훼드라의 세상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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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인 팬픽 - 한지민 (3) 기타 팬픽 (연예인, 그외)



                                 부제 : 정순왕후 스토리 현대판 버전 재해석



 룸살롱 여자였던 지민이 기선의 아내가 된것이 2년 몇 개월 전의 일이고, 기선의 간질,발작증세가 있는 외아들 규현이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것이 정확히 1년전의 일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1년이 지나 지민은 그렇게 결혼한 남편 기선이 세상을 떠나는 비운을 맞아야만 했다. 나이많은 회장인 기선이 천년만년 살 수 있을것이라 생각한것은 아니었지만, 결혼 2년만의 갑작스러운 남편 사망은 너무나 충격적이고 쉬이 받아들이고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황기선 회장이 10여년 정도는 더 살 수 있으려니 막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것이다. 하지만 기선은 지민을 자신의 세 번째 아내로 맞아들인 2년만에  향년 75세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기선의 장례를 치르고 며칠뒤 망연자실하게 있는 지민을 찾아온것은 1년전 경원그룹 2대 회장으로 취임한 노영민과 그의 법률대리인인 박홍섭 변호사였다. 영민은 대체로 담담한 어조로 자신이 찾아온 용무에 대해서만 사무적으로 말을 건넸다.

 “ 우선 제가 황회장님 뒤를 이어 경원그룹 2대 회장직을 승계한것은 이미 1년전

  에 주주총회의 합법적 의결을 거쳐 이루어진 일이고... ”

 아직 남편 기선을 잃은 충격에서 채 벗어나지 못해 망연자실한 상태인 지민은 별다른 대꾸없이 묵묵히 영민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어쩌면 그의 말이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일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영민은 그와같은 지민의 심리상태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듯 자신의 용건만 계속 덤덤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 회장님의 이 집을 비롯한 회장님 사재(私財)야 글자그대로 회장님 사유재산이니

  저희가 간섭할 이유도 없고 권한도 없습니다. 다만... ”

 “ ...... ”

 “ 회장님 몫으로 남아있는 저희 경원그룹 주식의 처분 문제는 상의를 드려야 할

  것이기 때문에 그 문제를 좀 상의하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회장님께서 이미 1년

  전 저희 경원그룹의 명예회장으로 물러나신 상태이긴 하지만, 주식지분은 아직까

  지 저희 경원그룹에서 가장 많은 지분을 갖고계신 최대주주이십니다. 헌데 이제

  저와같이 회장님께서 세상을 떠나셨으니... ”

 영민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는것인지 못하는것인지 지민은 여전히 별다른 대꾸가 없이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50대 초반의 작은 체구의 노영민은 목소리는 원래 그런것인지 사무적이고 무뚝뚝한 느낌이 거듭 들었다. 그의 설명이 계속된다.

 “ 합법적으로는 어쨌든 주식도 사유재산이니만큼 상속권은 사모님께 있는걸로 알

  고 있습니다. 다만... ”

 “ ...... ”

 “ 주식이란게 어쨌든 회사에서 주주총회의 의결권도 가지며 개인 재산으로서의

  역할도 있는 그런것입니다. 헌데 아직 나이어리신 사모님께서 회장님의 주식을

  그대로 상속받아 저희 회사의 의결권을 행사하실수 있으실련지 그게 염려되어

  서입니다. ”

 지민은 여전히 별다른 말이 없었다. 아무리 기선의 아내라지만 불과 2년여전까진 룸살롱에서 일하던 고등학교 중퇴 학력의 여자다. 그녀가 과연 이런 어려운 이야기를 얼마나 이해할수 있을것이며, 또 이해한다 치더라도 그런 여자가 경원같은 대기업의 주주총회라도 참석 무슨 의결권 행사를 할 수 있을만한 그런 능력이 되지도 않을것 아닌가. 영민도 기선의 세 번째 부인인 어린 아내 지민의 과거를 모르는 사람은 아니기에 어쩌면 그와같은 지민의 허점을 파고 드는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영민은 제법 나이어린 사모님 지민을 염려하는듯한 말투로 그녀를 설득하고 있었다.

