를 하는것은 포기하고 결혼준비에만 열중해하고 있을무렵 집으로 걸려온 뜻밖의 전화 한통화가 있었다. 다름아닌 윤준식이었다. 같은 교육원 동기생이면서 바로 혜빈의 작품을 뒤늦게나마 다른 수강생들과 평을 해보는 ‘합평회’ 자리를 가져보겠다는 제안을 하고 바로 며칠뒤 그런 자리까지 마련했던. 교육원 수강생들끼리야 동기생 명부에 주소와 연락처가 다 적혀있으니 전화를 거는것은 그리 어렵지는 않은 일이다. 다만 혜빈으로선 전혀 생각지도 않은 그의 전화에 다소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 어...준식씨...어쩐일이세요 ? ”

 일전에 합평회가 끝나고 준식이 그녀에게 나름대로 조언을 해준답시고 마련한 자리에선 혜빈도 자신을 ‘누나’라 부르는 준식에게 일시적으로나마 친숙함을 느꼈던지 말을 놓기까지 했었는데, 그래도 두 사람은 그 정도의 친분까지 있다고 보기는 힘들고 어려워서일까. 준식을 대하는 혜빈의 말투는 다시 존대로 바뀌어져 있었다. 그러나 준식은 스스럼없이 여전히 혜빈을 누나라고 부르는 가운데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져나간다.

 “ 근데 누나는...신학기 등록 안 하세요 ? ”

 강의를 들으러 더 나오지도 않고, 지금 한참 신학기 등록이 진행중일때라 그에대한 궁금함까지 덧붙여 그와같이 물은것이다. 그리고 혜빈은 어차피 숨길일은 아닌지라 공부를 더 할 생각이 없음을 솔직하게 밝혔다. 그러자 준식은 약간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이며 말을 이어간다.

 “ 어...저 누나...누나한테 꼭 좀 보여드릴게 있는데. ”

 “ 보여드릴게 있다니요 ? 뭔데요 그게 ? ”

 “ 아...좀 중요한건데...그보단 좀 만나주시면 안돼요 ? 이렇게 전화로 하는것보단

  직접 만나서...보여드릴것도 전해드리고...어쨌든 좀 직접 만나뵈었으면 하는데...

 ”

 “ 하하 참...글쎄요 뭐...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건지...그리고 제가 요즘 바

  빠서요. 아니...대체 무슨 용건인데 그래요 ? 뭘 보여준다는건데요 ? ”

 상기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이고 이제 결혼식 준비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혜빈 입장에선 만나달라(?)는 준식의 말이 좀 이상하게 들렸는지 약간의 불편한 기색까지 내비치며 그와같이 말한다. 아마 웬만한 중요한 용건이 아닌 다음에는 혜빈으로선 지금 굳이 준식을 만나거나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것 같다. 혜빈이 그쯤에서 통화를 마무리하려하자 준식의 말투는 다소 간곡해지기까지 하고, 결국 하는수없이 사흘쯤후 피차 한가한 시간으로 날짜를 잡았다. 전해줄게 있다니 대체 그게 뭔지 혜빈으로서도 궁금해지기도 했고 그래서 일단 준식의 제안에 응한것이다. 여하튼 혜빈 입장에선 괜시리 기분이 좀 묘하기도 하고, 준식의 이와같은 일방적인 태도가 좀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여하튼 일단 그렇게 만나게 된 두 사람. 혜빈의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작은 커피숍에서 약속장소를 정했고, 그곳에서 준식은 서류용 봉투에 담긴 뭔가를 건넨다.

 “ 뭐에요 이게 대체 ? ”

 혜빈은 거듭 의아해져 준식에게 그와같이 물었고 준식은 뭔가 사뭇 흐뭇하고 뿌듯한 감정까지 담아 그런 혜빈을 바라보며 말을 건네본다. 준식 나름대로는 어떤 기대감과 설레임까지 담긴 그런 표정이다.

 “ 꺼내서 읽어보세요. 보시면 알아요. ”

 “ 아니, 대체... ”

 그리고는 꺼내본 서류용 봉투안의 물건. 그리고 그것은 뜻밖에도 드라마 대본이었다. 교육원 강의 더 듣는것도 포기하고 결혼으로 방향을 선회한 혜빈 입장에선 이 자체가 뜬금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일단 애써 가져온 대본이 뭔가싶어 내용을 대충 읽어보려는데 몇장 읽어보다 그만 혜빈이 경악하고 만다.

 “ 뭐...뭐야 이게 ??? ”

 “ 누나가 지난번에 보여준 습작품...집에 가져가서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어봤어요.

