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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대 걸그룹 팬픽 - 전혜빈 (2) 1세대 걸그룹 팬픽




                                    교육원에서 생긴일 - 3. 오월의 신부





 김상기는 대학에서 컴퓨터 그래픽을 전공한 사람으로 지금은 프리랜서로 컴퓨터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는 중이다. 따라서 그는 평일에도 가끔은 일이 없어 한가할때가 종종 있다. 그래서 하루는 바로 별다른 특별한 할 일이 없는 수요일 오전에 혜빈을 불러내어 그녀와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불과 얼마전 아버지 광현에게 상기오빠 좋은사람이긴 하지만 별로 내키지도 않고 자신이 아직 결혼생각이 없다고 말한 혜빈이기도 한데, 정히 그렇다면 만약 혜빈이 상기를 만나고픈 생각이 없다면 본인이 적당히 핑계를 대서 거절해 버리면 그만일 것이다. 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기의 평일 오전의 데이트 제안에 별다른 망설임없이 응한것을 보면 혜빈도 상기가 아주 싫지만은 않은것일까. 여하튼 그렇게 점심시간까진 시간이 좀 한참 남은 다소 여유로운 오전시간에 두 사람은 만남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상기는 혜빈을 강북에 있는 한 하천변 오솔길로 불러내었다. 대충 이 인근이 공원처럼 조성되어 있는데, 무엇보다 숲길이 한쪽으로 제법 쫙 나있는것이 그런대로 운치있어 보이기도 하다. 한여름이라 신록은 싱그럽고 우거지기만 하고, 상기는 그 숲길을 혜빈과 함께 거닐며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 사실 여긴 가을이 되어야 제맛인데 말야. ”

 상기의 집안이 이미 혜빈 집안과 10년 가까이 인연이 있는 집안이라서일까. 혜빈도 상기를 보통 ‘오빠’라고 부르긴 하지만 상기도 세 살차이인 혜빈에게 별다른 어려움없이 말을 놓고 있었다. 비록 10년 인연이라도 두 사람 나이를 생각해본다면 서로를 알게된건 어느정도 성인이 된 뒤의 일일텐데 - 상기의 아버지와 광현의 아버지가 서로를 알게되고나서 바로 양쪽 자녀를 소개해 주었을리도 없을테니까 -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사이는 그렇게까지 거리감은 없는 대체로 편안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상기의 말이 이어진다.

 “ 가을에 난 종종 여기 와보곤 했었어. 내가 작품을 만들어서 갖다주는 회사가

  몇군데 이 근처에 있기도 해서말야. 그래서 일이 있어 나왔다가 가끔 시간이 남

  으면 여기 와서 혼자 이 길을 거닐곤 했었지. 가끔 그러다 출출하면 근처 포장

  마차에서 오뎅이나 떡볶이 따위를 사먹기도 하고말이야. ”

 상기의 말에 관심이 가는것인지 아닌지 혜빈은 일단 별다른 대꾸는 없는 가운데 상기는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 들려주고 있다. 헌데 그런 이야기를 하는 상기의 목소리엔 어떤 착잡한 감회가 서려있다.

 “ 솔직히 좀 서글펐어... ”

 “ 왜요 오빠 ? ”

 상기를 오빠라고 부르는 혜빈. 헌데 가을에 종종 혼자 여길 와보곤 했다는 말을 하면서 좀 난데없이 서글펐다는 소릴 입에 담으니 자연히 의아해질수밖에 없고 그래서 나온 혜빈의 물음에 상기는 마치 기다렸다는듯 그녀를 바라보며 살짝 입가에 미소를 머금어보인다.

 “ 왜긴...내 곁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지... ”

 “ 예 ? ”

 상기의 말을 바로 못알아 들은것인지 약간 어리둥절해 되물은 혜빈. 상기는 그런 혜빈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간다. 살짝 좌우 양쪽의 경치를 돌아보기도 하면서.