 “ 단도직입적으로 말씀을 드리자면...어차피 사모님께서 의결권을 행사하실만한 그

  럴 능력이 되는분이 아니시니만큼...회장님이 남기신 주식을...현재 2대회장으로

  있는 제게 양도하시는게 어떨까 그 말씀을 드리는것입니다. 주식이란게...그리고

  주주총회라는게 알고보면 참 어렵고 까다로운 일입니다. 그러니...회장님의 경원

  그룹 잔여주식. 그냥 제게 양도하시는게 낫지 않겠습니까 ? ”

 “ 저...저기... ”

 근데 어찌되었거나 회장의 주식을 노영민에게 양도하라는 말을 들으니 좀 쉽게 승복이 안 되는 것일까. 이의라도 제기하고픈 듯한 표정으로 지민이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영민은 순간 약간 긴장이 되었으나 설마 별일이야 있으랴 하는 표정으로 지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이 이어진다.

 “ 아저씨한테 회장님 주식을 양도하라는것은...무슨 말씀인지는 다 알아듣겠는데요

  다만... ”

 현재 공식적으로 경원그룹 2대 회장인 노영민을 지민은 ‘아저씨’라 호칭했다. 회장이란 직책을 아주 모르진 않을것임에도 그와같은 호칭을 붙이기가 쉽지 않은것일까. 지민은 여하튼 나이로는 아버지뻘은 될 50대 초반의 노회장에게 ‘아저씨’라고 부른것이다. 여하튼 그 부분은 영민이 별로 괘념할 부분은 아니니 적당히 넘어갔고 다만 지민의 부탁이 순간 영민을 좀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 그냥...제 지분 조금만 남겨주시면 안 돼요 ? 어쨌든 회장님 재산이고 상속권이

  제게 있다면...조...조금만 제 몫 남겨주시면 안 돼요 ? ”

 “ 아니 ??? 허허허...아니 뭐 얼마나 필요하신데요 ? 한 10주 ??? 아니면 100주

  ??? ”

 “ 그...그게... ”

 10주나 100주가 대체 어느정도나 되는 양인지 지민으로선 쉽게 가늠이 안 되었다. 그런 지민을 영민은 마치 철없는 막내딸 대하듯 만만하게 굴고 있었고, 지민의 그와같은 천진난만하고 순진한 모습이 귀엽고 우습게까지 느껴져 실소를 터트리기까지 했다. 여하튼 회장님 주식을 전부 다 영민에게 양도한다는것은 좀 아쉽고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지 조금은 자신에게 남겨달라는 말을 한 지민에게 영민은 제법 친절한 아저씨처럼 말을 건넨다.

 “ 뭐...그럼 한 10퍼센트 정도는 남겨드릴까요 ? 그럼 되나요 ? ”

 “ 네...뭐...그...그렇게 해 주세요. ”

 10퍼센트. 대체 1년전 명예회장으로 물러난 황기선 회장의 경원그룹 잔여주식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몫을 조금은 남겨달라는 지민의 말에 영민은 한 10퍼센트 정도면 되겠냐는 말을 했고, 그 말에 지민은 대체로 수긍하는 반응을 보였다. 하긴 어차피 황기선 회장의 다른 사유재산들이야 현실적으로 지민에게 상속권이 있어 그녀가 물려받게 될 것이고, 애초에 황회장이 지민과 결혼하면서 훗날 지민의 몫으로 따로 남겨주겠다는 유산도 있었다. 그걸 생각해보면 지민 입장에서야 어차피 그 무슨 경원그룹 주식에게까지 특별히 욕심을 부릴 이유는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무슨 기업경영이나 그런것에 대해 아는 여자도 아니니만큼 다만 주식도 어쨌든 재산의 개념이 된다는 상식은 있는 여자이기 때문에. 그저 조금만 자기 몫을 달라는 요구를 한 것 뿐이다. 그 말에 영민은 10퍼센트 정도만 남겨주랴는 말을 한 것이고 지민이 거기에 수긍 황기선 회장의 잔여주식 배분 문제도 일단 그와같이 마무리가 되었다.



