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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돌아가셨대요...... 정치,시사



 1979년 10월 26일.


 아니, 26일이 아니라 정확히 그 다음날인 27일 오후의 일이다. 그 당시 서울등 대도시의 초등학교(* 그 당시엔 국민학교)들은 베이비붐 시대에 자라난 아이들이 학교를 다닐때가 되어 웬만한 학교는 한반에 평균 60-70명 이상 게다가 그것만으로도 그 많은 학생들을 다 수용하지 못해 웬만한 초등학교 저학년들은 오전,오후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하는 ‘2부제 수업’을 실시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2부제 수업’을 실시하는 경우 한 교실을 두 학급이 사용하며 한주 또는 격주로 두 학급이 돌아가며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진행했었다.


 그때 우리반이 오후반 수업을 해야하는 주였고, 그렇더라도 1학년 오후반들은 대개 오후 한시정도면 수업을 시작하였다. 헌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날은 오후 두시가 다 되어가도록 선생님들이 수업에 들어오시지 않으셨다. - 오전에 있었을법한 그 심상찮았을 사회 분위기와 어수선한 어른들의 모습을 1학년 정도 어린 학생들의 대다수는 그리 심각하게 인지하지 못했던것 같다. - 그러다 두시도 한참을 넘긴 시간때쯤 담임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대통령이...돌아가셨대요...’


 초등학교 1학년 정도 되는 어린아이들이 ‘대통령의 서거’가 어떤 의미인지 얼마나 제대로 받아들일수 있었을까. 다만 선생님께서 사뭇 침울하면서도 비장한 어조로 전해주신 그 ‘대통령의 서거’ 소식은 그래도 눈치좀 있고 약삭빠른 아이들은 ‘나라에 큰일이 벌어졌나보구나.’ 뭐 대충 그 정도로 받아들였던것 같다. - 훗날 자전적 성격이 다소 들어간 몇몇 소설엔 그때의 분위기를 선생님께서 울면서 들어오셔서는 ‘어린이 여러분 !!! 대통령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대요 !!! 엉엉엉~~~!!!’ 하면서 한바탕 난리를 치는 분위기로 묘사했는데, 그건 소설이라 다소 과장되게 묘사한것이고 실제 그날 교실에 들어오셨던 OO 국민학교 1학년 O반 담임 OOO 선생님의 목소리는 대체로 침울하면서도 비장하게 느껴졌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을 그렇게 초등학교 1학년 어린 나이에 접했었다. 하지만 어린 나이임에도 ‘대통령의 죽음’이란 확실히 보통아닌 충격적인 소식이라 ‘박정희’란 이름은 한동안 내 뇌리에서 쉬이 떠나지를 않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시간이 다소 지나고 조금씩 철이들기 시작하고 세상물정을 알아가기 시작하면서,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박정희’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갖기 시작했었다. 무엇보다 18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았던 재위기간, 게다가 그 박대통령 서거 직후 사회 전체의 침울하고 침통한 분위기. 박대통령을 추도하는 노래 가사처럼 ‘태산이 무너지고 강물이 갈라진듯’ 하던 그 사회분위기가 ‘대관절 박정희가 어떤 인물이길래 ?’하는 궁금함을 내게 깊숙이 박아놓고 갔던것 같고, 그후 대략 한 중학교때부터이던가 종종 아버지를 졸라서 박정희 대통령 시절을 다룬 책들을 들입다 구해 읽어보기 시작했었다. ‘김교식의 제3공화국’, ‘이영신의 격동 30년’, ‘궁정동 총소리’, ‘청와대 비서실’, ‘혁명과 우상’, ‘남산의 부장들’ 대충 그런 서책들. 그렇게 중학교때부터 대략 20대 중반까지의 약 10년의 상당한 기간을 나는 ‘박정희를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었던것 같다.