  아무래도 여러 가지로 아쉬운점이 많이 남는 작품이라 한번 제가 살을 붙여봤어

  요. 그래서 한번 누나에게 보여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가져온거에요. ”

 “ 뭐...뭐라구 ??? ”

 한마디로 준식이 혜빈이 원래쓴 작품에 살을 더 붙여서 다소 변형시킨 새로운 드라마 대본을 만들어보았다는 이야기다. 준식이 대체 무슨 의도로 그렇게까지 한것인지는 지금 혜빈으로선 알수없는 일이지만 여하튼 혜빈은 무척이나 황당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일단 그 대본을 대충 훑어보긴 했다. 분량은 A4 용지로 30매가 조금 넘는 그러니 단막극은 충분히 되는 분량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혜빈이 자신의 외할아버지로부터 어릴때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썼다는 40년대 후반 지방의 어느 행세하는 양반집에 출신도 불분명한 머슴이 있었는데 그 집 주인이 딸을 그 머슴과 결혼시켰고, 헌데 막상 그렇데 둘이 제법 성대하게 결혼을 하고 두 사람 사이에 아이까지 생겼는데 출산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무렵 남자가 잠시 방을 비웠다 돌아온사이 여자와 함께있는 아이가 죽어있었다는 - 그리고 대본을 읽어본 다른 합평회 참석자들 모두 ‘여자가 아이를 죽인 상황’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남자 주인공 나레이션에조차 ‘당신이 고민 끝에 아이를 죽였구려.’라는 말이 있는 상황이었으니 그렇게 내용을 이해하는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여하튼 전체적으로 설정도 납득이 안 되고 짜임새도 부족하고 결말은 더 이해가 안가는 그와같은 엉성했던 혜빈의 대본을 준식이 내용을 다음과같이 바꾸어놓았다.

 ‘ 6.25가 나기 직전인 1949년. 충남 OO군에 있는 한 양반집에 만식이란 이름의

  출신을 알수없는 하인이 한명 일하고 있다. 사실 만식은 휴전선을 넘어 월남한

  사람으로 그의 본가는 원래 이북에서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으니 공산정권이

  들어서고나서 핍박을 당해 가문이 모두 몰락할 위기에 처한다. 그러자 만식은

  숙청의 피바람을 피해 홀홀단신 월남하게 된다. 그리고 원래 북의 고향에서 쓰던

  이름까지 버리고 만식이란 이름으로 충남의 한 양반집까지 굴러들어와 이곳에서

  머슴살이를 하며 어느덧 1년여째 살고있는것이다. 만식은 대체로 성실한 편이었

  으나 의외로 우직한면도 있어 이따금 사고를 치기도 하고 그집 주인의 외동딸인

  옥분이와도 묘한 인연이 두어번 엇갈리게 된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런 과정을

  통해 연인 비슷한 묘한 관계로 발전하고 만다. 하지만 뼈대있는 양반가문인 옥분

  의 아버지는 만식과 딸아이를 번갈아 단속하며 두 사람 사이가 행여 너무 깊은

  사이로 발전하는것을 막는다.

    1년후, 6.25가 터지고 너도나도 피난을 가야한다고 아우성이다. 헌데 이때

   몇 달전 작은 사고를 당해 부상을 입고 요양중이었던 옥분의 아버지는 피난

   가는것을 거부하고 자신은 조상 대대로 지켜온 이 집과 땅을 지키겠다고 선

   언한다. 다만 성실했던 하인 만식에게는 자신의 외동딸 옥분이를 부탁하고,

   만식은 눈물을 흘리며 그런 주인어른과 작별하고 옥분과 함께 피난을 떠난다.

    시간이 좀 더 지난뒤, 전쟁상황은 복잡하게 전개되며 좀처럼 종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가운데 부산의 피난처에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던 옥분과 만식은

   그 사이 더 깊은 관계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옥분이 아이까지 갖

   는일이 벌어지고 만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이미 부부나 다름없는 사이가 되어버

   렸고, 두 사람의 생계는 당시 만식이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이어가고 있는중이

   었다. 시간이 좀 더 지나 옥분은 만식의 아이를 낳게되고, 한편 이때쯤엔 휴전

   협상이 진행중이며 전쟁이 곧 끝날것 같다는 소식도 들려오게된다. 헌데 그때

   쯤 만식과 옥분의 사이엔 큰일이 벌어진다. 실은 옥분이 우연히 저자에 나갔다

   가 친척아저씨 한분과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다. 그분도 현재 부산에서 피난살

   이를 하는중인데, 친척아저씨는 조카 옥분과의 재회에 반가와했지만 옥분은 만

   식과 현재 그런 사이가 되어 아이까지 낳은 상태임을 친척을 비롯한 다른이들

   이 알게되는것을 두려워한다. 아무리 민주국가고 평등세상이라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은 많은 사람들의 의식에 신분제 잔재가 많이 남아있는 시절이다. 그

   런 시기 그것도 전쟁통에 그렇게 뼈대있던 양반집 외동딸이 머슴살이 하던 남

   자와 살을 섞어 아이까지 낳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보통 문제가 아니다. 새삼

   옥분은 아무리 그래도 자기집 하인이었던 만식과 그런 사이까지 된것을 수치스

   러워하고. 한편 친척아저씨는 하루는 날을잡아 조카인 옥분이 사는모습을 보고

   싶다고 찾아오려한다. 기겁을 한 옥분은 온갖 핑계를 대며 만류하려 하지만 급

   기야 친척아저씨가 옥분과 만식이 사는집으로 찾아오고, 다급해진 옥분은 만식

   과의 사이에 태어난 갓난아이는 목을졸라 죽여버리고 어디론가 달아나버린다

   ... ’



- 마지막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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