 황기선 회장의 장례절차가 모두 마무리되고, 황회장의 회사 잔여주식 문제도 노영민 신임 회장과 그렇게 정리절차가 모두 마무리된뒤, 집에는 이제 지민과 기선의 여섯 살난 손자 황병일. 그렇게 단 두 식구만 남게 되었다. 원래는 명예회장으로 물러난 황회장의 차를 운전하는 기사와 가사일을 돌보는 파출부가 매일같이 출퇴근을 하긴 했지만, 이미 황회장이 세상을 떠난 이상 운전기사는 필요가 없어졌고, 가사일의 경우엔 그 전부터 지민이 손수 돌보는 경우가 많아져 파출부를 두는게 의미가 없어진것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였다. 따라서 지민이 직접 기사와 파출부에겐 이제 더 이상 나오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해 이제 집의 식구라곤 정말 지민과 병일 달랑 두 식구만 남게 된 것이다.

 지민은 병일이 쓰는 방이 있는 3층으로 올라가 보았다. 밤늦은 시간이라 아이는 새근새근 잠이 들어있다. 여섯 살짜리 아이의 방이니 거기 무슨 특별한 무엇이 있을것은 아니고, 다만 아이는 어린이용 작은 침대 한 가운데서 새근새근 잠이 들어있고 방 한쪽엔 옷장과 이불장. 그리고 아이가 동화책 읽는것을 좋아해 방 또다른 한쪽에 놓인 작은 책장에 동화책이 다소 많이 진열되어 있을뿐이다. 지민은 무표정한 얼굴로 잠들어있는 병일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순간 지민에게 이미 세상을 떠난 황기선 회장이 자신에게 병일의 문제를 부탁하며 한 이야기들이 다시금 머릿속에 떠올려졌다. 황회장의 외아들로 어릴때부터 정신이 성치 못했다는 아들 규현이 갑작스러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황회장이 며느리인 혜경보고는 새출발을 권하며 자신의 집에 맡기고 가라고 한 아이. 사실 황회장 정도의 나이라면 가문이라던가 대를 잇는 문제에 충분히 신경을 쓰고도 남을 세대긴 하다. 따라서 그런쪽으로 황회장의 의도야 충분히 이해가 갈법한 부분이긴 하고, 그러면서 기선은 지민에겐 따로 일개 유흥업소 여자였던 자신을 신데렐라로 만들어준 일을 상기시기며 그 은혜에 보답하고 싶거든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손자이자 이 집안의 3대독자인 병일이를 좀 맡아 돌봐달라는 부탁을 했었다.

 기선의 그와같은 부탁에 지민은 진심으로 그리 하겠노라 답했지만,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지민은 설마 자신이 병일을 책임지는 시간이 되면 얼마나 되랴 생각했었다. 실제 70대 중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기선을 지민은 그래도 앞으로 10년 정도는 더 사시려니 막연히 생각했었고, 그때쯤 되면 병일이도 어느덧 사춘기 소년이 되어있을테니 그때쯤이면 저 나름대로의 사고와 가치관도 자리잡아갈 것이고, 또 제 친엄마도 멀쩡히 살아있으니 만큼 그때쯤되면 자신이 알아서 친엄마에게 연락을 취하거나 교류를 하지도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자신이 병일이를 책임지는 문제를 그렇게 크게 부담스럽게 여기지 않았었는데, 막상 황기선 회장이 세상을 떠나고 나니 지민도 막막해지는 심정을 쉬이 지울수가 없었다.

 이렇게된 이상 자신은 병일을 과연 언제까지 책임져야 하는것일까. 성인이 될 때까지 ? 아니면 그 이후 병일이가 좋은 여자를 만나 장가라도 가는날까지 ? 그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 한숨이 나왔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적어도 앞으로의 20년 시간. 비록 지금은 아직 여섯 살난 어린아이긴 하지만 자신이 이 아이를 그때까지 책임질수 있을까 그 생각을 하니 쉽게 자신감이 생기지 않고 있었다. 그 대신 황회장이 생전에 자신에게 했던 또다른 이야기가 떠올려졌다.