 그리고 느낀 박정희는 한마디로 쉽게 요약할수 없는 인물이란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가 한국 현대사에 남긴 궤적이 너무나 깊고 굵었기에, 그의 공과가 너무나 뚜렷하여 지금까지도 그에 대한 찬반 양론은 여전히 격렬하게 부딪히고 있기에 ‘박정희를 어찌 평가하는가 ?’ 하는 물음에 솔직히 짧고 간단하게 대답하기는 힘들다.


 어떤이들은 박정희를 마치 세종대왕 이상가는 성군이었노라 추앙하기도 한다. 반면 또 어떤이들은 박정희를 그저 희대의 독재자였을뿐이라 극렬하게 매도하고 비난하기도 한다. 하지만 필자의 심정을 솔직히 말하자면 저 양극단의 평가 모두 박정희를 제대로 평가하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저와같은 양 극단은 그야말로 각자 개인의 편협한 정치관,이념관에서 나오는 견해일뿐 ‘인간 박정희’, 혹은 ‘대통령 박정희’를 제대로 말하고 있는것은 아닌것 같다.


 어떤이들은 이런말을 하기도 한다. 박정희 시절의 경제발전은 그 시절 피땀흘린 노동자와 농민의 고생 덕분에 이루어진것이지 박정희 한 사람의 공로가 아니라고. 하지만 이것은 좀 바보같은 이야기다. 그런식으로 따지면 임진왜란때 왜적을 물리친 이순신 장군의 노량해전이나 명량해전같은 눈부신 전과도 이순신 장군 한 사람의 공적이 아닌 그때 전장에서 죽어간 수많은 무명의 병사들 덕분이라고 말해야하는것 아닌가 ? 마찬가지로 귀주대첩때 거란족을 물리친 강감찬, 살수대첩때 수나라 군사들을 몰살시킨 을지문덕 장군. 모두 비슷한 논리를 대입해야 되겠다. 귀주대첩이나 살수대첩 같은 전쟁도 그 무슨 강감찬이니 을지문덕이니 하는 명장 한 사람의 탁월한 리더쉽과 전략 때문에 이루어진것이 아니라 전장에서 죽어간 무수한 병사들 개개인에게 모두 공을 돌려야 하는것이라고.


 박정희 시절의 경제발전이 성공할수 있었던것은 한마디로 나라의 정책방향과 기조를 잘 잡았기 때문이다. 수출입국,중화학공업 육성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나 많은 이들의 뇌리에 생생하게 박힌 새마을 운동과 ‘잘살아보세’라는 구호. 그리고 그와같은 정책을 제대로 수행할수 있는 참모와 관료들을 제대로 등용해서 썼기에 이루어질수 있었던것인데 어찌 이를 박정희의 공로가 아니라 말할수 있겠는가. 전쟁터에는 무수한 병사의 희생이 잇따르게 마련이다. 하지만 전쟁에서 승리하려거든 유능한 장수의 탁월한 전략과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는것은 상식선상의 이야기 아닌가. 따라서 박정희 시절의 경제발전을 박정희의 공이 아닌 피땀흘린 노동자,농민들의 공이라 하는것은 단순히 박대통령을 평가절하하고 폄하하기 위한 넋두리에 지나지 않는다.


 또 어떤이는 그런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 시절엔 전 세계적으로 경제성장률이 상승추세였기 때문에 그때 경제발전을 이루지 못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것이라고. 하지만 이 또한 납득 안 가는 이야기다. 굳이 학교에 비유하자면 아무리 반평균이 우수한 학급이라도 꼴찌하는 학생은 나오기 마련이고, 반평균이 떨어지는 학급이라도 열심히해서 우등상을 타는 학생도 나오기 마련이다. 헌데 단순히 세계적인 경제성장률이 상승세였기 때문에 박정희 시절의 경제성장도 단지 운이 좋아서 그리된것이라 말하는것도 너무나 단편적인 견해다.