 “ 보다시피 지금은 여름이라 신록이 우거진 숲길이지만...가을엔 여긴 낙엽이 수

  북히 쌓이게 돼. 그 쌀쌀한 가을날에 낙엽만 가득한 숲길을 혼자 걷는 사나이의

  마음이 어떤건지...넌 이해가 가니 ? 나 진짜 그땐 억울하기도 하고...진짜 슬펐

  어. 이 쌀쌀한 가을날 혼자 도시 한복판의 숲길을 혼자 걷는 이 신세가...어찌나

  처량하던지... ”

 “ ...... ”

 “ 옆구리가 시리다는게 무슨 말인지 정말 그때서야 깨닫게 되는것 같았어. 진짜

  그렇게 혼자 처량하게 이 길을 거닐면 너무 내 신세가 서글퍼보여 울고싶어지기

  까지 하더라니까. 정말 그럴땐... ”

 그리고는 살짝 얕은 한숨을 내쉬는 상기. 혜빈은 별다른 말없이 그런 상기를 바라보는 가운데 그의 말은 계속되고 있다.

 “ 정말 내 곁에 누구라도 있었으면 하는 그런 바램밖에 안 생기더라. 정말 간절히

  ...정말 내 곁에 누구라도 좀 있게 해서...내년 가을엔 누구하고라도 함께 이 길을

  걸어보았으면 하는...진짜 저 하늘 어딘가에 신이라도 있다면 간곡하게 간구라도

  하고싶은 그런 마음이었는데... ”

 “ ...... ”

 “ 그런데 다행히 그래도 오늘은 네가 곁에 있구나. ”

 이런 대화를 나누는걸 보면 상기나 혜빈 집안에서 두 사람의 결혼말이 오간것은 그리 오래되지는 않은 거의 최근의 일인듯 하다. 양쪽 다 어쨌든 혼기를 놓쳤다고 봐야할 막내가 하나씩 있는셈이니 그런 이야기를 좀 주고 받다 차제에 두 사람을 연결시켜주는게 어떻겠느냐는 아마 어쩌면 덕담수준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다 본격적으로 두 사람을 짝지워주는 쪽으로까지 이야기가 진행된 모양인데. 어쨌든 상기 입장에선 그저 아버지와 친분이 있는 어르신 집안 딸 정도로만 여기고 있던 혜빈에게 이제사 본격 대시를 하는듯한 그런 모양새다. 혜빈은 그런 상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상기의 혜빈에 대한 다가섬은 사뭇 적극적이기까지 하다.

 “ 혜빈아 정말... ”

 “ ...... ”

 “ 올가을엔 너와 함께 이 길을 거닐어보고 싶다. ”

 혜빈은 별다른 대꾸가 없다. 그러잖아도 불과 얼마전 아버지한테 상기는 커녕 결혼 자체가 아직 생각이 없다며 교육원에서 강의를 더 들은뒤 방송가에서 한번 자기 역량을 발휘할수 있는 그런 일을 해보고 싶노라는 그런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밝히기까지 했던 그런 혜빈이다. 헌데 그런 혜빈에게 이렇게 상기가 자신의 속은 아는지 모르는지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혜빈도 그녀 나름대로 심사가 다소 복잡해져 있을것이다. 여하튼 자신을 호의로 대하는 이런 상기를 너무 야멸차게 내치고 싶지는 않은데 - 그런것을 보면 혜빈의 천성도 꽤나 착한것 같다. - 하지만 자신이 아직 결혼 생각이 없고, 따라서 혜빈은 상기의 그와같은 다가섬에 아직도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고 있다. 상기는 그런 혜빈을 재촉해 근처에 있는 다른 구경거리도 몇가지 더 구경시켜주고 그렇게 두 사람이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가운데 점심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 오빠...저어... ”

 “ 배고프지 혜빈아 ? 우리 뭐 먹을까 ? ”

 시간이 그쯤되니 지레짐작에 상기가 그와같이 물은것인데, 하지만 지금 혜빈의 속내는 그와 전혀 다르다. 사실 오늘이 수요일이니 바로 교육원 기초반 강의가 있는날 아닌가. 강의시간이 오후 2시고 여기가 서울 강북에서도 꽤나 북쪽지역에 위치한 곳이니 여의도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을 감안하면 이제 서둘러야 한다. 그런데 그런 혜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밥을 같이 먹자고 하는 상기. 혜빈으로선 퍽이나 난감해지는 상황이다.

 “ 오늘은 오빠가 한번 혜빈이 좋아하는걸로 한턱 쏘고 싶구나. 그러니 어려워말

  고 말해. 오빠 돈 많은거 혜빈이도 알잖아. 그러니 어려워말고 어서 이야기해봐.