 “ 허허허...지민아... ”

 집 앞 정원 테이블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며 예하 그 너털웃음으로 지민을 바라보던 기선. 지민은 테이블에 놓인 음료수 한모금을 살포시 들며 기선을 바라보았고, 기선이 그런 지민에게 말을 건넸다.

 “ 지민이 넌 족벌세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 ”

 “ 예 ? ”

 기선의 그와같이 꺼낸 말로 미루어보건대 기업들의 소위 족벌세습 경영 같은 문제를 두고 하는 이야기같은데, 하지만 지민은 그런 문제에 대해 별다른 깊은 생각이나 고민을 해본적이 없어서인지 그냥 단편적으로 짤막하게 대답했다.

 “ 글쎄요...전 뭐...그런거 별로 안 좋은것 같아요. ”

 “ 허허허...그래 ? ”

 기선은 그런 지민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고, 그러자 지민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는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황기선도 어쨌든 국내에서 어느정도 알아주는 재벌회장이고, 게다가 정신이 성치못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얼마전 사고로 떠나보낸뒤 지금은 하나남은 손자를 자신과 기선이 돌보고 있는 상태가 아닌가. 그런 상태에서 족벌세습 문제를 언급했다면 뭔가 다른 의미심장한 의도가 있는것이 분명한데, 헌데 그 속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신이 너무 가볍게 이야기를 꺼낸것같다. 실수임을 깨닫고 바로 사과의 말을 입에 올리고 하지만 기선은 괜찮다는듯 빙긋이 미소를 지어보인뒤 말을 이어간다.

 “ 허허허...그래 뭐...일반적으로는 세상이 말하기를... ”

 “ ...... ”

 “ 보통 족벌세습경영 같은것은 안좋은 것이라 말하곤 하지. 특히 그 무슨 진보

  니 재야니 그런것 하는 친구들은 그런 경영의 문제를 더더욱 극렬하게 비난하

  기도 하고...또 한편으론 그런식의 족벌세습이 옛날 왕조시대 왕실에서 자기 피

  붙이한테 왕위를 물려주는것과 뭐가 다르냐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뭐 다 그런대로 납득이 가는 이야기야. ”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는 기선. 회한의 눈빛이 서려있다.

 “ 하지만 재벌회장 입장에선 그것 또한 쉽지 않은일이야. 잘 생각해보면...사실

  재벌회장의 아들,손자쯤 되는 사람이 아버지 회사를 물려받지 않고 다른 일을

  찾아보는것도 쉽지가 않거든. 가령 차라리 뭐 예,체능쪽으로 재능이나 관심이

  있다면 그런쪽으로 나갈수도 있는 것이겠지만, 혹 가령 의사나 법조인 같은 전

  문직쪽으로 나간다해도 아주 아버지 기업과 연관을 안 짓고 살수는 없는 문제

  거든. 그리고 무엇보다...아버지 회사가 멀쩡히 있는데 다른 회사에 취직하는것

  도 쉽지는 않은일이고...무엇보다 그런 행위 자체를 아마 우리사회 통념상 쉬이

  납득을 해주기 어려울게야... ”

 “ ...... ”

 “ 허허허 그렇다고 내가 지금 무슨 족벌세습 같은것을 옹호하려든가 그러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재벌가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그런 고충도 어느정도 있다는 현

  실을 일러주는것이고... ”

 지민은 말없이 테이블의 음료수를 들고있는 가운데 기선의 말은 계속되고 있었다.

 “ 다만 나 같은 경우엔...가급적 유능한 전문 경영인이 있다면 공정한 경쟁이나 경

  합같은 대결을 시켜서 후계자를 양성하고 싶다는 생각을 꽤 오래전부터 해왔어.