 박정희는 무엇보다 동서 양 진영이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로 팽팽하게 맞서던 그 시절에 무엇보다 남과북으로 갈라진 분단국가로서 공산주의에 먹히지 않으려면 우선 경제부터 성장시켜야 한다는 기본적인 철학이 있었던 인물이다. 그랬기에 비록 비난의 여론이 있을지언정 민주주의는 잠시 접어두고 경제성장에 용왕매진 했던것이다. 과연 이것이 박정희가 아닌 다른 정치지도자가 대통령이었다면 할수 있는 일이었을까. 아닌말로 5.16이 일어나지 않고, 신구파가 그토록 반목하는 민주당 정권이 지속되었더라면 어찌되었을까 ? 특히 진보진영에서 종종 하는 이야기가 60-70년대는 북한이 오히려 경제적으로 남한보다 앞섰다던데, 그런식으로라면 그야말로 ‘배고픈 민주주의’를 하는 남조선보다는 독재를 할 지언정 인민은 굶주리게하지 않은 북한의 김일성 독재가 더 나은 상황이 되는것 아닌가. 이 모순되는 상황은 어찌 설명할것인가 ?


 하지만 박정희를 그 무슨 세종대왕과 동급으로까지 추앙하는 견해도 필자는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세종대왕도 해결하지 못한 보리고개를 해결한 대통령.’ 일리있는 말같이 들리나, 가령 유럽의 경우도 산업화가 이루어지기전까지는 불과 몇퍼센트에 달하는 귀족들만 잘먹고 잘살았을뿐, 나머지 대다수 노동자와 농민들은 피폐하고 가난하게 살았다는것은 역사를 조금이라도 배운 사람이라면 상식으로 알고있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근대화가 절실했던 시절 박정희가 있었던것은 분명 행운이었지만, 보릿고개(가난)를 해결하지 못한것은 산업화 이전에는 유럽이든 다른 어느나라든 사정은 크게 다를바가 없었다. 따라서 박정희를 세종대왕에까지 견주며 추앙하는것도 그다지 공정한 평가는 못되는것 같다.


 따라서 필자가 꽤 오래전부터 박정희에 비유해왔던것이 조선왕조의 기틀을 다진 ‘태종 이방원’이나 마찬가지로 고려의 기틀을 다진 ‘광종’임금이다. 이들과 박정희는 확실히 공통점이 있다.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거나 적장자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정통성에는 분명 취약성이 있으나 한 왕조가 수백년간 이어질수 있도록 한 그 기반을 다진 임금. 그런면에서 마찬가지로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산업화의 기반을 다진 박정희 대통령은 확실히 조선의 ‘태종 이방원’이나 고려시대 ‘광종’과 분명 공통점이 있다. 공과(功過)와 그로인한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린다는 점에서도 박정희는 특히 ‘태종 이방원’과 공통점이 많다.


 어쨌거나 그 박정희가 신임하던 측근의 손에 의해 세상을 떠난 10.26 사태가 있은지도 어느덧 35년 세월이 지났다. 훗날 나온 박정희 시절을 다룬 어떤 서책들에선 그 당시 박대통령 비서를 지냈던 몇몇 이들이 이런 증언을 하기도 해 눈길이 간다. 사실 박정희는 70년대 후반부 무렵부터 퇴임구상을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것도 꽤나 구체적으로 ‘핵개발이 성공하면 그 핵무기를 온 국민에게 공개하고 이제 우리도 자주국방을 하게 되었다고 천명한뒤 물러날것.’이라고. 사실이라면 그 나름대로 꽤나 근사한 퇴임식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잇따르는 비서관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그 퇴임시기를 대략 81-82년 정도로 잡았던것 같고, 그와같은 고백을 비서들에게 한것을 78-79년 정도로 본다면 박대통령은 그 무렵(70년대후반)부터 한 3-4년 정도 특히 핵개발에 좀더 혼신을 쏟은뒤 온 국민의 박수를 받으며 영광스럽게 퇴임하는 그와같은 그림을 그렸던것 같다.


