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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대 걸그룹 팬픽 - 전혜빈 (3) 1세대 걸그룹 팬픽




                                    교육원에서 생긴일 - 3. 오월의 신부





 “ 아...아빠 저 강의... ”

 원래 술이 약한 편인 혜빈이건만 오늘은 그렇게 아버지가 권한 독한 양주를 석잔이나 그것도 큰잔으로 마셨다. 덕분에 석잔을 다 비웠을때쯤엔 이미 꼬부라진 목소리가 되어있었다. 혜빈이 수요일과 목요일엔 방송작가 교육원 강의를 들으러 가야함을 모르지 않을 아버지 광현임에도 하필 그 시간을 앞두고 이런일을 벌인것은 확실히 이해가 좀 안 가는 일이다. 여하튼 양주 석잔을 연거푸 딸에게 먹인 광현은 그쯤에서 되었다 싶었는지 가정부 아주머니를 불러 그쯤에서 상을 치우도록 했다. 혜빈은 이러다 강의에 늦겠다 싶어 그쯤에서 대충 옷을 챙겨입고 집을 나선다. 하지만 이미 술이 많이 취한 혜빈이라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이런식으로 제대로 몸이나 가누며 교육원까지 가게될지 걱정이 될 지경이다. 그러나 광현은 그렇게 집을 나서는 혜빈의 뒷 모습을 바라보며 씨익 웃어보인다.

 “ 여보... ”

 그런 광현에게 아내가 다가와서는 살짝 한소리 한다. 남편이 딸 혜빈이 교육원에 다닌답시고 설치는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이제 그만 조용히 시집이나 갔으면 하는 바램을 갖고있는 그 생각을 모르는 아내가 아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남편이 오늘따라 하필 이와같은 행동을 취한 의도를 대충 짐작할것 같아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는가 싶어 나오는 아내의 반응이다. 하지만 광현은 그런 아내를 바라보면서까지도 능글맞게 웃어보인다.

 “ 다 혜빈이 잘 되라고 이러는거야... ”

 “ 하여튼 당신도... ”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은지 아내는 남편을 살짝 흘겨본뒤 방으로 들어가버린다. 광현의 평상시 성격이 쓸데없는 장난 같은것을 치는것은 물론 실없는 농담도 잘 안 하는 성격인것을 감안하면 오늘일은 확실히 장난이라도 너무 심한 장난임에 틀림없다. 아무리 그래도 공부하러 나가야 하는 딸한테 아버지가 할 짓으로는 좀 아니지 않는가. 어쨌든 혜빈은 그렇게 만취가 된 상태에서도 대충 집을 나섰고 광현은 광현대로 오후에 다른 스케줄이 있어서 그때쯤에 외출준비를 서두른다.

 혜빈이 사는 집 근처에 전철역이 있기 때문에 혜빈은 다행히 거기까진 무사히 당도할수 있었다. 5호선 전 구간도 개통된 뒤니(99년 여름) 여의도를 통과하는 지하철 5호선을 갈아타는 역에서 갈아타면 될 일이니 일단 교육원에 도착하는데 그리 큰 무리는 없을것이다. 그렇게 겨우 전철역에 당도 열차를 탄 혜빈은 평일낮이라 대체로 빈자리가 많은 열차안 한 자리에 쓰러지듯 풀썩 주저앉는다. 그러나 술에 취한 상태로 곯아 떨어지는 바람에 그만 자신이 내려야할 역을 몇정거장 지나치고 말았다. 그래서 허둥지둥 다시 반대편 열차로 갈아타고, 그렇게 가까스로 여의도에 있는 방송작가 교육원까지 도착할수 있었다. 그나마 이번엔 그렇게 늦은것은 아니고 2시에 시작하는 강의를 한 20여분 지나서야 가까스로 도착했다. 아직 알딸딸한 술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상태라 조심하긴 커녕 문을 벌컥 열고 강의실로 들어와버리고 그 문 여닫는 소리에 강의를 듣던 수강생들이 순간 흠칫 놀라기까지 했다. 일단 한쪽 자리에 대충 털썩 앉게되는 혜빈. 강의를 한창 진행중이던 김수현이 지금 지각으로 들어온게 혜빈임을 모르진 않을것이다. 하지만 이미 몇차례 그녀의 눈밖에 난 혜빈인지라 더 상대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지 수현은 강의만 계속 진행하고 있다.