  허허허...근데 뭐 그런 생각을 하나마나 애초부터 내 하나밖에 없는 아들놈이 저

  렇게 정신이 성치 못해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한 녀석이었는데다가...그런

  아들X마저 저렇게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았으니...뭐 내가 오래전부

  터 전문경영인과 내 자식을 공정한 경쟁을 시켜서 후계자를 양성하고 싶다는 생

  각을 해온것은...이제 다 무의미한 일이 되어버렸지만 말이야. ”

 “ ...... ”

 “ 다만 내게 아쉬운것이 있다면 내가 경원그룹을 세우고 이끌어오면서 가져왔던

  기업경영정신과 철학...그 정신을 온전히 이어받을수 있는 그런 후계자였으면 했

  는데 말이야... ”

 새로 황기선의 뒤를 이어 경원그룹 회장자리에 앉은 노영민이란 사람이 기선의 생각엔 자신의 그와같은 기업정신 (예를들자면 ‘애국적 기업’, ‘국가와 백성을 부강하게 만드는데 이바지하는 기업’등) 을 이어받기엔 부적합한 인물이라도 된다는 뜻일까. 기선은 평소에 지민과 더불어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긴 했지만, 지민의 한계탓일까. 기선의 그 깊은 속내를 제대로 다 헤아리지는 못하는것 같았다. 다만 웬지 황기선 회장이 안쓰러워져 조금은 애틋한 눈빛이 되어 그를 바라보고 있다.

 “ 어쨌거나...뭐 이제 기업은 그렇게 물려준 이상...이젠 마음을 비워야지 어쩌겠나.

  다만... ”

 “ 다만...뭐요 ? ”

 무슨 또다른 할 이야기가 남아있는 것인지. 지민이 다시금 호기심어린 눈빛을 보이는 가운데 기선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 병일이 말이다. 우리 3대독자 병일이. ”

 병일이를 어찌하겠다는 것인지. 어쨌거나 대(大) 경원그룹 명예회장 황기선의 3대독자이기도 한 여섯 살난 손자 병일이. 하지만 불의의 사고로 그러잖아도 정신이 성치않은 - 병일이가 자기 아버지가 정신이 성치 못한 사람이었는지까지 인식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 아버지를 잃은 신세가 된 어찌보면 딱하고 불쌍한 아이. 가령 그 아이를 경원그룹의 새로운 후계자로 키우기라도 하겠다는것인지. 헌데 기선은 그 부분에 대해선 고개를 살짝 좌우로 흔든다.

 “ 그런것은 아니야. 어쨌거나 나 역시 기업의 족벌세습을 그다지 안 좋게 보는 편

  이었고, 또 그런 문제와 현실사이의 딜레마를 많이 고민한 사람인데...이제와서 무

  작정 병일이를 - 그것도 아직 어린아이를 - 후계자로 무작정 민대서야 말이 되

  나. 다만... ”

 “ 다만...뭘 어쩌시겠다는 건데요 ? ”

 “ 내가 저 아이를 통해 이루고싶은 새로운 꿈이 있어. 그 꿈을...허허허... ”

 그러면서 기선은 말없이 지민의 손을 꼭 잡아본다.

 “ 물론 그건 그 아이의 선택에 달린 문제지 내가 강요할 문제는 아니야. 평양감사

  도 저 싫다면 그만이라는데...아들이건 손자건 그걸 부모나 할애비가 강요할 문제

  는 아니지. 다만... ”

 “ ...... ”

 “ 지민이는 그런 내 뜻을 알고 헤아리는 사람으로써...특별히 좀 그 부분을 신경써

  서 병일이를 맡아달라는 말일세. ”



 잠시 몸을 기대어 쉬다가 깜빡 잠이 들어 그 사이 꿈이라도 꾼듯, 지민은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환청처럼 들려왔던 기선의 말소리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지민은 그제서야 자신이 병일의 방 한쪽 벽에 기대어 쉬다가 잠이 들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기선이 생전에 지민에게 그와같은 말을 분명히 했던것은 사실이다. 꼭 병일이를 경원그룹의 새로운 후계자로까지 키우지는 않더라도, 자신의 생전 못다이룬 꿈 하나를 손자이자 3대독자인 병일이를 통해 이루고 싶은것이 있다고. 하지만 그것을 굳이 강요하지는 않겠다고. 그런말을 기선이 생전 몇 번 입에 담은것이 잠깐 잠든 사이에 꿈으로 다시금 형상화되어 나타난것이다.