 하지만 10.26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본다면, 만약 김재규의 그와같은 거사없이 박정희 시절이 그대로 갔다면 박대통령이 머릿속으로 구상했던 사뭇 근사하고 온전해보이는 그와같은 퇴임식의 모습은 이루어지기 힘들었을것 같다. 79년 가을에 벌어진 ‘부마사태’는 생각보다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찮았고,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사건으로 인해 야당인 신민당 역시 의원직 총사퇴를 선언하며 강경투쟁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러한 정국속에서 10.26이란 파국 없이 박정희 시절이 계속 갔다면 박대통령은 80년대 초반까지 가보지도 못하고 더더욱 불명예스러운 퇴진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것이 필자의 조심스러운 상상이자 추측이다. (* 만약 역사를 관장하는 신이 정말 저 어딘가에 존재한다면, 혹시 그가 김재규의 손을 빌어 1979년 10월 26일 밤을 마지막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시대를 막을 내리게 한것은 아닐까 ? 역사가 박정희에게 내려준 소명. 그것이 바로 딱 그날까지였던것 같다.)


 어찌되었거나 그토록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박정희의 시대가 막을 내린지도 어느덧 35년 시절. 그야말로 한세대 이상이 지난셈이고, 이제 박정희 시절을 생생하게 기억할만한 사람들이라면 최소한 50대에는 접어들었을 나이일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끊이지 않는 박대통령 평가에 대한 논란은 참으로 많은것을 생각하게 한다.


 박정희는 과연 보릿고개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신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성군일까 ? 아니면 18년 철권통치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억압한 희대의 독재자에 불과한 것일까. 사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평가는 수백 수천년전의 일을 가지고도 아직까지 학계에서 그 평가가 엇갈리는 경우가 수두룩하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불과 30-40여년전의 일인 박정희 시대에 대한 평가와 논란도 그렇게 쉽게 수그러들지는 않을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박정희를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성군으로까지 추앙하는 평가도, 그를 무작정 희대의 독재자라 매도하는것도 그와 그가 처해있던 시대상황을 제대로 이해하는데는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것 같다. 차라리 그의 시대의 명암(明暗) 그의 시대의 공과(功過)를 모두 겸허히 인정하는데서 박정희를 제대로 이해하는길이 열리지는 않을까 그와같은 생각을 가끔씩은 해본다.


 지난 십여년 우리사회는 좌우 양진영의 극심한 이념갈등과 정치과잉의 시대상황속에서 시달려왔다. 그리고 그 정치갈등,이념갈등의 핵심이 되는 요소 몇가지가 있는데 바로 북한문제와 대북정책, 또는 6.25나 해방정국에서 있었던 4.3이나 여순사건과 같은 평가, 혹은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평가 그리고 이승만,박정희 두 전직대통령에 대한 평가등이다. 한마디로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대한 평가도 좌우 양 극단의 갈등을 유발시키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렇기에 차라리 이쯤에서 박정희를 좀 더 공정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해보는것도 좌우 양 진영의 소통을 이루는 하나의 해법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런 제안을 해본다. 진보는 박정희 시절의 경제개발이 오늘날 우리의 번영의 기반을 닦는 토대가 되었음을 겸허히 인정하고, 보수는 반면 유신시대를 비롯한 박정희 시대의 인권탄압과 민주화 요구에 대한 억압으로 탄압받고 고통받았던 이들도 분명 있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겸손한 자세를 보여주면 안되는 것일까. 단지 그것 하나로 지금 우리사회가 앓고있는 이 모든 극심한 정치갈등,이념갈등이 모두 사그라들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박정희 그 한분에 대한 조금이라도 공정하고 객관적인 평가가 좌우 양 진영에 소통의 길을 여는 하나의 실마리와 같은 해법은 되지 않을가 하는 생각에서 이런 제안을 해보는 바이다.