 ‘ 드르렁~~~ 드르렁~~~ ’

 그래도 집에서 전철을 타고 여의도까지 오는데 한시간 가까이는 걸렸는데, 그럼에도 집에서 마신 양주 석잔의 술기운이 아직 채 가시지 못한것인지 혜빈은 나름 정신을 차리고 집중해 강의를 들으려 애를 썼건만 얼마 안가 다시 책상에 풀썩 쓰러져 곯아 떨어지고 말았다. 코고는 소리까지 제법 세차게 내며. 결국 그 소리에 신경이 거슬렸는지 김수현이 다가오고 만다.

 “ 이봐요...이봐요 아가씨 ! 정신좀 차려봐요. ”

 “ 응...으어 뭐야... ”

 수현이 혜빈에게 와서는 그녀를 ‘아가씨’라 부르며 흔들어 깨워보았고, 여전히 술이 덜 깬것인지 혜빈이 게슴츠레 눈을 떠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바로 상황파악이 되는지 그만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고, 수현은 그런 혜빈을 흘겨보았다. 다른 수강생들도 오늘의 혜빈 행동은 진짜 어이없어 하는 눈치였다. 종종 결석이나 지각이 잦았던것까진 뭐 그런대로 사정이 있을수도 있겠다 이해할수 있겠지만 대낮에 술에 잔뜩 취해 강의실에 들어와서 잠을 청하는것은 진짜 어이없는 행동 아닌가. ‘대체 저 언니는 뭐 하는 사람이지 ?’ 이런 생각 들기 딱 좋은 상황. 수현은 그녀대로 다시금 혜빈을 나무란다.

 “ 너 아주 가지가지 하는 애구나 ? ”

 수현의 예하 냉소적이면서 빈정대는 말투가 다시 나오고, 혜빈은 혜빈대로 그래도 이제 집에서 술을 마셨을때부터는 두시간 가까이 시간이 지난터라 술은 그런대로 많이 깬 상태다. 하지만 냄새는 아직도 가시지 않았는지 푹푹 풍기는 상태. 수현은 잠시 코를 막으며 손으로 환기정화를 시키는 시늉까지 해보이고는 다시 혜빈을 바라보며 빈정거린다.

 “ 너 이제 여기가...술취한 노숙자 받아주는덴줄 아니 ? ”

 “ 죄...죄송합니다. ”

 “ 죄송이고 나발이고 그냥 여기서 나가. 이게 그냥 웬만하면 귀엽게 봐주려 했더

  니 아주 갈수록 가관이야 ? 너 내가...여기 피서하러 오랬지 술처먹고 자러 오랬

  니 ? 여기 피서객은 혹시 받아줘도 술취한 노숙자는 안 받아주는데야. 교육원이

  그렇게 한가한덴줄 알아 ? ”

 혜빈은 말이 없었다. 어찌보면 사뭇 수치스럽고 모멸감까지 느끼게 되는 상황. 그렇다고 자신이 어쩌다 대낮부터 술을 마시게 되었는지 그 경위를 설명하기도 난감한 처지 아닌가. 아닌말로 공부하러 나가는 딸에게 아버지가 강제로 먹였다고 말할수도 없는 일이고. 하는수없이 죄송하다는 말만 연거푸 김수현 선생에게 건넬 뿐인데 그런 혜빈이 수현에게는 아주 구제불능으로 보이는듯 다시금 그녀에게 비아냥댄다.