 지민은 옷매무새를 어루만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는 다시 병일이 잠들어있는 어두운 방안. 한숨을 한번 다시 내쉬어보고는 밖으로 나왔다. 1층으로 내려와보았다. 이제는 더 이상 기선이 있지않은 침실이며 서재. 침실은 지민이 장례를 치른뒤 깨끗이 정돈을 해놓아 말끔히 정리가 되어있고, 서재에는 기선이 생전에 보던 책이며 회사경영에 필요했던 각종 서류 따위가 아직 처분을 하지 않은 상태라 서재 여기저기에 빼곡이 정리가 되어있다. 다른방문이며 화장실도 괜시리 한두번씩 열어보고 기선이 이 집에 더 이상 살지 않는다는것을 다시금 확인하고는 그의 죽음을 새삼 다시 실감하게 된다. 무표정한 얼굴로 지민은 3층 병일의 방으로 다시 올라가보았다.

 병일의 3층방은 그가 아버지를 잃고 할아버지 기선의 집에서 살게 되면서 아이가 쓰도록 배려해준 방이다. 하지만 아이 혼자 무서울수가 있으니 기선의 부탁도 있고해서 보통 아이의 잠자리는 지민이 보살펴주곤 했다. 그때 잠시 아이와 나누었던 대화도 지민은 기억에 떠올려진다.

 “ 안녕... ”

 지민은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밝게 미소지어보이며 인사를 건넸고, 하지만 아이는 할아버지 집에 같이 사는 키 큰 젊은 여자가 낯설고 어색하기만 한지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지민은 그런 아이에게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 이제부턴 병일이는 여기서 할아버지랑 나랑 같이 살아야 하는거야. 무슨말인지

  알겠니 ? 그리고 나 누군지 알겠어 ? ”

 아이가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지도 궁금했고, 또 피차 호칭을 어떻게 불러야하는지도 난감한 일이었다. 어쨌거나 지민의 현재 신분은 황기선 회장의 세 번째 부인. 그렇다면 대체 기선의 손자인 병일과의 관계는 어찌되는 것인가.

 “ 하... ”

 “ 뭐 ??? ”

 아이가 뭐라고 입에서 웅얼거리자 지민이 약간의 당혹스러움과 어리둥절함을 섞어 한마디 내뱉었다. 아이의 말이 이어졌다.

 “ 할...머니... ??? ”

 ‘할머니 ???’. 하지만 이 다섯 살(1년전) 어린아이에게도 한참 젊어보이는 이 키 큰 여성을 ‘할머니’라 부르는게 적절한것인지는 많이 혼동이 되는지 말꼬리를 다소 높이며 의문을 표시했다. 어쨌거나 그런 단어를 입에 담은것을 보면 지민의 정체(!)를 전혀 모르는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하지만 지민이 되려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이며 병일에게 보채듯이 말했다.

 “ 야아... ”

 아이는 여전히 멀뚱멀뚱 지민을 바라보기만 했고, 지민이 그런 병일에게 말을 건넸다.

 “ 이 나이에 할머니 소리는 좀 그렇다... ”

 아무리 그래도 이제 겨우 스물한살밖에 되지 않은 여자가 어린아이한테 ‘할머니’ 소리를 듣는것은 좀 아니지 않는가. - 조선시대 같았으면 이런 애매한 가족관계일때 어찌 호칭을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 그래서 지민은 어린아이에게 제법 보채거나 조르기라도 하는듯한 말투로 이와같이 말했다.

 “ 그냥...‘누나’라고 부르는것 어떨까 ? 그래...누나. 그게 좋겠다. 우린 그냥 이 집

  에서 누나동생하며...그런 친한 사이로 지내는거야. 어때, 병일아 ? 누나...어때 ?

