훼드라의 세상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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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왕따 체험담 그리고... 잡담, 고민나눔




 요즘 신문이나 TV 뉴스를 보거나 또는 인터넷에 접속하는 필자의 심정이 매우 착잡하기 그지없다. 왕따니 학원폭력이니 하는 문제가 연일 TV 뉴스며 신문 심지어 인터넷 포털기사까지 뒤덮고 있는데, 솔직히 어떨땐 외면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든다. 사실 필자도 학창시절 그와같은 왕따의 피해자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와서 새삼 기억조차도 하고 싶지 않은 그 시절의 일들을 일일이 떠올리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일전에 출간한 필자의 한 졸저(拙著) 서문에 내가 학창시절 당한 왕따를 ‘요즘 TV나 신문에 오르내리는 사건 그 이상’이었다는 표현을 했었는데, 아무래도 그 부분에 대해선 공개적으로 수정을 해야할것 같다. - 그렇다고 이제와서 내 책 받아본 사람들한테 일일이 연락 수정해달라고 할 순 없는일이고 -.- - 요즘 TV나 신문기사 또는 인터넷을 통해 접할수 있는 실제 왕따나 집단폭력 피해사례들을 보니, 차라리 필자가 학창시절 당한일은 그야말로 ‘애교수준(!)’이거나 장난이었다고 해야할것 같다. 그래도 20여년전의 청소년들이 요즘 아이들보다는 순진했다고 봐야하는걸까.


 2000년대 중반경 조선닷컴 블로그에 개설한 소설극장 카페(http://cafe.chosun.com/whaedra)에 200회 정도 분량의 장편소설을 연재한바 있는데, 여기에 필자가 학창시절 당했던 왕따사건을 배경으로한 내용들을 좀 묘사한일이 있다. 하지만 소설은 막상 집필을 하다보니, 개인감정에 지나치게 치우쳐 과장을 한 측면이 있다. 따라서 소설속에 묘사한 사건은 실화 45% : 가공(또는 과장) 55% 정도로 보면 된다. 다시말해 소설속 등장인물이 당하는 집단폭력 에피소드들은 실제 필자가 겪었던 일들을 바탕으로 해서 쓴 것이지만, 사건과 상황묘사에선 과장이 상당히 들어가있다.


 실제 필자는 소설속에 묘사한것처럼 ‘성기절단 협박’ 사건을 겪은일이 있다. 한 6,7명정도 되는 아이들이 하루는 방과후 필자를 학교 밖 한 공터로 불러내서는 다짜고짜 하의를 벗겨내리고 필자의 성기를 자르겠다 어쩌겠다 협박하며 놀린일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 칼을 들이대며 자르는 시늉을 했다던가 그런일은 없었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설속 창작이다. 실제로는 정말 그렇게 할것같은 위협정도만 주는 분위기였다.


 그런 경험을 한 일이 있는 필자조차도 요즘 TV나 신문,인터넷 기사를 통해 접하는 왕따 피해사례를 보면 차라리 그 시절 내가 당한일은 ‘애교수준’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할 정도니, 요즘 학교현장에서 그런일을 겪고있거나 또는 격었던 당사자들의 육체적,정신적 고통은 과연 어느정도이겠는가. 일단 피해학생과 그 가족들에게 깊은 위로의 말을 전하고, 무엇보다 고통을 견디지못해 자살로 생을 마감한 학생들 영전에 고개숙여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 시점에서 아무래도 필자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해야겠는데, 진실로 유감스럽게 생각하는것이 왜 학교 현장에서 선생님들의 학생들에 대한 체벌권을 거두어갔는가 하는점이다. 생각해보라 ! 엄연히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한테 몽둥이를 들수있는 권한이 존재했던 시절에도 왕따는 있었다. 하물며 학생들한테서 체벌권을 거두어가고, 심지어 교실에서 학생들이 선생님의 사소한 일거수 일투족까지 트집잡아 동영상으로 찍어 인터넷에 올릴수 있을정도로 교권이 땅에 떨어진 지금 대체 무슨수로 학교 현장에서 왕따나 집단폭력을 제지시킬수 있겠는가. 더욱이 요즘은 한자녀낳기 시대가 되어 모두 집안에서 자기 자녀만은 금이야 옥이야 왕자님,공주님으로 키우는 세상이다. 선생님이 학교에서 내 아이한테 조금 아쉬운 소리 좀 했다고 바로 학부모가 학교로 달려와 항의를 할 정도가 된 세상에서 대체 무슨방법으로 그것도 왕따 가해자 학생들을 제지하고 처벌할수 있겠는가. 