  뭐 먹을래 ? 오늘은 진짜 모처럼 오빠가 우리 혜빈이가 좋아하는것을 직접 대접

  해주고 싶구나. ”

 강의에 늦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하는데 그런 혜빈보고 점심을 같이 먹자고 거듭 재촉하고 있으니 두 사람의 대화와 생각이 이렇게까지 어긋나는것도 쉽지 않을것이다. 상기는 정말 혜빈의 평생 기억에 남을 정도로 근사하게 한턱 쏘고싶은 기세로 말하고 있지만, 강의에 늦으면 큰일이다 싶은 생각에 가득차 있는 혜빈에게 지금 딱히 특별히 무슨 별다른 먹고싶은게 생각날 리가 없다. 다만 상기의 거듭되는 권유를 뿌리치기 쉽지 않아서인지 결국 적당하게 아무것이나 생각나는 음식 이름을 댄 혜빈. 상기가 약간 뜻밖이면서도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일단 상기가 근처의 그런대로 괜찮은 레스토랑으로 가서 점심을 산다. 이때가 이미 시간을 정오를 넘긴 무렵이니 두시에 시작하는 강의를 들어야 하는 혜빈으로선 초조해질 수밖에 없는 처지. 음식먹는 속도가 유난히 빨라지는 모습에 의아한듯 상기가 말을 건넨다.

 “ 혜빈이...원래 그렇게 밥을 빨리 먹었니 ? ”

 “ 예 ? ”

 “ 아니...원래 내 기억에...내가 예전에 의원님(혜빈의 아버지 전광현 전 의원)댁

  에 갔을때도 혜빈이랑 식사를 한 적이 몇 번 있기도 하지만 내 기억엔 그때 식

  사속도가 그렇게 빠르진 않았던것 같은데...오늘보니 밥을 참 빨리 먹는구나. ”

 혜빈의 밥먹는 속도가 이전에 그녀 아버지 광현의 집에서 식사를 했을때보다 빠른것을 눈치챌 정도인것을 보면 상기의 혜빈에 대한 그동안의 지켜봄도 어지간했던것 같다. 혜빈으로선 자신의 속도 모르는채 생판 엉뚱한 소리만 입에 담는 상기가 답답해지기까지 할 지경이고 여하튼 해명은 좀 해야할것 같아서인지 일단 적당히 둘러댄다.

 “ 아...아뇨 그냥 좀 피곤해서... ”

 피곤한것과 밥을 빨리 먹는것이 대체 무슨 상관인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말도 안되는 이야기일지언정 그와같은 변명을 하고, 아무튼 그렇게 식사를 마친 혜빈은 그쯤에서 상기와 헤어지려는듯 작별의 말을 입에 담는다.

 “ 오...오빠 저 그럼 이만 가볼께요. 오늘 점심 잘 먹었어요. 전 그럼 이만 바빠

  서... ”

 그렇게 대충 레스토랑 식사를 마치고 황급히 그곳을 빠져나가려는데 상기가 돌연 그런 혜빈의 손을 잡는다.

 “ 가지마 혜빈아... ”

 “ 예 ? ”

 무슨 헤어지는 연인도 아니고 혜빈은 다만 강의에 늦으면 안되겠기에 빨리 이곳을 떠나려는 것인데, 그런 혜빈의 손을 잡고 사뭇 간곡하게 그와같은 말을 입에 담은 혜빈.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기는 다소 일방적으로 무조건 그녀의 손을 잡은채 이끈다. 레스토랑 식사대는 지불하고 거의 일방적으로 무조건 혜빈을 데리고 나오는 상기. 그리고 차에 혜빈을 태운다. 원래 상기는 자신의 차를 몰고 혜빈과 데이트를 하러 나왔었다. 아까 공원에서는 조금 떨어진 공용 주차장에 차를 세워둔채 오솔길을 거닐며 데이트를 했던 것이고, 그 차를 몰고 이곳 레스토랑까지 온 것인데 그 차에 일단 혜빈을 다시 태운것이다. 혜빈은 당황하면서도 일단 만약 상기가 자신을 태워다줄 의사가 있는것이라면 그것은 일단 고마운 일이기에 행선지를 입에 담는다.