 ”

 “ 누우...나아... ? ”

 병일은 어색해하는 말투로 그래도 천천히 그 단어를 입에 담았고 지민이 그런 병일을 기특하다는듯 쓰다듬었다. 아이에게 누나 소리를 듣는데 괜시리 감격이 다 될 지경이었다. 난데없이 공짜로 어린 동생이라도 생긴듯한 그런 기분이라고나 할까. ‘누나’. 지민도 제법 마음에 드는지 함박웃음을 지어보이며 아이를 품에 안았다.

 “ 그래...누나...너무 좋다. 누나...그래 이제...누나랑 병일이는 이 집에서...누나,동생

  하며 그런 사이로 지내는거야. 무슨말인지 알겠지 ? ”

 그것도 벌써 1년전의 일이다. 어쨌거나 할아버지와 한 집에 사는 여자를 ‘누나’라고 부르게 된 다섯 살난 어린 병일이. 그 사이 한 살을 더 먹어 여섯 살이 되긴 했지만 이 기묘한 가족관계를 어찌 받아들이고 있을지는 모를일이다. 무엇보다 지민은 이제 기선까지 세상을 떠난 마당에 이 아이를 자신이 어찌 책임져야 하는지 여전히 그 문제로 고민중이었다.

 세상모르고 새근새근 잠이들어있는 아이의 모습을 잠시 살펴보았다. 어두운 방이니만큼 작은 갓전등불까지 켜고. 그 불빛에 아이가 깨지나 않을까 조심스럽긴 했지만, 아이는 여전히 쿨쿨 잠이 든 상태다. 여섯 살짜리 아이의 작은 목과 팔뚝은 지민의 가녀리고 긴 손가락 두어개로도 한번에 잡힐정도였다. 아이의 목과 팔을 그렇게 잡아보니 진짜 어린아이라는것이 새삼 실감이 날 지경이었다.

 지민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어보았다. 그리고 계속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과연 이 상태에서 난 이 아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그 생각이 아직까지도 복잡하게 머릿속을 감돌고 있었다. 만약 지민이 나쁜마음을 먹는다면, 아이의 목을 조르든 팔이라도 비틀든 한번에 보낼수도 있는 그만큼 작은 어린아이다. 하지만 지민이 만약 정말 작정이라도 하고 이 아이에게 헌신하기로 마음이라도 먹는다면 확실하게 자기 아이로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는 그런 어린아이다.

 지민은 연신 아이의 팔이며 목 그리고 다리등을 계속 자신의 손가락으로 어루만져보았다. 지금 자신이 머릿속으로 얼마나 많은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채 천연덕스럽게 잠들어있는 아이. 그 생각을 하니 공연히 안쓰러운 느낌마저 순간 들었다. 아이의 심장에 살짝 손을 가져가보았다.

 ‘ 헉~! ’

 두근두근. 아이의 심장소리가 느껴졌다. 그러자 순간 당황이라도 했음인지 지민이 한두발자욱 뒤로 주춤하며 그 바람에 하마터면 나동그라질뻔 했다. 아이의 심장소리. 물론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심장이 뛸 것이야 상식적인 일임에도, 그제서야 지민에겐 이 아이가 살아있는 생명이란걸 실감이라도 하게 되는것일까. 공연히 식은땀이 나서 손으로 머리며 얼굴을 닦아보았다.

 “ 내 은혜에 보답할 마음이 있다면...그 아이를 잘 좀 보살펴주게나. 저 아이를 자

  네에게 부탁함세. ”

 순간 다시 기선의 말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느낌을 받았다. 칠순노인의 목소리라서인지 대체로 허스키한 편이기도 했지만, 그 환청을 느끼다보니 정말 어디 하늘에서라도 들려오는 그런 소리같았다. 지민은 말없이 물끄러미 다시 또 한참동안 잠든 아이를 바라보았다.

 다음날. 오후 늦은 시간쯤 잠시 외출을 한 지민이 뭔가를 사갖고 들어왔다. 병일은 1층 거실에 내려와 놀고 있었고, 지민이 그런 병일이게 자신이 사갖고 온 것을 보여준다.