 다른 문제라면 몰라도 이 사안만큼은 필자또한 한때 피해 당사자였던것 만큼 좀 더 솔직하게 현실을 이야기할수 있을거라고 본다. 사실 왕따문제는 아무리 그래도 가급적 학교 공동체내에서 문제해결을 하는게 최선의 방법이라고 본다. 헌데 학교내에서 도저히 그와같은 해법을 찾을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놓고 대체 이제와서 뭘 어쩌자는것인가 ? 학교내에서 해결못하는 일을 사회라고 해결할수 있을것인가 ? 워낙 왕따문제가 지속적으로 사회이슈가 되다보니 경찰과 검찰도 가해학생들에 대한 엄중처벌을 하는쪽으로 지침을 정한 모양인데, 솔직히 그다지 바람직한 해법은 아니다.


 다른것은 몰라도 이 부분만큼은 조선일보 박은주 엔터테인먼트 부장의 견해에 동의한다. 어찌되었거나 결과적으로 앞날이 창창한 중고생들 심지어 초등학생들까지 줄줄이 전과자로 만들 수 있는일이다. 그로인해 생길 훗날의 부작용은 또 누가 어떻게 책임지는가 ? 이러느니 차라리 학교 일선 현장에서 빼앗아간 선생님들의 학생들에 대한 체벌권을 돌려주라. 그게 그래도 가장 바람직한 해법이다. 도대체가 학교에서 선생들이 학부모의 항의가 두려워, 교육청의 징계가 두려워, 또는 인터넷에 자신의 시시콜콜한 문제가 올라가는게 두려워 학생들 눈치만 보고 심지어 왕따나 집단폭력같은 심각한 사태조차도 수수방관하는 상황까지 되어서 대체 뭘 어쩌자는것인가.


 어찌되었거나 학교라는 공동체 내에서 학생들간에 벌어지는 일은 학교 내부문제다. 가급적 학생들 스스로 해결하게 하고, 학생들 사이에선 해결이 안 되는 부당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거든 그때 선생님이 나서서 잘못한 학생들에게 처벌을 가하고, 그래도 안될때 사회가 나서는것이 가장 합리적인 해결방안이다. 


 아울러 왕따의 피해 학생들에겐 한때 그런일을 당한적이 있던 당사자이자 인생선배의 입장에서 충고하고 싶은것은 중요한것은 자신의 재활(再活)의지다. 지금 현재 당사자들이 겪고있는 심적,정신적 고통이 어느정도일지 충분히 이해하고 남음이 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문제는 지금부터의 일이다. 당한일은 당한일이고 이제부터 자신이 어찌 살아야할지는 어차피 자신이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아무리 훌륭한 청소년 상담사나 치료상담사가 와서 돌봐주고 치유를 해준다 하더라도 당사자가 의지가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흔히 하는말로 자신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이야기다. 끔찍한일. 두 번다시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일들. 떨쳐내기 힘들더라도 일어나야 한다. 자신이 재활의지가 없다면 사회가 아무리 부축해주려 해도 소용이 없다는 이야기다.


 얼마전 SBS에서 ‘샐러리맨 초한지’라는 중국 고전 ‘초한지’를 패러디한 새 드라마가 시작되었는데, 요즘 청소년들이 초한지를 읽어보았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초한지에 나오는 ‘한신’이란 인물의 고사는 아마 얼핏 귀동냥으로라도 들어본 기억이 있을것이다. 한신은 한나라를 세운 유방을 도와 그가 천하를 얻게 하는데 큰 공을 세운 명장이다. 하지만 그런 한신에게도 한때 이런일이 있었다.