덧글

  • 파파라치 2014/10/26 09:39 # 답글

    박까와 박빠 모두 실체적 진실에는 관심없고 그저 박정희의 이미지를 정치적으로 이용해먹는데만 관심있기 때문에 그런 시도는 별 환영 못받을 겁니다.
  • 훼드라 2014/10/27 11:14 #

    댓글울렁증이 좀 있는 사람이라서 일일이 답글을 달기가
    사실 좀 쉽지 않음을 양해바랍니다
    어쨌든 제가 말하고픈 이야기의 본질은...작금의 이 정치과잉,이념과잉의
    시대가 박정희에 대한 공정한 평가조차도 쉽지 않게 만들고 있는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입니다.

    박정희에 대한 양 극단의 평가는 이미 본문에서 논할만큼 논했으니 생략하기로
    하고요...어쨌든 서로의 생각의 다른 부분에 대한 조금의 이해와 소통이 있는
    그런 사회가 되길 바랍니다
  • 2014/10/26 10:42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4/10/27 11:15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PPP 2014/10/26 10:49 # 삭제 답글

    정확하게 하자면 박정희 개인의 공보다는 미국의 공산화 저지를 위한 에치슨 라인에 들어가서 경제지원을 받았고 이게 주효했죠, 뭐 대다수의 후진국들은 이런 밥상에 숟가락 까지 쥐어줘도 못받아 먹고 망하는 경우도 있지만, 결국 박정희의 경제모델은 상당히 문제점이 있는 계획이었고 국가개발 집중투자 개념은 원체 스탈린이나 무솔리니 스타일의 국가중심 중공업 위주 경제개발 근간을 이룹니다. 뭐 사실 박정희가 기반을 닦은건 맞지만 글쎄 과연 그리 찬양을 해야할 인물 인가는 매우 부정적이죠 걍 프랑코 스탈린 히틀러 무솔리니 같은 경제발전 지향형 독재자 모델에 가까우니 뭐 아예 못받아 먹는 ㅂㅅ보다 그래도 괜찮겠다 싶지만
  • 훼드라 2014/10/27 11:16 #

    미국의 경제지원도 어느정도 한몫했다는데 동의하지만
    적어도 60-70년대 박정희의 정책기조가 잘못되었다는데는 동의하기 힘들군요


  • 재규어 2014/10/26 11:22 # 삭제 답글

    내가 발터를 어디에 뒀더라...
  • 훼드라 2014/10/27 11:18 #

    ????
  • metalite 2014/10/26 12:20 # 답글

    일반적인 역사면 영웅중심주의를 중점적으로 서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역사학에서는 한명의 영웅이 역사의 주체가 아니라 일반 민중도 역사의 주체로 보죠. 그렇기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이 물론 경제발전에 어느 정도 기여한 것이 사실이라고 하나 그 시절 피땀흘린 노동자와 농민의 역할을 무시해서도 안됩니다. 마찬가지로 이순신 장군에 대한 평가도 뛰어난 지휘관으로 받아야 하는거지 당시 전투를 실제로 한 병사들을 무시해서도 안되고요. 그렇기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서 당시 경제적발전 성과 전부를 박정희 대통령의 개인적인 공로로 치부되어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 훼드라 2014/10/27 11:18 #

    하지만 구심점은 결국 박대통령이란 이야기죠.
    물론 그렇다고해서 박정희의 주변에서 정책개발을 하고 조언을
    한 수많은 경제참모나 관료들...또는 현장에서 발로뛴 수만은
    기업인들...그리고 수많은 산업의 역군둘(소위 말하는 노동자들)
    확실히 그 시절 보릿고개를 걱정하던 나라를 이만큼 일으켜놓은
    그 시절의 크고작은 모두가 공로자들입니다.