 “ 병일아...이거볼래 ? 그리고 이리와 앉아봐. ”

 지민이 사갖고 온것은 아이와 단둘이 먹을수 있는 정도의 크기인 작은 케익과 쥬스병이었다. 지민은 우선 병일을 거실 소파에 정중한 자세로 앉혀놓는다. 그리고 케익 상자를 열어보인다. 먹음직스러운 케익이 지금 당장이라도 먹고 싶은지 달려드는 아이를 잠깐 만류하고는 케익에 초를 꽂는다. 하나는 작은것이고 하나는 큰 것이다.

 “ 우리...언약식하자. ”

 “ 언약...식 ??? ”

 “ 그래...언약식...병일이는 언약식이 무슨말인지 알아 ? ”

 아직 어린 아이가 언약식이란 말뜻을 모를수도 있기에 그와같이 물은것인데 순간 아이에게선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 그럼...누나랑 내가 결혼하는거야 ? ”

 ‘ 푸욱~! ’

 마침 쥬스를 따르던중이던 지민은 사뭇 걱정스러운 말투로 그와같이 말하는 병일로 인해 하마터면 쥬스를 엎지를뻔 하기까지 했다. 이게 대체 무슨 말 ? 난데없이 웬 결혼 ? 그런 의도(!)가 분명히 아닌데. 순간 너무나 황당하고 기가막힌 생각이 들어 지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부채질까지 하며 어이없어한다. 철없는 어린아이가 생각없이 한 말로 받아들이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린뒤 다시 자리에 앉아서는 침착한 표정으로 아이에게 말을 건넨다.

 “ 얘는 무슨...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어린애가 무슨 결혼이니

  ? 그리고 누나랑 니가 도대체 몇 살차인데 ? 그런 의미의 언약식이 아니라... ”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지민이 병일의 할아버지 기선과 어떤 사이였는지를 감안한다면 그건 더더욱 말이 안 되는 소리고. 다만 그런말을 내뱉은것을 보면 병일이가 ‘언약식’이란 말의 의미를 아주 모르는것 같지는 않다. 만약 병일이가 제 할아버지를 닮은면이 있다면 분명 똑똑한 구석도 있을터인데. 그런 맥락에서 이해를 하기로 하고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여준다.

 “ 그런 언약식이 아니라...누나가 우리 병일이랑 의남매를 맺으려고 하는거야. 그

  럴때도 ‘언약식’이라 하는거야. ”

 “ 의남매가 뭐야 ? ”

 언약식이란 말은 그래도 어디서 대충 들어 알고는 있는듯한데 ‘의남매’라는 말은 또 모르는듯 했다. 그러고보면 역시 어린아이는 어린아이인것인지. 지민이 그 부분에 대한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 음...그러니까 의남매가 뭐냐면...간단하게 이야기해서...병일이랑 누나가 진짜 누

  나,동생 사이는 아니잖아. 하지만 비록 진짜 남매는 아니지만 앞으로 진짜 친 누

  나,동생처럼 친형제처럼...한 식구처럼 살기로 약속하는거. 진짜 남매는 아니지만

  진짜 누나,동생처럼 살기로 하는 약속...그런걸 ‘의남매’라고 하는거야. 그리고 누

  나가 오늘 그런 언약식을 병일이랑 맺고 싶어서 이런 자리를 마련한거야. ”

 “ 아아...그렇구나. ”

 그제서야 말뜻을 제대로 이해한듯 고개를 끄덕이는 병일. 그러고보면 여섯 살난 병일에겐 확실히 똑똑한 구석이 있는듯 했다. 일단 케익에 촛불을 켜고, 지민이 요즘(90년대 중반) 유행하는 노래중 분위기에 어울릴만한 노래(생일축하 파티는 아니니까)로 대충 선곡해서 한곡 부른후. 그 뒤에 병일과 함께 초를 끄고 케익도 잘랐다. 그리고 쥬스로 러브샷까지 하고, 그리고는 지민이 ‘의남매’의 정표삼아 마련한 작은 선물까지 병일에게 건네주면서. 그렇게 간단히 지민과 병일의 ‘의남매’ 언약식이 마무리 되었다.



- 4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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