 “ 거듭 말하지만 여기 피서객은 받아줘도 술취한 노숙자까지 받아줄수 있을만큼

  한가한데 아니다. 돈 없어서 피서하러 오는거면 피서객까진 내가 넓은 아량으로

  받아줄수 있어. 하지만 술취한 노숙자면 그냥 서울역이나 용산가서 구걸이나 해

  !!! 괜히 여기까지 와서 신성한 교육원 공기 흐리지 말고 !!! ”

 사실 ‘가끔 피서하러 놀러나 와라’는 말 역시 종종 지각이 잦았던 혜빈을 비꼬며 수현이 한 말 아닌가. 그야말로 비싼 등록금 내고 교육원을 놀러다니듯 다니는 혜빈의 태도와 정신상태를 비꼬기 위해 ‘여기 피서하러 놀러다니는 데냐 ?’라고까지 말했던 그런 수현이다. 헌데 이제 술취해 강의실에서 곯아떨어지는 모습까지 보이니 수현의 비아냥이 한 옥타브 더 높아진 것이다. ‘피서객은 받아줘도 술취한 노숙자까진 못받아준다.’ 김수현의 그 말에 혜빈은 한층 더 굴욕감을 느끼며 그 자리에서 울음이라도 터트릴것 같은 그런 심정이 되고 만다. 하지만 울면 그것마저 또 김수현이 뭐라고 비아냥거릴것 같아 우는것은 일단 참도록 한다. 하지만 터질것 같은 울음을 속으로 참아내느라 나머지 강의를 듣는 내내 혜빈은 ‘끅끅’ 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기초반에서 이런저런 곡절로 지각과 결석이 잦았던 혜빈이긴 했지만 그래도 6개월 기초반 과정 자체는 끝까지 수료했다. 사실 대체로 이런식으로 무성의하게 강의를 듣는 수강생이라면 기초 6개월 과정의 절반도 버티지 못하고 대개 중간에 그만두게 되기 마련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초반 6개월을 끝까지 마친것을 보면 방송작가가 되고 싶다는 혜빈의 의지 만큼은 여전히 살아있는듯 했다.

 방송작가 교육원은 대체로 기초-연수-전문-창작반 순으로 6개월씩 강의가 진행되고 그리고 기초반은 드라마와 비드라마반 구분 없이 통합으로 대체로 방송대본과 방송 그 자체에 대한 이론 위주의 수업이 진행된다. 그리고 2학기 부터는 본격적으로 드라마반과 비드라마반으로 나뉘어져 전문 분야별 심층 강의가 진행되는데, 드라마반 연수반의 경우에도 드라마 대본의 이론과 디테일등 보통 심층적인 이론 강의가 진행되고 그리고 연수반 중,후반기 무렵부터는 본격적으로 수강생들이 직접 습작품을 가져와 작품 위주로 담임선생이 지도를 해주고 학생들과 토론을 갖는 이른바 ‘합평회’가 시작이 된다. (* 90년대 후반 당시의 교육원 교육과정대로 설정을 한 것이기 때문에 2015년 현재 한국 방송작가 협회 산하 방송작가 교육원의 교육과정과는 다소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3학기 전문반부터는 사실상 이론수업은 거의 없고 습작품과 합평회등 실기 위주의 강의가 진행되고 창작반으로 들어가면 사실상 드라마 작가 데뷔를 돕는 지원형태의 강의로까지 들어가게 된다. 창작반까지 들어가면 사실상 드라마 작가 데뷔는 목전에 둔 것으로 봐도 다름이 없는것이다.

 여하튼 혜빈은 99년 5월부터 시작된 OO기 기초반 6개월 과정을 모두 마치고 이어 11월부터 시작되는 드라마반 연수반까지 등록을 해 계속 강의를 듣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혜빈의 기수는 연수반에서도 계속 김수현이 담임을 맡게 되었다. 이듬해 5월까지 진행되는 연수반의 경우 중반기를 넘어선 2월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습작품 위주의 합평회가 진행이 되었다. 모두 20여명이 넘는 수강생중 약 10여명 정도가 김수현의 요구대로 자신이 직접 쓴 드라마 대본을 제출하였고 그것 위주로 하루에 평균 한두작품씩 합평회가 진행이 되었다.