 “ 오빠...전 강의 들으러 가야해요. 그러니...여의도로 가야하는데... ”

 헌데 혜빈의 말을 귀담아들은 것인지 아닌지 상기는 일단 말없이 차를 출발시킨다. 혜빈은 그런 상기에게 자신이 가야할곳을 거듭 입에 담는다.

 “ 오빠...그러니까...강의...저 강의 들으러 가야해요. 여의도로 가야하는데...여의도

  금산빌딩이라고...국회의사당 건너편에 있어요. 그러니 그 근처에 내려다 주시면

  돼요. ”

 혜빈은 방송작가 교육원 소재지인 여의도 금산빌딩 위치까지 구체적으로 언급했는데, 상기는 일단 별다른 대꾸없이 차만 계속 운전하고 있다. 평일 낮이니 만큼 거리는 대체로 한산하니 차를 운전하는데 속도가 그리 느린편은 아니다. 다만 혜빈이 가야할곳이 여의도라면 여기가 강북지역이니 당연히 남쪽으로 가야함에도 상기의 차는 그 반대방향으로 가고있다. 처음엔 설마 다른 지름길이라도 있으려니 생각했는데, 상기의 차는 계속 엉뚱한 방향으로만 가고 있다.

 “ 오빠, 지금 어디로 가고있는거에요 ? 저 여의도로 가야 한다니까요. ”

 “ 가만히 있어 혜빈아. ”

 “ 오빠...저 강의 들으러 가야해요. 교육원 강의...여의도로 가야하는데... ”

 “ 강의보다 중요한 일이 있어 혜빈아. ”

 “ 예 ? ”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사실 혜빈이 아직까지 상기에게 방송작가 교육원에 다닌다는 말은 한적이 없다. 작가가 된다는게 남들에게 말하는것이 조금 민망한 일이 되어서인지 주변 친한 친구들에게조차도 아직 한일이 없고, 부모님만 대충 혜빈이 요즘 무슨 강의를 들으러 가는지 정도만 알고있고 심지어 이미 시집간지 수년이 넘은 언니들도 모르는 상황인데. 대체 상기는 혜빈이 강의를 들으러 가야한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한것인지 모르겠다. 밑도 끝도 없이 강의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니. 이런 상기의 말을 혜빈이 지금 어찌 이해하면 좋단 말인가. 상기의 의도를 몰라 의아해하는 가운데 이제 다소 불안해지기까지 하고 차는 어느새 서울을 빠져나가는 외곽도로로까지 접어들고 있다. 더더욱 황당해진 혜빈이 다시금 상기에게 말을 건넨다.

 “ 오빠 전 강의 들으러 가야한다니까요. ”

 “ 강의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 ”

 “ 예 ? ”

 상기의 말투는 일단 윽박지르거나 우격다짐은 분명 아닌 오히려 너무나 차분하고 온화한 그런 음성이었다. 대체 상기가 무슨 의도로 이러는 것인지는 도무지 그 속을 알수 없어 이젠 진짜 불안해하기까지 하는데 얼마를 달린 차는 서울을 벗어난 한 소도시 시가지에 있는 작은 건물앞에 선다. 그리고 혜빈을 차에서 내리게 한다.

 “ 따라와봐 혜빈아. ”

 “ 오...오빠... ”

 “ 어서... ”

 거듭 혜빈을 재촉하는 상기. 혜빈은 일단 대체 여기가 어디인지 그 지명부터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그에대한 질문부터 해보려한다. 주위를 잠시 두리번거리기까지 하는데 상기는 그런 혜빈을 거듭 재촉하며 아까 레스토랑에서 그랬던것처럼 이제 다시 혜빈의 손을 잡고 그 건물 안으로 들어서기까지 한다.

 상기가 혜빈을 데리고 들어간곳은 무슨 작은 전시관 같은것이었다. 지방자치제가 실시된 이후 각 지역별로 관광이나 수익사업 또는 기타 업적이나 홍보 목적등으로라도 이런저런 기념관이나 전시관을 자꾸 짓기도 하는 그런 시절이기도 한데, 다만 여긴 그렇게 새로 지은 전시관 같지는 않고 대충 주위를 두리번거려보니 미술관 같기도 하고 그 옆에는 아마 그 지역 특산물이거나 이런저런 전통과 관련된 유물 비슷한것도 진열되어 있었다. 어쨌든 그와같은 전시관 한 가운데 들어선 혜빈. 잠시후 불이 꺼져서 순간 혜빈은 당황했다. 헌데 갑자기 어떤 아름다운 조명 같은게 비치기 시작하더니 들어서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다름아닌 상기였다.