    하지만 결국 그 구심점은 박정희군요...
  • metalite 2014/10/27 22:31 #

    박정희 대통령이 한 구심점 역할은 빠른 경제 성장을 가능하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빠르지 않지만 이미 계속 경제발전이 지속적으로 성장할 가능성은 너무나도 산재랬다고 봅니다. 반드시 박정희 대통령이 구심점을 하지 않았어도 다른 구심점이 나타났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건 제가 역사를 필연으로 봐서 그렇게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지만요.
  • 백범 2014/10/27 01:45 # 답글

    서양의 백고릴라 오랑캐들은 13일의 금요일 공포증이 있는데, 한국인들은 26일 공포증이 생길 듯 합니다.

    6월 26일 백범 김구 피격운명일
    7월 26일 심헌 성재기 사고사망일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피격운명일

    어??? 왜 하필이면 다들 26일에 비명횡사를?
  • 훼드라 2014/10/27 11:16 #

    백범 김구선생과 박정희 대통령은 그렇다치고...
    뜬금없이 성재기씨가 왜 ??? -.-
  • 훼드라 2014/10/28 02:34 # 답글

    metalite / 70년대 초,중반 이후는 확실히 박정희 이후를 대체할만한 대안이 있었습니다.
    김종필씨도 있었고...경제전문가에다 위기관리 능력도 어느정도 있는 신현확씨도 있고...
    (10.26 발생 직후 다른 장관들은 상황파악이 안 돼 우왕좌왕하고 있을때 바로 김계원 비서실장
    을 불러 '비서실장은 대통령과 늘 같이 다니는 사람인데 대통령이 어찌되었는지 모른다는게
    말이되냐 ? 어서 사실대로 말하라 !'고 다그친게 신현확 부총리입니다)

    박정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중 상당수가 아쉬워하는 부분이 바로
    그 부분입니다. 박정희가 3선까지만 하고 김종필씨든 신현확씨든 괜찮은 사람
    을 후계자로 지목 그 자리 물러나고...자신은 상왕노릇(* 그 자체도 민주사회에서
    원론적으로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지만요)하면서 충분히 편히 여생 보낼수 있었는데
    왜 쓸데없이 유신체제까지 만들어 그렇게 비운의 총탄에 갔는지 모르겠다는...

    만약 박정희가 장기집권으로 갈 생각을 하지않고 70년대 초,중반 정도에서 후계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물러났더라면...그런 아쉬움이 생기는게 이미 그땐 박정희 다음을
    대체할만한 대안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 하지만 60년대에는 과연 박정희를 대체할만한 다른 대안이 있었을지는 의문이군요.
  • 훼드라 2014/10/28 02:37 # 답글

    metalite / '박정희가 후계자 양성에 실패했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계신데
    박정희 자신은 후계자 양성을 하지 않았거나, 혹은 후계 운운하는 이들이 생기는
    그 자체를 용납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적어도 70년대 초,중반 이후는 박정희 이후
    를 생각해볼만한 대안이 없었던것은 아닙니다.

    박정희가 유신체제를 만들었던 이유로는 대개 김일성 같은식의 1인지배를 꿈꾸었다
    통일대통령을 꿈꾸었다...그런식의 분석이 나오기도 하지만...다 나름 이유있는 분석
    이지만 한편으론 아마 71년 대선에서 40대의 젊은 김대중이 생각보다 높은 득표력을
    보인데 위기감을 느꼈던게 아닌가하는 생각도 드네요.

    과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다음 대선에 나왔을때...김대중이니 김영삼이니 하는
    40대 기수(70년대)들과 맞붙어 이길수 있을까...어쩜 그런 자신이 없었기에...그 모든
    것이 복합되어...유신체제로 가는 무리수를 두었던게 아닐까요 ?
  • 훼드라 2014/11/14 14:36 # 답글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한다. 하지만 그를 김일성 숭배하듯 추앙하는것은 반대한다.
    아마 오늘이 박정희 대통령이 태어난 날인가 본데 그걸 갖고 어느 종편에서 약간
    유난을 떨기에 한마디 함. 이미 돌아가신분 서거한날 추도하면 되었지 생신까지
    기릴일은 아니지 않나.

    그럴거면 공평하게 김대중,노무현 생일도 같이 챙기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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