 한편 혜빈은 정작 김수현이 작품을 제출하라고 했을때는 자기 대본을 내지 못했다. 사실 그때는 혜빈은 그녀대로 다른 사정이 있어 수업에 빠지는 바람에 ‘습작품을 제출’하라는 과제 요구를 듣지 못한것이다. 따라서 혜빈은 습작품을 제출못한 조로 나뉘어진채 합평회 수업이 진행되었고 그 합평회 과정도 거의 끝나가는 3월말의 어느날이었다.

 “ 저...서...선생님... ”

 “ 뭐니 ? ”

 그날 강의가 끝나고 강의실을 나서는 김수현을 따라오는 학생이 한명 있었다. 다름아닌 혜빈이다. 기초반때부터 여러차례 그녀의 눈밖에 난 혜빈인지라 수현의 혜빈에 대한 감정은 좋지 못했다. 하지만 어쨌든 그녀가 현재 담임인것은 피할수 없는 현실. 혜빈은 사뭇 긴장하고 떨린 손으로 그녀 앞에 뭔가를 내밀었다.

 “ 뭐니 이게 ? ”

 수현은 예하 그 시니컬하여 빈정거리는것처럼 들리는 그 말투로 혜빈에게 물었고, 혜빈은 손에 든 약 A4 용지 20장 정도로 되어보이는 종이뭉치를 내밀었다. 그리고 설명을 덧붙였다.

 “ 제...원고에요. ”

 “ 뭐 ? ”

 “ 제가 쓴 드라마 대본이라구요. ”

 “ 타임머신 타고왔니 ? ”

 “ 네 ? ”

 수현이 수강생들에게 습작품을 제출하라 요구한것이 벌써 두달전인 1월 말의 일이고, 그리고 2월초에 제출한 10여명의 학생들의 습작품 위주로 합평회가 시작되어 그것조차 이미 마무리 되어가는 단계다. 그러니 그땐 뭐하고 합평회가 거의 마무리 되어가는 지금에서야 대본을 내놓느냐는 그런 핀잔과 비아냥일것이다. 바로 ‘타임머신 타고 왔느냐 ?’는 식의 물음은. 수현의 성정은 물론이고 자신이 그녀에게 이미 찍힐대로 찍힌 처지란것을 잘 아는 혜빈인지라 순순히 선생이 자신의 대본을 받아줄것 같지는 않을것 같다는 예상 정도는 이미 하고 있었다. 허나 어쨌든 나름대로 애써 써서 가져온 대본이다보니 여하튼 늦게나마 제출하고 보자는 생각으로 혜빈은 일단 밀어붙여 보기로 했다.

 “ 느...늦어서 죄송합니다 선생님. 하지만 그간 사정이 있어서...늦어서 죄송합니

  다 선생님. ”

 허나 수현은 혜빈의 그와같은 변명은 더 듣고싶지 않은듯 자기갈길을 가기위해 발걸음을 옮기려 했고 혜빈은 다급하게 바로 그런 수현을 따라가서는 앞을 막아섰다. 혜빈의 그런 태도에 수현은 다소 놀라는 모습이다.

 “ 너 이게 뭐하는 짓이니 ? 저리 안 비켜 ? ”

 “ 죄...죄송합니다 선생님. 하지만 제 작품 한번만이라도 봐주세요. ”

 “ 나 바뻐. 놀러오고 싶으면 다음에 한가할 때 와. ”

 그러잖아도 1학기(기초반)때도 이미 지각,결석이 늦는 혜빈을 빈정거리며 ‘피서하러 오고 싶으면 한가할 때 얼마든지 놀러오라’는 식으로 빈정거렸던 그런 수현 아닌가. 그것을 염두에 둔다면 지금 하는 말도 역시 비슷한 맥락의 의미일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이렇게 된것 그녀로부터 무슨 말이나 수모를 들을 각오가 되어 있는것인지 혜빈은 다시금 간곡하게 자신의 대본을 받아달라는 애원의 말을 건넨다.