 “ 오...오빠... ”

 어느새 옷을 갈아입었는지 근사한 턱시도 분장까지 하고있는 상기. 흡사 일본만화 같은데서 종종 보는 근사한 정의의 사도같은 그런 모습이기까지 하다. 그런 옷차림으로 혜빈에게 다가오는 상기. 손에 들고있는 꽃다발을 건넨다.

 “ 혜빈아... ”

 “ 오빠... ”

 혜빈은 상기의 이와같은 의도를 짐작하는 것인지 못하는 것인지 여전히 당혹스럽고 멍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있는 가운데 상기가 그런 혜빈을 바라보며 말을 건넨다.

 “ 많은 시간을 고민하고 망설였었어. ”

 “ 네 ? ”

 “ 혜빈이 넌 모르겠지만...내겐 참 오랜시간 고민하고 망설인 시간이 있었어. 모

  르는 사람들은 날 아버지도 그런대로 잘 나가는 기업가시고 또 장남도 아닌 차

  남이니 무슨 경영수업을 받거나 기업을 물려받아야할 그런 사명감 같은것도 있

  는것이 아닌 그런 처지이니...그저 돈 많은걸로 제 마음대로 즐기면서 젊은시절

  마음대로 살 수 있겠구나 그렇게 말하곤 하지만... ”

 “ ...... ”

 “ 사실 나에게도 남모를 아픔과 상처가 있어... ”

 “ 오빠... ”

 이쯤되면 누가봐도 뻔한 그런대로 제법 근사한 자리를 마련해서 하는 프로포즈의 한 장면이다. 다만 혜빈으로선 교육원 강의를 들으러 빨리 가야하는 처지에 졸지에 상기에게 붙잡힌 상태에서 받게되는 꽤 얼떨떨한 프로포즈가 되어버린다. 교육원 강의에 지각까지 하면서 받게되는 프로포즈. 세상에 이런식으로 프로포즈를 받게되는 여자도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혜빈으로선 다소 황당하게 받게되는 청혼이기까지 한 셈이다. 혜빈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기의 말은 계속 이어진다.

 “ 내 본래의 소심한 성격탓인지 대학다니던 시절에도 그 이후에도 여자와의 인연

  은 별로 없었다. 그렇게 어느덧 나도 나이 서른을 넘기고. 차라리 어떨땐 결혼하

  지 않고 정말 혼자 자유분방하게 사는것도 그런대로 괜찮을것 같다는 그런 생각

  도 하곤 했었는데... ”

 “ ...... ”

 “ 이젠 정말 내 옆구리가 시려 더 견딜수가 없구나. ”

 “ 오...오빠... ”

 “ 이젠 정말 나 혼자만이 아닌 누군가와 함께 길을 걷고싶어. 인생의 길을...이

  제 혼자 쓸쓸히 하는 독백이 아는 대화를 나눌수 있는 인생을 살아가고 싶어

  그런 길을 걸어가고 싶어. 그리고 기왕이면... ”

 “ ...... ”

 “ 그 같은길을 걸어가는 상대가 너였으면 좋겠다. ”





 상기의 다소 갑작스러운 혜빈의 입장에서 더 솔직히 말하자면 얼떨떨하고 당혹스러운 프로포즈까지 받고나니 강의시간엔 결국 늦을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 혜빈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기는 혜빈이 자신의 프로포즈에 별로 감동하지도 않고 자신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이는 것 같지도 않자 다소 실망스러우면서도 한편 애가 타기까지 했다. 그런 상기에게 혜빈은 자신은 교육원 강의를 들으러 가야한다는 말만 안타깝게 거듭 입에 담았고, 하는수없이 상기는 혜빈의 부탁대로 그녀를 여의도 인근지역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이미 그때 시간은 4시가 거의 다 되어갈 무렵이었다.