 한신이 고향 회음에서 한낱 무명의 찌질이로 있던 어느시절 하루는 한 불량배가 그에게 시비를 걸어왔다. 그리고 하는말이 ‘만약 죽고 싶거든 나를 칼로 찌르고, 죽기 싫으면 내 가랑이 밑으로 지나가라’는 것이었다. 이때 한신이 그 불량배의 조롱을 못 견디고 무작정 그에게 덤벼들었다면 어찌되었을까 ? 시쳇말로 사람 하나 칼로 찔러 죽이는게 그렇게 어려운일도 아니고, 하지만 만약 그랬다간 한신은 그저그런 살인자중 하나로 인생을 마감하고 말았을것이다. 하지만 한신은 그 불량배의 바지 가랑이 사이를 기어가는 굴욕을 견뎌내었다. 그리고 훗날 세월이 지나 유방을 도와 큰 공을 세우고 회음후에 봉해져 금의환향하였다.


 즉, 다시말해서 큰 뜻을 품은 사람은 그까짓 작은 굴욕따위에 크게 연연하지도 마음쓰지도 않는다는것이다. 이 세상 모든 왕따 피해자들이 훗날 한신처럼 될수야 없겠지만, 정 오늘의 굴욕과 치욕을 이기고 싶거든 가장 좋은 방법은 훗날 오늘 자신을 괴롭혔던 학교 불량배들이 훗날 그때 자신들이 괴롭힌 아무개 이름만 들어도 벌벌떨수 있게 되도록 크게 출세하는게 가장 좋은 방법이란 소리다.


 ‘용서하되 있지 않겠다’는 말을 흔히 한다. 하지만 왕따 피해자들에겐 이 정 반대의 해법을 제시해야할것 같다. 끔찍한 기억, 두 번다시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악몽들 쉽게 떨쳐내기 힘들다는것 누구보다 잘 안다. 하지만 잊어야한다. 잊고 훌훌털고 딛고 일어서야 한다. 자신을 괴롭혔던 이들, 모욕을 주고 조롱했던 이들 아마 쉽게 용서하겠다는 생각이 들진 않을것이다. 하지만 용서는 못할지라도 잊어버리긴 해야한다. 그게 자신을 위해 좋은 일이다. 아무리 좋은 치유 상담사가 와서 위로해주고 상담해주더라도 궁극에가서 자신의 인생몫을 대신 살아주지는 못한다. 따라서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자신이 얼마만큼 지금의 이 악몽같은 시간을 견뎌내고 딛고 일어설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용서하기 싫으면 용서하지 마라 ! 하지만 잊어버리긴 해야한다. 그대들, 아니 우리들에게 필요한건 ‘용서하되 잊지 않겠다’가 아니다. 용서는 못할지라도 잊어버리긴 해야한다. 끔찍한 기억을 하루속히 떨쳐내는것만이 진정 그들을 이길수 있는 길이 되는 것이니까...






  





덧글

  • 지나가던과객 2012/01/07 12:14 # 삭제 답글

    한신이 출세한 후 이야기도 있는데, 자신을 모욕한 깡패를 불러다가 관직을 줬다는군요.
  • 지나가다 2012/01/07 13:32 # 삭제 답글

    왜 현장에서 체벌권을 거둬갔는가 하면 학생-학생 간 폭력과 마찬가지로 학생-선생 간 폭력도 문제가 되기 때문이지요. 나쁜 학생이 있으면 나쁜 선생도 있고, 어디든지 미친놈은 많지요. 그렇기에 자의적인 폭력을 법적이나 제도적으로 인정을 해버리면 참으로 막장이 됩니다.

    그리고 학생간에 이루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교사가 모두 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체벌권 있던 시절에도 학교 폭력은 있었고, 아예 제도화되어 정기적으로 뜯어가는 금품갈취 같은 것도 있었지요. 기본적으로 있을건 다 있었습니다. 걸리면 무자비하게 패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걸 두려워할 놈들도 아니었고, 정작 범죄로서 처벌이 되어야 할 순간에는 학생이니까...란 이유로 그냥 몇대 쳐 맞고 훈방처리로 끝나곤 했습니다. 그래서는 안되었는데 말입니다.

    다만 그때는 핸드폰이나 스마트폰도 없었고, 캐릭터를 강제로 키우게 할 온라인 게임도 없었지요(...). 무엇보다 다들 전체적으로 가난해서 아주 많이 털 수가 없었습니다(그래도 악착같이 털어가긴 했지만). 그냥 그정도의 차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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