 “ 선생님 저 정말...늦은것은 제가 입이 열 개라도 드릴말씀이 없는데요. 그래도 제

  작품 한번이라도 봐주세요. 정말 저 심혈을 기울여서...진짜 피고름으로 밤잠 안자

  고 쓴 대본이거든요. ”

 “ 밤에 잠 안오면 그냥 나가서 남자나 만나. 공연히 허튼짓 하지 말구... ”

 “ 선생님 제발... ”

 혜빈은 더욱 간곡해져 이제 울상까지 되어있고, 혜빈이 그와같이 나오니 수현으로서도 다소 곤혹스러워진다. 무엇보다 실제로 공사다망한 유명작가 김수현이기도 하니 이렇게 강의 끝나고 나서 지각으로 습작품을 내놓는 수강생과 오래 실랑이할 시간도 없을테고, 김수현 정도라면 지금 ‘나 바쁘다.’고 말해도 거짓 핑계는 분명 아닐것이다. 김수현 정도면 아마 오후 네시 이후의 스케줄도 이래저래 빡빡하게 짜여져 있을것이란것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일 아닌가. 여하튼 수현은 잔뜩이나 바쁘고 피곤한데 공연히 혜빈과 실랑이하며 시간낭비 하고싶지 않은지 바로 다시 그녀를 밀치고 자기 갈길을 가려한다. 교육원이 금산빌딩 4층에 위치하고 있으니 1층까지 가기위해선 일반적으로 다들 엘리베이터를 이용한다. 그 엘리베이터가 있는곳까지 어느덧 다다른 김수현. 하지만 혜빈은 그녀앞에 다시금 자신의 습작대본을 내놓으며 애원한다.

 “ 선생님 제발...그러지말고...단 한번만...그냥 제 대본 봐주기만 하세요. 제발...이

  대본 한번만 봐주시면 저 더 이상 선생님 귀찮게 해드리지 않을게요. 그러니 제

  발...한번만...한번만... ”

 “ 이걸 봐달라구 ? ”

 “ 네, 선생님 !!! ”

 혜빈의 간곡하고 거듭되는 애원에 마음이 움직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수현의 태도가 약간 달라진것 같은 느낌이 들자 혜빈은 바로 어둠속에서 한줄기 빛이라도 본듯한 그런 느낌이 들고, 한 2-3초도 채 걸리지 않았을 시간이 혜빈에겐 아마 몇시간 아니 그 이상의 시간과 동급처럼 느껴졌을수도 있을것이다. ‘이걸 봐달라구 ?’, ‘네 선생님.’ 그리고 잠시 어색한 멈칫함과 머뭇거림. 혜빈의 대본은 어느새 김수현의 손에 쥐어져있었다. 이제야 선생님께서 내 대본을 봐주시는구나. 혜빈은 바로 그런 희망을 보는듯한 느낌이었다. 설마 지금은 바빠서 대본을 다 읽어보시진 못하시더라도 다음주나 다음 강의때 기회를 잡아 자신의 작품 합평회 시간도 잡아주시겠지. 정말 단 몇초도 안 되는 시간동안 그야말로 새로운 희망이 생기는듯한 별의별 상상이 오가고 있었는데, 헌데 김수현은 혜빈의 손에서 빼앗듯이 건네받은 20장도 안되는 대본을 대충 훑어보는듯 하더니 바로 북북 찢어버린다.

 “ 서...선생님... ”

 순간 바로 조금전까지만 해도 김수현이 자기 작품을 봐주는 것으로만 알고 희망과 기대를 가졌던 혜빈은 경악하고 만다. 무엇보다 자신의 그녀 말마따나 ‘밤새 피고름으로 쓴 대본’이 천하의 김수현의 손에 사정없이 북북 찢겨지고 있지 않은가. 그 모습에 놀라고 경악한 혜빈은 차마 무슨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있고, 그녀의 전신은 벌써 이미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혜빈의 심리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김수현은 그런 혜빈을 바라보며 면박을 준다.