 강의가 끝나는 시간인 4시가 다 되어가는 무렵이니 이쯤되면 강의를 들으러 가는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니만큼 아예 포기를 해버릴만도 한데, 그래도 결석보다는 아주늦은 지각이라도 낫다고 생각한게 혜빈의 판단인것인지 더더욱 서둘러 택시까지 잡아타고 여의도 금산빌딩에 당도했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교육원이 있는 4층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교육원 오후반 강의가 보통 오후 2시부터 4시까지이지만 그렇다고 4시 딱 정각에 마치는것은 아니고 경우에 따라선 5분이나 10분정도 시간이 초과되어 강의가 마무리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반대로 그보다 다소 빨리 끝나는 경우도 더러있고. 하지만 오늘따라 OO기 기초반 오후반 담임 김수현의 강의는 4시를 다소 넘겨 마무리가 되었다. 따라서 혜빈이 도착했을때 그때 막 수현의 강의가 끝나고 학생들이 하나하나 강의실에서 나오고 있을때였다. 수강생들은 그제서야 도착한 혜빈을 다소 어이없다는듯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고, 강의가 다 끝난것을 안 혜빈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한 상태로 있었다. 헌데 바로 그때 김수현과 마주쳤다.

 “ 넌 뭐하는 애니 ? ”

 그러잖아도 지난번 지각한 일로 김수현한테 한바탕 비아냥 섞인 꾸지람까지 들었던 혜빈 아닌가. 근데 이렇게 되었으면 김수현 한테는 아주 제대로 찍힌 셈이다. 지난번에도 지각한 혜빈을 보며 ‘너네 집 돈 많냐 ? 비싼 등록금 내고 돈 아깝지도 않은지 지각이나 하고있게... ’ 이런식으로 비아냥댔던 김수현 아닌가. 물론 혜빈이야 어쨌든 아버지가 국회의원까지 지낸 그런대로 경제적으로도 여유있고 사회적 지위도 있는 그런 집안의 딸이긴 하지만 혜빈이 그렇다고 돈 쓸데가 없어 할 일없이 교육원에 등록한것은 분명 아니다. 여하튼 이런식으로 다시한번 김수현 눈밖에 나게된 것이라 잔뜩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김수현의 빈정거리는 소리가 다시한번 나온다.

 “ 그래, 놀다가라... ”

 “ ??? ”

 이게 대체 무슨소리인지, 수현이 한 말의 의도를 몰라 혜빈은 잠시 어리둥절해하고 있는데 그런 혜빈을 깨우쳐(?) 주기라도 하기 위함인지 수현의 빈정거림은 한마디가 더 덧붙여진다.

 “ 너처럼 돈없고 할 일없는애가 피서하러 오긴 딱 좋은데 아냐 교육원이 ? 그래,

  교육원 냉방장치 아주 잘 되어 있으니 가끔 더울때 놀러와서 잘 쉬다 가라고.

  알았어 ? ”

 그렇게 비아냥거리고는 김수현은 저만치 바쁜 걸음을 재촉하며 사라져버린다. 혜빈으로선 수현에게 다시금 한번 모욕을 당한 셈이라 그 수치스러운 심정에 어쩔줄을 모르고 있다.

 그런일을 겪은 다음날 목요일 강의는 그래도 혜빈도 제시간에 맞춰 와서는 온전히 강의를 듣고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주 다시 강의가 있는 수요일이 돌아왔다. 2시에시작하는 강의를 시간에 맞춰 듣기 위해서는 점심을 먹고 집을 나서기는 좀 애매해서 혜빈은 보통 점심은 집에서 먹지 않거나 간단한 컵라면이나 빵한쪽으로 때우고 나서곤 했다. 헌데 그날따라 혜빈이 막 강의를 들으러 집을 나서야 할 시간이 되었을때쯤 그의 아버지 광현이 딸을 불렀다.

 “ 혜빈아... ”

 목소리가 대체로 중저음이기도 하고 얼마전에는 딸이 그런 강의를 듣는것에 대한 못마땅한 기색까지 내비치며 상기와 결혼 조용히 시집이나 갈것을 권유하기까지 했던 광현이기도 하지만 평상시 광현이 딸을 대하는 태도는 대체로 부드럽고 자상한 편이다. 여하튼 그런 평상시 같은 모습으로 혜빈을 부른 광현. 2층 식탁으로 혜빈을 데리고 간다.