 “ 야 !!! 어따가 X같은걸 들고와서 지랄이야 ? 여기가 X간인줄 알아 ? ”

 “ 네 ? ”

 “ 무슨말인지 못알아듣겠어 ? 이 X같은거 당장 치우라고. 어후 냄새야. 교육원이

  X간야...아님 누가 X을 싼거야 ? 어서 이런 더러운 X이 잔뜩 어질러져 있어 ? ”

 “ 서...선생님... ”

 사실 혜빈은 평상시에 김수현을 딱히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그 정도는 아니었었다. 하지만 어쨌든 방송작가를 꿈꾸는 젊은 여성이니 만큼 천하의 김수현을 아주 모르지는 않았을터이고, 따라서 그만한 유명한 작가에게서 직접 강의를 듣게 되었으니 작가가 되는데 많은 도움이 되겠구나 하는 그 정도의 기대심만 갖고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천하의 김수현한테서 자신의 작품을 직접 평가받게 된다면 그로인한 어떤 기대감이나 설레이는 감정 정도는 분명 들었을것 아닌가. 헌데 그런 김수현앞에서 대놓고 ‘X같은 거’라는 막말을 들으며 대놓고 그녀가 자신의 방송대본을 찢어버리는 모습을 보았으니 그 충격은 또 오죽했을까. 혜빈은 너무 놀라 그녀에게 뭐라고 말조차 제대로 붙여보지 못하고 있는데 수현은 그런 혜빈을 바라보며 한바탕 면박의 말을 더 던져버린다.

 “ 이 X 당장 안치워 ? 이거 당장 치우고 꺼져. 이 X이 어디 신성한 교육원이 X

  싸는덴줄 아나 ? 어딜 X같은걸 들고와선 교육원에서 XX을 치고있어 ? 당장 니

  X 치워서 꺼져. 당장 안 꺼져 !!! ”

 “ 아...아니 저 선생님... ”

 혜빈에겐 수현의 그와같은 독설 하나하나가 그야말로 무수한 송곳이나 칼,바늘 따위의 날카로운것이 자신의 가슴을 찌르고 갈기갈기 찢어버리는듯한 충격에 그야말로 무슨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있었다. 다만 여하튼 뭔가 억울하고 야속한 감정은 있어 그 말이라도 전하고픈데 김수현은 이미 엘리베이터를 타고 문을 닫아버린다. 어쨌든 그녀도 나름대로의 바쁜 스케줄이 있을터이니 지금 그녀의 뒤를 쫒아가 붙잡는다던가 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혜빈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무엇보다 수현의 독설과 그리고 북북 찢어버린 자신의 대본원고로 인해 받은 정신적 충격이 이만저만 아니다. 물론 혜빈도 정작 습작물을 제출하라는 과제가 내려졌을때 제때 내지않고 뒤늦게 낸 것이니 그녀의 잘못도 분명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기로 이렇게까지 모욕과 면박을 당하고 대본까지 찢기는 수모를 당하리라곤 생각조차 못했다. 혜빈이 비록 김수현을 좋아하거나 존경한것은 아니었어도 그래도 천하의 김수현쯤 되는 작가에게서 직접 자신의 작품을 평가받는다는데 대한 최소한의 기대감이나 설레임은 있었는데, 수현은 그 혜빈의 기대와 설레임마저 무참하게 갈기갈기 찢어버린것이다. 수현이 찢어놓아 바닥에 널려진 대본만큼이나 무참하게 찢겨져버린 혜빈의 가슴. 찢겨진 종이보다 그녀의 가슴이 더 아팠다. 가슴을 진짜 누가 어떤 날카로운 물건으로 갈기갈기 찢어버리는것만 같은 그런 아픔을 느끼며 혜빈은 고통스럽게 흐느꼈다. 한참을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움직이지도 못한채 흐느끼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 겨우 정신을 좀 차리고 조금전 수현이 찢어놓은 대본을 겨우 수습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강의가 조금전 다들 끝나 혜빈의 연수반뿐만 아니라 다른 오후반 수업들도 모두 끝난 상태라 강의를 끝내고 나오는 학생들이 많이 있었다. 그중 한명이 울고있는 혜빈의 모습을 보면서 대충 주위에 널부러져있는 혜빈의 찢겨진 대본을 수습해 건네주긴 했다. 다행히 수현이 아주 갈기갈기 찢어놓은것은 아니고 대충 두어차례 찢다 만 것이라 대본 수습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A4 용지로 20장 가까운 분량이니 만큼 그런대로 두꺼운 부피라 찢기가 쉽지 않았을수도 있었을것이다. 무엇보다 수현으로선 일개 수강생중 하나일뿐인 혜빈의 대본이 그렇게까지 크게 신경을 쓸 문제가 아니라 여겨서인지 대본을 대충 두어번 찢다가 제대로 찢겨지지가 않아서 그대로 그냥 두어번 찢다만 대본을 그대로 내팽개쳐버린것 같다. 어쨌든 그 김수현은 지금 더 이상 이 자리에 없고, 강의가 끝나 강의실에서 나오는 수강생들도 거의 다 나왔음인지 엘리베이터 앞은 이미 한산해져있다. 그때쯤 혜빈은 자신의 찢겨진 대본을 겨우 수습해 들고 그쯤에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1층으로 다 내려온 혜빈은 금산빌딩 인근의 한 벤치에서 한참을 서럽게 울고 있었다. 아까전에 수현이 찢어놓은 대본을 다시 가방에서 꺼내 집어들어 보았다. 조금전 수현이 자신의 대본을 ‘X같은 거...’ 운운하며 찢던 모습이 다시금 선명하게 떠오르는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김수현한테 당한 그 모멸감 수치심이 혜빈을 견딜수가 없게 만들었다.

 다른건 몰라도 혜빈이 방송작가 교육원에 수강신청을 한것은 일전에 아버지 광현에게 말했던것처럼 어쩌면 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펼쳐보일수 있는 공간이 방송작가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실제 고등학교때 문예반 활동도 했고 대학때는 학보사 기자로 일하는등 문예쪽에 그런대로 재능을 갖춘편인 혜빈. 다만 대학은 사회학과를 나왔고 그러나 전공보다는 문예창작쪽에 혜빈은 종종 더 관심을 갖곤 했었다. 그래서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시나 수필따위를 노트에 끄적거리는것을 소일거리고 삼곤 하던 그것에 20대의 혜빈의 모습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한동안 직장생활을 하긴 했으나, 혜빈의 성격탓인지 아니면 다른 무슨 문제가 있는것인지 직장은 한 3년여 정도만 다니다 그만두고 말았다. 대체로 직장생활에 적응을 잘 못한 편이라고나 할까.

 그런 막내 혜빈을 지켜보던 광현은 그래서 그때쯤부터 막내딸은 이쯤에서 좋은 사람 소개시켜 짝지워 시집이나 보내려고 마음먹고 있었던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공기업 간부를 역임하면서 인연이 있는 집안의 둘째딸 김상기와 자주 만나게 해주었던 것인데, 하지만 혜빈은 아직 결혼은 내키지가 않았고 여하튼 그녀는 자신의 역량을 한번 제대로 발휘해볼 기회를 잡기위해 방송작가 교육원에 등록을 한 것이었다. 조용히 있다가 시집이나 갔으면 하는 아버지의 바램과는 달리. 그렇게 어찌보면 아버지의 뜻까지 거스르고 등록한 교육원인데, 그런 교육원에서 제대로 이런 면박을 당하고 나니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듯한 절망감마저 들었다. 온 세상이 칠흙같은 어둠으로 뒤덮이는 그런 기분이었다. 아직 오후 4시반도 채 안 된 시간이고 3월말의 봄이니 해도 차츰 길어질때임에도 불구하고 혜빈에겐 어떤 착시현상이라도 일어난것마냥 사방이 갑자기 어두컴컴해지는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혜빈은 절망감에 아까 김수현이 찢어놓은 자신의 숩작 대본을 품에 안고 한참을 울고 또 울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혜빈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자신의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90년대 후반이니 호출기 시대가 차츰 저물고 휴대폰이 보급되기 시작하던 무렵이다. 그러니 혜빈이나 상기 정도의 재력이 있는 집안이라면 이미 개인적으로 휴대폰 하나쯤은 필수로 갖고 다니기 시작할 무렵이다. 특히 현재 무직으로 교육원에 다니고 있는 혜빈의 경우라면 몰라도 프리랜서인 상기에겐 휴대폰은 무엇보다 중요한 필수품일 것이다. 지금 혜빈은 바로 그 상기에게 전화를 걸고있는 것이다.