 “ 아...아빠... ”

 그리고 어찌된 영문인지 식탁위엔 꽤 비싼 양주가 간단한 마른안주 거리와 함께 놓여져있다. 이게 대체 무슨일인가 싶어 혜빈은 다소 어리둥절해 있는 가운데 광현은 혜빈에게 앉을것을 권한다.

 “ 아빠...근데 그건... ”

 앉는것이야 뭐 어려운일은 아니지만 교육원 강의를 들으러 빨리 나가야하기도 하고, 이런 평일 대낮 식탁에 웬 술상이 놓여져있는 것인지 어리둥절하기까지 해 혜빈은 의아한 표정으로 여전히 광현을 바라보고 있고, 어서 앉으라는 아버지의 거듭되는 재촉에 자리에 앉긴 하지만 혜빈으로선 여전히 어리둥절해할수밖에 없는 가운데 광현이 식탁에 놓인 술병을 들어보이며 혜빈에게 설명을 해준다.

 “ OOO 선생이 얼마전에 스칸디나비아에 다녀와서 선물한 그곳 원산지의 고급 양

  주다. 그래서 아빠가 우리 딸에게 특별히 맛보이고 싶어 꺼내온거야. ”

 “ 아...아빠 ? ”

 OOO 선생이라면 혜빈도 아주 모르는 사람은 아니다. 아버지 광현처럼 역시 사회 지도층급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 그 역시 한때 국회의원까지 지낸 사람으로 혜빈도 알고있다. 무엇보다 80년대에 여당 국회의원을 두 번 지내고 10년간 공기업 간부를 역임한 광현임을 감안한다면 주위에 그 정도 신분의 사람들과 이런저런 친분이 있는것이야 아주 당연한 일일것이다. 헌데 그 평상시 아버지와 친분이 있는 OOO 선생이 스칸디나비아에 다녀왔든 고급 원산지 양주를 선물했든 대체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이라는 것인지 혜빈은 여전히 얼떨떨한 가운데 이미 광현은 혜빈 앞에 놓여있는 아주 큰 잔에 술을 하나가득 따라주었다.

 “ 보통 유럽은 남부는 와인이 북부는 독한 양주가 발달했다고 한다. 그건 유럽의

  기후및 전통 그리고 풍토와 관련이 있는 일이지만, 여하튼 이런 북유럽산 고급

  양주를 맛보는것도 그리 흔한 기회는 아닐것이야. ”

 “ 아...아빠... ”

 사실 혜빈은 평상시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다. 바로 얼마전 강의를 마치고 수강생들과 저녁을 먹고 2차로 술도 몇잔 마셨던 그런 혜빈이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보면 혜빈은 술 자체를 즐기는 타입과는 거리가 멀다. 어쩌다 회식이나 모임 자리에서 그저 소주나 한두잔 내지는 맥주정도만 마시는 그런 스타일인데, 그런 혜빈에게 대낮부터 대체 이 무슨 해괴한 일이란 말인가. 게다가 광현 역시 그만한 사회적 지위에 있으면서 술자리야 자연히 자주 가질수밖에 없었겠지만 무슨 애주가라던가 애호가에 속하는 그런 스타일은 분명 아니다. 헌데 그런 광현이 난데없이 무슨 유럽 양주 매니아라도 된 양 설명까지 덧붙이며 말하는 모습. 30년을 아버지를 지켜본 딸에게조차 낯선 모습이다. 무엇보다 지금 혜빈은 방송작가 교육원에 작가수업을 받으러 가야할 처지이지 아버지한테 술강의(?)를 들어야할 상황이 아니지 않는가. 헌데 그런 혜빈에게 거듭 그 술을 들것을 권하는 아버지. 혜빈은 처음엔 마지못해 한두모금 마시는둥 마는둥 했지만, 아버지의 거듭되는 권유에 결국 그 한잔을 다 마시고 말았다. 헌데 한잔을 다 비우고 나자 광현은 그 비싼 고급양주를 다시 하나가득 따라준다. 일반적으로 양주는 얼음을 타 마시는 경우가 많은데 얼음도 타지 않은 생 양주롤 술도 약하고 즐기는 편도 아닌 딸에게 연거푸 두잔을 먹이고 있는것이다.



- 3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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