 “ 오빠... ”

 전화를 걸자 바로 상기가 받았다.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혜빈이 말을 건넨다.

 “ 오빠... ”

 “ 아니, 혜빈아. 너 왜 그래 ? 무슨일이 있어 ? ”

 무엇보다 전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울먹이는 혜빈의 목소리에 너무나 놀란 반응을 보이고 있는 상기. 원래 결혼은 내키지 않고 따라서 상기와 정식으로 사귄다던가 하는것은 더더욱 생각이 없다고 하던 그런 혜빈이 아닌가. 헌데 그런 혜빈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와같이 상기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그리고 상기는 혜빈이 우는 목소리에 너무나 놀라는 반응을 보이고, 괜찮으니 무슨일인지 이야기하라는 상기의 말에 혜빈은 사뭇 처절한 목소리로 울부짖는다.

 “ 오빠...오빠아아~~~!!! 흑흑흑흑~~~!!!

 아직 상기에게 무슨 이야기는 제대로 꺼내지 못하고 절규하듯 우는 소리만 계속 내고있는 혜빈. 상기로선 그런 혜빈이 더더욱 걱정되고 놀랄수밖에 없을것이고, 그런 상기가 거듭 혜빈에게 무슨일이냐고 말하자 그제서야 혜빈이 말을 걸어온다.

 “ 오빠...저 좀 만나줘요...저 좀 만나줘요. 엉엉엉엉~~~!!! ”

 “ 어...어 그래 알았어. 혜빈아, 지금 어디니 ? 어디에서 전화하는거야 ? 몸은 괜

  찮아 ? ”

 설마 지금 무슨 상상을 하는것인지. 혹 혜빈이 괴한에게 납치라도 당하거나 몹쓸 봉변이라도 당하고 있는것은 아닌가 하는 그런데까지 걱정이 미치기라도 한것인지 몸은 괜찮으냐고까지 물은 상기. 혜빈은 여전히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 오빠...저좀 만나줘요. 저 이대로는 못 견디겠어요. 저 이대로는 여기서 한발자욱

  도 못 걸어요. 그러니 저 좀 만나줘요 오빠. 오빠라도 제 곁에 있어달란 말이에요

  . 누구든 지금 제 곁에 있지 않고서는 제가 미쳐 견디지 못할것 같아요. 여기서

  한발자욱도 걸을힘이 없어요. 그러니 제발좀 와줘요 오빠. 엉엉엉엉~~~!!! ”

 실제로 혜빈은 조금전 수현에게 받은 면박으로 인한 충격 그리고 이어지는 절망감에 진짜 쓰러질것만 같은 기분인 것이다. 이대로는 진짜 집으로도 가기 힘들고 아니 발걸음 자체를 움직이기조차 힘든 그런 정신상태가 되어있는것이다. 정말 누가 곁에서 부축이라도 해주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쓰러질것만 같은 현기증까지 느끼는 혜빈. 그렇게 절망적인 상태에서 지푸라기라도 잡고싶은 심정으로 상기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그리고는 무조건 만나자고 애원하고 있는 혜빈. 상기는 혜빈의 그런 모습에 더 놀라고 걱정이 되어 지금 어디냐고 그녀에게 묻고 당장이라도 혜빈에게 달려갈듯한 기세를 보인다. 혜빈이 자신이 있는곳을 말해준다.

 “ 교육원 앞이에요. 그러니까...여의도 금산빌딩...국회의사당 건너편이에요. 그러니

  제발 좀 와줘요. 저 지금 국회의사당 건너편 금산빌딩 앞에 있어요 오빠. 그러니

  제발 와줘요. 제발 저한테 와달란 말이에요 오빠 !!! 엉엉엉엉~~~!!! ”



- 4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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